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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의 철기는 중국 전국시대 철기의 영향을 받아 서기전 4세기경에 사용되었다. 초기에는 중국과 마찬가지로 주조철부(鑄造鐵斧)를 위시해 농공구류가 우세하였다. 철기의 자체적인 생산은 평안남도에서 주조틀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서기전 2세기경으로 보여진다. 이 때부터는 단조철기도 제작되기 시작하였다.
철기생산의 본격화 및 현지화, 제조기술의 발전은 다른 부분까지 영향을 미쳐 새로운 토기의 출현, 생산력의 증대와 같은 결과를 낳게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사회통합이 가속화되어 최초의 국가가 등장하기에 이른다.
철을 생산한 유적은 서북지방의 청천강유역, 중부지방의 한강 중상류지역, 경주지방에서 발견된 바 있다. 경기도 마장리 유적이나 대심리 유적에서는 야철지(冶鐵址)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그 부근에는 많은 사철(砂鐵)이 분포되어 있어 이 지역에서는 사철을 원료로 야철한 것이 분명하다.
경상북도 경주시 외동면 두계(斗溪)에는 삼각형으로 둑을 쌓아올리고, 정상부에서 밑으로 지름 1m, 높이 2m 정도의 용광로가 설치된 유적이 현존하고 있다. 이 야철지에서 채취한 철편을 분석한 결과, 이 곳에서는 사철이 아닌 철광석을 용해해서 철을 채취했음이 판명되었다. 실제로 경주군와 울산군 군계 일대에는 철광석이 많아서 최근까지도 철을 채취하고 있었다.
이 시대의 야철방법이 중국식을 답습한 것인지, 아니면 자체에서 개발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최근 중국에서 전국시대나 한대의 야철지들이 발굴된 예가 있다. 그 형태는 경주 부근의 야철지와는 달랐다. 이로 볼 때, 초기에는 중국식을 그대로 답습하다가 점차로 자체 개발한 것으로 추측된다.
우리 나라에 있어서 철기의 사용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학설이 있으나,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크게 두 단계로 나누어볼 수 있다.
첫째 단계는 중국제 철기가 들어온 시기이다. 서기전 4∼3세기에 해당하는 명도전(明刀錢)이 압록강 중류지방에서 서북지방에 걸쳐서 출토되고 있다. 명도전은 연나라의 동폐(銅幣)로서 표면에 ‘明’자가 양주(陽鑄)되어 있어서 붙여진 명칭이다.
평안남도 덕천군 청송리에서는 명도전이 철제이기와 함께 출토되었다. 또한 평안북도 위원군 용연동((龍淵洞)에서는 연나라 제품이 분명한 철도끼[鐵斧]·철촉(鐵鏃)·철창[鐵戈] 등과 함께 철낫[鐵鎌]·반월형철도(半月形鐵刀)·철괭이[鐵鍬]·철보습[鐵鋤] 등의 농기구가 일괄 발견된 바 있다.
이것들은 철기를 사용하던 연나라 영역에 살던 주민들이 들어왔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것이 우리 나라에 최초로 철기가 들어온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 시기의 철기는 주조로 된 농기구류가 주류를 이루고 있고, 무기는 여전히 청동제를 사용하였다. 중국에 있어서도 이 시기에는 단조철기(鍛造鐵器)가 보급되지 못하였고, 주조철기(鑄造鐵器)만이 일반화되어 있던 것과 같은 양상이 전개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에 한반도에 있어서는 세형동검(細形銅劍)을 표지로 한 청동제 무기가 성행하였다. 따라서 세형동검을 사용하는 곳에 주철제(鑄鐵製) 농공구가 들어온 것이다. 이렇게 청동기와 철기를 병용한 시대를 한국고고학에서는 ‘초기철기시대’로 구분하고 있다.
둘째 단계는 철기가 본격적으로 생산, 사용되기 시작한 시기이다. 서기전 108년 한(漢)나라 무제(武帝)에 의한 낙랑군(樂浪郡)의 설치는 철기문화가 본격적으로 유입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시기부터 철기는 우리 나라 전역으로 급속히 전파되었다.
