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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해남을 사랑하는 사람들 원문보기 글쓴이: 可憙...고미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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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마산은 해남군에서도 남단에 치우쳐 긴 암릉으로 솟은 산이다. 두륜산과 대둔산을 거쳐 완도로 연결되는 13번 국도가 지나는 닭골재에 이른 산맥은 둔덕같은 산릉을 넘어서면서 암릉으로 급격히 모습을 바꾼다. 이 암릉은 봉화대가 있는 달마산 정상(불썬봉)을 거쳐 도솔봉(421m)까지 약8㎞에 거쳐 그 기세를 전혀 사그러트리지 않으며 이어진 다음 땅끝 (한반도 육지부 최남단)에 솟은 사자봉(155m)에서야 갈무리하는 것이다. 달마산을 병풍 삼아 서록에 자리잡은 미황사 는 이 산과 깊은 인연을 가지고 있다. 신라 경덕왕 8년(749)인도에서 경전과 불상을 실은 돌배가 사자포구(지금의 갈두상)에 닿자 의조 스님이 100명 향도와 함께 쇠등에 그것을 싣고 가다가 소가 한 번 크게 울면서 누운 자리에 통교사를 짓고 다시 소가 멈춘 곳에 미황사 를 일구었다고 한다. 어여쁜 소가 점지해준 절인 동시에 경전을 봉안한 산이라는 뜻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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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성을 지닌 전라우수영이 표면에 드러난 계기는 다름아닌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장군이 이룩한 명량대첩이다. 이순신장군이 옥에서 풀려나 권율 휘하에 있다가 백의종군하던 중 나라의 위태로움 때문에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을 받고 그날로 장흥 회령포에 이르러 간신히 12척의 범선을 수습하여 이곳 우수영에 당도했다. 이때 왜군들은 4백여척에 2만명의 군인을 싣고 울돌목을 통과하여 예성강으로 진출 이미 직산에 머물러 있던 육군과 합세해 서울을 침범하려는 계획이었으나 일본군에 있어 울돌목 장악은 중요한 과제였다. 임진년 전라수사로 있을때부터 울돌목의 지형조건을 파악한 장군은 치밀하게 준비해 나갔다. 쇠사슬 두줄을 안목과 밖목에 건너 매 올렸다 내렸다 할 수 있도록 울돌목에 장치해 두고 장수들을 불렀다. '병법에 이르기를 죽으려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 하였고 또 한사람이 길을 막으면 천사람을 두렵게 할 수 있다 하였으니 이것은 지금의 우리를 이름이라. 공들은 살 생각을 말고 조금도 명령을 어기지 말라' '나라를 위해 죽기로서 싸워라, 만일 조금이라도 영을 어기는 자는 군법을 시행하리라' 하여 임전결의를 다졌다. 1597년 9월 16일 새벽. 드디어 어란포에 머물고 있던 일본수군들이 밀물을 타고 명랑으로 공격해 왔다. 이순신이 12척의 배로 이를 공격하니 왜선이 이순신의 배를 포위하여 격전이 벌어졌으나 장군은 적장 마다시를 향해 시위를 당겼다. 이때 기다리고 기다렸던 조수가 썰물로 돌아서자 마다시와 기함을 잃은 왜군들은 혼비백산 도망가느라 바빴다. 이때 대파된 왜선은 1백 33척으로 세계해전사상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대승리였다. 이것이 그 유명한 명량대첩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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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이순신장군이 창안하여 1592년에 건조한 세계 최초의 철갑용 거북선이다. 16개의 노와 2개의 돛이 있어 기동성 있게 진퇴할 수 있었고, 130~150명이 승선할 수 있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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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가 운다고 해 명량이라 이름되기도 하는 울돌목은 해남군 우수영과 진도군 녹진사이를 잇는 가장 협소한 해협으로 넓이가 325m, 가장 깊은 곳의 수심이 20m, 유속이 11.5노트에 달해 굴곡이 심한 암초사이를 소용돌이 치는 급류가 흐른다. 이러한 빠른 물길이 암초에 부딪쳐 튕겨져 나오는 바다소리가 20리 밖까지도 들린다고 한다. 이러한 지형의 특징이 정유재란 당시 4백여척의 왜선들에게 손쓸 방도도 없이 참패를 안겨준 큰 요인이 됐던 것이다. 울음을 터트리는 울돌목 바다위로 지금은 아취형 진도대교가 허공을 가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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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이순신의 충성심과 구국정신을 추모하기 위해 1964년 건립한 사당이다. 