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씨는 정유재란에서 수 많은 조상께서 전재산을 군수에 썼고, 형제숙질이 가복을 거느리고 싸웠다. 오늘날 우리 협계태씨가 희성이 된 것은 당시 많은 분들이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려다 전사했기 때문이다.
■정유재란과 남원
1. 정유재란의 발발
임진년 이후 왜란이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심유경(沈惟敬)은 왜군과 함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본영에 들어가 화의를 종용하였다. 이로부터 2, 3년 동안 몇 차례 일본과 명나라 사신이 왕래하였으나 사신 심유경이 중간에서 일본의 요구가 명나라에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을 알고 거짓으로 본국에 보고하였다. 후에 이 사실이 드러나게 되어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크게 반발하고 이로 인해 그는 조선을 다시 침략할 것을 도모하게 되었다. 이것이 이른바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게 된 동기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4만여 대군을 조선을 향하여 출발시켰다. 이 때 일본 수군은 이순신이 조선의 수군에 없는 틈을 타서 간계(奸計)를 써 원균의 함대를 다대포(多大浦)와 칠천양(漆川梁)으로 유인 전멸시켰다. 이 싸움에서 전에 이순신이 정비해 두었던 모든 전함이 완전 파괴되었고, 원균을 비롯하여 전라우수사 이덕기(李德祺), 충청수사 최호(崔湖), 조방장(助防將), 배흥립(裵興立) 등이 전사하였다. 이에 기세가 오른 일본군은 7월 28일부터 행동을 전면 개시, 우끼다 히데이에를 총대장으로 하고 고니시 유기나가를 선봉으로 하여 조선의 전지역을 총공격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일본군은 경상도를 중심으로 전라도 일대까지 점령하였다.
2. 남원성을 지키기 위한 준비
명나라에서 온 구원군은 전라도와 충청도를 왜군의 공격으로부터 보존하려면 전라도의 문호인 남원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즉 많은 병력을 남원성에 주둔시켜서 왜군의 공격을 차단함으로써 전라도와 충청도를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처럼 전략적으로 중요한 남원을 수호하기 위한 당시 우리나라 정부의 전략은 어떠하였는가. 남원에는 남원성과 교룡산성이 있었다. 선조 30년 2월에 도원사 권율이 경상도 대구에서 머물면서 남원의 병기를 대구로 보내게 한 일이 있었다. 이는 남원지역이 임진왜란 때 피해를 당하지 않아 대구에 상총통을 보낼 정도로 병기가 넉넉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남원성의 수비 여하에 따라 영남과 호남이 좌우되는데 병기를 대구지역으로 보내도록 명령한 조치는 정부의 적극적인 남원성의 방어 계획이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외에도 다른 문헌 기록들을 살펴볼 때 명나라의 구원군이 남원에 오기 전에는 교룡산성을 중심으로 한 방어 계획이 수립되기는 하였지만 당시 정부의 남원성 수비 계획이란 특별한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남원성의 수비는 명나라에서 구원군으로 왔던 양원(楊元)의 군대에 의해서 전적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양원은 서울을 떠나 전주를 거쳐서 6월 13일 남원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남원성 내에 있는 용성관에 남원성을 지키기 위한 작전본부를 설치하였다. 이보다 앞서 전주에 도착한 양원은 순찰사에게 모든 읍에 있던 군졸과 군마를 남원성으로 모이게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양원이 남원에 도착한 뒤에는 지금까지의 남원성을 지키려는 계획과는 상당히 달라지게 되었다. 교룡산성의 군량과 군기를 남원성에 운반하고, 남원성에만 전력하라는 작전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이러한 양원의 계획에 비변사의 관료들은 산성과 부성은 기각지세(奨角之勢)에 있으므로 두 성을 다같이 지켜야 된다고 누차 말하였으나 명나라의 구원군이 도착하면서 양원이 조선군과 명나라군의 작전 지휘권을 장악하게 되면서부터 산성의 수호 계획을 파기하고 남원부성의 수호 계획만을 일방적으로 결정해 버린 것이다. 이처럼 양원이 오기 전에는 남원의 방어 계획은 산성 중심이었는데, 양원이 온 후에는 부성 중심이 되었다.
3. 남원성 싸움의 전개
조선의 관군과 명나라 구원병이 왜군과 직접 싸움을 시작하게 된 것은 왜군이 남원에 대부분 도착한 정유년 8월 13일부터이며 남원성이 함락된 8월 16일까지 싸움이 계속되었다.
전투 첫날인 13일은 왜군의 대부분이 남원성 주위에 도착하여, 공격부대를 결정하고 남원성을 포위한 뒤 포위망을 좁히려고 공격을 했지만 이에 대해 조선 관군과 명군이 진천뢰, 승자총 등을 계속 적을 향해 쏘아대 포위망을 좁힐 수 없었다. 그 뒤 소수 병력으로 조선 관군과 명군을 교란시켰다. 이는 전력을 미리 파악하기 위하여 교대로 소규모적이고 산발적인 공격을 한 것 같다. 전투 이틀째인 14일은 왜군이 대 토목공사를 일으켜 공격준비를 하였다. 왜군은 또한 남원성을 공격하고 병력의 시위를 하였다. 조선 관군과 명군은 왜군의 공격으로 인하여 성첩의 수비병이 많이 죽었기 때문에 사기가 위축되었으며 인심은 흉흉하였다. 게다가 양원은 항상 자기 자신만을 과시하면서, 무모한 작전을 전개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조선 관군과 명군에 있어 인적 물적 손실과 사기의 위축만을 초래하였다.
15일의 싸움은 낮에는 왜군의 대규모 공격이 없었고 산발적인 공격만 있었다. 한편 왜장 고니시 유끼나가(小西行長)는 양원에게 빨리 성을 비우라는 연락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양원은 왜군의 이러한 요청을 끝까지 거부하였다. 이러한 양원의 강경한 자세에도 불구하고 남원성이 포위된지 며칠 안되어 조선 관군과 명군의 사기는 극도로 위축되었다. 그런데, 밤에는 왜군의 공격이 성을 함락시킬 정도의 대규모 공격은 아니었으나 매우 치열하였다. 이처럼 왜군의 공격이 심해지자 성안에 있던 군인이나 민간인들의 사기는 더욱더 저하되었다.
