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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와 백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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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수필 산문 및 기행문 스크랩 - 클라우제비츠에게 배우는 싸움의 기술
은하수 추천 0 조회 57 15.03.30 23:5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철학의 지혜? 심화 학습 자료

전쟁은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연속이다

클라우제비츠에게 배우는 싸움의 기술

 

 

참고자료 :

 

생각거리 :

 

 

집 필 자 :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 지음, 류재승 옮김, ?전쟁론?(책세상)

게르하르트 슈타군 지음, 장혜경 옮김, ?청소년을 위한 이야기 전쟁과 평화?(웅진 지식하우스)

삶에서 반드시 일어나게 마련인 싸움의 상황을 냉정하고 합리적으로 대처할 수 있다.

싸울 가치가 있는 문제와 없는 것을 가리고 냉철하게 결과를 계산하여, 피해가 가장 적은 방향으로 상황을 마무리 지을 수 있다.

안광복_ 중동고 철학 교사

 

 

들어가는 글

 

샤를마뉴(Charlemagne, 742~814) 대제?는 자기 이름밖에 쓸 줄 몰랐다. 그를 비롯한 서양의 기사들이 여자처럼 나약하게 된다.”는 이유로 지식을 하찮게 여겼던 탓이다. 지금의 기준으로 한다면 그들은 조울증 환자들처럼 보인다. 불타는 복수심과 명예에 눈이 멀어 칼을 휘두르다가, 이내 감정이 벅차올라 눈물을 쏟곤 했다고 한다. 그런 탓인지 그네들이 벌인 전쟁은 턱없이 잔인하고 어처구니없는 경우가 많았다. 역사상 가장 잔인했다는 평가를 받는 30년 전쟁?이 대표적인 예다.

반면,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 기원전 100~기원전 44)처럼 깨어 있는 인물이 벌인 전쟁은 뒤끝을 남기지 않는다. 그는 전쟁이 정치의 연장임을 너무도 잘 알았다. 점령한 지역에서는 절대 약탈하지 않았고, 너그러운 태도로 적들의 적개심을 누그러뜨렸다. 고려의 서희(942~998)는 이보다 더 뛰어났다. 싸우지 않고 거란족을 돌려보냈으며, 압록강 동쪽의 여섯 주()를 손에 넣기까지 했다.

그렇다면 제대로 된 싸움의 기술은 어떠해야 할까? 프로이센의 장군이었던 클라우제비츠(Karl von Krausewitz, 1780~1831)는 여기에 답을 주는 전쟁 철학자.

 

심화 자료

 

클라우제비츠의 생애

클라우제비츠는 178061일 프로이센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장교였으며, 할아버지는 유명한 신학 교수였다. 1792년 그는 12세의 나이로 군대에 들어갔고, 13세에는 사관생도의 자격으로 첫 전투에 참가했다. 그리고 유럽을 휩쓴 나폴레옹 전쟁?에 참전하는 등 여러 형태의 전투를 보고 배웠다.

그의 시대는 나폴레옹, 헤겔, 괴테, 하이네 같은 전쟁과 문화의 영웅들이 활동하던 시기였다. 또 프랑스 대혁명으로 세상이 시끌벅적하던 시절이기도 했다. 이처럼 그는 격동의 시기이자 문화와 예술의 전성기에 독일 한복판에 있었다.

1810, 클라우제비츠는 황태자인 빌헬름 1(Wilhelm I, 1797~1888, 프로이센의 황제로, 독일 연방을 조직하여 독일 황제로 즉위하였음)에게 전쟁론을 가르치는 교수로 임용되었다. 그 뒤 숱한 전투에 참가했고, 1812년 나폴레옹(Napol?on I, 1769~1821)이 결정적으로 무너지게 된 워털루 전투?에서도 프로이센의 참모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1818, 38세의 나이로 장군이 된 그는 이듬해 베를린 전쟁 학교 교장으로 취임하여 10여 년의 세월을 보냈다. 학교에서 지내는 동안 수많은 논문과 글을 썼는데, ?전쟁론?도 대부분 이때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1831, 클라우제비츠는 브레슬라우(Breslau, 현재 폴란드의 브로츠와프, 1742~1944년까지 프로이센의 지배를 받았음)에서 콜레라로 사망했다. 대표작인 ?전쟁론?은 그가 죽은 뒤 아내가 여기저기 흩어진 원고와 메모를 모아 출판한 것이다.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

