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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 그대는 어이 이리 빨리 철수했나! | |
파천황을 이룬 샛별-안철수의 추락을 안타까워하며... | |
모세원 칼럼니스트 | |
오호 애재(哀哉)라, 안철수여! 그대의 이름은 이번 한가위 노변화제(爐邊話題)에 전혀 오르지 못했어. 그대는 혼자의 힘으로 파천황(破天荒)을 이루어 낸 샛별의 전설을 남겼으나, 겨우 5년 만에 세월호와 함께 침몰해 버렸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 그대는 정치무대를 떠나면서 “다시 시작하겠다.”고 했다지? 그러나 “정치가는 민중에게 한 번 버려지면 난파선 꼴이 된다.”(네오클레스)는 금언을 가슴 깊이 새겨야 할 것이야!
‘무릎팍 도사’ 출연으로 중우의 우상이 된 안철수
5년 전, 그러니까 2009년 6월 17일은 그대는 개그맨 강호동이 진행한 MBC의 ‘무릎팍 도사’에 출연하여 허무맹랑한 빈말을 쏟아냈지. 그 빈말에 힘입어 그날 그대는 대한민국 중우(衆愚)들의 우상(偶像)으로 우뚝 섰지. 그대의 그 새빨간 빈말이 고등학교의 교과서에까지 실리면서 그대의 인기가 하늘로 치솟을 줄을 뉘라서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대는 “V1 백신을 세계최초로 개발하여 국민과 국가를 위해 무료로 배포했다”고 자랑했었지. 그러나 당시에는 이미 미국의 마이크로 소프트(MS), 맥아피(McAfee), 심마텍 등 7개 회사가 안티바이러스프로그램을 개발해 협회를 조직했고,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우리나라에도 이를 무료로 배포하고 있었어. 그러므로 안철수 그대가 만든 백신은 하릴없이 무료로 배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야. 국가와 국민을 위해 무료로 배포했다는 말은 온 국민을 바보로 취급한 빈말성 발언이었어!
또 그대는 1992년 2월 입대하면서 “미켈란제로 바이러스를 발견하여 새벽까지 백신을 만들어서 PC통신으로 보내놓고 미쳐 집에 알리지 못하고, 입영열차를 타고 대구에 있는 군의학교에 갔다”고 으스대지 않았나? 그런데 미켈란제로 바이러스는 1992년 4월에 처음 발견되었지. 또 입영열차란 것도 1985년에 폐지되어, 그대가 입영할 때는 아예 없었어.
그대의 사랑하는 내자(內子)께서는 조선일보 기자에게 “그이와 함께 지하철로 서울역에 가서 열차를 태워 보내면서 무지 서운한 마음이었다”며 울먹였었대. 그러므로 그대의 우쭐대던 말은 거짓이 농후했음이 증명되었지.
그대는 “나는 술도 전혀 마실 줄 모를 뿐 아니라, 여자가 시중드는 그런 술집(룸살롱) 같은 곳은 가본 적도 없다”고 군자(君子)인척 뽐냈지. 그대는 술을 못 마시는 것이 아니라, 폭음을 좋아해 간염으로 술을 마시지 못하게 되었다고 회사의 그대 측근인 X여사(女史)가 폭로했었어. 아래의 몇 가지 사실들이 그대의 말이 사실이 아님을 증명해 준다네.
첫째, “사업상 모임에서 참석자 대부분이 술집에 갈 때 동석했던 적이 두세 차례 있었다”는 2012년 8월 24일 했던 그대의 고해(告解). 둘째, “저희 사장과 6명이 룸살롱에서 안철수와 거나하게 한잔 한 적이 있다”고 ㈜SGA의 A 상무가 신동아에 한 증언. 셋째, 그대가 재벌 2세들과 ‘브이 소사이어티(V society)’라는 것을 만들어 그들과 어울려 청담동 일대의 룸살롱을 누비고 다녔다는 정황.
