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證道歌 무비스님 문수원 강의 11강
(44.自從頓悟了無生으로~ 50. 一超直入如來地리요)
自從頓悟了無生으로
(자종돈오요무생으로)
다행히 불법을 만나서 생사가 없는 도리를 깨달았으니
자종돈오요무생(自從頓悟了無生)으로 어제영욕(於諸榮辱)에 하우희(何憂喜)야, 돈오해서 무생을 요달했다, 생사가 없는 도리, 무생이라는 말은 생사가 없는 도리, 생사가 없는 그런 자리, 생사가 없는 본체, 생사가 없는 진실생명 참생명, 그것을 몰록 깨달아서 알았다 이 말입니다.
그런 것을 앎으로부터, 앎으로부터
於諸榮辱何憂喜아
(어제영욕하우희아)
모든 영광과 오욕에 무슨 근심이 있고 무슨 기쁨이 있겠는가.
어제영욕(於諸榮辱)에 하우희(何憂喜)야, 모든 영욕에 있어서, 영광과 어떤 그 욕됨, 성공과 실패, 기쁨과 슬픔 이런 모든 상대적인, 인간이 살아가면서 매일매일 겪는, 밤을 겪고, 낮을 겪듯이 기쁨과 슬픔 영광과 오욕 이런 것들이 계속 반복하는 거죠.
그런 반복은 이 육신이라고 하는 것, 삶과 죽음이 있다고 하는 것으로부터 존재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삶과 죽음을 받는 육신이, 또 우리의 일회적인 어떤 그 삶이 없다면 그런 영욕이 없죠.
그런데 사실은 생사가 없는 그 참 생명의 자리를 깨닫고 나면은 생사가 있는, 또 생사가 있음으로 해서 영광과 오욕이 있는, 기쁨과 슬픔이 있는, 이런 모든 것들에 대해서 하우희(何憂喜)야, 무엇을 근심하고 무엇을 기뻐하랴 그런 말입니다.
사실 기뻐하고 슬퍼하는 것, 영광에는 기뻐하고 오욕에는 슬퍼한다, 그런 것들은 결국은 나그네가 겪는 일과 같은 것이고, 숲을 지나가는 일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아무리 어떤 오욕을 겪어도 또 근심거리가 있어도 그것은 금방 상황이 바뀌면은 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아무리 붙들어 둘래야 붙들어 지지도 않아요.
슬픔도 마찬가지입니다. 슬픔도 아무리 정말 땅이 꺼질듯한 슬픔과 죽을 듯한 그런 그 슬픔이지만은 곧 지나가 버려요.
기쁨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건 생사를 반복하는 거죠. 그러니까 그런 것은 생사가 없는 우리 진실생명하고는 관계가 없다. 그러니까 무엇을 기뻐하고 무엇을 슬퍼하겠는가 이런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세계, 우리의 어떤 일회적인 어떤 삶, 또 순간적으로 변화무상한 삶이 있는가 하면은 또 한 면으로는 영원불멸하는 그런 삶이 있다. 그것이야말로 진짜 내 참생명이다 하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된다는 거죠.
그러니까 거기에 마음이 있는 사람, 거기에 어떤 이해와 깨달음이 있는 사람은 우리의 어떤 짧은 시간 안에 성공과 실패 또 영광과 오욕을 거듭하는 그런 것에는 크게 마음을 쓰지 않는다구요.
크게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그래 좀 더 대범할 수가 있고, 좀 더 멀리 생각할 수가 있고 그런 거죠.
실패를 해도 그만이고, 또 어떤 성공을 했다 해서 크게 뭐 그렇게 들떠서 정신없이 설칠 것이 아니라는 그런 어떤 경지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런 것을 달관이라고 할까요?
달관을 넘어서서 그야말로 그런 것을 완전히 초탈하는 그런 어떤 그 경지, 그것은 우리 진실생명을 보는 안목이 있을 때 그게 가능한 것입니다.
그걸 보지 않으면은 어렵죠 그게.
말하자면 보다 높은 그 어떤 안목을 가졌을 때 낮은 차원의 어떤 문제들이 시시하게 생각이 들고, 거기에는 관심을 두지 않을 수가 있지, 보다 더 다른 차원의 어떤 그 내 생활과 내 안목과 삶이 없으면은 그럴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무리 하찮은 거라도 거기에 그냥 온 삶의 무게를 싣고 내 인생의 가치를 거기다 싣고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그 성인의 가르침을 통해서 자꾸 우리가 안목을 높혀야 되고 어떤 그 소견 내지 지견을 자꾸 넓혀 가야 되는 거지, 그래서 우리의 관심의 대상도 자꾸 차원을 달리 해야 된다, 그래서 결국은 삶과 죽음을 초월한 해탈의 경지 거기에 마음이 머물러야 말하자면 불교적인 그런 그 성공이다 이렇게 이제 볼 수가 있겠죠.
