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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뭐 있어?(내 손으로 너를 묻고 싶다.)
내 친구 중에 음력 보름 날 밤이면 나를 찾는 곰삭은 친구가 있다. 그것도 보름달이 동쪽 하늘을 밝히는 시각이면 어김이 없다. 돌아보면 이미 30여년의 세월이 흘렀으나, 지루하거나 식상해 본 적이 없다. 도리어 친구와 맛있게 술잔을 기우리며 회포를 풀기 위해, 나답지 않게 며칠 전부터 절주를 한다.
친구는 지금까지 나에게 인생을 논 한 적도, 이렇게 살아야 한다느니 저래야 한다느니 틀을 만든 적도, 또 흘러갔거나 생존하는 알량한 유자명자들이 수 없이 처 놓은 그물에 갇혀 뽁짝거리거나 나부대지도 않는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친구가 무식하거나 결코 외고집 탓만이 아니란 걸. 적은그릇에 배운 것을 다 담지 못해, 그저 흘러내리는 혹자보다 그가 많은 것을 품고 있다는 것을. 나는 옛적부터 알고 있었다.
친구는 문자를 쓰거나, 힘을 주거나, 더구나 젠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도리어 맨 살을 드러낸 채, 머리를 텅 비우고, 철없는 시절로 회귀하려고 안달 하는 듯했다. 친구는 인생의 간을 알았다. 그러기에 항상 힘을 빼고 살았다. 나는 간혹 그런 그의 머리를 두드리면, 깊은 산속 절간의 풍경소리가 들릴 것만 같은 환상에 빠지고는 한다. 그렇다고 내가 그의 머리를 두드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저 같이 있는 것만으로 족했다.
그냥 편하니까.
그러고 보니 친구가 자기주장이 전연 없는 맨 탕은 아닌가 보다. 30년 전 어느 보름날 밤. 친구가 소주병을 꾀 차고 나를 찾았다. 벙벙 하는 내 멱살을 끌며 일갈했다.
“짜싸, 우리 몸띠 중요 기관인 肺·心臟·腎臟·胃·大腸. 뭉뚱그리면 오장육부 모두에 달月자가 들어가 있는 기라. 그러이 건강을 위해선 일광욕보다 월광욕을 해야 하는 기다. 떡대만 큰 놈아, 이제 알 것나?”
“핑계 없는 무덤이 있던가?”
어쨌든 일광욕이건 월광욕이건 술자리하면 사족을 못쓰는 나 아닌가. 게다가 통하는 친구와의 술자리. 나는 입가로 침이 질질 흘러 내렸다.
그날도, 그러니 작년 9월 보름날 밤이었다.
우리 동네에 있는 상리 공원에서 우리 둘은 소주잔을 기울이며 쓰잘 데 없는, 그야말로 영양가 없는 이바구를 시부렁거리다 낄낄대며 달빛을 길어 올리고 있었다. 그때 친구가 팔꿈치로 내 옆구리를 쿡 찌르며 눈짓을 했다. 달빛이 흐드러진 소나무 둥치 잡목 그늘에 짐승의 두 눈깔이 말끄러미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식겁 할 뻔하였다. 들 고양이인가? 나는 안주로 먹던 육포 한 조각을 던져 주었다. 그러나 놈은 움쩍도 하지 않았다. 허나 눈은 육포에 박혀 있었다.
“셋! 안으로 물고 간다, 에 건다. 석잔. 니는?”
친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놈은 솔개 병아리 채듯 육포를 물고는 숲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는 금방 고개를 다시 내밀었다. 친구가 육포를 던져 주었다. 놈은 이번에는 육포를 물고 숲으로 들어가지 않고 그 자리에서 해치웠다. 기걸이 든 걸로 보아 때를 몇 번 걸러 배가 등짝에 붙은 것 같았다. 나는 육포를 넉넉하게 던져 주었다. 놈은 눈 깜짝 새 육포를 개 눈 감추듯 하고는, 이제는 겁도 없이 우리 곁으로 자박자박 걸어왔다.