전쟁만큼 발전이 빠르고 극적인 분야도 없다. 기술이 한 단계 나아가면 그때까지의 모든 전투력은 종이호랑이가 되어 버린다. 예컨대, 활과 창으로 했던 전쟁은 총이 등장하자 이내 스러져 버렸다. 무기가 진화할수록 전략과 전술도 함께 바뀌게 마련이다. 그러나 시대가 아무리 변해도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전쟁의 고전으로 계속 읽히고 있다.

?전쟁론?이 이처럼 널리 읽히는 이유는 전쟁의 기법보다는 본질을 다루기 때문이다. 텔레비전의 사용법을 설명한 책은 새 기술이 나오면 금방 사라지지만, 전파 방송의 근본 원리를 다룬 책은 오래 살아남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의 설명 방식은 기하학자들을 떠올리게 한다. 기하학자들은 점, 선분 등의 정의(定義)에서 출발하여 수학 논리에 따라 세상을 그린다. 클라우제비츠도 마찬가지다. 전쟁이 무엇인지를 먼저 규정한 다음, 사유 실험을 통해 완전한 모습의 전쟁을 보여 준다.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이란 내 의지를 강요하기 위해 사용하는 폭력 행위라고 말한다. 전쟁의 최고 목표는 적의 싸울 능력을 완전히 없애는 데 있다. 적을 이기려면 모든 힘과 능력을 다 쏟아 부어야 한다. 상대가 노력하는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힘을 키워야 한다. 더욱이 상대가 나를 죽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내가 먼저 적을 거꾸러뜨려야 한다는 조급함으로 바뀐다. 그러다 보면 전쟁은 점점 더 잔혹한 쪽으로 흘러간다. 클라우제비츠는 인간적인 전쟁이란 없다고 잘라 말한다. “전쟁처럼 위험한 일에서는 착한 의도에서 저지른 잘못이 최악의 오류다.”

전쟁을 소재로 한 컴퓨터 게임을 떠올려 보면 이해가 쉽다. 게임에서 인도적인 조치는 무의미하다. 게임을 빨리 끝내려면 상대편을 무자비하게 밀어붙여야 한다. 클라우제비츠가 말하는 절대 전쟁’, 곧 이상적인 형태의 전쟁 역시 그렇다.

하지만 현실의 전쟁에서 상대는 물론 내가, 있는 힘을 모두 모아 겨루기는 쉽지 않다. 흩어져 있는 전투력을 한곳으로 모으기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상대를 없애 버렸다 해서 나한테 꼭 이롭다는 법도 없다. 일상에서 전쟁은 협상하고 물건을 사고파는 것 같은 여러 활동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문명국가의 시민들이 살인을 즐기기 때문에 전쟁을 벌이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들은 상대를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원하는 것을 손에 넣기 위해 싸운다.

전쟁은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연속이라는 클라우제비츠의 유명한 말은 현실의 전쟁을 정확하게 보여 준다. 물론, 프로 싸움꾼들은 다툼 자체에만 매달린다. 군인들은 대부분 적을 완전히 쓸어 없애는 데 주목한다. 그래서 더 화끈한 무기와 공격을 바란다. 하지만 정치가들은 다르다. 군대는 무역이나 경제 원조 같은 사용 가능한 카드의 하나일 뿐이다. “정치적 의도는 목적이고, 전쟁은 수단이다.”

