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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말로 다 못한 서러움
(1) 인어공주가 안데르센?
“모든 닿을 수 없는 것들과 모든, 건널 수 없는 것들과 모든, 다가오지 않는 것들과 모든, 참혹한 결핍들을 모조리 사랑이라고 부른다. 기어이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이다.”(작가들의 연애 편지, 205쪽, 김다은 엮음, 생각의 나무)
<기어이 사랑이라 부르는 기억들>이라는 제목이 붙여진 소설가 김훈의 글 일부이다. 그의 말처럼 사랑이란 충족이 유보된 갈망이고 영원한 사랑이란 지상에서 실현되지 않음이 전제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는 우리들이 꿈꾸는 불멸의 사랑이 만질 수 있고 품을 수 있고 불러볼 수 있는 현실의 연인과 함께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까닭이다. 우리 모두는 ‘단테와 베아트리체’, ‘오르페우스와 유리디체’처럼 불멸의 사랑을 꿈꾸지만, 아무라도 지상에서 좌절된 사랑을 되찾기 위해 죽음마저 두려워 않던 인어공주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4-1. 안데르센은 마차 삯이 부족해서 중간에 내려 걸어서 코펜하겐 안으로 들어왔다. 1819년 당시 이 도시는 성벽과 해자에 의해 보호받고 있었으며, 해자는 시청 앞 광장에서 티볼리 공원 입구까지 뻗어있었다. (사진, 티볼리 공원 입구)
열일곱 살이 된 청년은 요나스 콜린의 지원 덕분으로 국왕의 후원금까지 받아가며 슬라겔세(Slagelse)의 문법학교에서 라틴어와 기하학 등을 배우게 되었다. 그러나 그 시절 다른 아이들보다 무려 여섯 살이나 많았음에도 아는 것은 가장 적었기 때문에 자주 놀림감이 되곤 했다. 게다가 툭하면 공상에 빠지는 그의 성향이 합리주의자였던 메이슬링 교장의 심기를 건드려, 결국에는 글쓰기와 작문까지 금지 당하는 처량 맞은 신세가 되었다.
4-2. 아말리엔보르 궁전으로 가는 길에는 요나스 콜린 가족이 1838년 이후 살았던 9번지 집이 아직까지 그대로 남아있다. 사진은 아말리엔보르 궁전
학업을 마치고 코펜하겐으로 돌아간 1827년 봄 어느 날, 청년은 콜린의 집에 초대되어 자신의 나이 또래인 다섯 남매들과 사귀게 되었다. 특히 자신을 쌀쌀맞게 대하는 차남 에드바르(Edvard)에게는 묘한 연정까지 품게 되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에드바르도 청년의 라틴어 공부까지 도와주며 다정하게 대해 주었다. 그러면서도 에드바르는 자신이 은혜를 베풀고 있다는 태도를 은연중에 내비쳤다. 그런데도 이성적인 기질의 소유자로 용기와 결단력까지 갖춘 에드바르에게 매혹된 청년은 자신의 전부를 바쳐 그를 사랑하게 되었고 그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라면 어떠한 노력도 마다하지 않았다. 1833년 그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리는 이 같은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나는 일찍이 당신 내부의 무언가에 이끌렸으며, 많은 것들에 매료되고 존경심을 느꼈지요. 당신도 내게 관심을 보여주었고, 나는 그 관심이 더욱 더 커져 당신이 내 친구, 세상에 몇 안 되는 그런 친구가 되기를 바란답니다.”
이처럼 자신의 애정을 듬뿍 담아 편지를 수어차례 보냈지만, 그럴수록 청년은 기가 죽었다. 우정과 사랑을 고백하던 청년이 원했던 것 중 하나는 어찌 보면 지극히 사소한 ‘친구’ 또는 ‘너'라는 호칭이었다. 물론 오늘날의 시각에서는 나이 어린 에드바르에게 자신을 ‘친구’로 불러줄 것과, 자신도 그를 ‘너’로 칭할 수 있게 해달라는 부탁은 이해되기 어렵다. 하지만 봉건적 풍토가 남아있던 19세기 초반의 덴마크 사회 안에서 두 사람의 신분 차이를 생각해본다면, 이 문제는 결코 사소하지 아니었을 것으로도 생각된다.
