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년기
신경과 전문의를 취득한 후에, 신경과 의사로 활동했던 시기입니다.
굶는 아이를 돕다
병원에서 일을 하다 보면, 진료 외의 일에도 신경을 써야 할 때가 있습니다. 레지던트를 마치고 거제도 대우병원에서 일할 때였어요. 병원 근처를 아침부터 밤까지 하루 종일 돌아다니면서 저지래(어지럽히는)를 하는 어린 남매가 있었어요. 아빠는 알코올 중독자이고 엄마는 도망가고, 어린 남매가 방치되어 있는 상태였는데, 아빠는 국가에서 나오는 양육보조금으로 술만 마시고 아이들을 먹이지 않았지요. 그러니 배고픈 남매는 병원 주위를 서성이다가 매점 주인이 주는 과자로 배를 채우거나, 심지어는 매점의 과자를 훔치기도 하고, 입원실에 들어가 환자들의 가방을 뒤지거나, 병원 주차장에 세워둔 승용차 안의 물건을 가져가는 등 병원의 골칫거리였어요. 양치질을 못해서인지 이가 다 썩었더라고요. 그리고 동생 남자 아이는 자동차 무서운 줄 모르고 아무데나 뛰어다니는데, 시골길에는 인도나 횡단보도가 없고, 자동차들이 빨리 달리는데, 간혹 응급실에 교통사고로 실려 오는 또래의 아이들을 보면 그 아이가 아닐까 조마조마 했지요. 간호과장을 통해 동사무소에 전화를 하여 아이들을 보호하는 제도가 없냐고 물었으나, 아이들이 집을 떠나지 않겠다고 하면 법적으로 아이를 부모에게 떼어 놓을 방법이 없다고 하여서 정말 답답하였습니다. 그때가 2002년이었는데, 그 이후에도 아동을 보호하는 법이 썩 좋아지는 것 같지는 않아 안타깝습니다. 병원의 과장 회의에서, 병원이 병을 치료하는 곳인데, 아이 끼니 하나 못 챙겨줘서 될 일인가 하면서, 병원 식당에서 그 아이들 끼니를 챙겨 주면 좋겠다고 제안을 하여 동의를 받았습니다. 그 이후로는 아이들을 병원식당에 오라고 하였고 영양사가 아이들에게 식반을 갖다 주게 되었습니다. 지금 그 아이들은 잘 컸는지, 그리고 충치 때문에 뾰족하게 뿌리만 남아있던 유치들이 빠지고 건강한 영구치가 돋아났는지 궁금하네요.
개업 의사가 논문을 쓰다니
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시곤 하세요. “개업 의사는 환자 잘 보는 요령을 연구해야지, 교수도 아닌데 쓸데없이 책이나 논문을 쓰는 거냐?” 친구들도 이렇게 말하고 합니다. “이런데 시간 투자하지 말고 쉬면서 돈 버는 연구나 해라.” 여기에 어떻게 대답할지 모르겠어요. 저는 남들이 한 번 하는 레지던트(전공의)를 두 번 했습니다. 응급의학과 전공의를 2년 하고, 미국에 2년 있다가, 신경과 전공의를 4년 했어요. 의대 6년, 인턴 1년, 군복무 3년, 레지던트 두 번에 8년, 이렇게 꼬박 18년을 지나서 신경과 전문의가 되었으니, 군대를 가지 않은 동료들보다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거제도 대우병원을 그만둔 후에는 부산의 삼세한방병원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2003년도였습니다. 양·한방 협진병원이었는데 한방에 대해 마음이 열리는 계기가 되었어요. 이 시기에 『초음파 뇌혈류 검사』라는 책도 썼지요. 그 다음해에 가족이 있는 대구로 와서 요양병원에 6개월 정도 일하다가, 오희종 신경과의 오 원장님의 초청을 받아 그곳의 부원장으로 일하게 되었는데, 여기서의 경험 덕분에 제가 개원하여 지금까지 지내온 것 같습니다. 오희종 신경과에서 일하는 동안 어지럼증에 대한 논문을 두 편 써서, 라는 학술지에 실렸는데, 비교적 수준이 높은 학술지입니다. 오희종 원장님의 자료와 서울대 김지수 교수님의 지도가 바탕이 되었고, 제가 미국에서 지내면서 익힌 영어도 도움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시작하여 현재까지 책과 논문을 몇 권 내게 되었습니다.
도쿄 게이오 대학병원 신경과를 방문하다.
