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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08. 3. 11. 16:55
16. 홍경래의 난(1811~1812년)
홍경래의 난은 1811년(순조 11년) 12월에 홍경래가 세도정치와 삼정의 문란으로 인하여 극도로 부패한 조선 말기의 생활 불안과 서북인에 대한 차별대우, 그 억울함에서 오는 위정자들에 대한 민중의 반항을 대변하여 평안도 서해안 일대에서 일으킨 난(조선왕조에 일어난 민란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난)이다. 평안도 출신이라고 차별대우 하지 말라!
홍경래(1780-1812년)는 평남 용강군 다미면에서 진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본관은 남양이다. 그는 외숙인 유학권에게 글을 배워 과거에 여러 번 도전하였으나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다가 1798년(정조 22년)에 사마시에 또 낙방하자 그는 조정에서의 평안도 출신에 대한 배척, 제도적모순, 안동 김씨 세도정치, 그들의 심한 횡포와 매관매직, 그로 인한 암담한 시국을 개탄하고서 과거를 통해 출세하겠다는 뜻을 아예 단념해 버렸다. 당시 사마시에 합격된 자들은 모두 귀족의 자제들뿐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화가 난 그는 산에 들어가 한동안 독서를 하면서 지냈다. 그러면서, 그는 정권 쟁탈의 꿈을 키워갔다. 그 후, 그는 풍수 지사로 자처하면서 각지를 유랑하며 뜻을 같이 하고자 하는 동지들을 규합하였다. 그는 각지의 부호, 명사들을 찾아 다니며 인재들을 찾았다.
그는 1800년(순조 즉위년)에 평안도 가산군에 있는 청룡사라는 절에서 재략이 풍부하고 풍수지리에 밝은 서자 출신 우군칙(홍경래 보다 5살 아래, 당시 16살)을 만나 시국을 논하던 중 서로 의기 투합하여 반란을 일으키기로 약속했다.
그런 후, 평안도 내의 향무층중에서도 부농층을 주요 포섭 대상으로 삼았으며, 그 외 장사들도 포섭해 나갔다. 그러던 중에 만주의 마적단 두목인 정시수와 가산의 부호로서 무과에 급제한 뒤 가산역의 관리로 있던 이희저, 문재가 뛰어난 곽산의 진사 김창시등도 포섭되었다.
이희저의 경우 우군칙의 아내가 이희저의 처에게 먼저 접근하여 손금을 봐주면서 대길할 운이라고 귀뜀을 해준 다음, 지사인 척하는 우군칙이 이희저를 찾아가 부친의 묘자리가 명당이라고 침이 마르게 칭찬해 주었다. 이 때문에 기분이 좋아 있던 이희저에게 도사복을 입은 홍경래가 야밤에 몰래 찾아가, 거사 계획을 확신 있는 목소리로 밝혔다. 그러자 이희저가 혼쾌히 거사 동지가 되겠다고 약속했던 것이다.
이어 그들은 태천의 김사용(우군칙의 제자), 개천의 이제초, 곽산의 홍총각 등도 거사 동지로 합류시켰으며, 한양에 있는 전 좌의정 김재찬(그는 1805년 우의정 임명을 거절했다가 황해도에 유배된 적이 있었다)에게도 접근하여 거사 준비금 2천냥을 빌렸다. 이외에도 정주의 부호 김약하, 의주의 인삼상인 임상옥을 비롯한 여러 상인들도 동지로 끌어들였다.
그런 후 그들은 가산의 다복동(청천강 이북 지역으로 들어가는 입구임과 동시에 평양과 의주로도 통하는 교통 요충지)에 있는 이희저의 집을 비밀 아지트로 삼고, 거사하기 전부터 이곳에 옮겨와 운산 촛대봉의 금광 채굴을 구실로 각지(곽산, 정주, 선천, 안주, 철산, 개천, 태천, 박천, 영변)의 유랑민, 기인, 도사, 술사 모사 및 문인들을 꾀어 장정을 끌어 모은 다음 이들에게 군사훈련을 시켜 일정 수준을 넘으면 이들에게 돈과 의류를 나눠주고 이들을 10명 1조로 만들어 각 마을로 잠입케 했다.
그리고 거사일에 일제히 봉기하도록 서로 굳게 밀약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천문을 살피고 도창, 조총, 연환 및 각색 기치를 준비하고, 곽산 출신 김창시로 하여금 각 읍에 요언을 퍼뜨리게 하여 민심을 선동하도록 하였다. 이런 식으로 거사에 대한 만반의 준비를 해가면서 기회를 노리던 중 1811년(순조 11년)에 종래에 만나볼 수 없는 큰 흉년이 들게 되었다.
민심이 흉흉해진 틈을 타서 궁민들까지 끌어들인 다음 12월 15일에 무리를 이끌고 평양으로 들이닥쳐 대동관에 불을 지르고 그때의 혼란한 틈을 타서 반란을 일으키려 하였으나 차질이 생겨 연기하고 말았다. 홍경래는 다시 12월 20일에 거사하기로 작정하고, 각처의 동료들에게 무기 및 깃발을 보내주었다.
그러나 거사 소문이 너무 빨리 퍼져 나가, 선천 부사 김익순(김삿갓의 조부)이 이희저의 일가족을 체포하려 하자, 홍경래는 거사 예정일을 이틀 앞당긴 1811년 12월 18일에 2천여 명의 반란군으로 드디어 난을 일으켰다. 그는 스스로 평서대원수라 칭하고, 김사용을 부원수, 우군칙을 선생, 이희저를 도총, 김창시를 모사, 홍총각과 이제초를 선봉장으로, 김희연과 이성항을 참모로, 그리고 박성간을 병참장으로 삼았다.
홍경래는 봉기군을 크게 2군, 즉 북진군과 남진군으로 나눠, 남진군은 자신(총지휘권자)과 홍총각(선봉장), 윤후겸(후군장), 이희저(도총) 등이 맡고, 북진군은 김사용(대장), 이제초(선봉장), 김창시(모사), 김희연과 이성항(참모) 등이 맡게 하였다.
그런 다음, 출병에 앞서 김창시로 하여금 격문을 써서 봉기군 앞에서 읽게 한 다음 이를 각 관서에 보냈다. 그 격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무릇 관서 지방에서는 오래 전부터 특출한 인재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임진왜란 때에는 이곳 인물들이 중심이 되어 나라를 다시 세웠으며, 정묘의 변에는 양무공 정봉수(정묘호란 때 철산의 의봉장)와 같은 충신이 있었다.
그리고 둔암 선우협(성리학자), 월포 홍경우(성리학자)와 같은 재사가 이곳에서 났는데도 조정에서 이를 돌보지 않고, 심지어는 권문세가의 노비까지도 서북인을 평안도놈이라고 멸시하니 어찌 분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막상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는 우리 서북인의 힘을 빌리면서도 4백 년 동안 우리가 조정에서 혜택을 입은 것이 과연 무엇이 있단 말인가.
지금 조정에서는 어린 왕 주위에 있는 김조순, 박종경 같은 간신배들이 권력을 쥐고 흔들고 있기 때문에 하늘도 재앙을 내려 이처럼 흉년이 들게 하였도다. 그러나 다행히 세상을 다스릴 이가 청북 홍의도에서 나셨으니, 우리는 총궐기하여 부정 부패를 척결하자.
그러나 이곳 관서 땅은 성인께서 나신 고향이어서 차마 다치게 할 수 없어서, 먼저 관서의 호걸들에게 기병할 것을 명하여 도탄에 빠져 있는 백성들을 구하도록 하였노니, 의로운 뜻이 일어난 곳이 바로 참 임금을 기다린 명소가 아니겠는가.
이에 격문을 띄워 각 지역에 알리노니, 절대로 요동하지 말고 성문을 활짝 열어 우리 군대를 맞으라. 만약 반항하면 용서치 않겠다." 홍경래는 이희저와 홍총각에게 병력 50여 명을 주어 12월 18일 밤에 가산 군청을 제일 먼저 습격하도록 했다.
그들은 그곳 이속들의 도움을 받아 쉽게 군청을 점령할 수 있었다. 이때 군수 정저와 그의 부친 정노는 홍총각에게 사로 잡혀 끌려나와 봉기군들에게 맞아 죽었다. 그리고 김사용, 김창시 등이 이끄는 북진군을 곽산으로 보내 그곳을 치도록 했다. 그러자 곽산 군수 이영식은 겁을 집어먹고 벽장 속에 숨어 있다가 체포되었으며, 군수의 아우는 반항하다가 칼에 맞아 죽었다.
김사용은 북진군을 이끌고 능한산성으로 진격하여 점령한 뒤 임해진을 거쳐 정주성으로 향했다. 김사용은 12월 19일에는 집사 이침, 좌수 김이대와 김이천, 중군 이정환, 칙고도감 홍하진과 이미 내통하여 어느 정도 그곳 사정을 간파한 후 그날 정오에 최이륜, 정진교 등으로 하여금 정주를 치도록 하였다.
이때 목사 이근주는 당황하여 향교로 도망쳐 버렸다. 그러나 이침 등이 끝까지 뒤쫓아가 목사를 붙잡아 인부를 빼앗은 뒤 개 쫓듯 내쫓아 버렸다. 그리하여 김사용이 이끄는 북진군은 정주성을 무혈 점령하게 되었다. 한편 홍경래는 20일 새벽에 홍총각을 선봉장으로 내세운 남진군 3백여 명을 직접 이끌고 박천읍으로 쳐들어갔다. 그러자 그곳 군수인 임성고는 어디론지 줄행랑을 쳐버렸다.
홍경래는 군수의 노모를 일부러 감금하고서 겁을 주자 서운사에 숨어 있는 군수가 스스로 항복하여 왔다. 이런 식으로, 홍경래는 봉기군을 남북 2대로 나눠 본거지인 다복동을 중심으로 각 군읍을 하나둘씩 차례차례 공략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김사용, 이제초, 김창시, 김희연, 이성항 등이 이끄는 1대(북진군)는 곽산, 정주, 선천, 이서의 여러 고을을 차례로 점령하였으며, 홍경래, 우군칙, 홍총각, 윤후겸, 이희저 등이 이끄는 2대(남진군)는 박천 등지를 점령하였다.
홍경래는 점령지마다 곡창을 풀어 궁민들에게 나눠 주어 인심을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김사용도 정주성을 점령하고 나서 그곳의 지식층들, 즉 좌수, 풍헌, 별감, 별장, 천총 등을 설득하여 봉기군에 편입시키는 노력을 기울여 봉기군의 탄탄한 교두보를 확보해 나갔다.
남진군도 박천을 점령한 뒤 기수를 남쪽으로 돌렸다. 남하하기 위해서는 제일 관문인 안주를 공략해야 했다. 그러나 안주에는 평안도 병마절도사 이해우와 목사 조종영이 이끄는 1천여 명의 관군이 버티고 있었다. 게다가 곽산 군수 이영식이 이끄는 관군이 측면 지원해 주고 있었다. 그래서 안주 침공에 대한 의견이 봉기군의 지도자들간에 엇갈리게 되었다.
우군칙 등은 영변을 치자고 한 반면에 김대련과 이인배는 영변보다는 안주를 먼저 치자고 주장했다. 결국에는 영변을 먼저 치자는 쪽으로 결정이 났다. 이 때문에 절망한 김대린과 이인배는 봉기에 동참한 것 자체를 후회하더니, 급기야는 홍경래의 목을 베어 버리고 자수하자는 쪽으로 결심을 굳혔다.
그들은 야밤에 몰래 홍경래의 숙소로 숨어 들어가 칼을 휘둘렀다. 이때 홍경래는 잽싸게 몸을 피하고서 소리를 질러댔다. 그러자 곧바로 우군칙과 부하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이에 김대련은 암살 계획이 실패했음을 알고 자결하고 말았으며, 이인배는 부하들의 칼에 맞아 죽었다.
이때 홍경래는 이마를 다쳐 피를 많이 흘렸다. 그래서 그는 진격일정을 바꿔 상처를 치료할 겸하여 12월 21일에 다복동으로 일단 후퇴하였다. 그러자 북진군도 의주성에 대한 공격 시기를 며칠 늦출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12월 24일 밤 홍총각의 선봉부대가 먼저 송림리로 진격하였고, 되이어 홍경래, 우군칙의 부대가 12월 26일에 송림리로 가서 합세하였다. 이와 발맞춰 김사용의 북진군도 12월 24일 정주를 떠나 선천으로 향했다.
한편, 이 무렵 안주 목사 조종영은 헤이된 군대 기강을 바로잡고자 명령을 위반한 군졸 3명을 즉결 처형한 후, 성문을 굳게 닫아 걸고 봉기군의 공격에 철저히 대비하였다. 영변에서도 부사 오연상이 전열을 가다듬으면서 봉기군의 공격에 대비하여 만반의 준비를 갖춰 나갔다.
12월 22일에 운산 군수 한상묵과 개천군 염백관이 증원군을 이끌고 영변으로 와서 합류했다. 이때 한상묵과 염백관은 오연상에게 성 내에 첩자들이 있다고 귀띔해 주었다. 그러자 오연상은 가산과 박천에서 온 피난민들을 모두 성밖으로 내쫓아 버렸으며, 첩자 색출 작업을 벌여 19명이나 체포하는 성과를 올렸다.
그리하여, 첩자를 모두 잃어 버린 봉기군은 영변의 점령을 포기한 채 안주 쪽으로 기수를 돌려 곧바로 남진 할 수밖에 없었다. 평안 감사 이만수는 12월 22일에 순영중군 이정희를 안주로 출동시키고 영변 약산산정과 자산 자모산성 등지에 병력을 배치하여 반란군의 침공에 대비하였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이만수가 반란군 토벌에 소극적이라는 이유로 그를 파면시켜 버리고, 대신 병조참판 정만석을 관서위무사 겸 감진사로 임명하여 내려보내 반란군의 투항을 권고토록 하였다. 그리고 12월 24일에는 금위영에 순무부를 설치하고, 이요헌을 양서순무사로, 박기풍을 순무사 중군으로. 그리고 서능보와 김계온을 종사관으로 삼았다.
그러나 12월 26일에 자산부사에 임명된 김처한이 겁을 먹고 출정을 거부하므로 그를 소환하여 처형시켜 버린 후. 그를 대신하여 순무사 중군 박기풍을 내세워 12월 27일에 토벌군 선봉대를 파견하였다. 홍경래가 이끄는 남진군은 첩자인 좌수 김윤해와 변대익의 도움을 얻어 12월 25일 밤 남창읍 안으로 들어가 점령했으며, 김사용이 이끄는 북진군은 12월 24일 선천으로 진격하여, 첩자 최봉관과 유문제의 도움을 얻어 쉽사리 선천을 점령하였다.
이때 선천 부사 김익순(김삿갓 김병연의 조부)은 측근과 군졸 몇 명만 데리고 검산산성으로 도망가 버렸다. 그러자 김사용은 아장을 그곳으로 보내 회유 또는 협박하여 김익순으로부터 기어코 항복을 받아냈다.(이 항복 사건으로 인해 김익순은 나중에 죄인으로 몰려 죽었으며,
그의 자손은 대대로 벼슬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벼슬길이 막힌 김익순의 손자 김삿갓은 젊어서부터 세상을 풍자하는 시를 지으며 전국을 방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런 다음 김사용은 북진군을 2군으로 재편성하여, 1군은 신덕관에게 맡겨 구성 쪽으로, 2군은 김사용 자신이 맡아 철산 쪽으로 각각 진격해 들어갔다.
그리고 철산의 첩자인 좌수정대성의 도움을 받아 철산 역시 힘 안들이고 점령해 버렸다. 이처럼, 봉기군은 봉기한 지 5~6일 만에 청천강 이북의 가산, 박천, 곽산, 정주, 선천, 태천, 철산, 용천 등 8읍을 비롯한 평안도 서해안 일대를 완전히 장악해 버렸다.
이 무렵 황해도 황주 사람 노인담, 곽성집 등이 수백명의 난민을 모아 폭동을 일으켰으나 12월 28일에 황해도 병마절도사 조계에게 잡혀 처형되고 말았다. 한편, 홍경래는 박천의 송림동에 8백여 명의 봉기군을 집결시켜 평양을 치러 떠날 채비를 서눌렀다.
12월 29일 아침 홍경래는 봉기군을 3군으로 나누어 관군을 공격해 들어갔다. 관군도 역시 3군으로 나눠 봉기군의 공격에 맞섰다. 이 날 박기풍이 이끄는 순무영의 중앙 군도 개성에 도착하여 토벌군을 지원했다. 전투 초기에는 토벌군이 봉기군에게 밀렸다.
그러나 평안병사 이해우가 병력 1천여명으로 하여금 봉기군의 후방을 치게 한 이후로는 전세가 역전되고 말았다. 한때 홍총각이 후방을 지원하면서 봉기군 쪽의 전세가 다시 호전되는가 싶더니, 평안도 병마우후 이해승, 함종부사 윤욱렬, 순천 군수 오치수 등이 거느린 토벌군이 3면에서 총공격해 오는 바람에 다시 봉기군 쪽이 불리하게 되고 말았다.
그러자 봉기군은 중과부적으로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자 승기를 잡은 토벌군은 도망가는 봉기군을 쫓아가 닥치는 대로 무찔렀다. 그리하여, 송림전투에서 홍경래는 1백 30여명의 봉기군을 잃어 버리고 정주로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퇴각중에 4백여 명에 이르는 봉기군이 흩어져 버려, 홍경래는 2백여 명의 잔여 봉기군만을 이끌고 정주성으로 되돌아가 그곳을 거점으로 하여 장기전을 벌이며 북으로 진격한 북진군의 지원을 기다렸다. 이 무렵 황주에서는 김덕춘, 김사옥 등이 마장리, 용암리 등 12포구를 습격하여 민가 300여 채를 불태우는 등 폭동을 일으켰다.
경기, 황해, 평안 3도에서 징집된 관군 및 의병으로 결성된 토벌군의 주력부대가 1812년 1월 3일에 정주성 아래에까지 도착하였다.
그 사이에 곽산읍에서의 싸움에서 관군은 또 한 차례 이겨 박천과 가산이 회복되었다. 그리하여, 평안도 여러 읍 중 정주, 태천, 곽산, 용천 등을 제외하고는 모두 회복되었다. 그래서 토벌군은 태천, 곽산, 용천 등지에서 봉기군들과 전투를 벌임과 동시에 주력부대는 정주성을 겹겹이 포위하였다.
그러나 홍경래는 이에 굴하지 않고 항전을 계속하였다. 1월 5일에 토벌군은 봉기군을 맞아 전투를 벌였으나, 전사 3명, 부상 17명을 냈을뿐 별 성과를 얻지 못했다. 이 무렵 김사용은 북진군을 이끌고 용골산성을 점령한 후 이어 곧바로 용천읍을 점령하였다. 그런 후에 향반층과 각별히 신경을 쓰면서 군사를 모았다.
1월 8일 토벌군은 정주의 남진군과 용천의 북진군이 서로 합류하는 것을 막기 위해 후원장 이영식과 우영장 오치수에게 병력 2천여 명을 주어 곽산을 치게 하였다. 곽산의 북진군은 토벌군의 갑작스런 공격을 받고 혼비백산하여 흩어져 버리고 말았다. 선천으로 도망간 북진군의 박성신은 급히 김사용에게 패전 소식을 알렸다.
그러자 김사용은 이제초에게 기병과 군사 1천여 명을 주어 곽산의 토벌군을 공격하도록 했다.그리하여 곽산을 재탈환하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윤욱렬이 이끄는 토벌군이 다시 곽산을 공격해 왔다. 이번 전투에서는 곽산이 토벌되어 북진군의 장수 이제초를 비롯한 6명의 장수와50여 명의 북진군 병사들이 사로잡혀 모두 효수당했고, 태천도 토벌군에게 진압되어 북진군의 장수 변대익이 처형당했으며, 이윽고 용천.