“안철수연구소의 CEO를 그만 둘 때, 저는 모든 직원들에게 무상으로 나의 주식을 몽땅 나누어 주었다”는 그대의 허풍은 ‘무릎팍 도사’ 프로그램의 백미(白眉)였었지. 그대는 액면가 5천 원짜리 전환사채 8만 주(1인당 32만 5천 원)를 직원들에게 나누어 주고는 “외부에 알려지지 않게 절대 비밀로 하라”고 호들갑을 떨었지. 그것은 총발행주식의 1.5%에 불과했어.
그대는 이런 황당한 빈말로 무지몽매한 무리들을 기만하여 영웅이 되었고, 부패하고 무능한 정치권의 행태에 좌절하던 무리들의 메시아를 자처하게 되었지.
이로 인해 그대는 빈말에 관해서는 사슴을 가리키며 말(指鹿爲馬)이라고 우기던 조고(趙高)보다도 훨씬 윗자리를 차지했다는 평가를 받았어. 조고는 말과 비슷한 사슴을 놓고 말이라고 우겼지만, 그대는 황당무계한 빈말을 했기 때문이었지.
어찌되었건 그대는 ‘무릎팍 도사’를 기화(奇貨)로 거저 얻은 우중의 인기 를 발판삼아 득록(得鹿)의 야심을 들어 낸지 5년 만에 마침내 이카루스(Icarus)처럼 추락하고 말았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야. 그러나 어찌하겠나. 그대의 추락은 전적으로 그대의 탓인 것을!
새정치의 구체적 비전 제시 못해
그대는 이른바 ‘새정치’를 내세우면서 정치라는 흙탕물에 뛰어 들었지. 새정치라는 기치는 19년 전인 1995년에 이미 김대중이 표방한 것이었어. 김대중은 1992년 14대 대통령 선거 (1992.12)에서 김영삼에게 패하자, YS의 보복이 두려워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영국으로 도피했었지. 그러나 DJ는 그동안 정치놀음에서 맛보았던 꿀맛이 너무도 그리워 전전반측(輾轉反側)하다가 겨우 7개월 만에(1993.7) 슬그머니 귀국했지. 곧바로 아태재단이란 것을 만들어 ‘아태재단 헌금’이란 명목으로 막대한 정치자금을 긁어모았어.
그리고 3년 전에 온 국민의 눈시울을 적셨던 ‘정계은퇴 선언’을 헌신짝처럼 내팽개치고, 정계복귀를 선언하면서 ‘새정치국민회의’라는 정당을 만들었었지(1995.9.5). 당시 김대중의 새정치는 구호에만 그친 구태의연한 것이어서 ‘눈 가리고 아웅한다’는 비판을 면치 못했지.
안철수 그대는 김대중의 ‘새정치 구호’만을 빌려 왔을 뿐, 구체적인 새정치의 실질적 내용을 제시하지 못함으로써 그대를 열광적으로 지지하는 우중 뿐 아니라, 정치현실에 식상한 그대의 잠재적 지지자들에게마저 커다란 실망을 안겨 주었던 것이야. 따라서 그대는 ‘앝은 수로 국민을 속인 빈말꾼이다’라는 혹독한 비난을 받고 정신분열증을 앓다가 재기불능 한 나락(奈落)으로 떨어지게 된 것이야!
그대는 너무나 젊은 나이에 인기절정에 올랐고, 정치에 뛰어들면서부터 대통령병 말기 환자가 되어버렸어. 그리고 그대는 선을 사랑할 줄 모르고 악만을 증오했지. 그대는 정치권을 향해 “싹 쓸어버려야 할 구태”라고 비난을 퍼부으며 그대 홀로 고고(孤高)한 척, 군자(君子)인 척 으스댔지.
또 그대는 대기업 인큐베이터에서 성장하고, 포스코 등 대기업 사외이사로 수십억 특혜를 누렸으면서 재벌들을 무슨 철천의 원수인양 “재벌은 잡히면 죽여 놔야 해요. 그런 사람 사형을 왜 못 시켜요!”(2011.9, 오마이뉴스 공개강연)하며 기염을 토했지. 그대는 구태정치를 어떻게 새로운 정치로 바꾸고, 대한민국을 어떻게 살기 좋은 국가 만들 것인가에 관한 비전은 한 가지도 제시하지 못하면서 우리의 모든 것을 증오하고 저주했어. 이렇게 정치권을 비난하고, 재벌을 욕함으로써 인기가 천정부지로 치솟았지. 그때부터 그대는 대통령병이 고황(膏?)에 이르렀던 거야.
