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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왕의 전쟁
역대하 14:9-15
(대하 14:9) 구스 사람 세라가 저희를 치려하여 군사 백만과 병거 삼백 승을 거느리고 마레사에 이르매
(대하 14:10) 아사가 마주 나아가서 마레사의 스바다 골짜기에 진 치고
(대하 14:11) 그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여호와여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에는 주 밖에 도와 줄 이가 없사오니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도우소서 우리가 주를 의지하오며 주의 이름을 의탁하옵고 이 많은 무리를 치러 왔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우리 하나님이시오니 원컨대 사람으로 주를 이기지 못하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대하 14:12) 여호와께서 구스사람을 아사와 유다 사람 앞에서 쳐서 패하게 하시니 구스사람이 도망하는지라
(대하 14:13) 아사와 그 좇는 자가 구스 사람을 쫓아 그랄까지 이르매 이에 구스 사람이 엎드러지고 살아 남은 자가 없었으니 이는 여호와 앞에서와 그 군대 앞에서 패망하였음이라 노략한 물건이 심히 많았더라
(대하 14:14) 여호와께서 그랄 사면 모든 성읍 백성을 두렵게 하시니 무리가 그 모든 성읍을 치고 그 가운데 있는 많은 물건을 노략하고
(대하 14:15) 또 짐승 지키는 천막을 치고 양과 약대를 많이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더라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지난 시간에
아사라는 신앙이 있는 훌륭한 왕이
등장했다는 이야기를 드렸습니다.
신앙이 있다는 아사 왕의 행동은,
ㅡ백성들의 우상을 파괴하는 동시에
ㅡ백성들을 치는 것이 되고
ㅡ이것 또한 왕 자신이 의지할 만한 힘을
스스로 치는 것을 뜻합니다.
왜냐하면 백성들이 우상을 좋아하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백성보다는 하나님 말씀 편을
선택한 것입니다.
백성들에게 밉상을 받는
그런 각오를 하고서라도
말입니다.
그런데 우상이라는 것은
각자에게 재수 좋아라고 비는 거잖아요.
사람이 연약하기 때문에
뭔가 힘이 될만하고
행운이 될만한 것을 갖고 싶어하는데
그 복의 제공처를 가차없이 부순다는 것은
결국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에는
우리의 욕망대로 설 수가 없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주면 주는 대로 먹을 수밖에 없는 입장이지
내가 이렇게, 저렇게 하면
내 욕망을 이룰 수 있다고 까불대면서
하나님을 믿는 것은
정상적인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상을 없앤다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아무 것도 끼워 놓지를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냥 하나님 바라보며
하나님 앞에 나와서
있는 그대로의 모습 이대로가
하나님의 작품이라고 고백하며
투명하고 깔끔하게 모든 것을
날마다 드리는 삶입니다.
이게 바로 신앙입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고린도전서6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값 주고 사셨으니
이제는 우리가 우리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성경구절 하나만 한평생 쥐고 있어도
우리는 신자입니다.
나는 내 것이 아니라는 사실 하나만
분명하게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어도
우리는 이 세상에 겁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아사 왕이
바로 하나님 앞에 아무 것도 가리지 않고,
투명하게 자신을 노출시키며,
이 나라는 우리의 것이 아니고
하나님 것이며,
하나님이 이 나라의 왕 되심을
다시 한번 돌려드린다는 식으로
모든 우상들을 철폐했다고 합니다.
그 결과, 그 땅이 평안하고
여러 해 싸움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돌연 큰 전쟁이 발생합니다.
무려 백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쳐들어오는데
정말 너무나 엄청난 대군이요,
전쟁의 결과에 대해서
논의하나 마나한 상황입니다.
너무나도 강한 자와
거기에 너무도 약한 자가 마주합니다.
자 여러분!
이 싸움 자체가 성립이 될까요?
그런데 이러한 엄청난 상황 앞에서
평소에 신앙 좋다고 소문난 아사 왕이
어떻게 대처하는 지를 같이 지켜봅시다.
