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세 연속기획) 일본의 동남아시아 침략사.
"일본의 아시아 침략"은 "태평양 전쟁"과 "대동아전쟁"을 포함하는 거대한 지역 전쟁을 동반했고, 전체적으로는 유럽에서의 전쟁과 더불어 "제2차 세계대전"의 양대 국면 중 한 축을 구성했다. 또한 그 범위도 식민지였던 한국의 인적 자원 징용과 수탈 등을 포함하여, 중국과 벌인 "중일전쟁", 인도차이나 각국의 침공, 도서부 동남아시아 각국 및 오세아니아 지역에의 침공, 그리고 미국에 대한 진주만 공격 등 광범위한 양상을 보여주었다.
일본의 각국 침략은 그 당시는 물론이고, 지역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후의 역사에도 영향을 미쳤다. "크메르의 세계"는 이러한 일본의 침략사에 대해 온라인 상에서 대중적으로 이용할만한 상세한 자료가 많지 않다는 점을 고려하여, 일본의 침략과 관련하여 인도차이나를 포함하는 동남아시아 지역으로 범위를 국한시킨 연속 시리즈물을 공개키로 한다.
이 부분의 원서는 "위키피디아 영문판"으로서, "크메르의 세계"가 한국어로 번역한 것이다. |
연속기획 : 일본의 동남아시아 침략사 제2편
일본의 태국 침공
Japanese invasion of Thailand
일본은 1941년 12월 8일 태국을 침략했다. 이것은 태국과 일본제국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었다. 태국 남부지방에서 교전이 벌어졌지만, 태국의 저항은 불과 몇 시간 동안만 지속됐고, 이후 곧 휴전이 성립했다.
1. 배 경
일본은 말라야(Malaya)와 버어마를 침략하기 위해, 태국의 항구와 철도, 그리고 비행장들을 필요로 했다. 하지만 태국인들은 단 한번도 외국의 식민지가 된 적이 없었다는 데 대해 열렬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고, 비시 프랑스(Vichy France) 정권의 통제하에 있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와 "프랑스-태국 전쟁"(French-Thai War)을 치뤄 프랑스를 타격한지 막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어서, 이들은 독립국의 지위를 유지키로 결정했다. "태국군"은 무시하기엔 만만치 않은 전력을 갖고 있었고, 군인들도 확고한 임전태세를 갖고 있었다. 따라서 일본군이 많은 사상자의 발생을 피하려면, 태국 남부지방의 해안들에 저항없이 신속하게 상륙하는 것이 중요했다.(주1)
이를 위해, 일본군은 태국 정부와 비밀리에 협상을 가졌다. 당시 유럽의 전선에서는 추축국들이 승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태국의 독재자 빽 피분송캄(Plaek Pibulsonggram) 원수는 1940년 10월에, 만일 일본이 말라야를 침공한다면 지원을 하겠다는 구두약속을 비밀리에 했다. 대신 그의 비밀 동맹국인 일본은 1909년에 영국에 귀속됐던 말라야와 더불어, 버어마의 샨족 국가까지 태국에 할양하기로 보장했다.(주2) |
일본의 태국 침공 |
"제2차 세계대전"의 한 부분임. |
(지도) 1941년 12월 8일, 일본의 태국 침공도 |
일시 |
1941-12-8 |
장소 |
태국 |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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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휴전협정 체결
- 일본의 태국 점령
- 태국-일본 동맹 결성
- 태국이 연합국들에 대해 선전포고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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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 당사국 |
태국과 프랑스 |
일본 제국 |
지휘관 및 지도자 |
빽 피분송캄 원수 |
Shojiro Iida
(飯田祥二郎) Tomoyuki Yamashita
(山下奉文) |
병력 규모 |
5개 사단 |
2개 군 | |
하지만 피분송캄은 상황이 변화한다면 이 약속을 지키지 않을 작정이었고, 1941년에는 영국과 미국에 대해 만일 일본이 침략해올 경우 효과적인 지원을 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비록 영국의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 총리가 일본에 대해 태국을 침공한다면 선전포고를 하게 될 것이라 공개적으로 경고하긴 했지만, 영국과 미국이 도와줄 수는 없었다.
