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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의 배경-에세이문학 2018년 여름호
方 旻
수필에서 배경 문제를 다루고자 할 때 개념을 명확하게 구별해야 한다. 모든 문학에서 배경은 거의 필수 요소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공간과 배경 둘 다 유사한 개념인데, 공간은 문학에서보다 일반 분야에서 광범위 하게 쓰인다면, 배경은 문학의 특정 영역에서 주로 사용하는 개념이다. 이와 유사한 용어로 환경이란 용어도 있다. 환경은 일상에서 주로 쓰이지만, 공간은 환경과 배경과 개념을 공유하는 부분이 있지만 보다 확대한 개념이다. 공간은 시간과 함께 어울려서 환경의 중요한 부분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용어상의 포함과 상관성이 자연과학 물질계의 용어와 견줄 때 차등이 난다. 얘기를 풀어가기 전에 용어 개념을 한정하는 것은 오해를 줄여 이해의 폭을 넓히려는 생각에서다.
이 글의 본 개념어인 수필 배경은 수필 서사가 일어나는 여러 필수 인자 중에서 자연 지리 개념인 지역 혹은 구역의 한정된 공간 범위를 뜻한다. 예컨대 서사 화자가 주택 주방에서 일어난 사건을 작품화 할 때, 배경은 주택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주방이 그 글의 공간 배경이 된다. 이 배경과 관련하여 구분하자면 공간 배경과 시간 배경으로 나눌 수 있다. 이와 같은 시공간 배경은 서사 작품에서 필수적 요소다. 그러나 여기서는 시간 배경은 논외로 하고 공간 배경에 초점을 맞추려고 한다. 시간은 중요 요소로 이미 앞서 다룬 바 있고, 공간과 함께 다루면 공간 배경 특징을 온전하게 드러낼 수 없어 나누어 다룬다. 배경은 서사와 관련하여 매우 밀접한 역할을 맡는데 사건이 일어난 장소를 가리키는 것이 일차 기능이다. 또한 이 공간 배경은 작품 주제와 의미를 제시하는 데 매우 결정 역할을 맡기도 한다. 수필에서 주택 주방을 배경으로 선택한 경우는, 즉 그런 사건은 주방이 아닌 유사한 공간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 하면 배경으로서 역할은 축소된다. 이와 달리 그곳이 아니면 또는 그곳의 장소적 특징과 그 사연이 필수 관계일 경우에 진정한 작품 배경으로서 역할을 다한다. 우리는 이러한 서사와 필연 관계를 가진 배경에 문학 의미가 있다는 그 점을 살피고자 한다.
배경을 달리 구분할 수 있다면 필연 배경은 문학 의미가 크고, 우연 배경은 그냥 일상에서 사용하는 것처럼 문학성이 부족한 것이라 보겠다. 만약 배경을 변경해도 전반 서사에 큰 영향이 없다면 문학 의미가 부족한 경우이고, 배경이 바뀌면 스토리 자체가 성립할 수 없거나 또는 서사가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경우는 문학 의미가 큰 배경, 서사의 핵심 요소로 작용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시간과 공간 배경이 필수 요소라는 것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작품 생산에 나서야 수필의 문학성이 높아진다. 이 수필에서 보통 만나는 체험 서사는 그 선후 관계나 핵심 순위가 다르지만 시간과 공간 배경에서 일어난다. 대체로 둘은 동반하나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때문에 시간과 공간 배경을 따로 살펴본다.