중병에 걸린 말기환자는 결국 죽게 마련이고, 증오는 파괴의 어머니일 뿐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한다는 것은 진리야. 이것이 그대가 아무 것도 이룬 것 없이 추락한 근본적인 원인이랄 수 있어. 좀 더 자세히 얘기해 달라고? 그대의 소원이라면, 망설일 이유가 없지.
뭐니 뭐니 해도, 그대에게는 정치적 능력이 턱 없이 부족했어. 정치가 뭔지, 리더십이 뭔지 도통 모르는 철부지였지. 말하자면, 무지하고 무식했지. 이명박 정부에서 몇몇 특별위원회 위원을 지냈고, 안랩의 CEO와 포철의 이사회 의장 등 기업의 사외이사를 해본 경험을 내세워 수영장(풀장)에서 수영을 할 줄 안다고 뽐내면서 “수영장이나 태평양이나 다를 게 뭐 있나?”라고 반문했지? 참으로 미련하고 어리석은 말이었어.
그대는 북한에 관해 뭔가 배워보겠다고 김근식을 사사(師事)하면서, 김정일이가 죽었으니 ‘천안함 범죄’에 대한 공소권(公訴權)은 소멸되었다고 좋아했다면서? 독일은 2차 세계대전 때 저지른 범죄에 대하여 지금도 사죄하면서 배상도 하고 있는 데, 그렇다면 그건 바보 같은 짓이란 말인가?
그대는 교만하여 타인의 말을 귀담아 들을 줄도, 다른 사람을 예우(禮遇)할 줄도 몰랐지. 윤여준, 김종인, 최장집, 박선숙, 송호창, 금태섭 등이 그대를 떠난 일이 명백한 증거지. 그대가 너무나 인색한 사람이었다는 것 또한 그대의 고립에 한 몫을 했지. 줄잡아도 3천 억 원이 훌쩍 넘는 재산을 가진 재벌이 대통령을 하겠다고 설쳐대면서 땡전 한 푼 안 쓰려고 했으니 제대로 된 인재가 모여 들겠어?
그대는 기자들과 함께 먹었던 식대도 내지 않고 뺑소니 쳤었다고 하더군. 그대는 구두쇠(screw), 빈말꾼(gouge)으로 비판받을만 하지. 스크루지(Scrooge)가 갖는 두 가지 이미지에 완벽하게 어울렸지. 엄정하게 말하면, 그대는 스크래치(북유럽 신화, 악마)로 불려도 부족할 지경이야.
그대는 간난(艱難)에 부딪혔을 때 인내심이 전혀 없어 ‘철수(撤收) 7관왕’이라는 불명예를 안게 됐지. 건국대학 전임강사를 그만 둔 것이 첫 번째 철수요, 안 철 熾П맑 CEO를 그만두고 미국으로 유학을 간 것이 그 두 번째이며, 박원순에게 서울시장 후보를 양보한 것이 세 번째이고, 대통령 후보를 사퇴한 것이 그 네 번째요, 창당을 서두르다가 포기한 일이 그 다섯 번째이며, 기초선거 공천 공약을 파기한 것이 그 여섯 번째이고, 새정치민주연합 공동대표직에서 사퇴한(쫓겨난?) 사건이 그 일곱 번째였지. 이런 불명예야 말로 그대의 실록(失鹿)을 앞당긴 필연(必然)이었어.
빈말 도사 안철수
그대는 빈말로 사태를 호도(糊塗)하려 했고, 할 필요도 없는 빈말을 입에 달고 살았어. 그대의 빈말을 곰곰이 짚어보면, 천부적인 것 같아서 쓴 웃음이 나오곤 해. 좀 더 고상하게 표현하면 그대는 과대망상증에 의한 선천적 빈말 증후군 환자야.
