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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감 없는 들꽃처럼… 그냥 존재하는 삶을 배우다
‘조금순 여사와 소녀’ 이야기의 주인공 표정숙씨
“정숙아, 토끼풀 참 예쁘지? 사람들이 다니면서 막 밟고 그랬을 텐데도 이렇게 예쁘게 폈구나. 들꽃은 아무도 봐주지도 않고 누가 길러주지
않아도 이렇게 예쁘게 핀단다. 너도 이런 들꽃처럼 네 꽃을 예쁘게 피우거라.” 40여 년 전, 길가에 가득한 토끼풀을 보며 조금순 여사께서
나에게 해준 말씀이다.
순간 나는 ‘아, 나도 들꽃같이 예쁜 꽃이 될 수 있구나….’ 마음이 뭉클했었다. 꼽추라 놀림받던 아이, 항상 주눅 들어 있던 소녀에게
그 말은 큰 위로가 되고 힘이 되었다. 조금순 여사를 처음 만난 건 중학교 때였다. 당시 나는 몸도 마음도 한없이 약한 아이였다. 그런
나를 몹시 안타까워하고, 따스하게 챙겨주셨던 분. 나를 정신적으로 이끌어주신 그분은 나에겐 또 다른 어머니였다.
구술 표정숙, 정리 편집부, 사진 정하나
아이들의 놀림감이었던 여자아이
“아이구, 못살겠네, 얼마나 살겠노.” 어른들은 방 안의 나를 들여다보며 혀를 찼다. 그 소리가 큰 상처가 되었지만 어린 마음에도
‘나는 절대로 안 죽을 거야’ 마음먹었던 것 같다. 내게 장애가 온 것은 여섯 살 때 척추에 결핵이 오면서였다. 2년 동안은 일어나지도,
걷지도 못하고 누워서 지냈다.
절대로 안 죽겠다고 의지를 다져서일까, 그 후 조금씩 나아져 초등학교에도 들어갔다. 하지만 몸은 아주 약했다. 학교까지 가는 길에 두 번은
쉬어야 했고, 수업 중에도 책상에 엎드려 있어야 했다. 여러모로 나는 아이들의 놀림감이었다. 하지만 눈물만 흘리지는 않았다. ‘어떻게 하면
쟤들한테 갚아줄 수 있을까, 판사가 되면 갚아줄 수 있을까, 의사가 돼서 나 같은 사람을 전부 다 고쳐주면 얼마나 통쾌할까, 언젠가 하나님이
나를 고쳐줄지도 몰라…’ 아이로서 할 수 있는 모든 상상을 했던 것 같다. 그 마음이 그대로 커졌다면 세상을 원망하는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때 어머니의 들꽃 이야기는 해독제였다. ‘그래, 맞아’ 하고 들으면서 그런 마음들이 한순간에 사라지곤 했다.
들꽃은 너무나 가냘프고 부드럽지만 어느 곳에서나 자란다. 사람들이 밟고 지나가도 다음 날이면 다시 일어날 만큼 강인하다. 어머니는 그렇게
들꽃 같은 분이었다. 늘 소리 없이 다니셨고 인자하셨다. 사람들은 “땅이 꺼질까봐 그렇게 사뿐사뿐 살살 걸으시냐”고 우스갯소리를 했다.
그러면서도 “거창에서 제일 바쁜 분 또한 바로 사모님”이라고 했다. 어머니는 사택에서 농장까지 3킬로가 넘는 먼 길을 매일같이 오르내리며
노동을 하셨다. 마을을 지날 때면 집집마다 다니며 농장에서 거둔 채소며, 자식과 제자들이 사온 내의며 속옷들을 어려운 이웃들에게 나눠주셨다.
