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수필가협회 심포지움 발제 원고 (06.10.12 인천 파라다이스 호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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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적 상상력과 소설적 상상력
이 원 규. 소설가/동국대 문예창작과 겸임교수
1. 다른 장르 문인들의 수필 넘겨다보기
시인, 소설가, 극작가 들은 이따금 수필을 쓰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힌다. 물론 시인이 소설이나 희곡을, 소설가가 시나 희곡을, 극작가가 시나 소설을 쓰고 싶은 욕망도 갖는다. 그러나 대개 희망에 머무르고 말 뿐, 썼다 하더라도 탁월한 작품으로 인정받기는 어렵다. 하지만 수필은 수필 전문작가의 탁월함을 넘어서지는 못하더라도 어느 정도 좋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다. 수필은 고도로 전문화된 양식이 아니고 형식이 자유롭기 때문이다. 수필이 쉽다고 하는 말은 결코 아니다. 좋은 수필을 쓰려면 재능, 수련, 노력, 세 가지가 최고로 집중되어야 한다.
99퍼센트의 재능과 99퍼센트의 훈련과 99퍼센트의 노력이지요. 작가는 자기가 하는 일에 절대로 만족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충분하지 않으니까요. 스스로 알고 있 는 자신의 능력보다 늘 더 높은 목표와 꿈을 지녀야죠.1)
위의 인용은 윌리엄 포크너가 어떻게 해야 좋은 소설을 쓰는가 하는 질문에 답한 말이지만 수필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수필은 난해한 상징과 메타포를 가진 시나, 낯설게 하기를 선택해 이리저리 구성을 꼬아놓은 소설에 비해 쓰기 편하다. 미당 서정주와 박경리는 「질마재 신화」와 「토지」를 쓸 때 에너지가 고갈되어 마루 밑에서 누군가가 부르는, 베개 밑에서 누군가가 속살대는 환청을 들었다. 최근에 타계한 소설가 박영한은 항암치료보다 소설의 길이 더 고통스러웠다고 부인에게 말했다. 수필은 그런 처절한 고통이 따르는 자기 연소까지는 요구하지 않는다. 이런 견해에 대해 수필가들이 불편한 심사를 가질 필요는 없다. 수필은 그런 죽기 살기의 치열함을 요구받지는 않지만 거친 풍파로 가득한 이 시대에 독자에게 따뜻한 온돌방 같은 위안을 주는 역할을, 독자를 잃어가는 두 장르보다도 더 충실히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 소설가, 수필가, 극작가는 무엇인가. 문인이 될 재능을 타고난 자로서 압축 상징화된 말로 읊조리고 싶은 욕망이 강하면 시인, 사건의 과정을 전달하려는 목적이 강하면 소설가, 과정을 재현하려는 욕망이 강하면 극작가, 교술적(敎述的)인 목적이 강하면 수필가가 되는 것이다. 문인의 장르 선택은 다분히 그의 기질에 의해 결정된다. 예술철학자 올드리치는 ‘양식(樣式)은 사람’이라고 한 앙드레 브르통의 말을 빌어 ‘작품은 재료들과 매체의 사용에 의해 완성되는데 그것들의 성격 역시 양식 속에서 드러난다. 그리고 내용 속에 포함된 주제는 양식에 자기 나름의 요구를 제시한다’고 했다.2)
2. 이웃처럼 가까운 수필과 소설
네 개의 문학 장르 중 소설은 수필과 실제적으로 매우 가깝다. 시는 그 관점이 주관적이라는 면에서는 이론상 수필과 가깝지만 깊은 압축과 상징을 품은 운문이기 때문에 실제로는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다. 희곡은 서사를 다루는 측면에서 소설과 인접해 보이지만 공연이라는 재현 단계를 거쳐야 하고 언어예술과 행동예술의 중간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수필은 다른 장르의 문인들이 접근하기 가장 쉽지만 소설가에게 특히 그러하다. 그리고 좋은 소설을 쓸 가능성은 수필가에게 가장 많다. 실증할 만한 작품들도 많다. 중국의 감동적인 수필 주쯔청(朱自淸)의 「아버지의 뒷모습」과 한국 수필의 백미라고 말하는 피천득의 「인연」은 인물, 사건, 배경 등의 소설 구성 요소들이 많고, 소설양식으로서는 가장 쓰기 편하고 읽기 편하다는 1인칭 주인공 시점을 선택하고 있다. 사르트르의 「구토」나 김승옥의 「무진기행」, 최근에 나온 구효서의 수작 「시계가 걸렸던 자리」는 수필의 구조와 가깝다. 그런 작품들은 양쪽 장르에 무수히 많다.
