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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원곡중학교 축구부 원문보기 글쓴이: 홈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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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라는 별에 태어난 생명치고 삶이라는 여로의 고단함을 생각한다면 나름대로 위대하지 않은 생명체는 단 하나도 없을 것이다. 우리 인간들도 일정부분 본능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으며 태어난다는 것 자체가 '위대한 여정'의 첫 걸음이며 생명을 유지시킨다는 것이야 말로 동물들의 이동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사회에서 위대한 여정이란 동물의 출산 혹은 먹이를 찾기 위한 여정과는 다르게 그 차원의 격이 조금 더 높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유. 무형의 유물(명예, 업적, 기록물 등등)을 남겨야하며 이에 따라 다른 객체에게 직, 간접적 영향을 주는 삶을 살아야하기 때문일 것이다.
바야흐로 21C는 전파라는 매체를 통하여 이러한 위대한 여정을 걸어가는 사람들의 수가 모든 방면에 걸쳐 과거에 비하면 상당히 많이 늘어났다. 나는 이렇게 많은 이들 중에서 [위대한 여정]의 첫 번째 주자로 박찬호를 쓴 바 있고, 두 번째로는 김연아를 썼는데 게시판의 제목은 [前無後無한 레전드 마스터(Legend Master) Yu-na의 전설을 쓰자.]였다.
이번에는 세 번째 기록으로 프리미어리그의 선구자인 박지성(朴智星) 1981년 2월 25일- )에 대하여 비교적 간단하게 살펴보고 그가 왜 [위대한 여정]을 걸어갔는지 약간이나마 그의 뒤를 따르고자 하는 후배들과 함께 그의 정신을 배워 보고자 한다.
1)EBS peopl-e 에서-
#그의 발에 페인트를 뭍혔다면 그라운드 모든 곳엔 그의 발자국이 남았을 것이다.
-축구 해설위원 서형욱-
# 너무나 평범한 영웅
Manchester United Ji-Sung Park
-타임즈의 '아시안 히스토리' -
초등학교 시절. 나는 홰소한 체격 때문에 싫은 소리를 많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생각했다. "축구는 체격으로 하는 게 아니다."라고.......
대학팀도 사정은 다르지 않아 다 퇴짜를 맞았다.
우여곡절 끝에 명지대에 어렵사리 진학했다. 그때까지의 내 인생은 늘 그랬다.
남들 눈에 띄지 않으니 '깡다구' 하나로 버티는 것이었고,
남이 보든 안 보든 열심히 하는 것을미덕인 줄 알고 살았다.
난 그렇게 보잘 것 없는 나의 조건을 정신력 하나로 버텼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눈에 띄지 않는 정신력 따위를 높게 평가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부상으로 탈의실에 앉아 있던 내게 히딩크 감독님이 통역관을 데리고 다가왔다. 히딩크 감독님이 말씀하시길.......
"박지성씨는 정신력이 훌륭하대요.
그런 정신력이면 반드시 훌륭한 선수가 될 수 있을 거라고 말씀하셨어요."
그 말은 다른 사람이 열 번 스무 번 축구의 천재다 신동이다 하는 소리보다 내 기분을 더 황홀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월드컵 내내 그 날 감독님이 던진 칭찬 한마디를 생각하며 경기에 임했다. 그리고 월드컵에서 골을 넣었다.
2003년 네덜란드 PSV 에인트호벤 이적
PSV 에인트호벤 네덜란드리그 우승
팀 유럽챔피언스리그 4강 등극
2005년 7월 한국인 최초로 영국 프리미어리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에 입단.......
아버지 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유명한 스타가 되는 걸 원하지 않아요.
10분 뛰는 것에도 만족할 것이고, 그 다음엔 20분, 그 다음엔 전반전만 뛰는 선수라도 만족할 겁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다보면 언젠가는 저도 반니스텔루이나 웨인 루니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뛸 날이 오지 않겠어요?
