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4째주 목요일은 추수감사절 이죠. 아마 교회나 성당에 다니시는 분들은 잘아실 것 입니다. 1620년 영국의 청교도 102명이 신대륙에 상륙해 질병으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인디언들의 도움으로 이듬해 가을에 곡식을 거둬 들일수 있었죠.
총독 윌리엄 브래드퍼드가 이를 축하하기위해 칠면조를 잡고, 3일간 연회를 열고 하나님께 감사를 올리던 것이 효시가 되었답니다.
우리나라에도 날짜는 정해지지 않았지만 가을추수가 끝나면 지역마다 특유의 축제나 전통민속놀이들이 있는데요 역사적으로는 고구려의 동맹(東盟), 부여의 영고(迎鼓), 동예(濊)의 무천(舞天)이라는 제천행사가 있었고,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추수가 끝나는 10월경이면 탈춤이나 민속놀이등의 형식으로 조상님께 감사드리고 이웃간의 우의를 돈독케하는 행사는 이어져 내려왔던 것 같습니다.
산음리에서도 가을추수를 서로서로 축하하고 이웃간의 정을 나누는 축제가 있었는데, 이곳에서는 농악패들의 북과 꽹과리로 장단을 맞추고 청년들이 흰색 삼베옷을 입고 머리에 고깔모자를 쓰고 전통가락에 어울리는 신명나는 춤을 추었습니다.
농악패의 공연중에는 팥고물이 듬뿍 얹혀있고 채 식지않은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시루떡이 릴레이로 나왔고, 닷되들이 흰플라스틱통엔 지둔지표 막걸리가 연세 지긋하신 어르신들의 덕담과 더불어 쉴새 없이 오고 갔습니다.
공연자와 청중이 어우러져 막걸리 사발이 오고가며 금새 놀이판은 웃음과 흥겨움으로 만취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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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신명나는 놀이판의 백미는 역시, 상모 돌리기 였습니다.
흰색의 긴꼬리가 달린 챙이 달린 둥그런 모자를 쓰고, 지면과 비스듬히 누운듯한 아슬아슬한 자세로 마치 팽이가 돌아가듯 회오리치듯 돌아가던 그 몸놀림은 성인이 된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커다란 문화적 충격이었습니다.
전통문화를 계승하려는 요즘의 동호회나 클럽과 비교하여도 전혀 손색없는, 아니 더 나은 실력이었고, 춤이라기 보다 기계체조에 가까운 세계적 수준의 비보이 공연이 요즘 청소년의 우상이라면 유년기에 제가 보았던 역동적인 상모돌리기야 말로 신선한 충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나중에 알게된 사실이지만, 당시 농악공연은 마을자체에 전통적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풍습은 아니었고, 새마을운동의 확산과 더불어 농촌계몽운동이 활발했던 당시 4H클럽의 주도로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당시 아버지께서 4H클럽일을 맡아하시면서 봄,여름엔 저희집에 농촌체험을 위하여 도시의 많은 젊은이들이 방문하곤 했는데, 그 수십명의 밥상을 차리려면 어머니께서는 없는 형편에 고생이 많으셨고, 속으로는 다소 지겨우셨으리라 생각해 봅니다.
산음리에서 이사간후 몇 년뒤에 고향에 가기위해 용문터미널에서 버스를 기다리는데 어떤 20대 아가씨가 “혹시, 아버님이 김○○씨 아니니?” 하면서 물어본적이 있는데 그분도 농촌체험인 중 한 명 이었으리라 짐작이 갑니다.
농악놀이는 고가수의 동쪽 거북바위 위쪽에 뒷양지집이 3채가 있었는데, 맨윗집은 “권광~”로 나가는 분의 댁이었고, 가운데는 14회 이승희동문의 집이있었죠, 그 집에서 공연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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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나는 농악놀이가 무르익어가고, 어르신들이 술이 거나하게 취해있을때, 주복이와 저는 막걸리 한사발에 설탕을 몇숟가락 넣어서 마셨습니다. 당시에는 어른들 몰래 이런거 많이 마셔보셨죠?
그런데, 놀이가 끝날때쯤 되니 주복이가 보이질 않았습니다.
한참을 두리번 거리며 뒷양지 언덕에서 내려오고 있는데, 보름달에 반사된 작달막한 그림자 하나가 뱀처럼 구부러진 소로(小路)를 비틀거리며 걷고 있었는데, 채 다섯발걸음을 못가서 넘어지고, 또 가다가 넘어지고를 반복하는게 아니겠어요?
한참을 유심히 보노라니 주복이가 틀림없었습니다. 과음을 했던 게죠.... 저는 절대 어린이가 술을 먹어선 안된다는 철칙을 지켰던 것이고요..
큰집위에 천지송으로 가기전에 있는 작은언덕까지 어깨동무로 이리비틀 저리비틀 하고있는데, 밤늦도록 오지 않는 주복을 찾으러 큰형인지 누가 이쪽으로 오고 있었습니다.