용골산성, 서림성에서도 연달아 봉기군이 패배당했다.
서림성이 토벌군에게 점령당했을 당시 동림성에 머물고 있던 김사용은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중대 결단을 내렸다. 그리고 그는 야밤을 이용하여 정주성으로 들어가 홍경래를 도왔다. 그렇게 되자, 1월 10일경에 이르러서는 홍경래는 정주성안에 갇힌 채 완전히 고립된 꼴이 되고 말았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봉기군 중에는 관군에게 투항하는 자들이 자꾸만 늘어갔다. 게다가 양서순무사 중군 박기풍이 지원군을 이끌고 와서 정주의 토벌대와 함류하는 바람에 전세는 봉기군 쪽이 더욱 불리하게 되었다.
그런데다가 1월 15일에 북진군의 장수 김창시가 선천, 철산 등지에서 관군과 싸우다가 패주하여 용천 동림섬과 서림성으로 쫓겨 갔다가 그 이튿날 붙잡혀 효수당하고 말았다. 이렇듯 사태는 점점 봉기군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어갔다.
더욱이 성 안에서는 병력, 무기, 식량난에 대한 걱정이 나날이 증가되어 가는 반면, 토벌군은 날이갈수록 장비. 군사, 식량 면에서 더욱 우세해져만 갔다. 그러자 홍경래는 "싸우다 죽느냐, 아니면 항복하느냐" 를 놓고 한동안 갈등했지만, 결국에는 끝까지 싸우다 죽는 쪽으로 결심을 굳혔다.
1월 19일에 토벌군의 총공격이 다시 한번 가해졌으나, 그들은 완강한 봉기군의 저항에 부딪쳐 사상자 36명만 내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이후에도 2월 초까지 토벌군의 4~5차례의 총공격이 시도되었으나 번번이 실패만 하고 물러났다.
2월 12일 밤에는 성 안의 북장대에서 불이 났다. 이 틈을 타서 토벌대의 의병장 김견신이 성을 향해 진격해 들어갔으나 오히려 봉기군의 역습을 당해 실패하고 말았다. 이처럼, 봉기군의 저항이 의외로 거세고 끈질기게 이어지자, 조정에서는 2월 18일에 순무사 중군인 박기풍을 사직시켜 버리고, 대신 그 자리에 유효원을 앉혔으며, 신홍주를 병마절도사로 삼아 파견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월 19일과 2월 23일 2차에 걸쳐 반란군은 오히려 토벌군을 역습하여 위협을 주며 포위망을 뚫고자 시도하는 등 몇 번의 역습을 감행했으나 성공하지는 못했다. 새로 부임한 유효원은 경향군 8천여 명을 이끌고 내려가 기존의 토벌군과 합세하여 2월 29일에 정주성을 향하여 총공세를 펼쳤으나, 역시 실패하고 말았다.
3월 9일에 홍경래는 우군칙과 홍총각에게 장정 5백여 명을 주어 토벌군에 대한 역습을 과감히 시도해 보았으나 실패했다. 이때 봉기군은 46명이 죽고 4명이 포로가 된 데 비해. 토벌군은 70명이 죽고 1백37명이 부상당했다.
반란군은 3월 15일과 20일에도 성에서 나와 재차 토벌군을 공격하여 토벌군의 의병장 허항을 비롯하여 22명을 죽였으나, 이때 장수 김사용을 비롯하여 50여 명의 병력을 잃고 퇴각하였다. 3월 22일에도 봉기군은 또 한 차례 역습을 감행하여 토벌군의 병사 17명을 죽였으나, 자기 편은 69명이나 죽고 1백여 명이 포로로 잡혀 대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 식량이 부족해져 가기 때문에 봉기군은 어떻게 해서라도 토벌군의 포위망을 뚫고자 여러 시도를 감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즈음 홍경래는 그를 배반한 집사 이침이 쏜 총에 맞아 죽을 뻔했으나, 간신히 위기를 모면하였다. 이때 암살미수 사건에 연루된자들은 모두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이런 일로 충격을 받아서인지, 홍경래는 관군의 복병장 정의진과 협상을 시도하여싱 내의 여자 60여 명, 남자 병약자 및 어린애 7명을, 그리고 3월 26일에는 남녀 1백61명을 각각 성 밖으로 내보냈다. 이 무렵 성 안에는 먹을 것이 없어, 사람들은 소나 돼지뿐만 아니라 전투에 쓸 말까지도 거의 다 잡아 먹어 버린 상태였다.
심지어 소나 무 껍질까지 벗겨 먹어야 했기 때문에 성 안의 소나무들은 모두다. 하얗게 될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버드나무 잎사귀, 풀잎까지도 뜯어 먹을 정도로 식량난이 극심하였다. 그런데도, 홍경래는 항복하지 않고 항거를 지속하였다.
이에 유효원은 그 동안 4월 3일부터 보름 동안 정주성 북장대 밑까지 파들어간 땅굴에다 4월 18일 밤에 화약 1천8백근을 묻어 놓고 4월 19일 새벽에 이를 폭파시켜 북장대 쪽 성벽 10여 칸을 파괴해 버렸다. 그런 다음 토벌군 중 의병들을 먼저 돌진시키고 그 뒤를 따라 관군 수천명으로 하여금 쳐들어가게 했다.
이에 맞서 홍경래는 사력을 다해 싸웠으나 결국 토벌군의 총과 칼에 맞아 죽고 말았으며, 봉기군의 장수 홍총각, 김이대 등은 포로로 붙잡혔다. (홍총각, 김이대는 한양으로 곧바로 압송되어 그로부터 4일 뒤인 4월 23일에 처형당했다.) 그 외 포로로 붙잡힌 봉기군 1천9백17명도 모두 효수되었으며, 여자 8백42명과 남자 아이 2백24명만이 겨우 죽음을 면하였다.
우군칙과 이희저는 성에서 일단 도망치는 데까지는 성공했으나 그로부터 사흘 뒤인 4월 22일에 붙잡힌 후 대역죄로 처형당했다. 결국. 총 2천여 명의 봉기군들이 죄인으로 몰려 목베임을 당해 죽었다. 그리고 봉기군에 항복했던 지방 수령들은 파직 또는 처형을 당했다.
이로써 홍경래의 난은 정주성 안에서 항거한 지 1백여 일 만에(거사한 지 4개월 만에) 마침내 평정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토벌군은 4월 24일에 본래의 근무지로 각각 귀환하였다. 이후로도, 1813년(순조 13년) 11월에 제주도에서 양제해가 반란을 도모하다가 잡혀 죽었으며, 1814년과 1815년에 걸쳐 전국적으로 도둑떼가 횡행하여 민심을 혼란스럽게 하였고, 1815년 10월에는 용인의 이응길이 송지팽, 최한갑(뿔&매) 등과 함께 모의하여 병력을 모아 반란을 일으키려 하였으나 발각되어 처형당했다.
그리고 1816년 10월에는 성천의 승려 학상이 자칭 "홍경래 일파 라고 하며 민중을 선동하고 다니다가 붙잡혀 효수당했으며, 1817년 1월에는 유칠재가 홍찬모 등과 함께 조정의 중신들을 모함하려다가 유배당했고, 같은 해 3월에는 채수영등이 "홍경래가 살아 있다" 고 민심을 동요시키며 전라, 충청 2도에서 무기와 병력을 모아 상경하여 박종경, 김조순, 심상규 등을 죽이고 강화에 유배되어 있던 은언군 이인의 아들 이철득을 옹립하려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목숨을 잃었다.
17. 채수영의 난(1817년)
채수영의 난은 1817님(순조 17년)에 채수영이 김계호, 안유겸, 신성문, 김맹억 등과 공모하여 전라, 충청의 두 감영을습격하는 것을 시작으로 하여 당대 권세도가들에 대해 반기를 든 난이다. 정권을 쥐고 흔드는 세도가들을 쳐없애자!
채수영(미상~1817년)은 1817년(순조 17년)에 김맹억의 집에 모여, 김계호, 안유겸, 박충준, 신성문, 김맹억 등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모반을 모의하였다. 그들은 모두 왕의 외척 및 몇몇 권세도가들이 정권을 쥐고 흔드는 것에 매우 분개하며 그들을 제거하고자 반기를 들기로 했다.
그들은 매약상 또는 행상으로 가장하여 다니면서 다음과 같은 유언비어를 널리 퍼뜨렸다.
"외국군의 배가 들어오고 있다,"
"홍경래가 아직 살아 있다."
"이희선도 아직 살아 있다."
이런 유언비어를 퍼뜨려 민심을 선동한 뒤, 그들은 군사를 모아 전라, 충청의 두 감영을 습격하여 관군을 바짝 긴장시켰다.
이후, 채수영은 동지들과 함께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거사 계획을 세우고 이를 실행에 옮기고자획을 세우고 이를 실행에 옮기고자 하였다.
"앞으로 군사를 더 끌어모은 다음 상경하여 부원군 김조순(김조순은 1802년에 자기 딸이 순조의 비로 봉해지자 영돈령 부사가 됨과 동시에 영안부원군에 봉해졌으며, 철종 때는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기틀을 마련한 장본인), 판서 박종경(박종경은 1800년 순조가 즉위하고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자 이듬해 부수찬으로 기용되었고, 1809년 병조판서,
그 이듬해 이조판서와 훈련대장을 거쳐, 1812년 호조판서가 되었는데, 이때 대사헌 조득영으로부터 왕의 인척으로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음탕과 뇌물만을 탐낼 뿐 아니라 사사로운 감정으로 살인을 저지르는등 행패가 많다는 탄핵을 받아 양주 목사로 일시 좌천되었다가 다시 어영대장, 판의금부사를 거쳐 좌참찬에 이르렀으며, 순조와 순정왕후의 총애를 받아 군국기무로부터 공부까지도 장악하고 권세를 부렸던 당대 세도가), 판서 심상규(심상규는 1800년에 정조가 죽고 순조가 즉위하면서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어 벽파가 득세하자 시파로서 유배를 당했다가, 1802년에 풀려나와 이조참의, 대사간,비변사 제조, 호조판서, 양관 대제학 등을 거쳐 이조판서와 병조판서를 두루 역임한 세도가) 등등의 비판 대상인 당대 세도가들을 쳐죽이고, 강화도로 귀양 가 있는 은언군 이인(사도세자의 서자요 영조의 손자인 은언군
1771년상인들에게 진 부채가 영조에게 알려져 직산현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대정현에 안치되었으며, 1774년에 풀려났으나, 그의 아들 상계군 이담이 홍국영에 의해 모반죄로 몰려 자살하자 왕명에 의해 다시 강화에 유배당했다.
그는 1797년에 강화에서 탈출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였으며, 1801년 신유박해 때 그의 처 송씨와 며느리 신씨가 청나라 신부 주문모에게 영세받은 천주교인으로 순교하자 함께 유배소인 강화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그는 1849년 그의 손자 이원범(철종)이 즉위한 뒤 신원되었다.)의 아들 이철득을 왕으로 추대하자."
그러나 이 거사 계획은 한때 같은 동지로 활약한 바 있는 박충준의 고발로 실행에 옮기기도 전에 발각되어 채수영을 비롯하여 김맹억. 김계호, 안유겸, 심성문 등 모의에 가담했던 동지들 모두 참형을 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고발자 박충준은 상을 받는 대신에 감 1등되어 유배당하고 말았다.
18. 진주 민란(1862년)
진주민란은 오랜 동안 문제되어온 전정, 군정, 환곡의 세 가지 납징에 대한 불만을 가진 농민들이 1862년(철종 13년) 2월에 진주를 중심으로 일으킨 난이다. 양민착취 일삼는 탐관오리 처단하자! 1861년 9월에 환곡의 가산징수 때문에 민소가 자주 일어나자, 철종은 이를 크게 걱정하여, 각 도의 감사 및 수령 가운데 비위, 불법이 있어 민소를 당한 자들은 엄중히 문책하여 파면시키도록 조치하였다.
그러나 당시 영의정 정원용은 이를 의도적으로 회피하였다.
"민소가 많다 해도 일일이 준신(무엇을 준거로 삼아 쫓고 믿음)할 수는 없으므로, 실정을 밝히기 전에 문책하기 곤란하옵니다."
이렇듯 민소에 대한 진상 규명과 대책을 강구하지 않고 버려둔 까닭에 1862년(철종 13년) 2월 중순부터 경상도 진주 등지에서 민란이 터
지고 말았다.
민란의 직접적인 원인은 병마절도사 백낙신의 과도한 탐욕과 착취, 그리고 가혹한 탄압과 박해 때문이었다.
그는 1861년(철종 12년)에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진주에 부임한 후, 국고금을 횡령하고 갖은 수단과 방법, 즉 온갖 협박과 공갈을 동원하여 백성을 착취, 약탈을 자행하여 재산을 모으는 한편, 쌀 1만5천석(6만여 냥이나 되는 거액)을 호별로 징수하는 등 민폐를 끼쳐 농민들로부터 많은 원성을 사게 되었다.
여기에 각종 부당한 조세, 수령들의 탐학, 이서들의 농간, 토호의 토색질 등이 농민들을 파탄 지경에 이르게 하였다. 이에 진주의 서남쪽 유곡동에 사는 유계춘는 비변사에 소장을 내는 등 여러 차례에 걸쳐 조세의 부당성과 관리들의 착취에 대해 항의하였다. 그러나 이는 매번 묵살되고 말았다.
그러자 그는 고심 끝에 무력 항쟁을 계획하기로 했다. 그는 홍문관 교리를 지낸 적이 있는 이계열(이명윤의 6촌), 장교 출신인 김수만, 유랑 농민인 이귀재 등과 함께 모의하였다. 그런 다음 그들은 박수익의 외방객실, 사노 검동의 집, 그리고 박숙연의 집 등을 전전하면서 모의를 계속해 나갔다.
1862년 1월 30일에도 그들은 산기촌에 사는 검동의 집에 모여 앞으로의 항쟁 및 집회 계획을 구체적으로 세우고자 할 때 진주 사람들에게 신망이 두터운 이명윤도 참석하였다. 2월 2일에도 박숙연의 집에 모두 모여 그날 새벽에 유계춘이 소상인이나 농민들에게 보낸 한글 통문에 대해 토론을 벌였다.
이때 이명윤은 통문을 불태워 버리고 가급적이면 합법적이고 평화적인 방법을 택하자고 주장했으나, 다른 사람들은 대부분 유계춘의 뜻에 따라 한글 통문을 읍내 곳곳에 추가로 붙이기로 합의를 보았다. 그러자 이명윤은 자리를 박차고 나가 버렸다.그러나 그들은 2월 4일에 단성에서 민란이 일어나자 이에 힘입어 이계열을 두령으로 내세우고 나무꾼, 목동, 농민 등을 규합하였다.
그리고 격문과 선전문을 각 고을에 나눠 주고 한글 노래도 만들어 보급함으로써 그들의 사기를 고무시켰다. 그러자 병영에서는 주동자인 유계춘을 2월 7일에 붙잡아 진무청에다 연금시켜 버렸다. 그러나 병영에서는 농민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그에게 고문을 가하거나 죄인 취급을 하지는 않았다.
2월 13일에 집안의 제사를 핑계대고 집으로 돌아온 유계춘은 2월 14일을 기해 마침내 무력 봉기를 일으켰다. 유계춘은 이계열과 함께, 마동과 원동의 농민들로 하여금 수곡시장을 습격하게 하고, 백곡, 삼장, 시천 등지의 농민들을 규합한 후, 이들을 한데 모아 이끌고 가서 덕산시장을 일시에 점령하여 버렸다. 이때 훈장 이윤서의 집을 불태워 버렸다.
그러자 농민들이 거리로 나와 식사를 제공하는 등 시위대를 환영해 주었다. 이어 시위대는 덕천강을 따라 진주읍으로 진격하여 2월 18일 오전에 진주읍 근교에 이르렀다. 시위대는 그곳에 진을 치고서 한동안 시위를 벌였다. 그러자 진주 목사 홍병원은 이명윤을 보내 그들을 설득 는 회유시켜 보고자 했다.
그러나 이 기회에 착취와 토색질을 일삼는 관리들을 혼내주어야 한다고 시위대 군중들이 제각기 목소리를 높히는 바람에 협상은 무산되고 말았다. 시위대는 유계춘이 지은 노래를 한 목소리로 합창하며 환주읍으로 일제히 진격해 들어갔다. 흰 수건을 머리에 쓰고 몽둥이로 무장한 나무꾼들이 앞장서고, 그 뒤를 수천 명의 농민들이 바짝 뒤따랐다.
읍 내로 진입하는 데 성공한 시위대는 맨먼저 관가를 습격하여 평소 착취와 색질을 일삼던 이방, 호방, 토호, 이서, 또는 부당한 방법으로 재물과 욕심을 챙긴 상인, 고리대금업자 등의 집 수십 채에 불을 질러 버리고 재물을 닥치는 대로 빼앗았다. 이러한 방화와 약탈은 그 이튿날인 2월 19일까지도 계속되었다.
사태가 이처럼 악화되자, 병마절도사 백낙신이 자진하여 시위대 앞으로 나서서 가급적 회유하며 시위대를 해산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시위대는 그에게 관부의 문란 및 비행 등을 열거하며 좀처럼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시위대는 그를 겹겹이 에워싼 채 위압적인 자세로 그와 관리들의 비행을 추궁하였다.
그러자 위기를 느낀 백낙신은 당황한 나머지 그자리에서 시위대의 분노를 조금이라도 누그러뜨리고자 임시 응급처방으로 그 동안 횡령과 착취를 일삼아 지탄 대상이 되고 있던 이방 권준범과 포리 김희순을 군중 앞에 엎드리게 해놓고 곤장 수심 대를 가했다.
그러나 시위대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권준범과 김희순을 묶어 불에 태워 죽여 버렸으며, 아버지를 구하려고 달려든 권준범의 아들 권만두까지 짓밟아 죽여 버렸다. 시위대는 이에 그치지 않고 병마절도사 백낙신을 밤새워 길가에 세워 두었다가 이튿날 아침에 잡아 가두어 버리고 나서, 진주 목사 홍병원이 있는 본부로 몰려가 목사를 끌어내 삼정 문란과 관리틀의 죄를 추궁한 다음 병마절도사 백낙신과 함께 풀어 주었다.
그런 후에, 그 사이에 도망간 진주 이방 김윤구를 추격 끝에 붙잡아 때려 죽여 버렸다. 그리고는 시위대를 재편성하여 다른 공격 목표를 정한 뒤 다시 진주성으로 회군할 것을 결정하고는 읍 인근 각 처로 진출하였다. 그러는 중에, 시위대는 관아를 불태우고, 관문서를 불태워 없애 버렸다. 또한 그들은 읍 근처에 있는 부호 정영장, 성부인, 최진사 등의 집으로 몰려가 그 집들도 모두 불태워 버렸다.
그 외 착취를 일삼아온 토호, 양반, 관리 등의 죄를 추궁하면서 그 동안 누적된 원성을 마음껏 풀었다. 이런 식의 격렬한 시위와 폭동은 2월 22일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어느 정도 탄핵 대상들을 처벌하는 데 성과를 올렸다고 판단한 시위대는 2월 23일 오후에 모두 진주성에모인 다음 자진 해산하였다.
이 민란 소식이 전해지자, 조정에서는 비상대책회의를 열어 2월 29일에 탄핵 대상인 경상감사 김세균(김세균은 1834년에 진사가 되었고, 1841년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후 검열, 홍문관 제학을 거쳐 경상 감사가 되었다),
병마절도사 백낙신, 진주목사 홍병원 등을 파직시키고 그 죄를 물어 처벌하였으며, 그 대신 부호군 박규수(연암 박지원의 손자인 박규수는 1848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 정언, 병조좌랑을 거쳐 1860년 열하 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1862년 진주 민란이 일어나자 안핵사로 임명받아 사태 수습에 힘썼다.