남원성 싸움 마지막 날인 16일, 일부의 왜적은 풀과 논의 볏짚을 베어 민가의 타다 남은 담벽에다 수없이 쌓았으며 나머지 일부의 왜군은 성안에 있던 조선 관군과 명군을 공격, 치열한 전투를 계속하였다. 양원은 사태가 이렇게 되자 전주에 여러번 구원요청을 했으나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이날 밤 성은 왜군에게 함락되고 양원은 도망가 버렸다. 이 싸움에서 조선측은 장군, 의병, 군졸 및 부민이 거의 다 전사하였다. 명군 역시 중군 이신방을 비롯해서 천총 장표와 모승선을 잃게 되었으며 군졸 또한 대부분이 죽었다. 왜군은 17일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전승을 보고하고, 이틀동안 성안에 머물러 있으면서 살인과 약탈을 자행한 뒤에 남원을 떠나 전주로 향하였다.
4. 남원성 함락의 원인
병력■무기■수성준비 등의 남원성의 내적 요인과 지리적 관계, 외부의 지원 여부, 정부의 조처 등의 외적 요인으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내적인 요인을 보자.
첫째, 남원성의 수성장(守城將)인 양원의 수성준비(守成準備)의 소홀과 무모한 작전 때문이었다. 양원은 수성준비도 하지 않으면서 산성까지 파기시켰다. 또한 8월 14일에도 필요 없는 작전을 전개하여 병력의 손실과 사기만을 저하시켰다. 이처럼 양원은 자기 자신을 과신한 나머지 즉흥적인 작전을 일삼았다.
둘째, 중과부적(衆寡不敵)이었다. 왜군은 56,800여명이었는데, 아군은 4,300여명에 불과하였다. 또한 부민(府民)까지 합쳐도 왜군이 10여배나 많았다. 이처럼 현저한 병력의 차가 있었기 때문에 아군이 승리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병력뿐만 아니라 무기에 있어서도 조총 때문에 아군은 왜군에 대한 공격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셋째, 아군의 사기는 극히 저하된 반면 왜군의 사기는 왕성하였다. 아군은 도망자가 속출하였지만 왜군은 병력, 무기 등의 모든 면에서 아군보다 우세할 뿐만 아니라 생사를 가리지 않는 주종관계가 확립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기가 충전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 외적인 요인에는 무엇이 있었는가.
첫째, 아군은 지리적 지형, 지물의 장점을 이용하지 못했다. 양원의 지시에 의해서 교룡산성을 파기하고 남원성에서 왜군을 막으려고 하였다. 이로 인해 부민들의 사기를 떨어뜨렸고, 조정대신도 물론 포기상태였다. 또한 적의 진로를 차단하지도 못했다. 숙성령(宿星嶺), 율치(栗峙)에서 올라오는 왜군을 공격하지도 않았으니 지리적 이점을 전혀 이용하지 못하였다고 할 수 있다.
둘째, 전투시 성밖에서의 지원이 없었다. 남원성은 산성이 아니라 야성(野城)이므로 적이 성을 공격하는데 성벽 외에는 장애물이 없다. 산성이 파기된 이후의 남원성은 공격하는 왜군의 입장에서는 전혀 공격의 어려움이 없었는데 구원병은 한명도 오지 않았다.
셋째, 정부의 소극적인 수성의지(守城意志)로 임시방편의 조치만 취하였다. 남원의 중요성만 말하면서 명군을 보낸 후에는 오로지 그들에게 의지하고 관전하는 상태였다.
5. 정유재란과 남원성 싸움의 관계
남원성의 함락으로 말미암아 충청도와 전라도가 붕괴되었고 또한 서울까지 민심이 동요되어 세자와 중전이 피난길에 오르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와 같이 남원성 싸움은 남원 지방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조선 전체가 붕괴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었던 매우 중요한 싸움이었다.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남원이 함락된 후 양호의 인민은 왜군이 온다는 소리만 들어도 붕괴되어 흩어집니다. 또한 열읍의 수령이 곳곳에서 도망가거나 숨어 버렸습니다. 그리하여 직로 수백리되는 곳까지 무인지경이 되었습니다."
이 같은 기록은 남원성의 함락으로 전라■충청도가 붕괴되어 무인지경이 되었으며 심지어는 각 읍현의 수령까지도 도망가 버렸음을 말하고 있다.
정유재란은 임진왜란의 연장으로 조선이 크나큰 피해를 당한 전쟁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만약 조선 정부가 남원의 수비를 좀더 강화했었더라면 이 전쟁은 쉽게 끝나고 피해도 많이 줄였을는지도 모른다. 그만큼 남원은 정유재란에서 지리적■심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남원성을 함락 당하자 조선 관군과 명군의 연합군은 힘없이 무너지고 만 것이다.
■만인의 총
■ 만인의총은 정유재란(1597년)때 남원성 전투에서 순절한 민, 관, 군 1만여 의사들의 호국의 얼이 서려있는 성스러운 곳이다.
■ 임진왜란(1592년)때 호남을 범하지 못하여 승전하지 못했다고 판단한 왜적은 1597년 11만 대군으로 다시 침략의 마수를 뻗쳐 전라도를 침공키 위하여 적의 우군은 전주성을, 좌군과 수군 5만 6천명은 남원성을 공략하였다.
조정에서는 남원성을 사수하기 위하여 전라병사 이복남이 이끄는 1천여의 군사와 명나라 부총병 양원의 3천병사로 하여금 남원성을 지키게 하였다.
■ 적은 8월 12일 남원에 당도하여 성을 겹겹이 포위하였으며 13일부터 16일밤까지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중과부적으로 주민 6천여명을 포함한 1만여 의사들은 혈전분투하다가 장열하게 모두 순절하였다.