“고양이가 아이네?”
그랬다. 놈은 개였다. 그것도 애완견인 듯싶었다. 피모는 까만 短毛로 덥혀 있었는데 꼬락서니가 말이 아니었다. 광대등걸이었다. 어디를 굴러먹었는지 온몸은 흙투성이에 몸에서는 퀴퀴한 내음이 코를 찔렀다. 그래도 숭악한 꼴에 아첨을 떠는 근성은 있어 가지고 등을 바닥에 대드니 뱃바닥을 달로 향한 체 몸과 네 다리를 흔들어 댔다. 그 모양이 흡사 누워서 트위스트 춤을 추는 꼴이었다.
“키타 소리 띵똥땡. 들려오는 맬로디… …. 트위스트 춤을 춥시다.”
술이 오른 친구는 놈의 박자에 맞추어 정말 트위스트를 추는 흉내를 내었다. 우리는 깡 소주를 마셔가며 육포를 놈에게 모두 헌납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늑대와 춤을’이 아니고 ‘개와 춤을’ 추고 엉덩이를 털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놈이 주인을 따르듯 여상스레 우리 꽁무니를 쫄쫄 따라왔다. 처음에는 소리로, 다음엔 동작으로 훌쳤으나 놈은 막무가내였다. 할 수없이 우리는 주위에 있는 돌이나 나무 가지를 던지며 쫓았으나 멈칫멈칫하다가는 저만치서 끈질기게 따라왔다. 우리는 할 수없이 정문 파고라에서 비상대책회의를 개최하게 되었다. 놈은 요요한 달빛 아래서 앞발을 세우고 앉아 그런 우리를 맹랑한 눈빛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 생명이 있는 짐승을 내몰라라 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
* 집도 없는 것 같으니 오늘 하루 밤 재웠다가 아침에 지구대에 인계하자.
우리는, 우리의 따뜻한 인간미에 서로 만족하며 하이파이를 나누었다. 그리고 내가 친구를 손바닥에 받혀 올리며 짓궂게 말했다.
“그 영광을 귀하께 드리노라!”
“무시기 말씀, 아우 먼저!”
“우리 내무대신은 개하고는 사돈 팔촌인 걸”
“우리 부인께서는 개 알레르기가 있어서….”
친구는 온몸으로 손사레쳤다.
“부인 좋아하시네. 마누라가 그렇게 겁나나?”
“야, 인마! 대한민국 땅에 코 박고 사는 우리 나이치고 마누라 겁나지 않는 놈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춘풍접인. 사람 대하길 봄바람 같은 친구도 마누라 바가지에는 주눅이 드는 모양이었다. 딴은 그랬다. 나도 개를 안고 집에 들어서는 장면을 상상만 하여도 섬쩍지근했다. 그만치 아내는 집에서 개 키우는 것에 대해 평소 강한 거부반응을 나타내었기 때문이었다.
우리의 협상은 결국 결렬되었고 차선책을 따르기로 했다. 차선책이란, 우리가 집으로 가려면 공원 정문을 기준으로 친구는 우로, 나는 좌로 헤어지게 되어 있는데 선택권은 놈에게 주자는 아주 민주적인 발상이었다. 우리는 다시 한 번 기발한 묘책에 스스로를 탄복하며 또 한 번의 하이파이를 나누었다.
나는 정문을 나서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잰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한참을 걸었으나 놈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앗사라비아! 나는 회심의 미소를 뛰며 돌아섰다. 친구가 저만치 걸어가고 있었다. 놈은 친구를 놓칠세라 쫄랑쫄랑 부지런히 따라가고 있었다. 달빛 아래 꾸부정한 친구의 모습이 그날따라 더욱 왜소해 보였다. 우거지상이 되어 있을 친구의 모습을 생각하니 배꼽이 꿈틀거렸으나 안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짓궂게도 친구의 오장육보가 터지게 고함을 냅다 질렀다. 손까지 흔들어 주면서.
