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울진별곡(蔚珍別曲)
경북 울진행 버스를 탄 날은 2008년 12월 13일(토요일).
동서울터미널에서 15시 25에 출발했다.
당초의 계획보다 1주일이 당겨졌다.
20일에 출발하여 다음 날 불영사에서 동지팥죽부터 먹고 평해로
가는 것이 울진의 수선혜님과 조율된 스케줄이었는데 내가 깼다.
봉화대로 이후 인터벌(interval)이 너무 길기도 하거니와 걷기 알
맞은 난동의 나날을 허비하고 있는 것 같아 서둘은 것이다.
공사중인 영주~울진 직행로가 개통되면 개선되겠지만 현 도로
여건에서는 전국에서 가장 심각한 교통사각지대가 울진이다.
울진이 강원도 땅이었을 때 강원도는 조선의 칠레?
동서는 1백리 미만인데, 북쪽 함경남도 안변과 경계인 흡곡에서
통천, 고성, 간성, 양양, 강릉, 삼척과 남쪽 경북 영해와의 경계인
울진까지 동해안을 따라 1천리니까.
태백산맥 때문이었다고는 하나 참으로 불합리한 행정이었다.
그래도, 망양정, 월송정 등 관동팔경중 2경과 백암, 덕구 등 유명
온천 및 성류굴, 소광리금강송단지 등 풍부한 관광자원지역인데
경북으로 이적(1963년)됨으로서 서로 희비가 엇갈렸을 것이다.
삼척시 가곡면 삿갓재부터 통고산을 지난후 잠시 영양군 수비면
검마산을 제외하고는 영덕군 창수면 삼승령까지 긴 지형을 따라
낙동정맥이 뻗어가고 있다.
덜거덩 비포장길이던 70년대 초부터 동해안을 따라 숱하게 오르
내리며 수많은 인연을 맺었고, 자전거 일주까지 한 길이다.
한데,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목적으로 가는 중이라 그랬을까.
그리 가벼운 마음가짐이지 못한채 묻고물어 울진읍 읍내리'동명
사우나찜질방'에 들기는 밤 9시가 넘어서 였다.
사각지대답게 많은 시간이 걸렸다.
관속에 들어가는 중이던 장봉주(삼척시 원덕읍 노곡1리)를 살린
한약방을 찾아 예까지 달려왔던 1997년 이후에는 처음이다.
내 친구도 살릴 수 있을까?
영남대로변인 대지공원(충북 음성군 생극면)에 잠들어 있는 S가
늦동이 아들을 위해서라도 2년만 더 살기 바라던 때였다.
지푸라기라도 잡아보려 하는 물에 빠진 사람의 심정이 이럴까.
사정해 보았으나 살리기는 커녕 오래잖아 본인도 가버렸다나.
친구가 떠난 후로는 그와 연관된 곳은 모두 출입을 막고 매번 쏜
살같이 통과하고 말았는데 울진이 그 중 하나였다.
평해대로는 경상도를 싫어했나
첫 시내버스(06:10)가 짙은 안개를 뚫고 확장공사중인 7번국도를
지그재그해서 도착한 평해땅이 싸늘한 미명이었다.
비록 난동이긴 하나 초겨울 새벽임을 과시라도 하려는 듯 차갑게
구는 공기에 쫓겨 막 문을 여는 중인 해장국집으로 들어갔다.
뜨거운 국물로 달래며 먼동트기를 기다리는데 늙은이의 사정을
간파했는지 패트병에 더운 숭늉을 담아주는 주인녀가 고마웠다.
무뚝뚝한 인상에 반해 속정이 있는 여인인가.
그래서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말라는 거겠지.
사물이 또렷이 보이는 시각에 평해읍사무소와 그 뒤의 평해향교
(문화재자료 제160호)에 들른 후 옛 대로에 접어들었다.
평해는 울진군의 읍에 불과하지만 예전엔 군관아가 있던 곳이다.
경도~평해간의 평해대로는 왜 삼척, 강릉, 평창, 횡성, 원주 양근
경도의 890리길로 정했을까.
대동지지도 주(註)달기를 평해에서 영해(영덕)로 해서 가면 경도
780리라 했다.
울진에서 서쪽으로 80리 고초령(高草嶺), 90리 안동재산(才山),
80리 영천(현 榮州)으로 해서 가면 경도가 700리라 했다.
삼척에서도 백복령을 지나 정선길로 가면 삼척~경도가 590리라
하면서도 70리나 먼 강릉부 경유의 660리길을 택했다.
평해향교(상)와 달효마을(하)
왜 그랬을까.
평해대로는 경상도를 싫어했나.
의문의 걸음이 종일 이어질 것인가.
옛 7번국도 따라 달효마을의 회관에 들렀다.
평해와 5리 어간으로 달효역이 있던 곳이다.
