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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외교관이 본 개화기 조선>이라는 책 가운데, 겨우 A4 한 장 반 정도에 해당하는 내용을 신경숙의 지인 R이 번역하여 넘겨줬다고 한다. 무심코 받아든 그 글로부터, 신경숙은 마치 어떤 소명을 받은 작가처럼, 운명처럼 소설 <리진>을 쓰게 되었다. 번역된 짧은 글의 내용은 이렇다.
19세기를 넘어가는 그때 (이름없는) 한 궁녀가 있었다. 그녀는 프랑스 외교관과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그를 따라 멀리 파리까지 건너갔지만, 결국 그녀는 조선에 돌아와 금종이를 삼킴으로써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러니 신경숙이 쓴 <리진>은 알려진 사실로부터 비롯됐지만, 자료없음으로 인해, 단지 소설이라고 말해야 할 작품이다.
<리진>은 너는 누구냐, 조선의 여인으로 태어난 이름없는 너는 누구냐, 그때를 산 넌 어떻게 살았느냐를 묻게 되는 작품이다. 소설 에필로그까지 다 넘기고 나면, 그 뒤 서영채의 '뒤늦은 애도, 한 고결함의 죽음에 관하여'라는제목의 해설이 실려있는데, '뒤늦은 애도'라는 데서, 공감하게 된 제목이었다. 어쩌면 <리진>은 근대 격동기를 이름없이 살다간 한 여인의 삶을 통해, 이름이 없어 다른 누구로도 가능할 근대 여성들에 대한 뒤늦은 애도로서의 작품이다.
<리진>에는 남자를 사이에 두고 갈 길 없이 싸우는 여성이 아니라, 서로 다르게 공존할 수 있는 연대를 꿈꾸는 여성이 등장한다. 그 당시 궁의 왕비는 명성왕후였다. 왕비와 리진의 유대는, 한 여성과 다른 한 여성의 슬픈 연대라고 할 수 있다. 둘은 어떻게 연대되는가? 일찍이 부모님을 여의고 세상을 향해 손을 벌리는 서씨의 손에서 자란 이진이 궁에 들어간다. 왕비는 어떤가? 어린 나이에 궁에 들어와 폐망해가는 왕비가 됐다. 그들이 어떻게 이어지는걸까? 어린 궁녀는 대비를 즐겁게 하기위해 서상궁의 등에 엎혀 날마다 궁에 들어온다. 어느날 어린 궁녀는 그 큰 궁에서 길을 잃었다. 길잃은 아이에게 누군가 다가왔다. 왕비였다. 왕비는 그 아이를 데리고, 중궁전으로 들어가 하얀 배 속살을 파, 숟가락으로 배즙을 떠 먹인다. 그때 무슨 까닭인지 리진은 어머니의 소리를 듣는다. 이렇게 그녀들은 이어졌다. 어둠속에서 길을 잃고 울고 있는 아이에게, 길을 인도하는 왕비. 하지만 궁 안에 사는 그녀들이 어머니와 딸의 연대로 이어질 수 없었다. 그후 왕비와 리진은 어떻게 이어지는가? 궁 안의 여성이다. 궁녀는 왕의 소유라는 것에서, 왕의 부인인 왕비라는 데서, 왕의 소유인 궁녀라면, 왕비와 리진이 어떻게 이어지겠는가? 한 남자를 사랑할 수 있는 여성이라는 것이다. 아이를 낳고 기르는 모성의 여성성과 어미가 필요하고 어미가 되는 여성성에서, 그녀들은 한 남자인 왕을 사이에 둘 수 있다는 것에서 이어진다. 이때 왕비는 말한다. "너와는......"( 1권 131쪽) " 한 남자를 사이에 둔 그런 인연이고 싶지 않다."( 1권 131쪽)고. "여기는 궁이다."( 1권 131쪽)라고. 왕을 둘 사이에 두고 싶지 않은 것이다 . 여자의 일생에 있어서 남자는 한 남자이다. 여자에게 있어 남자는 한 사람이어야하는 까닭에, 궁녀와 왕비라는 다른 사회적 위치지만, 한 남자는 그 사이에 있을 수 있다는 걸 알아, 거기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신경숙의 이름이 뇌리에 박힌 작품은 <풍금이 있던 자리>다. 한 남자(아버지)를 두고, 두 여자(어머니와 여자)가 함께 하지는 않겠다는 마음은 그때 이미 결정된 사항이 아닌가 싶다.