그 외에는 아직 불교적인 그런 그 생활에 접어들지 못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사실은.
여기에는 또 개인의 오도송이다 보니까 개인적인 어떤 그 삶과 그 당시 그 어떤 환경이라든지 또 출가수행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어떤 그 삶의 모습들 이런 것들도 엿볼 수가 있는 것이 바로 이런 구절들이죠.
入深山 住蘭若하야
(입심산 주란야하야)
깊고 깊은 산에 들어가서 적정한 곳에서 살고 있으니
입심산주란야(入深山住蘭若)하니 잠음유수장송하(岑崟幽邃長松下)에 우유정좌야승가((優遊靜坐野僧家)하니 격적한거실소쇄(闃寂閑居實蕭灑)로다
요런 그 한 게송은 선종의 한가한 수행자의 생활, 그러면서 어떤 세속적인 그런 것을 다 떠나서 산중생활은 여러 사람을 만나지 않아서 말하자면 한가하고, 또 번거로운 것이 없으니까, 단순하니까 한가롭다.
또 그것은 그만치 마음에 그만한 준비가 되어 있을 때 그 그게 가능한 거죠.
그런 준비가 안 되어 있는데 산중에 혼자 가서 있어봐요. 망상 더 많이 부리고 더 답답하고 더 못견디죠.
사실은 산중에 간다고 해서 꼭 좋은 것은 아니지만은 시중에 살아도 마음으로부터 그런 번잡함, 번거로움을 다 떠난 사람은 사실은 굉장히 한가하게 삶을 사는 사람이다. 얼마든지 그런 길이 있어요 또 있기는.
꼭 산에 가야 된다는 것만은 아니죠.
입심산(入深山) 심산에 들어가고 난야에 주한다.
난야(蘭若)는 아란야라고 해서 적정처, 고요한 곳, 수행자가 사는 곳을 소위 아란야라고 이제 그래요.
그건 이제 사찰, 사찰 중에서 이렇게 큰 사찰 같은 건 이미 난야의 성격을 잃었습니다. 왜냐? 여럿이서 사니까 번거러운 거죠.
그런데 이제 한 두 사람이 사는 그런 토굴 같은 곳은 소위 난야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요런 곳은 아란야라는 것은 지금도 버어마나 스리랑카 태국 이런 데 가보면은 개인 토굴이 굉장히 많아요.
역시 뭐 우리나라에도 있지만은 부처님 당시에도 그런 장소를 소위 아란야다 그랬습니다. 중국에서도 역시 마찬가지고요. 대중처소는 아란야라고 하지 않아요. 난야에 주하니
岑崟幽邃長松下로다
(잠음유수장송하로다)
산은 높고 골짜기는 깊어서 낙락장송 숲속이로다.
잠음유수장송하(岑崟幽邃長松下) 잠음이라고 하는 것은 높은 곳, 빼어난 곳 이런 뜻입니다 산봉우리 뭐 그런 뜻인데.
유수는 깊은 곳 이런 말입니다.
아주 그 봉우리는 능선이나 봉우리는 높고 계곡은 깊죠.
그게 이제 잠음과 유수의 차이입니다.
‘높은 뭐 묏부리와 깊은 골짜기’라고 라고 하는 『초발심자경문』의 말이 있듯이. 그리고 장송, 장송나무 밑에 잠음유수장송하에 그러니까 높은 능선 봉우리 또는 깊은 골짜기 그리고 장송, 큰 소나무들 그런 밑에서 어떻게 사느냐?
優遊靜坐野僧家하니
(우유정좌야승가하니)
한가롭고 편안하게 야승의 움막에 조용히 앉았으니
우유정좌야승가((優遊靜坐野僧家)라 우유(優遊)는 아주 한가하게 노니는 것을 우유라고 그래요. 넉넉할 우(優)자 마음으로 부터 넉넉한 그런 그 상태를 우라고 그럽니다.
유는 그러니까 넉넉하니까 뭐 바쁘게 설칠 게 없죠. 그래서 유가 붙어서 한 말이 되는 거죠. 우유(優遊).
마음으로부터 정신적인 여유가 있어서 한가하게 노니는 그렇게 노닐기도 하고 정좌도 한다 이 말이요, 고요히 앉기도 한다.
어디에? 야승가에.
