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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1월, 가야독서 토론회
허먼 멜빌, 록웰켄트 그림, 황유원 옮김, 『모비 딕』, 문학동네, 2021.
허 모 영
작가소개
허먼 멜빌(1819~1891)
미국 뉴욕 출신의 소설가로, 젊은 시절 선원 생활을 하며 태평양과 남해를 항해한 경험이 그의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습니다. 초기에 발표한 모험소설 『타이피』와 『오무』는 일정한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지만, 『모비 딕』은 당시 독자들에게 지나치게 난해하고 철학적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외면당했습니다.
그의 문체는 성서적 어휘, 셰익스피어적 비극, 그리고 자연과 존재에 대한 형이상학적 질문으로 가득 차 있어, 당대의 문학적 기대를 뛰어넘는 실험이었습니다. 생전에 그는 문학적으로 잊힌 인물이 되었고, 세관원으로 생계를 이어가며 쓸쓸히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러나 1920년대 이후 미국 모더니즘 문학의 흐름 속에서 그의 작품은 재조명되었고, 특히 『모비 딕』은 셰익스피어의 작품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세계 문학사에서 결정적인 위상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멜빌은 근대성과 인간 존재를 탐구한 위대한 문학 탐험가로 평가받습니다.
<책속으로>
1. 첫 문장이 남긴 것
"Call me Ishmael."
이 세 단어로 시작되는 소설은 우리에게 이름 하나를 건넨다. 그러나 이 이름은 진짜 이름인가? 이스마엘—성경 속 쫓겨난 자, 방랑자, 장자권을 잃은 아들, 아브라함이 사라의 요구로 광야에 내보낸 서자. 화자는 첫 문장부터 자신을 하나의 상징으로 제시하며, 동시에 그 상징 뒤로 물러선다. "나를 이스마엘이라 불러라"는 자기 고백인 동시에 자기 은폐다. 그는 자신의 본명을 숨긴 채, 우리에게 역할만을 알려준다—나는 쫓겨난 자, 살아남은 자, 이야기를 전하는 자.
이 첫 문장이 문학사에서 가장 유명한 도입부 중 하나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짧지만 그 안에 작품 전체의 씨앗이 있다. 친밀함("나를 불러라")과 거리두기(가명 사용), 성경적 울림과 일상적 어조의 공존, 그리고 무엇보다—이야기꾼이 먼저 자신을 소개한다는 것. 이 책은 고래에 관한 책이기 전에, 고래에 관해 이야기하는 사람에 관한 책이다.
(*해석에 따라서는 "나를 이스마엘이라 불러라"가 아닌 “내 이름을 이스마엘이라고 해두자”로도 번역(작가정신). 관찰자로서의 입장에서 본다면 나를 ~로 불러라보다는 ~라고 해두자가 맞다고 해석함)
『모비 딕』을 읽은 우리는 무엇을 기억하는가? 흰 고래의 거대한 몸? 에이해브의 불타는 눈? 퀴퀘그의 작살과 문신? 아니면 끝없이 이어지던 고래의 해부학, 밧줄의 종류, 기름 짜는 법? 이 작품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주었지만, 그 모든 것을 하나의 의미로 묶어주지는 않았다. 오히려 흩어진 채로 남겨두었다. 마치 난파선의 잔해처럼, 마치 바다 위에 떠오른 조각들처럼.
오늘 우리의 대화는 그 흩어진 조각들을 각자의 방식으로 모아보는 시간이 될 것이다. 정답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서로 다른 읽기가 만나는 지점을 발견하기 위해서.
2. 항해의 구조: 바다 위에서 무엇이 진행되었는가
출발 이전의 징조들
이스마엘은 왜 바다로 갔는가? 그는 스스로 말한다—우울할 때, 입안이 쓸 때, 장례 행렬을 따라가고 싶은 충동이 들 때, 자신의 권총 대신 바다를 선택한다고. 이 고백은 가볍게 던져지지만, 그 안에는 죽음충동과 삶의 추구가 뒤엉켜 있다. 바다는 이스마엘에게 도피처인 동시에, 어쩌면 죽음을 향한 에둘러 가는 길이기도 하다.