4-3. 안데르센이 동화를 쓰기 시작했을 1835년에는 로젠보르 궁전을 둘러싸고 있는 왕립 공원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산책했다.(사진 로젠보르 궁전과 왕립 공원)
4-4. 뉘하운의 첫 번째 거주지인 20번지 집에서 안데르센은 첫 번째 동화를 쓰기 시작했고 20년간 이 곳에서 살았다.
1835년, 서른이 된 청년은 코펜하겐 니하운에 새 거처를 마련하고 드디어 동화 창작에 몰두하기 시작했고 부싯깃 통으로 시작된 일련의 창작 과정은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됐다. 그러나 곧 있을 에드바르의 결혼이 둘 사이를 영원히 갈라놓게 되리라고 예감한 청년은 불안했다. 그러던 중 청년은 동화야말로 이 금지된 사랑을 승화하는 매체로 제격이라는 생각을 하고 에드바르의 결혼식을 피해 핀에 머물면서, 몇 년 전 써둔 <아그네트와 인어>를 기초로 인어공주를 쓰기 시작했다. 수 없이 고쳐 써서 완성한 이 작품에서 그는 양성 모두에게 끌리는 자신을 인간과는 다른 종족인 인어라고 상정하고 에드바르를 넘볼 수 없는 왕자의 자리에 올려놓음으로서, 이루어질 수 없는 자신의 사랑을 은유하도록 했다. 그리고 청년은 자신의 현실에서와 마찬가지로 인어의 사랑도 왕자에 의해 구원받지 못하고, 물거품에서 바람의 딸로 변하게 되는 결말을 보여주었다.
4-5. 1913년 조각가 에드바르 에릭센이 만든 인어 동상. 1964년 동상의 목이 베어진 것이 발견된 이후, 2003년에는 조각상 전체가 폭파된 일도 있지만, 서러워도 말 못하는 비운의 공주님이다. 실제로 보면 사람 몸 사이즈라서 조금 실망스럽다.
인어공주는 자기희생과 침묵, 속죄로 뒤섞인 억압의 고통을 감내하는 인어를 이상적인 여성의 상으로 설정한 인상을 풍긴다고 비평가들로부터 비판받기도 했지만, 더 깊이 들여다보면 영속적인 여성의 사랑이 남성의 변심과 맞닥뜨리는 비극을 이야기한 것이고, 그 여성은 다름 아닌 에드바르를 사랑하던 청년 자신이었다. 이 작품이 발표된 이후, 인어공주의 소재는 오스카 와일드의 어부와 그의 영혼, H. G. 웰스의 바다와 귀부인이 탄생하는데 절대적인 영감의 재료가 되었고, 혀가 잘려나가는 고통을 당했던 인어공주처럼 자신의 사랑을 함구할 수밖에 없었던 청년은 영원히 독신으로 살아가게 되었다. 그 청년의 이름은 한스 크리스찬 안데르센이다. 이제 그가 태어난 지도 200년이 훌쩍 지났지만, 불멸의 사랑을 꿈꾸었던 그의 영혼은 찬란한 동화 작품으로 대대손손 전해지며, 그는 자신의 생에 누리지 못했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
(2) 말 못하는 공주
여기서 새삼스럽게 안데르센 원작의 인어공주를 이야기할 필요가 있을까마는 물거품이 된 공주의 사랑 앞에서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는 어리석은 인어공주에게 차라리 분노에 가까운 동정심을 느꼈던 나의 어린 시절이 기억난다. 사실 어린 내가 사랑이 무엇인지 생각이나 해봤을 리 만무하니, 인어공주의 처절한 헌신을 숭고한 사랑이라고 이해했을 리도 만무하다. 