오늘날 인터넷과 영상 매체의 발달은 예술과 문학에도 변화를 요구한다. 예술의 탈 장르, 문학의 탈 장르가 그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수필가와 소설가의 장르 넘나들기는 권유할 이유가 충분하다. 최근 소설가 최시한이 「진지하지만 추상적인, 고상하나 너무 단조로운」이라는 제목의 글을 써서 한국소설의 고지식함에 대해 성찰했는데3) 그것은 한국 수필의 경우에도 해당된다. 따뜻한 온돌방 같은 역할만으로 언제까지나 독자를 사로잡을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수필가들이 소설을 써보는 것은 수필의 외연 확대를 위해서도 필요하다. 특히 장편수필의 발전을 위해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은 소설의 폭을 넓히는데도 기여할 수 있다. 수필가들이 소설가의 수필을 받아들이고 소설가들이 수필가의 소설을 받아들이는 것은 양쪽의 상보적(相補的) 발전을 가져온다.
3. 사실과 허구의 울타리
수필과 소설 사이에는 사실과 허구라는 울타리가 놓여 있다. 수필가들은 삶에 대한 투명한 진정성을 붙잡고 글을 쓰고, 소설가들은 이야기를 꾸며서 하고 싶은 욕망 속에 글을 쓴다. 일반적으로 수필가들이 포용심이 많으며 원만하고, 소설가들 중에 끼를 드러내는 기인(奇人)들이 많은 것도 그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양쪽 다 자신의 길에 만족하지 못한다. 김소운의 글은 그것에 대해 시사한다.
예술의 방법에는 크게 나눠서 두 길이 있다. 진실을 진실 그대로의 위치에 두고 정시 (正視)하고 추구하려는 방법과, 허구의 유리그릇 너머로 왜곡된 가상(假想)을 통해서 하나 의 진실을 발굴하려는 방법이다. (중략) 나 자신의 글이란 것을 돌이켜보면 실로 ‘허구’ 그것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것을 자인하지 않을 수 없다. ‘진실이란 반드시 사실 그대로 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소위 내가 쓴다는 글은 언제나 ‘사실’의 테두리를 벗어 나지 못한다. 목적이 있고, 읽는 대상을 의식하면서 쓰는 글 - 그것이 과연 옳은 글이라 고 할 수 있을는지 의문이다.4)
수필문학의 대가였던 분의 고뇌 섞인 말은 소설을 향한 욕구를 드러내 준다. 그는 수필에 발을 들여놓기 전 시를 썼지만 소설로 가는 울타리를 넘지 않았다.5) 상당히 많은 서사적 수필을 썼음에도 그랬다.
수필가들이 막상 소설을 쓰려 하면 까다로운 구성의 장치에 대한 고심보다는 소설의 생명이라고 볼 수 있는 허구에 대해 ‘이야기를 꾸미는 것은 허위가 아닌가’ 하는 회의에 빠지고 만다. 허구는 상상력에서 잉태된다. 소설가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상상력으로 꾸며대는 이야기만 글로 쓰는 것이 삶의 진정성을 갖지 못한 채 사는 것 같은 자의식 때문에, 처음부터 끝까지 진실의 모자를 쓰고 가는 수필을 그리워한다. 그러나 막상 수필을 써보면 마치 자신의 죄와 비밀을 신부(神父)에게 고해하는 듯한 곤혹감을 느낀다. 스티븐 킹의 말처럼 소설가는 상상력이 충만한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족속이기 때문이다.6)
수필문학계에는 허구를 일절 인정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과, 예술적 감동을 위해서는 최소한의 허구를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사실 그런 논란은 훈고적인 인습으로 치부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문학이란 폭이 넓고 깊음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상상력이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수필가는 단순한 사실의 기록자가 아니라 창조적 예술가이기 때문이다. 결국 수필가는 비교적 진폭이 좁은 상상력을 붙잡고 살고, 소설가는 방랑자 같은 무한한 진폭의 상상력을 붙잡고 살고 있는 것이다. 수필가와 소설가가 진실과 상상력이라는 울타리를 유연하게 넘어설 때 양쪽 장르는 더욱 풍성해질 것이다.
1)William Faulkner 외, 안정효 역, [나의 삶 나의 문학], 책세상, p. 124.
2)V. C. Aldrich, 김문환 역, [예술철학], 현암사, p. 109.
3)[문학판], 2006년 가을호.
4)김소운, 「사실과 허구를 통한 진실한 삶의 표현」,(윤재천 [수필작법론], 인터넷 Google 웹사이트에
서 재인용)
5)김소운, 자서전『天の涯に生くるとも』(하늘 끝에 산다 해도) 권말 연보, 新潮社, 1983, 東京. 김소
운은 구전민요 수집을 통한 동요와 동시에서 출발해 1933년 창간 [조선문학]에 시를 발표했으나 수
필에 주력했고 소설은 한 편도 쓰지 않았다.
6)Steven King, 김진준 역, [유혹하는 글쓰기], 김영사, p. 1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