야승가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주지를 한다든지 큰스님이라고 소문이 나 있다든지 중앙에 무슨 행정을 한다는지 무슨 뭐 이런 이는 야승이라고 할 수가 없죠. 그야말로 그건 권승이라고 해야겠죠.
이 야승은 그야말로 이름을 숨기고 해서 조용히 자기 공부에만 충실한 그런 어떤 스님을 야승이다 그렇게 하죠. 그런 이들이 사는 데라면 당연히 작은 토굴이나 암자가 될 것입니다.
큰절에는 그렇게 안되죠. 큰 절에는 저절로 그게 이제 번잡해지고 소문이 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요것도 역시 난야와 같은 의미입니다. 아란야와 같은 의미입니다.
우유하고 정좌한 야승가(野僧家)에서 그러니까 집 가(家)자를 썼죠. 암자다 이런 의미이니까, 야승가에서 넉넉히 또 한가지 거닐면서 조용히 앉으니
闃寂閑居實蕭灑라
(격적한거실소쇄라)
호젓하고 쓸쓸하게 한가로이 사니 맑고 깨끗하기 이를 데 없다.
격적한거실소쇄(闃寂閑居實蕭灑)로다. 격적 고요할 격(闃)입니다. 고요할 적(寂)자, 아주 고요히, 아주고요히.
격조하다 그러죠. 서로 연락이 오랫동안 없었을 때 우리가 격조했다, 그럴 때 이 자를 씁니다.
격적하고 한거(閑居) 한가하게 산다 이 말이예요.
그래서 실로 소쇄(蕭灑)하고, 소쇄하다는 말은 뭐라고 할까, 아주 기온이 차고, 기온이 아주 낮고 말하자면은 낙엽이 지고 그리고 다니는 사람도 없고, 그래서 뭔가 싸늘한, 싸늘한 그런 어떤 그 느낌을 받는데 그런 환경을 소쇄하다 그래요.
어떤 가을의 그 깊은 산골짜기의 어떤 쓸쓸함, 그러면서 또 기온도 차고, 그래야 소쇄라는 말에 어울려요.
실로 그렇게 소쇄하다 이거죠. 아무도 없고, 혼자 한가하게 일년 내 가봐야 누구 하나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지나가는 사람도 없고 그런 상태를 소쇄하다 실로 소쇄하다.
소쇄함이로다, 이제 그렇게 살았다는 거죠. 이 스님이,
覺卽了 不施功이라
(각즉요 불시공이라)
깨달으면 곧 마치고 공을 베풀지 않는다.
각즉요불시공(覺卽了不施功) 그래 그렇게 자신이 그렇게 살기도 하려니와 또, 정말 열심히 수행하는 사람이 그 이렇게 사는 이들이 또 적지가 않죠.
각즉요불시공이니, 깨달으면 각즉(覺卽) 요(了)한다 이말이야, 깨달으면 다 끝낸다, 마친다. 깨닫기만 하면 이 마음 한 번 깨달으면은 다 끝나요.
요(了)자는 마칠 요(了)자, 수행을 다 마친다 이런 말입니다.
마치니 불시공(不施功)이라 공을 베풀지 않는다 이거예요.
한 번 깨달으면 끝이지 무슨 뭐 육바라밀을 낱낱이 닦는다든지 복을 지어야 된다든지 뭐 율을 뭐 특별히 가지려고 해야 된다든지 하는 그런 그 공을 베푸는 일이 없다 이겁니다. 그런데
一切有爲法不同이로다
(일체유위법부동이로다)
일체 유위의 법은 모두가 다 차별하고 다르니라.
일체유위(一切有爲)는 법부동(法不同)이로다, 깨달음의 경지는 사실 그래요. 깨달음의 경지는, 마음을 깨닫는 데는 뭐 복이 있느니 없느니 자비가 있느니 덕이 있느니 포교할 능력이 있느니 없느니 그런 게 해당이 되지가 않습니다.
그건 다른 차원의 것입니다.
그런데 일체유위는 법부동이라. 그건 유위법에 해당되는 거예요. 모든 유위법에는 법이 동등하지가 않다. 같지가 않다, 그래요.
그러니까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 있고, 없는 사람이 있고, 복이 있는 사람이 있고, 없는 사람이 있고, 덕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고, 똑같이 깨달았는데 부처님은 석가모니는 덕이 있고, 다른 조사스님들은 덕이 없고 말이죠.
복이 없어서 지 혼자 먹기도, 먹고 살기도 어려운가 하면은 수백 명 수천 명을 거느리고도 복이 남는 사람이 있고 그건 다 유위거든요. 밖으로 나타나는 어떤 모습이 있는 것입니다.