■전쟁이 끝난뒤 피난에서 돌아온 성민들이 시신을 한 무덤에 모시고 1612년(광해4년) 충렬사를 건립, 전라병사 이복남 등 8충신을 모셨으며, 1653년(효종4년)에는 충열의 사액이 있었고 1675년(숙종원년)에 남원역뒤 동충동으로 이건한 후 1962년 박정희 대통령이 이곳에 들러 허술한 묘역을 보고 이장을 검토하도록 하여 1964년 남원 시 군민들이 현위치에 이전하였다.
사적 제 102호였던 이곳은 이전으로 해제되고 지금은 사적 제 272호로 지정되어 있다.
■ 만인의총의 정화사업은 1974년부터 호국선현 유적정화사업의 일환으로 정부의 지원과 전도민의 정성어린 헌수로 1979년 정화를 마치고 충열사에는 50명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만인의총에서는 매년 9월 26일에 만의의사 순의 제향을 드리고 그 숭고한 뜻을 기리고 있다.
■ 왜군의 남원성 공략 작전도
이 작전도는 정유재란 당시(1597) 남원성 전투에 참가했던 왜병 가와가미 후사구니가 그렸던 것으로 그간 일본 가고시마겐 도서관에 묻혀있던 것을 최근 정유재란시 전라병마절도사 이복남 장군의 11대손인 이가정문(일본거주, 문학박사:정유재란시 왜군이 볼모로 데려갔던 이복남 장군의 셋째아들 이성현이 가문의 뿌리를 찾기 위해 60여년간의 노력으로 찾아낸 자료다.
■ 아군의 병사행차 위용 -1597년(선조 30년) 8월 12일 전화 연염이 하늘을 덥고 전운이 깊어지자 전라병사 이복남은 조방장 김경노와 교룡산성 별장 신호등의 장수와 임사미등의 장수 50여명를 포함한 수백명의 병력만을 거느리고 적이 이미 성밑을 포위하고 있는 가운데를 병사행차의 위용을 갖추고 이병사는 유연히 마상에 앉아 남문으로 당당하게 들어가고 이있다.
■ 적의 공격과 아군의 반격 -1597년 8월 14일 전황
작전 2일째 8월 14일 적이 계속 공세를 취하여 오니 성의 동남쪽을 지키던 수병이 많이 전사하게 되었다. 12시경 적이 총과 포를 쏘면서 돌진하여 오니 그 소리가 뇌성벽력같고 총탄이 우박 치는 듯하니 이복남, 신호, 김경노 등은 곧 병력 천여명을 이끌고 성문을 열어 제치고 나각을 불며 초요기를 흔들면서 진격하니 그 함성은 하늘을 찌르는 듯 하였다.
■ 적의 협상요구를 거절하는 아군 -1597년 8월 15일 왜구의 군사 5명이 양원에게 뵙기를 청하니 양원은 용성관 자기처소에 들어오게 하고 적장의 전황을 전달받은 양원은 내가 천하를 횡횅하였으며 싸워서 이기지 못한 전쟁이라곤 없었다고 하면서 기세 당당하니 적병사는 남문으로 돌아 갔다.
■ 아군의 최후전투 상황 -1597년 8월 16일 작전
구례현감 이원춘은 흑각 별장궁을 휘어서 십발 개중으로 쏘아 죽였는데 덤벼드는 적과 싸우는 광경을 바라보던 부하 군사들은 적중으로 뛰어들어가 장렬하게 싸웠으며 나이어린 손공생도 인궤를 끝까지 간직하고 이현감의 뒤를 따라 최후 일각까지 분절하다가 순절하였다.
이노래는 고려말부터 조선중엽까지 우리 조상들이 즐겨 불렀던 축가 [오늘이오늘이소서] 이다. 특히 소박한 평민들이 생활의 기쁨을 노래한 것이며 남원에서 채보되어 오늘날까지 전승되고 있는 노래이다. 오늘날 노래 [아리랑]이 우리 민족의 노래로서 국민모두가 애창 하듯이 우리 옛선조들도 심방곡 [오늘이 오늘이소서]를 애창하였다.
그러나 임진.정유재란을 당하면서 노래도 잃어가고 아는 이도 사라져갔다. 다행히도 1610년 남원에 살았던 양덕수가 사라져가는 노래들을 채보하여 양금신보를 만들었으니 남원의 문화적 위상을 드높인 유산이라 할 수 있다.
정유재란때 남원성을 함락시킨 왜구는 우리 조상들의 귀와 코를 베어 그들의 전공을 다투었고 풍신수길은 남원에서 베어간 코 421수를 잘 받았다는 영수증을 발행했으며 포로를 노예로 파는 만행을 저질렀다. 특히 남원의 수 많은 문화재와 사기장(도공)을 납치해 갔는데 이때 일본으로 끌려간 사기장들은 고국에서 불렀던 노래 [오늘이 오늘이소서]를 망향의 노래로 불러 400여년 이 지난 오늘까지 그들이 잡혀가 살고있는 일본 나에시로가와에는 고국이 그리워 단군단을 만들고 망향의 한을 달랬던 옥산궁이 있다. 해마다 음력 9월 14일이 되면 큰제사를 올리는데 이때 부르는 노래가 심방곡[오늘이 오늘이소서]이며 우리 음 그대로 부른다.
1988년 7월 26일 광한루원 완월정에서는 이들 사기장의 후예들에 의해서 그들이 부르던 노래 [오늘이 오늘이소서] 귀향 음학회를 가졌으며 노래의 원 고향인 남원에 다시 돌려주는 전수식을 가진바 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노래[오늘이 오늘이소서]의 역사적 의의와 가치를 재조명하고 남원의 문화적 위상을 드높이기 위해 남원문화원에서 1994년 세웠다.
