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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신년말씀 제4강
말씀 약3:1-12
요절 약3:2
신자의 언어생활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우리는 지난주 비전수양회를 가졌습니다. 하나님이 이미 주셨던 비전의 말씀을 기억에 보았고 현실에서 눈을 들어 10년 후를 내다 보려했습니다. 그러다보니 하나님이 내게 주셨던 그 말씀대로 신실하게 우리의 삶을 인도하신다는 것을 깨달았고, 또 주신 비전에 합당한 자로 키우려고 훈련하고 계신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저는 하나님이 주시는 훈련을 잘 받아서 열매 맺는 일이 지금 우리가 집중해야 할 중요한 일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훈련을 잘 받으려면 훈련받는 제목이나 도구에 대해 잘 알아야 합니다. 저는 그게 바로 언어생활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신년말씀의 마지막 강의를 신자의 언어생활이란 주제로 준비했습니다.
야고보 선생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그는 말에 실수가 없다면 그는 온 몸을 굴레 씌워서 조정할 수 있는 사람이고, 온전한 사람 - 성숙한 사람이라 합니다. 우리가 언어생활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훈련을 잘 받아서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이루는 성숙한 사람들로 성장하기를 기도합니다.
1. 언어의 위력(1-6)
1절을 봅시다. 야고보서는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였던 야고보 선생이 한 때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이었으나 이제는 흩어져 고난 받고 있는 신자들을 돕기 위해 쓴 편지입니다(1:1). 그래서 야고보는 ‘내 형제들아’라고 친근하게 그들을 부르고 있습니다. 그럼 그들에게는 어떤 문제가 있었습니까? 1b절에서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고 한 것을 보면 그들 중에는 선생이 되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서로 선생이 되려하다 비방하고 갈등하는 일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요즘은 신자들은 성경선생 되는 일을 부담스러워합니다. 그래서 학생 한 사람을 일대일 성경선생 되도록 돕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당시 유대인들은 선생 되는 일을 영광스럽게 여길 뿐 아니라 간절히 사모했습니다. 오늘날 의사나 판검사 되기 원하는 그 이상으로 유대인들은 선생되기를 원했습니다. 흩어져 핍박 받으면서도 선생 되려는 사람이 많아 교회가 시끄러울 지경이었다니 저는 놀랍고 또, 부럽습니다. 우리 목자들이 정말 유능한 일대일 성경선생이 되면 학생들의 존경을 받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그들이 전문인이 되기보다 유능한 일대일 성경선생되기를 더욱 사모할 것입니다. 언젠가 선생되려는 사람이 감당할 수 없이 많아져 우리가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며 타이르는 날이 온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가 10년 내에 그 일을 이룰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일대일 성경선생이 되거나 또 키우려 할 때 먼저 생각할 점이 있습니다. ‘선생된 우리에게 더 큰 심판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할진대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니라”(누가17: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태5:22) 이와 같이 선생이 되려는 자에게는 엄격한 기준이 있고 그 심판이 무섭습니다. 그러니 선생되기를 사모하기 전에 먼저 선생에게 따르는 책임의 준엄함을 알아야 합니다. 선생에게 그토록 엄격한 기준이 있고 심판이 무서운 이유는 언어가 가지는 위력이 상상하는 그 이상으로 크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언어의 위력이 어떠합니까?
첫째, 언어가 삶을 지배하고 조정합니다(2-4).
2절을 봅시다. 야고보 선생은 말을 실수하지 않는다면 그는 온 몸을 조정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온전한 사람이라 합니다. 다시 말하면 말을 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자기 몸도 맘대로 조정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내 몸이라고 내 맘대로 조정할 수 있는게 아닙니다.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새벽기도하고 운동하고 싶지만 몸은 이불속을 원합니다. 저녁 8시 이후로는 음식을 먹지 않고자 하지만 코로 냄새가 솔솔 풍기면 어느덧 손은 냉장고나 가스렌지로 향하고 발은 마트나 음식점으로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말실수를 하지 않는다면 이런 일도 능히 다 조절할 수 있는 성숙한 사람이 됩니다. 언어에 지배력이 있고 조정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3,4절에는 두 가지 비유가 있습니다. 먼저 ‘말(馬)의 입에 물린 재갈’입니다. 야생마는 힘이 좋은데 길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야생마가 길길이 뛰며 날치면 물건이 부숴지고 동네는 엉망이 됩니다. 그 말을 길들이려면 입에 재갈을 물리면 됩니다. 입에 재갈을 물리고 그 끈을 손에 움켜쥐면 길길이 뛰던 말을 잠재우고 또 뜻대로 움직일 수 있습니다. 다음에는 ‘풍랑 속에 있는 배의 키’입니다. 능숙한 사공은 큰 바람이 불어도 당황하지 않습니다. 바람의 방향에 따라서 키를 잘 움직여주면 바람이 부는대로 떠밀려가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배를 끌고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야고보 선생은 우리가 입으로 하는 말이 바로 야생마의 입에 물린 재갈이요, 풍랑을 헤쳐 나가는 배의 키와 같다고 합니다.