15호 태풍 ‘볼라벤’이 할퀴고 간 2012년 8월 30일 충남홍성마을회관에서 태풍 피해자들을 위로한답시고 그대는 이렇게 떠벌렸지. “우리 장인도 비닐하우스 농사를 지으시는데 바빠서 가보지도 못했고, 말로도 위로해 드리지 못해 제 마음이 얼마나 쓰리고 아픈지 모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의 아픈 마음도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대 장인은 전남 여수에서 양조장을 경영했고, 부동산 같은 데 손을 대서 큰돈을 모은 사업가 아닌가? 장인이 채마밭 한 귀퉁이에 상추 등 몇 가지 남새를 심어 놓고 그 위에 덮어 놓은 비닐이 바람에 날아간 걸 가지고 그대는 우리 장인은 ‘비닐하우스 농사꾼’이라고 태연히 빈말을 했어! 이 에피소드는 그대가 좋아 못사는 오마이뉴스가 보도했었지.
이 말은 여항(閭巷)의 술안주 감이 되었어. “여보게, 아파트 베란다에 고추 등 몇 가지 채소를 키우면 안철수는 ‘채소 농부’라고 할 기여!”, “여보게, 그 뿐이 아니랑께. 거실 어항에 열대어 몇 마리 기르면 안철수는 ‘가두리 양식장 어부’라고 할 것이랑께!”
그 뿐인가. 전셋집이나 사글세 집을 전전하는 30-40대의 인기를 끌고자 그대는 이렇게 너스레를 떨었지. “나도 전셋집을 전전해봐서 월세나 전셋집에 사는 고충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압니다. 헤헤...” 그대는 부모가 투기목적으로 사둔 방배동 등 호화 아파트에서 전세가 뭔지, 월세가 뭔지도 모르며 살았으면서 전셋집을 전전해 봤다고?
그대는 자서전에 “할아버지는 나의 수호신이다. 그런데도 할아버 熾“ 도움을 받지 않았다. 부모님에게도 손을 벌리지 않고 살았다.”고 썼어. 그러나 그대는 고등학교 3학년 때인 1979년 당시 공시지가로 9천2백만 원 상당의 토지(주택은 별도로)를 할아버지(안호인)로부터 증여받았는데, 이 때 매매한 것처럼 서류를 조작해 증여세도 포탈했었지. 그대의 할아버지는 일제강점기에 부산 금융조합장을 지내셨지. 당시 부산 같은 대도시의 금융조합장은 일본총독이 직접 임명하는 높은 자리였어.
또 무릎팍 도사에 출연해서는 “약관 27세에 대학교의 학과장을 했었지요, 하하...”하고 으스댔지. 멋모르는 젊은 시청자(특히 젊은 주부)들은 “와 대단한 사람이다! 우리 아들도 저렇게 키워야 하는데!” 등의 탄성을 터트렸었지. 그대는 1989년 9월부터 91년 2월까지 1년 6개월간 건국대 의대 전임강사를 하면서 학과장 대리노릇을 했지.
건국대는 1988년 3월 이공대학에 의예과를 신설하였고, 1989년 10월에 의과대학 의예과로 개편했지. 교수가 그대 1명밖에 없었거나 그대가 선임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학과장 대리가 됐겠지. 그렇지 않나? 대학의 학과장은 대단한 자리가 아니야. 국립대학은 2년마다 학과교수들이 돌아가면서 맡고 있어. 이런 걸 가지고 27세에 학과장 했다고 우쭐거리다니!
또 ‘무릎팍 도사’에서는 14년간 의사생활을 했다고 뽐냈지. 그대는 1980년 3월 서울대 의대에 입학했었고, ‘안철수바이러스연구소’를 창업한 때가 1995년 3월 5일이었는데, 그렇다면 서울대 의대 2학년 때(1981년)부터 ‘안철수연구소’ 창립 때까지 의사노릇을 했다는 거야?!
