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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동기회 소식지 제24호(2006.11) I. 동기회 김선구 회장님의 말씀
II. 60동기회 2006년도 운영 현황 요약 1. 2006년도 예산 가결산(11월 14일 현재)
2. 경조사 11월 14일 현재 총 24건으로 화환, 조화, 조기 등을 보냈읍니다(지출 2,723천원). 특히 지난 11월 3일에는 섬유과 이광무 회원이 타계하셨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본인상 - 1명 이광무(섬유) 자녀결혼 - 13명 이안부(건축), 문광순(광산), 최무(기계), 김기정 아들 2명(섬유), 김기웅(전기), 정정웅(전기), 김선구(토목), 김수웅(토목), 이희승(토목), 조맹영(토목), 정연승(화공), 정태수(화공) 부모상 - 10명 진영안(전자), 이영철(건축), 김정석(전자), 정현일(건축), 정경민(섬유), 이용혁(조항), 국천표(토목), 배상근(토목), 정우진(전기), 강종수(광산) 3. 동호회 지원(지출 : 1,200,000) 등산동호회 지원 : 60만원 지원(4.12일 및 9.19일 각 30만원) 골프동호회 지원 : 60만원 지원(4.13일 및 9.19일 각 30만원) 4. 홈페이지 운영 홈페이지 운영 경비 절약을 위해 4월 26일부터 무료로 서비스되는 <Daum> 웹사이트의 <카페>를 이용하도록 변경하였습니다. 신상엽 전자과 동기회장님의 수고로 카페명 <서울공대 60동기회 카페>라는 홈페이지로 변경되었습니다 (cafe.daum.net/snueng60), 홈페이지 운영비 치출 26만 5천원 5. 과별회비 납부 11월 14일 현재 11개과가 완납되어 4,280,000원을 수납했습니다. 과별회비가 완납되어도 회비 책정 예산 434만원에 미달했습니다. 회비 납부액에 근거하면 국내거주 과별 회원 인원이 217명에서 214명으로 3명 감소되었습니다. 건축(21), 광산(20), 금속(18), 기계(22), 섬유(20), 원자(8), 전기(29), 전자 (13), 조항(15), 토목(34), 화공(14) 6. 동기회 주소록 Update 국내 거주 과별회원 명부 update와 관련하여 11개과 전체의 명부가 홈페이지의 <60동기회 각과주소록> 란에 등재되었습니다.
III. 김일두 회원의 조선일보 역사문화대학 대마도 한민족사 탐방기
며칠전 조선일보를 펼쳐 보니 단국대 박물관장 鄭永鎬교수께서 강사로 인솔하는 대마도 한국문화유적 답사팀 모집기사를 보고 주저 없이 일착으로 얼른 신청을 마쳤다. [對馬]라는 지명은 서기 3세기 三國誌 魏書에 나오는 對馬國에서 시작된다. <쓰시마>의 "쓰"란 한국과 교통할 때 선박이 멎는 津(쓰)으로써 <津의 島>란 설도 있고 최남선 선생은 한국어의 <두(二) 섬>에서 나온 것이라 풀이 했는데, 이는 부산에서 보면 대마도가 두개의 섬으로 보이기 때문에 개연성이 높다고 한다. 그리고 日本書記에는 韓鄕之島(가라시마)라고 적혀 있는데 이는 한반도로 부터 문화가 거쳐 온 섬이라는 뜻이다. 역사적으로 우리와의 관계는 13세기 후반 麗元 연합군이 일본 침공시 대마도를 정벌하였고, <高麗史>에 대마도주를 변방행정책임자인 對馬島勾當官에 명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조선시대에는 世宗원년 (1418년) 李從茂장군이 대마도를 정벌하여 왜구의 침범을 근절시킨 사실이다. 