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성忠誠 이라는 메커니즘(mechanism)
인간은 거짓 가치를 만드는 데 대단히 뛰어나다.
이는 인간의 본질적인 속성이다.
《참된 가치는 그대의 전체성全體性을 요구하고 그대의 전 존재存在를 요구한다.》
반면에 거짓 가치는 아주 쉽게 만들 수 있다.
거짓 가치는 진짜처럼 보이지만 그대의 전체성을 요구하지 않는다.
껍데기만 그럴싸할 뿐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사랑이나 신뢰를 대신하여 '충성忠誠' 이라는 거짓 가치를 만들어낸다.
충성스런 사람은 사랑을 피상적으로만 알 뿐이다.
그는 여러가지로 사랑을 표현하지만 그 모두는 공허하다.
그의 가슴은 형식적인 몸짓에만 머문다.
노예는 충성스럽다.
《노예가 된 사람이, 자신의 인간성을 빼앗긴 사람이, 자신의 존엄을 빼앗긴 사람이 주인을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노예는 주인을 미워한다.
기회만 오면 주인을 죽이려고 들 것이다.
그러나 겉으로는 충성을 다한다.
그럴 수밖에 없다.
그의 충성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에서 나온 것이다.
사랑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강요에서 나온 것이다.
이는 개가 주인에게 보이는 충성과 별반 차이가 없다.
「사랑은 보다 전체적인 반응이다.
사랑은 의무감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가슴에서 나오는 것이다.
기쁨의 맥박에서 나오는 것이요, 나누려는 열망에서 나오는 것이다.」
충성은 추하다.
하지만 지난 수천년 동안 인간은 충성을 존귀한 가치로 만들었다.
사회는 여러 방법들을 동원하여 사람들을 노예로 만들었다.
아내는 남편에게 충성을 다해야 했다.
그래서 인도를 비롯 여러 나라에서 무수한 여인들이 남편의 화장용 장작더미 속으로 뛰어들어 순사殉死해야 했다.
인도에서는 순사를 대단한 가치로 여겼기 때문에 남편이 죽었는데도 순사하지 않은 여인은 일생 동안 견디기 힘든 비난을 받으며 살아야 했다.
계급사회에서 추방당한 존재로 살아야 했다.
자신의 가족 내에서도 하녀 취급을 받았다.
남편을 따라 죽지 않았다는 것은 곧 남편에게 충성을 다하지 않았다는 반증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반대로 생각해 보자.
아내의 화장용 장작더미에 뛰어든 남편이 단 한 명이라도 있었는가?
여기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한다.
남편이 아내의 장작더미에 뛰어들지 않은 것은 남편이 아내에게 충성스럽지 못하다는 반증이 아닌가?
그러나 사회는 이중 잣대를 들이댄다.
주인과 지배자에게 들이대는 잣대가 다르고 노예에게 들이대는 잣대가 다른 것이다.
사랑을 하면 그대는 자신보다 큰 사람에게 소유당할지 모른다.
그래서 사랑을 위험한 것이라 생각한다.
사랑은 자기 맘대로 통제할 수 없다.
사랑은 맘대로 만들어낼 수도 없다.
또한 지나간 사랑은 되돌릴 수 없다.
그래서 그대가 할 수 있는 일은 사랑을 가장하는 것뿐이다.
충성은 사랑과 완전히 다르다.
충성은 그대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있다.
통제할 수 있다.
교육이나 수련으로 만들 수 있다.
생활 속에서 충성의 마음을 단련할 수 있다.
충성이란 죽으나 사나, 자신의 가슴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상대에게 모든 걸 바치는 마음을 말한다.
심리학적은 차원에서 보자면 충성은 노예의 길이다.
「사랑은 자유를 낳고 충성은 구속을 낳는다.
겉으로 보면 비슷해 보일지 모르나 속을 들여다보면 사랑과 충성은 정반대다.
충성은 꾸민 행위이다.
스스로 단련하여 얻은 것이다.
그에 반해 사랑은 야성적이다.
사랑의 아름다움은 사실 그 야성에 있다.」
사랑은 미풍과 같다.
사랑은 그대의 가슴을 충만케 한다.
사랑의 미풍은 사막과 같은 곳에 꽃이 만발한 화원을 만든다.
하지만 그대는 미풍이 어디서 불어오는지 모른다.
미풍을 불게 하는 방법도 모른다.
미풍은 절로 왔다가 저절로 간다.
어느 날 손님으로 왔다가, 또 어느 날 갑자기 떠나간다.
미풍을 붙잡아둘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사회는 예측이 가능하지 않은 경험들을 바탕으로 존재할 수 없다.