코펜하겐에 가면 인어공주 동상은 육지 쪽을 바라보게끔 세워져있고, 그녀를 만나러 전 세계에서 온 관광객들은 들뜬 마음으로 인어공주 주변으로 모여든다. 그러나 어이없게도 고개를 다소곳이 숙인 채 슬픈 표정을 짓고 있는 인어공주의 동상은 비참하리만큼 작다. 직접 보았을 때 나는 좀 더 폼 나는 규모의 동상을 세워두지 않은 코펜하겐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차근히 인어공주를 읽으며 다시 생각해보니 가련한 인어공주에게는 그 정도 크기 이상은 어울리지 않을 거란 코펜하겐 사람의 깊은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림 4-1. 인어들은 열다섯이 되어야 수면 위로 올라가 아름다운 노을과 마을을 구경할 수 있다. 막내인 ‘인어공주’도 빨리 열다섯 살이 되고 싶은 마음에 언니들을 부러워하며 창밖을 내다보고 있다.
그림 4-2. 꼬리 대신 생긴 두 발은 걸을 때마다 마치 칼날을 밟는 듯해서 고통스러워하는 인어공주와 그녀를 부축하고 있는 아무 것도 모르는 왕자.
사람들의 육체는 유한하지만 영혼은 영원한 것이라고 믿던 인어공주는 이제 물거품에서 빠져나온 자신의 몸이 하늘 높이 올라가는 것을 느끼고 있다. 공기처럼 가볍고 투명한 ‘바람의 딸’로 변해 하늘을 떠돌다 보면 영혼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러나 바람의 딸이 되었다고 곧바로 영혼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300년이란 기나긴 인고의 시험 기간을 참아내야만 한다. 이 인고의 세월 동안 바람의 딸들의 고통을 덜어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순진무구한 아이들의 선행뿐인데, 그나마 아이들의 선행 하나에 300년에서 하루가 단축되지만 나쁜 짓 하나에는 오히려 하루가 늘어난다고 하니.......
입버릇처럼 사랑 타령을 하면서도 정작 사랑을 숭고한 자리에서 끌어내리고야 마는 우리들에게
그림 4-3. 리즈베트 츠베르거는 칼을 들고 왕자의 침실을 찾아간 장면을 직접 보여주지 않고 바다로 뛰어들기 직전의 참담한 인어공주의 모습으로 건너뛰었다
그림책으로 안데르센의 동화를 아름답게 형상화한 리즈베트 츠베르거(Lisbeth Zwerger)는 1954년, 예술의 도시 비엔나에서 출생한 현존하는 최고의 일러스트레이터 중 한 명이다. 그래픽 아티스트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부터 안데르센이나 그림 형제의 동화를 자주 접했던 그녀는 ‘그림 동화’나 ‘이솝 우화’ 등의 고전적인 스토리 혹은 오스카 와일드나 루이스 캐럴처럼 백 년 이상 앞선 시대의 대문호들의 작품을 그림책 소재로 주로 취했다. 또한 탁월한 상상력으로 세부 묘사가 돋보이는 환상적인 삽화를 많이 그렸는데, 이런 경향은 첫 번째 그림책인 E.T.A. 호프만(Hoffmann) 원작의 이상한 아이부터 드러났다. 이 점에 대해 ‘가능한 많은 판타지를 가진, 일상으로부터 멀어지는 이야기’를 최우선적으로 고려하기 때문이라고 작가가 직접 밝힌 바도 있지만, 그녀의 재능은 역시 환상적인 이야기를 다룰 때 더욱 빛난다.
