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장수중 교장선생님인 김인봉샘을 좋아합니다. 김인봉 샘을 직접 대면한지는 오래지 않습니다만 첫 대면에서 저는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첫 대면의 자리가 운명적으로 좋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장수군 농민회 단합대회 였습니다.
농민회 단합대회에 중학교 현직 교장선생님이 참석했다는 것은 의외이고 놀랄 일입니다. 시골 중학교 대부분의 학부모가 농민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놀랄 일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농민과 노동자는 저주받은 직업인양 온 세상이 엉터리로 돌아가는 세태에서는 시골 중학교 교장선생님이 농민회 모임에 참석 한 것은 깜짝 놀랄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난 3월이었습니다.
방화동 가족 휴양림에서 농민회 모임이 있었습니다. 저랑 수인사를 나눈 분들 중에 현직 중학교 교장인 김인봉선생님이라는 분을 소개 받고는 대뜸 김두봉 선생을 떠 올렸습니다. 일제하 의열단에서 활약하신 김두봉 선생은 일제하 전설적인 조직운동가 이재유와 함께 제가 제일 존경하는 분이었습니다.
김인봉샘은 김두봉 선생을 닮았습니다. 첫 만남에서부터 좋아하게 된 이유입니다.
다른 사유가 두 가지 더 있습니다만 생략하겠습니다.
아닙니다. 말 해야겠습니다. 김인봉샘은 장수중학교 학부모님들을 충돌질(?)하여 저를 불러 이야기를 하게 했습니다.
지난 5월입니다. 제 책 <똥꽃>이 출간되고 나서입니다. 효와 섬김의 삶에 대해 이야기 하는 기회가 제게 주어졌습니다. 고리타분한 고전적 효가 아니라 섬김과 모심의 명상적 화두를 김인봉샘은 알아 차린 것입니다. <똥꽃>이 출간되고 첫 외부 강연이었으며 그 후로 대학과 지자체, 시민단체와 노인요양보호사 양성소로 강의요청이 쇄도했습니다.
세번째 이유가 되겠습니다. 장수군 귀농인연대 결성식에서 김인봉 샘을 만났습니다. 마을마다 유령이라도 나올듯한 빈 집이 늘어만 가는데 김인봉 샘은 귀농/귀향/귀촌하는 움직임에 주목하신 것입니다. 장수군귀농인연대 발족식에 오셔서 축사를 해 주셨습니다.
저는 김인봉 샘을 결정적으로 좋아하게 하는 사건이 생겼습니다.
이번 일제고사 사건입니다.
결코 한 두 마디 입바른 언설로 고맙다, 대단하다, 존경한다는고 할 수 만은 없는 일입니다. 일제고사의 반 학육적('교육'이라는 말은 매우 일방적이고 권위적입니다. 배우며 기른다는 뜻의 '학육'이 좋은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의미는 두 말 할 필요가 없습니다.
현직 교장선생님이 일제고사를 거부하는 결단을 한다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과도 같이 힘든 일입니다. 전라북도 교육청에서 이번 23일의 일제고사에는 각 학교에서 자율적으로 판단하여 실시 여부를 결정하라고 공문까지 내려 보냈지만 장수중학교 외에는 단 한군데도 일반중학교에서 일제고사를 안 보기로 결정 한 곳이 없는 것을 보더라도 알 수 있습니다.
교장이라는 직함이 주는 기득권의식과 권위는 자신의 신분 훼손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김인봉 샘은 그것을 돌파 한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해고와 구속을 당한적이 있습니다.
그때마다 제 선택에 의해 이를 면할 수 있음에도 해고와 구속의 독배를 받아 들인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겪었습니다. 자신의 선택에 의해 고난의 가시밭길을 가지 않아도 됨에도 불구하고 학육적 양심의 소리에 귀를 막기보다 하늘의 소리, 양심의 소리에 자신의 미래를 내 거신 김인봉샘을 좋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존경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전화를 드렸습니다.
김인봉 샘은 웃었습니다. 십자가를 자청해서 지셨다고 위로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짐을 나눠지고 싶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현실적으로 무엇이 김인봉 선생님의 무거운 짐을 나눠 질 수 있는 것인지 잘 보이지 않습니다.
한 사람의 어깨에 짊어지워지는 우리나라 학육의 문제, 학육당국의 문제, 이명박 정부의 문제를 외면 할 수가 없습니다.
김인봉 선생님이 겪는 징계의 위협, 전라북도, 대한민국 학육당국의 비이성적 압박에 제가 눈을 감으면 저 자신이 폭력과 불합리에 감염될거라는 두려움이 있기에 결코 침묵 할 수 없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하려고 합니다.
김인봉 선생님 개인을 위함이 아니라 이 땅의 의로움을 위해 스스로 핍박받는 이들에게 작은 격려가 되기 위함입니다. 그럼으로 해서 저 자신이 타락하고 불의와 타협하는 것을 막아내기 위함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