■정유재란과 남원
1. 정유재란의 발발
2. 남원성을 지키기 위한 준비
3. 남원성 싸움의 전개
4. 남원성 함락의 원인
5. 정유재란과 남원성 싸움의 관계
1. 정유재란의 발발
임진년 이후 왜란이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심유경(沈惟敬)은 왜군과 함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본영에 들어가 화의를 종용하였다. 이로부터 2, 3년 동안 몇 차례 일본과 명나라 사신이 왕래하였으나 사신 심유경이 중간에서 일본의 요구가 명나라에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을 알고 거짓으로 본국에 보고하였다. 후에 이 사실이 드러나게 되어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크게 반발하고 이로 인해 그는 조선을 다시 침략할 것을 도모하게 되었다. 이것이 이른바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게 된 동기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4만여 대군을 조선을 향하여 출발시켰다. 이 때 일본 수군은 이순신이 조선의 수군에 없는 틈을 타서 간계(奸計)를 써 원균의 함대를 다대포(多大浦)와 칠천양(漆川梁)으로 유인 전멸시켰다. 이 싸움에서 전에 이순신이 정비해 두었던 모든 전함이 완전 파괴되었고, 원균을 비롯하여 전라우수사 이덕기(李德祺), 충청수사 최호(崔湖), 조방장(助防將), 배흥립(裵興立) 등이 전사하였다. 이에 기세가 오른 일본군은 7월 28일부터 행동을 전면 개시, 우끼다 히데이에를 총대장으로 하고 고니시 유기나가를 선봉으로 하여 조선의 전지역을 총공격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일본군은 경상도를 중심으로 전라도 일대까지 점령하였다.
2. 남원성을 지키기 위한 준비
명나라에서 온 구원군은 전라도와 충청도를 왜군의 공격으로부터 보존하려면 전라도의 문호인 남원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즉 많은 병력을 남원성에 주둔시켜서 왜군의 공격을 차단함으로써 전라도와 충청도를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처럼 전략적으로 중요한 남원을 수호하기 위한 당시 우리나라 정부의 전략은 어떠하였는가. 남원에는 남원성과 교룡산성이 있었다. 선조 30년 2월에 도원사 권율이 경상도 대구에서 머물면서 남원의 병기를 대구로 보내게 한 일이 있었다. 이는 남원지역이 임진왜란 때 피해를 당하지 않아 대구에 상총통을 보낼 정도로 병기가 넉넉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남원성의 수비 여하에 따라 영남과 호남이 좌우되는데 병기를 대구지역으로 보내도록 명령한 조치는 정부의 적극적인 남원성의 방어 계획이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외에도 다른 문헌 기록들을 살펴볼 때 명나라의 구원군이 남원에 오기 전에는 교룡산성을 중심으로 한 방어 계획이 수립되기는 하였지만 당시 정부의 남원성 수비 계획이란 특별한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남원성의 수비는 명나라에서 구원군으로 왔던 양원(楊元)의 군대에 의해서 전적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양원은 서울을 떠나 전주를 거쳐서 6월 13일 남원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남원성 내에 있는 용성관에 남원성을 지키기 위한 작전본부를 설치하였다. 이보다 앞서 전주에 도착한 양원은 순찰사에게 모든 읍에 있던 군졸과 군마를 남원성으로 모이게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양원이 남원에 도착한 뒤에는 지금까지의 남원성을 지키려는 계획과는 상당히 달라지게 되었다. 교룡산성의 군량과 군기를 남원성에 운반하고, 남원성에만 전력하라는 작전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이러한 양원의 계획에 비변사의 관료들은 산성과 부성은 기각지세(奨角之勢)에 있으므로 두 성을 다같이 지켜야 된다고 누차 말하였으나 명나라의 구원군이 도착하면서 양원이 조선군과 명나라군의 작전 지휘권을 장악하게 되면서부터 산성의 수호 계획을 파기하고 남원부성의 수호 계획만을 일방적으로 결정해 버린 것이다. 이처럼 양원이 오기 전에는 남원의 방어 계획은 산성 중심이었는데, 양원이 온 후에는 부성 중심이 되었다.
3. 남원성 싸움의 전개
조선의 관군과 명나라 구원병이 왜군과 직접 싸움을 시작하게 된 것은 왜군이 남원에 대부분 도착한 정유년 8월 13일부터이며 남원성이 함락된 8월 16일까지 싸움이 계속되었다.
전투 첫날인 13일은 왜군의 대부분이 남원성 주위에 도착하여, 공격부대를 결정하고 남원성을 포위한 뒤 포위망을 좁히려고 공격을 했지만 이에 대해 조선 관군과 명군이 진천뢰, 승자총 등을 계속 적을 향해 쏘아대 포위망을 좁힐 수 없었다. 그 뒤 소수 병력으로 조선 관군과 명군을 교란시켰다. 이는 전력을 미리 파악하기 위하여 교대로 소규모적이고 산발적인 공격을 한 것 같다. 전투 이틀째인 14일은 왜군이 대 토목공사를 일으켜 공격준비를 하였다. 왜군은 또한 남원성을 공격하고 병력의 시위를 하였다. 조선 관군과 명군은 왜군의 공격으로 인하여 성첩의 수비병이 많이 죽었기 때문에 사기가 위축되었으며 인심은 흉흉하였다. 게다가 양원은 항상 자기 자신만을 과시하면서, 무모한 작전을 전개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조선 관군과 명군에 있어 인적 물적 손실과 사기의 위축만을 초래하였다.
15일의 싸움은 낮에는 왜군의 대규모 공격이 없었고 산발적인 공격만 있었다. 한편 왜장 고니시 유끼나가(小西行長)는 양원에게 빨리 성을 비우라는 연락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양원은 왜군의 이러한 요청을 끝까지 거부하였다. 이러한 양원의 강경한 자세에도 불구하고 남원성이 포위된지 며칠 안되어 조선 관군과 명군의 사기는 극도로 위축되었다. 그런데, 밤에는 왜군의 공격이 성을 함락시킬 정도의 대규모 공격은 아니었으나 매우 치열하였다. 이처럼 왜군의 공격이 심해지자 성안에 있던 군인이나 민간인들의 사기는 더욱더 저하되었다.
