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라(갈 5:13)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기 원하셔서, 우리를 불러 주셨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보혈로 말미암아 죄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를 얻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유를 얻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 믿고 교회 다니는 것을 속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교회 다니기 싫다는 것입니다.
정말 교회 다니는 것이 속박입니까? 부자유입니까? 굴레를 씌우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참 자유를 주시기 위하여, 은혜로 우리를 불러 주셨습니다.
이것은 몇몇 그리스도인에게만 주시는 예외적인 특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한다면, 누구나 동일한 선물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주시는 자유를 누리고 살아갑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사람들을 향하여, “형제들아”라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 자매 된 우리 각 사람은, 자유함을 위해서 부르심을 입었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의 자유에는 무엇이 내포되어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이 자유하다는 말은, 그리스도인에게는 어떤 제한이나 제약이 전혀 없다는 말입니까?
그리스도인의 자유라는 것은 방종을 의미합니까?
그 당시 사람들에게, 바울이 오해 받은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한 잘못된 개념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자유를 위해서 부르심을 받은 사실을 밝혔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자유에 대해서 정의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바울에 대한 오해를 해명하려 했을 뿐 아니라, 그들이 바울의 말을 무책임하게 잘못 전하는 사실을 막으려 하였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바울이 말하는 자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은총을 사기 위해서 공을 쌓지 않으면 안되는 이런 공포와 속박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한 것이지, 모든 통제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의 표현 가운데 “육체”라는 말은 우리의 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말하고 있는 “육체”는 우리 인간의 타락한 본성, 아집으로 뒤틀린 인격의 바탕을 의미합니다.
“육체”란 또다시 범죄하기 쉬운, 조상 대대로 유전되어온 인간 본성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아서는 안됩니다.
이 육체의 탐닉을 위해서, 그리스도가 주신 자유를 사용해서는 안됩니다.
여기 “기회”라는 말은 “구실”이란 뜻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의 우리의 자유를 자기 탐닉을 위한 구실로 사용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죄를 범하는 자유가 아니라 죄를 범하는 데서부터의 자유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하나님 앞에 아무 거리낌 없이 나아갈 수 있는 자유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우리 자신의 이기적 욕망에 무제한 탐닉할 수 있는 자유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저급한 본성에의 방종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재갈 물리지 않은 자유는 참 자유가 아니라 방종입니다.
기독교는 방종의 종교가 아닙니다.
오히려 방종은 또 하나의 무서운 형태의 속박이요, 타락한 본성의 욕망을 좇는 결과가 되어버릴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유대인들을 향하여,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요 8:34)고 말씀하셨습니다.
디도서 3:3절을 보면, 바울도, 회개하기 전의 우리의 상태를 “각색 정욕과 행락에 종노릇한 자”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노예들이, 오늘 우리 사회생활 주변에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들은 큰 소리로 자유를 선창합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그들은 그들 자신의 방종적 욕망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그것을 자제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자유를 가지고 육체의 기회로 삼아서는 안됩니다.
오늘 하루도 주님과 동행함으로 승리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