즉 도끼·가래·낫 등 철제 농경구와 단검·창·꺽창을 비롯한 무기류가 전국적으로 생산,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경주 일원에는 철을 채취하던 원시 용광로 유적이 여러 곳에서 발견되고 있어서, 이 시대에 철생산활동이 활발했음을 엿볼 수 있다.
≪삼국지(三國志)≫ 위서 동이전(東夷傳)에 보면 서력서기후 3세기경 영남 일대에서 철이 많이 생산되어 낙랑(樂浪)·대방(帶方) 2군, 왜(倭)와 철을 교역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비단 3세기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 이전부터 있었던 일로 보인다.
이와 같이 철기생산의 전국적인 확산은 한나라의 세력에 밀려난 위씨조선인들에 의해서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이렇게 철기를 본격적으로 생산하게 된 시대를 전대의 초기철기시대와 대응되게 후기철기시대라 해랴 할 것이나, 한국고고학에서는 일반적으로 삼국시대 초기라는 의미에서 ‘원삼국시대’로 부르고 있다.
철기시대의 문화양상은 북부지역, 중부지역, 남부지역 등이 다소 차이를 보인다.
북부지역에서 가장 대표적인 철기시대 유적은 평북 위원 용연동, 영변 세죽리, 함북 회령 오동 유적 등이다.
세죽리 유적은 신석기시대층, 청동기시대층, 철기시대층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철기시대층은 가장 윗층으로 집자리는 모두 지상가옥이다. 집자리에서 명도전, 포전(布錢) 등의 화폐와 승석문토기 및 철기 들이 출토되었다.
이 시기의 무덤에는 토광묘, 조개무덤, 옹관묘 등이 있다. 유물로는 철기, 청동기, 토기 등이 있다. 그 중 철기로는 호미, 괭이, 삽, 낫, 반달칼, 도끼, 자귀 등이 있다. 토기에는 회색의 승석문토기가 있다. 연대는 서기전 3∼2세기로 보고 있다.
회령 오동 유적에서는 제6호 주거지에서 주조철부가 출토되었다. 북한학자들은 서기전 6∼4세기경으로 편년하고 있다.
무산 호곡동 유적에서는 철기시대의 주거지들이 조사되어 1기에서 6기로 나누어진다. 그 중 5기와 6기에 속하는 주거지가 철기시대에 속하며 다수의 철기를 포함하고 있다. 5기를 서기전 7∼5세기로, 6기를 서기전 3세기로 편년하고 있다.
그러나 5기에 속하는 주거지에서 주조철부가 출토되고 있어 이를 서기전 3세기경으로 낮추어 볼 수도 있다. 북부지역의 철기문화는 세형동검이나 토광묘의 등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토광묘는 북한에서 움무덤(토광목관묘), 나무곽무덤(토광목곽묘), 귀틀무덤(대형석실분, 목실분)으로 구분하고 있다. 토광묘의 서기는 중국에서 찾을 수 있다. 단장의 토광목곽묘가 은대(殷代)로부터 동주시대(東周時代)까지 계속 사용되었다.
토광묘가 북방계 청동기문화권에 들어와 처음 축조된 것은 요령성(遼寧省) 금서현(錦西縣) 오금당(烏金塘) 토광묘이다. 여기에서는 요령식동검과 진과(秦戈)가 함께 출토되어 그 시기를 춘추 전기(春秋前期)로 보고 있다.
그 다음의 토광목곽묘은 심양(瀋陽, 現 沈陽)의 정가와자(鄭家窪子) 유적이 있다. 여기에서는 인골과 함께 많은 청동기와 토기가 발견되었다. 연대는 춘추 말~전국 초인 서기전 5∼6세기로 보았다.
대동강유역에서 가장 이른 토광묘 유적은 재령군 고산리 유적을 들 수 있다. 여기서는 변형 요령식동검과 도씨검(桃氏劍) 2자루가 발견되었다. 연대는 전국 말에 해당하는 서기전 4∼3세기로 보고 있다.