어제 말씀을 공부하는데 한정미 목자가 탤런트 김자옥씨 이야기를 했습니다. 제 생각에 그분은 언어의 지배력을 알고 잘 활용하는 분 같습니다. 그는 남편으로 인하여 마음이 상하고 속이 상하여 잔소리를 하고 싶거나 짜증을 부리고 싶을 때 남편 얼굴을 보면서 “여보, 사랑해” 라고 말한다 합니다. 그러면 야생마처럼 날뛰던 짜증과 미움이 신기하게도 사라지고 마음이 온순해져서 남편을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었다 합니다. 이수희 목자는 졸업 후, 미국지사 발령을 받고서도 두려움과 자의식의 풍랑이 불어 태평양을 건너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풀타임 훈련을 받던 시절에도 장래를 개척해 나가는 일이 풍랑을 헤쳐 나가는 것처럼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동계훈련을 받으며 여호수아 17:17b,18 "…비록 삼림이라도 네가 개척하라 그 끝까지 네 것이 되리라…“는 말씀을 외쳤을 때 그 마음속에는 도전정신과 개척정신이 충만해졌습니다. 그러자 그 풍랑을 헤쳐 나가는 일이 exiting하였고 그 시간을 enjoy할 수도 있었습니다. 대양을 건너 태국에도 다녀올 수 있었고 한강을 너머 경기센타에도 올 수 있었습니다. 요즘은 입덧의 풍랑이 거셉니다. 시도 때도 없이 우울해지고 매스꺼워 마치 배멀미 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입술에 말씀을 주사 이 풍랑도 능히 헤쳐 나가는 능숙한 뱃사공이 되게 하시길 기도합니다.
둘째, 언어가 삶을 파괴합니다(5,6).
5절을 봅시다. 언어는 삶을 조정하는 운전대와 같은 역할을 하는 한편 잘 못 사용하면 온 산야(山野)를 불태우는 불씨와 같습니다. 산불은 무심코 버린 담배꽁초, 성냥개비와 같이 아주 작은 불씨에서 시작합니다. 그러나 바람이 불어 그 불씨가 커지기 시작하면 나중에는 걷잡을 수 없이 큰 힘을 발휘하여 온 산야를 다 불태웁니다. 1996년 4월 23일 강원도 고성에서 발생한 산불은 임야 3,000ha를 태웠고 유실수만 2만여 그루, 농기계 17,700여점을 불태웠습니다. 지난해 7월 말 그리스에서 산불이 났을 때에는 1000여명이 동원되고 헬기까지 동원하여 산불을 끄려 했지만 결국 국토의 절반을 불태웠고 60명의 사상자가 났고 올림픽 유적들이 손실될 뻔했습니다. 인터넷에서 최근 20년간 있었던 산불 중 최대규모가 어떠했는가 찾아봤는데 1989년 캐나다 서부에서 무려 2,000,000ha의 산야를 불태운 산불이 있었습니다. 이런 규모의 산불은 진압하는데 수개월의 시간이 걸린다 합니다. 나무가 많고 땅 덩어리가 클수록 산불의 규모가 커지고 진압하는 시간도 늘어납니다.