사회는 변하지 않는 확고한 규범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사회는 삶에서 사랑을 제거하였으며 그 자리를 결혼으로 대치했다.」
결혼은 충성을 요구한다.
남편에 대한 충성을 요구한다.
그러나 충성은 사랑과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충성은 사랑이라는 바다의 물 한 방울도 아니다.
그러나 사회는 언제나 신뢰할 수 있는 결혼제도를 좋아한다.
남편은 아내를 신뢰할 수 있고 내일을 신뢰할 수 있다.
아내가 변함없이 충성을 보여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랑은 신뢰할 수 없는 게 아니다.
「참으로 기이하게도, 사랑이야말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것이지만 사회는 사랑을 신뢰할 수 없는 것으로 여긴다.
사랑은 이 순간에 전체적으로 임한다.
사랑은 완전히 열려 있기 때문에 다음 순간은 어찌 될지 모른다.
계속 그대 안에서 자랄 수도 있고 아니면 날아갈 수도 있다.」
하지만 남편은 평생 노예가 되어 줄 아내를 원한다.
남편은 사랑에 의지해서 살 수 없다.
그래서 사랑과 비슷해 보이는 것을 인위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남녀 관계뿐 아니라 다른 분야에서도 충성을 대단한 가치로 여긴다.
《그러나 충성은 인간의 지성智性을 파괴한다.》
군인은 무조건적으로 국가에 충성해야 한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린 사람을 나무랄 수 없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다했을 뿐이다.
그는 상관의 명령을 받고 이를 수행했을 뿐이다.
군대의 본질은 거기에 있다.
군대의 훈련은 무조건적인 복종을 요구하기 때문에 훈련을 받은 상관의 명령에 절대 복종해야 한다.
옳지 못한 명령에도 "예, 시행하겠습니다." 라고 즉각 대답해야 한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폭탄을 떨어뜨린 사람이 기계였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에게도 그대와 같은 가슴이 있었다.
아내와 자식이 있었고, 어머니와 아버지가 있었다.
그도 그대와 같은 인간이었다.
하지만 그는 아무런 이의 없이 명령에 따르도록 철저한 훈련을 받은 군인이었다.
그래서 폭탄을 투하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명령을 그대로 이행한 것이다.
나는 폭탄을 투하한 군인의 마음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헤아려 보았다.
과연 그는 원자폭탄이 20만명의 인명을 살상한다는 사실을 몰랐을까?
'안돼! 20만의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는 것보다는 차라리 내가 상관의 총에 죽는 게 나아.' 라고 생각할 수는 없었을까?
하지만 그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군대는 충직한 군인을 만들기 위해 철저히 훈련시킨다.
작은 일에서부터 철저히 세뇌시킨다.
우리는 왜 군인들이 수년 동안이나 행진 등 온갖 멍청한 훈련을 해야 하는지 궁금히 여길 때가 있다.
왜 '좌향좌, 우향우, 뒤로돌아, 앞으로 가' 등을 특별한 목적 없이 몇 시간씩 해야 하는가?
거기에는 특별한 목적이 숨어 있다.
군인들의 지성을 무디게 하여 자동화된 기계로, 로봇으로 만드는 게 목적이다.
그래서 '좌향좌' 의 명령이 떨어지면 군인은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이행한다.
하지만 누가 그대에게 "좌로 도시오." 라고 말하면 그대는 "무슨 말이오? 왜 내가 좌로 돌아야 하오? 난 우로 가겠소." 라고 따질 것이다.
그러나 군인은 따지면 안된다.
그냥 명령에 따라야 한다.
이것이 충성을 강요하는 군인의 조건화이다.
군대가 인간이 아니라 기계처럼 움직이며 충성을 다하면 왕이나 장군들에게는 좋다.
반항하는 자식은 문젯거리다.
그래서 자식이 순종하면 부모는 좋아한다.
부모가 틀리고 자식이 맞는 경우에도 부모에게 순종해야 한다.
무조건적인 순종, 이것이 지금까지 모든 부모들이 자식에게 강요한 교육이다.
《나는 충성 대신 지성과 탐구심으로 과감히 '아니오' 라고 말할 수 있는 신인간新人間을 가르친다.》
《'아니오' 라고 말할 수 없다면 그대의 '예' 는 무의미하다.》
그대의 '예'는 녹음기에 녹음된 것과 같다.
그대 쪽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대에게는 '아니오'가 녹음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예'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사람들에게 지성의 길을 가르쳤다면 우리의 삶과 문화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그렇게 많은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들은 이렇게 들고 일어났을 것이다.
"왜 전쟁을 해야 하는가?
왜 무고한 사람들을 잔인하게 죽여야 하는가?"
