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신앙대상은 무엇인가?
어떤 철학자가 말하기를 “믿음이 있으면 종교요, 믿음이 없으면 철학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불교도 물론 믿음이 있으며 믿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대승불교 경전인 『화엄경』에서는 “믿음은 도의 근원이요, 공덕의 어머니가 되어서 일체 선근을 심어준다."라고 하였으며, 『법화경』에서도 “믿음으로서 깨달음의 경지에 이른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믿음은 종교의 생명이며 본질입니다. 그르면 불교는 무엇을 믿음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일까요?
첫 번째, 부처님(佛)과 보살님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고 있습니다.
기독교에서 ‘하느님', '예수님'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것과 같이 불교에서는 '부처님', ‘보살님'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의미는 매우 다릅니다. 신을 믿는 종교에서는 신(기독교의 여호와 신, 회교의 알라 신, 등)이 있어서 그 신이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였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운명을 주관하고 있으므로 그 신을 잘 믿으면 살아서는 소원을 성취하고 죽어서는 영원한 세계[천국]에 간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이러한 창조신이나 주재신(主宰神)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불교에서는 모든 것은 인연에 의하여 일어나고 인연에 의하여 사라진다는 인과법으로 존재의 원리[법칙]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모든 법이 인연 따라 일어나고 인연따라 사라진다면 여기에 신이 존재할 여지는 없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선각자(先覺者)이지 창조자나 주재신은 아니며, 보살님들은 깨달음과 중생구제의 원력을 세우고 열심히 수행ㆍ정진하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불교에서는 신앙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신행(信行) 또는 신봉(信奉)이라는 말을 쓰며, 이는 금강경 등 여러 대승불교경전의 신수봉행(信受奉行)이라는 말을 간추려 쓴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석가모니 부처님 이외에도 서방 극락정토의 교주인 아미타부처님, 동방정유리세계의 교주인 약사여래 부처님, 미래세계에 오신다는 미륵부처님 등, 많은 부처님이 계시고, 또 문수보살ㆍ보현보살ㆍ관세음보살ㆍ지장보살ㆍ대세지보살 등, 많은 보살님들이 부처님의 뜻을 받들어 중생구제를 위해 애쓰고 계십니다. 이들 부처님이나 보살님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이루시고, 그 지혜로서 과거ㆍ현재ㆍ 미래의 3세와 한량없는 우주 공간을 두루 살펴보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분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부처님ㆍ보살님을 신봉해야 하느냐가 문제입니다. 물론 석가모니 부처님만이 아니라 모든 부처님, 보살님을 신봉해야 합니다. 그 중에서도 우리와 같이 지구상에 태어나서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이루시고, 우리에게 참된 삶의 길을 가르쳐 주신 석가모니 부처님에 대해서 잘 알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자각각타(自覺覺他)의 행을 몸소 실천하는 사생(四生)의 자비로우신 어버이요, 인천(人天)의 큰 스승이십니다. 그래서 부처님을 불보(佛寶)라 하여 신앙의 대상으로 받드는 것입니다.
두 번째, 부처님의 가르침(法)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法)을 범어로는 다르마(Dharma)라고 합니다. 다르마는 원래 사물의 이치ㆍ진상ㆍ법칙ㆍ도리를 의미하는 것이었는데, 불교에서 이를 채용한 것으로 불교에서의 법은 부처님의 가르침 즉 '불교의 교법(敎法)'을 의미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세월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 따라 다른 것도 아닌 누구에게나 공통되는 행복의 길, 참된 삶의 길입니다. 부처님께서 처음으로 이 길을 발견하신 것입니다.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기 전에는 인간은 신의 창조로 이루어 졌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습니다. 신이 인간과 만물을 만들었다고 한다면 인간이란 결국 신의 도구에 불과하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공장에서 물건을 만드는 것은 인간의 필요 즉, 쓰임새에 따라 만들어 지고 있듯이 인간이 신에 의해 창조되었다면 인간의 의지보다는 오직 신의 섭리, 신의 눈치만 보고 살 밖에 없을 것입니다. 자기의 노력과 그 대가로 행복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오직 조물주인 신의 뜻에 의해서만 행복과 불행이 결정된다면, 인간의 의지나 노력은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모순이며 불합리한 일입니까? 부처님은 최초로 인간을 신의 종속에서 해방시킨 분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을 얻으신 후 우리 중생들을 구제하시고자 80평생을 하루도 쉬지 않고 법을 펼치셨는데, 부처님의 가르침을 집대성한 것을 경전ㆍ불경ㆍ일체경ㆍ대장경ㆍ팔만대장경 등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법[경전]은 인간이 괴로움[苦]에서 벗어나 열반을 증득할 수 있는 가르침이기 때문에 법보(法寶)라 하여 신앙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 승(乘)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고 있습니다.
