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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호산나♥호산나 높은 곳에서 원문보기 글쓴이: 예수믿으세요
임은진 사모 신앙간증 요약
저는 경북 점촌에서 태어났습니다. 저희 집안에 복음의 빛이 비춰진 것은 어머니로부터 시작됩니다. 50~60년대 어려웠던 시절, 당시 어머니는 저를 낳으시고 몸이 쇠약해진 탓인지 정신을 놓으셨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미쳤던 것입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미친 사람의 특징은 어디든 나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어머니도 그렇게 정신을 놓은 다음부터는 밖으로만 나갔습니다. 집을 나가면 온 동네를 다니며 구걸해 먹고, 산으로 들로 미친 듯이 다니는 것이 일이었습니다. 며칠씩 돌아다니다가 정신이 들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다가 또다시 정신이 나가면 헛소리하면서 산에서는 절밥으로 연명을 하면서 굶기도 밥 먹듯이 하는 죽음 같은 생활이 몇 년간 지속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해, 어머니의 정신이 조금 돌아와서 집에 있을 때였습니다. 옆집 사는 아주머니로부터 교회 가자고 하는 전도를 받았고, 미친년 소리만 듣지 않는다면 교회는 얼마든지 갈 수 있다는 처절함으로 복음을 받아 들였습니다. 아버지는 대대로 내려오는 종손이었지만 그런 것 역시 중요치 않는 상황이었습니다.
교회에 나가고부터 어머니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목사님과 심방 대원들의 심방이 시작되었습니다. 목사님을 비롯한 7-8명의 심방대원들이 방문을 열고 들어오면 어머니는 심방대원들의 이마에 붉은 십자가를 보았는데 그것이 너무 무서워 이불을 뒤집어쓰고 벌벌 떨었던 적이 많았었다는 말씀을 나중에 들었습니다. 이불을 쓰고 누워있는 어머니를 달래서 앉게 해서 예배와 기도를 해주셨습니다. 오랜 기간을 그렇게 사랑으로써 예배와 말씀이 이어지자 악한 영의 역사가 차츰 줄어들었고, 결국은 주님의 은혜로 더러운 귀신에게서 완전히 놓임을 받게 되는 큰 은혜를 입게 되었습니다.
저의 청소년 시절은 무척 가난했습니다. 가정 형편이 너무 어려워서 큰 오빠는 학업을 포기하고 그나마 조금 있는 논밭을 팔아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그릇 가게를 한다고 가게를 내었지만 시골에서만 살다가 경험 없이 무턱대고 장사한다고 벌려놨는데 잘 될 리가 만무했고 결국 얼마 못가서 그릇 가게는 망해버렸습니다. 그때 나는 중학교 1학년을 다니던 때였었는데 등록금을 한 번도 내지 못하는 상태에서 일 년을 다니다가 끝내는 등록금이 없으면 학교에 나오지 말라는 통보를 받았고 더 이상 학교를 나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저도 돈을 벌어야 했습니다. 공장을 다니면서 학업에 대한 꿈을 버리지 못하는 저에게 어머니로부터 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검정고시 시험을 보면 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공장에서 일을 하면서 검정고시 준비를 열심히 한 덕분으로 그렇게 가고 싶었던 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습니다. 가정형편은 계속 그대로 어려웠지만 저에게는 신앙이 있었고 믿음이 자라가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를 통한 복음이 전해진 후 저희 가족은 모두 예수님을 영접했고 그 덕분에 저 또한 믿음 안에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고등학교에 진학 할 무렵, 집에서 10분 거리의 명성여고가 있었지만 불교 재단이었기에 2시간 남짓 걸리는 남산 중턱에 있는 숭의여고에 지원하게 된 것도 작지만 믿음이 있어서 인 것 같았습니다.
