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 Phnom Penh Post 2011-10-7 (번역) 크메르의 세계 [번역:hojai, 편집:울트라-노마드]
[근조] 칼 발치 : 시엠립은 이 지역의 전설을 추모한다
Vale Karl Balch: Siem Reap mourns a local legend
기사작성 : Peter Olszewski
칼 발치(Karl Balch)의 갑작스런 죽음 소식이 퍼져나가자, 시엠립(Siem Reap)의 외국인 공동체는 비통한 충격에 빠졌다.
올해 47세로 아직도 젊은 발치는 게스트하우스의 오너이자 '영국대사관'의 위원으로도 활동했다. 그는 멋진 사내였고, 이 사원들의 도시에 1994년에 들어온 후 이곳의 외국인 공동체에서도 가장 열성적인 인물이기도 했다.
나는 불과 몇주 전에 프놈펜 에서 시엠립으로 가는 비행기에서 그의 옆자리에 앉았고, 그로부터 시엠립의 옛날 이야기들과 그의 향후 계획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바 있었다.
슬픈 일이지만 칼이 먼 미래를 갖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은 이제 분명해졌다. 그의 아내와 가족들에게 심심한 애도를 표하는 바이다.
아마도 본지(프놈펜포스트)가 지난 2008년 9월 25일자 보도에서 칼에 대해 소개했던 기사를 [이하에서] 다시 한번 공개하는 일은 그의 유산들을 가장 잘 기억하는 방법이 될 것이다.
(보도) Phnom Penh Post 2008-9-25 (번역) 크메르의 세계 [번역:hojai, 편집:울트라-노마드]
폴 포트의 유품을 간직한 선술집 주인
I'm keeping the pot : publican
'아이비'(Ivy) 바의 소유권이 바뀌면서 새롭게 단장한 일은 [시엠립의 명물거리인] '펍 스트리트'(Pub Street)의 역사적 사건이다. 이 지역의 오래된 사업체인 이곳의 모든 것이 함께 팔렸지만, 한가지 중요한 기념품만은 예외로 남았다. 그것은 캄보디아의 전직 권력의 자리인데, 바로 폴 포트(Pol Pot)의 좌변기 뚜껑이다.
(제공사진) 발치가 자신이 얻었던 상패를 들고 서 있다. 그 상패란 다름아닌 폴포트의 좌변기 뚜껑이다.
시엠립의 일부 [외국인] 거주자들은 그것을 아쉬워했지만, '아이비' 바의 오너였던 칼 발치(Karl Balch)는 오히려 자축을 하고 있었다. 본지와 회견하면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이비' 바의 매각은 이곳의 많은 이들에게는 상당히 큰 거래일 수도 있겠지만, 나에게는 그렇지 않다. 나는 10년이 채 못되는 기간 동안 이 가게를 갖고 있었지만, 내가 이 가게에 대해 보는 방식은, 이 가게를 팔기까지 9년이 걸렸다고 생각할 뿐이다. 나는 다른 일을 하고 싶다." |
물론, 이 가게의 역사는 발치와 함께 하고 있다. 그는 전설들의 저장고이고, 키가 크고 진실한 사람이며, 시엠립의 떠들썩한 '펍 스트리트'에서 제법 괜찮았던 '초창기'와 함께 했던 인물이다.
발치의 일화는 1990년대에 캄보디아에 흘러들어왔던 많은 이방인들과 유사하다. 그는 어떻게 정착하여 살아갈지에 대해 어떤 막연한 계획만 가진 상태에서, 폴 포트 정권 이후의 시대를 통해 도약을 시작했던 인물이다.
그는 자신이 시엡립에 처음으로 모습을 나타냈을 때 단지 방랑하는 표류자 중 한명이었을 뿐이었다는 점을 흔쾌히 인정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무용담이 써지기 시작했다. 그는 곧 사랑에 빠졌고, 아빠가 되었으며, 갑작스레 책임질 일이 생기게 되었다.
