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권 출신과 경찰청장 출신과의 첫 인연 >
한 남자가 태어나서 아버지가 아닌 다른 한 남자를 존경하면서 평생을 살아간다는 것이 요즘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 할지 모르지만 내게 있어서는 참으로 행복하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나도 그분에게 큰 실수를 하지 말아야 하며 그분 또한 내가 생각하는 기준에 어긋나지 않게 평생을 살아가야 그분과 나와의 둘 관계는 평생을 유지 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런 존재가 나에게는 있다는 게 이보다 얼마나 더 행복한 일인가 싶다.
그분과 나와의 첫 만남은 1981년인지 1982년인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당시를 기억하는 친구들 말로는 그 당시 그분은 서른한 살 애기 서장이 되어 홍성에 부임해 왔다고 한다, 그리고 내가 당시 홍성고등학교 2학년 때인지 3학년 때인지 모르지만 우리학교에서 특강을 했다고 한다, 사실 이런 기억이 난 없다, 고등학교 땐 범생이과에 속한 나로서는 전교생을 상대로 한 특강에 빠졌을 것 같지는 않다.
아마도 그때 처음 먼리서나마 그분의 얼굴을 봤음직 하지만 솔직히 기억은 없다. 내가 기억력이 좋았다면 이때가 그분과의 첫 인연이 될 수도 있었는데 말이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시골촌놈이 대학에 들어가서 보니 당시 80년대 초반에는 사회적 혼란이 극심했다, 5.18 광주 민주화 항쟁에 전두환 대통령의 독재 등등 값비싼 수업료를 내고 입학 했지만 실상 수업은 거의 받아본 기억 또한 나지 않는다, 매일같이 최루탄 연기 속에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나는 자연스럽게 학생운동권이 되어 가고 있었다.
1986년 초 나는 전국 수배가 되고 얼마 있지 않아 경찰서 유치장을 거쳐 청주교도소에 수감이 됐다. 당시 나와 한날 같이 구속된 사람은 노무현 정권 시절 행자부 장관을 지낸 김두관이었다, 그리고 한날 같이 석방되다 보니 남다른 인연이 있었다. 이후 나는 방위로 입대해 고향 홍성에서 근무 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경찰들이 내가 근무하는 기동대로 찾아와 다짜고짜로 내손에 수갑을 채웠다.
지금이야 승용차가 있어 곧바로 차에 타면 됐지만 당시는 경찰들이 승용차가 없었던지 수갑 찬 나를 홍성 버스터미널까지 끌고 갔다, 큰 잘못이야 없었지만 수갑을 차고 버스터미널까지 가면서 내가 생각한 것은 혹시나 우리 부모님은 차치 하더라도 나를 알아보는 사람들 중 누군가 보지나 않을까 심히 걱정이 되었었다. 이런 나로서는 솔직히 경찰에 대한 인상이 좋을 리 만무했다.
이후 난 홍성 YMCA에서 첫 직장 생활을 시작 했다, 당시 홍성 농민회는 전국에서 알아주는 농민회였고 일정정도 농민회 활동도 겸하면서 전교조가 첫 싹을 틔울 때 홍성 전교조의 태동은 사실 홍성 YMCA에서 태동 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1년쯤 지나자 전국에서 최초로 지역신문이 창간된 곳 또한 홍성이었다. 당시 홍성에서 사회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나 보고 홍성신문에 가서 활동 하라는 권유가 있어 본격적인 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아마도 1989년 말인지 1990년 초인 것으로 기억이 된다.
기자로서 홍성에서 활동하기 시작하고 1992년인지 93년인지 가물가물 하지만 홍성 사회 다방에서 한 가지 화제가 된 일은 이완구라는 사람이 전국 최연소 경무관으로 승진했다고들 수군수군들 거렸다.
‘이완구가 대체 누구야, 그리고 경무관이 뭐 그리 대단한 것인가 ?’ 이런 생각을 하면서 난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다 또 경찰 계급에 대해 알려고도 하지 않았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어쩌면 경찰과 안 좋은 옛 기억들로 인해 그런지도 모른다.
이러고 하루 이틀이 지났을까 우연히 사무실 책상에 나뒹구는 ‘주간조선’ 잡지가 눈에 들어와 이것저것 뒤적이던 중에 다방에서 들은 이완구라는 이름 석 자가 눈에 들어왔다. 약간의 호기심이 발동해서 그런지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지금 기억으로는 서른아홉에 경무관에 승진한 대단한 인물이라는 기억이다. “아 ! 이 사람이 홍성 출신이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누군가 ‘어 이기자 그 사람 한번 인터뷰 해봐’ 하지 않는가 ? ‘글쎄 이런 대단한 사람이 인터뷰에 응할까’라고 대답하고 있다가 ‘그래 밑져야 본전이지 한번 연락이나 해보자’하고 114로 난생 처음 경찰청 전화번호를 찾았다.