피쿼드호에 오르기 전, 이스마엘은 이미 여러 경고를 만난다. 뉴베드퍼드의 "스파우터 인" 여관에서 퀴퀘그와의 기이한 첫 만남, 포경 예배당에서 본 죽은 선원들의 기념비들—이름과 날짜, 그리고 "바다가 그의 몸을 돌려주지 않았다"는 문구들. 메이플 신부의 설교는 요나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신의 명령을 거부하고 도망친 자의 운명을 경고한다. 그리고 일라이자—예언자의 이름을 가진 누더기 차림의 남자—가 부두에서 던지는 불길한 암시들. "혼들... 혼들..."
에이해브는 출항 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선장 없이 출항하는 배. 빌다드와 펠렉은 그에 대해 말하지만, 그의 실체는 안개 속에 있다. 이 부재 자체가 하나의 연출이다—멜빌은 에이해브를 신화적 존재로 만들기 위해, 먼저 그를 숨긴다.
우리 독자는 이 모든 경고를 읽는다. 그리고 알면서도 배에 오른다. 비극의 결말이 예고된 항해, 그러나 그 여정을 따라가지 않을 수 없는 이끌림. 이것은 이스마엘의 선택이자, 책을 펼친 우리 독자의 선택이기도 하다.
바다 위의 시간
피쿼드호의 항해는 물리적으로는 낸터킷에서 대서양을 건너 희망봉을 돌아 인도양을 지나 태평양까지 이르는 여정이다. 그러나 서사적으로는 다른 리듬을 따른다. 우리는 폭풍을 만나고, 다른 배들과 조우하며("마주침의 챕터들"—각 배는 모비 딕에 대한 다른 정보, 다른 태도를 가져온다), 고래를 사냥하고, 기다린다.
이 "기다림"의 시간이 핵심이다. 모비 딕은 책의 대부분 동안 부재한다. 소문으로, 전설로, 에이해브의 집착 속에서만 존재한다. 우리가 읽는 것은 출현이 아니라 출현을 향한 긴 준비다. 그리고 그 준비의 시간 속에서, 멜빌은 고래에 대해, 포경에 대해, 바다에 대해, 인간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한다.
피쿼드호가 만나는 배들—고니호, 예로보암호, 버진호, 로즈버드호, 사무엘 엔더비호, 레이첼호, 딜라이트호—은 각각 하나의 거울이다. 어떤 배는 모비 딕을 만나 팔을 잃은 선장의 이야기를 전하고, 어떤 배는 그 고래를 본 적도 없으며, 어떤 배의 선장은 이미 광기에 빠져 있다. 이 만남들은 에이해브에게 경고가 되지만, 그는 듣지 않는다. 혹은, 듣고도 나아간다.
핵심 장면들: 서사의 결절점
뒷 갑판 (36장)
에이해브가 마침내 갑판 위에 나타나 선원들 앞에서 금화를 돛대에 못 박는 장면. 이 금화—스페인 금화 더블룬—는 흰 고래를 먼저 발견하는 자에게 주어질 것이다. 이 순간 항해의 목적은 상업(고래기름을 얻기 위한 포경)에서 복수로, 집단의 이익에서 한 개인의 강박으로 전환된다.
그러나 주목할 점은, 선원들이 저항 없이—심지어 열광하며—이에 동의한다는 것이다. 에이해브의 카리스마, 그의 연설의 힘, 혹은 선원들 내면에 이미 있던 무언가가 응답한 것인가? 스타벅만이 의문을 제기한다—"고래에게 복수라니, 선장님. 그것은 신성모독입니다. 짐승에게 복수를 하다니." 그러나 에이해브의 대답 앞에서 그도 물러선다.
이 장면은 연극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사와 지문, 코러스처럼 응답하는 선원들. 멜빌은 의도적으로 형식을 바꾸어, 이 순간의 의식적(儀式的) 성격을 강조한다. 계약이 맺어진 것이다—선원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에이해브의 운명에 묶였다.
