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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요약]
■이정귀(李廷龜)
1564년(명종 19) - 1635년(인조 13)
조선시대 예조판서, 우의정, 좌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 문인으로,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성징(聖徵), 호는 월사(月沙) · 보만당(保晩堂) · 치암(癡菴) · 추애(秋崖) · 습정(習靜). 시호주1는 문충(文忠)이다. 세조 때의 명신인 이석형(李石亨)의 현손이며 아버지는 현령 이계(李𡹘)이고, 어머니는 김표(金彪)의 딸이다. 윤근수(尹根壽)의 문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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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선생집 제16권 / 행장(行狀)
좌의정 월사 이공 행장(左議政月沙李公行狀)
공의 휘(諱)는 정귀(廷龜)요, 자(字)는 성징(聖徵)이요, 호는 월사(月沙)이다. 연안 이씨(延安李氏)의 계보는 당(唐) 나라 중랑장(中郞將) 이무(李茂)로부터 비롯된다. 소정방(蘇定方)을 따라 백제(百濟)를 평정한 뒤 그대로 신라(新羅)에 남아 벼슬하면서 연안을 관적(貫籍)으로 하사받았기 때문에 자손들이 마침내 연안인이 된 것이었다.
고조 석형(石亨)은 3차례나 장원급제한 분으로서 공신에 책훈(策勳)되고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에 봉해졌으며 문강(文康)의 시호(諡號)를 받았다. 증조 혼(渾)은 사헌부 장령으로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고, 조부 순장(順長)은 벼슬하지 않다가 오래 살아 노인에 대한 은전을 받고 가선대부의 품계에 올랐으며, 영의정을 증직받았다.
부친 계(𡹘)는 문장으로 한 시대에 이름을 떨쳤는데, 누차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급제하지 못한 채 삼등현령(三登縣令)으로 관직을 마쳤으며, 영의정을 증직받았다. 모친은 광주 김씨(光州金氏)로 정경부인을 증직받았다. 공은 가정(嘉靖) 갑자년(1564, 명종 19)에 도성 남쪽 청파(靑坡)의 우사(寓舍)에서 태어났다.
공이 태어나던 날, 호랑이가 대낮에 나타나 문밖에 와서 엎드려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놀라 달아났는데, 공이 출생하자 호랑이도 사라졌으므로 이를 듣고서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다. 말을 배울 무렵부터 벌써 문자를 알았으며 말과 행동이 범상치 않았다.
기자헌(奇自獻)이 공과 같은 마을에 살고 있었는데, 공이 7살 때 기(奇)가 비단으로 된 허리띠를 끌러 공에게 주었으나 공이 받지 않았다. 어떤 이가 그 이유를 물어보니, 공이 말하기를, “기(奇)가 찼던 허리띠를 어떻게 받을 수 있겠는가.”하였다.
8세 때부터 시(詩)를 짓기 시작하였는데 깜짝 놀랄 말들이 튀어나오곤 하였다. 그리고 점점 자라나면서 학식을 넓히는 동시에 비상한 기억력을 과시하였다. 일찍이 창려(昌黎)의 남산시(南山詩)를 읽고서 차운(次韻)했는가 하면 이윽고 그 운(韻)을 차용해서 다시 칠언시(七言詩)를 완성하기도 하였는데, 이를 보고는 사람들이 신동(神童)이라고 일컬었다.