아사 왕이 과연
백만 대군을 앞두고서
어떤 식으로 행동하는지를
성경을 통해서 한번 살펴봅시다.
아사 왕은
"여호와여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에는
주 밖에 도와 줄 이가 없사오니"
라고 부르짖고 있습니다.
저쪽 군대가 백만 대군이니까
강한 자라는 것은 누구나 압니다.
그런데 그 백만 대군 앞에서
우리는 수십만 밖에 안되니
우리가 약한 자 라는 것도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압니다.
이 두 상황은 신자이든. 신자아니든.
다 알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신자와 아닌 자가
어디에서 판가름 나느냐 하면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는 것과 믿지 않음에서
확연히 갈라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강한 자 백만 대군,
겨우 수십만의 약한 이스라엘 사이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은 강한 자의 편도,
그렇다고 약한 자의 편도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오직 하나님 마음에
합당한 자의 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은 부자편도 아니고
가난한 자를 두둔하는 편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에 맞는 사람의
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약하다고 해서
무조건 하나님이
우리편에 설 거라고 생각하면
이것도 엄청난 착각이고
잘못된 생각입니다.
또한 우리가 약한 자이니까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겠지
라고 생각하는 것도
크게 잘못된 생각입니다.
하나님은
오로지 자기 뜻만 펼치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가난함이
결코 우리의 의나 정당함의 근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가난하기 때문에
천당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걸 오해하시면 안됩니다.
어떻든 하나님은
사람의 편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늘 나라라고 펼칠 때
그 펼치는데 있어 불변의 계획이 있습니다.
그 계획을 누가 수용하느냐에 따라서
전쟁의 승패는 판가름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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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적으로, 12절에 보면
구스 사람을 패하게 해서
도망하게 했다고 나와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말로서만
"하나님이여 저쪽은 강하고 우리는 약합니다.
하나님!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에
하나님 외에는 누가 있습니까?" 라고,
겁먹은척 내놓고는
아사 왕과 같은 고백을 했으니까
하나님은 우리편일 거라고 생각한다면
이것도 크게 잘못된 생각입니다.
어떤 사이비 목사는
주기도문 3천 번 외우면
방언의 은사를 받는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주기도문을 3천 번 해봐도
그것은 방언도 아니요
계시도 아니요
은사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의 3천 번 행위에
마음 약해질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자기 뜻 펼치다가
순간적으로 인간 편을 들어주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어떤 특정한 기능이나 문장을
반복적으로 외운다고 해서
하나님의 정신에 혼선이나 혼란을 야기시켜 무의식적으로 축복주시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솔로몬이 일천 번제 드렸다고
복 받고 구원받았습니까?
아닙니다.
미가 6:7에 보면,
하나님은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구원이란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야됩니다.
아브라함이 자기아들 이삭 바쳤다고
우리도 아들 바치면 구원받습니까?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마음을 읽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줄 알아야 됩니다.
여기 11절 끝에 보면
"하나님이여 이 싸움은
사람과 사람의 싸움이 아니고
하나님과 사람이 싸우니까
절대로 사람에게 지지 않게 하시고
사람이 하나님을 이기지 않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했더니 이겼다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를 드리자면
우선 아사 왕의 이야기를 잠시 놔두고
이스라엘의 전쟁은
어떻게 승리를 가져오는가
그 원리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원리는 우선 출애굽 당시부터
표면화되는데요,
하나님께서 애굽나라와 전쟁을 할 때에
애굽군사가 교만했고 강팍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교만하고 강팍한 자를
제일 싫어하십니다.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의 이 원리원칙은 만고의 진리입니다.
사람은 일이 잘 풀려나갈 때
자칫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그래놓고서 하는 말이
하나님은 우리편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애굽이 패배한 것은
이스라엘보다 나쁜 짓을 많이 해서가 아닙니다.
그것보다 그들이 교만해서라고 말합니다.
광야에서 애굽은 떨어지고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만 남았지요.
둘이 동행하지요.
동행하면서부터
새로운 전쟁이 시작됩니다.
바깥에 있는 이방민족과의 전쟁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친히 인도하시는
자기 백성과의 전쟁에 나서십니다.
