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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산사모산악회 원문보기 글쓴이: 선경나라
웅석봉과 감투봉 사이에 있는., 달뜨기능선.
국군의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피해 빨치산들이 지리산 치밭목이나 조개골에 숨겨진 비트에서
이 능선 위로 차오르는 달을 보며 고향과 가족생각에 가슴 앓았다하여 <<달뜨기 능선>>이라 불리우던 곳이다. 이병주의 대하소설 <지리산> 이태의 <남부군>의 달뜨기 능선
토벌대를 피해 마지막으로 선택해야 했던 지리산 그들이 인민해방과 이상향을 꿈꾸었던 달뜨기능선.
<진달래>
<이방산 정상에서 바라본 지리산>
<상사바위>
<등산로에 핀 야생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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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일보에서 발췌 편집
치밭목 산장.
경상남도 산청군 삼장면에 위치한 치밭목능선,
치밭목 산장 동쪽에 있는 비둘기봉(1485m)에서
덕천강변 대포리까지 16km에 걸친 남동쪽 지능선
이 능선 상층부는 지리산 권역으로 편입이 되었지만
아직도 미개발 지역이라 산꾼들 호기심을 부추기는 곳,
써리봉(1642m)에 가려 천왕봉(1915m)을 볼 수 없어도,
동부 지리산의 남쪽사면을 고스란히 조망할 수 있는 곳.
무명봉(1018.2m) 조망은 막힘이 없어, 써리봉을 정점으로
시계 방향으로 시선 돌리면 밤머리재까지 이어진 백두대간
그리고, 웅석봉의 달뜨기 능선이 한폭의 그림처럼 다가온다.
맑은날 1018.2m봉에서 바라본, 비둘기봉..장당골..
남쪽의 덕천강 건너 하동쪽 산하에서 시천면의 주산까지.
그리고, 구곡산(961m)에서 써리봉까지 치오르는 황금능선,
발걸음 아래로는 무재치기에서 발원한 12km 거리의 장당골,
그 사이엔 내원사능선과 헤일 수 없이 많은 지능선과 지계곡들.
어느 한 곳도 눈길을 뗄 수 없는 비경이라 넋을 놓아야 할 정도.
장당골, 대원사계곡 물은 덕천강, 진양호, 경호강를 거쳐
진주 남강 물길따라 낙동강으로 모여 부산 앞바다까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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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무들! 저기가 '달뜨기능선'이요.
이제 우리는 지리산에 당도한 것이요!"
달뜨기 능선은 여순 사건 패잔병이 들어선 지리산 초입
남부군은 기나 긴 여로를 마치고 종착지 지리산에 잠입.
1천 4백 눈동자가 연봉을 응시하며 일시에 탄성 "아아!"
'지리산에 가면 살 길이 열린다' - 이헌상
마침내 그들은 살길을 찾아 지리산에 당도한 것.
덕유산, 백운산 거쳐 지리산으로 숨어든 남부군.
인민군 패잔병, 좌익세력, 여순 사건 동조자 등등.
1950년 6.25 당시 낙동강까지 남침했던 인민군.
UN군의 원산폭격과 인천 상륙작전으로 퇴각한다.
그후 북으로 도주하던 남부군들에게 가로막힌 38선.
'최후의 퇴로' 태백산맥 마저 차단되자 다시 남하.
남부군은 여순사건 패잔병과 합류해 살길찾아 방황.
퇴로가 차단된 그들에게 마지막 숨을 곳은 지리산 뿐.
여순 반란사건은 지리산 '반란의 역사' 불씨.
....................여순 반란 사건............................
1948년 10월 19일 전남 여수 국군 제14연대 반란 사건.
제주 4.3사태 진압명령을 거부하고 순천 여수 무력 점거
지창수 김지회 등 좌익계 군인들이 제주도 출동을 거부하고
친일파 처단, 조국통일 등을 내걸고 반란을 일으킨 사건이다.
이들은 19일 저녁 8시경 무기고와 탄약고를 점령하고
비상나팔을 불어 14연대 병력을 집결시켜 반란에 동참
곧 경찰서와 관공서를 장악하고 여수 순천을 장악한다.
이어 광양·곡성·구례·벌교·고흥 등 전남을 장악
초기 진압작전에서 실패한 정부는 여순지구에 계엄령
광주에 설치한 반군 토벌 전투사령부를 투입 소탕작전.
제2 여단, 제5 여단 예하의 5개 연대를 투입한 정부군
미국 군사고문단의 지휘 아래 장갑차·박격포 등을 동원
여순지역 탈환에 성공한 3개월 신생 정부에게는 큰 충격
이승만 정부는 이 사건을 계기로 각계각층 반대에도 불구
국가보안법 제정, 정치적 반대세력에 대한 무제한적인 탄압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 좌익계와 광복군계를 포함해 제거한다.
그 바람에 온건 민족주의 계통의 지식인들.
막스 레닌 이데올로기에 심취한 남녀 대학생들.
북한 공산주의 세력에게 이용 당해 반정부 활동.