스페인 금화 (99장)
돛대에 박힌 금화를 여러 인물이 차례로 바라보며 각자의 해석을 내놓는 장면. 에이해브는 금화에서 자기 자신을 본다. 스타벅은 삼위일체를, 스터브는 조디악의 순환을, 플라스크는 단지 시가 960개비 값을 본다. 핍은 금화를 "배꼽"이라 부르며 난해한 독백을 쏟아낸다.
같은 대상, 다른 시선. 이 장면은 작품 전체의 축소판이다. 모비 딕이라는 존재, 혹은 이 작품 자체가 이렇게 작동한다—우리 각자는 자신이 가진 것으로 읽는다. 객관적 의미란 있는가, 아니면 의미는 항상 투사되는 것인가?
손으로 쥐어 짜기 (94장)
이스마엘과 선원들이 향유고래의 정액 기름(spermaceti)을 손으로 짜는 장면. 지극히 육체적이고 감각적인 이 노동 속에서 이스마엘은 기이한 평화와 동료애를 느낀다. 손끝이 닿고, 기름이 미끄러지고, 서로의 손을 쥐게 된다. 그는 이 순간 "영원한 부드러움"을 느꼈다고 고백한다.
이 장면은 에이해브의 고독한 집착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에이해브가 추구하는 것은 저 멀리 있고, 거대하고, 죽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스마엘이 이 장면에서 발견하는 것은 지금 여기, 작고, 함께하는 것이다. 삶의 의미는 숭고한 목표를 성취하는 데 있는가, 아니면 이런 손끝의 접촉, 일상의 노동, 순간의 연대에 있는가?
양초 (119장)
폭풍우 속에서 피쿼드호의 돛대 끝에 성 엘모의 불이 켜진다. 이 자연현상을 선원들은 두려워하지만, 에이해브는 불꽃을 향해 연설한다—신에게 도전하는, 혹은 신과 대화하는 독백을. "나는 너를 숭배하지 않는다... 하지만 맞서 싸우겠다." 이 장면에서 에이해브는 프로메테우스적 영웅으로, 혹은 신성모독적 광인으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다.
마지막 추격과 침몰 (133-135장)
마지막 사흘간의 추격. 에이해브는 모비 딕을 발견하고, 쫓고, 작살을 던지고, 보트가 부서지고, 다시 쫓는다. 셋째 날, 에이해브의 작살줄이 그의 목을 감아 그를 바다로 끌고 간다. 피쿼드호는 침몰하고, 소용돌이에 모든 것이 빨려들어간다. 오직 이스마엘만이, 퀴퀘그의 관 위에 떠서, 레이첼호에 의해 구조된다.
이 결말은 예정되어 있었다. 우리는 알고 있었다. 첫 장부터 암시되었고, 일라이자가 경고했고, 모든 징조가 가리켰다. 그럼에도 그것이 도래했을 때, 우리는 무엇을 느꼈는가? 안도? 슬픔? 허무? 카타르시스?
3. 인물들: 한 가지 해석으로는 부족한 존재들
에이해브: 영웅인가, 광인인가, 아니면 우리 자신인가
에이해브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는 이 작품 전체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와 직결된다.
비극적 영웅으로서의 에이해브: 불가해한 우주에 맞서 의미를 요구하는 인간, 자신의 다리를 앗아간 "악"을 끝까지 추적하는 의지의 화신. 그의 유명한 선언—"저 흰 고래 뒤에는 벽이 있다. 때로 나는 그 벽 너머에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 벽이 나를 가둔다. 나는 그것을 뚫겠다."—에서 우리는 실존적 절망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싸우겠다는 결의를 본다.
에이해브는 셰익스피어 비극의 주인공들—리어왕, 맥베스—의 계보에 있다. 위대하기에 몰락하는 인물, 자신의 덕목(의지력, 결단력)이 과잉되어 파멸의 원인이 되는 인물. 이 관점에서 그는 숭고하다. 무의미한 우주 앞에서 굴복하지 않는 인간 정신의 표상.