여성이라는 걸 누구나 알 수 있는 글을 신경숙은 쓴다. 신경숙은 이제껏 그렇게 글을 썼다. 상처받을 수 있는 마음의 존재를 아는 여성이 등장한다. 한 남자와 두 여자가 있을 때, 내가 그 옆에 있으면 나로 인해 다른 한 여자가 상처받을 걸 아는 여자가 등장한다. 하여 <풍금이 있던 자리>에서 여자는 떠났고, <리진>에서 리진은 왕비의 곁을 떠난다. 여자에게 남자는 한 남자여야 하기 때문에. 나만 그런 게 아고, 너도 그럴 것이니까.
<리진>에 같이 숨쉬는 문학 이 있다. <리진>은 역사적으로 실제성으로 비롯된 허구라고 앞서 말했다. 그렇다면 어떤 허구가 숨 쉬게 됐을까? 작품들은 그 당시 읽혀졌을 문학(작가)과 손을 잡는다. <춘향전>과 <레 미제라블>과 <여자의 일생>이 있다. <레미제라블>은 그 책- <레 미제라블>- 안에 넣겠다는 향낭으로 등장하는데, 그리고 그건 이진이 콜랭의 청혼을 받아들이는 징표다. 또한 외면할 수 없는 불쌍한 사람들이라는 데서 서로 통한다. <여자의 일상>은 파리로 간 이진이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을 만나는 데서, 같이 숨을 쉬게 된다. <레 미제라블>은 프랑스 대혁명 후 나온 작품이다. 세상을 바꾸면 세상이 달라질 줄 알았는데, 아픈 사람들은 여전하다는 걸 아는 빅토르 위고의 통찰이 돋보였던 <레 미제라블>이 아니던가. 신경숙 또한 그렇게 생각했다고 받아들여진다. 그때나 지금이나 아파하는 사람들이 많다.
견딤과 절명/단절을 가능하게 하는 글/언어이다. <리진>에는 글/언어가 생사를 결정하게 하는열쇠로 작용한다. 리진은 유독 배우는 데 재주가 있었다. 리진이란 이름은 왕의 윤허로 콜랭과 떠나는 궁녀(서나인)에게 왕이 친히 내려준 이름이다. 궁녀가 궁밖으로 나갈 수는 없는 법도였기에, 왕비가 친히 나서서 가능한 일이었다. 떠나는 그녀에게 왕은 이진이라는 이름을 지워준다. 왕비와 왕의 협조로 가능한 여정으로부터, 리진을 조선의 딸이라 부르게 된다.
그때까지도 그녀에게는 이름이 없었다. 무슨 사연인줄은 모르지만, 이름없는 그녀의 가족이 반촌으로 들어왔다. 어떤 사연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사연은 알 수 없다. 유복녀로 태어난 리진이다. 아버지는 민병을 자원해 강화도로 떠나 미국함대를 물러나게 했지만, 그는 끝내 반촌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애기야, 라거나 집 앞이 온통 배나무 천지라는 데서 이화(梨花)라고 불러주던 어머니는 리진의 나이 5살 때 돌아가신다. 그녀에게는 이름이 없었다. 이름이 없었던 그녀는 어떤 정체성도 지닐 수 없었다. 어린 궁녀에서, 서나인으로, 봉주르라는 인사와 함께 콜랭의 눈을 홀린 그녀는, 콜랭에게는 나의 천사이고 진이다. 강연에게는 은방울이다. 그리고 콜랭과 함께 조선을 떠나던 그때 왕에게 받은 이름 리진으로 그녀는 살게 된다. 리진, 너는 누구냐?
