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멜수도회의 성인 가운데
우리와 가장 가까운 시대를 살았던 성인으로
에디트 슈타인 성녀를 꼽을 수 있다.
성녀는 1891년 독일의 브레슬라우(현 폴란드 지역)에서
독실한 유다교 집안의 10남매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성녀는 어린 시절부터 상당히 영민했으며
사람과 사물에 대한 본질적인 것을 추구하는 성향이 강했다.
그래서 사춘기를 거치면서
삶에 대한 깊고 다양한 물음을 던지며 고민했다.
‘왜 살아야 하는가? 인간은 누구인가? 여성은 누구인가?
여성은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
남성과 여성의 관계는 어떠해야 하는가?
진리란 무엇인가?’
이런 일련의 실존적, 형이상학적 물음과
그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는 노력 속에서
에디트는 자신의 삶을 투신할 수 있는
더 숭고한 가치를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인류에게 봉사하려고 이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 이는 성녀가 그 이후 실존적인 결단을 내리고
앞으로 다가올 삶의 여정에 자신을 온전히 투신하는 데
근본적인 동기가 되었다.
성녀가 대학에 진학하고자 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으며,
이는 성녀가 끊임없이 추구하고자 했던 삶의 의미이기도 했다.
에디트가 고민했던 것은 인류에 대한 봉사와
삶의 의미에 대한 문제였다.
그래서 에디트는 브레슬라우 대학에서
심리학을 배우기 시작했다.
대학 시절 에디트는 공부만이 아니라 여성운동을 비롯해
자선단체를 통해 적극적인 봉사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진리에 대한 물음, 삶에 대한 물음은
성녀가 심리학에만 만족하지 못하게 했고
철학으로 학문적인 방향을 틀게 했다.
결국 에디트는 2학년을 마치고 괴팅겐 대학으로 옮겨
에드문트 후설의 문하에서 당시 새로운 학문으로 떠오르던
현상학을 비롯해 철학적 인간학을 깊이 파고들었다.
에디트는 이 두 분야를 통해 ‘인간이란 무엇인가?’,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진리란 무엇인가?’와 같은
근본적인 문제들을 심도 있게 파헤쳤다.
그러나 그 와중에 유럽을 휩쓴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에디트는 학업을 중단하고 간호사로서
적십자 산하 야전병원에서 봉사하며
고통 속에 있던 인류와 함께 삶을 살아간다.
전쟁이 끝나고 다시 대학으로 돌아온 에디트는
계속해서 학업에 정진해 1916년 후설이 옮겨서 강의하던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감정이입 문제에 관하여’라는 논문으로
독일 역사상 처음 여성으로서 철학 박사학위를 받게 된다.
그 뒤 약 2년 동안 후설의 조교로서 학문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대학에 팽배해 있던 남성 중심적 분위기로 말미암아
여성 철학자로서의 에디트의 길은 평탄치 않았다.
철학자인 에디트가
그리스도교 신앙의 세계를 처음 접하게 된 것은
어느 날 우연한 기회에 에디트는
물건을 사러 시장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
잠시 성당에 들러 기도하는 여인을 보았습니다.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서만 회당에 가는 유다인들과 달리,
일상의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하느님을 만나러 오는
그리스도교 신자를 보면서
에디트는 뭔가 다르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습니다.
에디트는 기도하는 그 여인의 모습에서
우리 가운데 지속적으로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보았습니다.
성녀는 이 체험을 통해 유다교가 전하는 하느님과 달리,
그리스도교가 전하는 하느님은
인간에게 가까이 계신 분이자 당신에게 도움을 청하는
모든 사람에게 개방적인 분임을 깨달았습니다.
또한 성녀는 우연히 방문한 성당의 내부가
반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한편은 가톨릭 신자들이 미사를 보는 곳이고
다른 한편은 개신교 신자들이 예배를 보는 곳이었습니다.
에디트는 이 색다른 성당 구조를 보면서,
“아! 이것도 가능하구나!” 하며 감탄했다고 합니다.
성녀는 이 체험을 통해 그리스도교가 전하는 하느님은
어느 한 민족에게만 국한된 분이 아니라
모든 이의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알아들었습니다.
또 한편 대학시절 절친한 벗이자 멘토였던
라이나흐의 죽음이었습니다.
사실, 에디트가 충격을 받은 것은 라이나흐의 죽음보다도
그의 부인이 자기 남편의 죽음을 받아들인 태도 때문이었습니다.
