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달(溫達)은 고구려 평강왕(平岡王. 평원왕(平原王)이라고도 한다. 성은 고(高)씨고 이름은 ‘양성(陽成)’, 또는 ‘탕(湯)’이다. 서기 559년부터 서기 590년까지 고구려를 다스린 태왕[太王]이다 - 옮긴이) 때 사람이다(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1456년 전에 살았던 사람이다 - 옮긴이).
그의 얼굴은 멍청하게 생겨서 남의 웃음거리가 되었으나, 속마음만은 순박하였다. 집이 몹시 가난하여, 항상 밥을 빌어 어머니를 봉양했다. 다 떨어진 옷과 해진 신으로 거리를 왕래했으므로, 그때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바보 온달’이라고 했다.
평강왕의 어린 딸(‘평강공주平岡公主’. 이 말은 ‘평강왕의 공주’라는 뜻이지, 사람의 성이나 이름은 아니다. 이 사람의 성은 고高씨다 - 옮긴이)이 울기를 잘하니, 왕은 희롱하며(농담 삼아 - 옮긴이) 말했다.
“네가 늘 울기만 하며 내 귀를 시끄럽게 하니, 크더라도 반드시 사대부(귀족/공경公卿 - 옮긴이)의 아내는 될 수 없으므로 꼭 바보 온달에게로 시집을 보내야겠다.”
후에 딸이 나이 열여섯 살이 되어 상부(上部)의 고(高)씨에게 시집을 보내려 하니, 공주는 아뢰었다.
“대왕(大王)께서는 늘 말씀하시기를, ‘너는 반드시 바보 온달의 아내가 될 것이다.’라고 하셨는데, 지금 무슨 까닭으로 전에 하신 말씀을 고치십니까? 평민들도 오히려 입 밖에 낸 말을 어기려 들지 않는데, 하물며 지존(至尊. 임금을 받들어 일컫는 말로도 쓰인다 - 옮긴이)하신 분으로 그러실 수 있습니까? 그런 까닭으로 ‘임금은 희롱하는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지금 대왕의 명령이 잘못되었으니, 저는 감히 그 명령을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왕은 노하여 말했다.
“네가 내 명령을 따르지 않으니, 실로 내 딸이 될 수 없다. 어찌 같이 살 수 있겠느냐? 네가 가고 싶은 대로 가거라!”
이에 공주는 귀중한 가락지 수십 개를 팔꿈치에 매달고, 궁궐을 나와서 홀로 걸어갔다. 길에서 한 사람을 만나, 온달의 집을 물어서 그 집에 이르렀다. 공주는 그 집에서 눈먼 어머니(온달의 어머니 - 옮긴이)를 보고, 그 앞에 가까이 가서 절하고 그 아들(온달 - 옮긴이)의 있는 곳을 물으니, 늙은 어머니는 대답했다.
“내 아들은 가난하고 또 누추하니, 귀인(貴人. 귀한 사람. 그러니까 신분이나 지위가 높고 귀한 사람 - 옮긴이)이 가까이할 사람이 못 됩니다. 지금 아가씨의 몸 냄새를 맡으니 향기가 이상하고, 아가씨의 손을 만져보니 부드럽기가 마치 솜과 같구려. 그러니 세상에서 가장 귀하신 분일 터인데, 누구에게 속아서 이곳에 오셨나요? 내 아들은 주림(굶주림을 줄인 말 - 옮긴이)을 참지 못해서, 느릅나무 껍질을 벗기러 산속으로 가서(전근대사회에서는 나무 껍질을 벗겨서 비상식량으로 썼다. 곡식을 먹지 못하면 대신 나무껍질을 먹었다 - 옮긴이), 오래되었는데도 아직 돌아오지 않았어요.”