염희순 <세월의 흔적>은 호주의 바다가 공간 배경이다. 그녀는 “지금 호주에서 살고 있다.” 어느 날 남편 따라 바다에 가서 상황이 벌어진다. 만일 그녀가 바다에 가지 않았다면 이 글은 쓰이지 않았을 것이다. 즉 ‘호주 바다’라는 공간이 작품의 창작 동기 겸 터전이다. 이 작가가 바닷가 바위로부터 본 것은 “시간은 이렇게 물속에서도 흔적을 남긴다.”는 새로운 발견이다. 이 발견이 연상 작용하여 허리의 엑스레이사진에서도 서글픈 세월 흔적을 찾아낸다. 넓혀진 연상은 호주에서 작가의 고단한 삶의 실상을 소개하는 데로 나아간다. 그것은 “시간으로 결제하는 삶”으로 해석한다. 이것만으로 글이 끝난다면 조금 특이한 장소에서 서술자 삶을 회상한 것 정도로 그치는 생활문 수준의 평이한 작품에 지나지 않는다. “살기 위해 허겁지겁 사는 인생은 허망하기 짝이 없다.”고 인생을 다소 상투적으로 판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호주 바다 노을이 사고 전환을 이끈다. 그가 기억하는 한국 노을은 “처절한 핏빛의 유화”라면 호주 노을은 “해말간 홍시 빛의 수채화”이다. 한국에서 그녀 삶은 아마도 피와 땀내 진한 고달픈 삶이었을 것이다. 이에 견주어 호주에서 삶은 시간에 쫒기는 삶일지라도 말랑말랑 젤리처럼 유연하고 심정은 여유로운 것으로 인식한다는 점이다. 글에 나타난 속사정으로 보아선 호주 생활도 운치를 즐기는 만만한 삶은 아니다. 시간이 바로 돈으로 환산되는 역시 빡빡한 고투의 삶은 다르지 않다. 그렇지만 유사한 인생살이를 바라보는 그녀의 심적 인식은 퍽 상이하다. 이것이 바로 호주 바다 노을에서 그녀가 찾아낸 전환적 성찰의 결과다. 이걸 가능케 한 것이 공간 배경, 바로 호주 바다다. 호주 바다라는 장소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필연이다. 이 관계의 맥락이 곧 배경이 작용하는 문학 의미다. 자연과학 관점에서 본다면 한국 바다 노을과 달리 호주 노을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불가하다. 기본 자연 조건이 같으면 발현 현상은 같아야 한다. 그러나 작가 내면에서 이처럼 다르게 보게 하는 인식 전환은 문학에서만 가능하다. 결국 작가는 몸에 새겨진 ‘세월의 흔적’인 노화가 그렇게 슬프지 않고, 노을처럼 아름다운 의미가 있다는 것을 찾아낸다. 수필에서 배경이 빛나는 자리가 바로 여기다.
윤기정 <사릉에서 길을 잃다> 역시 한 지역이 글의 공간 배경이자 서사의 필연 매개요 중심 지점이다. 윤 작가가 ‘사릉’에서 길을 잃고 또 “백수(白手)의 길”을 찾게 된 길을 따라가 보자. 그는 퇴직하여 연금으로 살아간다. 퇴직 한 지 3년이 지나면서 퇴직한 편안함이 사라지고 꿈꾸던 삶에서 빗나간 공허함에 시달리고 있다. 우연한 기회에 그는 경춘선 열차를 타고 ‘사릉’으로 급히 목적지를 정했다. 그에게 ‘사릉’은 그곳이 고향인 중학 동창과 지난 추억이 생생하다. 사릉은 고교시절까지 섣부른 어른 흉내로 술과 담배, 트위스트를 추어대며 함께 보낸 곳이다. 청소년기 한 시절 삶을 대표하는 추억 공간이자 화려했던 인생인 셈, 즉 지금 다소 무료해진 퇴직자 삶과 대척 지점인 곳, 생동과 창창한 미래가 동숙하던 곳, 지나간 인생에서 절정 지점이었다. 왜 그가 ‘사릉’을 무심코 떠올려 열차에 오르게 했는지 필연적 연관성을 엿보게 한다. 작가 무의식 내면 공간에 묵직하게 오랜 동안 가라앉아 있었지만, 실상 그에겐 지금 삶과 가장 대비되는 삶이 자리했던 곳이기 때문이다. 한 순간 인생 나락으로 떨어진 사람은 과거 자신이 가장 잘 나갔던 순간을 제일 그리워한다. 보잘 게 없다고 스스로 생각한 은퇴자일수록 ‘왕년’을 수시로 거들먹거리며 현재 퇴락을 위무하려고 하거나 주위에 과시하며 지금 쓸모없음을 자발적으로 토설한다. 서글픈 자화상의 자진 노출 현상이다. 작가 기본 심리는 이를 닮았다. 여기에서 글이 멈추었거나 동일한 기조로 이어지다 끝냈다면 이 또한 여느 퇴직자의 세상 푸념 해소용 생활문에 불과하였을 터다. 이걸 넘어서는 문학 화소인 사릉 가는 길의 고물상을 찾아낸다. 그곳에서 발견한 건 선거철 유세 트럭에 달았던 홍보판이다. 당선자와 낙선자가 함께 어울려 햇볕을 쬐고 있는 걸 보면서 인생 승패의 덧없음을 깨우치고, 결국엔 승자와 패자 모두 동일한 운명을 맞는 공평한 현장을 목도한다. 아내 동창들이 방문하는 날, 일부러 피했던 자신의 퇴보적 현실관을 반성하고 귀가 길을 서두르는 인식 전환에 이른다. 결미에서 그는 현재 무기력한 삶에서 의문에 빠진 길(사릉을 찾아가게 된 동기)을 벗어나 새로운 ‘백수’ 길을 찾았다 고백한다. 이 모든 과정에 바로 공간 배경인 ‘사릉’이 문학 장치로 작용하여 그 필연성을 확인케 한다.
