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자오 나눔의 일정을 잡을 때 소록도 방문은 신년과 현충
일, 그리고 가을과 겨울에 방문하는 걸로 일정을 잡는다. 이번 현
충일 때의 소록도 방문도 자오 나눔의 일정에 잡혀 있던 대로 작
년부터 준비를 하고 있었다. 자칭 지하조직의 보스라며 말없이
자오 나눔을 밀어 주시는 형이 한분 계신다. 언제 어디서나 힘들
때 "형... 힘들어요" 하면 마치 아무런 일도 아니라는 듯 "야~ 주
님을 찾아야지..." 당신은 교회를 나가지 않아도 못난 아우는 열
심히 신앙생활을 하기를 바라는 형이다. 그형은 나 몰래 준비를
하고 계셨나 보다. 소록도에 보내 줄 옷을 준비해 놓고 나를 부
르신다. 공장에서 막 출고된 새 작업복이다. 가슴이 진탕된다. 말
보다 행동으로 먼저 나눔을 할 줄 아는 형께 항상 나눔을 배우곤
한다.
자오 장애인 거택 마련을 위한 마산 음악회를 다녀온지 얼마
되지 않아 여독이 채 풀리지 않은 것 같다. 소록도를 간다고 홍
보를 해 보지만 연휴를 즐기려는 유혹이 더 강한가 보다. 워낙
장거리라 강제로 가자고 할 수도 없다. 그러나 해야 할 일이기에
혼자라도 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준비를 한다. 옷을 찾아오고 정
리를 한다. 차곡차곡 쌓이는 새로운 옷들... 그걸 보던 홍승룡 집
사님이 새 추리닝을 지원해 주고 싶다고 한다. 감사함으로 받는
다. 세어 보니 50벌이다. 상목님이 후원한 수건 50장도 포함된다.
이제 가져갈 물건은 어느 정도 준비가 됐다.
그러나 중요한 운전할 사람이 부족하다. 같이 가시기로 한 분
이 건강의 악화로 참가를 못하겠다고 연락이 왔다. 혼자 끙끙대
는 모습이 안쓰러웠나 보다. 청주에서 지영현 집사님이 부천까지
올라와 가겠다고 하지만 왕복 1,100km 넘는 거리를 혼자서 운전
한다는 것은 무리다. 기다려 보시라고 한 후 교회 청년 회장에게
연락을 한다. 소록도에 몇 번 동행한 적이 있던 청년 회장은 벌
써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소록도에 동행을 해 달라고 부
탁을 했더니 교회의 큰 행사를 앞두고 준비해야 할 것도 많을텐
데 아멘으로 순종을 해 준다. 하나님께서 미리 예비를 해 두셨음
을 새삼 깨닫게 된다.
부천에서 나와 청년 회장, 새내기 나눔 회원인 곽수진씨와 그
의 아들 전호성(6살), 그리고 내 아들 준열(7살)이가 동행을 한다.
청주에서는 영현님과 민인숙님, 그의 공주 수경이와 왕자 혁구가
같이 가기로 한다. 여수에선 감도 교회 김정수 목사님 이하 14명
이 동행을 하신 단다. 같이 동행하기로 한 여수 사랑회에서는 다
음 기회에 기쁨으로 동행하기로 하고 이번 방문때는 기도로 밀어
주기로 한다. 이제 인원 정리가 거의 됐다.
소록도 방문을 위해 금식 기도로 준비를 했는데도 왜 이리 불
안한가... 기도가 부족함을 깨닫는다. 방문을 하려고 하는데 경비
가 없어서 그런가 보다. 15인승을 가지고 소록도에 다녀오려면
도로세와 기름값 등을 합쳐서 20여 만원이 들어간다. 그런데 재
정이 바닥이라 하나님의 도우심만을 바랄 뿐이다. 형편이 어려우
신 집사님 한분이 지갑에서 5,000원을 맨 먼저 보태신다. 나중에
정리하기로 하고 일단은 20만원을 빌려 준비한다. 황희돈 집사님
께 물건을 아래층으로 옮겨 달라고 부탁을 한다. 바로 차에 실으
려고 했더니 차량 운행을 하는지 보이지 않는다.