“어이 친구, 축하 한다-. 그라고 명복을 빈다-.”
헌데 이 어인 일인가. 내 고함소리에 쫄랑거리던 놈이 내 쪽으로 방향을 홱 틀었다. 그리고는 흡사 내가 부르기라도 했다는 듯 쏜살처럼 달려오는 게 아닌가. 이런 엿 같은 시추에이션이 있나. 나는 죽기 살기로 뛰었다. 허나 놈은 잽싸게 나를 추월하여 제 먼저 앞장서 가고 있었다.
내가 놈을 옆구리에 끼고 집에 들어서자, 아내는 코를 막고 시앗 자식 대하듯 우거지상이었다. 내가 자초지종 얘기를 해도 마뜩찮은지 세모꼴 눈은 여전했다.
나는 분풀이라도 하듯 놈을 욕실에 던져 넣고 샤워기를 틀어 사정없이 덮어 씌웠다. 우선 고약한 냄새로부터 해방하고 싶었다. 개를 씻겨 본적은 난생 처음인지라 목에 걸려 있는 목줄은 벗기고 샴푸를 뿌린 후 놈이 낑낑거리거나 말거나 대고마고 온몸을 마구 비벼 거품을 내었다. 때 국물이 뚝뚝 듣는 놈을 우격다짐으로 샴푸를 두 번 처발라 씻어내고, 그것도 모자라 린스까지 뿌려 씻어내자 구린 냄새가 어느 정도 가시고 놈의 본 모습이 서서히 드러났다. 아침에 갖다 준다면서 이 밤에 무슨 굿이냐는 아내의 짜증을 귓전으로 흘리며 나는 드라이기로 놈을 정성껏 말렸다.
그제야 때물을 벗고 놈의 당당한 실루엣이 드러났다.
놈의 피모는 짧고 전체적으로 윤이 자르르 흐르는 검은색이 주조를 이루고 있었으나, 그에 반해 세 군데의 눈처럼 흰 털은 신비할 정도로 귀태마저 풍겼다. 콧대를 호미로 파낸 것 같이 옴폭 들어 간 곳, 즉 주둥이가 뭉툭한 불도그처럼 생긴 얼굴 중앙에 흰 초승달이 떠 있었고, 턱 밑에서 뱃바닥 전체에 설원이 펼쳐져 있었다. 턱시도를 입은 듯 검은 바탕에 하얀 앞가슴은 꼬마 신사처럼 늠름했다. 그리고 네 발은 흡사 목화송이처럼 피어 앙증맞고, 길고 늘씬한 네개의 다리가 몸체를 단단히 받혀 주고 있었다. 두 귀는 빳빳하게 치솟아 타협을 모르는 단호함이 서려 있었다. 광야를 달리는 꼬마 경주마가 연상되었다. 너 참 멋 떨어지는구나. 나는 자신도 모르게 탄식했다.
놈을 빈 방에 가두고 잠자리에 들었다. 술 탓인가 금방 잠이 든 모양인데 아내의 호들갑에 깼다. 깨고 나서 나도 모르게 소스라치게 놀랐다. 놈을 가두어 두었던 방에서 구라파전쟁이 일어나고 있었다. 놈이 앞발로 문짝을 두드리며 야밤에 온통 분탕질을 치고 있었다. 아내는 나를 침대에서 밀어냈다. 놈이 하는 꼴로 봐선 발로 차내지 않는 것이 그래도 다행이다 싶었다. 놈은 나를 보자, 죽은 지 할애비라도 만난 듯 흡사 펭귄처럼 곧추서서 아양을 떨며 매달렸다. 그러나 나는 놈을 매몰차게 밀어 내며 단호하게 선언했다.