#박지성은 아시아에서 온 티셔츠 판매원(영국 축구팬)
#박지성은 계속 벤치나 지키고 있을 것이다.(news of the world 誌)
#유망하지만 돋보이지 않는다.(영국 BBC)
#쓰러질 지언정 무릎은 꿇지 않는다.(19살 때 인터뷰 中)
2)박지성의 기본 신상 명세
성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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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월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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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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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소속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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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및 성격 |
2000 - 2003 |
교토 퍼플 상가 |
총 76경기 11골 |
2003 - 2005 |
PSV 에인트호벤 |
총 64경기 13골 |
2005 - |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
총111경기 10골(2009. 2. 1 기준) |
2000 - |
총 75경기 10골(2009. 2. 11기준) |
박지성의 국가대표 경기 득점기록 | ||||
총10골 |
경기 일자 |
경기 장소 |
상대 국가 |
결과 및 매치 형식 |
1 |
2000-06-07 |
이란 - 테헤란 |
2-1. 친선경기 | |
2 |
2002-05-21 |
한국 - 서귀포 |
1-1. 친선경기 | |
3 |
2002-05-26 |
한국 - 수원 |
2-3. 친선경기 | |
4 |
2002-06-14 |
한국 - 인천 |
1-0. 월드컵 | |
5 |
2005-06-06 |
쿠웨이트-쿠웨이트시티 |
4-0. 월드컵최종예선 | |
6 |
2006-06-18 |
독일 - 라이프치히 |
1-1. 월드컵 | |
7 |
2008-02-06 |
한국 - 서울 |
4-0. 투르크메니스탄 | |
8 |
2008-05-31 |
한국 - 서울 |
2-2. 월드컵 예선 | |
9 |
2008-10-15 |
한국 - 서울 |
4-1. 월드컵최종예선 | |
10 |
2009-02-11 |
이란 - 테헤란 |
1-1.월드컵최종예선 |
3)박지성의 성장과정
한국 최초의 프리미어리거 박지성.
그가 처음 축구를 시작한 시기는 수원 세류초등학교 4학년 시절이다.
그는 초등학교 시절 ‘과연 운동을 할 수 있을까?’라고 생각할 정도로 체격이 워낙 왜소하여 이를 걱정한 아버지가 각종 보양식을 챙겨 먹였을 정도였다고 한다.
수원 공업 고등학교에 다닐 때에도 “심한 훈련에 성장이 되지 않을까?” 라고 생각한 이원종 감독은 두려운 마음에 남다른 배려로 가벼운 훈련만 시킬 정도였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가 뜀박질을 잘하라고 개구리를 잡아다 뒷다리를 억지로 먹였다는 일화는 이제 유명하다.
그러나 왜소한 체격과는 다르게 초등학교 6학년 때에는 제 5회 차범근 축구상을 수상할 정도로 재능에서 만큼은 두각을 나타내었다.
그를 지도한 모든 감독들이 박지성의 은사이겠지만 그래도 유년기에 결정적 역할을 한 분을 꼽으라면 빼놓을 수 없는 분이 수원공고 이원종 감독일 것이다.
박지성의 대학 진학을 위하여 이원종 감독은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그의 왜소한 체격을 본 대학 감독들은 손사래를 치기 일쑤였고, 하다못해 “지성이를 그냥 일본으로 진출시킬까? 를 고민하던 와중에 명지대학교의 김희태 감독은 눈에 들었다고 이원종 감독은 회고한다. 그리하여 이원종 감독의 추천으로 1999년 명지대에 입학한 박지성은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축구 대표팀과의 연습 경기에서 좋은 활약을 펼쳐 보이며 당시 올림픽 대표팀 감독이었던 허정무 감독에 의하여 올림픽 대표로 선발되었다.
허정무 감독은 “원래 다른 선수를 보러갔는데 박지성이 눈에 띄었다. 그는 볼에 대한 감각과 지능이 뛰어났다.
다만 힘이 약했지만 폐활량이 좋아 가능성을 높이 샀다.”고 훗날 회상한다.
일설에 의하면 김희태 감독과 허정무 감독이 친분이 있어 바둑을 두다가 박지성이를 선발했다는 말이 돌기도 하였으나 그것은 낭설일 것이다. 경력이 일천한 대학생 박지성을 교토 퍼플 상가의 강화부장에게 추천한 이가 바로 허정무 감독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무엇보다 중요한 건 무명이었던 박지성을 알아보고 여론의 의문과 질타에도 불구하고 그를 올림픽 대표팀에 선택했다는 것이고, 이 사실로 미루어 허정무감독의 안목도 대단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4)첫 도전. 교토 퍼플 상가로 가다.