그 다음에는 강서 태성리 유적이 있다. 이 곳의 토광목곽묘에서는 세형동검과 동모, 철부, 철단검이 출토되었다. 연대는 서기전 2세기 후반으로 보고 있다. 이는 북한에서 움무덤을 서기전 5세기에서 2세기 중엽으로, 나무곽무덤을 서기전 2세기 중엽 이후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토광묘는 세형동검이 유행하던 시기에 서북한지역으로 전래되었으며, 뒤 이어 철기가 혼입되었다고 생각된다. 이 시기의 유물에는 세형동검, 세문경, 동모 등의 청동기, 쇠단검, 쇠농공구, 쇠뇌 등의 철기, 화분형토기(花盆形土器), 배부른 단지 등의 토기가 있다.
그 밖에 철기시대 초기의 유적으로서 청동기와 철기가 공반되는 유적에는 서흥 천곡리 석관묘, 황해도 송산 솔뫼골 위석묘, 함흥시 이화동 토광묘 등이 있다. 다만, 가장 이른 시기의 유적인 서흥 천곡리 석관묘의 경우, 석관묘에서 출토된 검파두식을 철광석제로 보고 있어 철기시대의 유적으로 분류할 수 없다고 본다.
이상과 같이 북부지역에서 철기문화의 시작은 토광묘의 유입 및 세형동검의 등장과 깊은 관련이 있다. 대체로 세형동검이 만들어진 후 토광묘가 유입되면서 철기가 등장되었다고 보는 것이 무난하다.
철기시대의 시작연대는 북한학자들이 서기전 7세기경까지 올려보고 있다. 그러나 이는 연대추정의 근거가 불확실하고, 대체로 서기전 4세기경으로 보는 것이 무난하다.
처음 철기가 유입되는 시기에는 승석문 등 타날문이 있는 토기에 앞서서, 서북지역에서는 미송리형토기, 묵방리식토기, 우각형파수부토기 등이, 동북지역에서는 꼭지손잡이토기, 우각형파수부토기, 흑도 등 무문토기계통 토기가 사용되었다.
중부지역의 대표적인 철기시대 유적으로는 가평 마장리, 이곡리 유적과 춘천 중도 유적을 들 수 있다. 마장리 유적은 미군장교에 의해 조사된 후 국내에도 소개되었다. 이 유적은 서기전 2세기경부터 서력서기 전후에 걸친 유적으로 보았다.
여기에서 나온 C14연대는 1700±250B.P.(A.D. 200)이 나왔다. 가평 이곡리 유적은 철기Ⅰ기와 Ⅱ기로 구분된다. 연대는 중도 유적의 연대를 받아들여 1∼2세기경으로 보고 있다.
춘천 중도 유적은 주거지와 적석총 등이 조사되었다. 제1·2호 주거지의 연대를 북창 대평리 유적과 비교해 1∼2세기경으로 보고 있다. 제2호 주거지에서 채집된 C14연대는 1534±95B.P.(A.D. 415)가 나와 추정연대와 상당한 폭이 있다.
이 외에도 조사된 유적으로 경기도 수원 서둔동 유적, 강원도 횡성 둔내 유적, 양양 가평리 유적, 충청북도 중원 지동 유적, 하천리 유적 등이 있다. 그리고 최근에 조사된 강원도 명주 안인리 유적에서는 呂자형 주거지와 凸자형 주거지가 발견되었다. 유물은 경질무문토기, 타날문토기, 회색토기 등의 토기류와 철기류가 출토되었다.
이들 주거지 유적에서는 경질무문토기와 타날문토기가 공반되어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아직까지 청동기시대를 잇는 철기시대 초기 유적의 존재가 분명하지 않다. 이 시기의 무덤에는 토광묘(土壙墓), 옹관묘(甕棺墓), 적석총(積石塚), 즙석분(葺石墳) 등이 있다.
토광묘는 가락동 유적에서 처음 알려졌다. 가락동 유적은 1호분이 토광목관묘이고, 제2호분은 즙석봉토분으로 목관묘와 옹관묘가 합장된 형식이다. 이 즙석봉토분은 한강유역에서만 유일하게 발견된 형식이다.
석촌동 3호분 동쪽에서도 즙석봉토분, 토광묘, 옹관묘 등 여러 기가 조사되었으나 그 연대를 모두 3세기 중엽 이후로 보고 있다.