남원성 싸움 마지막 날인 16일, 일부의 왜적은 풀과 논의 볏짚을 베어 민가의 타다 남은 담벽에다 수없이 쌓았으며 나머지 일부의 왜군은 성안에 있던 조선 관군과 명군을 공격, 치열한 전투를 계속하였다. 양원은 사태가 이렇게 되자 전주에 여러번 구원요청을 했으나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이날 밤 성은 왜군에게 함락되고 양원은 도망가 버렸다. 이 싸움에서 조선측은 장군, 의병, 군졸 및 부민이 거의 다 전사하였다. 명군 역시 중군 이신방을 비롯해서 천총 장표와 모승선을 잃게 되었으며 군졸 또한 대부분이 죽었다. 왜군은 17일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전승을 보고하고, 이틀동안 성안에 머물러 있으면서 살인과 약탈을 자행한 뒤에 남원을 떠나 전주로 향하였다.
4. 남원성 함락의 원인
병력■무기■수성준비 등의 남원성의 내적 요인과 지리적 관계, 외부의 지원 여부, 정부의 조처 등의 외적 요인으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내적인 요인을 보자.
첫째, 남원성의 수성장(守城將)인 양원의 수성준비(守成準備)의 소홀과 무모한 작전 때문이었다. 양원은 수성준비도 하지 않으면서 산성까지 파기시켰다. 또한 8월 14일에도 필요 없는 작전을 전개하여 병력의 손실과 사기만을 저하시켰다. 이처럼 양원은 자기 자신을 과신한 나머지 즉흥적인 작전을 일삼았다.
둘째, 중과부적(衆寡不敵)이었다. 왜군은 56,800여명이었는데, 아군은 4,300여명에 불과하였다. 또한 부민(府民)까지 합쳐도 왜군이 10여배나 많았다. 이처럼 현저한 병력의 차가 있었기 때문에 아군이 승리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병력뿐만 아니라 무기에 있어서도 조총 때문에 아군은 왜군에 대한 공격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셋째, 아군의 사기는 극히 저하된 반면 왜군의 사기는 왕성하였다. 아군은 도망자가 속출하였지만 왜군은 병력, 무기 등의 모든 면에서 아군보다 우세할 뿐만 아니라 생사를 가리지 않는 주종관계가 확립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기가 충전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 외적인 요인에는 무엇이 있었는가.
첫째, 아군은 지리적 지형, 지물의 장점을 이용하지 못했다. 양원의 지시에 의해서 교룡산성을 파기하고 남원성에서 왜군을 막으려고 하였다. 이로 인해 부민들의 사기를 떨어뜨렸고, 조정대신도 물론 포기상태였다. 또한 적의 진로를 차단하지도 못했다. 숙성령(宿星嶺), 율치(栗峙)에서 올라오는 왜군을 공격하지도 않았으니 지리적 이점을 전혀 이용하지 못하였다고 할 수 있다.
둘째, 전투시 성밖에서의 지원이 없었다. 남원성은 산성이 아니라 야성(野城)이므로 적이 성을 공격하는데 성벽 외에는 장애물이 없다. 산성이 파기된 이후의 남원성은 공격하는 왜군의 입장에서는 전혀 공격의 어려움이 없었는데 구원병은 한명도 오지 않았다.
셋째, 정부의 소극적인 수성의지(守城意志)로 임시방편의 조치만 취하였다. 남원의 중요성만 말하면서 명군을 보낸 후에는 오로지 그들에게 의지하고 관전하는 상태였다.
5. 정유재란과 남원성 싸움의 관계
남원성의 함락으로 말미암아 충청도와 전라도가 붕괴되었고 또한 서울까지 민심이 동요되어 세자와 중전이 피난길에 오르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와 같이 남원성 싸움은 남원 지방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조선 전체가 붕괴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었던 매우 중요한 싸움이었다.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남원이 함락된 후 양호의 인민은 왜군이 온다는 소리만 들어도 붕괴되어 흩어집니다. 또한 열읍의 수령이 곳곳에서 도망가거나 숨어 버렸습니다. 그리하여 직로 수백리되는 곳까지 무인지경이 되었습니다."
이 같은 기록은 남원성의 함락으로 전라■충청도가 붕괴되어 무인지경이 되었으며 심지어는 각 읍현의 수령까지도 도망가 버렸음을 말하고 있다.
정유재란은 임진왜란의 연장으로 조선이 크나큰 피해를 당한 전쟁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만약 조선 정부가 남원의 수비를 좀더 강화했었더라면 이 전쟁은 쉽게 끝나고 피해도 많이 줄였을는지도 모른다. 그만큼 남원은 정유재란에서 지리적■심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남원성을 함락 당하자 조선 관군과 명군의 연합군은 힘없이 무너지고 만 것이다.
■남원역■에 얽힌 남원의 역사
표면적으로 남원역의 이전을 소망했던 남원시민의 일반적인 인식은 첫째 남원시가의 발전 저해, 둘째 기형적 남원시가의 발전을 들었다. 모두 경제논리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남원역은 경제적 주산알로 초점을 맞추어서는 안될 엄숙하고도 숭고한 역사 현장이라는 사실을 새롭게 인식하지 안될 시점에 와있다.
남원역 부지를 남원시에서는 인수해야 하고 남원시와 시민들은 이 부지를 어떻게 활용해야 할 것인가를 본격적으로 논의하지 않을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으며 이 시점에서 어떤 의식을 바탕으로 어떤 방향으로 정립하느냐에 따라 남원시와 시민의 역사 인식과 정신적 수준의 잣대가 결정되며 후배와 후세에 현재의 남원인이 떳떳하게 자리매김 되느냐, 아니면 비난의 대상이 되느냐가 결정되지 않을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이에 남원역에 얽혀 있는 역사와 현장성을 더듬어 보고 어떻게 활용해야 할 것인가를 몇 회에 걸쳐 제시해 보고자 한다.