박지성은 2000년 5월에 명지대를 휴학하고 일본프로축구(J-리그)의 팀 가운데 하나인 ‘교토 퍼플 상가’에 입단(이후 교토)한다.
사람들은 박지성이를 한국프로축구단에서 받아주지 않아서 일본으로 갔다고 하는데 이는 낭설에 지나지 않는다.
당시 일본 교토 팀은 대학 2년이던 박지성에게 연봉 5,000만 엔(당시 한화로 5억원)과 경기 출전수당으로 30만 엔(약 300만원)을 제시하였다고 한다. 그에게는 이때가 한번의 선택 시기였을 것이다.
물론, 일본 축구에 적응하지 못하여 2류 선수로 전락할 수도 있지만 그에게는 자신감이 있었다.
더구나 당시에는 황선홍 등 나이가 어느 정도 있는 고참급 선수들이 높은 대우를 받으며 일본으로 진출하는 경우가 많았기에 나름대로 믿는 바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박지성의 선택에 대하여 주변에서는 “너무 어린 나이에 더구나 하위권인 교토 로 이적하는 것은 너무 위험하지 않느냐”며 우려하는 사람들도 많았다고 한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교토로 간 박지성은 3년간 당시 팀 동료이던 마쓰이 다이스케, 미우라 가즈요시등과 함께 맹활약을 펼쳤다.
하지만 팀은 2부 리그로 탈락하였고, 많은 멤버들이 팀을 떠난 후에도 잔류를 선언하며 다양한 포지션을 소화하면서 팀을 다시 1부 리그로 이끄는데 많은 일조를 하였다.
2003년 1월 1일에는 일본의 FA컵 대회격인 천황배 결승에서 가시마 앤틀러스를 맞아 0대 1로 뒤지던 후반 7분에 프리킥을 받아 헤딩으로 동점골을 성공시키며 팀의 2대1 역전승을 도우면서 교토 퍼플 상가가 창단이후 처음으로 우승컵을 안는데 크게 기여했다.
그 후,
히딩크 감독이 박지성을 불렀을 때,
교토는 그를 잔류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으나 결심을 굳힌 박지성은 유럽 무대에 도전하기로 마음먹는다.
5)히딩크 감독을 찾아서 PSV 에인트호벤으로
2002년 12월경.
박지성의 네덜란드 에인트호벤으로의 첫 이적 소식이 기사화된다.
교토팀 팬들은 박지성의 잔류를 애타게 기원했다.
교토 팬들의 눈물에 박지성도 적지 않은 고민을 했다고 한다.
“히딩크 감독님이 아니었으면 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그는 말한다.
하지만 한. 일 월드컵에서 환상적인 활약으로 대한민국의 4강 진출에 크게 기여한 박지성은 영원한 스승인 히딩크 감독의 부름을 받고 네덜란드의 PSV 에인트호벤(이후 PSV)으로 이적한다.
사실 박지성이 이적한 이유로는 PSV에서 제시한 금액이 교토의 2.9배에 해당하는 엄청난 액수로 계약기간 3년 6개월에 420만 달러(약 51억원)란 거금도 한 몫 했을 것이다.
PSV로 이적한 박지성은 2003년 이적 초기에 부상 등으로 인하여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했고 이로 인해 매우 부진한 플레이를 펼쳤다.
이 때문에 홈팬들로부터도 야유를 받을 정도에 이르렀고,
플레이가 위축되는 극심한 슬럼프를 겪는다.
그때 힘들어하는 박지성에게 히딩크 감독은 말한다.
“더 큰 선수가 되고 싶으면 유럽에 남고, 아니면 아시아로 돌아가라.”
박지성은 이 말에 다시 도전할 수 있는 용기를 얻었고,
부상치료 후, 서서히 페이스를 끌어올리면서 점점 발군의 기량을 보이기 시작하면서 팀 내 주요선수로 발 돋음 하기에 이른다.
특히, 윙어 아르연 로번과 골게터 마테야 케즈만이 프리미어리그로 떠난 04-05시즌엔 에인트호벤의 전력이 현저히 약화되었다는 네덜란드 언론의 예상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그의 활약으로 PSV가 다시금 네덜란드 리그를 제패하게 된다.