11세 때에 김 부인(金夫人)의 상을 당했는데 성인(成人)처럼 상례(喪禮)를 행하였다. 14세 때에 반궁(泮宮 성균관)의 승보시(陞補試)에서 장원하여 명성을 크게 떨쳤다. 그 뒤 을유년 진사시에 입격하고, 경인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리하여 승문원에 소속되었다가 천거를 받고 한림(翰林)으로 들어갔는데, 당시 홍여순(洪汝諄)이 권세를 휘두르면서, 공이 태학(太學)에 있을 때 성우계(成牛溪 성혼(成渾))의 유임을 청하는 소를 작성했었다는 이유로 한림에 천거된 것을 논삭(論削)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宣祖)가 서쪽으로 피신하자 공이 사잇길을 통해 행재(行在)로 찾아갔는데, 성천(成川)에 이르러서 시강원 설서의 임명을 받았다. 계사년에 광해(光海)를 따라 정주(定州)에서 대가(大駕)를 맞이하고 예문관 검열에 임명되었는데, 상이 이르기를,
“강관(講官)이 사관(史官)보다 중하니, 도로 설서를 제수하라.” 하였다.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이 행조(行朝)에 이자(移咨)하여, 학문의 강론을 도와줄 만한 문학사(文學士)를 뽑아 보내도록 하였는데, 이때 공이 황공신(黃公愼)과 함께 선발되었다. 경략은 본디 육씨(陸氏 송(宋) 나라 육상산(陸象山))의 학문을 위주로 하였기 때문에 《대학(大學)》을 강할 때에도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설을 따르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에 공이 두 학설을 비교 분석하여 수십 편(篇)의 설(說)을 지으니, 경략이 훌륭하다고 칭찬하였다.
순안어사(巡按御史)가 도착하자 통군정(統軍亭)에서 연회를 베풀었는데, 제독(提督) 이하 여러 장수들은 모두 그 자리에 끼지 못하였다. 그런데 경략과 어사가 유독 공과 황공만을 청하여 그지없이 위로하고 장려해 주었으며, 자리가 파할 무렵에는 또 글을 써서 북돋아 주기를,
“동국(東國)의 흥망성쇠는 세자에게 달려 있고, 세자의 현부(賢否)는 바로 공들에게 매여 있다.” 하였다.
뒤이어 사서(司書)로 승진하였다. 경략이 본국으로 귀환하자 공이 의주(義州)에서 돌아와 병조 좌랑과 성균관 전적에 임명되었다. 중국 사신 사헌(司憲)이 왔을 때 이공 덕형(李公德馨)이 원접사(遠接使)가 되어 공을 종사관(從事官)으로 지명하였는데, 병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이조 좌랑에 임명되었다.
중국 사신이 돌아갈 무렵에 원접사가 또 공을 종사관으로 불렀는데, 비국(備局)에서 공이 바야흐로 괴원(槐院 승문원)의 외교 문서를 관장하고 있다는 이유로 위에 아뢰어 그대로 있게 하였다. 그러자 원접사가 뒤이어 또 공을 재차 종사관으로 지명하였는데, 이번에는 정원에서 또 공이 중국어를 잘한다는 이유로 위에 아뢰어 머물러 있게 하였다. 공의 재질이 뛰어나 당시에 급하게 쓰여진 것이 이와 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삼등공(三登公 삼등현령을 지낸 부친을 가리킴)의 병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는 상소를 하고 귀성(歸省) 길을 떠났는데, 부음을 길에서 듣고 말에서 떨어져 거의 혼절(昏絶)할 지경에 이르렀다가 눈 위를 도보(徒步)로 1백리 길을 걸어가서 갑오년 봄에 상구(喪柩)를 모시고 돌아와 장례를 행하였다.
병신년에 상복을 벗었는데, 공이 다시 전조(銓曹)에 들어가는 것을 당로자(當路者)가 꺼린 나머지 예조 정랑으로 좌천시켰다가 동지사(冬至使) 서장관(書狀官)으로 차출하였다. 누차 병조 정랑과 성균관 직강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병 때문에 응하지 못하였다.
정유년에 병이 조금 차도를 보이자 비로소 조정에 나아가 병조 정랑의 임명을 받으면서 승문원 교리와 한학 교수(漢學敎授)의 직책을 겸하였다. 경리(經理) 양호(楊鎬)가 평양(平壤)에 도착한 뒤 우리나라의 군병, 성지(城池), 양장(糧仗) 등이 얼마나 되는지 물으면서 3조(曹)의 판서가 직접 달려와 상황을 설명하라고 요구하였다. 이에 조정이 고민한 끝에 공에게 명하여 가서 답변하도록 하였다.