거기는 법이 일정하지가 않다, 같지가 않다 그게 그렇다고 해서 깨달음의 경지가 다르냐? 그건 아닙니다.
뭐 복 쪼가리 없다고 해서 그 사람의 그 지혜가 차이가 나고, 깨달음이 다르다 그렇게는 말할 수가 없는 거예요.
지금 우리가 뭐 생긴 게 다르고 여러가지 사회적인 수준이 다르다고 해서 저 본심이 본래심이 다르다 이렇게 말할 수 가 없는 것입니다.
본래 마음자리는 누구나 똑같애요. 남자나 여자나 무슨 뭐 젊은이나 늙은이나 똑같습니다.
본래심이 다른 거는 아니예요. 유위법이 달라. 업이 다르고 인연이 다를 뿐이야. 그거는 지으면 되게 돼 있어.
안 지어서 그렇고, 지으면 누구든지 그렇게 될 수가 있도록 돼 있는 거야.
그런데 지어도 안 되고 어떻게 할 수가 없이 똑같은 것은 본래심이라. 그건 부처님이나 우리나 똑같다고요.
그러니까 깨달음의 경지는 그런 본래심을 깨닫는 것이기 때문에 그건 뭐 복을 많이 지어야 깨닫고, 복을 안 지으면 못 깨닫고 이게 없습니다.
불시공이여, 공을 베푸는 게 아니라고요.
마음 한 번 돌리는 게 깨닫는 자리야.
그런데 세상을 이 몸뚱이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또 그게 아니거든. 차이가 있다고요. 있어봤자 별 차이도 아니지만은.
그러나 그 별 차이 아닌 데에 우리는 연연해 가지고 그 안달해 쌌는 게 또 인간이라고요. 그게 뭐 옳은 건 아니죠.
그러나 그런 차이가 없진 않다. 그래서 일체유위는 법부동이라 그랬습니다. 일체유위법은 다 같지가 않다.
우리가 그걸 이제 잘 알아야 되요.
마음은 똑같은데 뭐 이까짓 거 뭐 나하고 다를 게 있겠나, 물론 다를 게 없는 면이 있고, 그러나 또 천양지차로 다른 점이 또 있고.
그 양면을 똑같이 알아야 되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다’는 말을 우리가 잘 쓰듯이 그래 야 되요, 둘 다 알아야 됩니다. 같은 면도 알아야 되고 다른 면도 알아야 된다는 거죠.
어디 하나에도 편중하면 그건 곤란해요.
다른 것만 가지고 주장해도 어리석은 사람이고, 또 덮어놓고 같은 것만 가지고 자꾸 밀어붙여도 그것도 곤란하죠.
住相布施生天福이나
(주상보시생천복이나)
상에 집착하여 베푸는 일을 하는 것은 천상에 태어나는 복은 되지만
주상보시(住相布施)는 생천복(生天福)이니 그러니까 일체유위법부동이라는 말이 나오고 또 각즉요불시공 깨달으면, 마치고, 다 끝내고 공을 베풀지 않는다. 깨달음의 경지는 그렇다. 그러나 일체유위는 법부동이라 이런 말을 하니까 연이어서 이 스님이 나온 말이 그것입니다.
주상보시(住相布施)는 생천복(生天福)이니
유여양전사허공(猶如仰箭射虛空)이라
세력진전환추(勢力盡箭還墜)하야 초득래생불여의(招得來生不如意)다 그리고
쟁사무위실상문(爭似無爲實相門)에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리요
요 세 구절이 아주 그 유의해서 볼만한 대목이예요.
주상보시는 생천복이다. 밖으로 드러난 것이 말하자면은 어떤 복이 있다 덕이 있다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그걸로 우리는 살아가는 거야, 또 어떤 의미에서 보면은.
그런데 상에 머물러서 보시를 한다. 이 금강경에서 수없이 이야기 하는 그런 대목이죠. 말하자면은 보시를 하는 데 있어서 어떤 상을 낸다든지 뭐 생색을 낸다든지 또 댓가를 지나치게 바란다든지 이런 것들을 전부 ‘상(相)이다’ 라고 우리가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또 중생인 이상 상을 또 안 낼 수가 없죠.
우정 그것을 표현을 하지 않더라도 마음속에 일어나고 있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게 또 인간이니까요.
그러나 이제 불법(佛法)을 아는 이상 그걸 자꾸 드러낼 수는 없는 거죠, 또 드러낼 필요도 또 없는 것이고 그래서 가능하면은 억지로라도 상을 내지 말라.
어쩔 수 없이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상이야 그건 난들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거는 이제, 아직은 그런 수행이 안됐으니까.