사실, 현실에서도 절대 전쟁에 가까운 싸움이 벌어지곤 한다. 감정이 너무 많이 쌓여서 적대감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진 경우다. 자살 폭탄 테러가 그 대표적인 예로, 여기에는 적을 파멸시키기 위해서라면 자기 전부를 버려도 상관없다는 식의 논리가 숨어 있다. 전쟁에 걸린 이해관계가 너무 클 때도 그렇다. 이성을 잃어버리고 싸움에 매달릴수록, 다툼은 그 자체가 목적이 되기 쉽다.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을 적대감에서 비롯된 폭력, 우연, 이성적 판단으로 이루어진 경이로운 삼위일체라고 정리한다. 현명한 이는 이 세 요소를 고루 배합할 줄 안다. 유능한 지도자는 용기 있는 사람이다. 이때의 용기란 무대뽀 정신이 아니다. “우리의 형제와 자식을 안심하고 맡길 장군은 맹렬한 불 같은 머리보다는 냉정한 머리를 지닌 사람이다.” 진정한 용기를 지닌 이는 현실을 정확히 파악하고 이를 바탕으로 냉정하게 결단을 내린다.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에서 이성의 역할을 힘주어 강조한다. “물질적 힘이 칼집이라면 정신은 칼날이다.” 전쟁은 위험, 육체적 고통, 불확실성과 우연이 지배하는 공간이다. 그는 전쟁과 가장 비슷한 예로 카드 게임을 든다. 실력이 좋아도 운이 따르지 않으면 성공하지 못한다. 그러나 좋은 패를 가졌다 해도, 상대방의 수를 짚어 내지 못하거나 쉽게 흥분한다면 역시 이길 수 없다. 클라우제비츠는 지휘관에게 가장 필요한 능력은 격렬한 흥분 속에서도 균형을 잃지 않는 마음이라고 말한다. 이런 지휘관은 적의 약한 고리를 정확히 파악하여 공략할 줄 안다. 그리고 핵심을 이해하며 힘을 어디로 모아야 하는지를 안다.

나아가 전쟁은 항상 마찰(friction)’로 가득 차 있다. 실제 작전은 머릿속 생각과 달리 어긋나게 마련이다. 규모가 큰 전쟁일수록 더욱 그렇다. 이럴 때 지휘관은 가슴속에서 타오르는 불꽃으로 모든 병사들의 열정과 희망에 불붙일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현대전에서는 정신의 힘을 믿지 않는다. 지금의 전략가들은 확실한 계산과 객관적인 무력 비교를 승리의 지름길로 여긴다. 정신의 우위를 내세웠던 이라크 군대는 과학을 앞세운 미군에 상대가 못 되지 않았던가? 이 점에서 클라우제비츠의 주장은 모순인 듯하다. 한편에서는 손익을 냉혹하게 따지라고 하면서도 동시에 정신을 강조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클라우제비츠가 실전에 잔뼈 굵은 군인이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의 이론은 자신의 체험에서 우러나왔다. 그가 살았던 시대보다 한 세대 전만 해도 전쟁은 예술에 가까웠다. 수만 명이 싸웠는데도 사망자가 한 명도 없는 경우도 흔했다고 한다. 왜 그랬을까? 군인들 대부분이 용병(傭兵)이었던 까닭이다. 전쟁도 대부분 왕과 귀족들끼리의 다툼이 원인이 되었기 때문에 일반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치열한 전쟁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프랑스 대혁명 뒤에 만들어진 군대는 달랐다. 자유·평등·박애의 정신으로 뭉친 시민군은 그야말로 큰 군대(grande arm?e)’였다. 시민들이 모든 힘을 전쟁에 기울이는 전면전의 상황, 12세에 입대해서 13세에 첫 전투를 치른 클라우제비츠의 뇌리에 박힌 전쟁은 바로 이런 것이었다. “실제 전투에서 겪은 경험은 너무도 생생하여 모든 정리된 생각을 잊게 한다.”

이와 더불어 클라우제비츠는 정치를 아는 군인이었다. 프로이센 사관학교 교장을 10년 이상 지낸 고급 장교로서, 그는 나폴레옹의 군대가 왜 무너졌는지를 냉철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힘센 말은 고삐를 단단히 쥔 상태에서는 나에게 큰 힘이 된다. 반면, 고삐 풀린 말은 재앙일 뿐이다. 군사력 못지않게 정신이 중요한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클라우제비츠의 설명대로 무기의 위력은 무한 경쟁을 겪으며 점점 강해지고 있다. 일본, 중국의 군비 경쟁도 한창이다. 애증(愛憎)이 얽힌 우리와 일본, 중국의 역사는 전쟁의 가능성을 항상 안고 있다. ‘전쟁이라는 다른 수단의 의한 정치에 이르지 않도록 외교력을 기울여야 할 때다. 이 점에서 ?전쟁론?은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안광복,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

(<주간 조선> 1946, 2007319일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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