또한 챔피언스리그에서는 4강에 입성함에 있어서 공격진의 핵심선수가 되어 대활약하였다.
당시 박지성이 PSV에서 얼마나 대단한 활약을 하였는지는 다양한 증거들로서 찾아볼 수 있다.
먼저 마르크 판 보멀은 지난 시즌 불만을 표시했던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공개적으로 사과하는 인터뷰를 하였으며 04-05 챔피언스리그 16강 AS 모나코전과 8강 올림피크 리옹전 당시 경기를 중계하던 프랑스 해설가들은 박지성의 활동반경과 위협적인 움직임에 대해서 내내 찬사을 보냈다.
챔피언스리그 4강 AC 밀란과의 원정 1차전에서 0대 2로 패배한 수 실낱같은 희망만을 가지고 있던 PSV의 홈 2차전 예상에서 네덜란드 축구의 레전드 요한 크루이프는
“기적이 일어난다면 박지성의 발끝일 것”이라 예상했고,
과연 그의 말대로 박지성은 AC밀란전에서 당시 박지성을 상대했던 선수인 젠나로 가투소는 박지성을 마크했던 일이 괴로운 기억이었음을 추억하는 내용의 에세이를 일본 축구 잡지에 송고하였으며 시즌 종료 이후 박지성의 거취가 화두에 오르자 주장이었던 필립 코쿠는 박지성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내용의 컬럼을 게제하였다.
무엇보다 가장 극적이었던 것은 그렇게 박지성을 괴롭혔던 PSV의 팬들의 야유가 열광적인 ‘위숭 빠르크’송으로 바뀌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환상적인 시즌을 보낸 박지성에게 들려온 소식은 프리미어리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부터의 관심이었다.
6)박지성. 한국인 최초의 프리미어리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시절.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이후 맨유)는 2005년 UEFA 챔피언스리그 16강전에서 AC 밀란에 치욕적인 2연패를 당하며 탈락했다.
두 경기 모두 0대 1 패배였는데 AC밀란의 두터운 수비벽을 뚫지 못한 것이 가장 큰 패전 요인이었다.
그런데 이 대회에서 PSV 소속이었던 박지성은 AC밀란과의 2강 2차전 홈경기에서 불과 전반 9분만에 순간적인 돌파를 통해 선제골을 기록하였고 이것을 주목한 맨유의 알렉스 퍼거슨 감독이 박지성 영입을 결심하게 되는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박지성은 2005년 6월 계약을 하고서 2005년 7월 14일 입단식을 갖고 맨유 FC에 연봉 200만 파운드(약 36억원)을 받고 공식 입단하게 된다.
유럽 진출 2년 6개월 만에 한국인 최초의 프리미어리거가 된 것이다.
박지성이 맨유에 입단할 때, 큰 기대를 받으면서도 상당수의 대한민국 축구팬들과 거스 히딩크 감독까지 박지성이가 후보로 전락할지도 모른다고 걱정하였다.
이때 히딩크 감독이 박지성에게 보내온 격려의 편지가 눈길을 끈다.
[지성에게
내가 처음 자네를 만났을 때는 아직 어린 선수였지. 대단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었어. 하지만 자신이 얼마나 우수한 자질을 지녔는지 깨닫지 못하고 있더군. 월드컵을 준비하면서 눈부시게 성장했고 날이 갈수록 자신에 찬 모습을 보여주었지.
월드컵이 끝나고 네덜란드 PSV 에인트호번에 합류한 자네는 한동안 어려운 시기를 보냈지. 당연한 일이었어. 모든 면에서 완전히 새로운 환경이었으니까.
낯선 나라에 알지 못하는 언어, 생소한 문화, 몸에 배지 않은 훈련방식.......
무엇보다 3년 이상 쉬지 않고 경기를 해온 탓에 몸에 무리가 간 것이 자네를 더욱 힘들게 했지. 오른쪽 무릎 부상으로 고통당하면서도 기술진이나 의료진에게 아프다는 말도 하지 않았어. 역시 박지성다운 행동이었다고나 할까. 묵묵히 , 아무런 불평 없이 최선을 다해 뛰고 또 뛰는 것 말이야.