파괴적 독재자로서의 에이해브: 그러나 다른 각도에서 보면, 에이해브는 자신의 상처를 우주적 드라마로 확대한 자기도취자다. 그는 수십 명의 선원을 자신의 복수에 끌어들여 죽음으로 몰아갔다. 스타벅의 합리적 저항을 무시하고, 심지어 스타벅이 그를 죽이려는 유혹을 느끼게 만들 정도로 상황을 몰아갔다. 정상적인 항해 임무(고래를 잡아 기름을 얻고 돌아가는 것)를 포기하게 만든 독재자.
이 관점에서 에이해브의 "숭고함"은 착각이거나 자기기만이다. 고래는 그를 공격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공격하는 것에 반응했을 뿐이다. 에이해브가 "악"으로 보는 것은 자연의 무심함일 뿐인데, 그는 그것을 의도적 적대로 오독한다.
거울로서의 에이해브: 어쩌면 더 불편한 질문은 이것이다—우리 안에도 에이해브가 있지 않은가? 상처를 붙들고, 의미를 요구하고, 끝까지 쫓으려는 충동. 포기할 수 없는 무언가, 손에 넣으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 같은 목표. 에이해브를 "광인"으로 거리 두기는 쉽다. 그러나 그를 이해하는 순간, 우리는 자신의 집착과 마주하게 된다.
토론을 위한 생각거리: 비극적 영웅과 파괴적 광인이라는 두 해석은 양립 가능한가? 에이해브는 숭고하면서 동시에 파괴적일 수 있는가? 혹은, 작품은 우리에게 하나를 선택하라고 요구하는가? 당신은 에이해브에게 어느 정도의 공감을 느꼈는가?
이스마엘: 관찰자인가, 참여자인가, 그리고 왜 살아남았는가
이스마엘은 기묘한 화자다. 그는 이야기 초반에는 분명한 주인공처럼 행동한다—우울증을 피해 바다로 떠나고, 퀴퀘그와 우정을 쌓고(이 우정은 작품에서 가장 따뜻한 순간들을 만든다), 포경선에 오른다. 그의 목소리는 위트 있고, 자기비하적이며, 철학적이다.
그러나 피쿼드호가 출항한 뒤, 그는 점점 투명해진다. 에이해브가 서사를 지배하고, 이스마엘은 관찰하고, 기록하고, 고래에 대해 연구하는 목소리로 물러난다. 때로 그는 전지적 화자처럼 행동한다—자신이 있지 않았던 장면을, 에이해브의 내면 독백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멜빌은 서술의 일관성보다 이야기의 필요를 우선시한다.
그런데 마지막에, 오직 그만이 살아남는다. 왜?
서사적 필연성—누군가는 이야기를 전해야 하므로—외에, 이스마엘의 생존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몇 가지 관점이 있다:
거리두기의 보상: 에이해브가 집착의 화신이라면, 이스마엘은 유보하는 자, 거리 두는 자, 모든 것을 이해하려 하되 하나에 매달리지 않는 자다. 그는 고래학 챕터들에서 보듯 백과사전적 지식을 쌓지만, 그것으로 고래의 "본질"에 도달하려 하지 않는다. 이 열린 태도가 그를 살렸는가?
관찰자의 위치: 이스마엘은 참여하되 몰입하지 않는다. 그는 에이해브를 따르지만, 에이해브가 되지 않는다. 이 "중간자"의 위치가 생존을 가능케 했는가?
우연의 승리: 더 냉소적으로 보면, 이스마엘은 단지 운이 좋았을 뿐이다. 퀴퀘그의 관이 떠올랐고, 그가 그것을 잡았고, 레이첼호가 지나갔다. 그의 생존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우리의 욕망이지, 텍스트가 보장하는 것이 아닐 수 있다.
이스마엘의 또 다른 의미는 "이야기꾼"으로서의 역할이다. 그는 살아남았기에 이야기를 전한다—혹은, 이야기를 전하기 위해 살아남았다. 『모비 딕』은 그의 기록이고, 그 기록 행위 자체가 살아남은 자의 의무이자 트라우마의 처리 방식일 수 있다.