하지만 백성들은 자기 나라에 충성을 다해야 했기 때문에 정치가들은 이런 백성들을 이용해 서로 싸우고 죽이게 했다.
정치가들이 그토록 싸우는 걸 좋아하면 레슬링 경기를 하거나 축구 경기를 하면 될 터이다.
왕이나 정치가, 수상이나 대통령 자신들은 전쟁터에 나가지 않는다.
상대를 죽여야 할 특별한 이유도 없는 평범한 사람들이 전쟁터에 나가 사람들을 죽이고 스스로 죽어야 했다.
그리고 기계적으로 멍청하게 비친 충성의 대가로 상을 받고 훈장을 받았다.
《충성은 믿음과 의무, 존경 등의 온갖 질병이 뭉쳐진 것이다.》
믿음이나 의무, 존경 등은 에고의 자양분이다.
그대의 영靈적인 성장을 저해하는 장애물이다.
이들은 모두 기득권층만을 위한 것이다.
사제들은 그대가 믿음 체계에 의문을 제기하는 걸 바라지 않는다.
그대가 제기하는 의문을 풀어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믿음 체계들은 거짓투성이여서 제대로 의문을 제기하면 모두 무너져 내린다.》
그래서 사제들은 의문과 의심을 철저히 차단한 가운데, 수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여 거대한 종교 조직을 만든다.
현재 카톨릭 교황은 무수한 신도들을 거느리고 있다.
《그런데 무수한 신도들 중에서 단 한 사람도 "어떻게 처녀가 아이를 낳을 수 있습니까?" 라고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이런 질문은 신성을 모독하는 것이다.
《그런데 무수한 신도들 중에서 단 한 사람도 "예수가 하나님의 독생자라는 증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런 주장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예수가 고통에 빠진 인간을 구원했다는 증거는 어디에 있습니까?" 라고 묻지 않는다.》
교회 내에서 이런 질문을 하는 건 당혹스럽다.
《종교인들의 주장은 모두 증거나 근거가 없는 가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람들은 태어나자마자 자신이 속한 종교에 복종하도록 교육을 받는다.
그렇게 해야 사제들이 그대를 편리하게 착취하고, 정치가들이 사람들을 쉽게 이용하며, 남편이 아내를 쉽게 지배하고, 부모가 지식을 쉽게 지배하고, 선생들이 학생들을 쉽게 지배할 수 있다.
충성과 복종은 순전히 기득권층만을 위한 것이다.
충성 문화 때문에 인류 전체는 저능아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충성 문화는 의문을 허용하지 못한다.
의심도 허용하지 않는다.
지성도 허용하지 않는다.
의심을 하고 의문을 제기할 수 없는 사람은, 틀린 것에 '아니오' 라고 할 수 없는 사람은 인간 이하의 차원으로, 거의 동물의 차원으로 떨어진 사람이다.
요구하는 사랑은 충성으로 변한다.
요구하지 않는 사랑은 자유를 누린다.
요구하지 않는 사랑을 할 때 그대의 의식은 상승한다.
믿음을 강요받을 때 그대는 노예가 된다.
하지만 신뢰가 우러나올 때는 초인적인 무엇이 그대의 가슴 안에서 자라기 시작한다.
둘 사이의 차이는 미세하지만 그 차이는 더없이 중요하다.
요구를 받고 명령을 받는 사랑이나 신뢰는 가짜가 된다.
하지만 사랑과 신뢰가 스스로 우러나오면 더없이 소중한 것이 된다.
그런 사랑과 신뢰는 그대를 노예로 만드는 게 아니라 주인으로 만든다.
우러 나오는 사랑은 바로 그대의 사랑이요, 우러나오는 신뢰는 바로 그대의 신뢰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타인을 타르지 않고 자신의 가슴을 따른다.
타인을 따라야 한다는 강요도 받지 않는다.
그런 자유 속에서 사랑이 배여 나온다.
그런 존엄성 속에서 신뢰가 배어 나온다.
그런 사랑과 신뢰는 그대를 보다 풍요로운 인간으로 만든다.
이것이 내가 바라는 신인간의 상이다.
사람들을 자유롭게 사랑하지만 강요된 사랑은 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신뢰를 하되 자신의 가슴에 따라 신뢰할 것이다.
성전이나 사회구조, 사제, 정치가들에 따라 신뢰하지 않을 것이다.
그대의 가슴에 따라 살고, 맥박에 따라 살고, 완전히 열린 자유 속에서 태양을 가로지르는 독수리와 같이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는 그런 삶은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삶이 아니다.
그런 삶은 기쁨의 삶이다.
명상의 삶이다. 끝.
-친밀- 오쇼 지음/손민규 옮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