마침, 만난 마을 리장이 옛 달효역(達孝驛) 터라고 가르친 지역은
월송1리 조용한 마을로 변해 있다.
관동팔경중 하나인 월송정이 있어서 월송리라 했다 하나 월송정
(越松亭)과 월송리(月松里)는 한자표기가 다르다.
월국(越國)에서 송묘(松苗)를 가져다 심었다 하여 월송정(越松亭)
이라 했다 또는 달밤(月夜)에 송림(松林)에서 놀았다 해서 월송정
(月松亭)이라 했다고 말하나 현판은 월송정(越松亭)이다.
달효마을을 달로마을이라고도 한단다.
月松亭의 유래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리장이 설명했다.
월송정은 신라 화랑들이 웅지를 품던 도장이었으며 송강 정철(松
江鄭澈)에 의해 팔경에 들게 되었다고 하나 정철의 관동별곡에는
월송정이 없다.
그리고, 월송정은 원래 월송포 만호성(대동지지의 越松浦鎭?)의
남문루였는데 현 위치로 이건했다는 것.
이중환도 흡곡 시중대(侍中臺), 통천 총석정(叢石亭),고성 삼일포
(三日浦), 간성 청간정(淸澗亭),양양 청초호(靑草湖),강릉 경포대
(鏡浦臺), 삼척 죽서루(竹西樓)와 울진 망양정(望洋亭) 등을 팔경
(擇里地) 이라 하여 월송정은 제외됐다.
관동(關東)은 대관령 동쪽, 즉 강원도의 동쪽지방을 이른다.
그러므로, 관동8경은 동부 강원도의 8대 명경(名景)을 말한다.
망양정이 관동8경중 하나인 것은 울진이 강원도였음을 뜻한다.
평해대로가 위험부담이 많은 험산 준령과 고개들을 피하고 다소
우회는 하나 편하고 낭만적인 관동2경(죽서루와망양정)의 360리
길을 택한 것.
경도~송치(松峙)의 경기땅 175리를 빼고는 강릉부까지 355리가
강원도 길이라는 점 등에 유의할 필요가 있겠다.
평해대로 890리중 715리가 강원도길이다.
그러니까, 평해대로는 경상도를 싫어한 게 아니라 강원대로이며
당연히 이 길이어야만 했다.
평해대로 스케치1(북천교비)
얼마 가지 않아서 평해중.공업고등학교 교문 안쪽 중앙에 서있는
<切磋琢磨>가 음각된 바위가 어필(appeal)해 왔다.
절차탁마는 시경(詩經)을 인용한 논어의 말이다.
如切如磋 如琢如磨(옥이나 돌 등을 갈고 닦아 빛을 낸다.學而篇)
"학문과 덕행, 기예 등을 배우고 닦기를 등하교때마다 다짐하라"
고 세워놓은 이 학교의 교육 지표인가 보다.
서말 구슬도 꿰어야 보배라잖은가.
자연 발광체 외에는 갈고 닦아야 빛을 낸다.
그 과정의 장(場)이 바로 학교다.
월송정 입구 송림 속에 들어선 학교 운동장이 잔디로 덮여있어서
더욱 청정한 느낌을 주는 학교다.
아마, 축구가 이 학교 운동의 주종목인가 보다.
평해공업고등학교(상)와 황씨 본산(중, 하)
월송정 진입로 입구에는<黃氏始祖祭壇園>, <平海黃氏大宗會>가
넓은 송립 속에 자리잡고 있다.
우리나라 황씨의 본산(本山)이 이곳 평해 월송리란다.
중국 후한 광무제때(AD28년) 구대림(丘大林)과 함께 교지국(交
趾國)에 사신으로 가던중 동해에서 풍랑으로 평해 월송포에 표착
하여 정착한 유신 황락(儒臣黃洛)이 도시조(都始祖)다.
달효역과 5리간이라는 옛 월송포진(越松浦鎭)의 위치를 황보천
한하고 가늠해 보았으나 확인하지 못했다.
황보천 군무교를 건너 기성면에 들어서는데 다리에 신호가 왔다.
사보타주(sabotage)하겠다는 예고인가.
북천교비(北川橋碑) 앞에서 한참 달랬다.
이 비는 경북도 유형문화재 제361호로 이조 선조때 세웠단다.
이미 건너온 황보천이 당시의 북천이며 군무교 부근에 돌다리를
놓은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백성의 불편을 해결해 주려는 관(官)의 배려가 아니고 민(民)이
스스로 건립한 후 그 내력을 적은 비(碑)란다.
민을 위한 관이 아니고 민 위에 군림하는 관에 대한 민의 역사적
고발장에 다름 아니지 않은가.