그후 1864년 평안도 관찰사로 있을 때 미국 상선 셔맨 호가 대동강에 들어와서 행패를 부리자 군사를 동원하여 그 배를 불살라 버렸으며, 1875년에는 운양호 사건으로 일본이 수교를 요구해 오자 최익현 등의 반대를 물리치고 수교를 주장하여 강화도 조약을 맺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해냈으며 이후 신문물 수입과 문호 개방에 앞장섰다)를 진주 안핵사로 파견하였다.
그는 진주에 내려와 사태 수습에 최선을 다하였다. 그는 민란의 소요 원인이 관리들의 탐학과 착취라고 보고 이를 조정에 그대로 보고하는 한편, 처벌자를 최소한으로 줄여 유계춘, 김수만, 이귀재 3명만을 처형시키고, 나머지는 가벼운 형벌을 내려 사건을 종결지으려 하였다.
그러자 비변사나 신임 진주 목사 등의 반대파들이 들고 일어나 처형 대상을 2급까지 확대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는 처벌자를 최소화하자는 자기 입장을 좀처럼 꺾으려 하지 않았다. (결국 박규수는 이 때문에 나중에 한양으로 돌아갔을 매 반대파의 모함에 걸려 파직당하고 말았다.)
결국 처벌 대상은 반대파들의 주장대로 주모자 13명이 처형되었으며, 19명은 유배당했고, 42명은 징방되고 말았다. 이 중 이명윤은 민란의 주동자 유계춘 등과 같은 고향인 진주 출신인데다가 고향사람들에게 신망이 두터웠기 때문에 평소 그를 미워하던 지방 이서들의 무고를 받아 민란의 주모자로 몰려 강진의 고금도로 억울하게 유배를 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곧 진상이 밝혀져 철종의 특사령이 내려졌으나 사서가 당도하기도 전에 그는 유배지에서 병사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 무렵 진주 민란의 여파는 다른 지역으로도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크게 확산되어, 단성, 함양, 거창, 성주, 선산, 상주, 개령, 울산, 군위, 비안, 인동 등 경상좌도, 경상우도의 거의 대부분의 지역에서 시위가 일어났다.
3월부터 5월까지 약 3개월 동안에 전라도 부안, 금구, 순천, 장흥 등지에서, 그리고 충청도 회덕, 연산, 공주, 은진 등지에서도 연달아 민란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 해 8월부터 12월 사이에도, 제주, 함흥, 광주, 창원, 남해, 황주 등지에서도 민란이 일어나 일대 소동을 일으켰다. 그리하여 1862년 한 해는 그야말로 "민란의 해" 가 되고 말았다.
조정에서는 개령에 안동부사 윤태경, 제주도에 부호군 이건필, 익산에 부호군 이정현, 그리고 함흥에 행호군 이삼현 등을 파견하여 주동자들을 색출함과 동시에 민심의 동요를 막기 위해 여러 모로 조치를 취하는 한편, 이삼현을 영남선무사로, 조구하를 호남선무사로 각각 임명하여 현지에 내려보내 안핵사와 함께 사태 수습에 총력을 기울이도록 했다.
나아가 관료들의 개혁안이나 건의안들을 참작하여 근본 대책올 마련하는 한편, "삼정이정절목" 41개 조를 제정하여 이를 반포 시행토록 함으로써 민폐의 최소화를 위한 대책 마련에 부심하였다. 민란 외에도, 1863년 2월에는 경성에서 금위영 군졸들이 녹미의 질이 나쁘다고하면서 해묵은 울분을 떠뜨리며 소동을 일으켰다.
이런 저런 일, 즉 70여 차례에 걸친 잦은 민란, 궁궐의 당쟁과 분규, 척신들의 횡포 등등이 압박감을주어, 그나마도 병약한 철종은 재위 14년만인 1863년 12월 8일에 33세의 젊은 나이로 승하하고 말았다. 이후, 김씨 일족은 몰락하고 민씨 일족이 득세하게 되었다.
19. 이필제의 난(1871년)
이필제의 난은 1871년(고종 8년) 3월에 이필제가 최시형 등과 함께 동학 교조시원운동과 반봉건 투쟁 및 중국땅 정벌 등을 목표로 내세우고 동학교도와 농민들을 모아 영해에서 일으킨 봉기이다. 동학교도들이여! 봉건제 타도, 중국 땅 정벌!
문경의 향반 출신인 이필제(이필제의 본명은 이필)는 1863년에 동학에 입교하였다. 그는 충청도 진천에 거주하면서 여러 민란을 통해 드러난 봉건적 모순 및 사회의 구조적 모순 등을 직시하고 동학의 조직력과 무력 봉기를 통하여 반봉건 투쟁 운동을 벌여 갈 것을 결심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동학에 입교한 직후부터 동학 교도들을 아주 열정적으로 규합해 나갔다.
조정에서는 최제우를 붙잡아 처형하고 이필제와 같은 강경론자들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다. 그러자 그는 1869년 말에 진천을 떠나 영월 지방에서 한동안 유랑생활을 했다. 이 무렵, 그는 최시형을 만나기 위해 교도 이인언, 권일원 등을 보내서 다섯 차례나 면담 요청을 하였다. 그는 이인언을 통해 이렇게 자기 소개를 했다.
"나는 계해년에 용담 장석에서 도를 얻고 돌아와 포교에 종사하였소이다."
그러나 최시형은 용담 문도 속에 그런 인물이 있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하며 그를 경계했다.
이필제는 유랑 생활 끝에 결국 경상도 진주로 피신하였다.
그는 주성칠(이외에 그의 가명으로는 이홍, 주지, 이근수 등이 있다)이라는 이름으로 바꾸고 그곳에 거주하면서, 다시 동학을 포교하면서 동지들을 규합해 나갔다. 그는 또한 제 2대 교주인 최시형의 동의도 구하지 않은 채 독자적으로 교조 최제우의 설원을 주장하고 나섰다. 그는 영덕, 상주, 문경, 영해 등지의 교도들을 선동하였다.
그러다가 1870년 7월에 정만식, 장경로등과 항께 농민들과 동학교도들을 규합하여 거사한 다음, 진무 무기고를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하고 금병도라는 섬을 거점으로하여 세력을 커운 뒤 중국으로 건너가 새 왕조를 세우겠다는 거창한 거사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는 어떤 이의 밀고로 실패하고 말았다.
그래서 그는 경상도 영해로 급히 피신하여 몸을 숨겼다. 그 이듬해인 1871년 2월에 최시형(본명, 최경상)이 박사헌과 함께 이필제를 찾아와, 시국과 동학에 대해 진지하게 토의하였다. 어느 정도 분위기가 무르익자, 이필제는 이렇게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최제우 선생의 수치를 씻고 창생의 재앙을 구하고, 이어 중국을 차지할 뜻을 갖고 있소이다. 3월 10일이 선생께서 돌아가신 순교 기
념일이 아니요? 그날에 거사합시다."
이에 최시형은 '아직 동학의 교세가 확장되기도 전에 그 뿌리가 송두리째 뽑혀 버린다면 더 이상 동학이 설 자리가 없다’고 판단하여 선뜻 동의하지 못하고 한참이나 주저하다가 이렇게 말했다. "큰 일을 경륜하는 데에는 다 때가 있는 법이외다.
아직은 그런 시기가 아닌 것 같소. 경망히 의거했다가 실패하면, 오히려 교세의 기초도 바로 세우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필제는 성급하게 자기 뜻을 고집하였다. 결국, 이필제는 최시형의 뜻을 거역하고 동지들과 함께 대충 거사 계획을 수립한 뒤, 3월 10일에 읍의 동학교도 5백여 명을 이끌고 난을 일으켰다.
그는 봉기군을 이끌고 게릴라 전법을 구사하여 야밤에 영해관부를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하였다. 그런 다음 부사 이정을 문책한 뒤 처단해 버렸으며, 곧바로 성 안으로 진격하여 성 전체를 완전히 점령해 버렸다. 그는 성의 경계를 강화하면서도 동시에 소를 잡아 봉기군을 배부르게 먹인 후, 탈취한 돈과 곡식을 풀어 농민들에게 골고루 분배해 주었다.
그런 다음, 성을 썰물같이 빠져 나가 영양의 일월산으로 빠른 속도로 퇴각해 버렸다. 그러자 영해 주변의 수령들은 공포에 사로잡혔다. 언제 어디서 이들이 게릴라 전법을 구사하여 갑자기 들이닥쳐 관가를 습격하고는 다시 종적을 감춰 버릴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이들수령들과 관리들 중에서는 미리 겁먹고 도망쳐 버리는 자들이 속출하였다.
이러한 현상들은 바로 이필제가 노렸던 것들이었다. 이필제는 봉기군의 거점을 문경조령초곡에다 두고서 활약하다가, 그 해 여름에, (정감록)을 믿어 "정씨 천하"가 가능하다고하는 망령된 꿈을 꾸고 있던 정기현과 함께 공모하여 다시 봉기하고자 동지들을 불러 모았다. 그런데 당초에는 수백, 수천 명이 모여들 것이라고 예상했으나, 실제로 모인 봉기군은 6O여 명밖에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빈약한 수의 봉기군으로나마 8월 2일에 문경읍을 급습한다는 거사 계획을 세워 놓았다. 그러나 지방 관헌에게 미리 기밀이 누설되어 버리는 바람에, 거사 예정일에 이필제와 정기현 등 44명이 관군들의 뜻밖의 역습을 받아 일망 타진되고 말았다.
이로써 동학에 뿌리를 두고 반봉건 투쟁 및 중국 북벌론을 펼치고자 하는 이필제의 꿈은 일순간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이후 동학교도들은 정부의 가혹한 탄압을 받게 되었다. 그들에 대한 관헌의 추적은 경상도뿐만 아니라 강원도, 충청도, 나아가 경기도까지 뻗치게 되었다.
20. 임오군란(1882년)
임오군란은 1882년(고종 19년)6월에 구식 군대인 조위영과 장어영의 군졸들이 군료지급에 대한 불만을 품고 일으킨 병란이다. 정승댁 당나귀는 약식 먹고, 군졸들은 모래섞인 쌀 받아라?
대원군의 실각 이래 1876년(고종 13년) 한일 수호조약(강화도 조약)이 체결되고, 1882년 4월에는 한미(빤높), 한영의 수호조약이, 그리고 5월에는 한독 수호조약이 체결되어 구미 제국에 문호를 개방함으로써 종래의 대원군의 쇄국주의 정책이 완전히 붕괴되어 버리고 국왕을 비롯한 민씨 세력이 개국, 개화에로 매진하게 되었다.
그러자 배외사상을 가진 유림들과 수구파(보수세력)는 국왕과 척족에게 불평불만을 품고, 대원군을 앙모하게 되었다. 게다가 이 무렵 민비의 국고 낭비는 극에 달했다. 민비는 정권을 손에 넣은 후 세자 책봉을 위해 많은 경비를 썼다. 세자 책봉 문제가 해결된 뒤에도 유공자들에 대한 포상금, 청국 정부에 보내는 예물, 그리고 축하 사절의 왕복 비용으로 수백만금의 국고 낭비를 아끼지 않았다.
그밖에도 어린 세자가 조금이라도 탈이 나거나 왕실에 어떤 변이 나기라도 하면, 전국의 명산, 대천을 찾아다니며 기도 드린다거나 궁중으로 무당, 복술, 맹인 등의 잡배들을 끌어들여 굿, 불공, 치성을 를이는 데 엄청난 비용을 함부로 지출했다.
한번은, 금강산 1만2천봉의 봉우리마다 돈1천냥과 쌀 1석, 베 1필씩 바쳐 세자의 장수를 빌기도 했다. 하루는 당시 창우로 유명했던 김몽룡이 민비를 위해 춤을 추어주자 그에게 선뜻 3천금을 주기도 했다. 또한 점장이로 유명한 이유인이 점 한번 치는 데 비단 1백필과 금 1만냥을 상으로 내리기도 했다.
이렇듯, 민비는 대원군이 집권 10여 년 동안 모아놓은 국고를 불과 몇 년 만에 모두 탕진해 버렸다. 이렇게 하여 국고가 바닥나 버리자, 그녀는 가혹하게 세금을 징수하거나 매관매직을 서슴지 않았다. 그러자 때를 만난 듯 그녀의 척족들은 그 과정에서 중간 이익을 톡톡히 챙겨 재미를 보았다.
그 중에서도 영의정 이최응은 특히 뇌물을 좋아하여 곳간10개에 봉물을 가득 채워두었는데, 미처 손을 대지 못해 이것들이 그대로 썩어나가곤 했다. 그리하여 이렇듯 산더미처럼 많이 쌓여 처치 곤란한 산해진미를 가축에게 줄 정도였다. 그래서 당시 항간에는 이런 말들이 널리 유포되었다.
"홍인군 댁의 뀜과 생선 썩은 냄새에 이웃집 사람들이 코를들 수가 없다."
"혜당 댁 당나귀는 약식을 잘 먹는다."
"호판댁 큰 말은 약과를 싫어한다."
게다가 당시 간리배들마저 경성으로 운송되는 각지의 세납을 중간에서 얼마씩 횡령해 먹었다.
이렇게 되자, 백관들의 봉급을 5-6년 동안이나, 군인들의 급료도 13개월씩이나 지불하지 못하는 형편에 이르고 말았다. 그러나 관료들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 배를 채울 수 있었으나, 군졸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저 배만 곯았다. 게다가, 1881년(고종 18년)4월에 일어난 군제 개혁은 구 6영과 훈련도감 소속의 군졸들 사이에 큰 불만을 자아냈다.
얼마 전 정부는 강화도 조약체결 당시의 일본의 근대적 군대에 자극되어 1881년 4월 일본의 후원으로 별기군이라 칭하는 신식 군대를 조직하고 그 이듬해 1월에 6영을 개편하여 무위, 장어의 2영을 두기로 하였으므로, 2영의 군관과 군졸은 대우가 후한 별기군을 시기 또는 미워하게 되었으며, 특히 훈련도감 소속 군졸간에는 심상치 않은 불온한 기운마저 감돌았다.
그런데다가, 날마다 궁궐 안에서 들려오는 난잡한 굿소리와 웃음소리는 군졸들의 심기를 더욱 자극하였다. 1882년 6월 5일 아침에 선혜청 도봉소 앞에 무위영에 소속된 군졸들이 속속 모여 들었다. 그 전날, 군졸들의 불평을 살펴 한달치 군료만이라도 지불하겠다는 조정의 포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13달 만에 1달치 군료밖에 안 준단 말이야?"
라고 불평하면서도, 그것이나마 타가기 위해 그들은 줄을 섰다.
그런데 선혜당상 민겸호 집 하인으로 있는 창리가 곳간문을 열고 정작 배포한 쌀은 대부분 물어젖어 썩은 것이었고, 게다가 그것은 겨와 모래가 절반 이상이나 섞여 있는 것이었으며 양도 턱없이 모자랐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분개한 목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포수 김춘영이 먼저 큰 목소리로 항의했다.
"아니, 이런 것을 사람더러 먹으라는 것이냐?"
그러자 유복만, 정의길, 강명준도 덩달아 한마디씩했다.
"누굴 놀 리느냐?"
"나쁜 자식 들!"
"어떤 놈들의 농간이냐?"
그러자 창리가 권문세도가인 주인의 후광을 등에 업고 깔보는 말투로 그들을 나무랐다. 이에 군졸틀의 분노가 일시에 폭발하고야 말았다. "저놈부터 때려 죽여라." 이런 외침 소리와 함께, 군졸들의 주먹질과 발길질이 한꺼번에 창리에게로 쏟아졌다. 그리하여 도봉소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이 소식은 이내 궐내로 전달되었다.
선혜당상 민겸호는 노발대발하여 즉시 포교를 풀어 주모자를 체포하라고 지시했다. 이윽고 김춘영 둥 주모자 4-5명이 붙잡혀 들어가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그런데 그 중 2명은 가까운 시일 안에 사형에 처해지게 될 것이라는 소문이 장안에 확 퍼졌다.
이에 무위영의 군졸들은 한편으로는 당황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언젠가는 자신들도 주모자들과 똑같은 운명에 처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강박관념 때문에 동지의식을 갖고 서로 뭉치게 되었다. 6월 9일에. 김춘영의 부친 김장손과 유복만의 동생 유춘만 등이 서로 상의하여, 투옥된 군졸들의 구명운동을 전개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그들은 먼저 통문을 돌려 무위영 소속 구훈련 도감 군졸을 소집한 다음, 그들과 함께 당시 직속상관인 무위대장 이경하(이경하는 대원군에게 발탁된 무장이었다)의 집으로 대거 몰려가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였다. 그러자 이경하는 자신은 급여에 관한 권한을 갖고 있지 않다고 변명한 뒤석방을 호소하는 간략한 편지 한 장을 써주면서, 민겸호 대감을 직접 찾아가 보라고 하였다.
이에 군졸들은 이경하의 편지를 들고서 안국동에 있는 민겸호의 집으로 찾아갔다. 그렇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민겸호는 집에 없었고(그때 그는 경복궁에 있었다), 그 집 문지기에게 모욕만 당했을 뿐이었다. 이에. 화가 난 군졸들은 대문을 강제로 밀고 들어가 집안의 사치한 집기들을 모조리 때려부셔 버렸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고 보니, 군졸들은 이왕 감옥에 끌려가 죽을 바에야 차라리 군민의 원한 대상인 척족이나마 쳐죽이고 죽자는 각오 아래 우선 대원군을 찾아가 진정이나 해보기 위해 운현궁으로 몰려갔다. 찾아온 군졸들의 호소와 사정을 듣고 난 대원군은 겉으로는 군졸들을 달래는 척하면서도, 주동자인 김장손, 유춘만 등에게는 은밀히 모종의 방책을 일러주기까지 하면서 격려해 주었다.
그러면서, 그는 그의 심복 허욱으로 하여금 군복으로 갈아입게 하여 군졸을 지휘하도록 했다. 이에 사기가 크게 앙양된 군졸들은 운현궁을 나오는 길로 동별영으로 몰려가서 무기고를 부수고 병기를 탈취하였다. 그때서야 황급히 달려온 이경하가 이들을 무마하려고 애를 썼지만, 이미 때는 늦은 뒤였다.
총검을 손에 넣은 군졸들은 시위를 벌이면서 종로 대로를 지나 포도청으로 쳐들어가. 갇혀 있던 동료 김춘영, 유복만, 정의길, 강명준 등을 석방시킨 다음 다시 의금부를 습격하여 백낙관 등과 같은 정치범들을 풀어주었다. 이후부터 난군들은 군졸을 2대로 나누어, 제1대는 서대문 밖의 경기 감영을 향하여, 제2대는 척신들의 저택을 향하여 각각 돌격해 갔다.
제1대가 경기 감영에 도착해 보니 경기도 관찰사 김보현이 자리에 없었다. 그러자 그들은 무기고를 파괴하여 총기를 탈취한 다음, 일본인 3명을 죽여 버리고, 천연정의 일본 공사관 쪽으로 진격해 갔으며, 제2대는 강화 유수 민태호를 비롯한 척신들의 집들을 닥치는 대로 파괴하는가 하면, 하도감의 왜별기를 습격하였다.
그러자 별기군 소속 군인들이 난군에 호응하여 가담해 버렸다. 이때 일본인 교관 공병 소위 호리모또가 도망쳤으나 이내 붙잡혀 다른 일본인들과 함께 끌려와 처단당했다. 그날하루는 이렇게 저물어갔다. 그런데 해질녘부터 먹구름이 하늘을 덮는가 싶더니, 그날 밤 오랜 가뭄 끝에 한바탕 단비가 쏟아졌다.
그러자 난군들과 주민들온
"하늘도 우리를 돕는다"
고 크게 기뻐했다.