명량대첩 비 와 충무공 영정을 봉안하고 있다. 충무사에 세워진 명량대첩 비 는 조선 숙종 때 충무공이 정유년(1597) 9월 16일 우수영 울돌목에서 거둔 명량대첩 을 기록한 것인데 비문은 숙종 때 대학자 예조판서 이민서가 짓고 당대의 명필(名筆) 판돈령부사 이정영이, 홍문관 대제학 김만중이 전자로 써서 숙종 14년 3월에 문내면 동외리에 건립했다.그런데 2차대전을 유발한 일본의 조선총독부가 왜란당시 크게 패한 기록이 담긴 그 비(碑)를 가만둘 리 만무했다. 그래서 1942년 전남 경찰부에 비를 뜯어서 서울로 올리라는 명령을 내리자 일본인 경찰들이 인부들과 목수, 학생들까지 강제 동원하여 높이 2.67m, 폭 1.14m나 되는 거대한 비석을 500m 떨어진 우수영 선창으로 옮겼으며 비각을 흔적도 없이 헐고 말았다. 이 일로 인부가 죽고 목수 두 사람이 원인 모를 병으로 죽자 조선총독부는 한때 대첩비를 아예 없애버릴 계획을 세웠으나 불길한 일들이 발생하자 감히 실행을 못하고 경복궁 근정전 뒷들에 파묻어 버렸던 것이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우수영 유지(有志)들은 대첩비를 찾기 위한 '충무공 유적 복구 기성회'를 조직하고 경찰부와 총독부에 수소문한 끝에 파묻혀 있는 대첩비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러나 거대한 대첩비를 우수영 으로 옮길것이 막연했다. 이들은 미군정청(美軍政廳)에 면담을 요청하여 협조를 구해 미군 트럭에 실어 서울역으로 옮겨 목포까지 열차로, 목포에서 다시 배를 이용하여 우수영 선창으로 되돌아 오게 되었다. 그러나 비(碑)를 세울 장소가 없어져 버렸기 때문에 제각(祭閣)을 짓기 위한 모금 운동에 들어갔으나 턱없이 부족한 기금 때문에 풍물패를 조직, 나주 무안 등 8개 군을 돌기도 했고 대첩비를 수백장 탁본하여 여러 시와 학교 관공서를 돌아 다니며 팔기도 했다. 드디어 1950년 비각이 완공되어 비를 세울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지금은 학동으로 자리를 옮긴 명량대첩 비 는 최근 두 차례나 믿지 못할 영험이 나타났다. 국가의 대난이 예상될 때면 땀 흘리듯 검은 물이 흘러나와 나라의 장래를 근심한 충무공의 충절이 살아난 것이라고 한다. 1950년 6·25사변과 1980년 5·18민중항쟁 때 이 비는 두 번 우국의 눈물을 흘린 것이다. 명량대첩 비 는 1965년 보물 503호로 지정, 66년에는 사당이 지어졌다. 그후 75년 성역화를 위한 조경사업을 시작해 충무공 탄신일에 고 박정희 대통령이 친필한 충무사라는 현판을 걸었으며 매년 4월 28일 제향(祭享)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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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 11년 (1465)에 수군절도사영으로 승격·개편되었다. 성종 10년(1479) 순천 내례포에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영이 설치된 후부터 전라우도 수군절도사영(약칭 전라우수영)이라 칭하게 되었다. 영역은 원문내 남북 길이 10리, 동서 너비 5리이었다. 영성(營城)은 석축 둘레 3,843척, 높이 11척, 여첩 607개, 호지 3개소가 있었다. 『전라우수영지』(1787)에 의하면 영내의 민호는 620호, 수군 장졸의 병력은 1,085명을 보유하였다. 한편 본 영의 관할구역은 시대에 따라 변화가 있었으나 임란 이후부터 한말에 이르기까지 대체로 나주·영광·함평·무안·영암·해남·진도 등 7관을 속읍으로, 관내의 속진으로는 금갑도·남도포·어란진·고금도·신지도·마도진·목포진·이진진·다경포·법성포·임치진·지도진 ·주도진·금모포·고군산·선산진·흑산도·청산진·가리포 등 19진이었다. 임진왜란 때는 전라우도 연해지역 14관을 관할하였을 만큼 전시에 있어서 본영의 군사적 규모와 역할이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 조선후기 전라우수영의 군비로는 관사로서 내아 제승당 등 26개소의 각종 당청과 중요시설로 선청과 집회소 또는 회의장소로 이용된 12개소의 누정이 있었다. 중요시걸로 선창을 두었는데, 성남문밖에 석축으로 만든 4개소의 항구 시설이었다. 군선으로는 전선 2척·귀선 2척·해골선 ·방골선이 각 1척·병후선 8척 등 모두 17척을 보유, 여기에 사부·화포수·타공·웅고·기라졸 등의 수군을 배치하였다. 수군절도사는 무관 정3품이었다.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 때 본영의 수사 김억추는 통제사 이순신과 더불어 명량대첩 을 거두었는데, 명량은 본영 선창으로부터 불과 5리도 떨어져 있지 않은 급조류의 해협의 천험의 관방을 이룬 곳이다. 