마 제독(麻提督 마귀(麻貴))이 남정(南征)할 적에 접반사(接伴使)가 몇 번이나 종사관을 지명했어도 모두들 꺼려 피하곤 하였는데, 최후로 공에게 이르자 공이 즉시 그날로 길을 떠났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괴원이 계청(啓請)하여 소환되었는데, 이로부터 크고 작은 문서들 대부분이 공의 손에서 나오게 되었다.
언젠가 양 경리(楊經理)에게 보내는 첩문(帖文)을 지은 적이 있었는데, 선묘(宣廟)가 이를 보고서 하문하기를, “이 글이 매우 잘 되었다. 누가 작성한 것인가?” 하기도 하였다. 성균관사예 겸 시강원필선에 임명되었다. 공이 일찍이 춘방(春坊)에 입직(入直)하고 있을 때에 양 안찰(梁按察)이 졸지에 대궐로 오자 선묘(宣廟)가 어쩔 줄 모르고 나가서 영접하였다.
그런데 어전통관(御前通官)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으므로, 정원이 공을 불러 입시(入侍)케 할 것을 청하였는데, 공이 응대(應對)를 썩 잘해 나가자, 안찰 역시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춘방의 학사(學士)가 어쩌면 이렇게 중국 말을 잘 하는가.”하였고, 선묘도 승지에게 이르기를, “이정귀가 이토록 재주가 많을 줄은 생각하지 못하였다.” 하였다.
이로부터 상이 공을 더욱더 인정하여 3품의 준직(准職)을 제수하도록 명하는 한편 일곱 계단을 뛰어 올려 장악원 정(掌樂院正)으로 삼는 동시에 예전처럼 겸대(兼帶)하게 하였다. 무술년에 사헌부 집의에 임명되었다가 승정원동부승지 겸 승문원부제조에 발탁되었다.
관왕묘(關王廟)가 낙성되자 중국 장수가 상에게 제사를 올리러 함께 가자고 청하였다. 그런데 대가(大駕)의 출발 준비가 다 된 시점에 와서야 비로소 제문(祭文)을 지어 올리도록 명하였다. 이에 유사(有司)가 지제교(知製敎)를 불러올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공에게 그 일을 명하였는데, 공이 그 자리에서 바로 지어 올리자 상이 크게 기뻐하면서 비단을 하사하라고 명하였다.
체직되어 병조 참지를 임명받았다. 당시 중국 장수들이 도성 안에 가득하여 자게(咨揭)로 왕복하느라 밤이고 낮이고 눈코 뜰 새 없었다. 이에 공이 이쪽저쪽으로 응수하면서 대부분 입으로 불러 주면서 바로 작성하게 하곤 하였으며, 혹 공이 지어야 할 문서가 아니었어도 특별히 공에게 위촉된 경우가 또한 왕왕 있었다.
그리고 글이 한 편씩 완성될 때마다 번번이 표창과 함께 비단을 하사받곤 하였으며, 더러는 명에 의해 별도로 1본(本)을 베껴 안에 들이기도 하였다. 대신의 계청(啓請)에 따라 비변사 부제조를 겸하게 되었다. 얼마 있다가 정응태(丁應泰)가 우리나라를 무함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에 선묘(宣廟)가 정전(正殿)을 피하고 정무(政務) 보는 일을 정지한 채 짚자리를 깔고 황제의 명을 기다리게 되었는데, 중외(中外)가 온통 진동하는 가운데 장차 사신을 보내 무함을 해명하기도 의견이 모아졌다. 그리하여 사신(詞臣) 몇 사람을 뽑아 각자 주본(奏本)을 작성해 올리도록 명하였는데, 다 바치고 나자 유독 공이 지은 것만을 채택해서 쓰기로 하였다.