오순자 <어느 뜨거운 여름날에>는 제목만으로 위 글과 달리 공간 배경이 드러나지 않는다. 작가에겐 “여름날”이란 시간 배경이 더 중요하다고 보았을 것이다. 육이오 사변 피난기 어린 소녀가 겪어낸 삼 개월 기간 삶이 핵심 서사다. 당연히 시간이 중요한 요소임엔 틀림없으나 공간 배경도 그에 못지않다는 점을 지적하려 한다. 그 시기에 피난지가 시골이 아니라 임시 수도인 부산이었다면 분명코 다른 삶이 펼쳐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즉 시기와 더불어 공간이 중요함을 강조하여 말하는 것이다. 작가가 제목으로 내세운 시간 배경의 중요성은 밀쳐두고 이 글 주제인 공간 배경에 주목하여 얘기를 이어가기로 하자. 피난기 삼 개월을 “어린 시절의 황금기로 기억”하는 곳은 “친가의 집성촌”이었다. 그녀는 그곳에서 전에 살던 곳에서 겪어보지 못한 다양한 것을 체험한다. 전쟁에서 당연한 등장물인 “비행기 소리와 포탄 터지는 소리”로 놀라고 야간 등화관제도 낯설기만 하였다. 어린 소녀에겐 이런 이해 불가한 변화도 동심 유연성으로 금방 극복하여 시골 공간의 새로움에 쉽게 빠져든다. 정말로 그녀에겐 “산과 들로 쏘다니며” 신세계가 열린 셈이다. “도시에서 자란 내게는 신기한 것들이 많았다.” 그 일단을 보자면, “산딸기 열매” 따기, “방아깨비” 잡기, “우렁이” 잡기, 무서운 “거머리” 보기 따위였다. 그뿐만이 아니라 냇물에서 해본 “고기잡이”는 특히 인상적이어서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작가에겐 “노란 햇빛의 즐거운 일렁임이 눈에 선하다.” 물론 이중에는 소녀 눈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도 있었다. 주막에선 본 “나는 인민의 피를 빨아먹은 형사입니다.”라는 쪽지를 등에 붙인 사람과 그를 “아주 나쁜 놈이야!”라고 욕하던 사람, “어떻게 피를 빨아먹었을지” 무서운 생각이 들었던 어린이다운 신기함과 두려움은 어머니 걱정을 불러왔다. 아버지와 삼촌 부재도 가볍게 지나치고 계절이 변해가며 새로운 놀이인 “메뚜기 잡이”로 달라지면서 화려하고 신나던 체험 끝이 다가왔다. 소녀가 그래도 어렴풋한 변화를 감지한 것은 “한 아이가 태극기를 흔들며 ”해방됐다~!“라고 소리” 지르며 뛰어올 때였고, 어머니가 짐을 꾸리면서 찬연했던 소년기의 황금 시절은 끝났다. 그런 아름답고 소중한 추억 대가로 작가에겐 이후 고소공포증을 안겨 주었다. 모름지기 그녀는 그곳을 떠나면서 소년기를 마감하고 사춘기로 접어들었을 테다. 비로소 어른 세계에서 맞이한 철이 들어서야 그곳에서 보낸 삼 개월 삶의 역사 의미를 깨우쳤는데, 그 뒤에 그가 발견한 것은 헐린 집과 작은 동산, 작은 개울일 뿐이었다. 소년기 천국과도 같았던 장소의 사소함과 보잘 것 없음의 발견은 그곳의 인생론적 시효가 끝났음을 확인한 셈이다. 이 모든 체험 낱낱과 그 변화를 발견한 것은 공간 배경과 밀접하게 얽혀 있다. 이 장소와 사연의 필연적 얽혀듦이 글에서 차지하는 공간 배경의 문학적 의미인 것은 두말할 게 없다. 작가가 소년기에 이곳에 가지 않았더라면 이 글은 쓸 수 없었을 것이고 결미에서 기대하는 바 통일에 대한 기원도 다소 허구적 소망인 실체가 미약한 생각으로 읽혔을 것이다. 이 공간 배경에 관한 작가의 의미 부여는 시간 배경보다 다소 미약하게 보인다. 이건 작가 선택이니 왈가왈부할 일은 아니다. 다만 작가에겐 그 “뜨거운 여름날”의 시기가 더 의미 깊게 자리 잡았고, 언젠가 다가오길 바라는 통일 시기와 연결되기를 더 표가 나게 드러내고 싶었을 지도 모른다. 이것은 시간 상 차이를 구별해 문단 사이를 띄움으로써 시각 면으로 강조한 의도에서 얼마간 읽을 수 있다.