최근에 조사된 진천 송두리 유적은 2기의 토광목곽묘로부터 중부지역에서는 처음으로 남부지역에서 보이는 소위 와질토기계통의 쌍이부원저호 및 주머니호 등이 철부, 철낫, 청동기 등과 함께 출토되어 주목되었다.
천안 청당동 유적에서는 다수의 토광목관묘가 조사되었다. 유물은 연질단경호와 심발형토기, 청동제 마형대구(馬形帶鉤) 11점과 다량의 유리구슬이 출토되었다. 안성에서도 연질계 토기가 청동제 마형대구와 함께 출토되었다.
이와 같이 와질계 토기는 낙동강유역과는 다르게 원삼국시대 초기가 아닌 2∼3세기경의 토광묘에서만 나타난다. 이것은 와질계 토기의 중심지인 낙동강유역에서부터 파급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옹관묘는 가락동 2호분과 같이 토광묘와 합장으로 발견되거나, 단독묘일 경우에도 적석총과 같은 다른 묘제에 종속되어 나타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연대는 3세기 이후로 보고 있다.
적석총은 양평 문호리, 춘천 중도, 제원 양평리, 제원 도화리 등 한강 상·중류에서 2∼3세기경에 해당되는 무기단식 적석총이 발견되었다. 4세기 중반 이후에는 서울 석촌동 부근에서 기단식적석총으로 발전된다.
이와 같이 중부지역에서는 청동기문화 후기와 직접 연결되는 유적이나 서북지역의 대동강유역과 낙동강유역에서 발견되는 초기 토광묘 유적들이 전혀 발견되지 않고 있다. 또한 모든 묘제가 2세기 또는 3세기경 이후로 편년되고 있다. 따라서 현재의 자료로서는 중부지역에서 철기문화의 형성과정을 구명하는 일은 매우 어렵다.
그런데 중부지역에서는 남부지역과는 달리, 단면원형의 점토대토기 등 후기 무문토기를 계승하는 토기로 단면삼각형의 점토대토기의 존재가 극히 적다. 이에 비해 중도식토기를 비롯한 경질무문토기가 여러 유적에서 발견되고 있다.
하천리 2호 주거지에서는 경질무문토기만이 출토되고 있다. 이를 한강유역에서는 가장 이른 시기의 토기로 보고 있다. 또한 최근에 조사된 명주 안인리 유적에서도 이른 시기에 해당되는 주거지에서 경질무문토기가 많고 타날문토기는 적게 나타나는 경향이 보이고 있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따라서 중부지역에서 철기시대 초기에는 경질무문토기만이 사용되었던 시기가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여진다.
남부지역의 철기문화는 대체로 4기로 구분된다. Ⅰ기는 청동기사회에 철기유물이 유입되는 단계로 연대는 서기전 2세기경이다. Ⅱ기는 철기가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단계이나 여전히 청동기나 경질무문토기가 사용되며, 무덤으로 목관묘와 옹관묘가 있던 시기이다.
경질무문토기는 청동기시대의 무문토기와 같은 계통이나 경도가 높아지고 기형이 다양한 토기를 말한다. 이 시기의 연대는 서기전 2세기 말 또는 서기전 1세기 초반에서 서기 1세기 전반까지로 설정된다.
Ⅲ기는 완전히 철기문화에 접어든 단계로 타날문토기, 회백색연질토기(와질토기)가 사용되며 철기류와 장신구류가 많아지며, 무덤으로는 여전히 목관묘(木棺墓)가 사용된다. 이 시기의 연대는 1세기 중엽에서 2세기 전반까지로 설정된다.
철기에는 철도끼·철창·철검·철촉 등의 무기류와 철낫 등 종류가 매우 다양하며, 그 중에서도 주목할 것은 철도끼이다. 도끼 중에는 실제로 사용한 것도 있으나, 태반의 도끼들이 길이가 필요 이상으로 길고 납작해 실용하기에는 부적합한 것들이다.
이러한 대형 철도끼들은, 후에 신라고분에서 다량 출토되는 철정(鐵鋌 : 地金으로 사용됨.)과 유사하다. 이러한 대형 철도끼형 철기들은 교역의 매체로 사용되었음이 분명할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 철의 생산이 자체 수요를 훨씬 능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타날문토기는 노천요(露天窯)에서 구워낸 무문토기와는 전혀 다른 것으로 일부는 물레로 성형(成形)해 등요(登窯)에서 구워낸 것이다. 기벽을 강화하기 위해 박자(拍子)로 기벽을 때린 타날문(打捺文)이 있는 토기를 말한다.