1. 축성에서 정유년 남원성 전투 이전까지.
남원성을 언제 주가 축성했는가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필자는 백제시대 백제인들이 축성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졸저 ■남원지방을 중심으로 한 성곽의 추적 연구■참조)
그 성이 후기신라 신문왕 5년인 685년에 ■남원소경■으로 승격되면서 11년인 691년에 개축 혹은 증축한 것으로 보고 있으며 이때 우리가 알고 있는 일명 ■용성(龍城)■으로 불리운 ■남원성■으로 틀이 잡힌 것으로 보고 있다.
남원성의 윤곽과 성문은 순창 사거리에서 천주교 사거리까지가 남쪽 성벽이었으며 그 중앙쯤인 제일은행 사거리(남문 사거리로 명칭이 바뀌어야 할 것임)에 남문이 위치해 있었다.
천주교 삼거리에서 현대아파트의 효치과 삼거리까지가 동쪽 성벽이었고 동문사거리에 동문이 있었다. 순창사거리에서 충렬사(현재 성벽의 서쪽 끝부분)까지가 서쪽 성벽이었으며 서문사거리에 서문이 있었다. 문제의 북쪽 성벽은 충렬사에서 효치과 삼거리까지인데 성문은 이상하게도 동쪽으로 치우친 현재의 남원역 내에 북문이 있었다. 이 성안에는 관아(동헌:옛 군청자리) 용성관(용성초등학교 자리)과 주요관서나 창고 등이 모두 있었으며 성안 장터(구.의료원)도 있었다.
한반도의 남부 산악권에 속한 남원성은 군사적으로도 대단히 중요한 요충지였음에도 정유년 이전까지 전란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다. 다만 고려말 왜구의 침탈 때 함양까지 원정갔던 군사들이 패퇴하여 교룡산성에서 적을 무찔러 인월면까지 적을 밀어냈을 때 남원성이 왜구에 짓밟혔을 것을 예상할 수 있겠으나 그 이전 백제의 패망 당시 남원성에서도 치열한 전투가 있었을 것이며 후백제의 건국과 패망시에도 남원성은 치열한 전투를 겪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라는 추정만 가능하다.
■용성지■등의 사료에 의하면 개,보수의 기록 등이 나와있고 우물, 마면, 치첩 등의 숫자가 나와 있으나 여기에서는 생략한다.
2. 정유왜란 당시 남원성 전투와 남원역(북문지)
1597년 추석을 며칠 앞둔 8월 12일, 왜군이 남원성 동문 앞에 나타난 것을 시작으로 13일부터 남원성 전투는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성안에는 3천여명의 명나라 군사와 1천내외의 관군 및 의병을 포함하여 전투병력이 4천여명 외에 민간인 관리를 포함해 6천여명 총 1만여명이 공포에 떨고 있었다. 왜군은 5만6천여명의 병력이 남원성을 두세겹으로 포위하고 있었고 성밖의 건물을 방어용으로 이용할 것 외에는 모두 불살랐으며 만복사의 거대한 불상을 파괴하여 전차에 싣고 성을 돌며 시위하고 있었다. 성을 공격할 수 있는 모든 도구를 만들고 성벽보다 높이 단을 쌓아 성안을 공격하였다.
당시 남원성 동,남, 서문을 명나라 장수들이 지키고 있었으나 북문만은 유일하게 전라병사 이복남 장군이 지키고 있었다. 추석을 전투로 지새우며 넘기고 16일 저녁 명장 양원이 서문을 통해 달아나고 마침내 남,동,서문이 차례로 무너지면서 남원성은 왜군에 의해 함락되어 갔다.
남원성안의 민.관.군은 북문으로 몰릴 수밖에 없었고 남원성 최후의 전투가 이 북문에서 치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남원성안의 거의 모든 민.군.관은 이복남 장군이 최후까지 지키고 있던 북문에서 장렬히 순절할 수밖에 없었다. 남원성 북문자리는 남원성 최후의 순절 현장이며 남원성 민.관.군의 태반이 순절한 성지였다.
이 북문 현장에 얼마나 많은 주검이 산을 이루고 바다를 만들었으면 성내에는 무덤을 만들지 않는 불문율을 어기고 북문옆 성내에 큰 구덩이를 파고 그 주검들을 수습해 묻었을 것이며 그 이름을 ■만인의총■이라 했겠는가?
이 남원성 북문의 정화간 자리는 법원사거리에서 남원역으로 향한 도로를 직선으로 그어 올리고 효치과 삼거리에서 비석거리로 향한 도로를 직선으로 연결한 자리 즉 현 남원역 화장실의 북동쪽 5~6m지점 근방이다. 그리고 역전파출소의 자리는 화약고 자리였다. 이복남장군 이해 장수들은 최후의 순간에 나무로 단을 쌓고 그 위에 올라가 불을 지르게 하여 소사하게 되는데 나무단을 쌓을 때 화약고의 화약을 꺼내 나무사이에 끼워 넣었던게 아닌가 추정된다. 그리고 성문이 북쪽 성벽의 동쪽으로 치우쳐 있었기 때문에 주검은 성문의 서남쪽에 집중적으로 쌓였을 것으로 본다. 바로 그 자리에 일제는 남원역의 역사를 지은 것이자.