그러나, 이승만 정부는 강력한 반공국가를 구축
미국은 여순반란 사건 이후 군사지원을 훨씬 강화.
주한 미군철수를 1949년 6월 이후로 연기하게 된다.
1950. 6.25 당시 낙동강까지 남침한 인민군.
지리산 일대의 여순반란 사건 세력들과 합류.
남한은 공산주의 적화통일이 곧 되는 듯 했다.
미공군 B -29 원산폭격, 맥아더 인천상륙작전
UN군 1951.9.18 서울 수복후 인민군 배후공격.
전세가 역전되자 인민군은 38선 이북으로 후퇴.
공산주의 세력에 동조했던 여순반란 세력.
지리산 속으로 다시 숨어들어 빨치산 투쟁.
1963년 11월 남장 여인 정순덕 외 2인 체포.
'마지막 남부군 체포로 반란의 역사를 마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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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지리산으로 잠입한 그들은 모두 토벌 당한다.
반세기 전 산속에서 얼어죽고 굶어죽고 맞아죽은 그들
달뜨기 능선이 위치한 곳은 '곰바우산' 웅석봉(1099m).
웅석봉은 경남 산청 한가운데이자
백두대간 종주가 끝나는 지점이다.
지리산에서 달뜨기 능선을 보면서 달바라기를 했을 그들
그들이 달뜨기능선을 보며 달바라기 한 전망대가 치밭목.
남부군의 꿈과 한이 서려있던 전망대가 지금의 치밭목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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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평리에서 대원사를 거쳐 조개골을 오르면, 하봉과 중봉 사이.
하봉과 중봉 잇는 능선, 갈림길 왼쪽이 치밭목산장으로 가는 길.
천왕봉으로 이어지는 오솔길로 걷다보면 아담한 산장이 나타난다.
고향 못 간 남부군들이 명명한..'달뜨기 능선.'
조개골과 쑥밭재 언저리에 마련한 남부군 비밀 아지트.
그 건너편 웅석봉 남쪽능선 너머로 떠오르는 처연한 달.
그 달 아래 두고 온 고향 식구들을 그리워 했을 빨치산들.
치밭목산장 약수터는 달뜨기능선의 전망대.
달뜨기능선 위로 보름달이 두둥실 떠오르는 밤.
교교한 달빛 아래 졸졸 흐르는 샘물 소리가 정겹다.
이 약수터가 있어 치밭목 산장이 들어선듯.
충분히 땀 씻을 만큼 수량이 풍부한 약수터.
치밭목 산장 주위에서는., 유일한 약수터이다.
38선 이남 유격대였던 덕유산의 남부군들
살 길을 찾아 이헌상을 따라 지리산에 잠입.
지리산 동부능선에서 최후까지 빨치산 투쟁.
고향이 그리워도 못가는 신세였던 남부군.
보름 밤이면 앞을 다투어 뛰어 올랐다는 곳.
달맞이하며 고향이 그리웠던 마음을 달랬던듯.
그곳 첩첩산중 속에 파묻혀있는., 치밭목 산장.
사방을 둘러봐도 보이는 것은 오직 원시림과 하늘.
써레봉 중봉 하봉에 둘러싸여 산새들 지저귐 소리뿐.
간혹, 비바람 소리 만이 정적을 깨는 산장.
도시문명과 단절된채 태고의 숨결 만이 존재하는 곳이다.
짙은 안개, 비바람, 혹한, 울창한 침엽수림과 취나물 군락.
마치 바다 한가운데 외딴 섬에 동떨어져있는 등대와 같은 곳.
무인고도 같은 산장에서는 낯선 산꾼끼리라도 반갑다.
치밭목산장에서 가장 반가운 사람은 무뚝뚝한 산장지기.
고무신 등산복 차림인 그는 사막 속 오아시스와 같은 존재.
치밭목산장에 들어와 피와 땀과 젊음을 다 받친 민병태 씨.
전기도 전화도 없이 버너 등불로 어둠을 밝혔던 치밭목 산장.
이곳에서 혼자 살며 수많은 조난객 목숨을 구해냈던 산장지기.
'단지 지리산이 좋다' 는 이유 만으로 지리산의 일부가 된., 민 병태.
동아대학교를 졸업한 그는 입영 영장을 움켜쥔 채, 토왕성 빙폭등반.
87. 12. 14 에 산장 개장후 부인 정연숙씨와 지영 지현 두 아들은 진주.
'신혼 6개월 만에 16년간 방치된 무인산장에 들어온 그.'
홀로, 지리산 제 2 의 폭포 '무재치기'를 보며 산장생활에 만족해한다.
마차푸차례 산악회의 97년도 인도 히말라야 케다르나스 원정대장인 그.
아직도 산악회 활동에 꾸준한 그의 소박한 바램은 가족들의 경제적 안정.
'이젠 발전기로 전기불이 켜지고 2004년 보수로 달라진 산장.'
문명의 이기와 동떨어진 <치밭목 산장>에서의 낭만적인 밤.
대원사 들머리로 지리산 종주하는 산악인들 즐겨 찾는 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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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밭목은 '취나물 밭 길목'의 줄임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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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산길에는 무재치기 폭포 코스보다 산장 코스가 안전하다.