한효정 <손님>은 아주 비좁은 공간에서 벌어진 사연이다. 베란다로 흔히 불리는 아파트와 그 외부가 연결되는 작은 공간에서 일어난 일이다. 그곳에 까치가 둥지를 틀면서 시작했다가 “새끼들을 업고 날아가는 까치를” 아래층 어르신이 봤다고 전해 듣고 이야기는 끝난다. 이 글에서 주목할 바는 그야말로 극소 공간에서 인간과 미물간의 특별한 교류에 관한 이야기라서, 만약 이 공간이 아니면 결코 벌어질 수 없기에 공간 배경의 문학적 중요성이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가를 실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학이 아니면 이런 협소한 공간의 중요성과 의미는 결코 주목받기 어렵다. 물론 아파트에서 짐칸의 역할 또는 화초 주거지, 소방 시설 일부로 화재 발생 시 임시 비상 대피 공간 기능까지 여럿을 열거할 순 있지만, 삶의 일상적 용도일 뿐이다. 때로는 목숨을 부지해주는 소중한 곳이 될 수도 있고 식물 생장에 필수 공간도 되지만 이 단순하기만 한 사용 공간을 새로운 가치를 담은 의미 공간으로 승격시키는 것은 문학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그 구체 면면을 살피며 더 확인해보자. “혹한이 계속되던 어느 날부턴가” 작가의 거주 공간인 아파트 베란다와 그 창문 밖에 “에어컨 실외기와 창문 사이”가 사람 일상을 넘어 문학 의미 공간으로 변환하는 곳이다. 이건 까치가 “나뭇가지”를 물어오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사람의 쾌적한 실내 생활을 위해서 마련한 에어컨 실외기와 베란다 창문 사이가 미물의 생명 탄생 공간으로 변전하는 현장이다. 간혹 이런 특이한 조류 생태를 언론에서 소개하여 보기도 한다. 말하자면 이 사건은 뉴스감이거나 작품 소재로 다룰 만하다. 때문에 따지고 보면 새삼스러운 건 아닐 수도 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하여 언급하는 것은 그 공간이 차지하는 수필 배경의 중요성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 역시 공간 배경만이 아니라 시간 배경도 당연하게 나온다. 다만 그것이 이 글을 엮어가는 데 공간만큼 핵심 역할을 하지 않을 뿐이다. 때문에 시간을 가리키는 건 구체 공간 묘사와 달리 상당히 허술하거나 대략 제시한다. 예컨대 “어느 날”, “하루에 서너 번”, “어느 새”,“어느 아침”, “다섯 달”, “3 주”, “봄꽃들이 피고 지는 동안”, “며칠 동안” 따위로 명확하지 않게 특정한 시간이 아니라 막연하게 제시한다. 구체 숫자로 표시한 “다섯 달”과 “3 주”마저도 시간을 실감하기엔 폭이 꽤 넓은 편이다. 결국 이 글에서 시간은 사건을 전개하기 위해 경과를 나타내는 단순한 표지 역할만 하는 셈이다. 이와 다르게 공간에 관한 구체성은 다음과 같다. “안쪽으로 벽을 높게”, “지붕”, “바닥 공사”, “촘촘한 까치집 틈새”, “지푸라기 하나 들어갈 공간도 없는 틈” 따위는 시간 표현보다 더 세세하고 치밀하게 서술한다. 이것은 이 글이 시간보다 공간 배경이 글에서 매우 중요한 핵심 요소라는 걸 증명한다. 마침내 까치가 그 새끼들을 데리고 집을 떠나자 작가는 적막감을 느낀다. 때마침 작가 집에 머물던 부모님도 가시고, 여행 떠난 두 딸까지 그녀의 허전함을 가중시킨다. 까치 가족과 작가 가족의 신묘한 일체감을 암시하며, 미물과 인간 형태는 다르지만 가족 근거지인 집의 의미를 새롭게 부각한다. 이 지점은 수필 배경에서 공간이 얼마나 주요한 핵심 의장意匠인지 입증하고도 남는다.