그대는 미국 시애틀에 가서 빌 게이츠를 만나고 돌아와서도 황당한 빈말로 우리를 우롱했었지. “저는 빌 게이츠와 함께 다정하게 사진을 찍었지만, 공개하지 말자는 빌 게이츠 측과의 약속 때문에 사진을 공개할 수 없다.”고 언론에 양해를 구했지. 그런데 빌 게이츠 재단은 “안철수와 빌 게이츠는 같이 사진을 찍은 적이 없다는 점을 분명히 밝힌다.”고 발표했었어. 그 이유를 알아봤더니, 빌 게이츠와 찍은 사진을 빌미로 빈말을 치고 다니는 사람들이 부지기수(不知其數)여서 의심 갈 만한 사람하고는 절대로 사진을 찍지 않는다지 뭐야. 빌 게이츠 측이 그대를 빈말성이 농후한 인간으로 봤다는 의미가 아니겠나?!
“난 고교시절 야구장에 응원하라고 강제로 끌려갔는데, 상 崙 투수가 최동원 선수였다. 최동원 선수가 공을 너무 잘 던졌다. 잘 던지면 야유하고, 실투하면 좋아서 박수치고 그랬다.”(2012.5.30. 부산대 강연)면서 그대에게 열광하던 부산대 학생들을 바보 취급했었지. 그대가 부산고등학교에 입학했던 1977년에는 최동원은 경남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1학년이었어!
그대는 석사와 박사논문을 빼고 세 편의 논문을 썼는데, 그나마 두 편의 영어논문은 ‘공동저자’였었어. 나머지 ‘의료인의 컴퓨터 활용범위’라는 논문은 모두 5페이지로 전문적 내용이 하나도 없는 학부학생 리포트 수준이었는데, 그것도 다른 사람의 논문을 베낀 것이었지. 그러면서 시골의사라는 박경철과 함께 ‘세계적인 석학 안철수’라는 현수막을 내걸고, 전국의 대학을 돌아다니며 순진무구한 대학생들을 속여먹었지. 안 그래!?
유유상종(類類相從)이라던가. 그대의 부인 김미경도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빈말 도사였지. 그대 부인은 2002년 미국으로 유학 갈 때 있었던 일을 소개하면서 “중학교 1학년이었던 딸은 굉장히 싫어했다. 왜 자기가 엄마 때문에 친구들 다 버리고 학교를 떠나야 하냐고 하더라”고 떠벌렸었지.(2011.8. ‘김윤덕의 사람 人’ 조선일보) 이 인터뷰에 나온 사진제목이 ‘나이 마흔에 떠난 미국 유학시절 남편 안철수 교수, 딸과 함께 찍은 사진’으로 그 사진 찍은 날짜가 1997년 5월 24일로 찍혀있었어!
그대 딸은 부인이 미국에서 원정 출산한 아이이므로 미국시민권을 갖고 있었을 것이고, 따라서 미국의 명문 중의 명문 공립 초중고를 다니고 있었지. 그런데도 그대 부인은 딸이 서울에서 중학교 1학년에 다니고 있었다고 빈말을 했고, 1997년을 2002년이라고 둘러 댔지.
용감한 사람만이 빈말을 할 수 있다더니 그대 부부는 가히 가언발산기개세(假言拔山氣蓋世)일세그려. 한 마디로 그대는 ‘속은 푹 썩었으나 겉은 더 없이 예쁜 사과’였던 거야.
카이스트 교수, 서울대 교수 안철수 부부 무엇으로?
그대는 2008년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 와튼스쿨 경영학 석사과정을 마치자, 직장을 구해야겠다는 절박한 처지가 되었지. 노심초사 끝에 ‘안철수연구소’의 CEO였을 때 안면이 있던 당시 ‘IT계의 대부’로 불리던 정문술 회장이 KAIST에 300억 원이라는 거금을 기부한 사실을 생각해냈어. 그래서 정문술 회 장을 만나 KAIST 교수시켜 달라며 요망했지. 결국 정 회장은 그대의 간청을 못 이겨 ‘파격적’인 일을 저지르고 말았지. 서남표 총장에게 그대를 ‘정문술석좌교수’로 채용해 달라는 추천서를 써주었던 거야.(2008.3.26)
대학에 기부금을 낸 사람이 그 기부금을 빌미로 교수채용을 부탁하는 것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엄청 불명예스런 행위야. 그대는 정문술의 인격에 부담을 주면서 부부가 카이스트교수가 되었지. 그대는 제대로 된 논문 한 편도 없었고, 경력이라는 것이 건국대학 전임강사 1년 6개월이 고작이었으며, 의과대학 교수가 될 수 있는 전문지식이나 학문적 소양도 없었기에 돈 낸 사람의 압력, 다시 말하면 ‘돈의 위력’이 아니었으면 절대로 교수가 될 수 없었지.