조금 더 부언하자면 이 정유재란때 풍신수길은 호남인은 단 한사람도 남기지 말고 모두 죽이라고 엄명했으며 그것을 확인하기 위하여 코베기의 지시를 내려 일본에 코무덤을 만들게 되었고 이 코베기가 남원성 전투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계산에 얄팍한 왜군은 책임량으로 주어진 코베기를 한 다음 주민들을 사로잡아 노예로 팔기 시작하였는데, 일본의 종군승 경념의 일기에 의하면 성밖에서도 시체는 널려 있었으며 노예로 팔 산 사람을 사가기 위해 일본군 뒤에는 사람 장사가 떼지어 따라다녔으며 그들이 산 사람을 다루는 처절하고 참혹한 광경이 그대로 기록되어 있다. (남원교육청 발행■남원성을 바로알자.■ 최규진 저 ■정유왜란과 남원성■참조)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될 것은 남원성 전투는 패전이었던게 틀림없으나 정유왜란을 승리로 이끌어낸 종국적인 승전이었다는 사실이다. 앞의 경념 종군승 일기에서 보듯 남원성 전투에서 왜군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는다. 싸움에 이기긴 했어도 엄청난 사망자와 특히 부상을 많이 당해 치료에 손을 쓸 수가 없을 정도였고 이 사상자 때문에 전주에서 좌,우군이 합류는 했으나 함께 북상하지 못하였고 결국 우군이 직산까지 진격할 때 남원성에서 타격을 입은 좌군은 공주에서 후퇴하게 되었다. 그 결과 우군은 직산전투에서 관군과 명군의 연합 작전에 패퇴하게 되었다.
만약 좌군이 우군과 함께 전술, 전투를 감행하였다면 관군은 직산전투에서 왜군을 꺾을 수 있었을까? 패전하였다면 수도 한양이 온전하였을까? 모골이 송연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이 전투, 즉 일만여명의 민,군,관이 함몰되면서 적을 맞아 싸웠기에 끝내 정유왜란을 승리로 이끌어낸 남원성 전투의 마지막 순국 현장이 남원성 북문이었으며 이 전투 현장에 일제는 남원역을 건립하였다. 왜일까?
3. 간과해서는 안될 교룡산성
정유년 남원성 전투를 얘기할 때 비껴가기 쉬운 것이 교룡산성이다. 전투가 남우너성을 중심으로 치루어졌으며 일제의 음모도 남원성 중심으로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룡산성의 자연적, 입지적, 전략적 가치를 간과해서는 안된다.
1592년 임진왜란이 승전으로 굳어지면서 왜군이 철수한 후에 반드시 재침이 있을 것을 예상하고 있던 도원수 권율 장군은 호남지방의 관문인 남원지방의 군사적 입지를 인식하고 남원에서의 전투를 예상했었다. 그에 따라 당시 관리를 소홀히 해 퇴락한 교푱산성을 전술적으로 활용해야 할 것으로 보아 수축을 명했다. 이 임무를 부여받은 것은 의승장 처영이었다. 처영 의승장은 의승군을 이끌고 와서 남원과 인근주민들의 도움을 받아 6개월여에 걸쳐 교룡산성을 개보수하였다.
남원이 왜군의 표적이 될 것으로 예상하고 조정에서는 담양, 순창, 곡성, 장수, 운동 등지의 인근지방에 모아둔 군장비와 군량미 및 소금, 장 등을 비롯한 군수품을 모두 교룡산성에 집결시키고 왜군의 침입에 만전을 기했었다.
그런데도 건방지고 오만한 명나라 장수 양원은 3천여 군사를 이끌고 남원에 들어와 그깐 왜놈들을 막기위해 산속으로 들어갈 이유가 없다는 명목으로 남원성에서 적을 막기로 작정하고 교룡산성의 모든 군수품을 남원성으로 옮긴 다음 그렇게 애써 수축했던 교룡산성을 적이 이용할 것을 염려하여 남원인의 손으로 헐어버리게 하였다. 광할한 평원에서의 전투에 익숙해 있던 양원이 남원지방 고유의 지형적 특성을 외면하고 관군들의 간곡한 지정학적 특성에 입각한 교룡산 전투의 요구를 외면해 버린 것이다. 결국 남원성에서의 탈출에는 성공한 그가 자기나라 중국에까지 도망가는데는 성공했으나 자국에서 남원성 전투의 패전과 도망에 대한 문책으로 사형을 당했다.
그의 사형은 지극히 당연하다 하겠으나 한 장수의 오만함으로 스러져간 1만여명의 생령은 어떻게 보상할 것이며, 남원성의 패전으로 인한 국가적 손실은 또 어떻게 할 것인가? 자국의 방위를 외국에 의존하는 결과를 보여주는 표본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시 전주성에는 진충이라는 명장이 2천여 명군을 이끌고 주둔하고 있었으며 조정에서는 두려움과 간곡한 기대로 남원성 전투를 주시하고 있었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고 한다. 그러나 남원성이 아닌 천험의 요새이면서 호남 제일의 성이라고하는 금성탕지 교룡산성에서 적을 맞아 싸웠다면 정유년 남원전투가 남원성 전투와 같이 참혹했었을까? 5만6천여 대 4천여의 병력으로 4일간을 남원성에서 버티었다면 교룡산성에서는 아무리 못해도 10여일은 버틸 수 있었을 것으로 보며 그런 지리적 여건을 이용했더라면 전주에서의 원군이 있었을 것이고 이어 조정의 원군도 기대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본다. 그랬다면 정유년 최대, 최후의 전투가 남원에서 전개될 수 있었을 것이고 왜군을 남원 이북지방으로 내딛지 못하게 막을 수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교룡산성은 지형적으로 그만한 가치를 충분히 갖춘 천혜의 산성이었다.
이후 교룡산성은 현상금이 붙은 천도교 교주 최재우가 피신해와 교룡산에 올라 칼노래를 부르고 칼춤을 추면서 경국대전을 완성하였고 1894년 동학 농민전쟁때에는 동학접주이면서 제2인자였던 김개남 장군의 동학군이 주둔했었다. 김개남 장군을 설득하기 위하여 전봉준 장군이 찾아와 8일간을 머물면서 회담했던 성은 남원성일 것으로 보이지만 결국 김개남 장군이 정예군을 이끌고 북상한 후 남원에 남아있던 수만명의 동학군이 영남지방으로 진출하기 위해 운봉고원을 공격하려다 박봉양이 이끈 민보군에 의해 패퇴하여 남원성에서 방어하다 처참하게 패하게 된다.
이때 동학군이 남원성 아닌 교룡산성에서 민보군을 맞아 싸웠대도 그렇게 철저하게 패했을까?