공은 응태가 무함한 것에 대해 조목별로 그지없이 명쾌하게 해명하였는데, 특히 우리나라에서 임금의 호칭을 조(祖)와 종(宗)으로 했다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소방(小邦)은 바다 밖에 멀리 외따로 떨어진 나라이기 때문에 삼국 시대(三國時代) 이래로 예의(禮儀)와 명호(名號)를 정할 때에 중국을 사모하고 본받으려 한 나머지 비슷하게 본뜨려 한 것이 많았었는데, 선신(先臣) 강헌왕(康獻王 이태조(李太祖) 때에 이르러 일체 바로잡아 개혁하였습니다.
그런데 유독 임금에 대한 칭호만큼은 신라(新羅)와 고려(高麗) 때부터 시작되어 계속 이런 잘못된 오류를 범해 오고 말았는데, 이는 대체로 나라 안의 신민(臣民)들이 예전의 잘못된 습관을 답습한 나머지 그대로 따르기만 할 뿐 미처 고칠 줄을 몰랐던 것이니, 이는 그야말로 무지한 탓으로 망녕되게 행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따라서 이런 측면에서 죄를 받는다면 만 번 죽어도 할 말이 없습니다만, 만약 이를 두고 참절(僭竊)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진정한 마음을 너무도 이해해 주지 못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하였다. 이때 유상 성룡(柳相成龍)이 주고(奏稿)를 보고서 말하기를, “이것은 크게 관계되는 일인데, 지금 무작정 사실대로 털어놓는다면 헤아릴 수 없는 화(禍)를 당할 염려가 있다.
따라서 아예 빼 버리고 거론하지 않는 것이 차라리 나을 것이다.”하였는데, 이 문제를 두고 조정의 의논이 잘 귀결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 상이 수교(手敎)를 내리기를, “군신(君臣)은 부자(父子)와 같다. 속여야 할 일이 뭐가 있겠는가. 이 일 때문에 죄를 준다면, 내가 응당 기꺼이 받겠다.”하였으므로, 군의(群議)가 비로소 결정되었다.
이상 항복(李相恒福)이 진주상사(陳奏上使)가 된 다음 신공 흠(申公欽)을 서장관(書狀官)으로 데리고 가게 해 줄 것을 청하자, 상이 이르기를, “오늘날 사명(詞命)을 훌륭하게 행할 자로는 이모(李某)만한 이가 없다. 그의 문장을 보면 가슴속의 애틋한 마음을 다 쏟아 내면서도 여유가 있고 전중(典重)하며, 사람됨이 또한 상황을 잘 헤아려 처리할 줄을 안다. 그러니 그의 품계를 높여 부사(副使)로 삼는 것이 좋겠다.”하였다.
그리하여 이튿날 가선대부로 품계가 오르는 동시에 공조 참판에 임명된 뒤 진주부사(陳奏副使)로 차출되었는데, 공이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이듬해 봄에 경사(京師)에 도착해서 상주(上奏)한 다음, 각 아문(衙門)을 두루 찾아다니면서 정문(呈文)을 갖춰 해명하였는데, 그 글 36통이 모두 공의 손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황제가 주문(奏文)을 정신(廷臣)에게 내려 의논하게 하였는데, 제공(諸公)이 주문을 읽어 내려가다가 묘호(廟號)에 대해 설명한 대목에 이르러서 크게 칭찬하고 감탄하면서 말하기를, “정말 솔직한 말이다. 임금에게 숨김없이 고한 것을 보니 조선은 참으로 예의(禮義)의 나라이다.” 하였으며, 정신(廷臣)이 복의(覆議)를 올린 내용 중에도, “조선 국왕의 주문이 하도 명백하고 통쾌하여 읽어 내려가는 동안에 눈물이 뚝뚝 떨어지려고까지 하였습니다.” 라는 말이 있었다.
