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초등학생때 외가댁 할머니의 버선을 처음 보았다. 그때만 해도 할머니들이 버선을 신고 고무신을 신고 다니시는
모습을 흔히 볼수 있었는데 한번은 호기심으로 할머니의 버선을 신어보았다..
그런데 이 버선이 양말과는 달리 신축성이 많이 떨어지고 발보다 작아 신는것부터가 곤혹스러웠다. 몇번의 시도끝에
발을 버선 속에 넣을 수 있었는데, 일단 신어보니 끝(버선코)이 뾰족하게 되어있어 그때 어린 내가 신어도 불편하였는데,
왜 끝이 뾰족하고 들어가는 부분(버선목)보다 끝이 좁은 불편한 버선을 신고 다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모양이 이쁘기 때문에 신고 다닌다는 할머니의 말씀은 납득이 가지를 않았다.
조선시대 기록을 보면 여인네들이 수십km내지 수백km를 걸어다닌 기록이 보이는데 신사임당이 강릉의 친정 어머니를
뵙고 다시 한양으로 가기위해 대관령 고개를 넘어 가다가 오죽헌에서 친정어머니를 걱정하며 읊은 시가 <사친>이다
신사임당이 말을타고 대관령 고개를 넘었다는 기록은 그 어디서도 보이지않으며 대관령 고개를 걸어다녔음은 분명한데,
속이 좁고 발의 형태에도 맞지않는 불편한 버선에다 고무신 차림으로 험한 대관령 고개를 넘어서 한양까지 수백km를
걸어다녔다는 것이 상상이 되는가? 게다가 그때만 해도 산에는 산적이 들끓었을테인데 연약한 아녀자가 그런 행색으로
산적을 만날 위험까지 무릎쓰고 대관령 고개를 넘어갔다니??
해발고도 832미터에 굴곡이 심하고 강풍과 안개가 짙어 난코스로 유명한 대관령 99고개를 차로 넘어가도 아찔하고 눈이라도 오게되면 그곳을 지나가기는 사실상 불가능할 것인데 신사임당은 그런 차림으로 대관령 고개를 넘나드셨다고한다.
천리행군을 하는 특전사들도 발보다 작고 체형에도 맞지않는 버선에 고무신 차림으로 험한 대관령 고개를 넘어 행군을 하다가는 수십km를 못가서 포기하고 말지도 모를 일인데 연약한 조선 여인네가 그런 차림으로 한달 이상을 수백km를 걸어다녔다니 신사임당은 원더우먼이라도 되신단 말인가?
동아시아인의 발모양에 맞지않는 버선은 혹시 서아시아인의 발모양에 맞게 제작된 것은 아닐까라는 의혹이 든다
현 중국인, 반도한국인, 일본인등 동아시아인들은 발폭이 넓고 발등이 높고 발바닥이 평평한데 서양인에 비해 완만한 구형을 이루는데 반해 유럽과 서아시아인들은 발폭이 좁고 발등이 낮고 발바닥은 굴곡이 있으며 발끝이 뾰족하며 삼각형 형태로 생겼다
구두를 신어도 유럽이나 미제 구두는 발끝이 뾰족해서 발볼이 넓은 동아시아인이 신으면 불편하며 발의 모양 변화나
발건강에도 영향을 미친다.
일본제 축구화 중에서 미즈노라는 유명한 축구화가 있는데 이 축구화는 발볼이 넓은 동시아인의 발의 형태에 맞게 제작
되고 축구화로서의 기능도 뛰어나서 동아시아인들이 선호하는 축구화이다.
버선의 역사를 찾아보니 이미 통일신라시대때부터 버선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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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선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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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래 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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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특유의 것이며 남녀 모두 신었는데, 문헌상으로는 말(襪)·족의(足衣)·족건(足件) 등으로 표현되어 있다. 1527년(조선 중종 22) 최세진(崔世珍)이 쓴 《훈몽자회(訓蒙字會)》에는 보션말이라고 씌어 있는 것으로 그 이전부터 보션이라 불리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처음에는 발을 보호하는 수단으로 보자기 같은 것을 이용하여 감싸던 것이 점차 발달하여 오늘날의 고들목버선에까지 이르렀다. 모양은 끝(버선코)이 뾰족하여 위로 치켜졌고, 들어가는 부분(버선목)에 비해 회목이 조금 좁게 되어 있는데, 버선목의 바느질 눈이 오른쪽으로 된 것은 오른발, 왼쪽으로 된 것은 왼발에 신어 좌우를 구별한다.