장군은 전함 227척, 군량 65일분, 군졸 1만 7,285명을 거느리고 쓰시마 섬 정벌에 나서, 섬에 상륙해 왜구의 크고 작은 배 129척과 가호 1,940여 호를 불태웠으며, 적 114급(級)을 베어 대승을 거두었다. 이에 일본인들이 봉서(奉書)를 보내 퇴각할 것을 애걸하므로 군대를 이끌고 거제도로 돌아왔으며, 이를 계기로 고려말 이래 우리나라의 해안지역을 노략질하던 왜구의 활동이 거의 사라지고, 이후 임진왜란 전까지 쓰시마 섬과의 평화적인 통상관계가 지속되어 조선통신사가 12번 거쳐갔다. 또한 明治維新 후에 대마도주가 1868년 일본정부에 보낸 奉答書에 "朝鮮에 대해 藩臣의 예를 취해 수백년간 그 나라로 부터 굴욕을 받았으니 분함이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여 조선의 藩屬國이었음을 인정하였다고 한다. 입국수속을 간단히 마치고 첫날은 도보로 시내 가까이 있는 문화 유적을 찾는다. 먼저 修善寺. 이 사찰은 백제의 법묘니 스님이 창건하였다고 사적기에 기록되어 있으며, 통일신라 시절의 금동불상이 봉안되어 있을 뿐 아니라, 勉庵 崔益鉉선생이 사망하여 귀국하기 전 머문 사찰로써 현재 순국기념비가 세워져 있는 우리와 깊은 관계를 가진 사찰이다. 勉庵 崔益鉉 선생은 고종 때의 정치가로 排日派의 거두였다. 선생은 1876년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자 도끼를 가지고 궐문에 엎드려 조약의 반대를 상소하였고, 개국 후 제국주의의 침략에 대해 통찰력을 가진 개국외교의 반대론자였다. 그 뒤 유길준의 교사로 일본 순경에게 체포되어 단발의 압력을 받았으나 굴하지 않았다고 한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매국 5대신의 처단을 상소하려고 상경하려 했으나 왜병에 의해 저지되자 구국의 신념으로 호남의 임병찬과 함께 의병을 규합, 일본군과 항전하다가 일본군에 체포되었다. 선생의 의지를 무서워 한 일본군은 선생을 대마도로 유배시킨다. 이 곳에서도 단식도 하면서 일제에 대한 불굴의 투쟁을 하다가 口述 遺訴를 남기고 사망하였다고 한다. 황수영박사가 쓴 비문 "大韓人 崔益鉉先生殉國之碑"의 후면에는 선생에 관한 내력이 요약 기술되어있다. 남의 나라 땅에서 비좁은 공간을 할애 받아 비석을 세운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닌데 관계자들의 노력이 돋보인다. 이 곳 불교도들은 매년 한번씩 부처님 옷을 갈아 입힌다고 한다. 다음은 쓰시마 역사 박물관이 있는 언덕을 찾아간다. 언덕을 오르자 입구에 高麗門이 서 있다. 고려문 왼쪽에 "朝鮮國通信使之碑"가 세워져 있고 문 좌측에는 한일 친선 교류에 공이 큰 日本 유학자 아메노 모리호슈(雨森芳洲)가 쓴 "誠信之 交隣"이라고 쓰인 비석이 자리잡고 있다. 역사박물관은 월요일 휴관이라 다음날로 미루고 발걸음을 가네이시죠(金石城)으로 돌린다. 金石城은 대마도의 번성 시기인 1669년 소오요시자네(宗義眞) 번주 때 건설한 것으로 입구 담문은 1990년에 복원 된 것이라한다. 성문을 지나 약간 경사를 오르면 왼쪽에 높다란 비석이 눈에 들어온다. 이것이 바로 비운의 왕녀 덕혜옹주가 대마도 번주의 아들 宗武志와 1931년 결혼한 기념비이다. 