더욱 더 사기가 오른 난군들은 척족들과 대신들의 저택뿐만 아니라, 한양 주변의 사찰, 치성터, 놀이터 등도 모조리 파괴해 버렸다. 그런 후, 난군들은 난민들과 합류하여 서대문 밖에 있는 일본 공사관 쪽을 우르르 몰려갔다. 일본 공사관 하나부사는 이미 낮에 폭동 소식을 전해 듣고서 공관원들로 하여금 공관 안팎을 엄중히 경계하도록 지시했다.
이윽고 난군들이 무리지어 공사관 주위에 몰려들어 일본 침략 행위를 규탄하면서 처음에는 공관에다 기왓장, 돌멩이 등을 날려 보냈다가, 이윽고 활과 총을 쏘아댔다. 그러던 중, 누군가가 "불을 질러라" 하고 외치자, 몇 명이 달려가 공사관 옆에 위치해 있는 민가에 불을 질렀다.
곧이어 그 불길은 반접관 출장소와 차비관의 숙사까지 널름 삼켜 버렸다. 사태가 이처럼 점점 긴박해져가자, 하나부사는 공관원 전부를 본관으로 집합시킨 후, 조선 정부의 구원병을 기다리며 잠시 대치 상태에 들어갔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상황이 불리하게 전개 되어가자, 하나부사는 공관을 버리고 피난하기로 결정하고서, 스스로 공사관에 불을 지른 다음에 무장한 28명의 공관원들과 함께 신속히 정문을 뚫고 탈출하였다.
난민들은 순식간에 일어난 이들의 결사적인 탈출을 막지 못하고 말았다. 한편, 난군들은 불타는 일본 공사관을 보며 환호성을 올린 후, 발길을 돌려 여러 척신들의 집들을 차례차례 파괴하고 불태워 버렸다. 영돈녕 부사 홍인군 이최응의 집을 습격하여 그를 죽여 버렸으며, 호군 민창식을 길바닥에서 때려 눕혀 살해했다.
그리고 민치상, 민영주, 민영준, 민영소, 민영익 등 민씨 척신의 저택과 김홍집, 윤웅렬, 한성근, 윤자덕, 홍완, 이민하 등의 세도가의 저택 등 40여 채를 모조리 파괴하거나 불태워 버렸다. 그러자 고종은 무위대장 이경하를 동별영으로 급파하여 사태를, 수습토록 했으나, 수행원 1명의 목만 날아갔을 뿐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러자 왕은 도봉소 당상 심순택과 선혜당상 민겸호, 그리고 무위대장 이경하를 파면시켜 버리고, 무위대장 후임 자리에 이재면을 대신 앉혔다. 난군들은 한밤중부터는 왕궁을 포위하기 시작했다.(이 무렵, 고종은 대원군에게 청하여 즉시 입궐하라고 했다.
대원군은 그즉시 입궐하였다) 난군들은 이태원과 왕십리 일대의 주민들까지 선동시켜 입성시킴과 통시에 장어령과 별기군의 군졸들까지 합류시켜 6월 10일 새벽에는 창덕궁 돈화문을 일시에 공략하였다.
그러자 수문장과 문지기틀은 기겁을 하여 도망가 버렸다. 돈화문이 열리자, 난군들과 수천의 난민들이 물밀듯이 쳐들어갔다. 그때 그들은 입궐해 있던 민겸호와 김보현 등을 끌어내어 뜰에다 내동댕이친 다음 난도질을 하여 죽여 버렸다. 난군들은 이들의 시체를 금천교 밑에다 갖다 버렸다.
그런 후, 난군들은 중전 민씨(명성왕후)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그들은 그녀를 없애 버려야만 후환을 없앨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에 악착같이 그녀를 찾아 헤맸다. 이때 중전 민씨는 재빨리 궁녀의 모습으로 변장하고서 안절부절하고 있었다. 그런데 때마침 대원군과 함께 궁궐로 입궐한 부대부인 민씨가 그녀를 발견하고는 자기가 방금 타고 온 4인교 속에다 재빨리 그녀를 숨겨 주었다.
그러나 난군의 정의길에게 그만 발각되고 말았다. 정의길은 민비의 얼굴을 모르고 있던 터라 4인교에서 그녀를 끌어내면서 대뜸 물었다.
"너는 누구냐?"
이때였다. 그 곁에 서 있던 무예별감 홍재희가 기지를 발휘하여 이렇게 말했다.
"내 누이 동생 홍상궁이다!"
이렇게 하여 간신히 위기를 넘긴 중전 민씨는 무사히 궁궐을 빠져 나갈 수 있었다.
(그녀는 그 길로 화개동의 윤태준의 집으로 가서 은신해 있다가, 거기서 민영위 등과 연락을 취하여, 그들의 도움을 받아 여주의 민영위의 깁으로 일단 갔다가, 다시 충주 장호원에 있는 충주 목사 민응식의 집으로 가서 몸을 숨겼다.)
6월 10일 아침에 고종은 다음과 같은 자책하는 교서를 발표 하였다. "오늘의 사변을 어찌 상서로운 일이라 하겠는가, 생각하건대 짐이 덕이 없음에도 왕업을 계승하고자 탐하였으나, 이미 백성을 편안하게 따르게 할 능력이 모자라는 탓으로 이처럼 전례 없는 변란에까지 이르렀으니, 이 모두를 누구의 탓으로 돌리리요.
첫째도 나의 허물이요,
둘째도 나의 허물이로다," 그리고는 사태 수습의 책임과 대소 정권을 모두 대원군에게 맡겼다.
"이후부터는 적고 큰 공무 일체를 대원군 앞으로 품결하라."
이에, 수습책에 나선 대원군은 스스로 정면에 나서 난군들과 난민들을 달래며 이제 그만 해산하라고 분부했다. 그러나 그들은 대원군을 열렬히 지지하면서도 즉각 해산하는 데는 거부 의사를 밝혔다. 그것은 민비 때문이었다. 그들은 이렇게 부르짖었다.
"민 중전을 기어코 잡아 없애버려야 후환이 없다. 중전이 살아 있는 한, 우리 목숨이 위태롭다. 중전을 잡을 때까지 해산해서는 안 된다."
그러자 대원군은 임시방편으로 다음과 같은 교지를 내렸다.
"왕비께서는 오늘 정오에 이미 승하하셨다. 다만 그 시신만은 눈으로 확인하지 못하였으니 그리 알고 물러가라."
그리고 도승지 조병호에게 명하여 왕비의 국상을 반포하라고 했다. 그러나 조병호는
"중전이 승하하신 것을 확인해 보지도 않고 국상을 반포할 수 없다. 이와 같이 중대한 일을 결코 소흘히 거행할 수 없다"
고 하면서 거절했다. 이에 대원군은 다른 승지로 하여금 왕비의 국상을 반포하게 하였다.그런 다음, 정부 기구를 개편함과 동시에 인사를
단행하였다. 무위영을 훈련도감이라 부르게 하고, 통리기무 아문을 폐지하고 3군부와 5영군문 전부를 옛과 같이 복귀시켰다.
그리고 신응조를 우의정에, 이재면(대원군의 큰아들)을 훈련대장 겸 호조판서 겸 선혜당상에, 신정희를 어영대장에, 조희순을 금위대장에, 임상준을 총융사에, 이회정을 예조판서에, 조경호를 내의제조에 각각 앉히고, 영의정 홍순목은 그대로 유임시켰다.
이외에, 각 부서 및 지방관에도 새로운 인물들을 대거 기용하였다. 그리고 금부와 형조의 죄수들 및 정치범들을 석방하도록 명하였다. 그런 다음, 당시유배 중이던 이휘림, 정현덕, 조채하, 이만손, 이원진, 김평묵, 강진규 등을 모두 석방하였다. 이리하여 총 1천여 명이나 되는정치범들이 풀려나게 되었다.
그러자 난군들과 난민들은 난을 일으킨지 이틀만인 6월 11일에 자신 해산했다. 이로써 살륙과 방화와 파괴로 점철된 임오군란은 막을 내렸으며, 대원군과 보수세력(수구파)은 힘 안 들이고 개화세력 (개화파)을 몰아내고 재집권하게 되었다.그러나 민씨 일파는 매우 기민하게 움직여, 천진에 가있는 김윤식 등에게 통지하여, 청나라의 원조를 요청했다.
그러자 김윤식은 청나라에 조선왕조에서 있어서의 대원군 존재의 위험성을 강조하면서 속히 파병하여 국왕을 돕고 난당을 소탕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당시 청나라는 그렇지 않아도 조선에 파병하여 일본을 견제할 필요를 느끼고 있던 터라, 김윤식의 청원을 기꺼이 받아들여 파병하기로 하였다.
(일설에는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주일본 청국공사 여서창의 전보를 받은 서리 북양대신 장수성이 즉각 이 사실을 총리아문에 보고하였고,
통령수사제독 정여창에게 군함과 군사를 즉각 출동준비토록 명한 다음 보다 정확한 정보를 입수하기 위해 김윤식을 만났다고 한다.)
어쨌든, 오장경, 정여창, 마건충, 오조유, 황사림, 원세계 등은 쾌선 2척과 군함 1척과 육해군 수천 명을 이끌고 와서 조선에 주둔하면서 조선의 제반 사태를 감시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오장경은 한양근교에 주둔하면서 조선의 정치에 일일이 간섭하고, 임오군란의 선동 책임을 대원군에게 돌리고, 조선을 청나라의 속방이라고 선언하여 정치적 물의를 일으키기까지 하였다.
한편, 인천으로 갔다가 제물포를 거쳐 ,영국 선박 편으로 6월 15일에 일본 나가사키에 도착한 일본공사 하나부사는 조선 군인들의 폭동으로 8명,의 일본인이 희생되었으며 일본 공사관이 불타버렸다고 외무경 이노우에에게 즉각 보고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부산과 원산에 있는 일본 거주민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군함을 파견해야 한다고 간청하였다.
그러자 일본 정부에서는 긴급회의를 열어 신중히 검토한 후 군함 4척과 보병 1개 대대를 급파하였다. 하나부사는 군함을 이끌고 7월 3일 조선으로 돌아와, 7월 7일 고종을 알현하는 자리에서 강경하게 난의 책임을 물어 9개 사항을 들어줄 것을 요구하였다.
"문서에 의해 사죄할 것, 위자료를 지급할 것, 범인을 체포하여 처형할 것, 정부 당국자가 교사한 경우에는 강제 배상할 것, 조선 정부의 책임이 중대할 경우에는 거제도 또는 울릉도를 할양 할 것, 일본 공사관의 병력을 보호해 줄 것, 함흥, 대구, 양화진을 개시할 것, 일본 공사 및 영사관원의 대륙 여행 자유를 보장해 줄 것." 이후 3차에 걸친 회담 결과 제물포 조약 6조가 마침내 조인되었다."
"20일 이내에 수괴를 체포하여 중벌로 다스릴 것, 피해 입은 일본인을 융숭한 예로 장사지내 줄 것, 일본인 피해자 유족들에게 5만원을 지급할 것, 폭거로 입은 손해 배상금 50만원을 5년거치로 1년에 10만원씩 청산할 것, 일본 공사관에 군사를 두어 경비하게 하고, 그 경비를 부담할 것, 조선은 대관을 특파하고 국서를 보내어 일본에 사죄할 것."
이 굴욕적인 조약 체결과 청군의 간섭으로 임오군란에 참여했던 군민 1백70명이 체포되었고, 그 중 손순길, 공치원, 최봉규 등 11명이 참수되었다. 그리고 이어 대원군은 납치되었다. 7월 12일 막강한 육해군을 거느리고 입성한 청군의 장군들은 그 이튿날 운현궁을 방문하여 대원군에 경의를 표한 다음, 마건충이 정중히 이렇게 말했다.
"군무에 대해 상의할 것이 있으니, 청진까지 왕림하여 주십시오." 그러자 대원군은 7월 13일 오후 4시경 이용숙, 이조연 등 관료 몇 명과 호위기병 수십 명만 데리고 황사림의 청진으로 찾아갔다. 처음에는 약속대로 오장경, 마건충 등과 더불어 군무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눠다. 그런데 얘기 도중 마건충이 대뜸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조선의 국왕은 청의 황제가 책봉한 것이 아니오?"
이에 대원군은 다소 당황했으나 태연스레 대답했다.
"그렇소!"
"그렇다면, 모든 정령은 황제가 책봉한 국왕으로부터 나와야 하거늘, 당신은 어찌 변을 틈타 당신 마음대로 정권을 장악하고 자기와 의견이 다른 사람들을 죽이고, 불한당을 끌어들인 거요?"
"아니, 그건..."
"태공은 외교가 서투른 듯싶소이다. 오늘밤 남양만에서 배를 타고 천진으로 가서 청나라 황제의 유지를 받음이 어떠하시오?"
오장경이 막사에서 나가는 것을 신호로, 마건충과 그 부하들 이 미리 준비하여 놓은 보교에 대원군을 강제로 태워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그들은 대원군을 남양만으로 곧장 데려가 배에 태워 청국으로 납치해 갔다. 대원군은 7월 20일에 천진에 도착하였다. 그 달 29일에 이홍장은 대원군을 죄인 다루듯 심문하면서 임오군란에 대한 모든 책임을 물었다. 그런 후 대원군은 8월 16일에 보정부로 호송되어 연금되고 말았다.
이로써 재집권한 홍선대원권의 통치는 불과 33일 만에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그러자 충주 장호원에 그때까지 숨어 있던 민비(명성왕후)가 한양으로 돌아와 다시 정권을 잡은 후 대원군파를 대거 숙청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후 청군 3천명, 일본군 1개 대대가 조선에 상주하면서, 본격적인 내정 간섭을 시작하는 바람에 조선은 그들의 속국이나 다름 없는 위치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후 대원군은 4년간 유폐되어 있다가, 1885년에 풀려나 귀국하여 운현궁에 칩거하던 중 1887년 원세개와 협력하여고종을 폐위시키고 이재황을 옹립하려다 실패하였다. 1895년 재집권을 위해 일본공사 미우라와 결탁하여 을미사변을 일으켜 일시정권을 잡았으나 1898년에 79세를 일기로 숨을 거뒀다. 그와 사이가 악화된 그의 아들 고종은 끝내 그의 장례식에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21. 갑신정변(1884년)
1884년 12월에 박영효, 김옥균, 서재필, 서광범, 홍영식 등을 중심으로 한 혁신파인 개화당이 수구당의 여섯 거두 윤태준, 이조연, 한규직, 민영목, 조영하, 민태호를 제거한 뒤 그 일파를 몰아내고 혁신정책을 위해 일으킨 정변이다.
일본을 등에 업고 수구파 축출 및 개혁 시도...3일 천하 1882년에 일어난 임오군란을 계기로 청나라와 일본이 크게 대립되자, 이를 반영하여 조선의 정계도 두 갈래로 갈라져 첨예하게 대립하게 되었다. 일찍이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에 반대하던 민비는 이제는 청국에 기대는 보수세력이 되었다.
보수세력의 대표적 인물로는 척족의 민영익과 민승호 등과 정계의 김홍집, 김윤식, 어윤중 등이었다. 이들 일파를 일컬어 사대당이라고 하였다. 한편 이와는 달리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본받아 개혁을 단행하려는 사람들을 개화당 또는 독립당이라 하였는데, 그 대표적 인물로는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홍영식등 소장파였다.
1884년 11월 일본공사 다케조에가 일본 정부의 훈련을 받고 다시 내한했다. 그는 입경한 첫날부터 청국을 비난 또는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는 김홍집을 만나 이렇게 공박하였다. "귀국 외아문에 청국의 노예 노릇을 하는 자가 몇 사람 있다. 고 들었소. 나로서는 그 따위 인물과 상대하여 주선하기를 수치스럽게 생각하고 있소." 또한 그는 김윤식에게 노골적으로 다음과 같이 면박을 주었다.
"그대가 한학(없쫓)에 능할 뿐 아니라 청국에 내부할 의사까지 가지고 있다던데, 아예 청국으로 가서 벼슬살이를 하지 그러시오?" 일본공사의 이러한 거만하고 무뢰한 일련의 언행에 대해서 홍영식은 매우 염려하였다. 그러자 김옥균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것이 도리어 복이 될지 어찌 알 것인가? 우리는 좌우를 돌아볼 것 없이 오로지 변혁을 도모할 뿐이다."
이때부터 독립당의 거사 계획은 한층 더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김옥균은 11월 14일에 미국공사와 만난 뒤 독립당의 계획에대해 양해를 구한 뒤, 그 이튿날 다시 다케조에를 찾아가 상의하였다. 그런 다음 입궐하여 고종에게 시국이 불안한 책임이 청국군대와 사대당에게 있다고 아뢰었다. 이에 고종은 김옥균의 말을 믿고, 그 뒤부터는 청국 군대와 사대당측에 대해 오히려 불만을 품게 되었으며, 반면에 개화 독립당의 개혁안을 신임하게 되었다.
그러자 개화당 요인들은 오래 전부터 계획해 온 국정 개혁을하루 속히 행동에 옮기기로 하였다. 11월 25일에 김옥균은 다시 다케조에 공사를 단독으로 방문하여 재정적 문제뿐만 아니라 군사문제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지원을 해 줄 것을 확약받았다.
그런 뒤, 11월 29일에는 고종을 알현하여 현정세와 국가의 위기에 대해 상주하면서, 간신들이 청국의 세력을 빌어 왕권을 농락하는 것은 통타할 일이라고 고변하였다. 이에 고종은 "국가 대계가 위급한 때의 임기 조처는 경의 생각과 계획에 맡기겠다."는 "친수 밀칙"을 그에게 내렸다.
국왕에게 신임을 받고 있다는 기쁨을 감추지 못한 그는 그 이튿날 동지들과 만나 대략 거사 계획을 세운 다음, 12월 1일 밤에 박영효의 집에서 만나 우정국 개설 축하 피로연이 열리는 날을 이용하여 사대당의 거물급 요인들을 암살하고 국정 개혁의 대과업을 일거에 단행하자는 최종 합의를 보았다.
"맨먼저 연료를 가득 채운 포대 수십 개를 준비해 놓았다가 피로연이 열리는 초저녁에 별궁 북문을 넘어 들어가 별궁 정전안에 쌓아 놓고 불을 지르자. 이 일은 이인종의 지휘 아래 이규완, 임은영, 윤경순, 최은동 등이 맡기로 하자. 그 불길이 퍼질때를 기다려 미리 장치해 두었던 동서 행랑의 폭발물에도 불을 질러 화세를 돕도록 하자.
이 혼란스러운 때를 틈타 윤경순과 이 은종은 민영익을, 박삼룡과 황용택은 윤태준을, 최은동과 신중모는 이조연을, 이규완과 임은명은 한규칙을 각각 맡아 살해할 것, 그리고 만일의 실수에 대비하여 한복으로 변장한 일본인 1명씩을 추가 배치해 두자.
이때 모든 지휘 임무는 연장자인 이인종과 이희정 두 사람이 맡도록 하고, 신호는 방포로 하여, 통신연락과 정찰은 유혁로와 고영석 두 사람이 맡기로 한다. 궐내는 전영 소대장인 윤번이 맡기로 한다.
고대수라는 궁녀로 하여금 포발약을 준비하게 하였다가 궐 밖의 불길을 신호 삼아 통명전에서 이를 폭발시키게 한다. 일본인 4명을 궐내 으슥한 곳에 매복시켰다가 독립당 장사들이 실수할 경우에 그들의 임무를 대행하게 한다. 일본인 30명으로 하여금 금호문과 경우궁 사이의 왕래를 막아 뜻밖의 사고에 대비한다."
1884년 12월 4일 저녁 여섯시에 예정대로 전동 우정국에서 성대한 파티가 열렸다. 연회 시간이 되자, 귀빈들이 속속 도착했다. 미국공사와 서기관, 영국 총영사, 청국 영사와 서기관, 일본 공사와 서기관, 홍영식, 박영효, 김홍집, 한규직, 민영익, 이조연, 서광범, 민병석, 윤치호, 신낙균, 김옥균 등 20여 명이 연회에 참석하여 대화를 나누며 술과 음식을 들었다.