이 의논이 들어가자 천자가 정응태의 관적(官籍)을 회수하고 신문하도록 명하는 한편, 해부(該部)로 하여금 우리나라에 이자(移咨)하여 위유(慰諭)하도록 하였다. 사명(使命)을 마치고 돌아와 보고드리자, 선묘가 인견(引見)하고는 칭찬하고 권장해 주면서, 품계를 올리고 노비와 전결(田結)을 하사하도록 특별히 명하는 한편, 비변사 유사당상(有司堂上)을 겸하게 하였다.
조의(朝儀)가 장차 야인(野人)들을 토벌하려 하면서 서로(西路)와 북로(北路)로 하여금 군대를 뽑게 하였다. 이에 공이 차자(箚子)를 올려 잘못된 계책이라고 아뢰었는데, 이 차자를 보고서 상이 이르기를, “내가 진작부터 경이 재주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만, 적과의 승부를 헤아리는 과정에서 이토록 지혜를 발휘할 줄은 생각하지 못하였다.
게다가 시대 상황을 제대로 묘사하면서 사람이 듣기 싫어하는 말을 극력 진달하였는데, 이 역시 보통 사람으로서는 해내기 어려운 일이다. 나는 이런 인재가 있다는 것이 스스로 자랑스럽기만 하다.” 하고, 마침내 그 말을 따랐다. 호조 참판에 임명되었다가 뒤이어 예문관 제학에 특별히 제수되었다.
상이 언젠가 양 경리(楊經理 양호(楊鎬))를 접견할 적에 공에게 입시(入侍)하도록 명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다른 날에도 또 공이 입시하자, 상이 이르기를, “전에 이모(李某)에게 입시하도록 명했던 것은 대개 경리가 무슨 일을 물어볼 때에 혹시라도 대답하기 어려운 점이 있을까 염려해서였다.
그러니 평상적으로 접견할 적에는 꼭 입시하게 할 필요가 없다.” 하고는, 이어 공에게 비단을 하사하였다. 상이 공을 중하게 의지한 것이 이와 같았다. 경자년에 동지의금부사를 겸하였다. 이때 호조 판서의 자리가 비어 있었는데, 상이 묘당(廟堂)에 명하여 자질(資秩)을 따지지 말고 인재를 골라 의망(擬望)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공을 발탁하여 자헌대부로 품계를 올리고 호조 판서에 임명하였는데, 공이 여러 차례에 걸쳐 간절히 사양한 끝에 체직을 허락받았다. 그런데 마침 의인왕후(懿仁王后)가 상승(上昇)하자, 대신이 아뢰기를, “나라에 큰 상사(喪事)가 있게 되었는데, 이모(李某)가 아니면 탁지(度支 호조)를 관장할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하였으므로, 다시 공을 호조 판서에 임명하였다.
공이 이에 감히 사양할 수가 없어 즉시 나아가 숙배(肅拜)하고 국장도감 제조(國葬都監提調)를 겸하였다. 당시 국가의 재정이 고갈된 상황에서 염빈(殮殯)하는 데에 필요한 비단, 포목 등의 물품 숫자가 매우 많았다. 따라서 이들 물품의 충분한 양을 모두 시장에서 구해 와야 할 형편이었는데, 공이 적절하게 조처해 준 덕분에 일도 제대로 진행되면서 백성들 역시 고달픔을 당하지 않게 되었다.
또 방책을 시설하고 금령(禁令)을 내려 이서배(李胥輩)들이 시정(市井)을 침탈하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시장 백성들이 대단히 편하게 여겼다. 지경연사(知經筵事)를 겸하였으며, 예조 판서로 이배(移拜)되었다. 대행왕후(大行王后)의 영구가 궁을 나와 장지(葬地)에 도착한 다음 바로 다음 날 하관(下棺)할 예정이었는데, 그날 밤 영악전(靈幄殿)에 화재가 발생하였다.