“한 번 더 까불면 니 제사 날이다!”
나는 한껏 얼굴을 우그러뜨리며 엄포를 놓고 돌아섰다. 대신 불은 켜 주었다. 허지만 문을 닫고 한 발을 떼기도 전에 놈은 전보다 더 심하게 떼를 썼다. 나는 돌아 섰다. 그리고 놈의 궁둥짝을 서 너 번 걷어차며 신경질을 부렸다.
“죽고 싶어? 죽고 싶어! 또 지랄하면 정말 송장 친다!?”
“깨갱, 깨갱!”
쪼그마한 것이 그래도 입은 있다고 비명을 지르며 방구석으로 처박혔다. 나는 좀 안됐다 싶었지만, 눈 질끈 감고 발을 구른 다음, 방문을 일부러 우악스럽게 쾅 닫고 나섰다. 그제야 방안이 조용해졌다. 미안 하데이. 나는 숨 죽여 까치걸음으로 안방으로 향했다. 그러나 안방의 손잡이를 잡는 순간, 놈의 발작이 다시 시작되었다. 모두가 잠든 밤, 아파트 전체가 들썩 거릴 정도로 이번에는 죽기 살기로 발버둥을 쳤다.
“알았다, 알았어!”
나는 허겁지겁 놈부터 다독였다. 무작정 휘두르는 폭력이 먹히지 않는다는 걸 절감했다. 나는 할 수 없이 베개와 이불을 둘둘 말아 들고 놈의 방으로 이사를 하였다. 이렇게 나는 낙원에서 쫓겨나 실낙원의 신세가 된 것이다.
우리의 동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이불 속으로 파고들려는 놈을 나는 겨우 밀어내 이불 밖 내 옆구리 쪽에 자리하는 것으로 놈과 나는 암묵적으로 타협을 보았다. 놈은 그 정도로 만족한 듯, 옛날 어느 교감의 눈처럼 튀어 나온 눈알로 내 얼굴을 빠끔히 치켜보다가 잠이 들었다. 그놈의 두 눈알은 서로 원수가 졌는지 십리나 떨어져 자리했으나 맑고 유순해 보였다. 허나 나 참 기가 막혀서, 그 동안 들에서의 생활이 몹시 고단했던지 코까지 달달 골아댔다. 개도 코를 곤다는 것을 그날 알았다.
다음날 아침, 나는 놈을 옆구리에 끼고 서둘러 집을 나서다 어제 저녁에 벗겨놓은 목줄을 발견했다. 안쪽에 무슨 글자 같은 것이 적혀 있기에 집어 들었다.
-잘 부탁드려요. 도저히 힘들어 못 키우겠어요. 베베 안녕-
그리고 작은 글씨로 ‘1년3개월. 생일;6월 13일’이라고 적혀 있었다.
나는 일단 문을 나섰다. 그리고 놈을 엘리베이터 앞에 내려다놓고 비상계단에 쭈그리고 않았다. 놈도 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나처럼 쭈그리고 않아 말뚱히 마주 올려다보았다.
주인이 놈을 왜 버렸을까? 병? 아니면 지랄 같은 성격? 똥오줌을 못 가려서? 여러 갈래로 나래를 펴며 별의 별 생각을 다 해 보았으나 감이 잡히지 않았다. 지금 앞에 앉아있는 놈은 갓 시집온 새색시처럼 곰살맞지 않는가.
“베베?”
나는 나직이 놈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그러자 놈은 쫑긋한 귀를 서 너 번 까딱 거리드니 내게로 닥아 와 펭귄처럼 일어 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아-!”
내 속도 모르고 춤추는 놈을 그냥 보고 있기에는 안쓰러웠다. 하룻밤을 자도 만리장성을 쌓는다하지 않던가.