이곳에서 일박 후에 중봉에서 맞는 일출은 환상적인 아름다움.
치밭목 산장은 전화 난청지역이라 사전예약을 할 수 없는 것이 흠.
일박 1人當 5,000 원.
수용인원 약 50~60 명.
민간 위탁산장이라 맥주 판매.
지리산에서 맥주를 파는 산장은 <피아골, 뱀사골, 연하천, 치밭목>
지리산 종주를 하며 치밭목 산장에서 첫날 밤을 보내면 술이 그립다.
때로는 이곳에서 술로 밤을 지새우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기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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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목마와 숙녀. - 박 인 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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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어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그저 방울소리만 울리며
가을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볍게 부서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 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 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 작가의 눈을 바라다 보아야 한다.
등대 ...
불이 보이지 않아도
그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그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어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 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민병태
산청군 생초 출생, 거창에서 중고등학교 졸업, 부산에서 대학졸업.
거창 무심(無心)산악회에서 활동하다 진주 마차푸차레 산악회 가입
1997년 인도 가르왈 히말라야 케다르나스 원정대 원정대장으로 참여
1986년 3월 정연숙씨를 만나 결혼
6개월만에 치밭목 산장지기를 자원.
2005년 현재 그의 나이 52세!
무뚝뚝한 외모에 따듯한 인간미.
“산이 좋아 막무가내로 지리산에 들어오긴 했지만
신혼에 부인을 남겨두고 오는 것이 가장 안타까웠고
애들 태어날 때도 곁에 있지 못했기에 늘 미안했지요.”
“이제는 아내가 어느 정도 이해를 해주고 있지만
예전에 산에서 내려와 집에 다녀오면 어린 아이들이
가지 말라고 어리광 부렸을 때 가장 가슴이 아팠지요.”
민병태 씨는 보통 키에 까무잡잡한 피부, 퉁명한 말투.
그러나 그 순박하고 부담없고 성격에 푹 빠져 들고 만다.
민병태씨가 치밭목 산장과 인연을 맺은 것은 지난 86년부터.
1971년 정부는 전국 국립공원에 산장건립 계획 방안을 세웠다.
당시 치밭목 산장은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산장으로 방치되었다.
특히 치밭목을 중심으로 인근 써레봉에서 동남쪽으로 구곡산까지
황금능선은 지리산의 마지막 남부군 정순덕이 최후까지 활동한 곳.
1971년에 세워진 치밭목산장은 16년간 방치되며 쓰레기 더미로 둔갑.
등산객들의 반감으로 산장을 폐쇄하자는 여론이 일어났던 곳이었다.
국립공원협회 경남지부에서 산장 관리를 맡아달란 제의를 받았던, 그.
민병태 씨는 진주 마차푸차레 산악회 도움을 받아 대대적인 보수작업
1986년 9월 유평리, 새재, 무재치기폭포를 거쳐 이곳에 정착.
써레봉과 중봉에 일제 때 벌목한 나무와 방치한 철도침목 건축재
참나무 원목과 고사목으로 산장의 침상과 주방 조리시설을 만들었다.
산장 뜰에는 7개의 식탁과 의자를 만들어 아늑한 산장을 만들어 냈다.
'2004년 보수로 사라진.. 치밭목 산장의 옛 정취.'
중봉부터 무재치기 폭포까지 8㎞ 등산로 주변 쓰레기를 수거.
안전산행을 위한 나무 사다리를 만들고 등산로를 새로 다듬었다.
1986년부터 3년 간 등산로 개척과 조난 등산객들에 대한 구조활동.
경관이 뛰어난 써레봉 4㎞ 위험구간 새 등산로도 개척.
예전에 치밭목 -천왕봉 코스는 써레봉 암릉을 거치는 8㎞ 외길.
치밭목 산장 뒤에 있는 샘터에서 천왕봉 7 km 새 코스를 개척했다.
거리도 1km 단축되지만, 산책로 같고 주위 풍경도 좋은 등산로이다.
'해발 1,450m에서 치밭목 산장지기의 22년 집념.'
써레봉, 중봉, 하봉의 원시림은 자연환경이 잘 보존되었다.
1986년 이후부터 현재까지 수백명의 조난객들도 구조했다.
1997년 부산고신대생 4명 인명구조가 그의 대표적인 활동상.
폭우로 4명이 무재치기폭포 인근에서 길을 잃었을 때 극적 구조.
지금까지 수백여명 조난자들을 구조해 ‘훌륭한 도민상’을 받았다.
이곳에서 1박하며 그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산행의 즐거움.
철 없는 등산객이 잠든 밤에 그 젖은 운동화까지 말려주는 심성.
청소년들 행여 다칠까 혼내고도 동상 걸릴까 배려해주는 속마음.
치밭목 산장지기 그는, 무인고도 등대지기와 같은 지리산 지킴이.
무뚝뚝한듯 하여도 따듯한 마음씨.
그가 있어 그곳 찾는 발길이 가볍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