재궁(梓宮)은 다행히 다른 곳으로 옮겨 모실 수 있었으나,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떠들면서 크게 소란스럽게 굴자, 공이 영(令)을 내리기를, “모든 집역인(執役人)들은 각자 자기가 맡은 물건을 가지고 불을 피해 나온 다음 명령을 기다리도록 하라.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에는 중한 처벌을 내릴 것이다.” 하였는데, 불길이 진화된 다음에 공이 장부를 가지고 점검해 보니 유실(遺失)된 물건이 없었다.
이에 낭관(郞官)을 보내 치계(馳啓)하고 나서 마침내 세자와 총호사(摠護使)에게 보고를 올리니, 총호사가 기뻐하여 말하기를, “공 같은 사람을 예판(禮判)으로 얻었으니, 걱정할 것이 또 뭐가 있겠는가.”하였다. 이에 위안제(慰安祭)를 먼저 거행한 뒤에, 처음에 잡은 길시(吉時)에 의례(儀禮)대로 하현궁(下玄宮 하관)하는 의식을 행하게 되었다.
이때 공이 또 말하기를, “오늘 불행히도 큰 변고를 당하게 되었으나 책보(冊寶) 등 여러 기물(器物)은 다행히도 손상되거나 더럽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삼사(三司)와 육경(六卿) 등 관원들로 하여금 하나하나 자세히 살펴보게 한 다음에 광중(壙中)을 덮는 것이 좋겠다.” 하자, 모두들 그렇게 하자고 하였다. 이 때문에 일을 마치고 돌아가서 이의(異議)를 제기하는 자가 한 사람도 없게 되었으니, 이 모두가 공이 힘쓴 덕분이었다.
신축년에 세자 우빈객(世子右賓客)을 겸하였다. 일찍이 조강(朝講)에 입시했을 적에 대사간으로 있던 김공 상용(金公尙容)이 진대(進對)하다가 듣기 싫어하는 말을 많이 아뢰자 상이 크게 노하였다. 이에 좌우에 있던 신하들 모두가 감히 한마디도 하지 못하였는데, 공이 나아가 아뢰면서 잘 조정하여 해명을 하니, 상이 조금 노여움을 누그러뜨리면서 이르기를, “내가 그런 일을 한 적은 없다만, 궁중(宮中)을 거듭 경계시키겠다.” 하였다.
병으로 체직되었다가 얼마 안 있어 다시 예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이때 마침 교정청(校正廳)을 설치하고 경서(經書)의 언해(諺解)를 찬정(撰定)하자 공이 당상으로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 뒤 사직하여 지의금부사로 체직되었으며 뒤이어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지성균관사를 겸임하였다.
조사(詔使) 고천준(顧天峻)과 최정건(崔廷楗)이 장차 우리나라에 오려 하자 공이 원접사(遠接使)가 되었는데 조정을 하직하던 날 선묘가 쓰고 있던 초모(貂帽)를 벗어서 공에게 주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당시 원접사의 막료(幕僚)로 뽑힌 이들을 보면 모두가 한 시대의 명망을 지닌 인사들이었다.
그런데 그때 마침 정인홍(鄭仁弘)이 자기 패거리를 시켜 성우계(成牛溪 성혼(成渾))를 무함하며 헐뜯게 하였는데, 이에 반대하여 바른 의논을 견지한 신하들이 서로 잇따라 견책을 받고 파직되었으므로, 공 역시 스스로 편안치 못한 생각이 들어 병을 핑계로 해직시켜 줄 것을 청하였다.
임인년 3월에 체직되어 평양 영위사(平壤迎慰使)가 되었으며, 조정에 돌아오고 나서 문형(文衡) 및 빈객(賓客)과 경연(經筵)의 직책을 극히 사양한 결과 차례로 체직을 허락받았다. 그러다가 곧바로 빈객 및 총관(摠管)과 교정청 당상을 다시금 겸하게 되었으며, 또 예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이때 효경전(孝敬殿)의 제례(祭禮)를 다시 새롭게 정하였다. 또 정몽주(鄭夢周)의 묘소에 치제(致祭)하면서 ‘고려 시중 정공(高麗侍中鄭公)’이라고만 칭하고 이름은 부르지 말게 할 것을 청하였는데, 선묘가 처음에는 난색을 보이다가 공이 극력 청하자 들어주었다.