그런데 별궁에 방화하기로 한 계획이 사대당측의 경계 철저 때문에 불가능하다는 연락이 왔다. 그래서 김옥균은 그러면 이웃집이라도 방화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그것도 불가능하다는 통보가 왔다. 이에 당황한 김옥균은 "그러면 포졸들의 경계가 미치지 않는 곳을 택하여 방화하게 하라"고 하였다. 바로 이때였다.
우정국 북창에서 돌연
"불이야!"
하는 소리가 났다. 김옥균이 자리에서 일어나 북창을 열어젖히자, 맹렬한 불꽃이 하늘을 찌를 듯 피워 올랐다.
이와 동시에 우정국 안 연회석은 일대 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이 무렵, 연회도중 개화당의 이상한 기미를 미리 눈치채고 재빨리 도피하려던 우영사 민영익이 누군가의 칼에 맞아 피를 흘리며 연회석으로 되돌아와 픽 쓰러졌다.(그는 묄렌도르프의 주선으로 미국인 의사 알렌의 치료를 받아 목숨을 구하게 되었다.)
이때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은 북창 밖으로 뛰어 나와 일본 공사관에 가서 일본 공사관측의 태도가 변함없음을 확인한 다음, 김봉균 등을 인정전 밑 화약을 묻어 놓은 곳으로 보내어 30분 이내에 폭발시키도록 지시한 다음 왕의 침전으로 향하였다.
그들은 합문 밖에 윤경완이 이미 50명의 병졸을 거느리고 대기 중인 것을 확인한 다음, 침전으로 올라섰다. 김옥균이 사태에 대한 설명을 막 하려고 할 때. 동북쪽에서 굉장한 폭음이 하늘을 울릴 듯 진동하였다. 이에 몹시 놀란 국왕은 후문으로 급히 피난 하였다.
이때 윤경완이 거느린 군졸들이 국왕을 호위하였다. 대피하는 중에 김옥균은 사태가 위급하니 일본군의 보호를 요청하자고 국왕에게 두세 번 주청하였다. 그러자 왕이 이를 윤허하면서
"일본공사는 와서 짐을 보호하라"
는 친수 칙서를 내려 주었다. 박영효는 이 칙서를 가지고 즉시 일본 공사관으로 급파되었다. 그리고 국왕 일행은 경우궁 뒷문에 도착하여 굳게 잠긴 자물쇠를 깨뜨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이 경우궁 정전에 이르렀을 때 다케조에 공사와 함께 일본군 2백명이 벌써 도착해 있었다. 이윽고 독립당 요인들은 국왕과 비빈을 경우궁 정전에 모시고, 궁문 안팎의 경계를 강화하였다. 전정 안팎은 윤경완이 지휘하는 전영 병졸들이 맡았고, 전상에는 서재필이 지휘하는 정난교, 박응학, 정행징, 임은명. 신중모, 윤영관, 이규완, 하응선, 이병호, 신응희, 이건영, 정종진, 백낙운 등의 소장 정예 사관 생도 13명이 지켰다.
그리고 전문 밖에는 이인종, 이창규, 이규정 등이 이은종, 황용택, 김봉균, 유경순, 최은동, 고영석, 차홍식 등의 장사패들을 거느리고 삼엄한 경비를 섰다. 김옥균이 이에 만족하지 않고 다시 무감10여 명을 선발하여 궁문을 지키게 한 다음, 입시하려던 후영사 윤태준, 좌영사 이조연, 전영사 한규칙을 먼저 살해해 버렸다. 윤태준은 자객의 칼날이 내리치려 할 때 이렇게 애걸했다.
"나를 살려두고는 왜 일을 치르지 못하는가."
그와는 대조적으로, 이조연은 김옥균 일파를 심히 매도하면서 죽어갔다. 이때를 전후하여 김옥균 등은 어명을 빌어 민영목, 조영하, 민태호 등 사대당 거두들도 급거 입궐하라고 하였다. 이들도 경우궁 안으로 들어서다가 모두 저격당하고 말았다.
이로써 사대당의 거두 6대신을 모두 제거한 독립당 요인들은 보국 이재원을 어명으로 불러들여, 그에게 이번 거사의 취지를 설명하고는 같이 함을 합하여 국사를 처리하자고 요청하였다. 이재원이 이에 동의하자, 그들은 신내각의 인물 배정을 꾀하는 한편, 각국 공사관에 사신을 파견하여 우정국의 사태와 소란에 대해서 변명하고 양해를 구하였다. 12월 5일에 독립당의 기밀을 눈치 챈 민비가 서둘러 환궁할 것을 요구하자, 일시 분위기가 뒤숭숭해졌다.
그러자 독립당 요원들은 분위기를 일소하기 위하여, 환관 유재현을 결박하여 정전앞에 꿇어 앉히고 죄목을 따져가며 난도질을 하여 죽여 버렸다. 그러자 소란스러움이 가라앉고 분위기가 다시 숙연해졌다. 이때 독립당 요인들은 환관들과 궁녀들을 전부 밖으로 내쫓아버렸다.
그런 후에, 이재원을 수반에, 홍영식을 부수반에 각각 앉힌 다음 신내각을 조직하여 12월 5일 아침에 반포하였다.
"영의정에 이재원, 좌의정에 이재선, 우의정에 홍영식, 전후 영사에 박영효, 외무독판 겸 좌우영사에 서광범, 좌찬성에 이재면, 이조판서에 신기선. 예조판서에 김윤식, 병조판서에 이재완, 형조판서에 윤웅렬, 공조판서에 홍순형, 호조참판에 김옥균, 병조참판에 서재필, 도승지에 박영교..."
이리하여, 군사, 경찰, 내무, 재무의 실권을 모두 휘어잡게 된 독립당은 14개 혁신정책을 국민에게 반포하였다.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문벌을 폐지하고 인민평등을 확립하여 인재를 고루 등용한다. 대원군의 송환을 요구하고 청국에 대한 조공의 허례를 폐지한다. 내시부, 규
장각 등 불펼요한 관제를 없애고 세법을 개선하여 재정을 호조에서 총괄한다. 4영을 1영으로 통합하고 근위대를 설치 한다."
그러나 이같은 개혁 조치는 청병의 무력 간섭으로 이내 저지되고 말았다.
12월 6일 오후 3시경 원세개는 청군 8백명을 이끌고 선인문 방면으로, 오조유는 청군 5백명을 동원하여 북문 방면으로 우회하여, 그리고 나머지 청군 2백명은 후위를 담당한채 궁궐로 쳐들어와 창덕궁과 창경궁을 호위하고 있던 전후영 조선군사들을 공략하였다.
이때 신복모가 이끄는 군대가 날이 저물도록 저항하였을 뿐 나머지 군대가 지키는 1차 방어선은 힘없이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전투가 한창일 때 민비는 대왕대비와 세자를 데리고 청군 진영으로 도망쳐 버렸다. 1차 방어선을 무너뜨린 청군은 이어 일본군과 접전을 벌였다.
그러나 일본군이 전투도 제대로 해보지 않고 철수해 버리는 바람에 중간 방어선도 의외로 쉽게 무너져 버렸다. 이제는 충의계 50명의 장사와 사관생도로 편성된 3차 방어선만이 남았으나, 이 수로는 막강한 청군을 도저히 막아낼 수는 없었다. 그러자 김옥균 등은 고종을 모시고 연경당으로 피신하였다가,가, 다시 후원 태극정으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그곳도 안전한 곳은 못 되었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김옥균은 후일을 도모하기로 하고, 홍영식, 박영교 등에게 고종을 맡기고는 서광범, 서재필 등과 함께 궁궐을 탈출하여 일본 공사관으로 피신하였다. 한편, 홍영식, 박영교, 신복모 형제이하 사관생도 7명은 고종을 호위하고 북묘까지 갔으나, 그곳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사대당과 청군 병사들에계 생포되어 모두 참살당하고 말았다.
이튿날 아침 일본 공사관은 조선병과 난민의 습격을 받게 되었다. 그러자 김옥균 등은 다케조에와 협의하여 중요 서류를 소각한 뒤 관원 전원을 인솔하여 휘하 군대와 토목공인들의 호위아래 공사관을 탈출하였다. 그리하여 박영효, 김옥균, 서광범, 서재필, 신응희, 이규완, 정난교, 유혁로, 변수 이하 독립당 요원들은 마포에서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 그 이튿날 아침 인천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인천에서 그들은 일본 기선 천세환에 탑승하여,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이로써 갑신정변은 기껏
"3일 천하"
로 끝나 버리고 말았다. 이후 독립당을 일소하고 다시 집권한 사대당은 더욱 보수적인 인사개편을 단행하여, 영의정에 심순택, 좌의정 겸 외무독관에 김홍집, 우의정에 김병시, 이조판서에 이재원, 호조판서에 김영수, 예조판서에 김만식, 병조판서에 김윤식, 형조판서에 홍철주, 공조판서에 김유연. 호조참판에 남정철 등을 앉혔다.
그리하여 조선은 더욱 외세의 자주권 침해에 시달리게 되었고, 정치 체제개편 및 혁신정책은 다시 답보 상태에 빠져들고 말았다.
22.동학혁명(1894년)
동학혁명은 전봉준, 최시형, 손병희 등과 같은 동학당의 지도자들과 동학 교도들이 주동이 되어 농민들과 함께 1894년에 일으킨 농민 전쟁이다. 봉건제를 타파하고 외세침략 막아내자!
민중의 자각과 정치에 대한 불신이 뒤엉킨 전환기에 서학을 능가하는 동학이 1860년도에 창도되었는데, 이 동학은 토속 신앙을 그 바탕에 두고 그 위에 유교, 불교, 도교, 천주교 4교를 통합하여, 전통적인 신분제도의 철폐, 인간 평등주의 실천, 보국안민과 제폭구민, 인내천등 평등사상과 사회개혁운동을 그 목표로 내걸었다.
이 동학의 교조는 최제우였다. 동학의 목표는 당시 사회의 정치적 경제적 불안, 즉 관리의 매관매직, 문란한 세제, 경제 악화에 따른 농민 생활 곤궁, 서리들의 횡포에 찌들려 있던 농민의 요구와 아주 잘 부합되었기 때문에 그 교세가 날로 확장되어 갔다. 그러던 중, 최제우는
1864년 3월 10일에 처형되고 말았다.
최제우는 일찍부터 경사를 익혀 학문 탐구에 전심하다가 1844년부터 10여 년 동안 전국 각지를 유람하며 구도의 길을 걸었다. 그러다가 울산 유곡에 은거하여 도를 닦았다. 그러던중 1855년 금강산 유점사에 있던 승려에게서 얻은 (을묘천서)로 도를 터득한 후, 천성산 내원암에 들어가 49일간의 기도를 한 후 술수를 터득하였다.
그는 다시 1857년에 천성산 적멸굴에 들어가 또한번 49일간의 기도를 하고 나온 뒤, 1859년 경주 용담정에서 보국안민의 대도를 깨우치기 위해 다시 수도를 시작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유불선 동양 3교와 천주교 및 기독교를 토착 민간신앙 위에 융합하여, 시천주의 사상을 핵심으로 한 인내천의 교리를 완성하여 마침내 동학을 창시하였다.
그 후, 그는 천, 인을 대도의 근원으로 하고, 성. 경. 신을 도의 본체로 하며, 수심정기를 수도의 비결로 삼았으며, 도를 천도라 하였다. 1862년 남원을 거쳐 보국사로 들어가(수도사). (권학가)를 짓고, (동학론)를 집필한 다음 마침내 포교를 시작하였다.
차츰 교세가 확장되자, 각 지방에 접소를 설치하고 접주를 두어 관내의 동학 교도를 관장하도록 조치하였다. 그리하여 1863년에는 동학교도 3천여 명, 접소 14개소를 확보하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그는 이 해 7월에는 수제자인 최경상(경주 동촌 황오려 태생, 35세에 동학에 입문)을 북접대도주로 삼고 8월 14일에 그의 도통을 최경상에게 전수하였다.
그러나 고종은 그가 포교하는 동학 교리가 요사스러운 것이라 여겨 그를 체포하라고 명하였다. 그러자 선전관 정운귀가 각 접소를 순회 중이던 최제우를 1864년 봄에 체포하여 감옥에 가둔 다음, 그 해 3월 10일에 대구장대에서 사도난정의 죄목으로 그를 처형해 버렸다. 이후부터 동학은 정부의 주요 탄압 대상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2대 교주 최경상은 최제우의 뒤를 이어, 포,장,접이라는 특수한 조직망을 설치하는 데 성공하여, 커다란 사회적 조직으로 키워나갔다. 최제우보다 세 살 아래인 최경상은 강수, 박춘서 등과 함께 갖은 위험과 어려움을 무릅쓰고 영양 일월산에서 강원도 양양까지 왕래하며 교세의 재건을 위해 몸을 다 바쳤다.
특히 그가 비밀히 포교한 지역은 대체로 태백산맥 일대, 즉 경상, 강원, 충청 3도였다. 그런데 1871년 이필제가 영해의 동학교들을 이끌고 거사하여 실패하는 바람에, 관헌의 탄압과 추적이 심해지자, 소백산 암굴로 일단 피신하여 여러 날을 숨어 살아야 했다.
그 뒤 영월군 직곡리의 교인 박용걸의 집에 피신해 있다가, 1873년 10월부터는 태백산 갈래산 적조암에서 49일 동안 기도 수련을 했다. 그런 후 1875년에는 단양 도솔봉 송현동에 가서 숨어 살았다. 이때부터 그는 자기의 본명인 최경상을 최시형으로 바꾸었다.
그 뒤 1880년 4월에 인제 갑둔리의 교인 김현수의 집으로 가서 그곳을 경전 간행소로 삼아 (동경대전)을 대서시켜 간행했다. 1882년 6월에는 다시 단양으로 가서 여규덕의 교인집에서 머물면서 (용담유사) 8편을 대서시켜 간행했으며, 1883년 2월에는 충청도 목천의 김은경 교인집에 머물면서 (동경대전) 1천여 부를 간행하여 배포하였다.
1884년 10월에는 손병희를 데리고 익산 사자암으로 가서 함께 49일간 기도 수련을 했다. 이때 교장, 교수, 도집, 집강, 대정, 중정을 근간으로 하는 교단 조직을 체계적으로 정비하였다. 1885년 본거지를 충정도 보은으로 옮긴 후 그는 정국 혼란의 틈을 타서 좀더 적극적인 교세확장 운동에 들어갔다.
그러나 충청도 관찰사인 심상훈이 끈질지게 그를 추척하는 바람에, 다시 보은을 떠나 공주를 거쳐 영천 화계동에 이르러 초막을 짓고 한동안 숨어 살았다. 그러나 그곳도 위험하여 다시 상주 화령면 전촌으로 옮겨 가 은거하였다. 1887년에는 서인주.손천민 등을 대동하고서 정선을 거쳐 갈래사로 가서 49일 동안 기도 수련을 했다.
그런 다음 다시 보은으로 가서 몸소 밭을 갈며 수도하면서 교인들을 양성하였다. 1888년에는 전주, 삼례 등지로 가서 포교에 힘썼으며, 1889년에는 관헌의 끈질긴 추적을 피해 괴산 신양동을 거쳐 인제, 간성등지로 피신하였으며, 끄월에는 다시 경상도로 내려가서 금상 복호동의 김창준의 교인집에 머물면서 6개 조항으로 된(내수도문)을 작성하여 배포하였다.
"첫째, 집안의 모든 사람을 한울님같이 공경하라. 며느리를 사랑하라. 노예를 자식같이 사랑하라. 우마육축을 학대하지 말라. 만일 그렇지
못하면 한울님이 노하실 것이다.
둘째, 하루 세끼의 식사 때 한울님께 심고하라. 청결한 물을 길어 음식을 청결하게 하라.
셋째. 묵은 밥을 새 밥에 섞지 말라,흐린 물을 함부로 버리지 말라. 가래침이나 콧물을 아무 데에나 토하지 말라. 만일 길이 거든 반드시 묻
어라. 그렇게 하면 한울님이 감응하실 것이다.
넷째, 모든 사람을 한울님으로 인정하라. 손님이 오거든 한울님이 오셨다 하라. 어린이를 때리지 말라. 이는 한울님을 치는 것이다.
다섯째, 잉태하면 몸을 더욱 조심하고, 아무것이나 함부로 먹지 말라. 태아를 위하여 모든 일에 조심하라.
여섯째, 다른 사람을 시비하지 말라. 이는 한울님을 시비하는 것이다. 무엇이건 탐내지 말라. 다만 근면해야 할 것이다."
이후, 그는 1890년부터 두 해 동안 손병희, 손병흠 형제를 비롯하여 여러 우수한 제자들을 거느리고 충주, 공주를 거쳐 양구, 간성, 인제까지 갔다가, 다시 남쪽으로 내려가서 태인, 부안, 전주 등지를 돌며 포교에 힘썼다. 이에 충청, 강원, 전라 3도에서 동학의 교세가 날로 확장되어갔다.
이렇게 되자, 그들의 조직력과 역량이 중앙 정부를 상대하기에 조금도 손색이 없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교조 최제우에 대한 신원 운동이 중앙 정부를 상대로 당당히 전개할 수 있게 되었다. 1892년 10월 서인주, 서병학, 손천민, 손병희 등이 교조의 신원 운동을 전개해야만 교세를 더욱 확장시킬 수 있다고 강력히 주장하자, 그때까지 신중을 기하기만 하던 최시형이 마침내 결심을 굳혀 교조의 신원 운동을 허락하였다.
그리고 각 지방의 교인들을 격려하는 입의문을 배포하고, 서인주 등의 간부들로 하여금 각 지방 접주들에게 통문을 발송하여 그들의 대표자와 교도들을 전주 삼례에 소집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그 해 11월 1일에 전라도 삼례역에는 수천의 동학교도들이 모이게 되었다.
이들은 교조 최제우에 대한 신원은 물론 신앙과 교단의 자유를 요구 하였으며, 관리와 군졸들의 탄압에 대해서도 거센 항의를 하였다. 그들은 손천민을 대표로 뽑아 충청도 관찰사 조병식과 전라도 관찰사 이경직에게
"교조 최제우는 무죄이며, 또한 동학이 결코 서학의 일파가 아니며, 그리고 공자의 유교 외에 다른 종교들에게 대해서는 신앙의 자유를 허
용하면서 오직 동학만을 이단으로 몰아 탄압하는 것은 부당하다. 그리고 이서들과 군졸들이 함부로 양민인 교인들을 침학 또는 살상하지
못하게 해 달라"
는 내용이 담긴 청원서를 보냈다. 그래도 2도 관찰사의 태도가 미온적이자, 11월 7일에 다시 모여서, 또 한번 더 청원하였다.
그러자 관찰사 이경직은 "교조의 신원 문제는 중앙에서 해결할 문제이니 자신이 언급할 수 없으나, 지방의 이서와 군졸들의 횡포 등은 자기 권한으로 즉시 금지하겠다" 라고 했다. 이에 동학 교도들은 지방 관헌을 상대로 한 시위는 더 계속할 필요가 없다고 보고, 일단 해산하였다.
그러나 이서와 군졸들의 행패는 여전했다. 그러자 박광호, 손천민, 남홍원, 임규호 등이 중심이 되어 상소문을 작성하여, 박광호를 비롯한 40여 명의 동학 대표자들이 1893년 2월 8일에 한양으로 올라가, 이틀 후인 2월.10일부터 광화문 앞에 봉소하고 엎드려 사흘 동안을 밤낮으로 호곡하며 상소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자 2월 13일 정오에 칙령이 내려졌다.
"너희들은 각각 집에 돌아가서 생업에 종사하라. 그렇게 하면 곧 너희들 소원대로 해주겠노라,"
이에 동학 지도자들은 지방으로 내려와 해산하였다. 그런데 조정에서는 동학 교도들의 소원을 들어주기는 커녕 2월 26일에 동학의 포교
를 금지하라는 명령을 내려서 동학 지도자들을 체포하라고 하였다.