무슨 전쟁입니까?
교만과의 전쟁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도 모르고
가는 곳마다 원망입니다.
모세 원망과 하나님 원망과
모든 것에 불평합니다.
그래서 민수기에 보니까
불평을 열 번이나 했습니다.
그런데 불평 열 번하고서도 그들은 잘립니다.
그들은 가나안 땅에 못 들어갑니다.
옛날 애굽의 바로 왕이 열 번 강퍅했습니다.
그래서 홍해바다에 모두 빠져 죽은 것처럼
광야에서 그 모양이 된 것입니다.
옛날 애굽사람들이 하나님께 대들다가
혼줄난 이 일들을
이제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혼줄나고 있는 겁니다.
신명기 8장에,
내가 너에게 만나를 준 것은
제발 하나님과 함께 있을 때에는
마음을 좀 낮추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너희들이 원하는 양식을
일부러 주지 않으시고
만나를 준다는 것입니다.
듣도 보도 못한 양식을 주심으로
구원은 순전히
하나님의 일방적인 계획에 의해서
이루어져 진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은
그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 앞에
마음을 낮추며 동행했어야 했습니다.
그것도 모르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꾸만 과거 추억을 되돌아봅니다.
과거의 추억으로. 아름다웠던 시절,
애굽에서 고기 먹었고
갖가지 맛있는 것을 먹었는데
지금은 맛도 없는 만나를 매일 같이 먹게 되니까, 원망이 열 번씩이나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치르는 전쟁에서
외부와의 전쟁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진짜 전쟁은
하나님과 나 사이의 전쟁이
문제입니다.
우리가 불교신자나 비교하고
안 믿는 불신자 핑계되지만
정작 싸움은 하나님이
내 인생을 몰고 가는데 대해서
우리가 불평을 하고
불만을 터트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말하기를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해놓고는
"주여 내 말로만 그런 것 아시죠."
"푸른 초장으로 누이시고
쉴만한 물가로" 해놓고는
"하나님 나의 인생
완전히 버려놓으신 것 아시고 계시지요?."
우리는 이렇게 이중적인 이야기를 하면서도
성경에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는 구절만
달달 외우고 있단 말입니다.
그것 외우면
하나님께서 우리편이 되어준다고 믿고
미신처럼 되고싶어하는 마음으로 말입니다.
사실은 마음은
하나님하고 전쟁하고 있으면서 말입니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읽어야 됩니다.
그 마음은 민수기 21장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또 원망하죠.
5절에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고.
이곳에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노라 하매
정말 이렇게 나쁜 음식, 맛없는 음식
나는 싫습니다"라고 원망합니다.
이걸 보면서
저도 혼자서 가만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나도 그때 광야에 있었다면
내가 아무리 목사고 신학교 나와도
나 역시 하나님 앞에
원망을 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물이 변변히 있습니까,
연탄보일러가 있습니까,
음식물이 풍성합니까,
뭐가 있습니까?
저라도 원망하겠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니까
이렇게 그냥 기초적인 생존에
가장 필요한 것 때문에
할 수 없어 원망했는데
6절에 보니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셨습니다.
자, 여기서 불뱀에게
안 물릴 자신 있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어느 인간이 어느 정도 마음이 낮아져야
그러한 환경에서 원망 안 하겠습니까.
너무나도 척박한 환경에서
너도 짜증, 나도 짜증, 짜증,
짜증 안 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서 보낸 불 뱀에게
물려 죽어야 마땅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너무 상식선에서 생각합니다.
산타클로스 할아버지 선에서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얼마나 완벽한 것을 요구하시는가를
우리는 상상을 하지 않습니다.
자꾸만 대충 상식적으로
넘어가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완벽하게 원망하지 않고
완벽하게 겸손한 사람을 찾는데
우리는 대충 겸손하면 넘어갑시다.
"인간이 그럴 수도 있지 뭐.
아니 그걸 못 받아드리는가
그렇게 속이 좁은 분이 우리 하나님이신가?"