이름/정체성에 갇히지 않았던 그녀에게는 뭐든 배우는 재능이 있었다. 그녀는 춤을 배우고, 글을 배우고, 말을 배우고, 이국문화, 세상을 배웠다. 그런데 정작 그 배움은 그녀에게 무얼 줬을까?
그녀의 어려운 삶을 치열하게 살게하는데 있어 무엇보다도 우선하는 건, 바로 읽기와 쓰기였다. 블랑신부님에게서 배운 불어는 그녀에게 봉주르라는 인사를 건네는 콜랭을 알아보게 했고, 빅토르 위고, 보들레르, 랭보, 플로베르, 모파상을 만나게 했다. 그러다가, 그 글을 안다는 것이 바로 그녀에게 어떤 소명을 내렸다. 역사적 현장을 다시 새기게 하는. 그러나 그걸 조선인이 아닌 외교관 콜랭은 흐르는 시냇물처럼, 무심히 가혹하게, 흘려보낸다.
왜 글이어야 하는가에 대해서 생각하게 하는 두 부분이 있다. 서씨와 리진의 경우이다. 서씨는 경복궁 근처 반촌이라는 곳에서 아이들을 돌보며 살고 있다.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갖은 구박을 당하다가, 제발로 집을 나와 홀로 살고 있다. 아버지는 시집을 나온 서씨에게 살 집을 마련해준 뒤 부모자식의 연을 완전히 끊으셨다. 역관이었던 아버지덕에 글을 읽을 수 있었다. 결혼했지만 아이가 없다는 이유로 홀대받았던 그녀는 긴긴 밤 책을 읽으며 밤을 견뎌냈다. 그 홀로 지새워야했던 밤, 그녀를 견디게 했던 그 글읽기는 종국에는 그 억압과 모순 속의 시집살이를 더이상 견딜 수 없게 했다.
"세월이 지날수록 글의 세계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결핍을 참고 견디며 묵묵히 살아갈 수 있는 인내를 빼앗아갔다. 따가운 눈총과 노골적인 멸시를 받으면 사람이 이렇게 사는 게 아니다, 싶은 폭발할 듯한 감정에 휩싸였다. 그 농도가 시간이 지날수록 짙어졌다. 결국 서씨는 그 집에서 나왔다. 서씨에게 기존의 것에 저항하게 했던 것은 서책의 세계였다. "(1권 82쪽, 강조는 인용자)
본다/안다는 것은 생각하게 한다. 글을 알아 세상을 읽다보면, 자신의 삶도 읽게 된다. 이렇듯 글을 안다는 것은 자신을 확장하는 것이다. 무엇을 억제하고 무엇을 향유하고 무엇을 펼쳐야하는지를 알게한다. 하여 글을 읽는다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확고하게 하기도 한다. 그렇게, 글을 아는 서씨가 그곳에서 끝내 잃어버릴 자신을 생각하고서, 집을 나왔다면, 글을 아는 리진은 독을 바른 한불 사전을 삼키고 죽게 된다. 왜? 자신을 위해 자신이 몸소 해야할 바를 알았기 때문이다.