박헬레나 <모천으로 돌아오다>는 작품명부터 공간이 주요 화제임을 드러낸다. 회귀성 어종에게 어울리는 단어가 “모천”이 아닌가. 비유로 쓴 이 말에서 이미 이 글 주제를 암시한다. 글 핵심 역시 작가가 생각하는 모천, 현재 살고 있는 곳인 “창문 밖에 신천”이 흐르는 곳, 계절 따라 표정을 바꾸거나, 그녀의 “그날그날 기분에 따라 각도를 달리”하여 즐길 수 있는 곳이, 넓은 바다에서 살다 번식하러 돌아와 산란하는 연어처럼 모천이다. 왜 그런가하면 작가는 꽤 자주 오랜 동안 하와이에서 머물다 왔기 때문이다. 모천이란 말을 굳이 빌려와 쓴 것은 그녀가 생각하는 이상적 거주 환경을 결코 떠나지 않겠다는 결심 때문이다. 원한다면 하와이에서 살 수도 있지만 그걸 마다하고 돌아왔다는 작가 얘기다. 그녀가 생각하는 삶의 “환경” 조건이 무척 흡족한 것이 돌아온 일 순위 이유다. 앞에서 약간 살펴보았듯, 그녀의 현 주거지는 자연 환경이 좋고, 교통과 문화 편의 시설과 동네 분위기마저 마음에 든다. 아무리 하와이가 세상 사람들에겐 “태평양 한가운데 섬의 공기가 달고 신선”한 소위 “낙원”이고 “많은 것을 누리고 즐길”수 있는 곳이지만 그녀는 그곳을 떠나 이곳으로 회귀했다. 작가에게 가장 소중한 언어 문제가 달라서 “최적의 환경과 삶의 어떤 조건도 채워줄 수 없는 그 무엇”이 있다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언어 문제가 일차적 문제란 걸 작가답게 느낀다. 아는 것이 아니라 감각으로 자연스레 아니면 본능으로 그 언어가 다가온 것이다. 인간 사이 의사소통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넘치지 않는다. 언어 소통 부재는 인간에게 공기 부족과 같은 셈이다. 그 언어 문제를 넘어선 “코메리칸이라 불리는 재미교포”의 예를 들면서 언어로도 해결할 수 없는 또 다른 이차 이유를 찾아낸다. 그것이 바로 작가가 모천으로 회귀한 진정한 이유이다. 그것을 연어가 모천에 회귀하는 본능으로 비유한다. 그것이 앞에서 작가가 느끼고 실천하고 있는 거주 환경의 조건, 모천이 가지고 있는 무형적 정겨움이다. 이건 우리에게 필요한 쌀과 같은 필수 요소이다. 언어가 공기라면 환경은 늘 하루 세끼 먹고 살아가야 할 주식이다. 이점은 작가라는 특수 신분을 넘어 일반인에게도 보편적 공감대를 부른다. 아무리 거주 환경이 좋고 언어가 통해도 인간 삶에서 회귀본능을 충족시키는 것보다 소중한 것은 없다는 생각이다. 전해오는 옛말에 수구초심首丘初心의 실체를 작가는 체험하고 글로 형상한 것이다. 이 글에서 공간 배경인 “신천”이 흐르는 곳과 “낙원”인 하와이를 다른 장소로 바꾼다면 글 자체가 성립할 수 없다. 작품의 살과 뼈와 같아서 두 요소 존재는 작품 형상화에 당연직 이사 역할을 맡는다. 바로 이점에서 수필 배경이 가지는 의미 일단을 확증한다.