이제 무너져내려 그 흔적조차 찾기가 어려워진 교룡산성이지만 남원에서는 교룡산성을 잘 활용했을 때에 승전하였고 그러지 못했을 때에는 거의 어김없이 패전하였다. 남원시가의 북쪽에 우뚝 솟은 교룡산, 그 산을 휘감고 쌓아올린 거대한 교룡산성, 날이면 날마다 눈떠 들어올리면 보이는 교룡산과 교룡산성, 우리는 이산과 산성을 새롭게 인식하고 새로운 눈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4. 왜 남원역이 이 자리인가?
일제가 우리나라에 철로를 깔기 시작한 첫 번째 목적은 군수품의 운반이었다. 그 대표적인 철도가 경인, 경부, 경의선이다. 두 번째로 수탈한 물품을 그네 나라로 운송해가기 위한 것이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일본 생산의 절대 부족량인 쌀이었다. 이 쌀을 실어나르기 위해 만든 철도의 대표적인 것이 호남, 전라선이다.
전라선은 1931년에 착공되어 전주-남원간이 1935년에 개통되었다. 그러니까 1935년 10월 15일부터 남원역에는 허연 수증기를 내뿜으며 거대한 철마가 기적소리 드높이 굉음을 울리며 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기묘한 것은 남원역 자리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데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다. 상식이 통하는 사람이라면 이번에 철로와 남원역사가 옮겨간 그 자리거나 부근이었어야 했다. 백번을 양보한대도 서문사거리 밖에 역사가 있어야 했고 철로는 산곡동으로 빠져나갔어야 했다. 경제적인 조건으로나 편의성 어느 것으로 보던지 그렇다.
현재의 남원역이 불합리한 것은 무엇보다 상행 열차가 출발하여 가속이 붙기도 전에 급경사의 언덕을 만나는 것이다. 무쇠덩어리 열차는 가속이 붙기전에 언덕을 만나면 안된다. 그런데 언덕을 오르면 곧바로 암벽을 만나 급하게 유턴을 하게 된다. 공사에 대단한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코스는 같은 방향으로 향하는데 대단히 후회하는 것이다. 산곡동으로 빠져나가면 몇㎞를 단축하면서 공사상 어려움을 겪지 않는다. 일본인들이 멍청해서였나? 아니다. 그들은 치밀하고 주도면밀한 계획에 의해 현재의 자리에 남원역을 만든 것이다.
현재 남원역의 구조를 보면 그 정밀하고 정교함에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다.
남원역사를 중심으로 보면 남원성의 북쪽성벽은 서북쪽 충렬사에서 동남쪽 효치과 삼거리까지 남원역 뒤로 길게 대각선을 이루고 있다. 그 선상의 화장실 뒤쪽에 북문이 역시 대각선상의 위치로 있었으니 그 앞이 바로 남원역사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남원역 구내를 벗어난 뒤쪽에 만인의 총의 본무덤이 있었다. 그런데 이 무덤을 역구내 밖으로 했기 때문에 후손들이 일제의 음모를 눈치채지 못하게 해버린 것이다. 그리고 만인의총 본무덤과 남원역사 사이에 프랫홈을 길게 만들고 레일을 몇겹으로 깔아버렸다. 이 자리 그러니까 역사와 무덤 사이에서 모든 열차가 멈추고 출발하게 한 것이다. 놀라운 술책이 아니라 할 수 없다.
정유년 남원성 전투의 추석 다음날인 16일 순국의 현장에 역사를 만들어 그 후손들이 무심한 발길로 철저하게 짓밟게 만들어 놓고 그 영령들이 묻힌 무덤자리 사이를 레일을 수수겹으로 차단하고, 그리고 시도때도 없이 철마(鐵馬)가 굉음으로 선열의 넋을 으깨도록 만든 것이다.
그들은 정유년 남원성 전투를 340년 가깝도록 잊지 않고 있었으며 남원성 전투가 결코 승전이 아니라 정유재침을 패배로 귀결짓게 한 패전이었음을 알고 있었고 3반세기가 지난 후에 전라선을 만들면서 이 자리에 역사를 건립함으로써 치욕적인 전투에 보복을 한 것이다.
혹자는 말할 수 있다. 우연의 일치일 수 있음을 지나치게 과장되어 해석한 것 아니냐고, 또한 피해망상이나 자격지심에서 발상된 것이 아니겠느냐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도로의 구조를 보라. 10~20년 전까지만 해도 남원시가의 1번 도로였던 광한루원 후문에서 용성초등학교를 거쳐 전 동일주조장까지의 길을 바로 뚫었다면 남원역사는 보선사무소 근방이 되었을 것이고 그랬다면 남원시민에게는 더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역이 되었을 것이다. 남원역은 현 위치에서 서쪽으로 옮겨올수록 유리한 여건이 된다. 그런데 보선사무소 자리로 옮겨왔어야 할 역사를 어떤 이유로 기어이 세계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이해할 수 없는 자리에 만들었을 것인가?
필자는 견문이 좁아 그런지 몰라도 338년이 지난 역사의 현장에 이렇게 비열하고도 잔악하면서 치밀한 보복을 한 경우를 알지 못한다. 국내만이 아니라 세계를 통 털어서도 그렇다.
그 참혹한 음모를 모른 채 우리들 남원시민과 겨레는 66년 동안 그 순절의 성지를 짓밟아 왔으며 신음 소리조차 낼 수 없는 영령들의 넋을 단 한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1930년대 식민의 틀을 완전히 굳히면서 일제는 철로 개설을 기화로 남원성을 뜯어냈다.
그리고 그 자리에 길을 만들어 사람의 발길로 짓밟고 우마차로 횡행하게 하였다. 그것이 지금 남원의 본전통이라고 하는 순창사거리에서 천주교 삼거리 이어 동림사가를 거쳐 효치과에 이르고 순창사거리에서 서문 건널목까지이다.
첫댓글 수박 겉 핥기 식으로 알고 있엇는데 이렇게 자세히 볼 수 있다니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