당시에는 아직 '펍 스트리트'(선술집 거리)에 '펍'(pub: 선술집)이 하나도 없던 시절이었고, 그는 술집 하나를 차리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발치는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사원들을 보기 위해 배낭족들이 몰려들기 시작했지만, 밤만 되면 어디에도 갈 곳이 없었다. 그래서 내가 바(bar)를 열기로 마음먹었고, 빌딩도 한 채 짓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 일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약간 더 시간이 걸렸고, [그 사이] '앙코르 홧'(Angkor What) 바의 친구들이 먼저 문을 열었다. 그리하여 그들이 최초의 술집이 되었고, 이후 내가 '레드 피아노'(Red Piano)를 오픈했다. 이것이 바로 '펍 스트리트'가 시작된 계기이다." |
발치가 처음으로 가게 문을 열었을 때, 그의 수중에 있는 현금은 단돈 27달러가 전부였다. 하지만 그의 사업에 처음으로 실질적인 재정적 도약을 제공해준 일은 영화 <툼 레이더>(Tomb Raider)의 촬영팀이 당도하면서부터였다.
"그 영화는 나에게는 매우 좋은 일이었고, 내 사업이 반석에 오르는 데도 도움을 주었다. '레드 피아노'는 감독들과 제작자들이 오는 술집이 됐고, 나는 제작진을 위해 음식을 제공했다. 그들의 수는 많았는데, 그들은 술을 좋아했고, 나는 일을 잘 해냈다." |
발치는 시엠립 생활 초기에, 당시 이 지역의 '지뢰 제거 작업'을 시작했던 NGO들과도 많은 교류를 가졌다. 그리고 그는 이 같은 과정을 통해, 자신의 가장 유명한 기념품인 폴 포트의 변기 뚜껑 뿐만 아니라 폴 포트의 사망에 관한 정보도 들여다 볼 수 있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수많은 역사책들에 따르면, 폴 포트가 고령 혹은 심장마비로 죽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들은 바와는 다르다. 그는 스스로 마무리하기를 원했고, 그것(죽음)을 세심하게 계획했다고 한다." |
진실의 세척
1998년 4월15일, 영국의 BBC 방송은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집권기간 중 수백만명의 인민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캄보디아의 전직 독재자 폴 포트가 사망했다. 캄보디아 서부의 한 마을에서 폴 포트의 시신을 살펴본 기자들은 그가 심장마비로 사망했다는 말을 들었다. 초기에 의혹이 일어난 후, 대부분의 기자들은 그 시신이 폴포트의 시신이란 것을 확신했다. 밀림 속의 한 통나무집에 누워있는 그 시신의 모습은 TV로도 방영됐다." |
크메르루즈(Khmer Rouge) 군대의 사령관이었던 따 목(Ta Mok)은 1997년 말에 폴 포트를 체포한 바 있는데, 그 역시 폴 포트가 심장마비로 사망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 시신이 정부측 관리들에 의한 검안이 있기도 전에 화장됨으로써, 폴 포트가 독살됐거나 자살했을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하지만 발치는 자신이 폴 포트의 죽음에 관해 "믿을만한 소식통으로부터 직접" 진실된 내막을 전해들었다고 주장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2000년 1월에 안롱 웨잉(Anlong Veng, 안롱 벵)에 갔는데, 그들은 막 도로의 건설과 지뢰제거를 시작하고 있었다. [크메르루주의] 해당 지역 지휘관은 우리가 폴 포트가 살던 집까지 갈 수 있도록 허가했고, 가이드도 1명 붙여주었다. 그 가이드는 우리에게 자신이 오랜 기간 폴 포트의 경호원이었으며 사실상 가족이나 다름없었다고 말했다. 나는 그에게 폴 포트가 어떻게 죽었는지를 물었다. 그 가이드는 폴 포트가 사망하던 날 아침에 자신의 가족들과 더불어 모든 경호원들을 모아놓고, 국제사회가 자신의 죽음을 바라고 있으니 이제 스스로 죽어야할 시기가 된 것 같다고 말했다고 답해주었다. 그 가이드는 폴 포트가 오후에 자살하기로 계획했고, 오후 1시경에 알약 몇알을 삼켰다고 했다. 폴 포트가 사망하자 경호원들은 시신을 태국 국경까지 옮겼고, 언론인들이 그의 시신을 살필 수 있도록 잠시 동안 시신을 내려놓았다고 한다. 이후 그들(경호원들)에게는 시신을 화장해야만 한다는 명령이 있었고, 이러한 과정이 그 사건의 전말이다." |
이제는 아주 유명해진 변기 뚜껑에 대해, 발치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그 변기 뚜껑은 그냥 방바닥에 놓여 있었고, 한 친구가 내가 그것을 기념품으로 갖고 가면 어떻겠냐고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그것에 대해 조금은 불길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내 오토바이 뒤에다 던져놓았고, 그렇게 해서 가져오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것을 '아이비'의 공용 화장실 문에 그냥 매달아두었다. 하지만 이후에 그것을 자물쇠가 달린 박스에 넣었더니, 금새 인기를 끌었다. 독일의 잡지들이 기사로 다뤘고, 여행 가이드북들에도 소개됐고, 캐나다의 다큐멘타리 영화에도 나왔다. 나는 그것 에 대해 어떤 제안도 받아본 일이 없지만, 어찌되었든 기념품으로서 간직하길 좋아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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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어찌나 힘들었는지. 그런데 다시 보니...완전히 다른 글이네요.