모비 딕: 상징의 백색, 의미의 부재
흰 고래 모비 딕은 작품 내에서 가장 많은 의미가 투사되는 동시에, 가장 해석을 거부하는 존재다.
에이해브에게 모비 딕은 악이다—모든 분노와 증오를 쏟아부을 대상, "인격화된 악의". 그러나 멜빌은 "고래의 흰색" 장(42장, "The Whiteness of the Whale")에서, 흰색이 품은 모순적 의미들을 길게 탐구한다. 흰색은 순수와 순결의 색인 동시에, 창백함과 죽음의 색이다. 신성한 것(성의, 성찬포)과 공포스러운 것(백색증의 생물, 유령)이 모두 희다.
멜빌의 결론은 결론의 부재다—흰색은 "의미의 부재"를 의미할 수 있다. 색의 부재, 특성의 부재, 해석 가능성의 부재. 모비 딕의 흰색은 우리가 무엇이든 투사할 수 있는 빈 스크린일 수 있다.
그렇다면 모비 딕은..
악의 상징인가?
자연의 무심함인가?
신, 혹은 신의 부재인가?
인간이 의미를 투사하는 빈 캔버스 그 자체인가?
마지막 해석이 옳다면, 에이해브의 비극은 의미 없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 허상과 싸우다 죽은 것이 된다. 그러나 그것은 "어리석음"인가, "인간적인 것"인가? 우리 모두는 어느 정도 의미를 투사하며 살지 않는가?
흥미로운 점은, 모비 딕 자신은 작품 내에서 거의 "말이 없다"는 것이다. 그는 나타나고, 공격하고, 사라진다. 의도는 알 수 없다. 에이해브를 의도적으로 파괴하려 했는가, 아니면 자신을 공격하는 것에 반응했을 뿐인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리고 이 불가해함이 핵심이다.
조연들: 에이해브를 비추는 거울들
스타벅: 일등 항해사 스타벅은 합리성과 경건함의 대표자다. 그는 포경이 상업 활동이지 십자군 원정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는 가족을 사랑하고, 돌아가고 싶어 한다. 에이해브의 광기에 맞서 이의를 제기하는 유일한 목소리.
그러나 스타벅은 실패한다. 에이해브를 죽이고 배를 돌릴 수 있는 순간에서, 그는 행동하지 못한다. 왜? 권위에 대한 복종? 행동의 결과에 대한 두려움? 어쩌면 자신 안에도 에이해브를 따르고 싶은 무언가가 있었던 것인가?
스타벅의 실패는 "이성"과 "신앙"이 광기 앞에서 무력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옳다고 아는 것과 그것을 행하는 것 사이의 간극.
퀴퀘그: 남태평양 출신의 작살잡이 퀴퀘그는 작품에서 가장 이질적이면서 가장 인간적인 인물이다. 처음에 이스마엘은 그를 두려워하지만, 함께 잠을 자고 나서 깊은 우정을 맺는다. 퀴퀘그는 "문명" 바깥의 존재로, 서양적 종교와 합리성의 체계 밖에 있다.
그의 관이 이스마엘을 살린다. 퀴퀘그가 병들어 죽음을 예감했을 때 만들어둔 관, 그러나 그가 회복한 후 구명 부표로 쓰이던 그 관. 죽음을 위한 도구가 삶의 도구가 된다. 이것은 단순한 플롯 장치인가, 아니면 상징적 의미가 있는가? 이스마엘의 생존이 퀴퀘그와의 우정, "타자"와의 연대에 빚지고 있다는 것?
핍: 선실 소년 핍은 고래 사냥 중 바다에 빠져 오랫동안 표류한 후, 정신이 나가버린다. 그의 광기는 에이해브의 광기와 다르다—에이해브는 목표를 향해 질주하는 광기라면, 핍은 바다의 무한함 앞에서 자아가 녹아버린 광기다. 에이해브는 핍에게 기이한 애정을 보이는데, 어쩌면 핍에게서 자신의 또 다른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일 수 있다.