철야 예배를 드리고 가기로 하고 예배에 참석을 한다. 김주철
집사님이 보인다. 곁에 가서 11시까지 차에다 물건을 실어 달라
고 부탁을 드린다. 15인승을 다른 교회에 빌려주었단다. 이젠 12
인승을 교회에서 빌려 타고 가야 한다. 새벽 기도 차량 운행이
걱정되지만 어쩔 수 없다. 황희돈 집사님이 경비에 보태라며 손
에다 돈을 지워 준다. 선교회를 교회 소속으로 하면 재정적인 문
제는 없을 텐데... 하는 마음 약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모든걸 주님께 맡기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한 것 같다'라
고 혼자서 위로를 하며 예배를 드린다. 강대상에서 울려 퍼지는
고린도 후서 12장 7절부터 10절까지의 말씀이 나의 심장을 울린
다.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
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
라...' 자고... 스스로 높아지는 것. 내가 스스로 높아지려 했는가...
그것이 하나님께 덕이 되지 못했는가... 말씀을 깨달음으로 회개
가 이루어지니 마음이 편해진다. 이제는 담대함이 생긴다.
예배를 마치고 차로 이동하니 어두운 차안에 부지런히 짐을 싣
고 있는 사람이 있다. 김주철 집사님이다. 나눔을 할 때 언제나
말보다 행동을 먼저 할 줄 아는 사람, 어려운 문제가 닥쳤을 때
상의하고 싶은 사람... 말없이 혼자서 준비를 해 주고 있다. 같이
동행하지 못함을 안타까워하시는 모습에서 뜨거운 사랑을 발견한
다. 마음속으로 혼자 뇌까려 본다. '네가 없으면... 같이 가지 않으
면 내가 힘들잖니...' 나 혼자만의 욕심이다. 며칠 전에 마산까지
장거리 운전 봉사를 하셨는데... 그러고 보니 일주일 사이에 영남
과 호남의 끝자락까지 부천에서 이동을 하고 있다.
차에 짐이 다 실렸다. 수진님이 아들과 함께 탄다. 준열이보다
한 살 어리지만 덩치는 더 큰 것 같다. 대표 회장이신 이규환 목
사님의 기도를 받는다. 무사하게 다녀올 수 있도록 성령님의 인
도를 간구 하신다. 경비에 보태라며 봉투를 건네주신다. 목사님과
주철님의 배웅을 받으며 부천을 출발한다. 시간을 보니 5일 밤
11시 20분이다. 차안에서 봉투를 열어 보니 목사님께서 7만원, 황
집사님이 5만원을 보태 주셨다. 나머지를 보태 20만원을 청년 회
장에게 주며 알아서 쓰라고 한다. 이동하는 중에 삐삐에 진동이
울린다. 잘 다녀오시라는 회원의 메시지다. 핸드폰도 부지런히 노
래를 부른다. 색동이님이다. 같이 동참 못해 미안하다고 전한다.
멀리서 벗님네가 전화를 주신다. 영현님께 출발하고 있음을 메시
지로 알린 후 잠시 깊은 생각에 잠긴다. 이번에 가면 하늘나라에
가시고 뵙지 못할 분이 몇 분이나 될까... 그분들의 모습이 영사
기를 돌리는 것처럼 눈앞에 그려지고 있다. 밤하늘은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다. 진통제라도 먹고 올걸...
영현님과 통화가 되지 않는다. 명순님께 음성을 급하게 날린다.
그래 봐야 지금쯤 철야 예배를 드리고 있을 텐데... 혼자서 멋쩍
은 웃음을 지어 본다. 지금 심정이 어떠냐고 앞에 앉은 수진님께
물어 보니 긴장되고 떨린단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데 핸드폰이 노래를 한다. 영현님이다. 청주 톨게이트에서 만나기
로 한후 다시 이야기를 나눈다. 창밖에는 비가 쏟아지고 있다. 내
일은 추울 것 같다는 청년 회장에게 낼은 비 안 온다고 큰소리
쳐 본다. 하나님은 조금도 실수하시지 않는 분이라는 걸 강조하
며...
청주 톨게이트에 도착을 했다. 어느새 비는 그쳐 있다. 영현님
이 우릴 발견하고 뛰어 온다. 반가운 악수, 이윽고 가족이 탄다.
지적인 미모와 사람 좋아 뵈는 미소의 여인이 아이들을 데리고
탄다. 영현님의 갈비란다. 나는 그 가족을 처음 보지만, 그들은
나를 나눔지를 통해 진즉부터 알고 있었기에 전혀 낯설지 않나
보다.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밤길을 달리는 차량의 행렬은 꼬리
를 물고 있다. 얼마를 더 달리다 휴게소에 들려 용변을 처리한다.