종류는 용도에 따라 일반용과 예복용, 형태에 따라 곧은버선(고들목버선)과 누인버선, 만드는 방법에 따라서 홑버선·겹버선·솜버선·누비버선 등이 있다. 그 밖에 어린이용의 타래버선·꽃버선이 있다.
예복용
단국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적의용(翟衣用) 청말(靑襪)을 예로 들어 보면, 보통 버선보다 크고 끈이 버선목 끝에 겹으로 달렸으며 적의의 옷감과 같은 색인 청색 비단으로 안팎이 되어 있다.
또 통일신라 제42대 흥덕왕(興德王) 때의 복식금제(服飾禁制)에 의하면 버선에 끈이 달려 있고 고급비단인 금(錦)·나(羅)·명주·시(絁), 작은 무늬가 있는 능[小紋綾] 및 모직물인 계(罽) 등으로 만들어졌다고 되어 있다. 또한 왕이 종묘와 사직에 제사지낼 때 입는 면복(冕服)에는 적말(赤襪)을, 조복(朝服)에는 백색말을, 왕비가 혼례 때 입는 적의에는 청색말을 신는다고 되어 있다.
일반용
곧은버선은 수눅선이 곧게 내려오다가 버선코만 살짝 올라가고 회목에 여유가 있는 것으로 서울을 중심으로 한 지방에서 주로 신었고 누인버선은 수눅이 누인 것 같은 곡선을 이루며 회목이 꼭 끼이는 것인데, 남쪽과 북쪽 지방에서 신었다.
조선 중기 이전의 실물로 보아 발 모양 위주로 편하게 신었던 것이 김홍도와 신윤복의 풍속도에서 보면 맵시 위주로 변하게 되었다.
맵시를 내기 위해 실제 발 크기보다 작게 만들고 솜을 통통하게 넣어 오이씨 같은 버선의 맵시를 내게 되었다. 색은 주로 흰빛이었고 광목과 무명을 주로 사용했으며 일년 내내 신었는데, 처음에는 솜버선을 삼복더위에도 신다가 홑버선과 겹버선을 신었다. 오늘날에는 양복과 양장을 주로 입고 그에 따라 양말을 신기 때문에 버선의 수요는 점차 줄어들고 있으나 한복에는 새하얀 버선을 곱게 신어야 맵시가 난다.
첫댓글 양말이 나오기 전의 단순한 디자인이 아니었나 합니다. 실용적인 면보단 의식에 주로 신는 폼 같기도 하고요.
글쎄요. 제가 서아시아를 조선으로 생각해서 그런지 조선의 전통문화가 모두 의심스럽습니다
선입관땜에 그렇습니다.
몽골인들의 전통가죽신발(부츠)는 모두 저 버선코 모냥으로 돼어 있습니다...우리내나 중원의 관복 부츠처럼여...
동아시아에서도 아랍권에서도 다 선호하던 에리트들 패션일 뿐입니다.
아랍은 상대적 동북부 알타이의 거란과 몽골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 보이지...아랍이 저 버선의 원조라 보긴 힘겹습니다.
신사임당이 넘으신 그 고갯길의 강릉길은...
중원 고지도들이 수도 없이 나오는 원조 한양인 무한에서 서쪽 동정호 인근의 강릉(江陵)으로 가는 길이였을겁니다.
율곡이 기호학파(畿湖學派)의 거두가 된 것도 무한(武漢)과 동정호 인근의 수도권에서 제자들을 가르쳤기 때문이라 봅니다.
내. 중원 고지도상...한양(무안)과 강릉(江陵)은...양자강 강변길 따라 지척일 뿐인 수도권 지역입니다.
신사임당은 결코 버선,고무신 차림으로 300km이상을 걷지는 못했을겁니다. 불과 30~40m내외일 이라고 생각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