"일본군이 귀국(태국)을 침공할 가능성이 임박했습니다. 만일 공격을 받는다면 방어를 하십시요. 태국의 독립과 주권의 보존은 영국의 이익이기도 합니다. 영국은 태국이 공격받는 일을 곧 우리가 공격받는 것으로 간주할 것입니다." --- 이것은 처칠 총리가 피분송캄 원수에게 보낸 메세지이다. 하지만 태국은 일본과 휴전협정을 맺음으로써 이 입장을 매우 신속하게 무시했다.(주3) |
이러한 상황은 태국 영토 통과권 확보가 쉽지않을 것이라 보임으로써, 일본의 작전 입안자들로 하여금 망설이게 만들었다. 태국의 영토 통과권은 일본군의 작전 전체가 의존해야 할 중요한 요소였다. 하지만 일본군의 테라우치 히사아치(Hisaichi Terauchi, 寺内寿一) 대장은 태국의 허가가 있든 없든 병력을 태국 영토에 상륙시키기로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2.1. 1941년 12월 8일 이전의 시기
"왕립 태국육군"(Royal Thai Army)은 태국 남부지방에서 부대들을 새롭게 창설했다.(주4)
춤폰 Chumphon
- 제38 보병대대 : 춤폰 시내의 왕마이(Wang Mai) 면, 반 나니안(Ban Na Nian)에 주둔.
나콘 시 탐마랏 (Nakhon Si Thammarat)
- 제39 보병대대 : 나콘 시탐마랏 시내의 빡푼(Pak Phoon) 면에 주둔.
- 제15 포병대대 : 나콘 시탐마랏 시내의 빡푼(Pak Phoon) 면에 주둔.
- 제6 사단 사령부 : 나콘 시탐마랏 시내의 빡푼(Pak Phoon) 면에 주둔.
땅 Trang
송카 Songkla
- 제5 보병대대 : 핫야이(Hat Yai) 군, 카오코홍(Khao Kho Hong) 면에 주둔. 방콕 인근인 논타부리(Nonthaburi) 도의 방스(Bang Sue) 군에 있던 이 부대는, 군사훈련에 따라 1940년 2월 18일 그 첫번째 부대가 핫야이(Hat Yai)로 이동했다.
- 제41 보병대대 : 송카 시, 카오룹창(Khao Roob Chang) 면, 수완 뚠(Suan Tun) 리에 주둔.
- 제13 포병대대 : 송카 시, 카오룹창(Khao Roob Chang) 면, 수완 뚠(Suan Tun) 리에 주둔.
빳따니 Pattani
- 제42 보병대대 : 넝찍(Nong Jik) 군, 버텅(Bo Thong) 면에 주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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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로가기 : 개전 당시의 태국군 병력 규모
○ 바로가기 : 개전 당시의 일본군 병력 규모
2.2. 밧덤벙
1941년 12월 8일 여명을 기해 "일본 제15군"의 선봉인 "제국 수비사단"이 국경을 넘어 태국이 바로 직전에 영유권을 확보한 밧덤벙(Battambang, 바탐방) 도로 쏟아져 들어왔다. 일본군은 아특 테와뎃(Athuek Thewadej) 군의 스와이 던께오(Savay Donkeo) 면을 통해 들어왔다.
일본군은 저항을 받지 않았고, 시소폰(Sisophon)에서부터 당시에 거의 완성단계에 있던 아란냐빠텟(Aranyaprathet, 알란)과 몬콘 보레이(Monkhol Bourei) 사이를 연결하는 철도를 따라 아란냐빠텟 군으로 밀고들어 갔다. 당시 아란냐빠텟은 빠찐부리(Prachinburi) 도에 속해 있었고, 연결 철도도 1942년 4월 11일에야 실질적인 운행이 시작됐다.(주5)(주6)
같은 날 아침, 일본군 "제143 보병연대" 소속 "제1 보병대대"는 춤폰(Chumphon)의 해안으로 상륙했다. 이들은 상륙지역 주변으로 교두보를 형성했으나, "태국 청소년 군"(Thai Youth Army)의 단호한 저항을 받으면서 고립됐다. 당시 일본군의 진행을 가로막은 것은 "시야파이 학원"(Sriyaphai School) 소속의 "제52 청소년군 훈련단"으로, 이들이 춤폰 도 경찰들과 함께 태국육군 "제38 보병대대"와 함께 저항을 했다.