자꾸 이런 식으로 핑계를 대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어김없이
불 뱀을 보냈습니다
이것은 아직도 여전히
하나님 마음을 모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 마음을 모르고
마음이 낮아지지 않았기 때문에
불뱀을 보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불 뱀에 물려 죽게 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구원해 놓고
모두 죽여버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8, 9절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본즉 살더라"
여러분 불뱀에 물려 죽기 직전인데
모세가 높은 장대에다 놋뱀을 달아 가지고
"놋뱀을 쳐다보는 사람들은 모두 산다"고
할 때에
여러분은 쳐다보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목사님 다 쳐다봅니다."고
자신있게 이야기하실 분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천만의 말씀,
왜 쳐다보겠습니까?
우리가 뭔가 잘못한 짓을 해놓고
하나님께 벌받으면
우리는 하나님 쳐다보면서
죄 지은 우리를
구원받게 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하겠는데
분명히 내가 하나님한테 원망할 만 해서
원망했습니다.
물 없으니까 물 달라고 했고,
양식이 없어서 양식 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불뱀을 보냈습니다.
그러면 누가 잘못된 것입니까.
하나님께 원망할 만해서 원망한 내가
잘못된 것입니까?
아니, 약간 원망했다고 해서
그 무서운 지옥의 불 뱀을 보내 가지고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하나님이 잘못되었습니까.
이거 길가는 누구라도 막고 서서 물어봐도
하나님이 잘못된 거잖아요.
하나님이 잘못 되었다면
잘못이 없는 내가 왜 놋뱀을 쳐다봅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자기 잘못을 알아야
어느 정도 마음을 낮추고
"잘못되었습니다. 정말 잘못되었습니다.
앞으로 물 없어도,
양식없어도 원망하지 않을게요.
이 자리에서 죽어도 할말 없습니다" 라고 고백하며 놋뱀을 쳐다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형편이 나빠서
그 나쁜 형편 때문에
하나님에게 항변한 그것도
하나님 앞에 죄가 됩니까 라고 대드는 자는
결코 그 구원의 놋뱀을 쳐다 볼 리가 없지요.
쳐다본다는 것은
잘못이 자기에게 있지
결코 불뱀을 보내고 지옥을 만드신
하나님에게 있다고 마음먹지 않는 자입니다.
바로 이 고백을 하는 자만이 구원을 얻습니다.
이게 얼마나 중요한 복음의 핵심입니까.
우리는 교회 와서
놋뱀같은 예수 쳐다보면
구원받는다고 했습니다.
어떤 마음가짐으로 쳐다봅니까.
쳐다보면서 원망할 수밖에 없는 우리들인데
실컷 예수님 쳐다보면서도 원망하는데
그게 쳐다보는 것입니까
아니면 따지고 드는 것입니까.
다시 이야기합니다.
광야에서 하나님과의 동행은
지금 백만 대군이 문제가 아니고
천만대군이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아 백만 명의 적들이 쳐들어 왔다고
적들 이야기 하지 말고
너는 내편이냐를 묻습니다.
"하나님 편 맞는데요."
"내편 맞으면
마음을 낮추어야 될 거 아니야."
"낮추었는데요."
"마음을 낮췄는데
왜 물 없다,
양식없다고 나에게 원망하느냐"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놋뱀을 쳐다보고 나은 사람들만
그 후에 동행을 하게되고 만나는
숱한 이방 군대를 이기게 됩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모두 죽여버립니다.
그러면 놋뱀 쳐다보고 산 사람들이
다음에 원망하겠습니까.
제대로 예수 믿는 사람이
예수 믿으면서 원망하겠습니까.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이제 오늘 본문에 들어가면
아사 왕이 우상을 부수었지요.
그건 자기 자신을 쳐부순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주여 나는 왕이 아니라도 좋습니다.
목사 안되어도 좋습니다.
내 교회 없어도 좋습니다.
아내가 도망가도 좋습니다.
하나님으로 인해 영생 있으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그런 마음으로 우상을 부순거예요.
그런데 아무런 자기마음, 자기욕심도 없는데
덜렁 백만 대군이 쳐들어 온거예요.