지구대는 집에서 300여M 거리였는데 그 중간에 동물 병원이 있었다. 여기에 동물병원이 있었든가, 무관심하게 지나다 그날에야 동물병원이 눈에 들어왔다. 병원을 몇 걸음 지나치다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놈이 버려 진 원인이나 알아보자.
“이애는 보스턴 테리어 종인데 몸에는 딴 이상이 없고요, 허지만 비듬이 장난 아니네요. 이 정도면 주인도 학을 띠죠.”
“치료가 어렵나요?”
“한, 6개월. 음식부터 근본적으로 치료해야 하니까요”
그리고 여수의사는 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무심히 뇌까렸다.
“생긴 건 미끈한데…. 지구대에 맡기면 결국은 안락사 시키죠.”
나는 놈을 받아들고 병원을 나서 지구대 앞에 섰다. 그러다 놈을 옆구리에 낀 채 지구대 주위를 하릴없이 뱅뱅 돌기 시작했다.
안락사라, 안락사라?!
나는 계속 중얼거리며 배회하다 놈이 무거워 길바닥에 내려놓았다. 놈은 도로를 달리는 수많은 자동차들, 지나는 사람들, 잡다한 도시의 소음들, 그리고 청량한 가을의 공기마저 신비롭고 새로운지 귀를 쫑긋거리거나 코를 하늘로 대고 킁킁거렸다. 그러나 결코 내 곁을 손톱만치도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도리어 엉덩이를 내 다리 사이에, 기를 쓰며 뒤 밀어 넣고 있었다. 그런 놈을 나는 결코 밀어 낼 수 없었다. 갑자기 가슴이 싸-하게 아릿아릿해오며 터질 것 같은 연민이 나를 짓눌렀다.
“그래, 이것도 연이다!”
나는 놈을 번쩍 들어, 이번에는 가슴 깊이 꼭 안으며 신음처럼 말했다.
“베베, 같이 가는 거다.”
나는 처음으로 베베의 얼굴에 내 얼굴을 비볐다. 베베의 턱수염에 내 볼떼기가 간지러웠다.
동물 병원에서 나는 마음먹고 베베에게 필요 한 것들을 구입했다. 수의사의 권에 따라 한 달 치 식량, 비듬 샴푸, 영양제, 개 껌, 간식, 그리고 옷 두 벌, 목걸이, 침대, 밥통, 물통, 장난감 등등 손자 키우는 거나 매일반이었다. 내 한 달 용돈의 절반이 뭉텅 잘려 나갔다. 나는 병원의 문턱을 나서며 혼자 중얼거렸다.
‘이번 달은 술을 좀 줄여야 되겠는 걸. 덜 마시면 몸에 좋지 뭐….’
나는 이솝우화의 여우처럼 나 자신을 위로하였다.
집에 돌아 와 산더미 같은 베베의 물품을 정리 할 동안, 베베는 새로운 거처를 순시하는 모양이었다. 집안 구석구석을 킁킁거리며 돌아다니다 점검이 끝났는지 신이 나 거실과 방을 질주하며 돌아 다녔다. 그런데 나는 아연실색하였다. 베베가 달릴 때 피모에서 봄날 송홧가루 날리듯 비듬이 풀풀 날렸다.
그나저나 아내가 문제였다. 외출에서 돌아 온 아내에게 나는 장황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현란한 제스처와 얼굴 근육을 밀가루 반죽해가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런 내가 씨알도 안 먹히는지 코 방귀를 뀌며 듣고 있던 아내가, 가타부타 한 마디 없다 내 말을 싹둑 잘라먹으며
“내가 나가죠!”
하고, 간단명료하게 말했다. 평소에 가납사니가 아닌 아내는 단호했다.