그러나 그걸 너무 드러낼려고 우정 노력하는 것은 또 바람직하지 못하다 하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상에 머물러서 보시하는 것은 천상에 나는 복이다. 그랬어요. 보시 많이 하면 그 복으로 천상에, 천당에 간다 그럽니다.
이건 이제 천당에 나는 그런 노력을, 그런 그 일을 위해서 하는 것은 불교라고 하는 것하고는 조금 차이가 있다 이렇게 봅니다.
불교는 성불이 목적이고 어떤 부처의 인생을 사는 게 목적이지 무슨 뭐 천상에서 태어난다, 아니면 부자가 된다 이거 천상에 태어난다고 하는 것을 ‘아주 부자가 된다’ 라고 이렇게 생각해도 좋아요. 천상에 태어나는 복이니
猶如仰箭射虛空이라
(유여앙전사허공이라)
마치 하늘을 향해 화살을 쏘는 것과 같아서
유여앙전사허공(猶如仰箭射虛空)이라 비유컨대 뭐와 같은고 하니 복을 많이 지어서 천상에 나는 것은 앙전(仰箭), 위를 향해 가지고 저 하늘을 향해 가지고서 허공에다 대고 화살을 쏘는 거와 같다. 마치 그와 같다.
하늘을 향해서 화살을 힘껏 잡아 당겼다, 그랬을 때 어떻게 되겠어요? 한참 올라간다고요. 한참 여기서 탄력이 있는 동안은 올라가. 올라가다가, 올라가는 걸 뭐예요, 올라가다가
勢力盡箭還墜라
(세력진전환추라)
올라가는 힘이 다하면 화살은 도리어 떨어지느니라.
세력진전환추(勢力盡箭還墜)라 세력이, 그 올라가는 세력이 진(盡), 진해서 탈진해 가지고 다 되어가지고서 다끝나면 어떻게 해?
화살은 도리어 떨어진다. 그렇지요. 총알도 마찬가지예요. 총알도, 그때는 뭐 총알이 없었으니까 화살 이야기를 했지만, 또 화살이 눈에 보이니까 또 쉽고.
잔뜩 이제 올라가지, 올라가다가는 끝내 내려온다고요. 우리가 뭐 돌팔매를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招得來生不如意로다
(초득래생불여의로다)
오는 세상에 뜻과 같지 못함을 초래하게 되리라.
초득래생불여의(招得來生不如意)다 그랬어요.
내생(來生)에 불러 오는 것이, 다음 생에 그것을 불러오는 것이 여의치가 못해. 예를 들어서 복을 많이 지었다, 내생이 그게 내생 한 생을 부자로 산다는 것 보장을 못한다 이거예요.
예를 들어서 복을 많이 지었는데 전생에 빚을 탕감했을 수도 있고, 탕감했을 수도 있고, 또 어느 정도 탕감하고도 남아서 내생에 써먹을 수도 있고, 아니면 빚이 한 푼도 없어가지고 내생 아니라 내래생까지도 써먹을 수도 있고. 그걸 아무도 모르는 거예요.
그래 내생에 그런 어떤 그 보장이 안 된다. 내생을 불러오는 일이 여의치가 못하다 이런 말이예요.
그럼 뭘 해야 되느냐? 뭘 해야 되느냐? 하는 게 여기 이제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이죠.
바람직한 걸 해라.
그렇게 한 번 써먹고 마는 것, 그거에 관심 쓰지 말고, 물론 그것도 필요는 해요. 어느 기간까지는 그게 효과가 있으니까, 그러나 어느 기간까지기 때문에 그게 문제다 이거지.
영원히 쓸 수 있는 것, 그게 없느냐 이거지, 영원히 쓸 수 있는 것.
집수리 같은 거 할 때도 한 번 해놓으면 한 100년쯤 좀 이렇게 안 고쳐도, 손 안대도 되는 것 없는가? 항상 그 생각을 하죠 우리가. 살다 보면 그런 생각을 하지.
아이 그 저 문풍지도 한 번 발라놓으면 한 백년쯤 안 고쳐도 되는 거 없는가? 매년 그 안 발라도 말이죠 누렇게 되지도 않고 좀 그런 게 없는가?
특히 뭐 저 하수구 같은 거 그런 거 말이죠. 한 번 해놓으면 뭐 몇 백년 손 안대도 좀 될 수 있는 거 그런 게 없는가? 참 그런게 잘 없는데 여기 하나 그게 있는가 봐요.
爭似無爲實相門에
(쟁사무위실상문에)
어찌 아무런 작위가 없는 실상의 도리에서
쟁사무위실상문(爭似無爲實相門)에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야 그랬습니다.