그래서 그대는 전문지식 같은 것이 필요하지 않은 잡문이나 주워 모아도 입담으로 얼버무릴 수 있는 ‘기업가적 사고방식’, ‘기업가 정신’을 강의과목으로 선택했지. 그것은 ‘생명공학과 나노기술을 접목한 인재양성’을 목적으로 한 정문술기부금의 취지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은 교과목이었어. 하는 수 없이 카이스트는 그대를 기술경영전문대학원의 ‘정문술석좌교수’로 발령했었지. 그대는 부인 김미경도 의과대학원 부교수로 임용되도록 술수를 부리기도 했었어.
학문적 소양과 그럴듯한 논문 한 편도 없는 그대 부부가 서울대 정교수가 된 일은 불가사의(不可思議)야. 서울대 총장이 카이스트에서도 별 볼일 없는 그대를 제 발로 찾아가 서울대학교 융합과학기술대학원 원장 자리를 제의하면서 교수로 와달라고 애원한 이유가 뭘까? 그대는 오연천 총장의 제의를 받고, 부인 김미경도 정교수로 채용하라고 부탁을 넣었다면서?!
서울대 역사상 그대 부부와 같은 경력도 학문도 논문도 부족한 사람을 정교수로 채용한 적은 없었고, 앞으로도 그런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야. 그런 당치도 않은 주장을 내세울 배짱은 어디서 나왔을까? 그대 뒤에 감히 토를 달 수 없는 든든한 권력이 버티고 있었다는 것이 식자들의 공통된 인식이었는데? ‘그 권력’이 그대를 정치권으로 끌어들였고, 언론마저 이용하면서 인기도 끌어올려 주었지. 그렇지?!
꼼수를 부리며 회사를 경영한 안철수
그대는 안랩을 중소기업으로 둔갑시켜 3년 동안 갖가지 ‘중소기업 혜택’을 누렸어. 씨 원이 300명 이상이고 자기자본이 1천억 원 이상이면 대기업으로 분류되는데, 안랩은 상시직원이 571명이었고 자본금이 1324억 원인 대기업이었지. 그런데 그대는 직원 571명 중에서 303명을 연구원이라고 기재, 중소기업 혜택을 보았지. 왜 그랬느냐고 누가 따져 물으니까 그대는 “기업이란 최대한의 이익을 창출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알량한 준법 따윈 쓰레기통에다 버려야 한다.”고 대꾸했다며?
그대는 안랩이 BW(신주인수권부 사채) 25억원을 발행하여 인수하도록 했는데, 이 과정에서 상법을 위반하면서 저가발행으로 인한 부당이득을 챙겼지. 그러고도 증여세와 가산세 150억 원을 포탈한 의혹도 받고 있어.
또 2012년 2월 경남도교육연구정보원이 ‘백신소프트웨어 라이선스 구매’공고를 냈을 때 ‘안랩’은 중소기업이 아니므로 입찰자격이 없었기 때문에, 입찰 전에 경남교육연구정보원과 ‘물품공급 또는 기술지원협약’을 체결했지. 그 협약서에 ‘어떤 업체가 낙찰되어도 그 회사는 안랩의 제품을 사야만 납품할 수 있다’는 내용이 명시되어 있었기 때문에 안랩은 낙찰에 참여 않고도 4억 9천 9백만 원어치를 팔아 이익을 챙기기도 했었지 이런 꼼수를 ‘피터팬 신드롬’이라고 부르는 거야. 이것이 그대의 맹랑한 ‘노블리스 오브라주’였어.