소심한 성격에 졸지에 공범으로 몰릴까 걱정된 저는 김장독을 묻은 삼각뿔 모양의 짚단뒤로 숨었습니다.
결국, 커다란 그림자가 작은 그림자를 업고 구불구불한 언덕길을 오르고 있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천천히 시야에 노출되지 않는 만큼의 적정거리를 유지하며 뒤를 따라 올라갔습니다.
첫댓글 그때나 지금이나 현명한 판단력과 똑바른 사고방식이 오늘의홍창이를 만든것이 아닐까싶다 너 어떻게 권광호까지 기억을 했니 나보다 1년 이나 2년 선배되지싶어 근대 우리동내사람들은 모두다 친해서 그냥 친구처럼 이름 부르며 놀았단다 6회 영철이 진구 현수 명수 주영이 주호 금영이 병숙이 새삼스럽다 그당시 정말 농악놀이 많이 해긴했다 진땡이 막걸리에 냉수를 적당히 타서 마시면 유난히 맛있었는데 우리 할머니는 막걸리 거를때 어린 우리들한테 간을보라 하셨단다 집에서 담은 막걸리말야 그 이후 막걸리는 술이 아니라 그냥먹는 음료로 생가이 들었어 찬 보리밥을 막걸리에 말아 먹으면 그 맛이 일품이란다
가페에 나오진 않지만 4회 권광춘이란 분은 6촌인 충현의 작은 어머니 이십니다. 그분이 저를 업어주셨다더군요, 옛날 그 미모와 아가씨같은 허리를 유지하고 계시죠. 그랬었군요, 술이 아닌 음료로서의 막걸리, 정겨운 우리의 토속주 였죠. 요즘엔 지평에 공장이 있는데 포천것 보다 더 달착지근 하더라고요. 그 때도 아마 이장님댁 에서 공수한 돼지고기가 있었을 것입니다.
이미지가 손상되었네요 애써 만든것이 한번더 손을보고 다듬어야 할것같지요? 홍창 동문님 수고많네요 화이팅!
늦은밤 댓글 감사드립니다. 용량 문제로 이미지가 보이지 않는 컴퓨터가 있는것 같습니다. 잘 보일수 있도록 손질해 보겠습니다.
모든것이 손볼데가 없을듯 반듯하네요.. 저도 기억에서 벗어난것들을 이렇게 추억해주니 차츰 기억을 거슬러 갔었네요.. 그래야만 했었구요.. 음,.. 감탄밖엔 나올게 없는듯.. 홍창이 머리속엔 무엇이 있을까.. 아님 내가 차츰 기억을 잊어가는걸까.. 많은 생각을 하게해준 후배이면서 동생이면서 어쩌면 아주 선배같은 홍창이가.. 너무나 커보이네요.. 아주큰 소나무같이 든든하게 느껴져요.. 고마워..^^
그 옛날 추억을 되 살리게 하는 글을 다시 올려 주셨군요...우리 산음1리에도 농악대가 있었죠..."농자천하지대본" 이란 기대가 제일 앞이고 다음이 농악대를 이끌고 지휘하는 꾕과리 상쇠잡이, 그 뒤에도 꾕괴리, 북, 복고, 나팔수, 상모 들리는 사람 3명등 머리에 고깔을 쓰고 뒤 딸았으며 농악대 뒤에는 신명나는 춤을 추는 춤꾼들이 뒤를 따랐죠...당시엔 동네분들의 큰 구경거리 였으며 신이 나는 분들은 그뒤를 따라 덩실 덩실 춤을 추곤하였죠...당시엔 어른 아이 할것없이 모두다 모여들어 구경을 했죠...우리집 밖앗 마당이 놀이터도 되고 사랑채 마루가 무대가 되어 연극 공연도 한적이 있습니다...-_-...
구경거리가 없던 그 시절엔 모든 동네 사람이 모여들어 구경하는 큰 잔치 마당이었습니다...모 심을때도 농악대를 운영했으며 긴 장대에 "농자천하지대본"깃발을 깃대를 논 두렁 위에 꽂아놓고 노래를 불러가며 모심던 시절의 기억이 생생이 떠 오릅니다...당시 산대 안골을 중심으로한 산음1리와 고가수 수청을 중심으로 한 산음2리 농악대가 구성되어 있었군요...지금 생각인데 농악 놀이는 상부(면사무소, 군청)으로 부터 장려 정책 이었을 겁니다...아무튼 당시 농악 놀이는 우리들이 어린시절 촌에서 크나큰 구경거리 였습니다...*(^0^)*...
저보다 산음리에서 더 오래사셨던 선배님이시라 기억이 더 섬세하신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온동네 잔치가 바로 그 농악놀이였던것 같습니다. 다시생각해봐도 절로 어깨춤이 덩실덩실 추어질것 같은 광경입니다.