이 비석은 당시 대마도에 거주하던 한국사람들의 성금으로 지은 모양이다. 비석 아래 후원자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데 모두 우리 이름이고, 하나 재미난 사실이 성금 금액이 단체는 20~10엔이나 개인은 5~1엔이다. 당시의 화폐가치를 짐작케한다. 비문에 "대한제국" 대신 "李王家"라고 써 있는 것이 슬픈 역사의 한 페이지를 읽을 수 있다. 비운의 왕녀 덕혜옹주는 고종황제의 막내 딸로 후궁 복녕당 양귀인 사이에서 1912년 고종의 회갑 때 태어났다. 일제에 의해 1925년 13살의 어린 나이로 부모 곁을 떠나 강제로 일본으로 이주하여 외로운 생활을 하면서 결국 정신병을 얻어 평생 고생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정략적으로 대마도주의 아들인 宗武志 백작과 1931년 결혼하여 딸 마사에를 낳으나 결혼 생활은 순탄치 못해 결국 1953년 이혼하게 된다. 남편 宗武志는 동경제대 영문과 출신으로 나중에 대학교수로 지내고 문학과 그림에도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고 박정희대통령 시절 1962년 귀국하게 되나 막바로 낙선제로 가지 못하고 대학병원 신세를 거쳐야 했다. 성문을 나와 계곡물이 흐르는 해자(?)를 끼고 돌다보면 옛 성벽을 만나게 된다. 축성법은 일본의 오사카성벽 같이 큰 돌이 아니고 우리식의 잔돌로 견고하게 쌓은 것을 알수있다. 金石城 앞을 흐르는 개천을 끼고 가다 보면 일본 전통의 아취형 석교가 보이고 절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돌로 만든 諫鼓가 보인다. 우리 신문고와 같은 역활... 반쇼인(萬松院) 절의 내력은 소오요시토시(宗義志)가 1615년에 사망하자 20대인 아들 소오요시나리(宗義成)가 금석성 뒤에 묘를 쓰고 그 아래에 松音寺를 지었으나 그 뒤 아버지의 법명을 따서 萬松院으로 개명을 했다고 한다. 宗義志는 장인 고니시유키나가(小西行長)와 함께 임진왜란 때 최선봉 장군으로 부산포에 상륙한 우리 역사의 아픈 부분을 함께 하고 있다. 그러나 아이러니칼하게 어느 자료를 보면 유언에 "조선과 화평을 최우선으로 하라"고 했다고 한다. 사실 두 사람은 조선침공에는 반대편이었다고. 사찰 내부에는 高麗佛(관세음보살半跏思惟像)과 고려版經文이 있고 寺寶로써 조선국왕이 선물한 제례용 三具足이 보존되어 있다. 한가지 특이한 것은 도쿠가와 가문의 위패가 본토에서 쫒겨나 이곳에 안치되어 있다. 사찰을 나와 오른쪽으로 일본 3대 묘소의 하나인 宗씨 가문 묘소로 올라가는 300여개의 돌계단과 양쪽에 서 있는 석등의 이끼낀 모습과 주위의 울창하게 그림자를 드리운 삼나무등의 숲이 햇빛을 막아 묘역의 음산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계단을 오르면 아름드리 삼나무가 앞을 막는데 키가 40여 미터나 되고 수령은 안내문에는 자세히 알수 없고 묘역이 400년이 되었으니 그 이상일 것이라고 한다. 20대 요시나리의 묘소. 조선과는 화친의 시대로 당대에만 통신사가 5번이나 다녀 갔다고. 반쇼인을 나와서 조선통신사의 유숙 장소인 사이산지(西山寺)로 향한다. 西山神寺라고 써있는 돌표지를 지나 돌계단을 오르자 입구 문에 "유스호스텔"이라는 표말이 보인다. 