IMF 위기라는 말도 거짓말인가 보다. 연휴라 그런지 엄청 내려
간다. 명절 때보다 더 많이 밀리는 것 같다는 말이 귓가로 들린
다.
운전 교대를 한다. 영현님이 운전대를 잡는다. 앞좌석에는 영현
님 가족이 타게 한다. 영현님께 농담조로 "너의 가족이니 네가
알아서 운전하고 가라"고 했더니 너털웃음을 웃는다. 좋은 친구...
언제나 내 곁에서 도와주겠다는 고백이 가슴으로 와 닿는다. 빗
길을 계속 달린다. 어느새 비도 그치고 지리산 자락을 휘감고 있
는 구름이 날이 밝아 옮을 알려준다. 갑자기 핸드폰이 울린다. 소
리가 이상하다. 알람이다. 새벽기도 갈 시간을 알람으로 지정해
두었던 것이 4시 40분이 되니 울린 것이다.
벌써 날이 밝았다. 밤이 많이 짧아졌음을 알 수 있다. 얼마를
달렸을까 핸드폰이 반가운 노래를 들려준다. 많이 들어본 목소리
다. 아... 부여 제비 박종국 형님이다. 같이 동참하지 못함을 미안
해하며 이른 아침에 전화를 주셨다. 감사의 눈물이 난다. 고맙다
고 제대로 말도 못하고 말꼬리를 흐린다. 다음 기회에는 동참하
기로 하고 전화를 끊는다. 근처에 사는 형님께 핸드폰을 날려 본
다. 핸드폰이 꺼져 있나 보다. 통화를 할 수 없다. 목사님께도 전
화를 해 보니 마찬가지다. 벌써 고흥반도로 들어섰다.
녹동항에 도착한 시간이 8시 30분 경이다. 밤길을 9시간 이상
을 달려 도착했다. 선착장에 도착 한 후 눈앞에 보이는 섬이 소
록도라고 하니 "저 섬을 보니 빠삐용에서 나온 섬이 떠오른다"고
대답을 하는 수진님의 얼굴에도 피곤함이 역력하다. 허긴 양쪽
허벅지로 두 아이들의 베개 노릇을 하며 오셨으니 피곤도 하리
라. 소록도를 11번째 내려오다 보니 어느새 단골집이 되어 버린
광주 횟집으로 들어간다. 큰 숭어 한 마리면 9명이서 회와 매운
탕을 넉넉하게 먹을 수 있을 것 같다. 얼마냐 물어 보니 30,000원
이란다. 주문을 한 후 방으로 들어간다. 천방지축 아이들은 방에
들어가자 마자 운동장으로 만들어 버린다. 회가 나오기 전에 미
리 나오는 음식이 푸짐하다. 가리비, 새우, 낙지, 메추리알 등...
기도를 한 후 음식을 먹는다. 갑자기 호성이가 배가 아프다며 안
먹는다. 약방에 데리고 가 약을 사 먹였나 보다. 약 먹은지 1분도
안되어 음식을 맛있게 먹는 6 살배기 호성이를 보며 씽긋 웃어
본다.
회가 큰 접시로 수북하게 나온다. 배가 고픈 상태였지만 량이
많아 매운탕에 넣고 끓인다. 매운탕과 밥을 먹고 있는데 여수 팀
이 오고 있다고 전화를 한다. 식사를 마친 후 커피를 마시고 있
는데 소록도 동성 교회에 계시는 강대시 장로님이 찾아 오셨다.
어느새 영현님이 식사비를 지불해 버렸다. 장로님께 이것저것을
물어 보느라 바쁘다. 마산 팀은 오후 2시에 도착한단다. 우리만
먼저 예배를 드리자고 한다. 소록도에 전화를 하여 종을 치라고
하신다. 종을 치면 교회로 모이는 주민들... 이유를 묻지 않는다.
교회로 모여 은혜의 시간을 나눌 수 있기를 기도할 뿐... 순종의
미덕을 은연중에 가르쳐 주고 있다.