이 전투는 태국 병력들이 오후에 들어와 휴전 명령을 하달받음으로써 끝이 났다. 태국 병력에서는 청소년군의 훈련단장이었던 타윈 니욤센(Thawin Niyomsen) 대위와 소수의 도경 경찰관 및 민간인이 사망했다. 타윈 대위는 후에 중령으로 추서됐다.(주7)
2.4. 나콘 시 탐마랏
나콘 시 탐마랏(Nakhon Si Thammarat)에는 태국육군 "제6사단" 사령부와 "제39 보병대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12월 7일 밤에, 일본군 전함 3척은 해안에서 불과 수 km 떨어진 곳에서 닻을 내리고 있었다. 이 함선들은 "제143 보병연대" 소속 "제3 보병대대" 와 육군항공대 기장을 부착한 부대인 "제32 방공포대대", 그리고 "제18 공정연대" 및 "제6 건설노동중대" 병력들을 태우고 있었다.
일본 전함들은 심야에 "타패 운하"(Tha Phae canal: 일명-빡푼 운하[Pak Phoon Canal])에 병력들을 상륙시켰다. 이곳은 그 지역 태국군의 주요 군사기지인 "캠프 워치라웃"(Camp Vajiravudh)에 바로 인접한 북쪽이었기 때문에, 태국군은 송카(Songkhla, 송클라)에 대한 일본군의 침공보다도 훨씬 빨리 이같은 사실을 인지하고, 곧 대응행동에 돌입했다. 교전은 한낮까지도 이어졌고, 빽 피분송캄 총리가 태국군에게 발포중지를 명령하면서 중단됐다.(주8)
2.5. 빳따니
빳따니(Pattani)는 말라야(Malaya) 국경과 바로 인접해 있었기 때문에, 일본군 "제25군"에게 있어서는 2번째로 중요한 전략적 목표였다. 거친 파고와 상륙지점이 적절한 것은 아니었지만, 상륙은 강행되었다. 태국군 "제42 보병대대", 빳따니 도 경찰, "태국 청소년군"(벤짜마 라추팃 학원[Benjama Rachoothit School] 소속의 제66 학생훈련단)이 이 침공에 대해 효과적으로 저항했다. 하지만 정오 무렵이 되면서 휴전명령이 내려지면서 전투는 중단됐다. 이 교전에서 태국군 대대장이던 쿤 인카윳버리한(Khun Inkhayutboriharn)을 비롯한 24명의 병력이 사망했고, 도 경찰 5명, 청소년군 소속 학생 4명, 민간인 9명이 사망했다.(주9)
2.6. 빠쭈웝키리칸
빠쭈웝키리칸(Prachuap Khiri Khan) 도에는 빠왓 춤사이(Pravat Chumsai) 중령이 지휘하는 "왕립 태국공군"(RTAF)의 "제5 비행단"이 주둔하고 있었다. 일본군 "제143 보병연대" 예하 "제2 보병대대"는 새벽 3시에 상륙했고, 지역 경찰의 저항을 제압하고 읍내를 장악했다.
이후 추가적인 상륙작전이 비행장 남쪽에서 전개됐다. 일본군 기습부대는 비행장을 포위했지만, 도 경찰들의 지원을 받은 태국 공군 병력은 정부로부터 휴전명령을 하달받는 정오까지도 비행장을 사수했다. 일본군의 집계는 일본군 115명이 전사했다고 기록했고, 태국 측 기록에 따르면 217명이 전사하고 300명 이상이 부상을 입었다. 태국군은 18명이 전사하고 27명이 부상했다.(주10)
2.7. 사뭇빠깐
일본군의 "제국 수비연대" 예하 "제3대대"는 12월8일 이른 시각에 사뭇빠깐(Samut Prakan)에 상륙했다. 이 부대는 방콕을 점령할 임무를 띠고 있었다. 일본군은 소규모 경찰 병력과 상당한 긴장 속에 대치했지만, 교전은 벌이지 않았다. 일본군은 협상이 끝날 때까지 방콕에 입성하지 않고 기다린다는 데 동의했다.(주11)
2.8. 송 카
야마시타 토모유키(山下奉文) 장군이 이끌던 일본군 "제25군"에게 있어서, 송카(Songkhla)는 주요한 목표 중 하나였다. 일본군은 12월8일 이른 시각에 상륙했다.