요즈음도 숙박시설에는 변함이 없나보다. 절 내부로 들어 오니 사찰 건물 앞에는 잘 가꾼 잔디밭이 있고 조금 높은 언덕에 자리 잡은 까닭에 대마도 앞 바다가 시원스레 펼쳐져 보인다. 그 바로 밑으로 조선통신사들이 상륙하였으리라. 잔디 밭 한 쪽에 義城金씨 문중에서 세운 鶴峯 金誠一선생詩碑가 세워져 있다. 조선통신사로 이 곳에 묵었다는 기념비인 모양인데 당파 싸움의 산물로 西人인 황윤길의 왜의 침입설을 반대로 귀국 보고한 것은 익히 잘 아는 사실인데 구태여 일본에 비석을 세워야 했을까? 역사는 있는 그대로 읽어야 한다고 하고, 또 반복된다고도 한다.지금은 동인,서인이 아니고 개혁이다,보수다,우익이다 좌익이다(역시 방향성?) 미사일 탑재물이 탄두다,인공위성이다, 방어용이다, 공격용이다. 다만 똑 같은 愚를 범하여 백성을 도탄에 빠뜨리는 일은 없도록 有備無患의 지혜를 발휘해야 할 것이다. 오랜 행군으로 지친 탐사반원들이 서산사 경내에서 주저 앉아 정영호 박사님의 강의를 경청하고 있다. 칠순 지난 분이 매번 서서 강의를 재미나게 하시면서 노익장을 과시하신다. 법당 내부에는 높이 1미터의 고려 불상이 안치되어있다. 서산사를 나와 석식 예정 식당으로 가는 도중 이곳 역사박물관에 보관중인 두루마리 그림을 개천 벽에 타일로 조각한 조선 통신사 행렬 그림을 본다. 대마도에 이런 넓은 홀이 있을까 깜짝 놀랄 정도의 식당에서 특이한 돌판구이 생선과 야채 요리로 저녘 식사를 한다. 한가지 아쉬운 것은 문화대학이라서 학생들에게는 술이 금지되어 있다는 주최측 설명에 할수 없이 눈물로 소주를 대신하여 안주만 먹어야 한다. 요즈음 학생들도 술 잘하는데 맥주 정도는 ... 귀빈들이 왔다고 (사실 멤버 가운데는 전직 총리도 포함되고) 일본에서 보기 드문 미인인 식당 주인의 부인(무용전문가)이 예정에도 없든 전통 일본 춤을 선사한다. 돌아와요 부산항의 노래에 맞추어 춤을 추고, 이 것을 끝으로 첫날의 탐사는 막을 내리고 대아 호텔로 돌아 오자 말자 생맥주 한 쪼끼로 참았든 갈증을 풀자 이제사 살 것 같아 단 잠을 부른다 태평양이 내려다 보이는 경치 좋은 곳에 대아호텔이 자리잡고 있다. 아직 관광객이 많지 않아 타산이 맞지 않을텐데 운항 선박에서 호텔까지 장기적인 투자를 한 것이 돋보이고, 우리 경제력의 성장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든든하다. 또한 특이한 것은 김치를 못먹어 아쉽지만 한국인이 하는 호텔에서 한식을 안한다는 것도 얼른 보면 이상하지만 철저히 현지화 한다는 것도 경영철학인가 보다. 호텔 주위는 주로 노인 복지시설과 어린이 공원 등 산책길도 잘 마련되어 있고, 특히 태평양이 내려다 보이는 경치는 가슴을 확 트이게 하는 느낌이다. 아침 출발전부터 비가 내린다. 이 곳 일본에서는 비를 친구 삼아 같이 지내야지, 맑은 날만 기대하는 것은 너무 욕심인가 보다. 먼저 해안가로 가서 옛 번주의 선착장을 찾았다. 축성방법은 금석성과 마찬가지로 우리 식이다. 우중에 만세키바시(萬關橋)를 걸어 가면서 1901년 일본이 러.일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동.서를 연결하는 운하를 파서 군함과 전쟁물자의 수송을 원활하게 한 곳이다. 이 다리는 근년에 건설한 것으로 두 개의 섬 대마도가 하나로 연결되었다. 대마도의 4개의 海神神寺의 하나인 와다즈미 진자(和多都美 神寺)를 간다. 