야간 고등학교 진학 후 낮에는 무역회사를 다니고, 저녁에는 학업을 할 수 있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제가 벌어 학교를 다녀야 하는 힘들고 고단한 날들이었지만 학교를 다닐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감사했고, 그래서 학교생활도 무척 즐거웠고 적극적으로 활동했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학급 신앙부장을 맡게 되었습니다. 매주 수천 명의 학생이 대강당에 모여 예배를 드렸고 예배 후에는 학급별로 헌금을 했습니다. 각 학년 신앙부장들이 그 헌금을 정리해서 교무실로 가져가는 일을 담당했습니다. 그때 저는 교무실에 가서 다른 학급의 헌금을 먼저 확인한 후 저의 학급의 헌금을 드리는 식의 열심도 보였습니다. 예를 들어 가장 많은 학급의 헌금이 7천오백원 이라면 우리 반에서 모인 헌금에 저의 돈을 몽땅 털어 7천육백원이 되게 하는 방법으로 해서 항상 우리 반이 일등을 하게 했었습니다. 그렇게 돈을 몽땅 털어서 헌금을 채우고 나면 저는 밥 사먹을 돈이 없어 라면으로 때우고, 때로는 친구들한테 얻어먹기도 했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밥을 배불리 먹는 것보다 기뻤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모두가 주님의 은혜였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나를 예쁘게 보셨는지 머리에 지혜와 총명을 주셔서 전교 2등을 할 수 있게 하셨고, 그래서 등록금 내지 않고 장학금을 받으면서 공부할 수 있도록 축복해 주셨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오빠에게서 서예를 배웠고, 교육열이 가장 높다는 강남 압구정동에서 서예학원을 차리게 되었습니다. 학원을 운영하다 보니 수시로 수강료를 받기 때문에 주머니에는 항상 돈이 있었는데 매 주일 교회에 가서 예배드릴 때면 주님의 은혜가 감사해 돌아갈 교통비만 남겨놓고 모두 다 헌금을 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렇게 모두 드리고 가면 월요일에는 꼭 새로운 학생이 등록을 해서 필요한 물질을 채워주시는 신기한 경험을 많이 했었습니다.
제가 남편 목사님을 만난 것도 서예학원을 할 때였습니다. 우연히 잘못 걸려온 전화로 만남을 갖고 결혼을 했습니다. 그때 남편은 건실한 직장 생활을 할 때였기에 우리는 현대아파트를 사서 신혼생활을 할 정도로 여유로움이 있었고, 승용차를 두 대씩이나 몰 수 있는 물질의 은혜를 주셨었습니다. 저는 그때 이제 그동안의 힘들고 어려웠던 생활은 끝났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만이 늘 함께 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신혼의 단꿈에 젖어 있던 어느 날, 느닷없이 남편이 회사에 사표를 쓰고 목회를 하겠다고 했습니다. 시아버님이 목회자이셨지만 남편은 목회 한다는 소리를 하지 않았기에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습니다. 남편을 처음 만날 때부터 남편은 신실한 신앙과 믿음을 갖고 있었고, 기도도 열심히 하는 모습에 많은 은혜를 받았는데 그런 남편이 이제는 목회를 해야겠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기도를 하면 목회자의 길을 가야한다는 성령의 음성이 들려온다고 했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신앙생활을 해왔기에 목회자의 길과 사모로서의 길이 어떤 것인가를 알 수 있었습니다. 또한 나는 사모로서의 그릇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결사적으로 6개월을 반대하며 남편을 설득했지만 결국은 남편을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남편이 주의 길 가는 것이 확정되자 나는 근심거리가 생겼습니다. 사모는 음식도 잘해야 하고 피아노를 칠 수 있어야만 남편을 도울 수 있고, 찬양도 은혜롭게 잘 불러야 하며 가르치는 것도 잘 해야 하는데 저는 잘하는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면서 주님 앞에 저의 이런 심정을 토로했습니다. 그런데 주님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말을 잘 하지 않느냐...”
어렸을 때 못 먹어 몸이 쇠약해 폐결핵 걸린 적도 있었고, 오빠 가게에 불이 나서 다리에 큰 화상 자국도 있고, 한쪽 귀는 다쳐서 때로는 잘 들리지 않을 때도 있기 때문에 스스로 늘 뒤쳐진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한 가지 잘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말 잘한다는 소리를 곧잘 듣곤 했는데 기도할 때 주님께서 그것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내가 잘 할 수 있는 것은 말밖에는 없는데 그러면 말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 어린아이처럼 곰곰이 생각해 봤습니다.
기도가 생각났습니다. ‘그래, 기도를 열심히 하면 되겠구나! 그러면 남편의 목회를 잘 도울 수 있잖아!’ 생각해보니 정말 좋은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하루 5시간씩 기도하기로 결심하고 기도에 전념을 하게 되었습니다.
강서구 화곡동에 교회를 개척해서 4-5년 정도 되었을 때 교회가 성장하였습니다. 그래서 강서구 등촌동에 100평 정도의 상가 건물을 사서 이전을 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 화곡동에 있는 교인들이 10분 정도의 거리에 있는 등촌동 교회까지 열심히 다녔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차츰차츰 거리가 먼 관계로 조금의 일이나 사정이 생기면 교회를 빠지곤 했습니다. 그리고 연이어 거리가 멀어서 다니기가 불편하다고 하며 집 근처에 있는 교회를 다니겠다고 하는 성도들이 생겼습니다. 거리가 멀어 신앙이 떨어지는 것보다 가까운 교회에서 신앙생활 잘 하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하면서 성도들을 떠나보냈습니다. 대부분 불신자들을 전도해서 신앙생활을 하신 분들이다 보니 신앙이 쉽게 뜨거워졌고 또 쉽게 식어졌습니다. 당시만 해도 아직 목회 경험도 없고 부족한 점도 많았기에 사랑하는 성도들이 떠나가는 것을 몸 둘 바 몰라 했습니다.
