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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들에게 듣다
김덕수
이번 연재엔 대학로 현장에서 작업하고 있는 배우들 이야길 좀 엿들어 보기로 했다. 그동안 연재를 통해 극작가 한명, 연출가 한명을 소개해 드렸으니, 이번엔 배우들 차례인 듯하다. 그런데 이 배우들 이야길 어떻게 해야 할까? 무대에서 한순간 피어났다가 곧 사위어버리는 연기를 어떻게 묘사해야 할까? 이론적인 정리? 혹은 비평적 코멘트? 이래저래 고민하다가, 그냥 옆에 앉아 그들이 직접 하는 얘길 슬쩍 엿들어보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독자들도 여행길 차 안이나 어느 주점 한갓진 자리에서 우연히 옆자리에 앉게 된 배우들 이야길 슬쩍 엿듣는 기분으로 편하게 읽어주시길 바란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어준 배우 이두성은 스스로를 “몸짓하는 사람”이라고 부르는 마임이스트이다. 대표작인 <새·새·새> 등을 계속 공연하고 있으며,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연기와 연극치료 등을 가르치고 있다. 또 한명의 배우 김승언은 현재 극단 신작로 소속으로 대학로에서 활발한 연기활동을 하고 있는 배우이다. 올 봄엔 <인터뷰>라는 워크샵 공연을 연출하기도 했고 음악 연주 모임 아뿔싸의 대표이기도 하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어준 두 분께 다시 한번 나의 깊은 우정과 감사를 드린다.
각자들 공연연습이 끝나고 모인 어느 저녁, 우리는 한 서너 시간동안 자유롭게 꽤 많은 이야길 나누었다. 이야기는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저절로 물 흘러가듯이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그러나 지면관계상 여기 다 싣지 못하고 기록자가 임의로 자르고 붙이고 하면서 사이사이 소제목을 끼워 넣었다.
■배우俳優
이두성 : 배우가 뭔지 잘 모르겠어. 배우…, 모르겠어. 이건 요즘 자주 하는 생각이기도 한데 어떻게 배우가 되는 거지? 타고나는 건가? 학습 아니면 뭐 훈련되는 건가? 얼마 전 사석에서 어느 유명한 배우가 그러더라고. “배우는 타고나는 거라고.” 그 말을 듣고 있는데 속에서 거부감이 확 일어나는 거야. 그렇지만 또 배우가 훈련이나 노력만으로 될 수 있는 건가? 재능이나 가능성과 상관없이 정말 열심히 노력만 한다면 누구나 될 수 있는 건가? 나는 배우인가? 우리가 배우인가? 어떻게? 요즘 이런 생각을 계속해. 오늘 여기 오면서도 했어.
김덕수 : 아마 학생들 가르치시니까 그런 고민이 더 직접적이시겠네요.
이두성 : 학생들한테 배우는 타고나는 거라 얘기하기는 어렵지. 열심히 해도 소용없다는 식으로 받아들이기 쉬우니까…. 그런데 또 그런 얘기 안 하고 가만히 있으면 거짓말하는 것 같은 기분도 들고, 아무튼 교육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타고 난 것 같은 거, 그런 게 있는 거 같거든.
김덕수 : 배우의 자질 같은 거겠네요. 타고난 것이든, 배워서 익힌 것이든, 하여튼 한 사람을 배우일 수 있게 하는 그런 자질이요. 그런게 도대체 뭐죠?
김승언 : 보통 그런 걸 “끼”라고들 하는 것 같던데, 딱 맞는 것 같지 않아요. 내 생각엔 사람들마다 독특한 “매력” 같은게 있잖아요. 인간적인, 혹은 배우로서 독특한 매력? 그런건 배울 수 있는 테크닉이 아니죠.