그대는 또 그대 부부를 카이스트 교수시켜준 정문술과 만나 철석같이 약속했지. “내 회사는 절대로 친척을 고용하지 않고 투명한 경영을 하겠다”고 말이야. 그런데 장인과 부인을 이사시키고, 처남에게 감사를 맡겼지. 그것이 재벌가들과는 다른 투명한 경영이란 말인가?
‘나눔’을 특히 강조하던 그대가 안랩의 대표로 있던 시기(2001-2005)에 매출총액이 1496억 원에, 순익은 262억 원이었는데, 5년간 기부금은 고작 3,183만원으로 순익대비 0.12%였고, 매출액 대비로는 0.02%에 지나지 않았지.
또 ‘안철수 생각’이란 책의 판매가를 높게 책정했고, 영세상인 보호를 강조하면서도 대형서점과 온라인 서점에만 공급하여 동네서점에서는 구입할 수 없게 했었지.
안랩은 상시 고용인 620명 중 장애인은 4명뿐으로 고용율은 0.65%에 불과했었어. 동종 정보업체 중 후발주자인 ‘잉카 인터넷’은 장애인 고용율이 2.2%, ‘하우리’는 1.1%였는데도 말이야. 당시 의무 고용율이 2.5%였으므로 안랩은 장애인을 14명 고용했어야 했지. 그대는 이렇게 변명 했었지. “IT보안기술의 특성상 동일직무를 수행할 수 있는 관련 장애 인력 채용이 어려워 그에 상응하는 장애인 고용부담금을 납부하고 있다.”고.
그런데 그대는 “장애인이 일자리를 갖고 자립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공공기관부터 고용의무를 준수해야 한다. 돈으로 때우려 하지 말고 실제로 고용을 하라는 것이다.”(안철수의 생각 p235)라고 큰 소리쳤지.
투기박사 안철수와 그 가족
신동아 허만섭 기자는 “1987년 대통령 직선제 이래 대선 후보 중 단연 부동산 박사는 안철수”라면서 야당은 “‘쪽방촌 투기의혹’ 한 건으로 장관후보자를 날려버렸는데. 이로 비추어 보면 안철수는 아예 청문회에도 설수 없는 사람이다.”고 꼬집었다는 사실을 그대는 알고 있나?
그대는 이촌동의 대표적 재건축 예정지인 한강아파트 36동 106호(31평)를 장모 송씨 명의를 빌려(차명) 매입(2011.11)하여, 2012년 10월의 시세로 10억여 원의 차익을 얻었고, 실제로는 여의도 포스코 더 샵 아파트 101동 911호(63평)에 살면서 이 아파트에 위장전입(2011.6.13-2011.10.6)을 하기도 했었지.
그대의 부친 안영모와 모친 박귀남은 범천의원(부산진구 범천동 1197-45)의 대지 건물을 갖고 있었고, 범천동 1197-1 주택(21평)에 거주하면서 부동산 투기 바람이 거세게 불던 해운대 해수욕장 옆 ‘달맞이 언덕’의 빌라 두 채를 매입하여 매도했었지. 박귀남씨는 사고 판 빌라 두 채로 주소지를 번갈아 옮겨 다녔지. 양도소득세를 면세 받고자 무단전출이라는 꼼수를 부린 거지.
또 그대의 모친 박귀남은 1988년 4월 20일과, 4월 27일 본인 명의와 안철수 그대 명의로 강남구 도곡동 역삼럭키아파트와 동작구 사당동 재개발아파트 입주권을 매입 한 뒤 2000년 7월 26일과, 10월 30일에 매도했었지. 뿐만 아니라 그대는 다운계약서를 작성하였고, 그대 부인 김미경도 송파구 문정동 훼밀리아파트 매입 때 다운계약서를 써서 취득세와 등록세, 그리고 양도세를 적게 냈지.
그런 그대는 철면피하게도 ‘안철수의 생각’(109p)에서 “탈루되는 세금이 없도록 세무행정도 강화해야 하는데, 탈세가 드러날 경우 일벌백계로 엄중하게 처벌해서 세금을 떼어 먹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하도록 해야 된다.......탈세액의 몇 甕 물리는 징벌적 벌금제를 도입해서 국민들이 조세정의를 실감하게 해야 증세도 가능하다”고 했지? 그 말은 영락없는 유체이탈화법(有體離脫話法)이었어!