부두에서 여수 팀을 기다리는데 대형 버스가 여러 대 들어 온
다. 소록도에 있는 성당으로 미사를 드리러 가는 육지 사람들이
다. 철갑선에 두 번으로 나누어 탄다. 400명정도 미사를 드리러
온 것 같단다. 오늘이 현충일이라 특별 미사를 드리러 온 것 같
다. 여수 팀이 두 대의 차량으로 나누어 도착을 한다. 반가운 악
수 악수 악수... 그사이 목사님 흰머리가 늘은 것 같다. 못난 나
때문에 신경을 많이 쓰셨나 보다. 배가 도착하지 곧 바로 차량을
배에 싣는다. 도선비를 목사님이 지불하신다. 이러한 방법으로 미
리 경비를 예비해 놓으셨음을 체험한다. 바다를 보는 아이들이
신났다. 벌써 2년째 소록도를 따라온 준열이는 눈에 익은 환경들
을 보며 아는 체를 한다. 저 아이들이 어른이 되었을 때는 소록
도 주민도 모두 소천하고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의 기억
속에는 소록도의 모든 환경들이 남아 있을 것이다. 그것이 저 아
이들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커다란 도움이 되리라는 것을 믿어 의
심치 않는다.
세 번의 검문이 수월하다. 장로님이 앞에서 인솔을 해 주시기
때문이다. 사슴이 보이는가 잘 보라며 영현님은 주문을 한다. 지
금이 어느 땐데 우리 눈에 사슴이 보이랴... 모두 숲속에서 풀을
뜯고 있을 텐데... 드디어 동성 교회에 도착을 한다. 성전에서는
찬양 소리가 낭랑하게 울리고 있다. 우리를 마중해 주고 있는 장
로님들 이하 주민들... 반가움의 악수와 포옹... 단지 외모만 추해
보일 뿐이지 모두 깨끗함을 입은 그들에게 언제나 자연스런 악수
를 나눌 수 있을는지... 마련해 간 옷을 내려놓고 바로 성전으로
들어간다. 앞자리에 앉아 있던 일행들에게 주민들과 더불어 앉으
라고 지시를 한다. 우리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다. 똑 같은 사람인
데 왜 같이 앉지 못할까... 예배를 드린다. 찬양과 기도와 말씀,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 때 없는 자 외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 목사님의 심금을 울리는 설교와 용기를 주고 있
는 설교가 묘한 조화를 이루며 우리의 가슴으로 와 닿는다.
광고 시간에 같이 나눌 수 있는 음식을 준비해 오지 못함을 미
안해하시는 목사님... 다음엔 꼭 마련해서 같이 나눌 수 있게 하
겠노라 는 말씀이 더욱 미안함을 느끼게 한다. 옆에 앉은 그분들
과 피부 접촉을 한다. 반가운 악수다. 보이지 않는 그분들께 내가
해 드릴 건 악수와 포옹뿐이었다. 그리고 난 그분들의 엄청난 기
도를 받고 있다. 지금도 새벽마다 자오 나눔을 위한 기도와 '양집
사님 사명감 있고 믿음 좋은 동반자 보내 달라'고 기도를 하신
단다. 예배를 끝난 후 전도사님과 장로님께 소록도의 소개와 정
신교육을 잠시 받는다. 잠시 밖에서 목사님과 정담을 나누었다.
자오 나눔의 선교비를 직접 준비해 오셔서 건네주신다. 조금도
실수하시지 않으신 하나님...
여수 감도 교회에서 사모님 이하 성도님들이 마련해 오신 김밥
으로 점심을 나눈다. 전도사님과 장로님 이하 몇 분만 같이 음식
을 나눌 수 있었다. 다음에는 꼭 이분들과 식사를 할 수 있도록
교회 차원에서 마련해 오시겠다는 사모님의 고백이 뜨겁다.
식사를 한 후 성전 앞에서 사진을 한 장 찍는다. 여건이 허락
되면 나눔지 표지에 올리려고 한다. 중앙 공원의 경치는 더욱 아
름답다. 휠체어를 빌려 타고 이동을 한다. 여기 저기서 셔터를 눌
러 댄다. 많이 개방되어 단체로는 쉽게 들어 올 수 있기에 많은
분들이 소록도에 들어오셨다. 자료 전시실에 들어가 설명을 들으
며 경악에 찬 시선을 전시된 사진에 고정시키고 있는 일행들...
저 사진들이 저분들의 한이리라... 다른 전시실을 구경하고 있는
데 '쨍그랑' 아고 무슨 일이냐... 개구쟁이 호성이가 전시장의 유
리를 깼네... 아이가 다치지 않았는가를 먼저 걱정해 주는 소록도
주민... 유리값을 변상해 드리려고 유리값을 물어 보았다가 오히
려 혼을 난다. 물어 본 내가 머쓱해진다. 뒤통수만 긁적긁적... 엄
청난 충격을 받은 것 같은 일행들... 오래오래 그 기억이 남아서
세상을 살아가는데 커다란 보탬이 되시길...