김덕수 : 그건 좀 너무 넓은 것 같은데…. 배우가 하는 일이 뭐죠? 그러니까 오늘날 “연기 한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작업을 의미하는 거죠? 그걸 생각해보면 그 일에 필요한 자질이 뭔지 짚어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연기演技
김승언 : (웃으며) 어린 친구들이 그러더라고요. 기다리는 존재라고. 오디션 보고 결과 기다리고 뭐 이런…, 그런 거 생각하면 연극은 배우의 예술이 아니라 연출가나 기획자의 예술인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도 전 아직 연극은 배우의 예술이라고 믿어요…. 적어도 후배들한테는 그렇게 얘기하지요. 왜냐하면 작가나 연출 또 다른 스텝이 아무리 훌륭하다 해도, 무대에서 관객과 직접 만나고 호흡하는 건 배우니까요.
김덕수 : 그래요. 그게 본질이죠. 연극은 본질적으로 배우와 관객의 만남에서 출발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연극에 어떤 본질적인 변화가 오려면 여기서부터 시작되어야할 거예요. 즉 어떤 방식으로 만나는가, 배우와 관객이?
이두성 : 그런데 뭐하는 거지, 만나서? 그러니까 관객들 앞에서 난 뭐하는 거지? 뭔가 표현하고 전달하는 건가? 미리 씌어진 텍스트 같은 거. 아니면 그냥 나를 보여주는 건가? 그것도 아니면 공감, 교감? 이런 생각하다보면 “처음에 나는 왜 배우가 하고 싶었지?” 그 질문으로 또 돌아가…. 생각해보면 결핍 때문이었어. 열등감도 있었고. 그런거 채우고 싶고 보상받고 싶고, 주목받고 사랑받고 싶어서였지. 뭔가 대단히 만족스러울 것 같았어. 그런데 막상 해보니 아무 것도 없는 거야. 선생들도 쫓아다니고 유명한 극단에도 들어가 봤는데 뭔가 없는 거야. 그리고는 어느 순간 나는 작가처럼 돼 있더라고, 배우가 아니라. 마임은 아무래도 작가의 성격이 강하거든. 그래서 마임 공연하면 난 커튼콜이 두려워 막 도망 다녔어. 내가 작가, 연출, 배우 다 한 거니까 얼굴을 못 들겠더라고. 부끄러웠어.
그런데 여기저기 봉사공연 다니면서, 그러니까 다른 결핍된 사람들을 만나면서 편안해지는 거야. 만족하고 행복했어. 우리 아버진 그런게 우월감 아니냐고 하시지만, 난 그렇게 말하고 싶지는 않아. 거기엔 정말 나를 잊게 하는 게 있어. 어쩔 땐 이게 정말 “나우 앤 히어” 아닌가 싶기도 해. 순간을 사는 거야. 정말 마약 같은 기쁨이 있어.
김덕수 : 제가 이해하기론 그동안 작업해오신 게 관객과 만나는 방식에 대한 탐구가 아니었나 싶은데요. 그러니까 처음 연극을 하실 때엔 보통 그렇듯이 관객 앞에 하나의 캐릭터로 존재했겠죠. 이때 배우는 매체나 전달 수단에 가까워요. 또 마임 작업을 하실 땐, 단순한 전달자가 아니라 메시지의 창조자, 발신자로서, 즉 한 명의 작가로서 관객들을 만나셨겠죠. 이땐 아무래도 어떤 캐릭터라기보다는 그냥 ‘나’라는 인간으로 존재하는 것 같고, 그리고 그 다음은…, 저는 경험해보질 않아 잘 모르겠지만 굳이 이름 붙여 보자면, 치유자이면서 동시에 치유 받는 자. 혹은 같이 아픈 자. 하여튼 얘길 듣다보니, 배우의 자질이란 게 관객과 만나는 방법 혹은 기술과 관련이 있을 것 같네요.
김승언 : 저는 형 얘길 듣다보니 참 부러워지는데요. 형처럼 그렇게 다양한 방식으로 연기를 경험해보지 못했으니까요. 전 요새 건방진 소린 줄 알면서도 “연기하기 싫다.” “재미없다”는 말을 많이 하고 다녔는데 그게 다 연기를 너무 좁게 접근해온 탓인 것 같아요. 이제 좀 답답해진 거죠. 정확히 얘기하자면, 사실주의적 연기방식에 좀 싫증이 났다, 지쳤다 이런 뜻이에요. 대본 받고 역할 정해지면, 열심히 읽으면서 인물에 대한 정보를 모으고, 행동의 동기나 목적을 분석하고 심리의 흐름을 잡아내고 그걸 나름대로 표현해보려고 애쓰는 거죠. 무대 위에서 마치 진짜 그 캐릭터인 척하면서요. 대학 때 동아리 활동으로 연극 시작했으니, 그것까지 치면 이제 한 15년 한 것 같은데 계속 이런 식이었죠. 조금씩 다르긴 했어도 근본적인 차이는 없었어요. 저뿐만 아니라 주변에서 다들 그렇게 해왔고, 사실주의가 가장 보편적인 연기 접근방식이었으니까요.