특히 누구네가 애를 낳았다고 하면 절대 그냥 지나치지 않고 쌀 한 되와 미역, 옷을 갖다 주셨다. 누가 아프다 소리를 들으면 간호사 경험을
살려 치료도 해주고 병원에 데리고 가는 것도 도맡았다. 공동 목욕탕도 만들고 교회도 지으시고, 시골 아이들에게 연극도 노래도 가르쳐주셨으니,
어머니는 만능 해결사였다.
마을 사람 모두에게 헌신한 어머니
사택에는 늘 배고프고 갈 데 없는 학생과 선생님들이 찾아왔다. 어머니는 하루에도 몇 번씩 밥상을 차리셔야 했다. 전영창 교장 선생님은 자신의
전 재산을 학교를 위해 썼고 폐교 위기의 학교를 살리기 위해 헌신한 분이셨다. 그 뒷바라지는 어머니의 몫이었고, 묵묵히 해내셨다. 쪽진
머리, 무채색 스웨터에 고무신을 신고, 한 손엔 사람들에게 나눠줄 물건이 담긴 커다란 가방을 든, 한결같은 모습이셨다.
어려운 집을 방문할 때면 나를 데리고 다니셨고, 그 오가는 길에 들려주신 것이 들꽃 이야기였다. 이런 훌륭한 분이 나를 챙겨주신다는 게,
내가 처음으로 인정받는 것 같아 힘이 났다. 마음도 행동도 당당해질 수 있었다. 그 후 거창고등학교에 입학한 나는 장학생이 되어 등록금
걱정 없이 학교에 다녔다. 서울에 있는 신학대학에 진학했을 때도 등록금이며 기숙사비를 거창고등학교에서 지원해주었다. 나뿐만이 아니었다.
그 시절 어려운 친구들을 위해 학교에서는 등록금을 대서 공부를 시켜주었는데, 그 중심에는 어머니가 계셨다. 아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도와주는
것을 당신의 사명이라고 여기셨던 것이다. 서울에서 대학 생활을 막 시작했을 때였다. 어머니가 학교로 편지를 보냈다. ‘항상 떳떳해라, 용기를
잃지 말아라….’ 그런 내용이었다.
씩씩한 척해도 낯선 곳에 가면 사람들이 날 어떻게 생각할까, 위축되기 마련인 내게 그렇게 힘을 주신 것이다. 두고두고 그 은혜를 갚고 싶었는데,
대학 1학년 때 어머니는 췌장암으로 돌아가셨다. 겨우 예순하나. 사람들은 “하나님이 너무 일찍 데려가셨다”며 애통해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사람들이 당황한 일은 장례를 치르면서 생겼다.
어머니의 묘비 앞에 선 마을 사람들, 그렇게 많은 도움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제야 비로소 그분의 이름 석 자가 ‘조금순’임을 알게 된
것이다. 자신을 전혀 앞세우지 않고 헌신하신 분, 평생을 이름 없는 들꽃처럼 사신 어머니의 삶에 사람들은 뜨거운 감동을 느꼈다. 대학 졸업
후 나는 바로 거창으로 내려와 모교의 교사가 되었다.
일본유학을 보내주겠다, 대학원에 가라, 하며 사람들은 더 공부할 것을 권했지만 그때 나의 생각은 이러했다. ‘난 대학교까지 간 것만 해도
너무 공부를 많이 한 거다. 이제부터 몸으로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어머니처럼.’
고 조 금 순 여사는 1916년 전남 해남에서 태어났으며 목포 정명여고를 졸업하고 기독교인으로서 전주 한일여자성경학교에도
다닙니다. 스물셋에 전영창과 혼인하고 거창고등학교 교장이 된 남편을 따라 거창군에서 사람들에게 헌신하며 여생을 보냈습니다.
표 정 숙(53)님은 거창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한국신학대학 신학과를 졸업하고, 모교인 거창고에서 18년간
재직했으며, 현재는 같은 재단 산하의 샛별중학교에서 재직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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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가장낮아질때 가장 고귀해지는것,,
이름없는 새처럼 살고 싶어요..
흐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