6절을 봅시다. 혀는 ‘불꽃’(a flame of fire)입니다. 혀에서 불꽃이 한번 튀면 그 불은 사람들에게 옮겨 붙습니다. 때론 온 몸을 더럽히고, 한 순간이 아니라 전 생애를 불구덩이 속으로 밀어 넣기도 합니다. 다윗의 첫사랑은 ‘미갈’이었습니다. 다윗은 사울 왕이 공주 미갈을 얻으려면 블레셋의 양피 100을 가져오라 했을 때에 200을 베어왔습니다. 10년이 넘는 도망자 생활을 마치고 유다의 왕이 되었고, 그 후 남북이스라엘을 통일시키려 할 때 다윗이 북이스라엘의 군대장관 아브넬에게 제시한 유일한 통일의 조건이 무엇이었습니까? 10년전 발디엘에게 시집가버린 미갈을 다시 돌려 받는 그 한가지였습니다. 다윗이 그렇게 미갈을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언약궤가 들어오는 것으로 즐거워하여 춤추는 다윗을 보고 미갈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스라엘 왕이 오늘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 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 그의 신복의 계집종의 눈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삼하 6:20) 이 한마디가 그녀의 입에서 불꽃처럼 튀었을 때 다윗의 눈에는 그녀는 더 이상 사랑스러워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후, 사울의 딸 미갈과 동침하지 아니하였고 그녀는 죽는 날까지 자식이 없었습니다(삼하 6:23). 한 마디 말이 아름답던 그녀의 온 몸을 밉게 만들었습니다. 그 인생의 수레바퀴가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처량한 인생으로 굴러 떨어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꿈에도 그리던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 앞에 왔습니다. 그때 모세는 12명의 지파 대표들을 정탐꾼으로 보내었습니다. 가나안 땅에 가보니 땅이 기름지고 물이 풍부하고 포도송이 하나가 사람머리통 만했습니다. 그런데 포도송이만 큰게 아니었습니다. 그것을 먹는 사람들도 거인들이었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두령들이 두려움에 빠졌고 돌아와서 여호와께서 우리를 죽이려는게 분명하다고 입을 열어 원망하며 불평했습니다. 그때 힘들더라도 좀 참고 입을 다물고 기도했더라면 달랐을텐데 그 입술에서 원망의 불꽃이 일단 튀자 하나님이 진노하셨습니다. 모든 계획을 수정하셨고 20세 이하의 장정들은 가나안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광야에서 엎드러질 운명에 처했습니다. 훈련기간은 무려 40년이나 되었습니다. 10사람의 입에서 튄 불꽃이 200만의 인생의 수레바퀴를 뜨거운 광야로 굴러가게 했습니다.
때론 하늘이 하영이 같은 어린 아이들의 말도 불꽃처럼 튀어서 엄마 아빠 가슴이 열불이 납니다. 그러니 덩치 크고 영향력도 큰 엄마 아빠의 말에는 얼마나 큰 화력이 있겠습니까? 우리가 부모가 되고 목자가 되고 또 학교에서 학년이 오르고 직장에서 좀 더 영향력 있는 위치에 오를수록 말의 파괴력이 크다는 것을 알고 두려움을 가져야 합니다. 자그마한 섬마을보다는 땅이 넓고 많은 사람이 살고 바람이 많이 부는 대륙에서 산불의 위력이 더 강합니다. 이처럼 삶의 범위나 영향력이 커질수록 말이 가지는 파괴력 또한 커진다는 것을 잘 알아야 합니다.
야고보 선생은 혀가 불꽃이요 또한 악의 세계라 합니다. 사람이 소우주(小宇宙)란 말이 있듯이 혀는 악의 세계입니다. 그 작은 혀 안에 세상의 모든 악이 다 있습니다. 혀가 악의 백화점이요 전시장입니다. 혀에는 모든 악에 하나도 빠짐없이 다 담겨있습니다. 우리가 불조심만 할 것이 아니라 입조심하고 말조심하며 살아야 합니다. 꺼진 불도 다시 보는 정신으로 늘 말을 살피고 조심해야 합니다. 혀 안에 모든 악이 있음을 알고 혀를 길들이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혀를 길들일 수 있습니까?
2. 언어를 훈련하는 방법(7-12)
야고보 선생이 ‘이렇게 하면 언어를 길들일 수 있다’고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의 권면 속에서 길들이는 방법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첫째, 악한 혀를 결코 길들일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7,8). 7절을 봅시다. 사람들은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와 벌레와 바다의 생물을 다 길들일 수 있습니다. 서커스를 보거나 동물원에 가보면 원숭이, 사자, 코끼리, 비둘기, 앵무새, 물개, 돌고래 등이 사람의 말과 지시를 따라 온갖 재롱을 부리는 것을 봅니다. 그런데 이렇게 짐승들조차도 길들일 수 있는 인간이 자기 혀는 길들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 혀를 자기 힘으로 길들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8절에서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라고 했습니다. 저는 어떻게 하면 혀를 길들여서 아름답고 귀하고 가치 있는 말을 할 수 있을까 관심을 가지고 본문을 읽었습니다. 그런데 야고보 선생이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라고 말하니 답답했습니다. 그런데 한참을 답답해하고 한숨쉬다보니 그 사실을 인정하는데 바로 혀를 길들일 수 있는 비결이 있지 않는가 하는데 생각이 미치게 되었습니다.