■사실주의 너머로
김덕수 : 그렇게 재미없어져서 이제 어쩌나요?
김승언 : 넘어가보는 거지, 너머로. 사실주의 너머로. 연기나 연극을 좀 다른 방식으로 생각해보고 싶어요.
김덕수 : 연기의 다른 가능성은 역사나 전통에서 찾아볼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서양 연극사에선 브레히트나 오픈씨어터의 작업에서도 힌트를 얻을 수 있겠죠. 오픈씨어터의 경우 공연중에 배우들이 자주 역할을 바꾸기도 하고, 생명 없는 사물이 되기도 하고 단순히 자기 자신이 되기도 하죠. 즉 무대 위에 하나의 고정된 캐릭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배우─자기 자신으로서 현존하게 되는 거죠. 이런 걸 “숨통이 좀 트였다” 얘기할 수도 있을 거예요. 우리네 전통 탈춤이나 그것을 계승한 마당극만 해도, 사실주의 연기와 비교해보면 그 품이 참 넉넉하죠. 그렇게 캐릭터를 고집하지 않고, 또 무엇보다도 관객들과 자유롭게 댓거리하면서 같이 노는 거죠. 그런데 이렇게 배우와 관객, 무대와 객석이 허물없이 친밀한 관계일 수 있는 게, 마당이라는 공간의 역할이 큰 것 같아요. 즉 배우와 관객이 만나는 공간이 달라지면 자연스레 그 방식도 달라지지 않나 하는 거죠.
■어쩌면 거리에 답이 있을지도 모른다
김승언 : 그래서 난 요즘 자꾸 거리극 쪽으로 마음이 가요. 답답하니까 극장 밖으로 나가고 싶은가 봐요. 도전의식 같은 것도 좀 있구요. 계기가 된 사건이 몇 있었는데 그 중에 한번은 광화문 촛불집회 때였어요. 그냥 자유롭게 삼삼오오 모여 앉은 시민 발언대 같은 자리였는데 거기서 <어느 미국 소의 일기>라는 텍스트를 낭독했었죠. 작가가 쇠고기파동을 지켜보면서 즉각적으로 쓴 대본이라 외우고 자시고 할 시간이 없어서 그냥 대본 들고 낭독을 한 거예요, 시 낭독 하듯이. 그때 어떤 욕구가 막 솟더라구요. 그냥 단순히 텍스트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 말고도 사람들 하고 뭘 좀더 나누고 싶어지는 거예요. 그런 걸 소통이라고 해야할지…. 아무튼 그런데 방법을 모르겠더라고요. 당황스러웠죠. 그 뒤로 오기가 생겼어요. 제대로 한번 해봐야겠다고요. 물론 연구를 좀 해야죠. 거리로 나가려면 기존의 연기방식이나 연출, 텍스트 구성방식 등이 다 바뀌어야 할 거예요. 두성 형이 거리 공연도 많이 하셨으니 앞으로 좀 많이 도와주세요.