여기서 잠시 한센씨병(나병)의 역사적 배경과 소록도 병원의
시작, 그리고 한센씨병의 이해를 인용하여 옮겨 본다.
* 역사적 배경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데 한센씨병이 깨끗하여진지라."(마8:3) 하
나님의 말씀대로 복음이 들어가는 곳마다 구라사업(救癩事業)이
시작되었고 아골 골짜기에 소망의 문이 열리게 되었으니 이 어찌
할렐루야로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을 수 있을까!
1882년 5월 22일 한.미조약이 체결되고 한국에도 선교의 문이
열리게 되니 1884년 10월 20일에 중국에서 선교 활동을 하던 알
렌의사 부부가 개신교 최초의 의료 선교사로 들어와 왕실 병원
제중원(1886년)을 세우고 1885년 4월 5일 언더우드 선교사와
1885년 6월에 아펜젤러 의료 선교사 부부가 한국에 와서 의료 선
교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때 한국에서 한센씨병이 만연되어 사회문제가 되고 있었는
데, 하나님께서 불쌍한 영혼들을 사랑하셔서 1909년 4월에 미국
남 장로교 의료 선교사 포사이드와 윌슨 의사가 광주 지역에서
한센씨병 환자를 치료하기 시작하였고, 1909년 여름 윌슨 선교사
에 의해 최초 한센씨병 환자 10여명을 전남 광주 근처 봉선리에
수용하게 되었다. 1925년 현재 여천군 00리로 옮겨 교회, 병원,
숙소 등을 신축하고 치료하며 발전한 것이 여수 애양원의 시작이
다.
1910년 3월 30일에 부산 감만동에서 선교사 어빈과 맥긴져 목
사가 특수병원을 개설하니 이것이 부산 상애원의 시작이다. 1913
년 3월 1일 미국 북 장로교 선교사 프렛처 의사가 병원을 개설하
여 치료하기 시작한 것이 대구 애락원의 시작이었다.
이들 지역에서 복음과 함께 육신의 치료가 시작되고 한국의 한
센병 치료는 복음과 함께 시작되었으니 한국의 복음 전파는 한센
병 치료와 무관하지 않다. 그 당시 한센씨병에 대한 불안 시대에
선교사들의 헌신적인 사랑의 모습이 선교의 효력을 극대화시켰다
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소록도 병원의 시작.
1910년 8월 22일 한일합방 조약 이후 일본의 탄압과 한국인의
원성이 고조될 무렵 여수, 부산, 대구 등지에서 한센씨병 치료에
국민적 반응이 좋았으나 다 수용할 수 없는 환우들 처우 문제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되었을 때 일본 총독부에서 착안한 것이 한센
씨 병원의 개설이었다.
후보지를 물색하던 중 기후가 온화하고 수량이 풍부하며 육지
와 가깝고 서달지역 남쪽에 구릉이 있어 환자지대와 직원 지대로
나누기 용이하여 격리 수용에 적합한 소록도를 선택하고 1915년
2월에 섬주민을 설득하여 소록도 서북쪽에 19만 9천 7백평과 주
민 가옥 10동을 매수하여 동년 7월에 착공하였고 1916년 1월에
47동의 병동과 병원 본관을 준공하고 1916년 5월 17일에 전남 도
립 자혜 의원으로 개원하여 처음 100명을 현재 소록도 2번지 구
북리 일대에 이주하게 하여 삶을 다시 개척하여 치료받게 되었
다.
일본인 아리가와씨가 제 1대 소록도 병원장으로 부임하게 되었
고, 2대는 하나이씨가 3대는 미스자와씨가 4대는 수호씨가 5대는
니시기씨가 부임하였다. 당시 조선에서는 사립 나요양소가 세군
데 있었으나 그 규모가 작아 수용된 인원이 아주 적었으며 대부
분의 한센씨 환자들은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었기에 일제에게는
'반(反)사회인'으로 의학적으로 관리대상이라기 보다는 정치적, 사
회적 관리 대상으로 보고 일제는 집단 격리하는 과정에 정치적
힘을 동원함으로써 조선 통치의 근거가 되는 국가권력의 정당성
을 확보하려 하였다.
*한센씨병 이해.