이리하여, 이서들과 군졸들에 의한 동학 교도 박해는 전보다 더욱 심해졌다. 이렇게 되자, 동학당은 매우 분개하면서 새로운 대책을 강구하기에 이르렀다. 최시형은 곧 손병희, 손천민 등의 간부들과 상의한 후, 3월 10일에 보은에서 모임을 갖는다는 통문을 전국 교인들에게 돌렸다. 이날 모인 교인 수는 대략 2만5천여 명 정도에 이르렀다.
그틀은 최시형, 손병희, 손천민, 서병학, 임규호 등의 지휘를 받으며 평화적으로 시위하였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보은 군수 이중익등을 보내, 회유하며 해산할 것을 한사코 종용하였다. 그러나 시위대는 해산을 거부하였다. 사태가 이처럼 악화하자, 3월 17일에 어윤중을 양호도어사로 임명하여 보내 회유케 했으며, 충청도 관찰사에 조병호를, 전라 감사에 김문현을 각각 임명하였다.
어윤중은 3월 26일에 공주영장 이승원, 보은 군수 이중익, 순영군관 이주덕 등을 데리고 직접 보은으로 내려가 시위대의 대표자들과 만나 해산을 권하였다.
4월 1일에도 그는 청주영장 백남석과 보은 군수 이중익을 데리고 시위대를 방문하고 무조건 해산할 것을 명령하였다. 이때, 시위대는 척왜, 척양의 취지를 역설하고, 지방 관리들의 불법 탐학을 호소하면서, 앞으로 5일 이내에 모두 해산하겠다고 제안하였다.
그러자 어윤중이 3일로 단축시키자고 하여 시위대측에서 이를 수락하였다. 그런데 그날 밤, 충청 병영의 군사 1백명이 선무사를 호위한다는 구실로 장내에 도착하고, 경병 1천명이 대포를 끌고 출동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최시형을 비롯한 간부들이 그 이튿날 밤 보은을 떠나 행방을 감추어 버렸다. 그러자 시위대도 하나둘씩 흩어지기 시작하여 4월 3일에는 장내가 텅 비게 되었다.
이 무렵, 전라도 고부 군수 조병갑은 자기 부친의 비각을 세우겠다는 명목으로 농민들에게서 1천냥을 불법으로 거둬들였다. 그리고 그는 면세해 주겠다고 약속하고서 진황지를 개간케 한 다음 수확기에는 강제로 징세하였으며, 또한 농민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군내에 만석보(관개용 저수지)를 수축케 하여 7백석의 수리세를 징수하여 사리사욕을 채웠다.
이에 분개한 농민들은 수차에 걸쳐 군수와 관찰사에게 진정하였으나,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이에 고부 지방의 동학교 접주 전봉준(전봉준: 1854-1895년, 본명은 전명숙, 별명은 녹두장군, 전창혁의 아들, 전부 태인 출신, 부친이 민란의 주모자로 처형된 뒤부터 사회개혁에 대한 뜻을 품게 되었으며, 30세경에 동학에 입문하여 고부 접주가 되었다)은 탐학 불법을 일삼는 조병갑에게 힘으로써 응징하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였다.
그는 정익서, 김도삼 등의 동지들과 상의하여 고부군의 아문을 습격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1894년(고종 31년) 1월 10일 새벽에 그는 1천여 명의 농민들을 이끌고 마항 시장터에서 봉기하였다.
봉기군은 흰 수건으로 머리를 동이고 길이가 대여섯 자쯤 되는 죽창들을 손에 들고서 "탐학 군수를 응징하러 가자" 라는 전봉준의 독려를 받자마자. 도도한 기세로 나아가고 부관아를 습격 점령하였다.
그런 다음 그들은 관가의 무기를 탈취한 다음, 이서나 관속배들을 모조리 붙잡아 문초하고, 그들이 부당하게 강탈하여 거두어 들인 수세와 세곡을 원주인인 농민들에게 다시 나누어 준 다음. 문제 많은 만석보를 파괴해 버렸다. 이때 군수 조병갑은 재빨리 담을 넘어 도망가 버렸다.
봉기군들이 그를 추격하였으나 그 행방을 찾지 못하고 돌아오고 말았다. 조병갑은 변장을 하고 정읍을 거쳐서 1월 15일에 전주 감영에 도착하였다. 그는 감사 김문현에게 온갖 변명을 늘어놓으면서 1천명의 병력을 지원해 주면 고부로 돌아가 소요를 진압하겠다고 간청하였다. 그러나 감사는 그의 요청을 거부하고 중앙의 지시를 기다리자고 했다.
그러면서 감사는 병방 비장에게 병력 50명을 주어 급히 고부로 출동시켰다. 그러나 이들은 변장을 하고 봉기군들 속에 숨어 들어가 전봉준을 체포하려고 했지만, 오히려 봉기군들에게 들켜 모조리 체포되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조정에서는 조병갑 군수를 구속하여 처벌했으며, 감사 김문현을 감봉에 처하고, 장흥 부사 이용태를 안핵사로 임명하여 내려 보냈다. 그러나 봉기군은 전봉준의 지시에 따라 1월 하순에 자진 해산해 버렸다.
그런데 안핵사 이용태는 부임 때 8백여 명이나 되는 역졸을 데리고 위세당당하게 나타나더니, 선정으로 뒷수습을 하기는 커녕 모든 책임과 죄를 동학 교도들과 농민들에게 덮어 씌워 가혹한 탄압과 횡포를 일삼는 등 광태를 연출했다.
그는 새로 임명된 군수 박원명을 공갈 협박하여 민란의 주모자들을 수색하게 하고, 동학 교도의 명단을 만들어 나누어주면서 그들을 체포하라고 역졸들을 사방에 풀어 놓았다. 이들 역졸들은 사방으로 돌아다니며 무고한 농민들을 함부로 구타, 포박, 약탈을 일삼았으며, 심지어 부녀자들을 겁탈하기까지 하였다.
그런데도 이용태는 나 몰라라하며 전주 한벽당에 가서 밤낮없이 기생들을 품에 끼고 술을 마셔대며 놀아났다. 전봉준은 이러한 이용태와 역졸들을 응징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서, 정익서, 김도삼 등과 상의한 다음, 이웃 군과 현의 다른 접주들에게 함께 궐기할 것을 요청하는 통문을 발송하였다.
그리하여, 태인, 고부 등지의 수천명의 동학교도들이 모여들게 되었다. 그러자 전봉준은 3월 21일에 "동조대장"이라고 쓴 큰 깃발을 앞세우고 다시 봉기하였다. 전봉준은 봉기군을 이끌고 먼저 고부군 내의 백산면 백산을 점령한 뒤 그곳에서 진용의 정비 및 대오를 편성하여 지휘자를 임명하였다.
그는 우선 병력을 손화중포, 김개남포, 김덕명포의 3개 부대로 나누고, 손화중포 중 1대(1천5백명)는 고창 두령 오하영, 오시영. 임형로, 임천서 등이, 2대(1천3백명)는 무장 두령 송경찬, 강경중 등이, 3대(7백명)는 흥덕두령 고영숙이, 4대(1천2백명)는 정읍 두령 손여옥, 차치구 등이 각각 지휘 책임을 맡도록 하였으며, 김개남포(1천 3백명)는 태인 두령 김낙삼, 김문행이, 그리고 김덕명포(2천명)는 태인 두령 김경선, 김제 두령 김봉년, 금구 두령 김사엽, 김봉득, 유한필등이 각각 지휘 책임을 맡도록 하였다. 그런 다음, 3월 25일에 다음과 같은 4대 강령을 내걸었다.
"하나, 함부로 사람을 죽이지 말고 짐승도 죽이지 말 것. 둘, 충효를 다하고 세상을 안정시키며 백성을 편하게 할 것. 셋, 왜이를 다 몰아내
고 성도를 맑게 할 것. 넷, 군사를 몰아 한양으로 가서 권귀를 다 쳐 없앨 것."
이들 봉기 소식은 순식간에 주위에 퍼져 나가, 태인, 금구, 부안, 정읍 등지에서 동학 교인들 외에 농민들도 백산으로 몰려왔다.
이 무렵, 전남의 고부뿐만 아니라, 금산, 장성, 무장, 그리고 영남의 김해 등지에서도 민란이 일어났다.(이 무렵 동학 교주 최시형은 전봉준이 봉기하자 이에 호응하여 북접 산하 동학도들을 궐기시켜 청산에 집결시킨 다음 희덕의 관아를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했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전라 병사 홍계훈을 양호초토사로 임명하여 장위영 병정 8백명과 야포 2문, 기관포 2문을 주어 출동케 했으며, 안핵사 이용태. 균전관 김창석, 전운사 조필영등은 문책하여 파직시켰다.
그러나 관군은 남하하는 도중에 3백여 명 이상이나 탈영해 버려 전주에 도착했을 때는 4백70여 명의 관군밖에 남지 않았다. 4월 3일 동학군은 금구, 부안 두 곳으로 몰려가서 부안현 아문을 습격하여, 부안현감 이철화를 구속하고 그곳 관속들을 모두 결박한 다음 무기를 탈취하였다.
이후 봉기군은 전주에서 출동한 관군과 황토현에서 맞붙어 4월 6일 밤부터 7일 새벽까지 통쾌히 쳐부순 후, 그 여세를 몰아 정읍, 흥덕, 고창, 무장, 영광, 함평 등 10여 군, 현을 무력으로 점령하여 버렸다. 이어, 장성 황룡촌에서 경군까지 격파한 봉기군은 4월 24일 노령을 넘어 다시 정읍으로 진입하였다.
그런 다음 태인을 거쳐 전주성 밖 삼천까지 진격해 갔다. 그러자 관군들이 봉기군의 기세에 놀라 겁을 집어먹고 달아나 버리는 바람에 전주성을 별로 힘 들이지 않고 4월 28일 아침에 함락해 버렸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조정에서는 동학군을 회유함과 동시에 휴전을 제의하였다.
이때 봉기군은 "탐관오리와 지방관과 양반부호들의 횡포 및 토색질 근절, 노비 문서의 소각, 신분 차별의 개선, 과부 재가의 허용, 토지 균분제의 실시, 외국상인, 특히 일본상인들에 의한 상권 침해 근절" 등을 골자로 하는 12개 폐정개혁을 내세웠다.
이를 정부가 모두 들어주기로 하고 또한 동학군의 생명 및 생업의 안전을 약속하자, 동학군은 5월 7일과 8일 양일에 걸쳐 자진 해산하였다.(사실상, 전봉준은 민란을 구실로 청군이 개입하고 천진조약을 빙자하여 일본군도 입국하여 국가의 운명이 위태롭게 되자, 더 이상 외국군이 나라를 침범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판단하고는 한 걸음 물러서기로 했던 것이다.)
휴전 협정대로 정부는 전라도 53개 군에 집강소(민정기관)를 두어 이를 지방행정 보조기관으로 삼아, 동학교도들에게 이를 관장케 하여 구체적으로 폐정 개혁에 착수하였다. 이후 전봉준은 20여 명의 간부를 인솔하고 각지를 돌아다니며 교도를 격려하고 집강소를 전국에 설치하는 등 조직 강화에 힘쓰는 한편 정부 관헌들과 대등한 위치에서 시정을 감시하고 신임 관찰사 김학진과도 만나 도정을 상의하는 등 부패한 지배계급의 근절과 근본적인 시정계혁에 혼심의 힘을 기울였다.
그러던 중, 1894년 6월에 일본군이 갑자기 궁궐로 쳐들어가 민씨 정권을 제거하고 대원군을 옹립한 후 새 정부를 수립하자, 이를 예의 주시하고 있던 전봉준은 "척왜"를 부르짖으며, 그 해 9월에 삼례에서 남도접주로서 동학군을 다시 집결시킨 다음, 북도접주 손병희와 연합하여, 교주 최시형의 총지휘하에 항일구국의 기치를 내걸고 9월에 재봉기하여 대일전을 시작하였다.(교주 최시형도 전봉준이 재봉기하자 북접 각지의 접주들에게 총궐기를 명령하여 대병력의 봉기군을 이끌고 논산에서서 남접군과 합세했다)
그리하여 한때 중부, 남부의 전역과 함남, 평남까지 항쟁의 불길이 확장되어 갔으며, 특히 이천, 목천, 공주 등지에서 혈전을 벌여 그 위세를 크계 떨쳤으며, 그 해 11월 중순에는 논산까지 진출하였다. 그러자 일본군은 동학군을 진압하기 위해 공주 쪽으로 병력을 급파하였다.
이리하여, 동학군과 일본군은 공주의 우금고개에서 6-7일간 치열한 전투를 치르게 되었다. 그러나 동학군은 우수한 근대식 무기와 조직적인 훈련을 받은 정예부대인 일본군의 대대적인 반격으로 패하고 말았다. 이후 후퇴를 거듭하여 전주. 태인을 거쳐 전라도 남단까지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전봉준은 일단 남쪽으로 후퇴하여 머물면서 동학군의 전열을 가다듬은 다음 재봉기를 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전봉준이 수명의 동지들과 함께 순창으로 피신하여 있을 때, 현상금을 탐낸 한신현 등 지방민의 급습으로 12월 28일에 피로리에서 붙잡혀 한양으로 압송된 후 이듬해인 1895년 3월에 사형당하고 말았다.
(교주 최시형은 공주에서 일본군의 혼성군과 싸워 참패한 뒤 논산을 거쳐 장수 등지에서도 패하고 영동, 청주로 피신했다가 1898년 원주에서 송경인에게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된 후 사형당 했다)
이리하여, 안으로는 양반 중심의 봉건 체제에 대항하고, 밖으로는 외국 자본주의의 침략에 대항하여 싸운 동학혁명은 결국 그양자의 연합세력에 의해 실패하고 말았지만, 이 결과로 대내적으로는 1896년의 갑오개혁이라는 내정 개혁을, 대외적으로는 청.일 전쟁을 유발시킨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의의깊은 농민전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제4부 대한민국
1. 4.19 혁명(1960년)
4.19혁명은 1960년 4월 학생을 비롯한 국민들이 이승만 자유당 정부의 독재와 부정 부패,부정 선거에 항의하여 벌인 일련의 민주 항쟁이다. 4월 19일 절정에 달했으며, 4월 26일 마침내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함으로써 자유당 정권은 붕괴되었다. 이후 허정 과도 정부가 수립되었다.
부정선거 독재정권, 이승만은 물러가라!
1948년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을 당시에는,민주적 가치와 실행에 대한 믿음이 모든 사람들에게 널리 퍼져 있지 못했다. 그러나 정부의 실제 행동이 더욱 비민주적으로 되어 가고 대규모의 부정 선거가 자행됨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이승만 정권의 독재를 규탄하고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를 요구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국민 의식의 민주화는 대체로 광범위한 민주적 교육과 6.25 이후에 나타난, 급속한 도시화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1945년 이래로 민주주의 교육이 초등학교와 중등학교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졌고, 도시 또는 준도시 사람들이 대중 매체를 널리 접촉할 수 있게 된 것은 한국인에게 민주주의의 가치를 인식시키는 구실을 하였다.
이러한 민주주의 정치 교육의 긍정적 결과는 많은 조사 결과, 젊은 층들이 기성 세대들보다 좀더 민주적으로 전향되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도시화는 일반 국민의 민주적 사회화와토 밀접한 관련이 있다. 1952년에는 남한 인구의 17.7%만이 인구 5만 이상의 도시에 살고 있었으나, 1955년에는 24.5%, 1960년에는 28%로 늘어났다.
이처럼 금속한 도시화는 확장된 교육과 6.25 동란에 따른 지역적 인구 분포의 붕괴, 그리고 사회의 일반적 상업화 등에 기인한다. 그런데 정치 세력이 여당인 자유당과 야당인 민주당으로 양극화됨에 따라 유권자들은 각자의 정치 의식 수준에 따라, 누구를 반대하고 누구에게 투표하여야 할 것인가를 쉽사리 알 수 있게 되었다.
비교적 유동적인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들이 새로이 얻은 민주적 가치를 확인하는 방법은 비민주적으로 행동하는 여당과 그후보자들에 대해서 반대 투표를 하는 것이었고, 정부에 반대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지지표를 던지는 것이었다.
1958년의 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출신 의원은 인구 5만 이상의 도시에서 오직 13명만 당선되었지만, 민주당은 43명이나 선출되었다. 반면에 나라 전체를 볼 때, 민주당의 79석에 비하여 자유당은 총 1백26석을 얻었다.
1956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은 나라 전체로 볼 때 56%의 지지를 받았지만, 서울에서는 38%밖에 지지를 받지 못했다. 도시 지역에서 나타난 자유당의 약세는, 대도시에서는 비교적 부정 선거를 쉽게 저지를 수 없었다는 데 그 이유가 있었다. 이른바 "준봉 투표" (conformity votes)는 비도시 지역에서 팽배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사회화와 도시화의 증대에 따라 이러한
"준 봉투표"
는 급속히 감퇴하여 갔으며, 이러한 현상이 자유당으로 하여금 더욱
"비민주적인"
수단을 강구하도록 부추겼던 것이다. 하지만 자유당이
강압적인 수단을 동원하면 할수록 공정한 선거에서 대중의 지지를 얻을 기회는 그만큼 더 줄어들었다.
1950년부터 1960년 사이에 이승만의 추종자들은 이승만과 그 정권에 대한 지지를 획득하기 위해 여러 방법으로 대중 시위를 조작해 냈다. 국토를 양분시킨 공산주의자틀과의 휴전 협정을 반대하는 대중 시위와 행진, 1952년에서 1956년 사이에 이승만을 재선에 나서도록 부추겼던 대중 시위, 일본 당국의 재일 교포 북송 결정에 항의하는 대중 집회 등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러한 관제 대중 동원은 1950년대 초반기 동안, 어느정도까지는 이승만의 인기를 회복시키고 유지시켜 줄 수 있었다. 그러나 195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국민들 사이에서 이승만의 개인적 인기는 사라졌으며, 그의 권력은 오로지 경찰의 강제력에 의하여 유지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1960년, 많은 국민들은 민주당 대통령 후보인 조병옥의 죽음으로 다시금 실망에 빠졌다. 조병옥은 선거에서 이승만의 강력한 대적자로 여겨져 왔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다른 강력한 대적자가 없는 마당에 이승만의 재선은 확고한 것이었다. 이승만의 노령으로 인해 부통령의 경합이 보다 중요한 문제로 등장하였다. 이렇듯, 실제 싸움은 현직 부통령인 장면과 이승만이 밀어주는 이기붕 사이에 벌어졌다.
선거전에서 야당 선거원들은 계속해서 체포되고 탄압을 받았다. 반공청년단의 폭력 단원들이 선거 당일, 시민들이 투표권을 어떻게 행사하는가를 감시하기 위하여 각 투표장에 나타났다. 농촌 지역에서는 3인조, 9인조 등의 "조" 가 형성되었고, 자유당에 대한 충성심에 의심의 여지가 없는 자가 각 조의 "조장" 이되어 "조원" 들이 자유당 후보자에 대한 투표를 책임졌다. 경찰은 공개적으로 자유당 후보를 지원하였다.
그러나 이런 노력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선거 결과가 경찰 지휘부와 내무부에 의해 안전하게 날조되었기 때문이다. 선거 결과, 이승만은 총투표 수에서 당선에 필요한 3분의 1보다 두 배 이상 많은 표를 얻었고, 이기붕은 1백80만 표를 얻은 장면을 제치고 8백40만 표로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자 국회에서는 민주당이 선거가
"불법적인 것이고 무효"
라고 주장하였다. 반정부 시위가 선거 전후, 전국에 걸쳐 대도시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부정 선거와 불법 선거를 규탄하고 나섰던 것이
다. 민심은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으로부터 거의 완전히 이반되어 있었으므로, 대규모 봉기에 필요한 것은 도덕적 분개라는 공통된 감정을
점화시켜 줄 수 있는 사건만 있으면 되었다.