김덕수 : 그래요. 거리 공연은 꼭 한번 도전해 볼만 해요. 물론 저도 거리가 관객들과 더 깊이 더 친밀하게 만날 수 있는 공간이라고 기대를 하죠. 하지만 다른 이유들도 있어요. 지금의 연극 제작방식을 생각해 볼 때 우리가 직접 거리로 나갈 필요가 있어요. 보통 연극제작은 두 가지 방식으로 이뤄지죠. 문예진흥원이나 문화재단에서 주는 지원금에 의존하거나 기획사에 고용되는 거죠. 기획사에 고용되는 건 정말 임금노동자가 되는 거죠. 다 그런건 아니지만 대부분 로맨스와 코미디를 적당이 버무린 상업극들인데, 정말 끔찍한건 이런 작업을 할 때 우리의 태도가 창조적이지 않고 그냥 패턴에 따라 일하게 된다는 거죠. 그럴 거면 그냥 돈 벌지 연극할 필요는 없죠. 또 지원금의 경우는 받기도 어렵고 거기만 목매달고 있을 수는 없잖아요. 혹시 지원금을 받는다 해도 그 돈 다 어디로 가나요. 반 이상이 극장 대관료고 또 아무리 적어도 홍보비로 몇 백 날아가죠. 거리로 나가면 이런 돈은 안 들 거예요. 거기다 티켓도 더 싸지죠. 티켓 값 올리는 게 다 극장 대관료니 홍보비 뽑으려는 거니까요. 그리고 거리에서 관객과 직접 만나면 중간 유통과정이 싹 빠지잖아요. 일종의 직거래 같은 거죠. 굳이 거리가 아니더라도 극장 밖의 대안 공간들을 찾아낸다면 정말 가능성 있어요. 중요한건 이렇게 된다면 어디에도 기대지 않고 연극인들의 자치가 가능해진다는 거죠.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을 우리 힘으로 해낼 수 있다면, 우리는 굳이 자본주의 경제체제나 예술 관료들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어지는 거죠. 용감하게 이 체계 밖으로 나가버릴 수 있는 거죠. 멋있게 거부하면서.
이두성 : 아무래도 연극은 자본주의나 관료주의 같은 것은 거슬러 갈 수밖에 없는 것 같아. 보통 연극을 라이브한 장르라고 하잖아. 매순간 살아있어야 한다고도 하고. 연극이 정말 살아있는 아주 라이브한 장르라면 당연히 우리는 살아있는 모든 존재들을 존중하고 사랑할 수밖에 없고, 살아있는 것들을 억압하고 파괴하는 힘들엔 저항할 수밖에 없는 거잖아.
그런데 내가 거리로 나간건 이런 이데올로기 때문은 아니었고 아주 단순한 거였어. 일단 내 공연 보라고 사람들을 극장으로 오라 하는 게 좀 미안했어. 극장에 와서 무대에 있는 나만 보라는 것도 좀 그렇고. 그냥 밖에서 하면 사람들이 공연 보면서 하늘도 좀 보고, 지나가는 예쁜 여자도 좀 보고 할 수 있잖아. 그러니까 나도 너무 편하고 좋더라. 내가 그냥 환경 안에 녹아 있으니까. 덜 미안하고 덜 부끄러운 거지. 거리에서 공연하면 정말 별별 사람들이 다 오더라고. 가장 기분이 좋은 건 저 사람이 나를 정말 소중하게 봐주는구나 하는 느낌이 들 때야. 돈의 가치가 아니라. 어느 날은 공연 끝나고 노숙자 같은 사람이 와서는 공연 잘 봤다고 담배 한 까치를 주는데, 그땐 뭐랄까 그 사람이랑 같이 내가 조금 바뀌고 있다는 느낌? 내 존재의 창이 꽉 닫혀있다가 잠깐 열려 환기된 기분, 그런 거 있잖아.
■교감交感
김덕수 : 그런 걸 공감 혹은 교감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아까 우리가 얘기했던 배우의 자질이란게 관객과 만나는 방식과 관련이 있다면, 이러한 공감이나 교감의 능력이 배우의 자질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김승언 : 그러게요. 난 아까도 말했지만 그런 점에서 스스로 몹시 답답해하고 있어요. 올봄에 어쩌다가 <인터뷰>란 공연을 연출했는데, 그때 텍스트가 우리에게 전혀 다른 연기방식을 요구하고 있는 거예요. 나는 연습을 진행하고 배우들에게 뭐라고 지시를 하면서도 너무 당황스러웠죠. 우리에겐 숨을 만한 캐릭터나 잘 짜여진 상황 같은 게 거의 없었어요. 뿐만 아니라 객석에다 직접 말을 걸어야 했고, 관객들이 우릴 보고 있다는걸 다 인정하면서 거기에 섬세하게 반응해야 했죠. 정말 그동안 극장에서 “제4의 벽”1)안에 너무 편하게 숨어있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죠.