승을 범어로는 상가(Samgha)라고 하는데, 이를 음역하여 승가라고도 하며 간략하게 승이라고도 하고, 화할 화(和) 무리 중(衆)자를 써서 화합중(和合衆) 또는 화합승려라고 하기도 하고, 여러 불자들이 화합하는 것이 마치 여러 강물이 모여서 바다를 이루지만 바닷물의 맛은 한가지인 것에 비유해서 바다 해(海), 무리 중(衆)자를 써서 해중(海衆)이라고도 합니다. 다시 말하면 승이란 화기애애하게 모여 사는 부처님의 제자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부처님의 제자란 단순히 스님들만이 아니고 사부대중(四部大衆)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부대중이란 비구ㆍ비구니ㆍ우바새ㆍ우바이를 가리키는데, 이 중 비구 ㆍ비구니는 출가한 남ㆍ여 스님이며, 우바새ㆍ우바이는 재가 남ㆍ여 신도입니다. 이 처럼 승가는 출가 승려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리 출가 2중과 재가 2중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승가 즉 스님들과 신도들을 승보(僧寶)라고 하는데, 왜 승(僧)을 보배라고 하는가 하면 승가가 있음으로써, 부처님의 가르침을 홍포하고 후세에 까지 불법을 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승가가 없다면 우리는 지금 어떻게 부처님을 알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부처님의 제자들을 승보라 하여 부처님과 똑같이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것입니다.
재가신도라도 부처님의 정법을 바르게 깨닫고 이를 널리 전하는데 노력하는 사람은 삼보의 하나인 승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자들은 스님들을 존경해야 함은 물론이지만 신도님들 가운데서도 남의 모범이 되는 불자는 다 같이 존경하고 받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ㆍ법ㆍ승, 이 세 가지 보배는 어느 하나를 따로 떼어 생각할 것이 아니라, 부처님(佛)과 부처님의 가르침[法]과 부처님의 제자(僧)를 한 덩어리로 똑같이 공경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더불어 이 세 가지 보물을 밖으로만 찾을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 가운데서 찾아내야 합니다.
우리의 청정한 근본자성이 바로 불보입니다. 왜냐하면 이 불성은 부처와 중생이 본래 차별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6조 혜능대사는 “깨달으면 부처요 미(迷)하면 중생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자성 가운데의 불보를 공경하는 마음을 갖고 이 소중한 보배를 찾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또 우리의 성품이 보배입니다. 왜냐하면 이 성품이 온갖 생각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역시 6조 혜능스님은 “선지식아 일체 수다라와 모든 문자로 된 12부 경전이 모두 사람으로 말미암아 있는 것이며 지혜의 성품으로 세워진 것이니, 만일 세상에 사람이 없다면 일체만법이 본래 제 스스로 있을 수 없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우리의 4대 육신 가운데서 승보를 찾아야 합니다. 우리는 간혹 육신을 천대하지만 이 육신을 떠나서는 부처도, 법도 간직할 곳이 없습니다. 부처님의 법을 전하기 위해서도 이 육신이 있어야 하므로 승보요, 갖가지 인연이 모여서 마음의 명령에 따라서 잘 움직이는 이 육신이야 말로 참으로 화합이 잘 이루어진 승보인 것입니다.
삼보에 대한 귀의를 삼귀의라고 하는데 『율장대품』에 의하면, 그 형식은 다음과 같습니다.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가르침에 따르는 승가에 귀의합니 다. 거듭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거듭 가르침에 따르는 승가에 귀의합니다. 다시 한 번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다시 한 번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다시 한 번 가르 침을 따르는 승가에 귀의 합니다.
왜 세 번을 반복하여 귀의토록 하였겠습니까? 그것은 삼보에의 귀의야 말로 불교 신앙의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삼귀의를 ‘귀명(歸命) 삼보’라고도 하는데, 이 말은 목숨을 바쳐 삼보에 귀의 한다는 뜻으로서, 삼보에 자기의 전 인생과 심지어 하나밖에 없는 생명까지도 바치겠다는 마음가짐을 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