내가 누 고? 콧김으로도 날아가는 독수리를 떨어트리던 왕년의 덕대 아이가. 한식에 죽으나 청명에 죽으나 매일반. 어물쩍 넘기거나 구구이 변명하기보다 구라를 까며 들이대기로 했다. 아직은 새벽 호랑이가 아니었다. 아내를 달래고, 어르고, 구슬리고, 다독거리고, 엄살을 피워 댔다. 그러나 박 터지게 싸울 수도 없는 노 릇. 결국 평소 쥐락펴락하던 기세를 꺾고 무릎을 분질렀다. 그런 내 꼴을 생명부지의 낯선 사람 보듯 냉냉 하던 아내가 A4 용지 한 장을 불쑥 내밀었다.
“…?”
“받아쓰세요.”
서약 서
*잠자리, 밥 주기, 간식 모두 책임진다.
*자주 목욕시켜 냄새나지 않게 철저히 관리한다.
*대·소변은 즉각 처리한다.
*비듬이나 털이 집안에 날리는 일이 없도록 한다.
*집 안에서 짖지 않도록 한다.
위 사항을 어길시 지구대에 넘겨도 입 봉 하겠음. 서명
나는 싸인으로 조인식을 마쳤다. 조인식이 끝난 날부터 나에겐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었다. 내 손에는 진공청소기, 빗자루 아니면 걸레가 떠날 줄 몰랐다. 베베를 비듬 샴푸로 씻기고, 드라이기로 말리고, 하루에도 몇 번씩 솔로 피모를 털어주고, 먹이고, 간식주고, 이빨 닦아주고, 대소변 치우고 또 닦아 주고, 냄새 베지 않게 뒤처리하고, 그리고 똥 덩어리 확인하고, 같이 데리고 자고, 공원에 데려가 바람 쐬고….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전차에 받힌 것 같이 황당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다가도 전전긍긍, 행여 아내가 딴죽걸이 할까봐 베베의 뒷바라지에 애면글면하였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도 있는 법. 베베의 몸 상태가 조금씩 호전되어갔다. 그러나 더 기똥찬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것은 베베의 햇볕정책이었다. 북극의 빙하 같던 아내의 마음을 봄눈 녹이듯 녹여 버린 것이다. 처음에는 베베가 옆에만 가도,
“징그럽다.”
“저리 가!”
“못 생긴 게….”
“아이고 냄새야.”
하고, 타박을 하거나 손사래를 쳤는데, 어느 날부턴가 곁에 와도 그러려니 하더니, 달이 지나서는 베베를 쓰다듬기도 했다. 언젠가 부터는 노골적으로 놈을 안고 둥개둥개 하지 않는가.
이건 순전히 베베의 천성 탓이다. 베베는 집안에서도 제 혼자 그냥 걷는 법이 없었다. 지나는 길에 나나 아내가 있으면 오가며 옆구리로 슬쩍 치고 지나갔다. 아니 일부러 스치며 스킨십을 했다. 몇 번이고. 그러다 눈을 주면, 발밑에 누워 배를 위로한 채 트위스트를 추거나 펭귄처럼 곧추 서서 지르박을 밟는다. 그 투박한 얼굴, 툭 불거진 두 눈으로 정색을 하며 아양을 떠는 넉살에 배꼽 잡지 않을 장사 없으리라.
“어머, 어머! 야, 왜 이래? 호호호.”
하고, 베베의 재롱에 아내도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마음의 문을 여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이제는 외출했다 돌아오면 나보다
“베베는 요-?”
한다. 그 뿐인가?
아예 데꼬 잔다.
이제 베베는 우리 집에서 자기의 봉게(몫)를 톡톡히 하고 있다. 나와 아내 사이에 매신저 역할도 하고, 중재자 역할도 한다. 간혹 아내와 나 사이에 음성이 올라가면 누가 먼저 도발했는지 용케도 알아차리고 그쪽을 향해 몽몽 짖어 댄다. 우린 놈 때문에 언성을 높일 수 없다. 우리 대화의 8할은 베베가, 웃음의 9할은 놈이 촉매제 역할을 한다.
