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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감긴 통제언론]에 시민들 "분노폭발"
신군부, 보도지침 진실왜곡방송 종용 [광주상황]계엄분소 발표문만 내보내
전국여고앞 수만여 시위대 군·경저지선 속속 돌파…도청접수"눈앞에"
광주MBC 건물에 갑자기 불기둥이 치솟아 오른다.
20일 밤8시40분께 전남여고앞 제봉로 일대는 수많은 시민들의 함성과 MBC건물에서 솟은 불길로 시민봉기의 절정을 이룬다.
밤9시께 노동청 앞에서부터 제봉로와 중앙로가 만나는 구 시민관 사거리까지 운집한 1만여군중을 해산시키려는 듯 육중한 굉음을 울리며 장갑차 한대가 맹렬한 속도로 달려온다. 황급히 흩어지는 시민들. 그러나 잡시후 거리는 다시 모여든 군중들로 가득 메워지고 그들은 외치기 시작한다.
[계엄군 물러가라.] [관제언론 MBC를 불태워라.] MBC건물은 다음날 새벽 1시까지 계속탄다.
시민들은 여전히 노동청앞에서 군경저지선을 치고 가로막고 있는 공수대들을 향해 분노의 함성을 보내고, 화염병을 날리고, 곧이어 불붙은 택시를 대민다.
조금씩 후퇴하기 시작하는 군경저지선. 그들은 서서히 도청안으로 밀려들어 가기 시작한다.
도청 3층의 도지사실은 이때 이미 폐쇄되고 장형태 전남지사는 1층 서무과로 피한다. 잠시후 상무대 계엄사령부로 피신한다.
밤10시10분께 도청을 에워싼 시민들은 시시각각 군경저지선으로 압축해들어온다. 이제 도청은 함락 일보 직전의 성채와도 같다. 경찰력은 완전 마비다. 외부와의 연락은 오직 무전기 한대. MBC가 불탄데 이어 KBS도 분노한 군중들에 의해 타기 시작한다.
방송은 중단된지 오래. 광주는 이날 한반도에서 가장 고립된 섬으로 남는다.
온 시민들은 모두 도청쪽을 향해 몰려들고 시내는 곳곳에서 지른 불길로 환하고 가끔 공포탄소리, 이어지는 함성으로 마치 그 옛날 파리 콤뮌 바스티유감옥이 함락될 때 이러했는가 싶다.
세무서등 관청방화
MBC건물 방화는 20일 밤시위의 절정이다.
택시차량 시위대가 등장한데 이어 방송국과 노동청, 세무서 등 관청에 대한 방화가 일어나면서 광주의 양상은 겉잡을 수 없는 [민중 봉기]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단순한 계엄에 반대하는 학생들의 시위정도가 아니다. 새롭게 태동한 권력에 대해, 군부쿠데타 세력에 대해 분명히 민중전체의 목소리로 [반대다]를 외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민들은 왜 MBC를 불태웠나. 잠시 당시 언론의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80년 1월 18일 MBC 보도부 부부장 박봉간씨는 보도부 사무실에서 광주보안대 수사관들에 의해 연행된다.
차장 심재화, 수습기자 최황묵등과 함께. 이들은 계엄포고령을 위반했다는 혐의로 끌려간다.
79년 12월 광주시 서구 사동에 있는 무진회관내 반공관에서 남파간첩 장비전시회 도중 소련제 권총도난 사건이 있었는데 이를 보도통제도 받지 않고 방송했다는 이유다.
언론가에는 보도통제, 사전검열 등의 한파가 몰라친 상태다. 당시 모든 신문 방송은 전남도청내 검열관실의 검열을 거쳐야 보도가 가능했다. 진실의 입을 틀어막은채 모두 계엄사령부가 제공한 보도자료만을 불어대는 앵무새가 된다.
시민들은 관제화된 언론에 분노한다.
80년 5월14일 시민학생들은 광주 언론에 대해 최초의 불만을 시위로 표출한다.
전남대생들은 궁동 문화방송 사옥 앞으로 몰려가 [언론인은 각성하라] [MBC는 각성하라]는 구호를 외친다.
계엄군은 이 시위로 즉각 1개분대를 문화방송사앞에 상주시킨다. 그러나 언론을 향한 시민들의 시위는 계속돼서 15, 16일에도 시위는 끊이지 않는다. 이 상황을 지켜보던 일부 언론인들은 진실을 알리기 위해 편집국을 박차고 모여든다.
16일 6시30분 금남로 가톨릭센터. CBS MBC KBS 3개 방송사 기자 60여명이 모여 [언론자유화선언]을 발표한다.
전일방송과 전남일보 전남매일은 15일 각각 언론자유화 선언을 발표한다.
이 항거로 인해 이들은 군사정권에 의해 모두 거리로 쫓겨난다. 해직된 것이다.
19일 시민들의 시위는 더욱 거세지면서 취재중이던 CBS차량이 시민들에 의해 불탄다.
오후 3시20분께 시민들은 문화방송앞으로 몰려와 투석, 유리창이 깨지고 차량이 불탄다. 당시 광주에 대한 상황에 대한 보도는 계엄분소의 발표문외에는 전혀 허용되지 않은 상태. 이러한 언론에 대한 시민들의 비난, 개탄 그리고 분노를 넘어선 위협은 곧 방송사에 대한 방화 일보 직전으로 치닫는다.