이 곳은 해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바다를 생업으로 하는 이 곳 사람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곳이다. 한국에서 건너간 도래인들이 수렵인들을 개화시켜 벼 농사를 아르켜 주었고, 따라서 한반도에서 건너간 용어들이 많이 남아 있다고 한다. 와다즈미의 "와다"는 우리말 바다이고 "미"는 신을 말한다. 神寺 뒤를 돌아가면 우리 서낭당의 금실 같은 것을 두른 샤마니즘의 현장이 남아 있다. 이 것이 발전하여 신사가 된 것이다. 이동중 버스에서 정박사님의 강의를 경청한다. 강의시 마이크와 무전기를 동시에 사용하여 다른 버스에서도 학생들이 강의를 들을 수 있다. 주최 측의 완벽한 준비에 감탄. 미네마치(峰町)라는 조그만 읍? 사무실에 마련된 민속 자료관에는 우리 無文토기와 고려청자등 해저에서 인양된 유물들이 많이 진열되어 있다. 관람 후 고맙게도 2층 강당을 빌려주어 비를 피해 도시락 점심을 해치운다. 미네마치(峰町)의 사가항(사하항) 근처에 소오(종)시 일가의 묘지가 있는 엔쯔지(원통사)가 있다. 이 절 입구에는 울산 출신으로 조선 전기 대일 외교에 큰 구실을 맡았던 충숙공 이예(1373~1445) 선생의 업적을 기록한 공적비가 관광객을 먼저 맞는다. 대마도주 종정무(宗貞茂)가 사망했을 때 이예 선생이 직접 원통사를 찾아 조문한 기록과 원통사 안에 태극문양이 새겨진 조선범종, 고려약사상본존불 등 우리나라와 관련한 주요 유적이 남아 있는 것에 근거해 높이 3m50㎝, 폭 70㎝의 공적비를 학성 이씨 문중에서 세운 것이다. 이예 선생은 40여 차례 일본에 통신사로 파견돼 600여명의 조선 포로를 구해내고, 세종 때 삼포조약 체결에 큰 구실을 했다. 또 세종의 명을 받아 대장경을 일본 국왕에 전달하고 일본의 자전물레방아와 무쇠로 만든 대포를 조선에 들여오는 등 두 나라간 문화교류에도 큰 업적을 남겼다고 한다. 다음은 가미아가다마찌의 해변가에 있는 충렬공 朴堤上의 순국비를 찾는다. 대마도 하면 우선 떠 오르는 것이 박제상과 망부석. 三國史記에 의하면 신라 실성왕 때 전왕 내물왕의 아들 미사흔(未斯欣)을 일본에 볼모로 보내고 또 412년에는 미사흔의 형 卜好를 고구려에 볼모로 보내었다. 417년에 눌지왕이 즉위하자 그의 형제들을 구하기 위해 박제상을 고구려에 보내어 먼저 복호를 대려왔고, 다음에 동생 미사흔을 대마도까지 같이 대동하여 일본인들을 속여 미사흔만 보내고 본인은 남아 체포된 후, 倭王의 회유를 뿌리치고 新羅에 대한 忠으로 목숨을 다했다고 한다. 이 소식을 들은 부인이 지금 울산 근처 치술령에서 동해 바다를 바라보고 남편을 기다리다 두 딸과 함께 망부석이 되었다는 전설은 익히 알고 있는 것이다. 1988년에 한일친선을 위해 황수영교수와 이번 강의와 인솔을 맡으신 정영호 교수 등 여러분의 노력으로 이 곳에 순국비가 세워졌다. 다음은 가미자카(上見坂) 전망대. 385미터의 대마도에서는 높은 곳이고 맑은 날에는 대마도 전체와 아소만의 리아스식 해안과 섬들을 볼수 있는 곳인데, 안개 비속에서는 암중모색이다. 해안이 잘 보이는 군사적 요새이기 때문에 러.일 전쟁을 위해 준비한 포대와 콘크리트 병사숙소는 왠만한 포탄에도 꼼짝 안할 정도의 두꺼운 벽으로 만들어져 일본군국주의의 환상을 실물로 본다. 빗길을 내려와 코모다항(小茂田)에 있는 小茂田 濱 神寺로 향한다. 