카오 콘헝(Khao Khor Hong)에 주둔지를 두고 있던 태국군 "제41 보병대대"와 "제13 포병대대"는 즉시로 말라야로 내려가는 도로를 따라 위치를 잡아나갔다. 하지만 일본군 주력은 이들의 진지를 무시하고 옆으로 비켜서 지나가버려, 이러한 배치는 무용지물인 셈이었다.
이후 핫야이(Hat Yai)에서 추가적인 교전이 발생했다. 태국군 "제41 보병대대" 병력 8명과 "제13 포병대대" 병력 7명이 전사하고, 30-55명이 부상했다. 이후 휴전명령이 하달되어 정오 경에 전투는 중지됐다.(주12)
2.9. 수랏타니
일본군 "제143 보병대대" 예하 "제1 대대" 소속의 1개 중대 병력이 12월18일 이른 시각에 해안가 마을인 반던(Ban Don)에 상륙하여, 수랏타니(Surat Thani) 읍내로 행군하여 들어갔다. 그들은 이곳에서 태국 경찰 및 민간인 자원자들로 구성된 병력의 저항을 받았다. 그들은 폭풍우 속에서 산발적인 교전을 벌였고, 오후가 되어 압박을 견디다 못한 태국 병력들이 무기를 내려놓으란 명령을 수용하면서 전투는 중지됐다. 이곳의 태국인들은 17-18명이 사망했고, 부상자 수는 집계되지 않았다.(주13)
2.10. 방 콕
태국 경찰이 방콕 주재 일본인들을 체포해나가는 가운데, 태국 내각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를 놓고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주14) 일부 인사들은 망명정부를 꾸릴지라도 끝까지 저항하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빽 피분송캄 총리는 이러한 의견들을 누그러뜨린 후, 일본의 요구에 굴복하기로 결정했다.
(주14) E. Bruce Reynolds. (1994) Thailand and Japan's Southern Advance 1940-1945. St. Martin's Press. |
3. 이후의 여파
빽 피분송캄이 일본과 휴전하겠다는 신호를 보낸 결정은 영국의 처칠 수상이 태국과 동맹을 맺겠다고 한 제안을 효과적으로 차단시킨 셈이 되었다. 피분송캄 원수는 일본군에게 태국 영토를 말라야 침공을 위한 군사기지로 사용할 수 있도록 허가했다.
휴전협정이 발효되고 몇 시간이 지나자, 인도차이나 반도에 주둔 중이던 일본군의 전투비행단들이 송카 비행장으로 이동해왔다. 이로써 일본군은 말라야 및 싱가포르에 있던 주요한 전략적 목표물들을 가까운 거리에서 공습할 수 있게 되었다.
휴전의 시점부터, 미국과 영국은 태국을 일본의 점령지로 간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태국의 진정한 의도가 파악된 후에는 그러한 입장이 약간 변화했다.(주2)
피분송캄은 12월14일 일본과 비밀협정을 체결하고, 태국군을 버어마 작전에 투입키로 결정했다. 태국과 일본은 12월21일에 공식적으로 동맹을 맺었다.
1942년 1월 25일, 태국 정부는 미국과 영국에 대해 선전포고를 했다. 이에 대한 반응으로 미국 정부는 미국 내에 있던 모든 태국 자산을 동결했다. 주 영국 태국대사는 영국 정부에 선전포고 결정을 공식 통보했지만, 워싱턴 주재 태국대사였던 세니 빠못(Seni Pramoj)은 본국의 명령을 거부하면서 "세리 타이"(Free Thai: 자유 태국) 운동을 조직했다.(주2)(주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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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태국이 미국과 영국에게 선전포고까지 했다는 내용은 놀랍네요.
당시에 독재자 피분송캄 원수가
이리저리 좀 재다가
일본이 승리할 것이란 데 베팅을 했던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