4월 초, 전국에서 부정 선거를 규탄하는 여론이 비등하고 있을 때, 항구 도시인 마산 시민들은, 총에 맞아 만신창이가 된 채 해변가에 버려진 16세 소년의 시체를 발견하였다. 그 소년은 부정 선거를 규탄하는 시위에 가담했다가 마산 경찰에 의해 체포당했던 것이 틀림없었다.
시민들과 학생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시위 도중에 경찰의 총에 맞아 여기저기 쓰러졌다.
4.19 이전 수주일 동안, 주로 지방 도시에서 고등학교 학생들이 불법 선거 및 자유당과 경찰의 반민주적이고 억압적인 행위에 항의하는 시위를 산발적으로 행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상황의 급박성을 이해하려 들지 않았고, 또 그럴 수 있는 능력도 없었다. 마산의 시위에 대하여 이승만은 4월 15일. 그 사건은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고무되고 조종된 것"이라는 내용의 담화를 발표하였다.
이러한 비극적 사태에 책임이 있는 "무분별한 사람들"의 죄는 간과될 수 없다고 선언하면서, 이승만은 "젊은 청년들" 을 폭동으로 유도하고 선동하는 "정치적 야심가"와 공산주의자들의 선전 활동에 대해 경고했다. 이승만의 이러한 견해는 협박과 강제력 행사를 그만두지 않겠다는 것을 분명히 한 것으로, 학생들을 더욱 격분케 하였다.
1월 18일에는 서울에서 시위하고 있던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경찰의 비호를 받고 있는 반공청년단의 폭력배들로부터 습격을 받았다. 아무리 이승만 정권이 합법적인 권위를 지녔다고 주장하더라도, 이제는 시민과 학생들의 지지를 완전히 잃어가고 있었다. 이승만 정권이 유지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강력하고 적나라한 폭력을 사용하는 것뿐이었다.
4월 19일에는 약 3만 명의 대학생들과 고등학교 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그 가운데 수천 명이 경무대로 몰려들었다. 그리고 경찰이 데모대에 대해 발포하기 시작했으므로 학생들의 시위는 폭동으로 변하였다. 전국적으로 부산, 광주, 인천, 목포, 청주 등과 같은 주요 도시에서 수천 명의 학생들이 가세하였다.
서울에서 만도 자정까지 약 1백 30명이 죽었고, 1천명 이상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경찰이 시위대에 발포하기 시작한 직후, 전국 주요 도시에 계엄령이 반포되었고, 육군 참모총장이었던 송요찬 중장이 서울지구 계엄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4월 19일 이후부터 데모와 폭동이 연일 계속되었으며, 이제 학생이 아닌 일반 시민들도 가담하였다. 그러나 군대는 유혈 사태를 경계하고 재산의 파괴를 방지하는 데 신경을 쓰면서 방관하는 태도를 견지하였고, 이승만은 반정부 시위에 관하여 더 이상
"공산주의자들의 선동"
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4월 21일에 내각이 전국의 혁명적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났으며, 다음날 이승만은 당시 정부 내에서 어떤 직위도 가지지 않은 정치인 2명을 불러들였다. 한 사람은 전 국무총리였던 변영태였고, 다른 한 사람은 전 서울시장이었던 허정이었다.
이승만은 이들에게 위기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도움을 간청하였다. 두 사람은 이승만과 가까이 에서 일한 적이 있었고, 또 이승만은 이들에게 신뢰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승만과 만난 자리에서 두 사람은 상황이 이미 자기들의 통솔 능력을 뛰어넘었다고 말하면서, 이승만의 각료로 틀어가기를 거절하였다.
이승만은 이기붕으로 하여금 모든 정치 활동으로 부터 물러나도록 설득하는 데는 성공하였다. 그러나 시위대들은 이승만의 즉각적인 사퇴를 요구하였다. 이승만은 자기가 자유당을 비롯한 모든 사회 단체와 결별하겠다고 말함으로써 시위 군중들을 진정시키려고 하였고, 아울러 앞으로는 경찰을 포함한 정부 관리들이 정치적 간섭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였다.
이승만은 정부의 모든 권력을 이양 받으리라는 약속과 함께, 허정으로 하여금 외무부 장관직을 수락하도록 설득할 수 있었다. 외무부 장관으로서 허정이 지명되었던 것과 결부된 가장 중요한 사실은, 이승만이 사임을 결심할 경우에 부통력이 없는 상황에서 허정이 대통령직을 맡게 된다는데 었었다.
시위 군중들은 이승만의 양보를 경험하고 그의 약점을 알아차리게 되자 더 다그쳤다.그들은 점점 더 광포해지기 시작하여 , 반공청년단과 자유당 간부의 집을 파괴하고 방화하면서 거리로 휩쓸려 다녔다. 4월 25일이 되자 시위의 새로운 물결이 일어났다.각 대학의 교수들 3백여명이 이승만의 사임을 요구하는 제자들을 지지하면서 서울 시내를 행진하고 나섰던 것이다.
결국,4월 26일에 새로 지명된 허정 외무부장관과 송요찬 계엄사령관,그리고 주한 미국 대사였던 맥카나기 acanaghy D.P.)의 충고를 받아 들여, 이승만은 정부통령 선거가 새로 실시될 것이며, 헌법도 대통령 중심제에서 의원 내각제로 바꾸어질 것이라고 약속하였다.
이승만 정권의 붕괴는 경찰력에 의해 유지되었던 정치 권력이, 학생들이 선봉에 선 대중들에게 굴복하였음을 의미했다.
경찰력이 자유당의 주요 골격을 이루어 왔다는 것은 4.19 이후 경찰력의 마비로 인하여 자유당이 하룻밤 사이에 붕괴됨으로써 명백하게 드러났다. 교수들의 시위로 시작된 시위의 새로운 물결, 미국으로부터의 압력, 경찰력의 붕괴, 그리고 무엇보다도 군으로부터의 지지 결여 등에 직면하여, 이승만은 1960년 4월 26일에 이르러 사임을 발표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틀 전에 이승만으로부터 외무부 장관으로 임명된 허정은 과도 정부의 수반이 되었다.
이승만 사임 후, 정부 내에서의 허정의 권력 기반은 크게 위태로웠다. 허정은 한국 사회의 어떤 부문에서도 적극적 지원을 확보할 수 없었다. 학생과 일반 시민의 입장에서 볼 때, 허정은 이승만 정권의 지속을 의미하였다. 그는 또한 배후에 민주당이나 민족청년단과 같은 조직화된 정치 세력을 갖지 못했다.
송요찬은 허정이 당시의 혁명적 상황에 대처하기에는 너무 미숙하고 준비가 없었던 것으로 믿었다. 그리고 군부의 어떤 지도자도 허정이 이끄는 정부에 대하여 전격적인 지원을 해줄 수 없었고, 또 그렇게 하지도 않았다. 허정에게 유일한 힘의 기반은 관료 기구와 경찰 조직을 포함한, 이승만 정권의 정부 기구뿐이었다.
사실상 허정에게 있어서 단 하나의 권력 기반인, 바로 그 정치 구조를 깨뜨려야 한다는 모순된 과업이 주어졌다. 허정은 과거에 어떠한 정치 조직체에도 가담하지 않았고, 정치 권력에 대해서도 그다지 큰 욕심이 없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에, 민주당이나 자유당이 그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자유당은 허정이 과거에 이승만과 그의 정부와 긴밀한 관계를 지녔었기 때문에, 사회 정치적 구조에 급격한 변화는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만일 허정이 과도 정부를 이끌어 가기를 거절한다면, 모든 자유당원의 안전을 위협하는 보다 심각한 정치적 혼란이 들이닥칠 것이 뻔했다.
그래서 자유당 인사들은 허정을 군부를 포함하여 사회 내 어떤 단체나 개인보다도 무리 없는 인물로 여겨 수용했다. 민주당 또한 당내의 응집력과 일체감이 결여되어 있었으므로, 정권을 인수할 채비가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장면이 이미 부통령직을 사임하였기 때문에, 민주당이 정권을 인수할 수 있는. 어떠한 합법적인 절차도 없었다. 당내의 신구 양파 중 어떤 세력도 정권 획득을 위하여 변칙적 수단에 의존하려 하지는 않았다.
민주당은 선거에서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적만 많이 만들고 우군은 점점 잃어 버리는, "혁명적 과업" 을 수행할 짐을 떠맡으려고 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국회 내의 양당 지도자들은 허정 자신이 어려운 과제를 떠맡기에 주저하였음에도, 허정이 과도 정부의 수반에 앉아야 한다고 촉구하였던 것이다.
허정은 내각에 민주당 의원을 참여시키려 하였지만, 그들은 직접 참여하지는 않고 허정 정부에 대하여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했다. 결국, 허정이 구성한 내각은 정권에는 욕심이 없어 보이는 사람들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일반 국민들이나, 조직된 정치 세력에 대해 신경을 써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었다.
이들 중 대부분은 제각기의 분야에서 남다르게 훌륭한 업적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다른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던 시민들이었다. 이들에게는 사전의 정치 경험이 없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정치에 관한 한 조직적인 기반이 없었고, 또한 어떠한 진보적 견해나 혁명적 성향도 없었다. 널리 알려진 그들의 슬로건인 "비혁명적 수단에 의한 혁명" 이라는 말은 실로 허정 정부의 성격을 잘 나타내 주고 있었다.
5월 3일, 발표문을 통해 허정 정부는 정책 기조의 방향을 광범위하게 밝혔다. 내정에 있어서는 일상 생활과 법, 사회 조직의 근본 구조에 비치는 4월 봉기의 여파를 극소화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법과 질서를 유지하는 과제에는 반공 투쟁이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고, 대외 관계에 있어서는 강한 반공 노선과 미국과의 긴밀한 유대 관계를 지속하려는 뜻을 분명히 하였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이 초래했던 국제적인 고립, 특히 아시아 또는 중동의 중립국들과 일본에 대한 폐쇄적 관계를 지양하는 정책의 길을 터놓았다.
허정 과도 정부는 일련의 모순된 목표를 추구해야만 했다. 과도 정부에 대해서 국민들은 군대 내의 부패를 일소하고 선거 부정을 저질렀던 자들을 처벌할 것을 기대하였다. 그러나 과도 정부는 군대 고위 장성들의 비위를 건드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더욱이 그들로 하여금 정치에 개입하는 구실이나 자극을 주고 싶지 않았다. 과도 정부는 학생과 언론으로부터 전직 자유당 관리들이나 부정 축재자들에 대해 즉각적이고도 혹독한 처벌을 내리라는 요구에 직면하고 있었지만, 이러한 조처가 취해진다면 그것은 경찰력의 효율성을 마비시키는 것이며, 경제 구조의 근본을 파괴하는 것이라 여겨 주저하였다.
한편, 정치 문제에 있어서는 양당 제도의 확립을 위한 조처가 기대되었으나, 과도 정부로서는 자유당의 부활이나 혹은 좌익 정당의 등장을 용인할 수 없었다. 이렇게 상충되는 과제에 부딪힌 과도 정부는 문제들을 극히 신중하고 무난한 방법으로 해결하려 들었다. 허정이 스스로 술회했듯이, 그는 군을 어떻게 취급할 것인가에 대해 몹시 골몰하였다.
그는 자유당 정권과 손잡고 부정 선거를 저지른 고위 장성이나 여러 부정 사건에 관련된 부패한 장성들을 숙청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인식하였다. 군부에 대한 허정의 첫번째 조처는 이종찬을 국방부 장관으로 임명하는 것이었다.
일본 국방대학을 졸업하고 1951년부터 1952년까지 육군 참모총장을 지낸 바 있는 이종찬은 이승만의 미움을 샀는데, 그 이유는 1952년의 부산 정치 파동 때 이승만이 군을 동원하는 것에 대하여 그가 반대를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이승만 정권에 가까이 동화되지 않은 소수의 몇몇 장성들 중 한 사람으로서, 많은 장교들로부터 존경을 받아오고 있었다.
국방부 장관으로서의 이종찬이 우선 해야 할 일은 군의 정치적 중립성을 유지 시키는 것이었다. 이종찬은 임명 후에 가진 첫 기자 회견에서, 군의 정치적 중립의 필요성에 최대 역점을 두었다.
허정 정부의 막바지 무렵, 각군의 참모총장들은 전 각료 앞에서
"한국군 참모총장의 한 사람으로서 나는 정치에 있어 엄격한 중립을 지킬 것이며, 조국을 적으로부터 보호하는 신성한 의무에만 진력할 것
을 엄숙히 맹세합니다"
라고 명시된 서약문을 읽고 서명하도록 요구받았다.
허정은 군부를 개혁하려 하거나 주요 장성들을 추방하려는 조처를 취하였을 때에 생길 수도 있는, 군으로부터의 적대적 반응을 내심 두려워하였다. 그래서 그는 고급 장교들의 지난 실수에 관해서는 지극히 관대한 정책을 추구했다.
장교들을 섣불리 숙청하려 한다면 한국 내의 미국 대사와 미국 사령관이 같이 쥐고 있는, 한국군의 전투 능력을 상실하게 될 수도 있다는 나름의 계산도 있었다. 허정은 과도 정부의 수반으로 재임한 3개월 동안, 때때로 혹은 정기적으로 미국 관리들과 회동하였다.
미 제8군 사령관인 매그루더(Magruder C.B.) 장군은, 한국군의 재편은 현존하는 불안정과 혼란이 종식될 때까지 연기되어야 한다고 허정에게 말했다. 결국 과도 정부는 약간명의 장성을 전역시켰을 뿐 근본적인 숙군을 단행하지 못했다.
이로 인해, 군부 내의 "정군 문제"는 숙제로 남게 되고 말았다. 허정 내각의 4.19 뒷마무리 중 중요한 과제는, 선거 부정 행위의 주요 음모자와 이승만 밑에서 불법적이고 강압적인 행동을 자행한 경찰들에 대한 처벌 문제였다.
이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서 정부의 기본 입장은, 기존의 법에 따라 공판을 받게 하는 것 이었으며, 경찰에 대해서는 정상적인 인사 정책을 통해서 경찰을 정화하는 것이었다. 허정 정부에 의해 체포된 자들은 9명의 전직 각료와 15명의 자유당 간부였는데, 이들은 3월 15일에 있었던 정부통령 선거 때 불법 활동을 자행한 혐의로 기소되었다.
여러 은행장들도 자유당에 거액의 선거 자금을 불법적으로 제공했다는 혐의로 구속되었다. 이승만의 경호실장이었던 곽영주와 수많은 고위 경찰 관리들은 4월 봉기 때 시위 군중에게 발포한 혐의로 연루되었으며, 하급 경찰 요원들은 4월 19일 이전에 시위 학생들에게 잔악한 고문을 가한 혐의로 구속되었다.
또한, 전 서울 시장이었던 임흥순과 내무부 장관이었던 이근직은 1956년의 부통령 선거 때 장면을 암살하려던 음모에 관련되었다. 그리고 자유당 정권과 공모하여 재계, 문화계, 정치계 인사들에 대한 테러를 자행하였던 정치 깡패의 두목들도 체포되었다.
이들에 대한 공판은 7월 29일로 예정된 국회의원 선거보다 몇 주일 앞선 7월 5일에 열렸다. 공판 과정에서 허정 정부는 법원과 검찰청의 현직 관리들에게 크게 의존하는 수밖에 없었는데. 이들 역시 이승만 정권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봉사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자들이었다.
그들 역시 자유당 정권의 효과적인 정치 도구로 작동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자유당 정권으로부터 거리가 있었던 것처럼 다른 분야에서 활동했던 동료들을 기소해야 하는 임무를 떠맡아야만 했다. 허정 정부로서는 기존의 정치적, 이념적, 법적 기본 구조를 파괴할 의사가 없었기 때문에, 이러한 모순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따라서 공판은 "혁명적" 방식으로 진행되지 못하거나 끝맺어지지 못하였으며, 주어진 법의 테두리 내에서보다 더욱 혹독하게 처벌하기를 바랐던 학생들과 시민들을 만족시킬 수도 없었다. 공판은 장면이 이끈 다음 정부로 넘겨졌으며, 이것은 장면 정권에게는 심각한 고민거리가 되었다.
부정 축재자에 대한 처리도 국민들의 기대에 어긋났다. 과도정부는 부정 축재자를 처벌하겠다는 방침을 반복해서 밝혔지만, 실제로는 몇 사람에 대하여 과거의 부정을 자신 신고하게 하고, 부정 축재분을 사회에 환원시키게 만드는 데 그쳤다.
7월에 가서야 이승만 정권 밑에서 부정 축재한 18명의 개인과 기업가 65명의 명단을 공개하고, 이들을 조사하겠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문제 자체의 복합적 성격으로 인하여 장면 정부가 출범한 이후까지도 그들에 대한 실제적인 조처는 취해지지 못했다. 물론, 부정 축재자들에 대한 조사 처리를 늦추었던 데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이들의 불법적 기업 활동은 이승만 정권과 광범위하고도 뿌리 깊게 결탁되어 있었고, 완벽하게 조사하는 것이 애초부터 불가능했으며, 설사 그것이 가능했다 하더라도 이러한 조처는 나라의 경제 구조뿐만 아니라 정부의 기본 구조를 유지하는 것마저 와해시킬 우려가 있었던 것이다.
분명히 허정 정부는 그러한 모험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국립경찰의 정치적 중립화와 민주화 문제에 있어서도 허정 정부는 선거 부정이나 정치 테러에 책임을 자고 있는 경찰의 최고 간부들만을 해임시켰을 뿐 근본적인 문제해결에는 다가서지 못하였다.
기본적으로 허정 정부의 보수적이고 온건한 문제 접근 방법으로는 일반 국민들을 만족시켜 줄 수 없었을 뿐더러 경찰의 권위주의적 성격도_변화시킬 수 없었다. 짧은 과도 정권 기간 중, 허정 정부는 줄곧 "비혁명적" 방법으로 과제를 해결하려는 입장을 견지한 결과, 후계 정권에게 제한된 행동의 자유를 가지고 "혁명" 을 수행하여야 한다는 어려운 숙제를 남겨 주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4.19 혁명에 대한 역사적 판단을 어떻게 내려야 할 것인가? 4월 봉기의 성과를 따지기에 앞서서,우리는 먼저 당시의 상황을 "혁명적인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지 물어 보아야만 할것이다. 혁명에 대한 개념은 여러 가지로 이해되어 왔다. 대다수의 사회 과학자들은 혁명이라는 말을 보다 넓은 의미로 해석하고 있다.
예를 들면,엑스타인(EcksteinH.)은 "혁명은 국가 정책과 지배자, 또는 제도 등을 기존의 사회규범에서 벗어난 방법으로 변경하려는 모든 시도로서 폭력적인 성격을 지니며, 정착된 기존 제도적 패턴의 심각한 붕괴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라고정의하였다.
그리고 브린턴(Brinton c.)과 페테(Pette G.) 같은 역사학자들에게 있어서의 혁명이란 1789년의 프랑스 혁명이나 1917년에 일어난 볼셰비키 혁명에서처럼, 대규모의 사회적, 정치적 재편성을 내포' 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 이 다. 또한, 정치 철학자인 아렌트(Arendt H.)는 좀더 특색 있는 해석을 내리고 있다.