공주는 온달을 찾아나가서, 산 밑에 이르러 온달이 느릅나무 껍질을 짊어지고 오는 것을 보고, 그에게 다가가서 자기 회포(懷抱. 마음속에 품은 생각이나 정情 - 옮긴이)를 말하니, 온달은 갑자기 안색(얼굴빛 - 옮긴이)을 바꾸며 말했다.
“이곳은 어린 여자가 다닐 곳이 아니다. 너는 틀림없이 사람이 아니고, 둔갑한 여우 귀신이다. 내게 가까이 오지 말라.”
마침내 돌아보지도 않고 가버렸다. 공주는 홀로 돌아와서 싸리문(사립문이라고도 한다. 온갖 잡스러운 나무들의 가지[싸리]를 엮어서 만든 문짝이 달린 문이라서 이렇게 부른다. 옛날 초가의 입구에 있는 문이었다. 싸리문을 열고 들어가면 마당이 있고, 마당을 통과해야 집채로 갈 수 있으며, 집채에서 문을 열어야 방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 옮긴이) 앞에서 자고, 그 이튿날 아침에 다시 (온달의 집으로 - 옮긴이) 들어가서 그 모자(母子)에게 사정을 자세히 말했으나, 온달은 우물쭈물하면서 결정하지 못했다.
온달의 어머니는 공주에게 “소인의 아들놈은 지극히 누추(陋醜. 사람에게 이 말을 쓰면 ‘아는 것이 적고, 신분이 낮으며, 못생겼다.’는 뜻이다. ‘누陋’는 ‘견문이 좁고 적다/신분이 낮다’는 뜻이고, ‘추醜’는 ‘못생겼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 옮긴이)하니, 귀인(여기서는 평강공주 - 옮긴이)의 배필(配匹. ‘배配’는 ‘짝지어 주다’라는 뜻이고, ‘필匹’은 ‘짝’이라는 뜻이다. 순우리말로는 ‘짝’이고, 오늘날 쓰는 말로는 ‘배우자’다 - 옮긴이)이 될 수 없으며, 소인의 집은 지극히 가난하니, 참으로 귀인께서 사실 곳이 못 되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공주는 이렇게 대답했다.
“옛 사람의 말에 ‘곡식 한 말도 찧으면 양식이 될 수 있고, 베 한 자도 꿰매면 옷이 될 수 있다.’고 했으니, 진실로 두 사람이 마음이 같다면 꼭 부귀(富貴. 재산이 많고 지위가 높음 - 옮긴이)해야만 같이 살 수 있겠습니까?”
이에 금가락지를 팔아서 땅과 집과 종, 말과 소, 기물(器物? 그릇? - 옮긴이)을 사들여 쓰임새가 있는 기구(器具. 세간/그릇/연장/기계 - 옮긴이)를 모두 갖추었다.
처음에 말을 살 때, 공주는 온달에게 말했다.
“절대로 장사꾼의 말은 사지 말고, 국마(國馬. 나라[國]의 말[馬]. 그러니까 나라에서 특별히 관리하여 기르던 말 - 옮긴이)로서 병들어 야위어서 내버린 것을 가려, 그것과 (돈을 - 옮긴이) 바꾸어 오세요.”
온달은 그 말대로 했다. 공주는 말을 정성껏 길렀으므로, 말은 날로 살찌고 건장(健壯. 튼튼하고[健] 씩씩함[壯] - 옮긴이)해졌다. 고구려는 항상 봄 3월 3일에는 낙랑의 언덕에 모여 사냥하여 잡은 멧돼지와 사슴으로써 하늘과 산천(山川. 뫼[山]와 내[川] - 옮긴이)의 신(神)에게 제사지냈는데, 그날이 되어 왕이 나가서 사냥하니 많은 신하와 5부(部)의 군사들이 모두 따라 나갔다.
이에 온달도 자기가 기른 말을 타고 따라갔는데, 그는 항상 남보다 앞서서 말을 달렸고, 많은 짐승을 잡았으므로 다른 사람들이 그를 따르지 못했다. 왕이 그를 불러서, 성(姓)과 이름을 묻고는 놀라고 또한 이상히 여겼다.