처음 수화기를 들고 떨리는 목소리로 이완구 경무관하고 통호 할 수 있냐고 하니 순순히 연결해주는데 연결시간이 불과 10초에서 20초쯤 될까 하는데 굉장히 떨리기 시작했다. 연결되자 나는 간단히 나를 소개하고 인터뷰 하자고 하자 그분은 ‘인터뷰 할 만큼 그런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면서 정중히 거절하지 않는가’ 이것이 나와 그분의 첫 대화였다.
한번 꼭 인터뷰 하고 싶은 오기가 발동했다, 다음날 다시 전화를 걸어 고향 어른 신들이 많이 궁금해 하니 반드시 인터뷰를 해야 한다고 강짜를 쓰자 마지못해 그럼 언제 올라올 수 있냐는 말에 약간의 희열을 느끼면서 내일 올라가겠다고 하자 지금이야 없어 졌지만 ‘서울역 시계탑 앞까지 오후 3시까지 올라오라는 것이다’
다음날 오후 3시 시계탑에서 어슬렁거리는데 누군가 다가오더니 ‘혹시 누구 아니시냐’고 한다, 그렇다고 하자 이완구 치안본부장 보좌관께서 (지금은 경찰청장이지만 당시는 치안본부장이었음) 모셔오라고 했다면서 자동차에 타라고 한다, 자동차를 타고 난생 처음 경찰청을 들어가는데 정문에서 경비를 서고 있는 사람들이 자동차를 보자마자 일제히 거수경례를 하지 않는가 ? ‘아 ! 높긴 높은 사람인가 보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수갑 차고 경찰서를 들어갔던 생각이 나자 만감이 교차하기 시작 했다.
한 시간쯤 인터뷰가 끝이나 자 20여분쯤은 개인적인 대화가 이어졌다. 이때 그분이 내게 한 말은 평생 잊을 수가 없다, 어쩌면 이때의 그분과의 대화로 인해 그분을 평생 존경하며 살기 시작 했는지도 모른다.
당시 그분과 20여 분간 진지하게 말씀하신 요지는 이렇다 ‘지금이야 남북이 분단돼 있지만 언젠가 하루빨리 통일이 돼야 하지 않겠는가, 통일을 위해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도 젊지만 당신도 젊으니 통일을 위해 차근차근 무언가를 준비하며 살아가자’는 것이었다.
경찰청을 걸어 나오면서 뒤통수를 세게 맞은 것 같은 기분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경찰하면 늘 적대적 관계로 생각하며 살아온 내가 그날따라 얼굴이 화끈거리며 부끄럽다는 생각을 했다. 돌멩이를 던지고 화염병을 던지며 민주화 운동을 한다고 했는데 사실 그때까지 통일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미래의 통일을 걱정하며 준비하라는 그분의 한 말씀은 아직도 잊지 않고 있지만 사실 내 아들 이름을 통일이라 지은 것 밖에는 통일을 걱정하며 준비한 것이 솔직히 별로 없다는 게 늘 살아가면서 죄송하고 부끄럽기도 하다.
이후 그분은 충북지방경찰청장과 경찰청 기획 관리관 충남경찰청장을 하는 사이 인터뷰를 하며 기자와 출세한 출향인으로 몇 번 만났던 기억이다. 1995년 3월초 그분은 충남경찰청장직을 끝으로 공직에서 물러나고 국회의원에 출마하기 위해 홍성에 사무실을 마련하고 열흘쯤 지났을까 나를 만나고 싶다는 연락이 왔다.
‘왜 나를 만나자고 할까 ? 만나보면 알겠지’ 하고 사무실을 찾았을 난 깜짝 놀랄 제안을 받았다.
‘이기자 우리 같이 한번 일 해볼 의향은 없는가 난 같이 했으면 좋겠는데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지....’ 하는 게 아닌가 ? 이에 난 이렇게 되물은 기억이 있다 '저는 학생운동권 출신인데 그래도 괜찮겠습니까'하자 '출신이 뭐 그리 중요한가 뜻이 맞으면 같이 하는것 아닌가...'라는 답변을 들었다.