그렇게 1년 정도가 지나자 열심을 냈던 목회가 무기력해지고 허무해졌습니다. 그뿐 아니라 우울증까지 찾아왔습니다.
신명기 8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로 내모신 것은 너를 낮추기도 하시고, 주리게도 하시면서 네 마음이 어떠한지를 보시려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광야는 훈련장소입니다. 시험의 장소이기도 하고 연단의 장소이기도 합니다. 나는 모든 것을 내려놓았습니다. 당시만 해도 목회는 내 열심만으로 하는 줄 알았는데 목회는 주님의 일이기에 주님의 개입함이 있어야만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좀 더 큰 은혜를 주시기 원하셨습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기도하던 날이 지속되던 나날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주님 앞에 내려놓고 기도에 전념을 하게 되니 내 심령에 가난함과 정결한 은혜가 부어졌습니다. 그렇게 팔복의 은혜가 심령 깊숙한 곳에서 자욱한 안개처럼 젖어 들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내 평생에 잊을 수 없는 은혜의 날! 감격의 날! 눈물의 날! 감사의 날이 찾아 왔습니다. 기도를 하고 있는데 내 눈 속이 환하게 광명하게 밝아지고 있었습니다. 분명 눈을 감고 있었는데 감고 있는 눈 안에 또 하나의 눈이 있는 것처럼 무엇인가 보였습니다. 영적인 눈이 열린 것입니다. 그리고 열린 눈앞에 밝은 빛이 내 앞에 서 있었습니다. 빛이 서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빛은 광채가 났으며, 스포츠 야간 경기할 때 환하게 비춰지는 라이트의 강열함 같이 무척 밝았으며 투명한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빛이 내속에서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순간적으로 ‘어머, 주님이시구나’ 라는 생각이 스쳤습니다. 주님이 내게 빛으로 찾아와 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빛 속에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난 너에게 목숨을 주었는데 너는 날 위해 무엇을 주겠느냐?”
그 음성을 듣자 나는 몸 둘 바를 모르며 엉엉 울면서 통곡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말씀이 내 심령 깊숙이 들어와 나를 찔러 쪼개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을 하시는 그 순간 내가 주의 일에 충성하지 못했던 많은 일들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더 사랑하지 못한 죄, 더 기도하지 못한 죄, 더 전도하지 못한 죄, 남을 미워했던 죄, 등등 많은 죄들이 생각났습니다.
회개의 영이 임해서 모든 것을 주님 앞에 자백하며 회개했습니다. 주님께서는 “네가 죽도록 충성하기를 원한다.” 라고 말씀하시곤 홀연히 사라지셨습니다. 나는 한없이 울고 또 울었습니다. 그렇게 주님을 만나고 오랜 기도를 마친 후 눈을 떠보니 얼마나 많은 눈물이 쏟아졌던지 온 바닥에 눈물과 휴지가 범벅이 되어 있었습니다.
대구로 부흥회를 갔었을 때의 일입니다. 집회에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나타났고 참석한 분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듬뿍 받았습니다. 그 집회에 멀리서 오신 분이 계셨는데 그는 부산에서 기독교 서점을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첫날 저녁 집회를 참석한 후 그분은 다음날 서점운영을 하기 위해 돌아갔지만 저녁에 다시 참석하여 저에게 귀한 책을 선물하셨습니다. 예수님 이후 현 시대에 크게 쓰임 받았던 치유사역의 거장들이라는 두툼한 책이었습니다.
순서대로 열거해 보면 치유의 사도 죤 알렉산더 도위, 성령님의 증명자 마리아 우드워스 -에터, 웨일즈 부흥의 주역 에반 로버츠, 오순절의 아버지 챨스 에프 파햄, 오순절의 촉매자 윌리암 제이 세이모, 치유의 사람 죤 지 레이크, 믿음의 사도 스미스 위글스워스, 성취의 여인 애미 샘플 맥 퍼슨, 기적을 믿은 여인 캐더린 쿨만, 놀라운 이적과 기사의사람 윌리암 브랜햄, 담대한 믿음의 사람 잭코,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 에이 에이 알렌입니다.
