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포리아 시대, 아르케는 영혼의 정신의 아레테가 필요하다!
지금의 시대는 aporia의 시대이다. 아포리아는 그리스어로 해결점이 보이지 않는 막다른 상태, 난관이 상태를 의미한다. 아포리아 시대를 넘어가려면 아르케(arche)즉 우주근본의 본질을 찾아야 한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아르케는 무엇인가? 아레테(arete)에서 찾으면 어떨까 한다. 아레테는 그리스어로 탁월함이란 뜻이다. 그렇다면 어떤 탁월함을 우리는 갖추어야 할까? 권력? 명예? 재산? 신체적 탁월함? 이를 넘어서는 정신적 아레테가 필요하다.
조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며 돈 많은 상민이 양반을 사기도 하는 등 신분제 사회에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세계대전을 겪으며 인간들은 동료와 가족이 죽음을 맞이하는 것을 지켜보며 누구를 위해 목숨을 바쳐 싸워야 하는 것인지 존재론적인 의심을 품게 된다. 이렇듯 전쟁은 인류사의 흐름을 바꾸는 결정적 계기가 되기도 한다. 고대 그리스 대철학자인 소크라테스 또한 마찬가지였다. 소크라테스 2차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겪으며, 특히 전쟁 통에 인육을 먹는 사람들을 보며 인간의 삶에 대해 성찰하게 된다. ‘인간이란 무엇이며, 사는 것은 무엇인가?’ 존재론적인 의심을 품게 된 것이다.
고대 그리스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바르게 사는 삶, 인간다운 삶은 곧 국가를 위해 충성하고 권력과 명예를 얻고, 내 권리를 위해 언변학을 배우는 등 자신의 외적 성공이라고 믿는 시대였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전쟁을 겪으며 외적인 삶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고 반성하며, 자신의 무지를 깨달아 지혜에 도달하는 삶이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는 삶임을 주장한다. 정의, 용기, 지혜에 관심을 갖고,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는 삶, 그래서 그 유명한 ‘하루라도 자신의 삶을 검토하지 않는 사람은 살 가치가 없다, 너 자신을 알라’ 등 명언을 남기게 된다.
소크라테스의 제자 플라톤 역시 스승의 죽음과 전쟁을 경험하며, 자신의 내면성찰을 강조한다. 그러나 플라톤은 ‘동굴의 비유’를 통해 내면성찰 뿐만 아니라 너와 함께 나아가는 삶이 곧 윤리적으로 나아가야 할 지향점임을 밝힌다. 동굴의 비유 그림을 보면, 쇠사슬에 묶인 사람들은 동굴에 비친 그림자가 실체인 양 믿고 따른다. 그러다 한 명이 동굴 밖을 나가 태양을 바라본다. 태양을 통해 밝아진 내 모습을 보며 본질을 깯닫는다. 곧 자기 내면을 들여다 본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끝나지 않고, 다시 춥고 가난하고 어두운 동굴로 그 사람은 들어간다. 가서 아직 쇠사슬에 묶여 있는 사람들을 동굴 밖으로 인도하기 위해 지혜와 지식을 설파하고 강제로라도 동굴 밖으로 인도하러 애쓴다. 즉 자신의 내면성찰이 끝난 후, 지혜를 얻은 후에는 자기만의 행복과 안위를 위해 동굴 밖에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춥고 어두운 암흑의 동굴로 다시 들어가 힘들고 지친 약자들과 손 잡고 함께 나란히 동굴 밖으로 따뜻한 세계로 나가려 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진정한 인문학적인 영혼의 정신의 아레테(탁월함)를 찾을 수 있다. 나만 잘 살고 행복한 삶은 바른 인문학적인 삶이 아니다. 을자, 힘든 자, 지친 자들을 바른 삶으로 인도하며 함께 손잡고 이들과 함께 변화를 시도하는 삶이야말로 진정한 인문학적인 삶이자 정신적 아레테인 것이다. 여러분은 어떤가? 나 혼자만의 이익과 권익을 위해 살고 있지는 않은가? 약자들이 좀더 덜 고통받고 덜 힘들어하는 세상으로 나아가도록 함께 손 잡고 나아가고 있는가?
나를 넘어 약자의 고통을 함께 나누며, 함께 변화시키고자 하는 영혼의 탁월성, 정신의 아레테가 곧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본질 즉 아르케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