다시 조선에 돌아와 홀로 모로코로 떠난 콜랭에게 리진은 편지에 쓴다. "이것으로 우리는 충분하다 여깁니다."( 2권, 243쪽)라고. 그러면서 달콤한 말을 속삭였던 콜랭의 과거마저 잊으라 한다. 그리고는 외교관으로 조선에 다시 들어오는 콜랭에게, 편지를 전한다. 왕비가 일본군인들에게 얼마나 처참하게 죽었는가를 상세히 적은 그 피눈물나는 상황을 적은 편지를 말이다. 그러나 콜랭은 리진이 충분하다고 말하는 거기에서, 스스로 충분할 수가 없었다. 자신에게 전하는 글이 아니라, 자신을 통해 알려지기를 원하는 글인 걸 콜랭은 알지 못했다. 알았다할지라도, 모르도록할 무의식이 아닐까 싶다. 하여 무심히 넘겼던 것이다. 오래된 것을 수집하던 수집가에게 그 시대 제국주의 소용돌이에 휩쓸린 한 국가의 비참한 이야기는 단지 다른 나라의 이야기일 뿐이었다. 리진이 왜 자신에게 편지를 쓴 것인지에 대해서 생각하지 못했다. 사실은 생각하지 않았다.
여기에서 리진의 죽음과 같이 놓여있는 사물이 왜 하필이면 블랑신부가 필사한 불한사전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리진은 그 사전을 통해 넓은 세상을 알게 된 것이다. 서씨에게 서책의 세계가 견딤을 가능하게 함과 동시에 저항하게 했듯, 리진에게 사전은 왜 글이 존재하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한 존재를 살게 한 사전은 한 존재를 죽게 한다.
"리진의 입가에 실낱같은 핏줄기가 흘러내리고 두 손엔 한 움큼 종잇조각들이 쥐어져 있다. 이른 봄 햇살이 그녀의 목덜미 위로 쏟어져내리고 두 손에서 풀려나온 종잇조각들이 봄바람에 밀려 주위에 이리저리 떠다녔다.
그것은 흡사 봄을 맞이해 나래를 편 금빛 나비처럼 보이기도 했다."(2권 299쪽)
한 존재는 그렇게 살 수 없어, 죽는다. 그러나 세상은 한 존재의 목숨과 바꾼 그 소명감을 사라져도 될 한낱 종이로 만들어버릴 정도로 냉혹하다. 그녀에게 있어서 글은 세상에 대한 치명적인 앎이 되었다. 허나 그녀의 목숨과 바꾼 그 치명적인 글은 조선인이 아닌 이방인에게는, 리진에게 있어 콜랭이 무의미한 존재라는 걸, 콜랭에게 상기시킬 뿐이다.
리진, 너는 누구냐? 모든 기억이 숨어버린 아이 때의 어느날, 리진에게 "너는 누구냐?"라는 답할 수 없는 질문을 던진 이가 빛 속에서 나타났다. 왕비였다.
파리에 콜랭과 함께 살던 리진은 의문한다. 문득 문득 묻는다. "나는 누구일까요?"( 2권 94쪽)라고. 리진은 왕에 의해 리진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과연 리진은 누구일까?
"내 너에게 성을 내리노니, 오늘부터 너는 이(李)씨다. 이름은 진(眞)으로 하라."1권 25쪽) 는 명을 받은 리진, 너는 누구냐? 너는 무력한 조선의 슬픈 딸이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너를 지켜주지 못해 머나먼 낯선 곳까지 떠났다, 그러나 네가 있을 곳은 머나먼 이국이 아닌 너를 존재하게 한 이 땅이었던 운명은 너를 불안한 조선으로 다시 돌아오게 한다. 어찌해도 너는 조선의 딸이다. 그걸 알고 너는 조선의 고통사를 네 푸른 목숨 받쳐 세계에 알리려했다. 그러나...
"외교관으로만 돌아가겠다고 했던 자신에게 왕비가 시해당하던 밤의 정황을 낱낱이 써서 남긴 것은 이권과는 상관없이 왕비의 죽음을 제대로 알려달라는 듯이었나. 그랬나. 잡초가 무성한 궁궐을 죽음의 장소로 택한 것도 그 때문이었나. 그걸 왜 이제야 깨닫는단 말인가.”(2권 307쪽)
너는 조선의 딸이다. 조선의 딸 리진의 죽음은 뒤늦게야 되살려져 이렇게 애도될 뿐이다.