우수영의 축성은 설치 위치로는 해안성, 축성재료로는 토성과 석성의 혼합성, 평면형태로 사각형과 원형의 중간형태인 부정형성, 축성방법으로는 편축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성돌의 크기는 일반적으로 아랫쪽은 150㎝ 이상이 되는 것들도 있으나 올라가면서 50㎝에서 30㎝정도로 작아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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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군 삼산면 구림리 산8-1에 위치한 산이다. 두륜산(703m)은 해남의 영봉이며 여덟개의 높고 낮은 연봉으로 이루어진 규모있는 산이다. 북서쪽으로 경사가 완만하고 빼어난 경관을 이루며 산행코스가 험하지 않아 2~3시간 정도면 가련봉 정상에 오를 수 있다. 8개 암봉이 이룬 연꽃형 산세를 이루고 있다. 두륜산은 가련봉(703m)을 비롯해 두륜봉(630m), 고계봉(638m), 노승봉(능허대 685m), 도솔봉(672m), 혈망봉(379m), 향로봉(469m), 연화봉(613m)의 8개 봉우리로 능선을 이루었다. 이 여덟 봉우리는 둥근 원형으로 마치 거인이 남해를 향해 오른손을 모아 든 듯한 형상이다. 오른 손을 가지런히 펴고 엄지를 집게손가락에 붙인 다음 손가락 끝을 당겨 오목하게 물을 받을 듯 만들면 영락없는 두륜산의 지세가 된다. 두륜산은 대둔산이라고도 불렀는데 이는 산이란 뜻의 '듬'에 크다는 뜻의 관형어 '한'이 붙어 한듬→대듬→대둔으로 변한 것으로 풀이한다. 이 때문에 과거 대둔사는 한듬절로 불리기도 했다. 대둔사지에 의하면, 두륜산은 중국 곤륜의 '륜'과 백두산의 '두'자를 따서 두륜산으로 불리다가 나중에 두륜산으로 변했다고 한다. 두륜산행은 여러 고승 대덕의 발자취를 뒤따라 적당히 땀을 흘리며 산봉을 오르면 되는 산행이라기보다는 유유자적한 소요에 가까운 행위가 된다. 사계절 언제 찾아도 좋은 산이기도 하다. 이른 봄은 지천으로 핀 동백, 여름에는 울창한 수림과 맑은 계류가 가을에는 찬란한 단풍이 길손을 맞아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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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마산은 해남군에서도 남단에 치우쳐 긴 암릉으로 솟은 산이다. 두륜산과 대둔산을 거쳐 완도로 연결되는 13번 국도가 지나는 닭골재에 이른 산맥은 둔덕같은 산릉을 넘어서면서 암릉으로 급격히 모습을 바꾼다. 이 암릉은 봉화대가 있는 달마산 정상(불썬봉)을 거쳐 도솔봉(421m)까지 약8㎞에 거쳐 그 기세를 전혀 사그러트리지 않으며 이어진 다음 땅끝 (한반도 육지부 최남단)에 솟은 사자봉(155m)에서야 갈무리하는 것이다. 달마산을 병풍 삼아 서록에 자리잡은 미황사 는 이 산과 깊은 인연을 가지고 있다. 신라 경덕왕 8년(749)인도에서 경전과 불상을 실은 돌배가 사자포구(지금의 갈두상)에 닿자 의조 스님이 100명 향도와 함께 쇠등에 그것을 싣고 가다가 소가 한 번 크게 울면서 누운 자리에 통교사를 짓고 다시 소가 멈춘 곳에 미황사 를 일구었다고 한다. 어여쁜 소가 점지해준 절인 동시에 경전을 봉안한 산이라는 뜻이다. <참고문헌> 전남의 명산 조선일보사 월간산부, 전라남도,199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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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풍산(313.1m)은 해남읍의 지형 옥녀탄금형의 병풍에서 유래된 산이다. 금강산이 선녀라면 호산은 가야금에 해당되고, 병풍산은 병풍에 해당된다. 고산문학 산중신곡의 산실 수정동 , 금쇄동 , 문소동 을 머금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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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자료 제 78호로 지정되어 있는 대둔사는 13대종사와 13대강사를 배출한 우리나라 31본산의 하나로 조선후기 불교 문화권의 산실이었다. 지금은 대한불교 조계종 제 22교구 본사로 해남·목포·영암·무안·신안·진도·완도 등 8개 시군의 말사를 관할한다. 백두산의 영맥이 남으로 뻗어 내려 소백산맥 자락에 지리산을 만들더니 영암의 월출산을 지나 한반도의 최남단에 이르러서 융기한 두륜산 중턱에 이 가람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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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16세기 임안로, 허황 등이 중종의 문정왕후를 폐하려다 실패하여 폐사되거나 귀양을 가게 된 어지러운 시절, 문학인들은 이런 사회풍조에 맞춰 지팡이 하나에 짚신을 걸머지고 팔도의 명산대천을 유랑하며 어지러운 세상과 나라의 앞일을 문장으로 토해내는 유랑문학을 태동시켰으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