그리고 소성도(燒成度)가 낮아서 흡수성이 있고 개와(蓋瓦)와 비슷한 연질의 토기이기 때문에 소위 와질토기(회백색연질토기)라는 명칭이 생겨났다. 이 토기들은 물레로 빚었기 때문에 토기의 벽이 얇고 표면이 고르며 기종도 다양하다.
Ⅳ기는 철기문화가 발달하는 단계로 목곽묘(木槨墓)가 등장하고, 철기의 출토량이 많아진다. 목곽묘에서는 무기류가 증가하며, 패총에서는 회청색경질토기가 등장한다. 이 시기는 2세기 중엽에서 3세기 중엽까지로 설정할 수 있다. 그 다음 단계는 3세기 후반경 이후로 고총고분(高塚古墳)이 등장하는 시기이다.
남부지역 철기문화의 형성과정은 전 지역이 동일한 과정을 거쳐 이루어졌다고 보기 보다는 최소한 두 계열에 의해 유입된 문화를 수용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 과정에서 남부지역 내에서도 지역에 따라 각기 다른 양상을 보인다.
토광묘를 중심으로 하는 문화는 대동강류역으로부터 육로(陸路)를 이용해 낙동강유역으로 파급된 문화를 바탕으로 형성되었다. 이것은 토광묘에서 철기와 함께 중국의 전한(前漢)대에 제작된 일광경(日光鏡), 소명경(昭明鏡)·가상부귀경(家常富貴鏡) 등 거울 등이 발견되고 있기 때문이다.
패총 및 옹관묘의 문화는 해로(海路)를 통해 서해안과 남해안을 거쳐 동남부지역으로 파급된 문화를 바탕으로 형성되었다. 이것은 패총에서 화천(貨泉), 오수천(五銖錢) 등 중국의 화폐와 복골(卜骨)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이 두 계열의 문화는 세부적인 면에서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두 문화가 접합되는 낙동강 하류지역에서는 두 계열이 어느 정도 공존했음이 유적에서 나타나고 있다.
남부지방 철기문화의 초기단계에서의 성격문제는 낙랑(樂浪)의 등장과 관련시키는 것이 통설이다. 그러나 오히려 그 이전인 위만조선(衛滿朝鮮)의 건국을 전후하는 시기에 한반도에 들어온 철기문화의 여파가 남부지역까지 도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것은 남한지역에서 발견되는 초기의 철기는 주조철부 등으로 있고, 낙랑과 직접 관련되는 유물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종래 철기문화의 형성은 대륙으로부터 유입된 철기문화가 주류를 이루면서 남부지역의 철기문화를 형성하였다는 입장을 유지해왔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시각에서 벗어나 남부지역의 철기문화가 밖으로부터 유입된 새로운 문화와 기존의 토착문화가 융합되어 새롭게 생성되었다는 관점에서 접근하게 되었다.
이러한 해석의 근거는 고고학적 자료에서도 확인된다. 즉, 철기가 유입되는 시기에도 여전히 석기나 청동기가 사용된 점, 청동기가 소멸된 후에도 무문토기의 계열인 경질무문토기와 적갈색연질토기가 계속적으로 사용된 점, 특히 철기 중에서 초기에는 청동기를 모방한 유물이 많은 점 등이다.
다만, 철기의 제작기술은 외부로부터 유입되었다는 것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남부지역의 철기문화는 외래적인 문화요소가 많다고 하더라도 토착적인 청동기문화에 이어 변화·발전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철기시대는 역사적으로 보아 북부지역에서는 고조선(古朝鮮)과 위만조선(衛滿朝鮮)에 이어 고구려(高句麗)가 등장하는 시기이고, 남부지역에서는 삼한(三韓)이 자리잡았던 시기이다. 서울지역, 경주지역, 김해지역에서는 철기문화를 바탕으로 하는 독자적인 중심 세력이 형성되면서 각각 백제, 신라 및 가야 등으로 발전되어나갔다
출처:네이버지식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