박순 <거제 포로수용소>는 표제만으로도 한반도의 아픈 상흔을 떠올리게 하는 장소다. 한민족에게 집단무의식 상처 같은 이곳은 요사이 성급한 통일론과 화사한 남북대화 분위기에서 반드시 떠올리고 그곳이 담보하는 진정한 의미를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 어느 한 개인에게만 의미 있는 장소가 아닌 매우 보편적 문제 장소를 수필에서 다룬다. 이 글이 필자에게 의미가 남다르게 다가온 것은 글 구석구석에 담긴 고단하고 힘들었고 특이했던 결코 잊을 수 없는, 한 가족이 겪어내야만 했던 피란민의 삶만은 아니다. 그 시절을 견디고 살아남은 수많은 사람에게서 일면 유사한 체험 스토리는 적잖이 알려졌다. 각자 기억하고 살아온 육이오 사변 그 시절 삶의 역정은 별개로서 각각 의미 편차가 다르다. 이것을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한 개인, 범위를 넓혀서 작가 가족의 3년간 피난 체험 회상을 유발하게 했던 동기動機를 제공한 곳인 거제도 리조트다.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반세기가 훌쩍 지난 지금”에도 포로수용소란 문제적 공간 배경 기능과 의미가 특별한 점이 이 글에서 주목한 바다. 이 거제 포로수용소가 있던 곳은 세월 따라 이제는 “거제도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이 되었다. 이렇게 반백년보다 더 긴 세월이 흐른 지금에도 작가에겐 잊을 수 없는 과거 시간이 아니라 현재에도 살아서 작용하는 시간이고 공간이다. 이 때문에 작가에겐 여전히 문제 공간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곳에서 우리는 아직도 미완의 통일로 남아 있는 이 땅의 아픔을 맛보았”고, “역사 속의 미완만이 아니”면서 “내 삶의 미완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돌이키자면 반세기를 훨씬 넘겨 아직도 작가에게 영향을 미치는 곳인 ‘포로수용소’란 공간은 이 수필에서 배경이 맡은 참된 기능이자 의미를 갖는다. 육이오 사변이란 역사 고난을 관통하는 민족적 의미가 있는 곳, 그러므로 현재엔 “유적”이 된 곳이 작가 개인에게도 ‘삶의 유적’이 되어버린 곳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 곳이 아니면 이 글의 산출도 없었을 것이듯, 작가 인생도 달라졌을 것이다. 이 ‘포로수용소’는 개인의 사적 의미를 넘어서 문학적 의미를 공유하는 배경인 셈이다. 글에서 이곳 말고도 등장한 지역은 서울, 춘천, 신의주, 전라도, 부산, 대구, 거제도 사동항, 고현 등이다. 하지만 이들은 배경이라기보다 서술 과정상 보조적으로 드러낸 지명 이상 의미는 없다. 배경으로 작용한 게 아니란 말이다. 오직 거제도 포로수용소만이 이 수필에서 진정한 의미에서 배경으로 보게 하는 까닭이다.