부산에 근무할 때였어요. 2003년경이었던가요. 휴가 때 일본의 의과대학을 둘러보고 싶다는 생각에 일본의 여러 대학병원에 이메일을 보냈지요. 그 가운데 도쿄에 있는 ‘게이오 대학병원’의 타나하시 교수님으로부터 연락이 와서 가게 되었고, 친절하게 대학병원을 둘러볼 수 있었어요. 놀랐던 것은 교수님들의 방이 굉장히 좁다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잠수함에 들어온 느낌이랄까. 책상들은 철제 앵글로 만들어져 있는데, 독서실 책상처럼 작은 스탠드가 있고, 그 위에 책꽂이가 연결되어 천장까지 닿아 있었습니다. 책상이 작아서인지 모두 노트북 PC를 사용하더라고요. 그렇게 좁은 방에 7명의 교수님들의 자리가 있다는 게 놀라왔습니다. 교수님 중 한 분이 먼저 자신의 연구실을 보여주면서 1시간 정도 저와 이야기를 나눈 후에, 그 다음 교수님 방으로 안내하고, 그렇게 해서 모든 연구실을 돌아보고, 점심시간에는 그분들과 구내식당에서 식사를 하였어요. 놀랐던 것은 그들의 연구실도 모두 좁은 방이었고, 거기서 살아있는 쥐의 경동맥을 연구하는 등, 실험기구들도 모두 작고 정밀하여서, 정말이지 이렇게 좁은 공간에서 조그마한 기구들을 사용하는데도 그렇게 훌륭한 연구를 하는 게 존경스러웠습니다. 그리고는 일 년 후에 『초음파 뇌혈류 검사』라는 책을 쓰고, 타나하시 선생님께 메일을 보내서 일본에 가게 되면 ‘게이오 대학병원’에서 이와 관련된 강의를 하고 싶다 하니, 그렇게 하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여름 휴가 때 그 병원에서 강연을 했는데, 병원의 스즈키 과장님께서 오만 엔을 강사료로 주셨어요. 그날 저녁 타나하시 선생님께서 저희 가족에게 좋은 식사를 대접했는데, 선생님께서 쿠폰을 꺼내시는 것을 언뜻 보니 음식가격이 1인당 1만 엔이었던 것 같았어요. 일식은 양이 적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그날은 음식이 너무 많아서, 호텔에 돌아와서 아무리 기다려도 배가 꺼지지 않아 가족 모두 배탈이 날 정도였습니다.(웃음)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그렇게 대접받을 만한 사람이 아닌데, 혹시 게이오 대학 측에서 저를 아주 대단한 학자로 착각하고, 비싼 강의료와 비싼 음식을 대접하지 않았을까 생각하니 미안해서 몸 둘 바를 모르겠더라고요. 그래서 언젠가 다시 만나면 선물을 드려야겠다고 했는데, 마침 몇 년 후에 한일 뇌졸중 학회에 타나하시 선생님이 오신다기에, 인삼 선물세트를 준비해서 드렸습니다.
욕창치료에 관심을 가지다
사람들이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는 욕창치료에 관심을 가지기 된 건, 제가 요양병원에서 6개월 근무할 때, 굳이 소독을 하지 않아도 되는 환부에 소독을 하고, 매일 하지 않아야 하는 곳에 매일 드레싱을 하는 것이 오히려 치류를 방해한다는 걸 알게 되면서 부터였습니다. 욕창을 치료하면서 증례를 모아서 사진과 함께 편집하여 『욕창의 비수술적 치료』를 출간했어요. 관심이 적은 영역이고 더욱이 영어로 쓰였으니 한 권도 팔지 못했어요. 공짜로 나눠주다가 아직도 저의 책장에 몇 권 남아있습니다. 그 때부터 욕창에 대한 관심이 많아서, 휴가 때 『초음파 뇌혈류 검사』 발표를 위해 도쿄에 갔을 때, 시내 서점에서 욕창관련 서적들을 몇 권 샀습니다. 역시 일본은 우리가 관심을 가지지 않는 욕창에 대해서도 잘 정리된 책이 많더라고요. 저자들은 주로 간호사들이었어요. 이걸 보고 한국에서 몇몇 대학교의 간호 과장님들과 연락을 했었는데, 진전이 없었어요. 욕창을 비롯한 상처에 대한 치료에 대해서는 아직도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채, 값비싼 드레싱 재료들은 많이 시판되고 있습니다. 상처 치료의 원리를 알면 그런 비싼 재료가 아니어도 상처를 잘 치료할 수 있거든요. 자본주의에서 돈으로 환원되지 않는 좋은 정보들은 빛을 못 보는 것 같아요.