인어 공주에서는 물거품처럼 투명한 효과를 가져다주는 수채물감을 이용해 한결 슬픔이 절절하게 느껴지도록 그려내고 섬세한 선 처리를 통해 기품 있는 인어공주의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츠베르거는 어떤 그림책에서든 이야기의 이미지에 따라 미술적 기법을 달리하는 데 탁월하다. 그런데 알고 보면 리즈베트 츠베르거만큼 상복이 많은 그림책 작가도 드물 듯하다. 그녀의 작품 중, 빨간 모자, 오즈의 마법사, 노아의 방주는 각각 1993년, 1996년, 1997년 세 차례에 걸쳐 <뉴욕타임스>의 “올해의 최고 그림책”에 선정되었다. 또한 “브라티슬라바 국제 비엔날레상”을 두 차례나 받은 것 이외에도 1990년에는 어린이 문학 분야에서 가장 혁혁한 공을 세운 작가에게 수여하는 “한스 크리스찬 안데르센상”까지 받았으니 과연 그녀의 그림책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3) 가사 없는 노래, Felix Mendelssohn(1809 ~ 1847)
<무언가, Songs Without Words>
우정의 천재 펠릭스 멘델스존은 낭만주의 시대를 대표하는 음악가로 안데르센과도 친구로 지냈다. 독일을 여행할 때 안데르센은 라이프치히에서 멘델스존과 만나 함께 베토벤 교향곡 7번의 리허설을 본 적도 있다고 한다. 또한 가끔은 집에 모여 안데르센이 자신의 인어공주를 낭독하면, 둘의 친구이자 유명한 오페라 여가수인 예니 린드가 멘델스존의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천성적으로 밝은 성격의 멘델스존은 안데르센의 이야기에 황새가 자주 등장한다며 놀려대기도 하고, 안데르센이 동화를 읽어줄 때면 흉내까지 내며 ‘정말 당신의 낭독은 환상적입니다. 아무도 당신처럼 동화를 멋지게 읽어주지는 못할 것입니다.’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도 전한다.(안데르센 평전, 506쪽, 재키 울슐라거, 미래 M&B)
4-6. 멘델스존이 살던 집을 그대로 기념관으로 개조해 일반에게 공개하고 있다. 멘델스존의 얼굴을 새긴 대리석 출입구를 지나 정원 안으로 들어가면 온통 노란 집이 보인다. 2층에는 멘델스존이 사용한 서재 겸 연습실과 30인을 수용하고도 남을 크기의 화사한 연주홀이 있다.
안데르센이 이탈리아를 상상력으로 가득 찬 나라로 찬양했듯이,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의 적극적인 후원 덕에 세상을 두루 보고 다녔던 멘델스존 역시 이탈리아를 뮤즈의 고향으로 생각했다. 실제로 그는 이탈리아 베니스에서 곤돌라를 타고 노닐다 떠오른 시상을 마음에 품고 있다, 말로는 차마 다 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선율로 옮겨 자신의 누이 화니에게 선물했다. 화니의 일기에는 멘델스존이 ‘가사가 없는 노래’란 뜻의 <무언가>를 작곡해 자신의 생일날 선물로 줘서 최고로 멋진 생일잔치를 치렀다는 기록이 있다. 이처럼 이탈리아 여행을 계기로 스물한 살부터 16년간 틈틈이 작곡해서 모은 49 곡의 <무언가>는 멘델스존의 생애 동안 6곡씩 나뉘어 모두 8권으로 출판되고, 나머지는 사후에 출판되었다.