8b절을 봅시다. 혀는 쉬지 않는 악입니다. 죽이는 독이 가득합니다. 사람은 쉬어야 사는데 악은 쉬지도 않습니다. 또 혀에는 맹독이 있어서 건드렸다 하면 독을 뿜어 대어 사람의 생명을 앗아갑니다. 이런 혀를 누가 다스릴 수 있습니까? 그러니 혀를 다스리려면 혀를 다스릴 수 없는 것을 우선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의 혀를 다스려 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또한 혀가 아름답거나 유익한 것이 아니라 악이요 독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가 말을 잘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 말로써 유익을 줄 수 있다는 사람은 혀를 써서 뭔가를 계속 말하려 합니다. 달콤한 말, 소위 ‘립서비스’로 자매들의 마음을 얻어 보려 하거나 지혜로운 말로 사람들을 설득하려 하거나 따뜻한 말로 사람들을 위로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 말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깊이 깨닫고 그 혀가 쉬지 않는 악이고, 죽이는 독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기 전까지는 우리는 쉴새 없이 혀를 사용하며 뭔가를 도모하려 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우리를 연단하셔서 얼마나 말실수가 많고 우리 혀에 독이 가득한가를 발견합니다. 우리 말에 아무런 유익이 없음을 깨닫도록 도우십니다. 사도바울이 말했습니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롬 3:13,14) 우리의 입술에 독사의 독이 있고 입에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다는 것을 알면 우리는 더 이상 말하기를 멈추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나의 언어생활을 도와주시도록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사도바울은 지혜와 지식이 큰 선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많은 연단 끝에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4,5) 우리가 말을 다스릴 수 없음을 알고 또 우리 혀에 악독이 가득함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바울의 고백한 것처럼 오직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말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말의 일관성을 가지도록 점검하고 훈련해야 합니다(10-12). 10절을 봅시다. 신자들은 하나님을 우리 주요 아버지라 부르며 찬양합니다. 그런데 그 입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신 형제를 저주합니다. 이는 마치 아버지를 존경한다고 하면서 아버지의 동상이나 아버지의 사진을 깨뜨리고 부수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옳지 않은 일입니다. 그런데 돌아보면 우리에게 그런 모순이 얼마나 많은지요? 우리는 은혜가 있을 때에는 하나님을 찬양하던 그 입으로 하나님의 형상인 형제를 비방할 때가 있습니다. 은혜가 있을 때는 형제를 귀하게 여길 수도 있지만 은혜가 없거나 마음이 힘들면 비방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일에 문제의식이 별로 없고 ‘사람이 다 그렇지 뭐~’하며 넘어갑니다. 그러나 야고보 선생은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요 마땅치 않다며 개탄(慨嘆)합니다.
11,12절을 봅시다. 같은 샘에서 결코 단물과 쓴물이 동시에 나오지 않습니다. 단물이 나오는 샘에서 결코 단물과 쓴물이 동시에 나오지 않습니다. 단물이 나오는 샘에서는 계속 단물이 나오고, 쓴물이 나오는 샘에서도 계속 쓴물이 나옵니다. 온천에서는 항상 뜨거운 물만 나오고 옹달샘에서는 찬물만 나옵니다. 무화과 과무는 100년이 지나도 무화과 열매만 맺고, 포도나무는 포도 열매를 맺습니다. 무화과 나무가 기분에 따라 무화과 열매를 맺었다가 포도열매를 맺거나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불평도 할 수 있고 찬양도 할 수 있다고 하는데 야고보 선생은 그런 일은 마땅하지 않다 합니다. 그는 언어생활의 일관성을 강조합니다. 사람이 이말 했다, 저 말했다하면 그 말을 믿을 수 없고 말의 가치가 모두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앞서 사람의 혀를 산불을 지르는 불꽃이나 악의 세계라고 비유했던 저자가 이제 사람의 혀를 샘과 나무에 비유하는 점을 생각해 봅시다. 샘은 목마른 사람에게 생수를 제공합니다. 나무는 탐스럽고 아름다운 열매를 맺습니다. 이와 같이 사람이 하는 말은 영혼을 살리는 생수와 같고 그 말은 어떤 식으로든지 열매를 맺습니다. 사람이 하는 말은 불같이 산야를 불태우기도 하고 독이 되어 사람을 죽일 수도 있지만 목마른 자에게 생수와 같고 주린 자에게 열매와 같습니다. 잠언기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의인의 입은 생명의 샘이라도 악인의 입은 독을 머금었느니라”(잠 10:11) “지혜 있는 자의 교훈은 생명의 샘이니 사망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느니라”(잠 13;14)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잠 18:21)