또 노산(魯山 단종(端宗)의 강봉(降封)된 칭호)과 연산(燕山)의 후사(後嗣)를 세우자고 청하였으나, 그 의논은 저지되어 행해지지 못하였다. 병으로 체직되어 서추(西樞 중추부)에 몸담게 되었다. 갑진년 정월에 천변(天變)이 일어나자 상이 구언(求言)을 하였다.
이에 공이 유지(有旨)에 응하여 봉계(封啓)를 올리면서 군정(軍政)을 닦아 무비(武備)를 단속하고, 기강을 진작시켜 국체(國體)를 존엄하게 하고, 인심(人心)을 결속시켜 화기(和氣)를 불러오게 하고, 언로(言路)를 열어 주어 훌륭한 계책들이 모여들게 하고, 공도(公道)를 넓혀 인재를 널리 수습하고, 실덕(實德)을 닦아 하늘의 꾸지람에 응하도록 청하였다.
조정에서 세자의 책봉을 건의하면서 공을 주청사(奏請使)로 삼았다. 공이 중국에 갔다가 돌아온 뒤에, 대관(臺官)이 권신(權臣)의 뜻을 떠받들어 사소한 일들을 주워 모은 뒤 공을 탄핵하였으나, 상이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을사년에 외방으로 나가기를 청하여 경기 관찰사에 임명되었다.
그러다가 찬집청(纂集廳)이 설치되자 윤공 근수(尹公根壽)와 이공 호민(李公好閔)이 아뢰기를, “이모(李某)를 이번의 선발 대상에 포함시키지 않을 수 없으니, 파격적으로 당상에 임명토록 하소서.”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공은 기전(畿甸)을 다스리면서 풍교(風敎)를 엄하게 하고 방치되었던 일들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것을 급선무로 삼았다.
그리고 포은서원(圃隱書院)을 용인(龍仁)에 세웠는데 그 일이 알려지자 위에서 충렬(忠烈)이라는 편액(扁額)을 하사하였다. 이와 함께 숭의전(崇義殿 고려 태조 이하 8왕의 위패를 모신 사당)을 중건한 뒤 후손인 왕곤(王鵾)을 전감(殿監)으로 삼게 해 줄 것을 청하였으며, 수원(水原)과 죽산(竹山) 두 산성(山城)을 보수하여 군량과 기계(機械)를 비축해 둠으로써 급할 때의 대비책이 되도록 하였다.
이듬해 임기가 만료되자 체직되어 지중추부사가 되었고, 실록청, 춘추관, 의금부의 지사(知事)를 겸하였다. 그때 무명씨(無名氏)가 반궁(泮宮)의 복도 벽에 글을 써 붙여 당로자(當路者)의 악행을 폭로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러자 권신(權臣)이 마침내 대옥(大獄)을 일으켜 죽은 사람이 매우 많았는데 그 와중에서도 공이 구해 준 덕분에 목숨을 보존한 자가 꽤나 많았다.
또 일찍이 삼성회좌(三省會坐 의정부ㆍ사헌부ㆍ의금부의 관원이 모여 신문하는 것)한 자리에서 우스갯소리로 희롱을 하자 권신이 더욱 성을 내었는데, 선묘가 뒤이어 심리(審理)하는 관원들에게 널리 물어보았을 때에 공이 억울한 정상을 극력 말하였으므로, 마침내 모두 놓아준 적도 있었다.