여자에게 사랑은 하나다! 사람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아파하면서도 사랑한다. 몸짓의 자태가 아름다운 리진에게 사랑이 없을소냐. 리진에게도 사랑이 있(었)다. 여러 남자들이 등장하지만, 여러 남자들에게서 사랑을 전해받지만, 리진에게 사랑은 하나다. 강연과의 사랑이 그렇다. 그건 언제까지나 바라봐주는 사랑이다.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자신을 향한 강연의 마음일 것이다. 리진은 새삼스런 깨달음에 고통을 느꼈다."(2권, 252쪽)
이방인 콜랭의 달콤한 사랑과 투쟁하는 홍종우의 가학적인 사랑과 언제까지고 바라보는 (말 못하는) 강연의 사랑. 그 중 무엇을 리진은 사랑이라고 생각했을까?...작가는, 아니 독자는 누구를 하나이길 바라는 사랑이라고 생각하겠는가.
조선의 딸 이진은 한 남자에게 언제까지나 은방울이다. "춤을 추고 싶어."(1권, 229쪽) "저 달빛 아래서, 네 대금 소리에 맞춰서......."( 1권, 229쪽)
<리진>을 읽고 나서 생각하니, 리진이 추었던 춘앵무의 몸짓때문인지, 은방울이라는 이름을 간직한 강연 때문인지, 무슨 일인지 몰라도, 김춘수의 꽃이 떠올려진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신경숙, <리진>, 문학동네, 2007년
첫댓글 [리진]. 김탁환은 [리심]이라 했지요. 김탁환의 작품이 먼저 나와서 진작부터 서점의 가판대를 쥐고 있더군요. 폭기님의 글 잘보았습니다. 참 [벌레이야기]는 사서 보았습니다. 단편이 주는 맛과 영화가 주는 맛이 많이 다르더군요. [밀양]을 등에 업고, 그림과 함께 단행본으로 나왔더군요. 그림은 제 상상을 재단하는 듯해서 싫었지만, 한권쯤 그런책도 봐보아야지요. 근데 그림이 너무 울울했답니다.
([리심]은 모르겠고), 신경숙의 소설을 즐겨 읽으셨다면, 6년만에 나온 신경숙의 장편소설 [리진]을 읽어보길 권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꼭 읽으시라는 건 아니고, 읽으시면 좋을 작품 같아서요. 그런 작품이 어디 한 둘이 아니지만요... ^^<벌레 이야기>의 그림을 읽고서 울울하셨어요? 어쩌나요...하지만 '그 이후'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만....아닌가요?^^
글을 읽고 책을 곧바로 주문했습니다. 폭주기관차 님의 글과 직접 읽을 소설 사이에 생길 간극이 두렵기는 하지만 말이지요. 마땅히 가시를 자르지 않은 장미꽃이 새삼 인상적입니다.
주문하셨군요? 설사 두려운 간극이 있다해도, 로카드 님이시라면, 그 간극에 끼어들어올 '무엇'을 보실 거라 생각합니다...
폭주기관차님 정말 빠르세요. 신간이나 개봉 정보에서 봤다 싶으면 리뷰가 바로 올라오니...
그러고보니, 몇 번, 그래요, 몇 번인가 그런 것 같네요...^^
팩션을 어떻게 잃어야 합니까...?? 결국 하나의 사실을 가지고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종류의 팩션과 거의 대부분이 사실이고 일부를 만들어낸 팩션... 저는 모두 거짓말인것 같아서....ㅎㅎ
세상이 쉬운 게 어디 있을까마는 제겐 참 어려운 질문입니다. 굳이 제게 묻는다기보다는 자문하시는 질문일 수도 있는 같습니다만. 이건 제가 대답하기 어렵다는 말이기도 하지요.^^ 전 이런 생각을 합니다. 어떤 삶이 누군가에 의해 (그래요, 말씀하신 거의 대부분이 사실인 팩션으로)언어화 되었다면 언어화된 세계가 흔히 실제 인간이 살았던 삶인 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