4. 형식의 의미: 고래학 챕터들에 대하여
솔직히 묻겠다. 『모비 딕』을 읽으며 지루하지 않았는가?
고래의 해부학, 고래 머리의 비교(향유고래 머리 vs. 참고래 머리를 나란히 놓고 비교하는 긴 장!), 고래 분류의 역사, 포경선의 구조, 작살 던지는 법, 밧줄 감는 법, 기름 짜는 법, 고래 뼈와 화석에 대한 논의—이 챕터들을 읽으며 "이게 왜 필요하지?"라고 생각했다면, 당신만 그런 것이 아니다. 많은 독자들이 이 부분에서 속도가 느려졌고, 일부는 건너뛰었을 것이다. 비평가들 사이에서도 이 챕터들이 작품의 약점인지 의도된 설계인지 오랫동안 논쟁이 있었다.
그러나 멜빌은 왜 이렇게 썼을까? 그는 충분히 "효율적으로" 쓸 수 있었다. 에이해브와 모비 딕의 대결로 곧장 달려갈 수 있었다. 그러지 않았다.
앎의 욕망과 그 한계: 이스마엘(그리고 멜빌)은 고래에 대해 알 수 있는 모든 것을 나열한다. 분류하고, 측정하고, 비교하고, 역사를 추적한다. 이것은 19세기의 지적 열망—박물학, 백과전서적 지식, 세계를 완전히 분류하고 이해하려는 욕망—을 반영한다.
그러나 이 모든 지식 뒤에도 모비 딕은 불가해한 존재로 남는다. 고래의 뼈를 측정하고, 기름의 성분을 분석하고, 역사적 기록을 추적해도, "고래 자체"에는 닿지 못한다. 이것은 에이해브가 모비 딕을 죽임으로써 "의미"에 도달하려는 시도와 평행하지 않은가? 알려고 하면 할수록 멀어지는 것, 지식의 축적이 이해를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
형식이 곧 경험: 바다 위의 선원들은 무엇을 경험하는가? 긴 기다림, 단조로운 일상, 광대한 무료함, 수평선의 반복. 그 속에서 가끔 폭발적인 사건—고래의 출현, 폭풍, 사고—이 터진다. 멜빌의 구성은 이 리듬을 형식으로 체현한 것일 수 있다.
우리가 느낀 "지루함"은 실패가 아니라 의도된 효과—항해의 시간성을 독서의 시간성으로 번역한 것. 에이해브가 느꼈을 초조함, 선원들이 느꼈을 단조로움을 독자인 우리도 느끼게 만드는 것.
우회의 미학: 모더니즘 문학은 "효율적 서사"를 의심한다. 『율리시스』가 더블린의 하루를 수백 페이지로 늘리고,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마들렌 과자의 기억으로 수천 페이지를 여는 것처럼, 『모비 딕』은 19세기에 이미 이 우회의 가치를 실험하고 있었다. 목적지로 곧장 가지 않고, 길 위에서 머무는 것. 그 머무름 자체가 의미.
5. 주제의 그물: 작품이 던지는 질문들
『모비 딕』은 답보다 질문이 많은 작품이다. 멜빌은 우리에게 해석을 강요하지 않는다—오히려 질문들을 펼쳐놓고, 우리가 각자의 방식으로 씨름하게 한다. 몇 가지를 추려본다.
집착과 광기에 관하여: 무언가를 끝까지 쫓는 것은 언제 "위대함"이 되고 언제 "광기"가 되는가? 그 경계를 결정하는 것은 결과인가(성공하면 위대함, 실패하면 광기), 의도인가, 외부의 판단인가? 에이해브와 위대한 탐험가, 예술가, 과학자 사이의 차이는 무엇인가? 집착 없이 위대한 성취가 가능한가?
자연에 관하여: 모비 딕은 에이해브를 공격했다. 그러나 그것은 "악의"였는가, 아니면 고래라는 존재의 본능이었을 뿐인가? 에이해브가 먼저 고래를 사냥했고, 고래는 반격했을 뿐이다. 자연에 인간적 의미(악의, 복수, 정의)를 부여하는 것 자체가 오류인가? 혹은 그런 의미 부여가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조건인가?