합기도 3단
아주대병원에서의 레지던트 3년차 시절에 시간적 여유가 조금 있어서 병원 근처의 합기도 도장에 다니게 되었어요. 제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다는 게 좋았어요. 레지던트를 마치고 부산 ‘삼세한방병원’에서 일하면서 가까운 도장에서 합기도를 계속 배웠어요. 처음에 배운 곳이 대한합기도협회에 속한 도장이었기에, 여기서도 같은 협회에 속한 도장에 계속 다니면서 1단을 땄어요. 한번은 환자의 상태가 나빠져서 ‘부산대병원’으로 이송하려 하는데, 멀리서 왔다는 사위가 와서 시비를 걸면서 자기와 한판 붙자고 하던 적도 있었어요. 진료실 앞에 붙어있는 저의 경력에 합기도 1단이라는 걸 보고 그렇게 한 거죠. 대구에 직장을 옮겨와서도 같은 협회의 도장에서 합기도를 계속해서 3단까지 땄어요. 의사들도 스스로를 보호하려면 운동을 하는 사람이란 걸 보여주는 게 필요한 것 같아요. 합기도 보급이 많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 동료 의사나 직원들에게 홍보를 했죠. 사람들은 저의 마르고 빈약한 몸집을 보고, 많이 먹고 운동 좀 해라 하다가, 합기도 3단이라고 하면, 표정을 바꾸면서, 아하 그러고 보니 마치 도사 같이 보인다, 라고 합니다.(웃음)
의사라는 직업은 위험한 직업입니다. 몇 년 전에 3년 연속으로 비뇨기과 의사들이 해마다 한 명씩 환자의 칼부림에 목숨을 잃었던 적이 있는데, 그 때 이웃에 개원한 비뇨기과 선생님이 속성으로 합기도 호신술을 배우고 싶다 하여, 저의 도장에서 함께 수련한 적이 있습니다. 특히 칼을 막는 법을 많이 배웠어요. 저는 의원 대기실에, 제가 합기도복을 입고 자세를 잡은 사진이 실린 신문을 붙여놓았는데, 그래서 그런지, 폭력사건이 없었어요. ‘대구광역시 생활체육 합기도 연합회’ 회장을 맡은 적이 있는데, 이 때 말을 함부로 하면 안 되겠구나 하는 것을 배웠어요. 무심코 뱉은 말 중에서 자기에게 유리한 말만 골라서 트집을 잡는 상대가 있기 마련이죠. 단체를 대표하는 자리에 있는 사람일수록 말을 신중하게 해야 한다는 것을 느꼈지요. 단체 구성원 사이에서 갈등도 많았는데, 서로 간의 이익이 걸린 문제는 아무리 노력해도 화해나 조정이 어려워서, 성과가 전혀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국회의원이나 시의원 같은 정치가들은 참 힘들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죠. 많은 분들이 국회의원이나 시의원에게 주는 월급이 아깝다고 하는데, 꼭 그렇지는 않은 것 같아요. 불같은 마음의 사십대와는 달리 나이가 드니 마음을 다스리는 요령도 생겼어요. 화를 내는 그들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이해를 하게 되었어요. 나이가 들면 모서리가 닳는 거 같아요. 이제 제 나이는 지천명이니 하늘의 명령에 귀를 기울여야죠.
논문을 통해 만난 외국인
제가 이명과 어지럼에 관한 리뷰 논문을 각각 한 편씩 썼는데, 이것을 인연으로 알게 된 외국인들이 있습니다. 제가 휴가차 외국에 갈 때는, 인터넷으로 그곳에 있는 의사를 검색하여 이메일을 보내 방문의사를 타진하고, 휴가 일정 중에 그 곳 의사를 방문하곤 했습니다. 파리의 퐁피두 병원의 이비인후과 의사인 Rondero를 방문했는데, 그가 말하기를 바로 전날에 어떤 이명 환자가, 제가 쓴 논문을 가지고 자기에게 보여주었다고 해서 으쓱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인터넷으로 이명을 검색하면 저의 논문 전문을 볼 수 있습니다. 한편, 제가 쓴 전정재활치료에 관한 리뷰 논문을 보고, 자신의 대구 방문 일정 중에 저의 의원을 찾아온 미국의 저명한 학자도 있었습니다. 피츠버그 대학의 Whitney 교수로, 아주 큰 몸집의 금발의 중년 여성이었습니다. 그 때는 저의 의원이 60여 평의 작은 장소일 때여서 컴퓨터 화면에 나오는 동영상 들 외에는 보여줄 게 없었어요. 큰 운동센터가 있을 것이라고 기대를 하고 왔는데, 그게 아니어서 실망을 하지 않았나 싶었습니다. 또한, 제가 쓴 『어지럼과 이명 그림으로 보다』 책을 보고, 방문한 분들도 몇 분 계셨어요. 책에는 제가 상상으로 그린 전정재활운동센터가 실려 있는데, 아마 이걸 보려고 방문하셨다가 실망하셨던 건 아닌지 염려되었습니다.
발란스 운동센터
어지럼 환자들을 운동으로 치료하려면 넓은 장소가 필요한데, 주위의 병원이나 피트니스 센터와 협력을 하려 하였으나 실패했습니다. 병원과의 협력에 대해서는 법적인 제도가 없어서 실패했고, 일반 피트니스 센터에서는 건강한 사람이 아니면 받아주지 않아서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제가 위험부담을 앉고 투자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리스크를 안아야 발전이 있잖아요. 2017년 10월에 의원을 넓은 곳으로 옮기고 장비와 인원을 증가시키니, 내원객이 늘어서 의원에 활기가 더해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는 것은 직원들의 공로가 큽니다. 이런 에너지를 바탕으로 ‘발란스 운동센터’를 만들어 2018년 4월부터 운용할 계획입니다. 여기서는 우수한 물리치료사 분들이 바탕이 되어, 우리나라에서는 비교적 선도적으로 전정재활치료 방법을 연구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