여러분은 이들 중에서 어떤 분의 이름을 알고 있습니까,
책 머리말을 읽어 보았더니, 대부분 이들에게는 특별한 공통점이 네 가지가 있었음을 밝혀 놓았습니다. 내가 볼 때 상당히 중요한 부분이라고 여겨집니다.
첫째,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했을 때의 체험을 평생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둘째, 이들은 하나님의 능력이 자신들의 삶을 통하여 역사하기를 강렬하게 소원하였습니다.
셋째, 이들은 한결같이 환상을 통해 하나님이나 예수님을 직접 만났습니다.
넷째, 이들은 사람들의 비난에 주눅 들지 않고 자기의 가야할 길을 끝까지 갔습니다.
이 열 두 명의 위대한 사역자들의 공통점 가운데 하나가 주님을 직접 만난 경험을 갖고 있는 것을 보고 저 자신에게도 큰 힘과 위로를 얻었습니다.
주님을 만난 후 많은 깨달음 속에 영적 충전을 해 나갈 때 예전과 달리 기도만 하면 내 눈이 뜨거워졌습니다. 한 달 가까이 기도만 하면 마치 따끈한 호빵을 두 눈에 올려놓은 것처럼 뜨거웠습니다. 병원에 가면 레이저 빛을 쬐듯이 뜨거운 빛이 내 눈을 비췄습니다.
환상!
어떤 분을 통해 들었던 그런 증상은 영적인 눈이 열리고 환상이 열리는 것이라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기도하면서 내가 아는 어떤 분에 대해서 성령님께 물어 보았습니다.
“성령님 그 분의 실상을 보여주세요...?”
그렇게 기도하자 생각지도 않게 물어본 사람에 대한 상황이 마치 칼라 TV가 켜지듯 켜지면서 그 분에 대한 모습이 보였습니다. 아람 나라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침공하려고 할 때 그 모든 계획을 침상에서 조차 일어나는 일까지도 엘리사가 모두 보았습니다. 마치 그와 같은 일이 저에게도 일어났습니다.
여기서 조심스럽게 말합니다. 나는 절대로 신비스러운 사람이 아닙니다. 신비주의적인 신앙관을 가진 사람도 아닙니다. 어느 날 제 자신을 내려놓고 기도하다가 성령의 불을 받고 그 불이 내 눈에 비춰진 영적 상황을 경험한 것을 밝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저에게 주신 환상의 은사를 통하여 주의 일을 하게 되니, 모든 것이 은혜와 간증임을 고백하고 싶을 뿐입니다. 저는 앞으로 저보다 더 귀한 분들이 하나님 앞에 잘 세워지고 다듬어져 이와 같은 귀한 은사를 받아 하나님의 일을 잘 감당해 나가기를 바랍니다.
이후 그 기름부음이 손으로 오면 손이 무척이나 무겁고 뜨거웠습니다. 그때 아픈 사람을 기도해 주면 놀라운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예를 들어 팔다리 한쪽이 8cm나 짧았던 고등학생에게 그 때 기도를 해 주고 나니 팔다리가 길어져서 양쪽이 똑같아지는 것이었습니다. 크나 큰 교통사고로 5살 때 한쪽 눈이 실명된 교인이 있었는데 눈에 손을 대고 기도하니까 30년 만에 그 눈이 떠지는 것이었습니다. 성도들이 아프다고 찾아왔을 때 아픈 곳에 손을 얹은즉 낫습니다. 지금도 기도하면 눈이 뜨겁거나 손에 기름부음이 흐릅니다. 치유사역이나 예언사역은 내가 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소문으로 찾아온 분들을 기도해 주다보니 자연스럽게 성령사역을 하게 되어진 것입니다.
5년 동안 부흥집회를 국내외로 다니게 된 것도 그렇습니다. 저희 부부는 어느 부흥단체에 소속되어 있지 않습니다.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기 전에는 부흥회를 한 번도 나간 적이 없습니다. 누가 불러주어야지요. 그러나 주님 만난 후 소문이 퍼지게 되었고 이것을 출판사에서 책을 내주겠다고 해서 출판한 책이 “내가 예언과 환상과 꿈을 주리라” (예찬사)입니다. 이 책은 출간된 지 어느덧 6년이 되어졌는데도 꾸준히 팔리고 있으며, 지금도 갓피플에 들어가 보면 알 수 있듯이 항상 베스트셀러 위치를 지키고 있습니다.
2005년 9월부터 시작된 영성집회는 만 5년이 되어지도록 한 번도 쉰 적이 없을 정도로 큰 은혜가 흐르고 있습니다. 성령의 기름부음을 사모하는 수천 명의 주의 종과 성도들이 찾아오셨습니다. 새털처럼 가벼운 제가 쓰임 받는 것 자체가 행복이요, 축복임을 간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