그대는 2011년 11월 14일 소유주식 절반을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밝혀 또 한 번 인기가 폭발적으로 치솟았지. 그대는 이 돈이 “저소득 청소년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일에 쓰여 지면 좋겠다.”고 말함으로써 기부천사가 되었고, 정치테마주로 큰 이익을 챙겼다는 비난도 잠재웠지. 그대의 ‘안철수 재단’은 설립당시 자산이 722억 원이었는데, 2013년 말 953억 원으로 231억 원이나 불어났지. 이건 ‘안철수 재단’이 저소득 청소년들에게 보탬이 되는 사업을 전혀 하지 않았다는 방증이지. 그렇지 않나?
그대가 설립당시(2012.4) 재단 이름을 ‘안철수 재단’이라고 한 것은 중앙선거관리위원회로부터 “대선후보의 이름을 가진 재단의 기부행위는 공직선거법 위반이다.”(2012.8)라는 유권해석을 얻어내 기부금을 한 푼도 쓰지 않기 위한 꼼수였었어. 선관위가 유권해석을 내린 2일 후 그대의 재단은 이사회를 열어 ‘안철수 재단’의 명칭은 유지하지만, 법적 테두리 안에서 사업을 추진하기로 결의함으로써 실질적인 기부행위를 거부하고 안철수란 이름을 고수하기로 했었지.
그대가 2013년 2월 ‘동그라미 재단’으로 명칭을 바꾼 것은 그해 4.24 노원 병 보궐선거에 출마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뿐 진정으로 기부활동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어! 그대의 재단은 설립 후 1년7개월 동안 3개 사업을 진행했는데, 관련 사업비는 겨우 7억 6천만 원으로 재단 자산 953억원의 0.8%였고, 각종운영비를 빼고도 순이익이 약 15억 원이었으며, 그나마 저소득층 학생들에 대한 무이자 대여는 한 건도 없었지. 그러므로 주식 반을 기부한다는 것부터 재단설립까지 그 모두가 빈말행각이었어!
침몰한 난파선은 복구할 수 없어
그대가 ‘오적어(烏賊魚)의 묵계(墨契)’를 남발함으로써 추종자들의 신뢰마저 잃어버린 일이야말로 그대에게 재기불능한 치명상을 입힌 핵심적 요인이었어.
그대는 지난 2월 17일 새정치연합 창당준비위를 발족시켜 정치지망생들의 기대를 한껏 부풀려 놓고 불과 13일 만인 3월 2일 민주당과 합당선언을 함으로써 수많은 그대의 추종자들을 대량학살 했어.
그리고 그대는 지난 3월 26일 이름도 길쭉한 ‘새정치민주연합’을 탄생시키고, 김한길과 공동대표를 맡아 7.30 보궐선거에 ‘기상천외(奇想天外)’한 공천을 강행한 바람에 선거에서 참패했지. 그 와중에 손학규라는 괜찮은 인재가 날벼락을 맞아 ‘정계은퇴’라는 비운을 겪어야 했지.
그대는 7월 31일 대표직을 그만 뒀었지. 그날 그대는 “조용히 성찰하겠다.”면서 “내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다.”고 하늘을 원망했지. 그런 점에서는 죽는 순간까지 왜 유방(劉邦)에게 패퇴했는지를 모르고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한 것이지, 내가 전투를 잘못한 죄가 아니다(天亡我非戰之罪也)”라며 하늘 탓 만 한 항우(項羽)를 쏙 빼닮았어.
그대는 이제 침몰한 난파선이야. 다시 시작할 수 없는 잊혀 진 인생이라는 말이지. 그러므로 이제는 허황한 욕망일랑 다 내려놓고 물처럼 바람처럼 조용히 살게! 교수도 의사도 기업인도 정치인도 제대로 못해본 사람, 빈말은 뉘 시키며, 속은 어이 비었는가. 사시사철 그렇게 빈말만 하니 너를 싫어하노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