무위실상문(無爲實相門), 무위실상문, 함이 없는 실상의 문이다, 쟁사(爭似) 어찌 같으리요 이 말인데 무위실상문에서
一超直入如來地리요
(일초직입여래지리요)
여래지에 들어가는 것과 같겠는가.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 한 번 뛰어서 바로 여래의 경지에 들어가는 것만 어찌 같으리요, 그러니까 요거는 마음 한 번 깨달아 버리면 모든 게 끝난다 이겁니다.
그리고 영원히 간다 이 말이요. 복지어가지고 뭐 이렇게 근사하게 폼 잡고 사는 것은 그거 어느 기간동안이야. 그렇다고 안할 수도 없는 일이지만은.
그러나 유위와 무위, 마음의 경지와 어떤 바깥 현상의 유위의 모습 이런 것들의 차이가 그렇게 있다.
깨달으면 마음을 깨달으면 영원한 것이고, 또 우리가 복을 짓는 것은 어느 기간까지, 그 복의 힘이 있을 때 복력이 있는 동안까지 그렇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들을 우리가, 무얼 선택할 것인가 하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이걸 우리가 분명히 알고 넘어가야죠.
그런데 마음을 깨닫기 위해서 그 수행하는 그런 사람은 복을 삼생 원수다 이런 말을 해요.
옛날 어른들 보면 꼭 그런, 여기 경전에도 그런 말이 나오고 조사스님들 어록에는 그런 말을 잘 써요.
세속에서 말하자면 식구와 같이 더불어 사는 데는 유위법이 꼭 필요하죠.
나중에 가난하게 살 때 살더라도 당장에 필요하죠. 또 써 먹으면서 또 짓고, 써 먹으면서 짓고, 지으면서 또 써 먹고 계속 그래야 되요. 그래야 끝나지 않는다고요.
내가 이만하면 됐다 하고, 교만을 가지고 그 다음에 베풀지도 안하고, 좋은 일도 안하고 그러면은 그 사람은 금방 이제 끝나고는 나중에 그야말로 거러지가 돼 버리고, 넉넉하게 많이 가지고 있더라도 계속 지어야 되요. 계속, 끝없이 줄기차게 지어 나가야 됩니다.
그러면은 그게 오래 가는 거예요. 오래 갈 수 밖에 없지.
왜냐, 자기 지은 복이 탕감 했다고 하더라도 또 지은 게 있으니까.
그러니까 은행에서 계속 말이지 돈벌어서 통장에 넣고 그리고 또 계속 써야, 되는 거지.
쓰기만 하면 어떻게 해?
나중에 하나도 없잖아요. 계속 지어놔야 그게 들어가거든요. 그런 식이야. 유위법은 빤한 거예요. 우리 계산법이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거예요.
그래 우리 복이라는 것도 사실 그런 거예요. 마음의 경지 외에는 전부 유위법이야.
이 저 법문도요, 자꾸 듣고 뭐 경전도 자꾸 공부하면 잘 된다고요. 유위법만치 눈에 잘 드러나게 효과 있는 게 없어.
금방 익숙해지거든. 글자도 잘 알고, 글도 잘 새겨지고, 그런데 몇 달 안 해 버려봐. 금방 멀어져 버려.
다 잊어버리고 이거 언제 내가 배웠던가 싶은 정도로 그렇게 된다구요. 그러니까 계속 하는 수밖에 없어요.
복도 계속 지어야 되고, 지혜도 계속 갈고 닦아야 되고, 이 저 학문도 계속 해야 되고. 계속 해 놓으면은 그러니까 내가 다음 생에 부모 속 안썩힐라거든 꼭 죽는 순간까지 자꾸 글공부하라고 경전 공부 열심히 하라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는 거예요.
괜히 머리 돌대가리로 태어나가지고 부모 속 썩히지 말고 열심히 죽는 순간까지 공부해놔야 뭐예요? 우리 업이라는 게 어떻습니까?
자꾸 갈고 닦아 가지고 맑게 된 그 어떤 정신세계가 그대로 다음 생으로 지속이 돼야 그게 머리 영리한 사람, 머리 영리한 사람은 딴 거 아니예요.
죽는 순간까지 열심히 머리 쓴 사람이야. 그 사람이지 다른 게 아니라고요. 마음자리는 다 똑같애. 그런데 왜 머리가 둔한 사람이 있고 영리한 사람이 있습니까? 그 마음을 그렇게 죽는 순간까지 제대로 쓴 사람이냐 안 쓴 사람이냐 거기에 차이야.