결국, 우리 말이 독이나 불이 되지 아니하고 생명의 샘이나 열매 맺는 나무와 같으려면 그 말에 일관성이 있어야 합니다. 자기가 한 말에는 끝까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우리는 지난해 에스더서와 룻기를 배웠습니다. 에스더는 민족의 위기 앞에서 ‘죽으면 죽으리라’ 말했고, 그 말을 그대로 지켰습니다. 그때 이스라엘 민족이 구원을 얻었고 그의 말은 생명을 살리는 말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만일 에스더가 그렇게 말하고 나서는 ‘너무 어려워서 왕앞에 나가지 못했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말은 사람들의 배신감을 자아내고 사람들을 실망시키는 말이 되었을 것입니다. 왕후로서의 품위도 잃고 백성의 신뢰를 송두리째 잃어버렸을 것입니다.
룻기의 ‘아무개’씨는 ‘내가 무르리라’했다고 손해가 날 것 같으니까 ‘무르지 않으리라’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침뱉아도 할 말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보아스는 ‘내가 무리리라’한 약속을 지킴으로 생명의 회복자가 되었습니다.
언어의 일관성을 가지는 일은 선생이 되려는 사람이 가져야할 가장 중요한 덕목이요 진리입니다. 그런 사람의 말에는 화려한 기술이나 수식어가 붙지 않아도 생명의 샘물같이 사람을 살리는 생명력이 있고, 그런 사람의 말은 시절을 좇아 마르지 아니하며 과실을 맺는 나무와 같이 열매가 풍성할 것입니다. 우리가 말을 잘하려고 문법에 틀리지 않게 말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할 수 있으면 아름다운 말을 사용하는게 좋습니다. 좋은 음성으로 또박또박 말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감정적으로 말하기보다 이지적으로, 교만하게 말하기보다 겸손하게 말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도 믿을만한 말, 일관성 있는 말을 하는게 중요합니다. 우리가 한 말에 책임 지는게 가장 중요합니다. 거기서 말의 생명력이 나오고 그 말이 열매를 맺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생명의 말씀인 것은 그 말씀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말씀이 변하지 않고 그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변함없이 그대로 이뤄지기 때문에 우리는 그 말씀을 믿을 수 있습니다. 그 말씀이 삶의 기준이 되고 생명이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를 지고 죽으시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기 위하여 잠잠히 모든 고난을 다 감당했습니다.
우리가 한마디 말씀을 1년 요절로 잡았다면 정말 그 말씀이 내 삶속에서 이루어지기까지 끈질기게 자기를 훈련해야 합니다. 그 말씀대로 살고 있는가 살펴보고 점검하고 훈련해야 합니다. 핑계하려는 마음을 극복하고 절대적으로 그 말씀을 지키려 애써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요절로 붙잡은 말씀이나 우리가 한 말이 그대로 보증수표가 될 수 있는 그런 사람들로 빚어져야 합니다. 우리가 성경말씀을 많이 알고 잘 정리하려하기 보다 한 말씀을 그대로 이루기 위해 노력하기를 기도합니다. 그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많은 말씀을 깨닫는 지혜를 주실 것이요 우리를 날카로운 칼과 같게 하시고 마광할 살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사49:2). 또한 곤핍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줄줄 아는 학자의 혀를 가진 일대일 성경선생이 되도록 할 것입니다(사50:4). 우리가 말을 잘하려 하기보다 내가 한 말을 책임질 줄 아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또 하나님 앞에서 약속한 말, 내가 하나님 앞에서 잡은 요절 말씀을 온전히 이루는 신실한 사람들로 성장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의 악한 혀를 구속하사 우리 언어 생활이 생명의 샘물과 같이 되게 하시길 기도합니다. 우리의 언어생활이 바람에 나는 겨와 같지 아니하고 시절을 좇아 열매는 맺는 나무
와 같이 풍성하게 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