한방에서는 개라(疥癩), 대풍창, 풍병이라 불렀다. 구약에 한센
이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하는 곳은 출4:6이다. 모세가 하나님으로
부터 사명을 받을 때 보여주신 이적 가운데 하나다. 히브리어로
는 "메졸라트"로 표현이 되었고 이 말은 [짜라]라는 말에서 파생
된 말로 "몹시 괴롭다"라는 말뜻을 가지고 있다. 학명으로는 한센
씨병이라 호칭을 한다. 한센씨병이란 노르웨이 의학자였던 한센
씨(1841-1912)가 1897년 처음으로 한센균을 발견하여 배양에 성
공함으로 한센씨병을 병균에 의해 감염되는 병이라고 공포되고
본격적인 치료약이 개발되어 한센씨병이 완치되게 된 것이다.
마8:3에 예수님께서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말씀 하
신 대로 한센씨병은 치료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병은 원래 병
균이 너무 약해서 전염되는 확률이 적을 뿐 아니라 특별한 경우
가 아니면 전염되지 않는다. 한국에서는 1992년 세계 나학회 서
울 총회에서 한센병 종료 선언을 했으며, 한국에서는 한센씨병이
끝난 상태다. 발병 즉시 정상적인 치료를 받지 못하여 그 후유증
으로 심한 장애를 가지고 있으나 사실상 건강을 회복한 것이다.
한센균은 너비 0.2-0.4 밀리미크론, 길이 2-7 밀리미크론의 간균
으로 세대 기간은 10-31일이며 균이 많이 뭉쳐 있는 것이 결핵균
과 다른 점이다. 붉은색 막대 모양으로 염색되어 있으며 치료약
에는 디디에스(DDS)와 클로파지민과 리팜피신과 프로치오나마이
드 등이 개발되어 한센씨병은 초기에 발견하면 100% 치료가 되
는 병이며 완치되는 피부 질환이다. 그러므로 이병에 대한 인식
이 새로워져야 할 것이며 이제는 이병을 반드시 세계 통용어로
쓰이는 한센씨병으로 번역해야 할 것을 건의하며 모든 언론 논설
위원들과 특히 목회자들은 강단에서 말씀을 선포할 때 과거 아픔
을 들추어 내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며 인권회복을 위해 앞
장서야 할 것을 부탁드린다.
이와 같이 한센씨병에 대해 잠시 옮겨 본 것은 바른 이해를 돕
기 위함이다. 전시관을 모두 견학했다. 단종대가 있던 감금실과
마루타의 현장이었던 검시실을 미리 둘러보고 왔기에 전시관에서
설명을 해 주시는 관리 집사님의 설명이 더욱 실감 나나 보다.
다시 차량으로 이동을 하여 교도소와 화장터를 돌아보며 설명
을 해준다. 화장터에선 잠시 간증도 하며 은혜를 나눈다. 그사이
준열이랑 꼬마들은 바닷가로 나가 게를 잡느라 분주하다. 돌아오
라고 소리 질러도 들리지 않는가 보다. 멀리서나마 납골당까지
구경을 한 후 해수욕장으로 이동을 한다. 바다를 보며 마음껏 소
리지르면 답답함이 풀릴까... 동성 교회에 남아서 잠시 휴식과 청
소를 하고 있는 청년 회장을 태우고 영현님이 돌아온다. 바로 김
정수 목사님의 기도를 받고 선착장으로 이동을 한다. 교회 창립
12주년 행사가 있기에 괜히 마음이 바쁘다. 배가 오는 동안 준열
인 게를 잡겠노라고 바닷가로 나갔다가 신발과 바지만 젖어 온
다.
전용 차선으로 달리는 우리는 생각보다 빨리 달리고 있다. 달
리는 중에 명순 집사님의 전화다. 어디쯤 오고 있느냐고... 청주에
들려 저녁을 먹고 가라고... 감사하다. 그러나 시간이 허락질 않는
다. 청주에서 영현님 일행이 내린 후 얼마를 더 달리다 입장 휴
게소에 들려 저녁을 먹은 후 또 다시 달린다. 오산을 지나 수원
을 거쳐 부천에 들어와 수진님 일행을 내려 준 후 교회에 도착하
니 자정이 넘었다. 바로 통신에 들어와 도착을 알린 후 재정 간
사께 보고할 경비 지출 문제를 대충 정리 해 놓고 있는데 준열이
가 자다가 허전한지 다시 나온다. 그래... 나머진 내일하고 자자...
간단하게 씻고 이불 속으로 들어간다. 무척 단잠을 잘 것 같다.
이번 소록도 방문을 인도하신 하나님과 동행하신 모든 분들께 감
사를 드립니다. 샬롬.
1998.6.7. 자오 나눔에서 나눔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