그렇다면 왜 그가 가사 없는 노래를 작곡했는지, 다음의 설명을 들어보자. “내 마음 속에 특별한 단어들이 떠오를 때 나는 누구에게라도 말로 전하고 싶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같은 단어도 사람에 따라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지요. 오직 음악만이 누구에게나 똑같은 감정을 일으키고 똑 같은 것을 전달할 수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혀가 잘려 할 말도 할 수 없었던 인어 공주의 심정과는 거리가 먼, 의도적으로 말을 아끼는 작곡가의 여유로운 태도에서 조금 부화를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바로 또 다른 질문을 이끌어낼 수도 있다. 만일 ‘그렇다면 멘델스존, 당신은 꾀꼬리 같은 목소리, 즉 인어 공주가 물 밖으로 나오기 전까지 갖고 있었다던 물방울 같이 통통 튀는 목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습니까?’라고 묻는다면 멘델스존은 자신이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던 오페라 여가수 예니 린드를 예를 들며 절대 그렇지 않노라고 대답할 것이다.
4-7.최고의 음향시설을 자랑하는 라히프치히의 자랑, 게반트하우스(Gewandhaus)는 1884년 세워졌으나, 2차 세계대전 때 연합군의 폭격으로 파괴된 것을 1981년에 재건한 것이다.
다시 멘델스존의 <무언가>로 돌아가서 이야기를 계속 해보자. 각각의 곡은 2분 내지 3분의 아주 짧은 소품들이지만, 때로는 고양이의 나른한 낮잠처럼 달콤하고, 때로는 봄바람에 나부대는 빨래처럼 뽀송한 음감으로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편안하게 감상할 수 있는 명곡들이 대부분이다. 사실 곡들의 제목을 몰라서 그렇지 막상 들어보면 언젠가 들어본 적이 있는 친근한 곡들이다. 말 하고 싶어도 말 할 수 없었던 인어공주, 에드바르를 친구 이상으로 사랑하면서도 세상에 꺼내놓고 말할 수 없던 안데르센, 말보다는 음악이 더 적확하게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것으로 믿던 멘델스존, 아름다운 목소리로 안데르센의 나이팅게일에서 주인공이 되었던 예니 린드, 이들에게 <무언가>는 단순히 소리 없는 메시지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인어공주에게는 <희망, No.16 in A major>, 안데르센에게는 <영원의 비애, No. 22 in F major>, 멘델스존에게는 <달콤한 추억, No.1 in E major>, 그리고 예니 린드에게는 <봄의 노래, No.30 in A major>를 들려주고 싶다. 다만 형편없는 내 피아노 솜씨로는 이들 모두에게 실례가 되니, 발터 기제킹(Walter Gieseking)의 연주로 대신해서 들려주고 싶다.
발터 기제킹은 프랑스 리옹에서 독일 국적의 부모 사이에서 태어나 활동한 20세기 최고의 피아니스트 중 한 사람이다. 그는 피아노 앞에 앉아 연습을 안 하는 연주자로도 이름을 날렸는데, 사실은 엄청난 기억력의 소유자로 머릿속으로 연습하며 곡의 해석을 마친 이후에나 피아노 앞에 앉았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기제킹의 연주하는 옆모습이 담긴 흑백의 사진을 한참 들여다보고 있으면, 통통하게 살이 오른 새 한 마리가 자동적으로 연상된다. 아마도 새의 부리 같은 콧날 때문인 것 같은데, 어쨌거나 그의 <무언가> 연주에는 앞서 언급한 안데르센, 인어공주, 멘델스존, 그리고 예니 린드가 말로는 다 못한 사연들을 정확하게 피아노로 그려내는 특별함이 있다.
첫댓글 제가 좋아하는 독일 작가, ETA Hoffmann의 경우, 본인이 Anderson을 너무 좋아한답니다. 이름 앞의 A가 의미하는 것은 바로 Anderson이라고 하더군요. wikipedia 중에서
한동안 잠잠하다 했더니 계속 쓰는 거지요. 안데르센 공부 좋습니다. 계속 열심히 하세요.
예. 이 주에 한 번 꼴로는 계속 쓰고 있었어요. 안데르센 공부를 차분히 하고는 싶은데, 너무 방대해서 평생 해야할 것 같아요. 그래도 일 년에 10편이라도 할 수 있었으면 해요. 혼자 하기 버거우니 다들 함께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