죽음을 넘어 영원한 생명을 바라보며 희망하는
그 부인을 보면서 에디트는 깊은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성녀는 이 체험을 통해 죽음을 넘어서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을 불어넣어 주심으로써
삶에 깊은 의미를 부여해주시는 하느님을 보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에디트가 결정적으로 영향을 받은 것은
1918년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의 「자서전」을 접하면서였다.
당시 에디트는 밤새 이 작품을 읽고
그동안 자신이 현상학과 철학적 인간학을 통해 추구했던
진리에 대한 해답을 발견했다고 확신했다.
마침내 1922년 에디트는 슈파이어라는 조그마한 마을에서
세례를 받음으로써
가톨릭 신앙인으로서의 새로운 삶의 여정을
시작하게 된다.
그리고 1922년부터 1933년까지 철학자이자 고등학교 교사로서
그리고 여성인권운동가이자 가톨릭 신자로서
다양한 강연과 저술활동을 통해 더욱 폭넓은 활동을 해나갔다.
그러나 1933년부터 불어닥친 나치즘의 영향으로
사회가 혼란에 휩싸이고
특히 유다인들에 대한 박해가 심해지자
에디트는 구약의 에스테르처럼 유다 민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제물로 봉헌하고자 십자가를 선택하게 된다.
이는 앞서 「자서전」을 통한 데레사 성녀와의 만남과 더불어
에디트가 가르멜 수녀원에 입회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결국 에디트는 1933년 쾰른 가르멜 수녀원에 입회하게 된다.
그리고 ‘십자가의 데레사 베네딕타’라는
새로운 이름을 수도명으로 받아
가르멜 수녀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그 와중에 나치의 유다인 박해는 더욱 극심해져 갔고
1938년에는 극으로 치달았다.
이에 쾰른 수녀원에서는 에디트를
네덜란드의 에히트 가르멜로 피신시키게 된다.
그러나 1940년 나치는 네덜란드를 침공했으며
그와 동시에 대대적인 유다인 박해를 시작했다.
결국 1942년 8월 2일 에디트는 언니 로사와 함께 붙잡혀
8월 9일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독가스실에서 살해당하고 만다.
그 뒤 에디트는 1987년 5월 1일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순교자로 시복되었으며,
1998년 10월 11일 시성됨과 동시에
비르지타 성녀, 가타리나 성녀와 더불어 ‘
유럽의 공동 수호성인’ 칭호를 받았다.
에디트 슈타인의 생애는
가톨릭 지성인이 어떻게 인간과 진리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에서부터 시작해
신앙에 귀의하는지 그 여정을 우리에게 잘 보여준다.
또한 가톨릭 지성인이 자신이 받은 지적 탈렌트를 통해
어떻게 교회에 봉사하고
인류를 위해 투신할 수 있는지도 보여준다.
성녀는 현대 철학의 대표적 분야인 현상학과
철학적 인간학을 통해 진리를 추구했으며
인간이 지닌 품위와 그가 실현해야 할 근본적인 성소를
새롭게 발견한 이 시대의 대표적인 가톨릭 지성이자
이를 바탕으로 여성의 존엄성과 성소를 발견하고
동시대 사람들에게 새로운 비전을 전해준
여성인권 운동가였다.
또한 1차 대전과 2차 대전을 겪으면서
인류의 고통을 몸소 받아 안고
인류의 화해와 평화를 위해 자신을 초개와 같이 내어던진
하느님께 봉헌된 희생제물이자
핍박받던 자기 민족의 구원을 위해
주님 곁에서 혼신을 다해 전구한
이 시대의 에스테르 왕후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예수의 성녀 데레사와
십자가의 성 요한의 영성 안에서 재통합해 낸 영성가였다.
성녀가 이 모든 것을 이루고자 선택한 궁극적인 길은
주님께서 가신 십자가의 길이었다.
결국 성녀는 이 모든 것을 끌어안고
가스실 속에서 산화해 갔다.
그래서 성교회는 특별히 에디트 슈타인 성녀에게 ‘
순교자’라는 칭호를 선사했다.
현대 가톨릭 지성인으로서 학문을 비롯해
이시대의 아픔과 교감하며 이 모든 것을
그 누구보다도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더불어
통합하고 몸소 살아냈기 때문이다.
성녀는 철학자이자 영성가로서 많은 저작을 남겼고
상당한 분량의 작품(27권 전집)이 전해진디.
경향잡지, 2012년 10월호, 윤주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