제한된 시간과 공간, 6미리 디지털 카메라, 스타부재의 시스템, 이
모든 것들은 저예산 독립영화의 필요조건을 만족시켜 주고 있다. 저예
산으로 영화를 찍기 위해선 공간의 제한이 필수적이다. 더구나 TV로
생중계 되는 축구 경기의 시작과 끝은, 동시에 영화의 시작과 끝도 장
식한다. 전후반 경기와 하프타임의 쉬는 시간까지 포함해서 축구 경기
100분 동안과 일치하고 있는 이 영화의 완결구조는 일종의 닫힌 구조
로서 영화의 외형적 틀에 안정감을 부여한다.
그러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나 [영원한 제국]의 박종원 감독
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파라다이스 빌라]는 당혹스럽다. 왜 우
리들의 영웅이 이렇게까지 일그러지게 되었을까? [파라다이스 빌라]는
주류 상업적 질서에서 밀려난 한 능력 있는 중견 감독이 선택할 수 있
는 비극적 선택을 보여준다. 이것은 자해행위이다.
외형적으로는 3층으로 되어 있지만 지하층에서 옥탑 방까지 택시기
사, 정수기 세일즈 우먼, 나이트 클럽 여가수, 펀드 매니저, 피아노 강
사, 원조교제 소녀 등 각각의 방에 각각 판이한 성격과 배경을 가진
인물들이 거주하고 있다. 영화가 끝날 때쯤 그들 중에서 모두 7명이
시체로 변한다. 폐쇄공간에서 일어나는 연쇄 살인사건은 동기도 모호
하고 긴장감도 약하다. 컴퓨터 게임에 중독된 대입 삼수생은, 온 라인
과 오프 라인의 경계를 지우고 사이버 스페이스의 컴퓨터 게임을 현실
공간으로 연장시킨다.
그렇다면 [파라다이스 빌라]는 장자의 [호접몽] 고사처럼 우리들 삶
의 영역을 혁명적으로 변혁시키고 있는 가상공간에 대한 화두를 제시
하고 있는 영화인가? 그렇지 않다. 그것은 단지 살인사건을 제공하는
소재적 차원에 그친다. 거기에 대한 어떤 진실된 고뇌도 우리는 찾아
볼 수 없다. 사춘기 청소년들의 성적 유희와 탐닉, 물물교환 되는 육체
적 거래 등 타락한 사회의 타락한 모습들이 비쳐지고 있지만, 그것들
이 삶을 성찰하는 단계까지 이르지는 못하고 있다.
혹시 박종원 감독은 새로움에 대한 콤플렉스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아닐까? 지나치게 트렌드의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것 같은 그의
[파라다이스 빌라]는, 아직도 본인의 감각이 상업적으로 시장에 먹힐
수 있다는 강변의 표현으로 보인다.
[파라다이스 빌라]는 디지털 카메라의 특성을 충분히 살리기 위해,
역동적으로 꿈틀거리며 제한된 공간을 살아 움직이고 있지만, 그러나 주제의
심도 깊은 표현과 맞물리지 못하고 있다. 촛점을 잃고 산만하게만 보이는
그것은 단지 장식적 차원에 그친다. 개봉 시기를 놓친 것도 중요한 패인의
하나가 될 것이다. 한여름의 끈끈한 더위와 팽배한 욕망, 동기가 불확실한
살인의 충동 등은 하나의 묶음으로 연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