북천교비(상)와 운암서원(하)
불사이군(不事二君)의 려말(麗末)충신인 백암 김제(白岩金濟)는
두문동칠십이현(賢)중 한 분이다.
600년을 뛰어 넘어 교감한 사이가 아닌데도 그의 호(號)'白岩'이
묘한 친근감을 느끼게 했다.
그 분을 봉향(奉享)하는 운암서원(雲巖)이후 해변을 버리고 울진
공항교차로, 신.구7번국도가 얽혀 있는 정명(正明)길을 택했다.
기성면소재지를 지난 후 사동리에서는 신7번국도에 합류했다.
정명~망양 각 10리 사이라는 명월포(明月浦)를 찾지 못한채.
망양리 오징어목장과 해변에 건조중인 오징어떼가 즓비했다.
판매대 마다 의상을 갖춘 허수아비가 1차 임무를 수행중이었다.
고객의 관심이 확인되면 부리나케 뛰어나오면 되니까.
바닷바람이 세기 때문에 방안에 앉아 망을 보고 있는 것이리라.
그런데, 저 오징어들이 다 국산 맞나?
사지 않을 것이면서도 이같은 엉뚱한 의심을 품고 있다니?
모든 생선이 그렇거니와 특히 오징어는 원양산보다 연근해산을
선호하는 점에 착안해 원양산을 근해산으로 둔갑시킨다잖은가.
죽변의 거대한 냉동창고에 남태평양(칠레앞바다)에서 포획해온
오징어떼가 가득한 것을 목도한 후로는 더욱 그런 의심이 든다.
노실 어촌에서 잡아, 건조해 보내주는 것 외에는...
<관동제일루> 망양정
바닷바람이 싸하긴 해도 상쾌하기 그지없는 망망대해와 벗하여
해변을 걷는 것이야 말로 상상으로는 결코 알 수 없는 행복이다.
기성면 망양리 망양정옛터(望洋亭舊址)에 올라섰다.
동해를 응시하고 있는 현종산(417m) 남쪽 기슭, 해변의 오뚝한
콧날 위에 <望洋亭遺墟碑>(망양정유허비)가 서있다.
북에서 남으로 푸른 동해바다가 참으로 막힘이 없고 끝도 없다.
이조19대 숙종이<關東第一樓> 친필 현액을 하사할 만 했겠다.
서인(西人)의 거장으로 당쟁에 몸을 던짐으로서 파란곡절을 겪긴
했으나 당대 가사문학의 최고봉이었던 송강 정철(松江鄭澈:1536
~93)은 관동8경의 하나로 꼽았다.
망양정 유허비(상)와 망양정시(하)
그런데, 망양정은 이사수(移徙數)가 있었던가.
처음(고려때)에는 망양리 해변 언덕에 자리잡았고,
이조4대 세종때 현종산 기슭(유허비 위치)으로 이사했고,
25대 철종11년(1860)에는 멀찍이 떨어진 현 위치(근남면 산포리
屯山洞)로 다시 이사했으니 말이다.
찾아올 내로라 하는 시인 묵객이 없는데 어디에 있는 들 어떠랴.
<天根을 못내 보와 望洋亭의 올은 말이,
바다 밧근 하날이니 하날 빗근 무서신고.
갓득 노한 고래 뉘라셔 놀래관대,
블거니 쁨거니 어즈러이 구난디고.
銀山을 것거내어 六合의 나리난닷,
五月長天의 白雪은 므사일고.>(관동별곡중 망양정 일부)
망양휴게소에서 첫 식사를 한 시각은 13시 30분.
굼뜬 건 아니었지만 이것저것 살피느라 진도가 더뎠나 보다.
울진읍까지는 아직 멀어 걸음을 재촉했다.
덕신역(德新驛)이었던 원남면 덕신리에서 신7번국도를 택했다.
남은 길을 조금이나마 줄이려면 면소재지를 우회해야 했으니까.
매화천변 덕신리 고분공원에서 다시 옛길로 들었다.
울진기미독립만세공원(매화동산)이 쉴 만한 곳이라 여긴 것일까.
그간 잘 참아주었다는 듯 석양인데도 쉬라는 다리를 어쩐다?
어차피, 밤길이 될 거라면 느긋이 걷겠노라고 달래며 일어섰다.
금매리를 지나 근남면 구산리~석류굴 입구 교차로까지 나갔다.
신7번국도에 흡수된 노음교차로까지 가다가 하마터면 봉화대로
죽령길의 재판이 될 뻔 했다.
그 때와 거의 비슷하게 어둑해진 시각에, 그 때처럼 도로의 차선
안내표시등 모서리에 걸려 아스팔트 바닥에 엎어졌다.
이렇다 할 상처가 없어 다행이지만 순간 아쩔했다.
역시 다리 힘이 빠진데다 원덕, 삼척 거리 셈하며 걷다가 그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