그러면 뭐하겠습니까?
"하나님! 개척 교회인데
교인들이 거의 없네요.
아, 아, 아니지 하나님!
나 아무것도 없는 줄 아시지요."
이런 자세로서 말입니다.
아사 왕은 겸손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저쪽은 강한 것 아시지요.
강한 자와
아무 것도 없이 연약한 우리 사이에
나는 그저 하나님만 믿습니다.
나 원래 가진 것 없기에
저놈들이 나를 치는 것은
나를 치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하나님을 치는 것입니다"고 하니깐
백만 대군이 무슨 힘을 발휘하겠습니까.
백만이라는 대군이
아무런 소용없었습니다.
ㅡㅡㅡㅡ
12절에
여호와께서 패하게 하셨다
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아사 왕이 승리했습니까?,
하나님이 승리했습니까?
하나님이 패하게 만들어 주었으니
그놈들이 패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을 신약성경에서는
마귀가 너를 지배할지라도
여호와께서 우리를 구원케 하시니
우리가 구원되었다는 것과 같은 거예요.
내 행함이나 선행으로 구원된 것이 아니고
우리는 원망할 필요도 없고
하나님께 짜증낼 필요도 없고
나는 아무 것도 아닌데
놋뱀만을 쳐다보면 된다고 여기는 사람에 한해서
다른 사람이 묻기를
"야, 너 어떻게 구원되었지,
백만 대군으로 구원되었나?
그러면 백만 가지 선행을 해서 구원되었나?
아니 그럼 뭐야?"라고 묻을 때
우리는 뭐라고 답변해 주어야 합니까?
저 사람과 우리사이에 여호와께서 계시니
여호와께서 악마를 물리치시고
나를 건져주시니
구원은 여호와께서 나를 구원해 주셨다.
이렇게 신약성경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에 예수님의 십자가의 능력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은
여러분이 모두 알고 있습니다.
말은 아주 쉽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당장 현실적으로
역대하 14장에 보니까
백만 대군 앞두고도 그런 소리 나오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 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알아서 해 주십시오" 라는 고백,
이것이 진정 신앙이 아닐까요?
아버지가 아들을 데리고 산에 올라갑니다.
아마도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위해서 일 것입니다.
그런데 제사에 쓰일 제물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때 아버지는 난감함을 직감합니다.
있어야 하는데 없습니다.
준비해야되는 되는데
준비되지 못했습니다.
이정도 되면
제사를 포기하는것이 맞습니다.
아마도 아버지는
어떻게 되겠지라는 생각보다
제사란 하나님과의 약속이기에
약속은 지키자는 쪽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눈뜨고도
보이지않는 동물은 어쩌지?
잡아야하나? 쉽게 잡히지도 않을 텐데..
아마도 하나님을 원망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제물이 준비되지 않았거나,
그럴여건이 주어지지않은 것도
모두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뜻이 있을거야.
아버지는 그저 제사준비만 할뿐입니다.
이윽고 데리고간 아들 이삭을 봅니다.
말씀으로 낳은 아들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압니다.
제사하는 것을 보여주려 데리고 갔는데
정작 제물은 보이지 않습니다.
시간이 가면서 급박함이 몰려옵니다.
아무리 하나님과의 약속이라도
제물도 준비되지 않으니 포기할까?
제물이 준비되지 않았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뜻인데,
그럼 제물없이
제사 형식만 취하는 것으로 할까?
하나님께서 이버지 이삭을
믿음으로 몰고 가십니다.
좁다란 길끝에는 사랑하는 아들과
제사에쓸 칼 뿐입니다.
믿음이란 가장 귀한것을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드릴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
아들을 죽이기까지하면서
택한 백성을 구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란것을 깨닫게 됩니다.
나아가 아브라함은 여기서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것이 의무가 아니라 기꺼이드려지는것이 제사의 관건임을 알게됩니다.
지금도 죽어있는
하나님의 사랑하는 백성을 구하는 일,
죄에서 구원하시는 일,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의 죽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들의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갚아지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