이 곳은 우리나라에서 해류가 밀려 오는 곳으로 1419년에 이종무 장군이 상륙한 곳이기도 하다. 한글이 적혀있는 비닐등 쓰레기가 밀려와서 골치를 썩는 곳이기도 하단다. 이 항구는 당시 사스우라(佐須)항으로 1274년 10월 5일 合浦(마산)를 떠난 麗.夢 연합군 약 3만명 (몽골 2만, 고려군 1만명)이 쳐들어 와서 제일착으로 일본 땅에 상륙하여 항전하는 지휘관 北條를 위시한 일본군을 섬멸한 곳이다. 대마도를 정벌한 연합군은 여기서 150Km여 떨어진 하카다항(지금의 후쿠오카항)에 도착하여 그 곳에서 태풍(일본인들이 얘기하는 가미가제:神風)으로 함선들이 침몰하여 규슈를 점령하지 못하고 많은 군사를 잃고 퇴각했다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고려 장수인 金方慶은 빨리 육상 교두보를 확보하여 무기와 병참 물자를 양륙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몽골 사령관인 혼도는 피곤한 군사를 쉬게 해야한다고 반대하여, 해상에 정박 중 태풍을 맞게 되었다고 한다. 일전 몽골을 다녀 왔지만 안내를 맡은 처녀가 초원에서 말을 보더니,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 처럼 초원을 질풍하는 것을 보고서 역시 피는 못 속인다고 생각 한 적이 있는데, 반대로 몽골 군인들이 초원도 아니고 풍랑에 시달렸으니 천하무적의 몽골 군대도 배 멀미 앞에서는 장수가 없었으니, 몽골 장수의 심정도 이해 할 만하다. 더구나 쿠빌라이가 南宋을 치기 전에 일본을 쳐서 배후를 안정시키기 위해 일본 침공을 서두르다 보니 함선을 건조할 시간이 부족하다보니, 揚子江에 다니는 내륙용 선박을 상당수 동원했으니, 당연히 바다 풍랑 앞에서는 추풍낙엽이었다고 한다. 이 때 만일 김방경의 말을 따랐다면 규슈의 대막부도 퇴각했을 것이고, 가마쿠라 막부도 붕괴되어, 세계역사도 달라졌을 것이고, 한반도의 위상도 많이 변했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지도자 한 사람의 판단이 역사의 흐름을 바꾸는 방향타이며 얼마나 무서운 위력을 발휘하는지 새삼 느끼게 된다. 朝鮮시대 일본 막부에 파견된 공식 외교 사절인 朝鮮通信使의 역사는 1429년(세종11년) 교토로 正使 朴瑞生을 파견한 것을 시작으로, 임진왜란 이후 본격적으로 12회에 걸쳐 내왕이 있었다고 한다. 통신사의 구성은 조선정부의 최고 관료(正使)와 학자, 문화인을 비롯하여 樂隊,小童,武人,통역관 등 300~500명에 달하는 대 사절이었다. 특히 일본측 준비,영접인원이 약 2000명에 달하였다 하니 엄청난 규모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더구나 이들의 숙소 및 식사를 위한 준비로 사전에 2년이상의 준비 기간이 걸렸다고. 조선통신사 행렬에는 악대가 반드시 참가했다고 한다. 임금님의 행차 때에 연주하는 취타로 악기는 자바라(심벌즈), 징, 太平簫(날나리), 螺角(소라), 나팔 그리고 용이 그려진 북 龍鼓로 구성되어 있었다.지금의 군악대 처럼 연도에 구경차 나온 구경꾼들에게 좋은 볼거리를 제공해 준 것이리라. 1719년 德川吉宗(도쿠가와 요시무네) 幕府 시절 파견된 製述官(기록자) 申維翰이 쓴 [海游錄]에 기술된 내용을 보면 일본인의 질서정연 함에 놀란 내용과 같다. "구경꾼들은 길 양쪽으로 갈라서 앉아 있는데 키가 작은 사람은 앞줄에, 큰 사람은 뒷줄에 앉는다. 