클럽 안팎에서 들려오는 자네에 대한 불만의 소리들도 적지 않았어.
하지만 자네는 해냈어. 시련의 시기를 견뎌내고 마침내 PSV에서 가장 특별한 선수, 가장 사랑받는 선수 가운데 하나로 우뚝 섰어, PSV서포터들과 에인트호번 시민들도 열광했지.
자네가 세계적인 스타 플레이어가 되어 PSV를 떠날 때,
팀의 동료들과 팬들은 그 동안 온몸을 던져 보여준 투혼과 헌신에 뜨거운 신뢰와 박수를 아끼지 않았네.
앞으로도 묵묵히 아무런 불평없이 최선을 다해 뛰는 그 박지성을 기대하겠네.
with best regards
From Gurs Hiddink
-박지성의 자서전 멈추지 않는 도전 中-]
그러나 박지성은 모두의 염려를 편안하게 만들면서 첫 번째 시즌을 성공적으로 보내며 맨유의 스쿼드 로테이션의 한축이 되었다.
박지성은 주로 오른쪽 윙인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와 왼쪽 윙어인 라이언 긱스와 번갈아가며 출전하였으며 2006년 9월 토트넘 핫스퍼와의 경기에서 얻은 부상으로 수술후 회복에 성공해 12월 18일 웨스트햄 유나이티드와의 원정경기에서 복귀하였다.
수술 후, 박지성은 주변의 우려와 달리 예전보다 더 나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블랙번전에서 1골 1도움을 넣는 활약을 펼친 후,
선수생명의 연장을 위해 미국 콜로라도에서 수술을 받았으며 2008년 3월 1일 박지성은 풀럼 FC와의 원정 경기에서 긴 재활 기간에서 돌아와 스콜스의 크로스를 헤딩으로 받아 넣으며 07-08 시즌 첫 득점을 기록했다.
하지만 부상 복귀 이후 3월 한달 간 꾸준한 선발 기회를 잡지 못하던 중 박지성은 국내에서의 출장 기회에 대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UEFA 챔피언스리그 8강 1차전 로마와의 원정경기에 선발 출장하여 후반 브라운의 크로스를 헤딩으로 연결하며 루니의 골을 어시스트하였다. 또한 며칠 후인 4월 6일 그는 미들즈브러와의 원정경기에서 테베즈와 교체되어 들어가 루니에게 결정적인 동점골을 어시스트함으로써 맨유를 패배의 위기에서 구출하기도 하였다.
2008 4월 9일 올드 트래포드에서 열린 UEFA 챔피언스리그 8강 2차전에서는 다시 선발 출장하여 박지성은 엄청난 활동량을 보이며 공격은 물론 수비에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로써 총합 3대 0으로 승리한 맨유는 4강에 진출하였고 박지성은 아시아 선수로는 최초로 세 시즌동안 챔피언스리그 4강에 진출하는 기록을 이루어냈다.(2004-05년 에인트호벤, 2006-2008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4월 23일과 4월 29일 FC바로셀로나와의 준결승에서 두경기 모두 선발 출장하였고 맨유가 합계 1대 0으로 승리하는데 기여하여 결승전에 진출했으며 결승전이 열리는 러시아로 날아가기 까지 하였다.
이때 러시아 축구 대표팀 사령탑을 맞고 있던 거스 히딩크는 스포츠서울 홍민재 통신원과의 현지 인터뷰에서 애제자를 만나는 기쁨을 이렇게 표현했다고 한다.
“박지성을 이곳 모스크바에서 이렇게 큰 경기에서 다시 보게 되다니 정말 자랑스럽다.”
“그는 챔피언스리그 결승에 나서는 선수들 중 내가 가장 보고 싶은 선수다. 결승전에서 행운을 빈다.”라고.......
정작 박지성은 결승전에서 퍼거슨 감독의 공격지향적 전략에 의하여 벤치에서 앉아있지도 못하고 갑작스럽게 명단에서 빠져 출전조차 하지 못하였다.
한국인 최초의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의 기대감이 산산조각 나는 날이었다.
2008-09 시즌 초반에는 출장하지 못하다가 2008년 9월 21일 첼시 FC와의 원정 경기에 시즌 첫 출장했고, 박지성은 이 경기에서 선제골을 기록하였다.