의미의 투사에 관하여: 우리는 세상에 의미가 있다고 믿고 싶어한다. 그 의미를 찾기 위해 쫓고, 싸우고, 때로 부서진다. 만약 의미가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면? 에이해브가 모비 딕에게 부여한 의미는 고래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내면에서 온 것이다. 그렇다면 그 의미는 "가짜"인가, 아니면 인간에게는 그것이 유일한 의미인가?
앎의 욕망과 한계에 관하여: 이스마엘의 고래학 챕터들은 앎에 대한 열망의 표현이다. 그러나 그 열망은 채워지지 않는다. 완전히 아는 것은 가능한가? 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분류하고 측정하면 "아는" 것인가?
서술과 생존에 관하여: 이야기를 전할 수 있는 자만이 살아남는다—혹은, 살아남은 자만이 이야기를 전한다. 『모비 딕』은 생존자의 기록이다. 죽은 자들의 이야기는 어디에 있는가? 이스마엘의 서술은 "진실"인가, 아니면 살아남은 자의 편집과 해석이 개입된 것인가?
공동체와 고독에 관하여: 피쿼드호는 하나의 사회다—다양한 인종, 배경, 성격의 사람들이 모인 작은 세계. 그러나 에이해브는 철저히 고독하고, 이스마엘도 내면에서는 홀로다. 함께 있으면서도 각자 다른 바다를 항해하는 것—이것이 인간 공동체의 초상인가? 진정한 연대는 가능한가?
6. 질문
질문 1: 에이해브를 이해하시나요, 아니면 거부하시나요?
에이해브의 추격을 어떻게 보셨는지 궁금합니다. 그의 복수가 "정당"한지를 묻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추격 자체가 에이해브에게—그리고 어쩌면 우리에게—무엇인지를 묻고 싶습니다.
만약 에이해브가 모비 딕을 죽이는 데 성공했다면, 그는 만족했을까요? 그 이후의 삶을 상상할 수 있으신가요? 혹은, 에이해브에게 중요한 것은 죽이는 것이 아니라 쫓는 것 자체였을까요?
그리고 당신은 에이해브에게 어느 정도의 공감을 느끼셨나요? 그를 이해하기 힘들었나요, 아니면 불편하게도 이해가 되었나요?
질문 2: 당신의 "모비 딕"은 무엇인가요?
우리 각자에게도 쫓는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잡으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 같은 목표, 상처를 준 대상에 대한 분노, 끝까지 가보겠다는 집념, 혹은 답을 찾고 싶은 질문.
이 작품을 읽은 뒤, 그것을 다르게 보게 되었나요? 에이해브의 이야기는 경고인가요, 아니면 어떤 면에서 공감할 수 있는 것인가요?
질문 3: 이스마엘은 왜 살아남았을까요?
서사적 필요(누군가는 이야기를 전해야 하니까) 외에, 이스마엘의 생존에 다른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요?
그가 살아남은 것은 그의 성격(관찰자적 거리두기, 집착하지 않는 태도)과 관련이 있을까요? 아니면 단지 운이었을까요?
그리고 퀴퀘그의 관 위에서 살아남았다는 것—퀴퀘그와의 우정이 그를 살렸다는 것—이 상징하는 바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첫댓글 발제문이 텍스트와 잘 어울려져 의미와 생각이 남 달랐습니다. 동일한 운명에 처한 선원들 중에서 왜 이스마엘만 살아 남았는가?에 대한 의문이 텍스트가 주는 교훈이겠죠. '생에의 의지'라기 보다는 자신이 관여하는 '삶에 대한 태도'가 유일한 생존의 무기가 되지 않았을까, 하고 발제문에서 어렴풋이 답을 찾았습니다. 글이 사람을 닮았네요.
모영 샘의 태도라면 무엇을 하시든 좋은 일이 생길 것 입니다.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