누구 하나 소란을 피우고 이탈하는 사람이 없고 길을 넘는 자도 없었다". 그는 朝鮮의 士農工商과는 달리 일본은 兵農 工商의 계급사회라 兵이 軍法으로 다스리기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조선통신사의 여정은 漢陽을 출발하여 釜山까지는 육로로 간 뒤 부산에서부터는 대마도주의 안내로 海路로 대마도를 거쳐 시모노세키를 경유 일본 각 藩의 향응을 받으며 세도나이가이를 항해하여 오사카의 요도우라항에 상륙하여,여기서 부터는 육로로 교토와 도쿄로 이동했다. 일행이 묵는 숙사에서는 漢詩文과 학문의 筆談唱和의 문화상 교류가 성행했다고 한다. 조선에서 화가를 보내는 것은 일본의 풍물을 기록하기 위한 것인데 김명국의 경우는 통신사가 머무는 숙소에 그의 그림을 받으려고 일본인들이 줄을 서 있을 정도로 인기였고, 더구나 10년 뒤 통신사가 다시 갈 때 일본 정부에서 특별히 김명국 같은 사람을 요청하여 처음으로 두 명의 화가를 보냈다고 한다. 그와 관련된 逸話 하나를 소개하면 명사도에 얽힌 얘기다. <명사도>란 명부전에 걸리는 불화의 하나로 저승에 가서 염라대왕에게 심판을 받는 일종의 '지옥도'입니다. 영남의 한 스님이 비단을 가지고 와서 김명국에게 '지옥도'를 그려 달라고 하며 삼베 수십 필을 예물로 바칩니다. 술을 매우 좋아했던 김명국은 아내에게 삼베를 술로 바꿔오라고 합니다. 이날부터 김명국은 그림을 그리지 않고 술을 마시기 시작합니다. 얼마뒤 스님이 그림을 찾으러 왔는데 김명국은 술만 마시고 그림을 그리지 않고 '아직 때가 아니니 기다리라'라고 말합니다. 스님은 서너번 헛걸음을 하였다고 합니다. 하루는 술에 취한 김명국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는데 생생하게 그림을 완성하였습니다. 그림이 너무나 생생하여 마치 살아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고 합니다. 마침내 그림을 가지러 온 스님은 까무러칠 뻔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지옥에서 형벌을 받고 있는 사람들을 모두 스님으로 그려놓았기 때문이죠. 스님이 항의 하자 김명국은 " 너희들이 일생동안 하는 악업이 혹세무민 하는 일이니 지옥에 갈자가 너희들이 아니고 누구겠느냐"라고 웃으며 말하였습니다. 기가막힌 스님이 삼베를 다시 돌려달라고 하자 김명국은 술을 사오면 고쳐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스님이 술을 사오자 김명국은 술을 마시고 다시 붓을 잡고 그림을 그렸습니다. 스님으로 그려진 인물에다 머리와 수염등을 그려넣고 옷의 색도 채색을 하여 금새 그림이 바뀌어 졌습니다. 그림을 다 그린 김명국은 크게 웃으면서 또 술을 마셨다고 합니다. 이 그림을 본 스님은 "공은 참으로 천하의 신필(神筆) 입니다"하며 감탄을 하며 절을 하며 그림을 가져 갔으며 그림은 그 사찰의 보물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금은 그 그림이 전해져 오지 않습니다. (출처 - 유홍준 [화인열전], 정내교[화사 김명국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