김윤선 <집>은 미국 교민 삶을 엿볼 수 있는 글이다. 우리와 다른 공간에 작가는 삶터를 마련해 살고 있다. 이것만으로 수필 배경으로 보는 데는 무리가 있다. 작품에서 더욱 구체화하여 삶과 직결된 연결 고리로 작용하지 않고는 필연 장소인 배경으로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녀 삶은 아주 싱싱하게 조금은 시시하게 하루를 연다. “아침에 뒤뜰에 물주는 일”로부터 시작한다. 이 수필은 한 장소와 공간이 인간에게 어떤 의미로 각인되는지를 실제로 증언한다. “미국의 주택은 새로운 세상과의 만남”이므로 태평양 건너 한국의 “부동산 붐”과 연결되어 “부익부, 빈익빈의 자본 형성에 집의 위세”가 미국도 “역시나 부자 동네의 집값 상승이 가파르다.”를 견주어 흥미롭게 대비하고 있다. 이런 추세를 알고 있지만 그녀의 체험적 삶을 근거로 이러한 시대적 흐름에 선뜻 동의할 수 없다. 이 글을 집필한 사유思惟 고리이자 창작 동기다. 이런 일반인의 집에 대한 인식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체험을 바탕으로 생생하게 묻고 있다. 이를 보강하기 위해서 그동안 살며 보아왔던 집에 대한 견문과 지식을 드러낸다. 이에는 전북 고창군의 “고인돌유적지”, 충남 공주의 “무령왕릉”, 캐나다 빅토리아 섬의 “크레이그다로슈 저택” 등을 거치고 “시아버님의 묘소”에 이르기까지 산자와 죽은 자의 집이 여러 생각을 골고루 떠오르게 했다. 오랜 시간 경험과 한국과 미국, 캐나다를 아우르는 광범한 거주 공간을 겪어보고 결론지은 건 “집이 가족을 담는 그릇이라는 명제”이다. 집이란 공간이 가지는 인생 의미를 새롭게 정의한다. 물론 이에 대한 공감 여부는 독자 개개인에 따라 다를 것이다. 이 글에서도 지적한 많은 사람은 집이 재산 증식과 부와 권력 과시와 그 확인물일 뿐으로 알고 있다는 것, 그런 속인들로 넘쳐나는 지구촌 한 양태를 비판하거나 이해 못할 시선의 부정으로만 보는 건 아니다. 담담하게 세태를 서술하고, 그녀만의 집에 대한 생각을 드러낸다. 애초에 이글이 작가 자신과 다른 집에 대한 인식을 비판하거나 문제시하려고 쓴 것은 아니다. 자기 집에 대한 생각을 형상하기 위한 비교 대상일 뿐이다. 분명히 그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대비하여 드러내고 싶었기에 상대 객체로서 가져온 것이다. 역시 이 글에서도 확인하는 바는 집이란 건물의 인공적 공간 가치는 그곳을 이용하는 자의 생각에 따라 상당한 차이로 다른 의미를 품는다는 점일 것이다. 이점에 수필 배경은 뒷자리에 풍경으로 혹은 가리개 정도의 병풍이 아니라 반드시 있어야 할 필수 요소임을 재확인한다. 이 글의 집은 엄밀하게 말하자면 공간 배경이라기보다 수필 제재이다. 왜냐하면 집에서 벌어지는 서사는 별반 없고, 그녀에게 집이 차지하는 의미를 형성케 한다는 면에서 배경 자체를 넘어선다. 곧 수필 제재가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껏 앞에서 다룬 작품들과는 다르다는 걸 밝혀둔다. 배경이되 배경을 넘어서는 자리에 이 작품이 놓여있다 보겠다.
수필에서 배경이 필수 요소임을 말해왔다. 앞에서 다룬 몇 작품에서 확인한 바는 장식적 장치로서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반드시 있어야 할, 수필 서사 공간의 필연적 핵심이 공간이었다. 말하자면 대체가 불가능한 공간이 지금껏 말하고 있는 공간 배경이다. 편의상 배경의 다른 요소인 시간은 별도로 이미 살펴본 바 있어 이 자리에서는 다루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과 공간 배경을 구성하는 둘은 함께 어울려 작용하는 경우가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압도적으로 우세하다. 따로 나누어 살핀 것은 선명하게 분리되는 경우보다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이다. 삶의 자잘한 일상에서 원석을 발굴하고 다시 보석으로 가공하여 길어 올려야, 비로소 문학의 거리에 수필의 작은 터를 잡고 작가만의 집을 지을 수 있다. 이 과정에는 다양한 문학 장치와 요소들이 서로 가공 도구가 되고 이를 다룰 숙련된 기술이 필요하다. 그 중에 지금 살핀 배경은 언제나 세공 작업대 한편에 놓여야 한다. 다만 여기에서 말하는 것은 있어도 없어도 그만인 배경, 다른 시공간으로 바꾸어도 글의 맥락이나 주제가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는 배경은 말뿐인 배경이고 참다운 수필의 바람직한 배경은 아니다. 피상적으로 어느 곳, 어떤 시간 제시가 아니라 그 시간과 공간이 있거나 없으면 작품이 아예 들어설 수 없거나 성립할 수 없는 어떤 것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러할 때 수필에서 배경의 참다운 자리가 있고, 맡은 바 진정한 역할이 있으며, 이의 적절한 기능 발휘는 보다 수필다운 작품, 더욱 문학성이 가미된 글을 독자에게 내밀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