선배님이 고치느라 더 고생하셨을 듯. ㅠㅠ
영어가 상당히 원어민적 관용구들을 사용하고 있는 데다,
내용이 실은 좀 복잡합니다.. 배경지식이 필요한 내용이었어요..
고생하셨어요~ ^ ^
그나저나 뽈 뽓의 자살설을 제기한 기사는 이 기사가 유일한 것인데..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말이죠.... ;;;
흠!! 여러가지 회상을 하게하는 글입니다.
리차드가 1999년 우기(아마 여름방학시즌으로 기억??)에 안롱웽을 방문했을때, 발치가 얘기한대로 지역지휘관이 있었고,
마일드세븐 한갑에 직접 우리일행(강원도 모 고등학교 교사 10여명) 여러 현장으로 안내를 해 주었습니다.
폴폿이 거주(가택연금상태?)했던 집은 바닥이 타일로 된 벽돌집이었고, 당시에도 방안에는 약병들이 흩어져 있었고
바깓의 마당, 오토바이를 손님이 타고 기사가 밀면서 올라갔던 험준한 길가에는 부숴진 탱크와 탄약 등이
곳곳에 널려있었으며, 화장터는 나무목책을 두르고 있었습니다.
특히 의약품을 좀 아시는 한분 선생님은 주로 항생제가 많다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
특히, 펍스트리트가 포함된 올드마켓지역에 가장먼저 오픈한 외국인카페는 프랑스인이 했던 짠지바가 원조이고
로투스마켓을 벨기에인이, 아이비바와 산타나바(리차드후배)는 바로 다음해에 오픈을 했습니다.
물론 앙코르홧, 레드피아노 등이 차례로... 레드 맞은편 인터치가 그 뒤를 이었구요!
신문내용은 발치만을 위한 좀 꾸며진 내용입니다. 리차드사무실이 바로 옆에 있었고,
눈으로 직접본 내용들 이거든요.. 좀 조사해서 한번 정리를 해봐야 겠습니다.ㅎㅎㅎ
지금 폴폿의 화장터는 지붕을 씌워 보존을 하고 있고, 그의 주택은 허물어 졌으며, 절벽위 멋진 경관을 자랑하던
그 자리에는 레스토랑과 게스트하우스가 들어서고, 주차장이 만들어 졌으며, 경호원숙소는 지붕만 남아 있습니다.
영화 툼레이더는 올드마켓을 세계여행자들에게 엄청난 광고를 해 준것이 사실이고
덕분에 현재 그곳의 땅값, 임대료는 하늘을 찌릅니다.
돈 잘 못벌기로 유명한 리차드는 펍스트리트 간판을 달기 직접 가게를 팔아버렸고
좀 한가한 지역으로 이사를 나왔었었습니다. ㅎㅎㅎ
오.. 재미있는 비화네요...
역시 리차드 선배님은 시엠립의 역사이시네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