그녀에 의하면, "혁명은 사회적, 정치적 변동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그 변동의 결과, 정치 과정에 대한 시민참여라는 의미의 정치적 자유를 갖추는 헌법적 구조가 창조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존슨(Johnson c.)은 제도화된 권력 구조와사회 가치 구조 사이의 조화라는 관점에서 사회적 안정을 정의하고 있는데, 그는 잠재적 혁명 상황이라는 것은 이런 조화가 깨질 때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이렇듯, 서로 다르게 해석되고 있는 혁명의 공통된 현상은, "사회의 가치 체계 변동에 기인되었거나 또는 그러한 변동을 야기시키는 과격한 사회적, 정치적 변동" 이라고 하겠다. 1960년 당시의 한국 상황은 이승만 정권의 권력 구조와 정치의식 계층, 특히 그 중에서도 학생들의 가치관 사이에 크고 명백한 균열이 있었다는 의미에서 혁명적인 것으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4월 봉기는 이승만과 그의 지지 세력에 대항하는 반정부 세력에 의한 혁명적 시도였다. 그러나 시위 학생과 군중은 그들 스스로의 조직화된 지도력을 갖지 못했다. 민주당 지도층에서는 자기네들이 시위 운동을 일으키는 데 앞장을 섰다고 주장하였지만, 시위 대중 사이에서 그들의~실제적인 지도력은 나타나지 않았다.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이와 같은 명백한 지도력의 부재가 이승만의 조속한 사임을 가져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는 이승만 정권의 붕괴 후에 '혁명' 을 완성시키지 못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기도 했다.
2. 5.16 군사 정변(1961년)
5.16 군사 정변은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소장을 중심으로 일단의 청년 장교들이 4.19 의거 이후의 정치적, 사회적 혼란을 수습한다는 명분 아래 일으킨 군사 쿠데타다. 이로써 민주당의 장면 정권이 무너지고 혁명 정부가 수립되었으며, 2년 동안의 군정이 실시되었다. 현 정권과 기성징치인에게 더이상 국가의 운명을 맡길 수 없다!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육군 소장을 비롯한 일단의 정치 군인들이 제2 공화국의 장면 정부를 쓰러뜨리려고 무력으로 정권을 탈취하여 거사 당일에 군사혁명위원회를 구성하고, 3일 만에 국가재건최고회의를 출범시키면서, 이후로 한국은 오래도록 군사독재라는 암울한 역사의 한 뒤안길을 걸어야 했다. 박정희와 김종필에 의해 주도된 5.16 군사 쿠데타의 발생 배경은 다음과 같다.
첫번째 배경은, 4.19 혁명 이후의 정치적, 사회적 혼란상을 들 수 있다.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붕괴되고 허정 과도정부가 수립되었지만, 정파간의 이해 관계 대립으로 각종 개혁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지 못했다. 허정 과도 정부의 성격은 민주 정부 수립을 위한 각종 선거를 관리하는 데 국한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뒤에 선거를 통하여 민주당 정권이 수립되었지만, 그들은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된 3.15 부정 선거의 뒷수습을 말끔히 처리하지 못했다. 4.19 혁명 주체 세력은 특히 구정권과 결탁하여 치부한 부정 축재자들의 모든 재산을 몰수하고 그들을 법에 따라 엄격히 처벌할 것을 요구하였지만, 민주당 정권이 미온적으로 일관했기 때문에 불만이 높았다.
여기에다 자유당 정권하에서 탄압받았던 각 사회 단체들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나 통제력이 떨어진 민주당 정부에 자신들의 권익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나섰다. 이와 같은 4 · 19 주체 세력의 정치적 요구와 각 사회 단체의 집단적 권익 투쟁으로 민주당 정부는 몸살을 앓아야 했다.
민주당 정부 당시에 각종 시위가 얼마나 성행하였는가는, 4.19 혁명 이후부터 5.16 군사 정변까지, 학생 시위 7백47회, 노동 관계 시위 6백75회 등 무려 2천여 회의 각종 시위가 발생하였다는 사실에 잘 나타나 있다.
두번째 배경으로는, 민주당 신파와 구파의 파벌 싸움이 격화된 것과 그 와중에 휩쓸린 장면 정권의 무능을 들 수가 있다. 1960년
"7.29 총선"에서 민주당은 의석 수 2백33석 중 1백 75석을 확보, 의석률 74.6%라는 압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장면이 이끄는 신파와 김도연을 대표자로 한 구파 사이에 국무 총리 선출을 둘러싸고 치열한 권력 투쟁이 벌어졌다. 선거 결과, 1백17표 대 1백15표로 장면이 국무 총리가 되었지만, 구파는 그 해 9월 22일에 민주당과의 결별을 선언하고, 얼마 뒤에는 신민당을 창당하여 극심한 권력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장면 정부는 당 내외의 반발에 못 이겨 두 달이 멀다 하고 개각에 개각을 거듭해야 하는 정치적 불안정을 드러냈다. 한편, 같은 해 10월 11일에 4.19 부상 학생들이 국회 의사당에 난입하여 의장석을 점거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이러한 사태의 억제를 위하여 장면 정부는 "반공법"의 제정을 시도하였다.
이 시도에 대하여 신민당, 신풍회, 청조회등에서는 적극적인 반대 투쟁에 들어가
"국가 보안법"
개정을 주장하는가 하면, 혁신 세력은
"2대 악법 반대 경연대회"
를 열고 장면 정권의 퇴진을 요구하기도 했다.
세번째 배경은, 혁신 세력의 대두와 공산주의의 위협이 증대되었다는 사실이다. 이승만의 하야와 자유당 정권의 붕괴는 적어도 혁신계에서는 반공 정권의 와해로 받아들여졌다. 4.19 혁명이후, 7월 29일에 실시된 5대 국회의원 총선거에는 혁신계에서 1백48명의 후보가 출마했다. 정부 수립 이후 처음 보는 혁신계의 대거 출마였다.
이들 중 비록 5명밖에는 의회 진출을 하지 못 했지만, 혁신계 나름의 정치적 전망은 국민의 신망을 잃고 있는 민주당의 대체 정치 세력이 자기들뿐이라는 것이었다. 혁신계가 남북한 관계와 통일 방안에 대해 국민 대중의 지지와 호응을 얻을 것으로 판단한 때인 같은 해 8월
14일, 북한의 김일성이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남북연방제안을 내놓았다.
또한, 10월 21일에는 미국 상원의원이며 외교분과위원회 위원장인 맨스필드(Mansfild M.)가 오스트리아식 중립화 통일 방안을 제안하기도 했다. 이러한 분위기는 혁신계 세력에게 유리한 활동 여건을 만들어 주었다. 1961년 2월 21일에는 통일사회당 등 혁신계가 모여서 중립화통일연맹을 만들었고, 이것을 주축으로 민족자주통일 중앙협의회를 결성하여 적극적인 활동에 틀어갔다.
그리고 같은 해5월 5일에는 민족통일 전국학생연맹이 5월중에 판문점에서 회담할 것을 결의하였으며, 민족자주통일 중앙협의회는 5월 13일에
"남북 학생 회담 환영 및 통일 촉진 대궐기 대회"
를 열었다. 이와 같은 혁신계의 움직임은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큰 파문을 불러 일으켰다.
네번째 배경은, 군부 내 혁신 세력의 성장과 혁명 기도였다. 군사 쿠데타 세력의 움직임은 4.19 혁명 이후에 정군 운동이란 이름으로 처음 포착되었다. 사회 전반에서 혁명적 변화가 일어남에 따라 군부 안에서도 정군의 필요성이 부각되었던 것이다.
표면화된 그 첫 계기는 1960년 5월 2일, 당시 군수기지 사령관이었던 박정희 소장이 송요찬 참모총장을 찾아가 군부에서의 3.15 부정 선거와 각종 비리에 대하여 책임을 지고 물러날 것을 권고한 일이었다. 한편, 같은 해 5월 8일에는 육군정보참모부를 중심으로 김종필, 김형욱, 길재호, 옥창호, 신윤창, 최준명, 석창희, 오상균 등 육사 8기생 8명이 정군을 위한 연판장을 작성하였다가 국가 반란 음모라는 죄목으로 사직 당국의 조사를 받았다.
그리고 이들은 뒤에 연합참모부 부장인 최영희중장과 미 국방성 군원국장인 팔머(Palmer W.B.) 대장의 성명을 성토하여, 세칭 하극상 사건으로 피소되기도 했다. 이들 정군 장교들은 허정 과도 정부에 정군의 당위성을 주장하고, 정군을 위한 구체적인 시안을 마련하도록 건의서를 제출하려 하였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장면 정권이 들어서서도 박정희 소장 등의 정군 요구는 외면 당하였다. 그래서 영관급 정군파 장교들은 1960년 9월 10일 방문이나 건의 등의 평화적 방법으로는 정군을 추진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이른바 "충무장 결의"를 통하여 투쟁 방향을 정군 운동에서 군사 혁명으로 급선회하였다.
박정희 소장이 육군본부 작전 참모부장으로 전임되고, 김종필이 예편되어 자유로운 몸이되자, 그들은 정군과 구국을 목표로 하는 혁명 조직의 규합과 확대에 전념하게 되었다. 그 결과, 육군 206 관구사령부, 육군 제33사단, 육군 제34사단, 육군 제12야전공병대, 육군 제1공수전단과 육군본부.국방부의 중견 장교들을 혁명 조직의 일원으로 포섭할 수 있었다.
이와는 별도로 해병 제1여단장인 김윤근준장이 중심이되어 1961년 4월 15일에 해병대 단독으로 군사 혁명을 일으키려 한 계획이 있었지만, 육군 계획과 횡적 제휴가 이루어져 단독 계획은 보류되었다. 5.16 군사 정변의 주체 세력은 박정희 소장의 지휘아래 전후 4차에 걸쳐 혁명계획을 다음과 같이 세웠다.
첫번째, 5.8 계획: 제1차 계획은 송요찬 참모총장이 미국에 가서 부재중인 1960년 5월 8일을 거사일로 택하여, 해병 제1상륙사단을 주력
으로 7개 지역 부대가 진군할 계획을 세웠지만, 4.19 혁명으로 거사의 의의가 소멸되어 중지되었다.
두번째, 4.19 계획 : 제2차 계획은 1961년에 파다하게 퍼졌던 "3, 4월 위기설"에 대비하여 장면 정권이 군부대에 의한 폭동진압을 할 경
우, 이를 역이용하는 이른바 "역혁명 계획"이었다. 그래서 폭동 진압 부대로 지정된 제6관구사령부에서 혁명조직에 가담한 김재
춘 참모가 움직여 혁명 추진이 시각을 다투었지만, 4.19 혁명 1주년의 위기설이 무사히 넘어감으로써 군의 출동 명분이 없어져 버
려, 거사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세번째, 5.12 계획: 제2차 계획이 무산된 직후, 박정희 소장이 보다 적극적인 혁명 전력을 재정립하여 그 해 5월 12일을 거사일로 결정하
였다. 그러나 혁명 조직을 "작전 수행반"과 "행정반"으로 재편성하여 거사일을 기다리던 중, 조직의 이종태 대령이 동지 포섭을
하다가 기밀이 누설되어 거사를 일단 중지하였다.
네번째, 5.16 계획 : 기밀을 알아차린 육군 방첩대가 육군 참모총장의 지휘하에 수사를 전개할 것에 대처하기 위해 거사의 조기 집행에 들
어갔다. 그동안 이러한 혁명 기도에 대한 정보가 여러 차례에 걸쳐 정보 기관에 알려졌고, 그 때문에 장면 총리와 현석호 국방장관이
장도영 육군 참모총장을 불러 물었으나. 장 총장은 "박정희 소장은 그런 위인이 못 된다"는 답변으로 수뇌부를 안심시켰다.
위기를 느낀 박정희 군부 세력은 1961년 5월 16일 새벽, 해병 제1 여단장 김윤근 준장의 지휘로 해병대가 출동한 것을 기점으로, 공수단은 박치옥 대령이, 제 6군단 포병대는 군단 참모인 홍종철 대령과 문재준 대령의 인솔하에 각각 출동하였다. 그리고 구자춘 대령이 제933대대, 백태하 중령이 제822대대, 김인화 중령이 제911대대를 각각 지휘하였다.
한강대교에 도달한 해병대와 공수 부대는 장도영 육군 참모총장의 지시로 출동한 헌법 제7중대 병력과 약간의 총격전을 벌이기도 했지만,
무난히 돌파하여 서울 시내로 진입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들은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육군 본부를 접수한 제6군단 4개 포병대와 합류한 뒤에, 주력 부대는 서울 시청으로 진주하고, 해병대는 치안국과 서울시 경찰국을, 공수단은 중앙방송국을 이날 새벽 4시 30분경에 각각 접수하였다.
또한, 공수단은 장면 총리의 숙소인 반도 호텔을 급습하였지만, 이미 총리는 도피하고 난 뒤였다. 혁명군은 서울 전역을 장악하였을 뿐만 아니라, 지방에서도 주요 도시인 대구, 부산, 광주, 대전 등지를 장악하는 데 별 어려움이 없었다.
혁명군은 이날 상오 5시에 서울 중앙방송국의 첫 방송을 통하여
"우리군부가 궐기한 것은 현 정권과 기성 정치인에게 더 이상 국가의 운명을 맡겨 둘 수 없다고 판단하고, 백척간두의 위기에서 방황하는
국가의 운명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다"
라고 혁명 목적을 전하고, 다음과 같이
"혁명 공약 6개항"
을 밝혔다.
첫째, 반공을 국시의 제의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쳤던 반공 체제를 재정비, 강화한다.
둘째, 유엔 헌장을 준수하고 국제 협약을 충실히 이행할 것이며, 미국을 위시한 자유 우방과의 유대를 더욱 공고히 한다.
셋째, 이 나라 사회의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퇴폐한 국민 도의와 민족 정기를 바로잡기 위하여 청신한 기풍을 진작한다.
넷째, 절망과 기아 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 자주 경제 재건에 총력을 기울인다.
다섯째, 민족적 숙원인 국토 통일을 위하여 공산주의와 대결 할 수 있는 실력의 배양에 전력을 집중한다.
여섯째, 이와 같은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들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준
비를 갖춘다.
혁명 주체 세력은 그날 방송을 통하여 "군사혁명위원회"가 조직되어 입법, 사법, 행정의 3권을 통합 장악한다고 발표하였다. 이 위원회는 임시 육군본부 상황실에 설치되었다. 장도영 참모총장은 그날로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장직을 수락하였다.
그리고 장면 총리가 5월 18일에 은신처에서 나와 중앙청에서 제69차 임시 각의를 주재하고, 내각 총사퇴를 결의함으로써 군사혁명위원회에 정부를 이양하였다. 이로써 민주당의 장면 정권은 집권 9개월 만에 단명으로 물러나고 말았다. 이날 육군 사관학교 생도들이 군사 혁명을 지지하는 시가 행진이 있었고, 미 국무성은 한국의 군사 정부를 인정한다고 밝혔다.
또한 매그루더(Magruder C.B.) 주한 유엔군 사령관은 김종필과 회담을 가진 뒤, 군사 혁명을 인정하는 공동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때 평소 민심이 장면 정권으로부터 이탈하고 있다고 여겨 오던 윤보선은 박정희, 유원식의 방문을 받은 자리에서 "올 것이 왔다"는 긍정적인 논평을 했다.
이로써 5.16 군사 정변은 명실공히 성공을 거두었으며, 같은 날 군사혁명위원회는
"국가재건최고회의"
로 명칭을 바꾸고 의장에 장도영, 부의장에 박정희. 그리고 혁명위원을 30명으로 구성하고, 고문에 김홍일, 김동하를 추대하였다.
그 뒤에 국가재건최고 회의는 혁명 내각을 조직하고, 내각 수반에 장도영 의장을 겸임시켰다. 장도영이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인 동시에 내각 수반으로 임명되었음에도, 실권은 부의장인 박정희 소장과 중앙 정보부장으로 임명된 김종필에게 있었다.
이에 불만을 느끼고 있던 장도영이 반혁명 사건으로 체포되자, 혁명 주도자였던 박정희 소장이 명실상부한 군사혁명 정부의 실권자로 국민 앞에 부상하였다.
5.16 군사 혁명 정부의 통치 방향은 그들의 혁명 공약 속에 잘 나타나 있는데, 혁명 정부의 우선적인 목표는 국내외의 신망과 지지를 얻는 일이었다. 그들은 민주당의 장면 정권이 해내지 못했던 4.19의 뒷마무리들, 곧 부정 선거 관련자 척결, 정치 깡패들의 처단, 부정 축재자 처벌 등을 속결하고, 사회 질서와 행정 기능을 회복하여, 민주당 정권의 우유부단과 정치 파벌 싸움에 식상한 국민들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구정치인들의 활동을 묶기 위하여 1962년 3월 16일에
"정치 활동 정화법"
을 제정하는 한편, 민정 이양에 앞서 민주공화당의 사전 조직에 착수하였다. 외교적으로는 미국과 일본과의 관계 개선에 치중하였는데, 미
국은 처음에 혁명 정부의 정치적 성격에 의구심을 까졌다.
이 의심을 풀기 위해 혁명 정부는 1961년 5월 18일 밤을 기하여혁신계와 용공 세력 및 중립화 통일론 자들을 검거하고, 7월 4일에는
"반공법"
을 제정하였다. 그리고 11월 11일과 12일에는 박정희 등 최고회의 의장단 일행이 미국을 방문하여 케네디 대통령과 회담을 함으로써 미
국 정부와의 신뢰를 구축하였다.
또한, 일본과는 10월 20일에 한일 회담을 재개하였으며, 미국에서 돌아오는 길은 11월 22일에 도쿄에 들러 이케다 수상과 회담을 가졌다. 그리고 군사 혁명 정부는 그 동안 시급하였던 민생 문제와 안정을 위하여 농어촌 고리채를 정리하여 서민 경제에 활기를 불어넣었고, 화폐 개혁을 단행하여 통화 유통의 일신을 꾀하려 하였다.
또한, 한국 경제에 자력 갱생의 길을 연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하였다. 경제 개발을 위해 그들은 증산, 수출, 건설을 경제의 3대 지표로 설정하였고, 다음과 같은 주요 시책을 발표, 추진하였다.
첫째, 공업화의 기반 구축을 위한 기간 산업, 에너지, 농수산업의 중점 개발.
둘째, 기간 종목인 화학 비료, 시멘트, 제철, 정유 공장 등의 건설.
셋째, 금융 제도의 정비와 국공영 기업의 경영 합리화 추진.
또한 병역 기피자, 밀수범, 조직 폭력배 등 사회에 깊이 뿌리내린
"사회악"
일소를 위해 강력한 단속이 펼쳐지기도 했다. 그리고 혁명 직후부터 언론에 대한 검열을 실시하였으며, 언론 정화를 위해 6월 22일에는
공보부를 신설하였다.
사회 생활 전반에 대한 안정을 목적으로
"중앙정보부법"
을 제정, 공표하였는데, 김종필을 초대 정보부장에 임명하여 군정의 기반을 튼튼히 하였으며, 사회 기강의 확립과 국민 정신의 재무장을
위하여
"재건 국민운동"
을 전개하기도 했다.
이상과 같이, 5.16 군사 정변은 장면 정권의 무질서 정치에 대한 또 하나의 무질서 정치의 대응이었다. 이는 정치 참여의 폭발로 인한 무정부주의에 대처하는, 정치 참여 제한의 전체 정치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정치학자 헌팅턴이 말하는 무정형 정치의 연장선상에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민족사적 견지에서 볼 때, 5.16 군사 정변은 그렇게 간단히 단순화할 수 없는 면이 있다.
5.16은 결과적으로 민족사적 일대 전환의 계기를 마련한 역사적 사건이며, 우리민족의 자립적 근대화의 시발점으로 평가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박정희는 스스로
"5.16은 우리로 하여금 민족의 자아를 되찾고 자기 자신을 알게 된 계기가 되었으며, 민족 중흥을 위한 르네상스였다"
고 토로했던 것 같다.
이를 5.16 주역들의 자기 정당화라고만 단정할 수 없는 것은, 5.16을 기점으로 한국 경제 성장과 근대화가 급속히 이루어졌다는 점에서다. 그런 반면에, 5.16은 군사의 정치 개입이라는 나쁜 선례를 남겼고, 관료 위주의 체제를 뿌리 내리게 하였으며, 인권 탄압, 빈부의 격차 등등 새로운 사회 문제점들을 노출시켰다는 점에서는 여전히 부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