현재는 팀 동료인 루이스 나니와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며 선발 출전하는 경기가 많지만 PSV 에인트호벤 시절에 비해 득점력이 저하된 점은 그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7)박지성의 경기 스타일
자서전에서도 밝혔지만 박지성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을 꼽으라면 히딩크 감독과의 만남일 것이다.
히딩크 감독은 2001년 1월 칼스버그컵 파라과이 전에서 박지성을 수비형 미드필더로 첫 출전시켰다.
하지만 다음 컨페드컵 호주전에서는 왼쪽 미드필더로 출전시켰고, 중국과의 평가전에서는 오른쪽 윙백으로 출전시키기도 하였다. 이는 히딩크 감독이 박지성의 포지션을 딱히 하나로 규정하지 않고 여러 포지션에서 시험했음을 말해준다.
이후 히딩크 감독은 박지성에게 미드필드 중앙에서 공수전환을 맡아 경기 조율을 하는 플레이메이커 자리를 부여하였다.
그리고 에인트호벤에서도 챔스리그 경기에서는 같은 역할을 주어 돌풍을 일으키는 원동력을 만들어주었다.
하지만 그 외 박지성은 주로 공격형 미드필더로 활약한다.
그는 수비가담 능력이 매우 뛰어나다.
또한 ‘산소탱크’라는 별명에 걸맞게 좌, 우, 중앙에서 뛰어난 위치선정 능력을 보이고 있다. 패싱 능력도 준수한 편이며 스피드도 수준급이며 특히 볼에 대한 집착이 대단하지만 골에 대한 개인적 욕심보다는 팀을 위한 플레이를 주로 한다.
이로 인하여 골 결정력에서는 부족한 면을 보이고 있지만 위기의 순간에 좋은 활약을 보여 100경기 출장 위업 달성 이후에도 꾸준히 주전 자리를 꿰차고 있다.
특히 박지성은 맨유에서 세 개의 폐를 가졌다고 할 정도로 열심히 뛰는 선수로 유명하며 이 때문에 팀에서도 보이지 않는 영웅으로 인정받는 계기가 되었다.
8)박지성의 위대한 여정은 이제 한창이다.
박지성이의 나이가 이제 만 28살이다.
나는 아직도 그의 기량에 대하여 나날이 발전하고 있음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박지성이에게 가장 크게 생각하는 점은 위에 열거된 모든 것보다 히딩크 감독이 말하는 정신력이다.
히딩크 감독이 말하는 정신력은 다름 아닌, 이루고자 하는 노력을 말하며 이것이 승부근성으로 나타날 때 그 열정이야말로 우리가 좋아하는 박지성이의 가장 큰 재산일지 모른다.
신체적 조건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끊임없는 노력 그리고 불굴의 볼에 대한 욕심.
그것은 우리 모두가 배워야하고 이것이야말로 그를 좋아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본질적인 이유일 것이다.
9)글을 마치며-
역대 최고의 선수라 불리던 분데스리가의 차범근 선수은 타고난 신체적 조건을 가지고 있는 반면 박지성은 후천적 승부욕으로 자신의 성과를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황금알을 낳은 거위처럼 아주 조금씩 자신의 모습을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그가 낳는 황금을 탐하여 아주 커다란 욕심을 낼때, 다시는 박지성이를 통한 기쁨을 누리지 못 할 수 있다.
박지성은 욕심내고 팬들은 욕심내지 말고 그냥 보아주자.
역시 다른 무엇보다 노력하는 박지성의 성품이야말로 가장 위대하기에 그냥 아낌없는 성원만 보내주자. 그의 프리미어리그 [위대한 여정]에 기쁨과 영광 그리고 슬픔과 눈물도 모두 사랑하자.
그의 여정이 끝나는 날까지 온 국민이 함께 할 것이라 여겨진다.
그러면 욕심 많은 박지성이도 행복하지 않겠는가?
PS: 참조 글: 위키백과 - 우리모두의 백과사전
안병근 공주교대 교수님의 [理知논술/통계로 세상읽기]왜 박지성은 자꾸 이적을 할까? / 스투 변기자님 / 스포츠 서울 홍민재 통신원의 히딩크 취재내역 中 / 기타 출처 불명의 여러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