언제 기회가되면 집에서 담은 막걸리는 힘들겠구 지평 막걸리에 총떡이나 먹으면서 토킹 어바웃해보자 아재는 필히 있으셔야 하구 용문산 막걸리도 엄청맛있어 산음리의 잔잔한 이야기가 한창 무르익어가네 이맘때쯤이면 옥수수 낫가리를 하나둘씩 헐어서(이표현이 좋아) 송곳으로 듬성듬성 고속도로 뚤어놓고 손으로 알갱이를 따면 참재미있었는데 사랑방에 소죽불 지펴놓고 말리면 습습한 옥수수향이 초겨울을 대신했단다
그 옥수수 알갱이 바짝말린거 잘 모아두었다가 대장간하는 영복후배님 집에서 뻥튀기 해먹었잖아요. 쩝 총떡먹어본지는 30년이 넘었네요
무월누님은 지상에서 가장 좋은 멘트로 칭찬을 해주셨네요,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짧은 제글을 통해서 묻어두었던 추억을 캐낸다면 그 역시 세상을 살아가는 작은 기쁨일 것입니다.
잘 보입니다. 11탄두 대박이 예상됩니다. 언제 쐬주한잔 합시다.ㅎㅎ
감사합니다. 쐬주는 많이는 못하지만 한잔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
추위에 떨고, 아름다운 글에 또 한번 떨어 봅니다. 작은 동네에서 나도 잘 모르는 지ㅣ명이 있습디다. "천지송"이란 이름이 마음에 와 닿소. 생각해보니 무경이네 집앞의 솔나무를 천지송이라 부르는것 같소만. 추운 겨울밤의 군불같은 이야기에 취해봅니다.
아랫동네까지 방문해 주시고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천지송은 무경선배의 생가가 있는 언덕입니다. 좋은 하루되십시요
선배님 글 올리느라 수고 하셨어요 앞으로도 좋은 이야기로 우리를 즐겁게 해주세요~~~
댓글 감사드립니다. 후배님도 가끔씩 좋은글 올려주시고 계시죠....
믄득 .,홍창이가 올린 글 보면서 매번 그렇게 느끼는데요.. 10살이란 나이에 그정도나이면 한창 어리광부릴 코흘리게(요즘 아이들같지 않고..) 에 불과한 아이임에도 이렇듯 그시절의 기억을 고스란히 갖고 있는게 너무나 의아하면서 한편엔 기특하단 생각을 안할수가 없네요.. 근데,. 그시절 놀이감도 없이 겨울이면 눈밭을 놀잇감![삼](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17.gif)
고 ,여름엔 물흐르는곳엘 의지하면서 그렇게 어린 유년시절을 보냈으니, 나보다 어른들의 행동들을 유심히 볼수밖에 없었을것 같단 생각도 해봅니다.. 저만해도 어린시절이 선명하게 떠오르는게 있어요.. 아마 홍창이도 그중 가장 잊혀질수없는 그무엇들을 머릿속가득 담고 있는듯하네요..아마도![!](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54.gif)
^^
맞아요. 아이들을 공기탁한 사각의 차단된 공간에 가두고 시력을 저하시키는 디지털기기로 가득찬 현대문명에서는 절대로 느낄수 없는 순백의 동심과 맑은공기, 투명한 물, 정겨운 농촌문화등은 그 무엇으로도 살수없는 소중한 지적재산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옥수수 낫가리는 수많은 옥수수를 매달아 예술적으로 또는 과학적으로 만들었던 거 같습니다, 밤으론 송곳으로 타개고 알갱이 분리 작업을 하고 영복이네 집에서 뻥튀기 만들고 정월이면 조청에 동그랗게 뭉쳐두고 먹기도 하고... 뻥튀기 기계옆에 삑사리난 거 주워 먹으려고 잠복해 있다가 야단을 맞기도 하고...ㅋㅋ
난 잊지 이세상에서 홍창이가 쓴글이 제일 좋단다 왜냐하면 잊혀진 추억을 한개도 흘리지않고 고스란히 주어서 싹뛰었잖아 나이들어 그런지 금방 들은말도 잊기가 일쑤다 하지만 홍창인 달라 그옆에서 열심히 어시스트하는 현주도 이쁘고 막상 가보면 볼것도 없는 산음리 하고도 고가수 거긴 우리의 유년시절의 꿈이였던 곳이기에 더더욱 애틋하다 부모님이 살아계셨음하는 아쉬움 때문에 그리움만 더해가는 고가수가 마음을 애잔하게 한다
딱 맞는 말씀이네요. 지금은 잡초만 무성한 고가수, 동댕이, 유년시절에 그렇게 커보였던 나무며, 성황당이며, 띠길이 왜그렇게 작게 보이는지, 그렇지만 그런 소재들을 보면서 추억을 회상하게 되지요, 또한 너무어려서 몰랐던 큰누나, 둘째누나와 현재진행형으로 만들어가는 지금이순간이 제2의 추억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