이때 후주(後周. 중국의 남북조시대에 북중국에 있던 왕조. 한화한 유목민이 세웠다 - 옮긴이)의 무제(武帝)가 군사를 일으켜 요동(이 무렵에는 고구려 땅이었고, 때로 고구려라는 나라 이름 대신 쓰이기도 했다 - 옮긴이)으로 쳐들어오므로, 왕은 군사를 거느리고 배산(拜山) 들에서 맞아 싸웠는데, 온달이 선봉이 되어 빨리 싸워 적군 수십여 명을 베어 죽이니, (고구려의 - 옮긴이) 여러 군사들이 이긴 기세를 타서 힘을 내어 (후주군을 - 옮긴이) 쳐서 크게 이겼다. (고구려의 왕과 귀족들이 군사들의 - 옮긴이) 공을 논하자, 모두 온달의 공이 제일(제 1)이라고 했다. 왕은 (그 말을 듣고 온달을 - 옮긴이) 가상히(기특하게 - 옮긴이) 여겨 감탄하며 말했다.
“이 사람은 내 사위다.”
그 뒤 예절을 갖추어 그를 (사위로 - 옮긴이) 맞아들이고, 벼슬을 주어 대형(大兄. 5품品에 속하는 고구려의 벼슬 - 옮긴이)으로 삼으니, 이로부터 왕의 총애가 더욱 후했고, 위세와 권력이 날로 성해졌다.
양강왕(陽岡王. 고구려의 태왕. 영양왕嬰陽王이라고도 한다. 평원왕의 맏아들로 태왕 자리를 이어받았다. 성은 고高 씨고, 이름은 원元 또는 대원大元이다. 서기 590년에 즉위해 서기 618년까지 고구려를 다스렸다. 양견[楊堅]이 세워서 다스리던 수나라를 먼저 쳤고, 그 뒤 양견[시호 수문제]과 양광[시호 수양제]이 이끄는 수나라 군대와 싸웠다 - 옮긴이)이 왕위에 오르자, 온달은 왕에게 아뢰었다.
“신라가 우리 한강 북쪽 땅을 빼앗아 군/현으로 만들었으므로, 백성들이 원통하여 언제나 부모의 나라를 잊지 않고 있습니다. 대왕(大王. 고구려에서는 태왕太王과 같은 뜻으로 쓰였다 - 옮긴이)께서는 불초(不肖. 못남 - 옮긴이)한 신(臣)을 어리석다 여기지 마시고, 군사를 주신다면 한번 나가 싸워서 반드시 우리(고구려 - 옮긴이)의 땅을 회복하겠습니다.”
왕은 이를 허락했다. 떠날 때 온달은 맹세했다.
“계립현(雞立峴)과 죽령(竹嶺)으로부터의 그 서쪽 땅을 우리 땅으로 회복하지 못한다면, 나는 돌아오지 않겠노라.”
드디어 (고구려를 - 옮긴이) 떠나 신라 군사와 아단성(阿旦城) 밑에서 싸우다가 적군(신라군 - 옮긴이)의 화살에 맞아 (싸우던 - 옮긴이) 중로(中路. 도중 - 옮긴이)에서 죽었다. 장사를 지내려 하니 영구(靈柩. 죽은 사람의 넋[靈]을 넣은 널[柩]. 그러니까 사람의 시신을 넣은 상자 - 옮긴이)가 움직이지 않았다. 공주가 와서 관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죽고 사는 것은 (이미 - 옮긴이) 결정되었습니다. 제발 (고구려로 - 옮긴이) 돌아갑시다.”
드디어 관이 움직여 장사지냈다. 대왕이 이 소식을 듣고 매우 슬퍼했다.
―『삼국사기』「열전」제 5 <온달> 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