이두성 : 연극을 하면서 배우가 숨는다는 게 뭘까? 사실 나도 늘 숨어왔어. 인형 뒤로, 물체 뒤로…. 난 아직도 제대로 관객 눈을 본 적이 없어. 무서운가봐. 어쩔땐 정말 기분이 그래. 영화랑 다르게 배우가 관객이랑 같은 공간에 같이 있는데 공감이나 교감이 전혀 없는거 같은 거야. 오히려 스펙타클 화려하고 사운드 빵빵 터지는 영화가 휠씬 관객들과 잘 만나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 때도 있어.
그런데 또, 글쎄…. 교감, 그런게 있으면 좋겠지. 그런데 내 생각엔 교감 같은걸 매순간 너무 강조하는건 욕심이 아닐까 싶기도 해. 이번 학기 종강한 뒤에 한 학생이 찾아와서는 “선생님 죄송해요. 전 이번 공연에서 자위행위 했어요.” 그러는 거야. 그래서 내가 그랬어. “자위가 나쁜 거니?”라고. 다들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거 아니야? 자기 위안도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타자를 위할 수 있지? 자기 스스로 즐길 줄 모르면서 어떻게 남을?
얼마 전에 연극 쎄라피 하는 친구랑 영화를 보는데 이 친구가 펑펑 우는 거야. 내가 보기엔 완전히 엉터리 삼류 영화인데. 그러니까 사람들은 연극이나 영화를 보면서도 자기를 보는 거야. 그러니까 결국 배우도 솔직하게 자기 얘기를 하면 되는게 아닐까? 누구를 구원하겠다거나 교감시키겠다거나 하는 욕심은 좀 버리고. 담백하게.
김승언 : 아마 그래야 진정으로 무대에서 살아있을 수 있는게 아닐까요. 살아있는 순간이 되는 거지요.
김덕수 : 거 참 재미있네요. 저 또한 연기를 몹시 좁게 생각했었나봐요. 그러니까 어떤 역할을 맡아 캐릭터를 연기한다는 관점에서 저는 연기가 철저한 ‘타자되기’의 경험이라고만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지금 듣다보니 연기는 또한 온전한 ‘자기되기’의 경험이기도 하겠군요.
어찌됐든 처음에 꺼냈던 배우의 자질 문제, 그러니까 배우가 되기 위한 가장 근본적인 자질이 뭐냐, 또한 그것이 타고나는 것이냐, 배우고 익힐 수 있는 것이냐 하는 것은 답이 그렇게 딱 떨어지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오늘 나눈 이야기 속에 대강 녹아있는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씩 하시죠. 아무거나, 그냥 사는 얘기도 좋고요.
김승언 : 얼마 전 박경리 선생 작고하시고 텔레비전에서 생전에 하신 인터뷰를 보여주는데 이런 말씀 하시더라고요. 삶이 예술보다 앞선다고. 삶이 먼저고 예술이 따라가는 거지요. 요즘 이런 생각을 자주 해요.
이두성 : 박재삼 시인이 참 가난하고 힘들게 사셨잖아. 그 분 시가 생각나. 천년 전 바람처럼 사는 거지. 오늘 부는 바람도 딱 그때 그 바람처럼 부는 거잖아. 배우들도 얼마나 오랜 세월 살아왔어. 그렇게 살면 되는 게 아닐까?
·장소 : 2008년 8월 5일 대학로.
·기록 및 정리 : 김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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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무대와 객석을 분리하는 상상의 벽, 사실주의 연극에서 관객은 그와는 무관하게 전개된다고 여겨지는 행위를 반투명의 칸막이 뒤에서 구경한다. 관객은 등장인물들을 몰래 엿보도록 권유받고, 등장인물들은 그들이 마치 제4의 벽에 의해 보호받고 있는 것처럼 객석을 고려하지 않은 채 행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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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수 / 1975년 강원도 삼척에서 태어났으며,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극작과 전문사과정에 있다. 연극 「강변 풍경」과 「우리 사이」 극본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