그래 업이라는 것이 자꾸 우리가 갈고 닦음으로 해서 상황이 달라지거든요. 복도 마찬가지요, 머리도, 뭐 지식이라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고 전부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을 깨닫는 일은 또 거기하고 다르다는 이야기 입니다. 그래서 여기 무위실상문.
이건 유위가 아니야. 그러니까 공을 베풀어서 무슨 부처되고 하는 게 아니라는 거죠.
구불시공조만성가? 부처가 되기 위해서 공을 베푸는 것이 언제 이루어지겠는가? 그건 공 베풀어서 부처되는 것이 아니라고요.
공을 베풀면 천상에는 날 수가 있겠지, 천당에는 갈 수 있겠지, 그러나 성불하고는 달라.
천당에 간다고 부유하게 잘 산다고 말하자면은 마음을 깨달았나? 그건 아니거든요.
그래서 여기서 주상보시는(住相布施)는 생천복(生天福)이니 천상에 나는 복이다. 마치 하늘을 향해서 허공에다 대고 화살을 쏘는 거와 같다.
그 화살이 올라가는 세력이 있는 동안은 올라가지만은 그것이 끝나면은 화살은 도로 떨어지게 돼 있다.
내생에까지 가는 데에, 내생을 불러오는 데 있어서 여의치가 못하다. 그러니 무위실상문, 이 마음자리, 마음공부, 여기에 대해서 한 번 제대로만 맞아 떨어졌다 하면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야.
한 번 뛰어서 여래의 지위에 껑충 뛰어 올라 가니까 그거하고 어떻게 비교가 되겠는가.
쟁사(爭似) 어찌 같으리요, 다툴 쟁이지만은 어찌라고 그렇게 새겨요. 그거하고 어찌 같으리요.
이런 도리가 있는 거예요. 불법의 다른 점은 다른 어떤 종교하고 불교하고 다른 점은 바로 이겁니다.
‘무위의 세계, 어떤 실상의 세계가 있다’ 라고 하는 거죠.
그거는 모든 사람들이 다 갖추고 있는 본래심을 깨닫는 그런 일입니다.
그래서 그런 이치가 우리가 있으니까 그러니까 양쪽으로 다 닦아야죠. 석가모니 같은 이들은 양쪽으로 다 한 분입니다.
마음도 깨달았고, 복도 유루복을 많이 지었어요.
유루복을 많이 지어가지고 왕자로 태어났고, 머리도 총명하고 얼굴도 잘 생겼고, 여러가지가 제대로 갖췄죠.
그런 눈에 보이고요, 어떤 현상적으로 요렇게 계산이 되는 것은 전부 그게 유위복입니다.
석가모니라고 해서 다음 생에 그게 꼭 보장이 되는 게 아니예요.
물론 뭐 법문도 많이 해줬지만은 그래도 금생에 많이 얻어먹었기 때문에 아마 또 빚졌을 거예요 그분도, 틀림없어요.
또 정신적으로 은혜 베푼 것도 물론 커요, 크긴 크지만 큰 건 큰 것 대로 있고, 은혜 베푼 건 베푼 것 대로 있고, 자기가 지은 빚은 빚대로 있는 거죠.
그게 이제 서로 갚을 수 있는 것은 갚아지지만 또 갚아지지 않는 것은 또 갚아지지 않는 대로 있다구요.
그래서 정업난면(定業難免)이라. 결정된 업은 면하지 못한다.
이 유위세상으로 돌아오면은 아주 복잡해, 일이 복잡하다고요.
그래서 부처님도 뭐 과거생에 말이지.
외도들, 인행시에 외도들만 왕궁에 말이지 잔뜩 초청 받아가가지고 대접을 잘 받거든요. 대접을 잘 받는데 자기는 제대로 수행을 하는 데도 불구하고 어떻게 잘못 보였는가, 안 알아주는가 초청을 못 받았다고요.
그래서 신경질 나가지고 ‘에이 말이 먹는 말이지 여물이나 잔뜩 줘라’ 이런 식으로 비난하는 소리를 한마디 그렇게 질투하는 소리를 그렇게 했다고요.
그 한마디 그 과보로 오백 명 제자를 데리고 한 철 동안 말여물을 먹었잖아요. 말이 먹는 그 보리를 먹은 거예요. 말여물을 그대로 먹었다고 그 한마디 잘 못해가지고.
그거 보십시오.
유위법이라는 건 복잡해져. 일이, 일이 아주 복잡해져.