나는 당시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하고 일주일만 시간을 달라고 했다 그때 가부간의 대답을 하겠다면서 그분의 사무실을 나오면서 고민에 빠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분과 몇 번 만나면서 경찰에 대한 거부감이 좀 약해지긴 했지만 가슴속 깊이 자리 잡은 경찰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는 그때까지 지워지지 않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학생운동권 출신과 지방경찰청장 출신과 한배를 타고 살아간다고 생각하자 운동권 선후배들의 비난의 목소리가 사실 가장 두려웠었다, 그리고 홍성신문사 식구들은 나를 두고 또 뭐라 할까 심히 염려되고... 이런 복잡한 근심과 걱정이 뒤엉켜 고민하길 일주일이 다 되어 가는데도 뚜렷한 결론이 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일주일이 지나 그분에게 가부간의 최후 통첩할 시간이 되었을 때 ‘그래 한번 해보자’라는 결심이 서고 그분에게 먼저 뜻을 전달하고 운동권 선배들과 홍성신문사 식구들에게 이 같은 사실을 알리자 모두들 나보고 미친것 아니냐는 반응들이었다.
그때 내가 그분들에게 이 같은 결심을 하게 된 배경을 설명한 요지는 이랬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하는것 아니냐면서 근본적으로 우리가 추구해 왔던 것은 우리 농민과 국민들이 편안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인데 그 방법이 지금과 같은 방법이 있을 수 있지만 나는 이완구라는 인물을 통해 그것을 앞당길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결심하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지만 아무도 그 말을 믿어주지 않았다.
당시 내뜻을 단 한명이 이해하고 그러라고 한 사람은 지금의 홍성신문 윤두영 대표이사로 그분은 당시 ‘당신 뜻을 한번 펼쳐봐라 열심히 하고 만약에 당신 뜻이 틀렸다고 후회할 때는 언제든지 다시 홍성신문으로 돌아와라’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15년이 흐른 지금 난 후회하지 않는다, 그래서 홍성신문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2009년 8월 17일 시골촌놈>
2편은 다음에.....
첫댓글 시골촌놈님과 지사님의 만남도 파란만장 하네요...하지만...마지막 말씀. "15년이 흐른 지금 난 후회하지 않는다. 그래서 홍성신문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 말씀이 가슴에 콕 박힙니다. 토끼도 지사님 만난걸 영원히 후회하지 않고 살아가겠지요...^^
15년을 한결같이 함께하는 시골촌놈 멋졌어요 ^^
편안하고 느슨한 분인줄 알았는데 저돌적이고 끈기있는 분이군요, 성격은 좀 달라야 한다는데 지사님과 호흡이 잘맞네요. 오랜시간 함께함을 변치않기를 ,,,,,,,,,,,,,,,,,,,,,,,,,,,,,,,,,,,,
그동안에 몰랐던 것을 자세하게 아는 지금 이순간, 가슴이 찡함을 느낍니다. 차분함속에서 조용한 분으로 생각을 했는데... 그동안 지사님과 함께하신 15년의 세월만큼이나 앞으로의 시간에도 두근두근 기대가 됩니다. 시골촌놈=진짜 사나이 멋쟁이입니다. 2편을 기대합니다.
동감..세대를 보니까 386이시네요. 당시의 젊은이들은 모두 그런 환경속에 거의 같은 고민을 하면서 컸지요. 용기있는 사람들은 거리로 나섰고 많은 국민들이 호응했던 기억이 납니다. 최루탄가스에 눈비비며 도망다니고....아~~~가끔씩은 옛날의 추억이 떠 오릅니다.
존경하는 분을 곁에 모시고 살아간다는것... 참 멋있는 일이지요. 대한민국 1번으로 우뚝서는 날까지 두분의 환상 호흡을 기대합니다~~~
계속 함께 할것이지요.....함께 하셔야 합니다!
자신의 일을 생각하기에 앞서 지사님의 일을 먼저 생각하고 걱정하는 시골님- 정말 존경합니다.
비서실장님 미안합니다 지난번 무례한점 이해해주시고 한순간 개인의 이익으로 생각한점 죄송합니다 다 읽고나니 마음이 후련하네요 앙금이 없는것으로 생각해도될지요
이글을 쓰시면서 만감이 교차하셨을 시골촌놈님..후회없는 선택을 하셨고, 앞으로도~ 서로를 알아보는 혜안도 탁월..
준비하는 자만이 목표을 달성할수 있다고 했읍니다,,목표가 어딘지 차근차근 준비하다보면 목표가보이겠지요?????
늘 --그대로의 모습 그 자체로 참 좋은사람입니다. 후회없는 오늘, 힘찬 내일로 이끌어 가길 바랍니다.
지사님과 대단한 인연 이시군요.한배를 타셨으니 끝까지 지사님 보필 하셔서 승리의 기쁨을 맛보세요.
한자한자를 눈에서 뗄수가없어 끝까지 읽었네요 꿈이 있어 꿈을 향해서 꿈을 이루기 위해 열정을 보여 주십시요 당신곁엔 우리가 있습니다
" 그리고 15년이 흐른 지금 난 후회하지 않는다, 그래서 홍성신문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 참으로 아름다운 인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