평소에 귀가하면 “왔어요.” 아내는 나를 힐끗 쳐다보고, 건조한 말 한 마디 내 이마빡에 붙이고는 TV드라마에 눈을 빼앗겼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래도 덤덤하다.
내가 엘리베이터에 내리는 기척만 나도 베베는 이미 알아차리고 현관 앞에 대기하다, 내가 문을 열면 놈은 끔뻑 넘어간다. 두 발로 일어서서 동동거리며 내 몸 구석구석을 킁킁, 이상이 없나 찬찬히 점검한다. 그리고는 숨을 할딱이며 내게 하소연 한다.
‘할배 할배, 할배 할배! 나 저엉-말 주욱-는 줄 알았어. 할배 보고 시-퍼-서…. 그래도 집 자알 지키고 얌전히 있었다아-.’
놈은 묵시로 하고 나는 언어를 사용한다.
“아이고, 그래쪄! 우리 베베, 착한 베-베. 할배도 보고 시이-퍼 주욱-는 줄 알았네.”
나는 놈을 번쩍 쳐들고 비행기를 태운다.
나는 요사이 누구보다 베베와 많은 대화를 나누고, 스킨십을 하고, 같이 놀고, 더불어 산책하고, 철없이 장난치고, 함께 자고, 똑같이 먹는다. 놈의 몸무게는 7,5kg 그러니 내 몸무게의 딱 10/1이다. 내가 하루에 빠짐없이 먹는 간식이 있는데 그걸 우리는 10;1로 공평하게 나누어 먹는다. 놈도 으레껏 그르려니 하고 자기 지분을 당연하게 요구한다.
베베가 있어 나는 전보다 열배나 더 웃고, 일찍 귀가하고, 술도 덜 마시고, 많이 움직이고, 하루하루가 즐겁고, 보고 있어도 보고프다. 놈을 만나 고난의 행군을 거친 지금 우리 집은 더욱 활기차고, 생기가 넘친다. 주로 집 밖으로 나다니 아내는,
“젊은 날에는 누-가 진짜진짜 보고 싶었는데…. 지금은 베베가 그렇게 보고 싶어요. 어떨 때는 갈증 날 정도로. 지금도 보고 싶은 대상이 있고, 마음이 동한다는 것이, 이정도로 짠하게 마음의 시계바늘을 과거로 돌릴 줄 미처 몰랐어요.”
그러면서 아내는 집에 발을 들이기 바쁘게 허겁지겁 베베와 뒹굴기 바쁘다.
베베 나이가 사람으로 치면 이제 일 여덟. 모든 것이 궁금하고 모험심이 강하다. 핏줄 탓인지 저보다 작은 놈에게는 답지 않게 수줍음을 타지만 아무리 큰 놈이라도 건드리면 몸을 던진다. 사생결단 물러 선 적이 없다. 공원 등산객들에게 이미 호가 났다. 검투사, 검은 투사라고.
오늘도 공원에서 잔치 잔치 꽃 잔치 벌였던 가지에 꽃이 지자 꽃자리에 녹음이 밀리고 있었다. 연녹색 잎사귀들이 앞 다퉈 머리를 내밀고, 그사이로 스며든 햇살이 신기한지 베베는 주둥이를 코 박고 킁킁거렸다. 그러다 놈이 갑자기 뒷다리를 꺼-떡 들더니 코 박던 곳에 오줌을 찍 깔기지 않는가. 놈이 하는 짓거리란.... 언제나 그랬다.
남자는 죽는 날까지 여자를 생각하고, 여자는 그 날이 되어도 거울을 본다는데, 베베는 오로지 먹는데 올인한다. 베베의 수명은 앞으로 15년. 언젠가 놈도 눈이 가고 이빨이 빠지리라. 그때까지 베베를 수발들고 싶다. 그리고 어느 날, 내 손으로 곱게 묻어 주고 싶다. 그러기 위해 나를 다져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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