그래도 죽을 때도 등창이 나서 죽었느니, 이런 교훈들이 뭐 죽을 나이가 되어서 죽었지. 그렇지만은 죽게 되는 그 계기가 뭐냐? 등창이 나서 죽었다. 뭐 이래가지고 그것도 전부 자기가 지은 인연하고 업하고 연관을 시키거든.
이 유위라고 하는 거는 꼭 그렇게 돌아간다고요.
그러니 그런 것 시시비비 따지고 관심 쓰지 말고 무위실상문에 있어서 일초직입여래지 하는 거 여기에 우리가 마음을 쓰자.
그거 좀 잘 먹으면 뭣하고, 못 먹으면 뭣하냐? 좀 잘나고 못나고 뭐 그거 복이 좀 있고 없고 거기에 너무 그렇게, 그거 계속 변화하는 거예요 좀 살다가도 못 살 수 있고, 못 살다가도 잘 살 수 있고 무슨 유행가 가사처럼 늘 그렇게 변화가 많잖아요. 그게 이 세상만사라고요. 그게 유위법이라. 유위법은 그래 돼 있어요.
그리고 뭐든지 한결 같은 건 없어요. 유위법이라고 하는 것은 절대 한결같지가 않습니다.
그러니까 그러나 저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데는 이 유위법, 현실이 그대로 제일 관심의 대상이라구요.
그러면 현실을 우리가 제대로 좀 내 한 생을 살아가는 동안이라도 그래도 모양새를 제대로 잘 갖춰서 살려면은 어떻게 사느냐? 인과의 법칙대로 살아야 돼. 인과의 법칙대로.
그러니까 계속 복을 짓고 또 계속 또 필요한 만치 까먹어 가면서 또 짓고 지으면서 까먹고, 까먹어 가면서 짓고 이걸 할 줄 알아야 된다고요.
좀 어느 정도 복이 있다 하고 잊어버리고 말이지 전혀 복 지을 줄 모르면은 그런 곤란해요. 그러면 나중에 정말 깡통 차는 도리가 생긴다고요. 아무리 있는 사람이라도.
우리는 관음기도를 많이 하는데 관세음보살의 그 보문품 가운 데 내용들이 대개 그런 것 아닙니까?
관세음보살을 부르면은 뭐 별별 문제를 다 해결한다. 관세음보살의 인격을 배운다는 거예요.
관세음보살의 인격을 배운다는 게 뭡니까?
그 말 속에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하는 그 속에 관세음보살이 알고 있는 자비와 지혜의 그 가르침이 다 그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거예요. 그걸 통해서 관세음보살의 인격이 됐거든.
그럼 우리가 관세음보살 할 때 관세음보살의 모든 인격, 모든 그 지혜와 자비가 그 한마디 속에 다, 내가 교훈으로 받아들이고 그걸 본받겠다 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그랬을 때 모든 문제 해결이야.
온갖 불행이라든지 온갖 어려움이라든지 그런 것이 다 해결되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관세음보살 좋아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현실 문제 잘 타결하는데는 관세음보살 다음생에 문제 해결하는데 누구지? 지장보살 딱 그래 돼 있잖아요 하하.
첫댓글 自從頓悟了無生으로 於諸榮辱何憂喜아...다행히 불법을 만나서 생사가 없는 도리를 깨달았으니 모든 영광과 오욕에 무슨 근심이 있고 무슨 기쁨이 있겠는가. (생사가 없는 그 참 생명의 자리를 깨닫고 나면은 생사가 있는, 또 생사가 있음으로 해서 영광과 오욕이 있는, 기쁨과 슬픔이 있는, 이런 모든 것들에 대해서 무엇을 근심하고 무엇을 기뻐하랴)...꽃물들다님! 수고하셨습니다.._()()()_
於諸榮辱何優喜 _()()()_
무위실상문(無爲實相門)으로,,,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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爭似無爲實相門에 (쟁사무위실상문) : 어찌 아무런 작위가 없는 실상의 도리에서 一超直入如來地리요 (일초직입여래지) : 여래지에 들어가는 것과 같겠는가
.....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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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위복은 수행자에게는 삼생의 원수이다. 무위의 세계, 어떤 실상의 세계가 있다. 住相布施生天福 爭似直入如來地 수리수리마하수리수수리사바하 수리수리마하수리수수리사바하 수리수리마하수리수수리사바하...
주상보시(住相布施)는 생천복(生天福)이니 유여양전사허공(猶如仰箭射虛空)이라.ㅡ상에 집착하여 베푸는 일을 하는 것은 천상에 태어나는 복은 되지만 마치 하늘을 향해 화살을 쏘는 것과 같다._()()()_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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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_何憂喜 어찌 기쁨과 슬품이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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