MBC 박봉간심의실장 (당시 보도 부부장)에 따르면 19일까지도 방송은 계엄분소의 지시에 의해 [광주시내 소요사태와 관련, 단 한명의 학생이나 계엄군이 사망한 바가 없다]는 허위보도를 하게 된다.
그러나 이미 시내에서는 곳곳에서 시민들이 학생들의 주검을 병원에 실어나르고 있었던 것.
20일 오후1시 전남북 계엄분소는 정훈장교 (대위) 1명을 방송국에 상주시킨다. 오후2시 계엄분소장의 담화문과 시내에서 연행됐다 풀려난 시민·학생들의 명단을 1시간에 2회씩 방송하라는 지시가 내려온다.
정훈장교 방송국 상주
오후 6시50분께 대인동 시민관앞에 시위중이던 시민들은 대치중이던 계엄군의 저지선이 무너지자 순식간에 제봉로를 메워버린다.
이어 노동청쪽으로 물밀듯 밀려간다. 군경의 노동청 저지선에 부딪힌 시민들은 이번에는 방향을 틀어 MBC 앞으로 몰려온다.
당시 시위중이던 서채원씨 (현 서구의원)에 따르면 전남여고 앞에서 밀고 밀리는 대치를 계속하던 사이 8시40분께 시민들속에서 [어용방송 MBC를 부수어라]는 구호와 동시에 일제히 돌과 화염병이 MBC건물을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는 것. 이어 무너진 가로등 기동과 전신주등으로 내려진 셔터를 쿵쿵 짓부수기 시작하고, 곧이어 문이 열리자 시민들 한꺼번에 급류가 휘몰아치듯 사옥안으로 짓쳐들어간다.
1층세트실안에는 목제와 분장도구들이 가득했고 불이 여기에 붙자 도료 등 휘발성 물질이 타면서 불을 삽시간에 2층, 3층으로 옮겨붙는다.
20일에서 21일 아침까지 광주시내에서는 MBC를 비롯 30여개의 파출소 세무서 KBS 등이 모두 불에 타버린다.
김선문씨 (당시 시민군·현 서구의원)에 따르면 이날밤 가장 치열한 전투현장중 하나였던 광주역 부근에 있던 KBS건물앞, 밤 9시께 차량을 앞세운 시위대가 무등경기장쪽에서부터 광주역으로 밀려오기 시작하자 계엄군은 최루탄을 맹렬히 쏘아대기 시작한다. 또다른 시위대는 임동성당에서 중앙고속을 거쳐 광주역을 향하고 있다.
새벽 1시께 물밀듯 밀려드는 시민들을 향해 갑자기 새벽의 정적을 깨는듯한 요란한 콩볶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시민들은 모두 자기 귀를 의심했다.
설마 총소리일까. 그러나 순간 시위대 앞쪽에서 픽픽 시민들이 쓰러지기 시작한다. [앗 계엄군이 총을 쏜다. 피하라.]앞쪽에서 다급한 외마디 비명이 들린다.
시민들의 위세를 당하지 못한 계엄군은 이날 새벽 광주역에서 첫 발포를 한 것. 그러나 무수한 희생에도 불구 시민들은 새벽 5시30분께 밝아오는 여명과 함께 계엄군의 전략적 요충의 하나였던 광주역을 점거해 버린다. 이 와중에서 현 종근당 옆건물에 자리잡고 있던 KBS도 불타버린다.
시위대 광주역 점거
KBS는 MBC에 비해 피해가 덜하다. 1층에 있던 TV주조종실은 불탔으나 3,4층에 있던 라디오 조종실과 사무실 등은 다행히 전소를 면한다. 광주역앞에서 새벽 5시께까지 계속된 광주역전투는 치열하다 못해 혈전이다.
금남로전투 못지 않게 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하고 시내 전역에서 계엄군을 퇴각시키는데 결정적 공헌을 한다.
광주역은 당시 도청과 마찬가지로 최소한의 행정적 기능을 유지할 수 있는 상징적 장소였던 셈.
계엄군으로서는 병력과 장비를 보급받는 통로로서 전략적 거점이었기에 시민들을 향해 발포를 해가면서까지 지키려했던것.
새벽께 시내 전투는 계엄군의 발포와 함께 본격적인 시가전으로 돌변한다.
새벽 1시경에 시민들은 도청 뒤편 세무서로 몰려든다. 세무서도 순식간에 몰려든다.
세무서도 순식간에 불이 붙는다. MBC는 여전히 불타면서 화광을 시내 전역에 흘뿌린다. 이때다. 찢어질듯 젊은 여자의 흐느끼는듯한 분노의 소리가 확성기를 통해 시위대의 귓전을 친다.
광주 5·18의 잔 다르크와도 같은 전춘심의 목소리다. 시위대는 사기가 살아난다.
첫댓글 잊져서는 안될 우리의 불행한 현대사 입니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 그게, 다 5.18광주민주항쟁 결과물 입니다.
감사합니다.
잘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