일본 사람이 화의(和議)를 청하면서 사수(死囚)를 묶어 보내고는 임진년 당시에 왕릉(王陵)을 범한 적(賊)이라고 거짓말을 하였는데, 유영경(柳永慶)이 이를 장차 종묘에 고한 뒤 진하(陳賀)하려고 하였다. 이에 공이 상차(上箚)하여 그 불가함을 논하다가 사직소를 올려 금부와 총관에서 체직되었다.
정미년에 지춘추관사를 겸하고 다시 호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무신년 2월에 선조가 승하하자, 공이 규례에 따라 국장도감 제조(國葬都監提調)를 겸하였다. 공이 전후에 걸쳐 2번 호조 판서가 되었는데 그때마다 모두 국상(國喪)을 당하여 모든 물품을 부족하지 않게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더욱 공의 통재(通才)에 탄복을 하였다.
그 뒤 병조 판서로 옮겨 임명되었다. 광해(光海)가 처음 임금 자리를 잇고 나서 스스로 위태롭다고 지나치게 생각한 나머지 군대를 동원하여 궁성(宮城)을 에워싸게 하였는데, 오래도록 그 일을 그만두지 않자 장사(將士)들이 야숙(野宿)하는 등 그 고달픔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 일을 감히 말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공이 위에 아뢰어 군대를 해산시키게 하였다.
난리를 치른 뒤에 군공(軍功)을 세운 사람들과 곡식을 바친 사람들에 대해 국가에서 이렇다 할 보답을 해 주기는커녕 강제로 돌려가며 상번(上番)케 하면서 ‘일삭 금군(一朔禁軍)’이라고 불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원통하게 생각하였다. 이에 공이 또 계청하여 이들을 해산시켜 집으로 돌려보내게 하고 일이 발생할 경우 부방(赴防)만 하게 하였다.
그리고 내삼청(內三廳)에 소속된 참하관(參下官)들이 적체(積滯)된 채 천전(遷轉)되지를 못하자, 훈련주부(訓鍊主簿)의 자리를 더 설치하도록 청하여 그들이 승진되어 옮겨 갈 수 있는 기회를 확대해 주었다. 세자 우빈객(世子右賓客), 동지경연사, 동지성균관사를 겸하고, 또 선혜청 당상과 내의원 제조를 겸하였다. 선조(宣祖)의 행장(行狀)을 지어 올리자 공을 가자(加資)하여 정헌대부로 삼았다.
대행 대왕(代行大王)의 발인(發靷) 때에 소요되는 군정(軍丁) 6천여 명은 으레 제도(諸道)에서 징발해 오도록 되어 있었는데, 공이 계청한 결과 5부(部)의 방민(坊民)을 조발(調發)해 쓰도록 하였고, 마침내는 이를 정식(定式)으로 삼게 하였다. 중국 사신 웅화(熊化)가 왔을 때 공이 관반(館伴)이 되었다.
웅공(熊公)이 공의 시를 얻어 보고는 찬탄해 마지않으면서 글로 써서 역관(譯官)에게 보여 주기를, “글자 하나하나에 당(唐) 나라 시인의 넋이 깃들어 있다.” 하였다. 그리고 매일 공을 초청하고는 편복(便服) 차림으로 들어와 대화를 나누곤 하였으며, 말을 할 때나 글을 써서 보낼 때에 꼭 선생(先生)이라고 일컬었다.
작별한 무렵에는 애틋한 정을 이기지 못해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였으며, 그때 공에게 황화집(皇華集) 서문(序文)을 청하여 받아 가지고 가기도 하였다. 태감(太監) 유용(劉用)이 잇따라 우리나라에 왔다. 호조 판서로 있던 김공 수(金公睟)가 관반(館伴)이 되었으나, 대신이 계청한 결과 공이 이를 겸하게 되었다.
유사(劉使)가 도중에 재물을 요구하는 것이 끝이 없었으므로 장차 어떻게 응해야 할지 모를 지경이 되었다. 그러자 더러 말하기를, “민간에 비축된 것들을 긁어모으고 또 창고를 열어서 그 곡식으로 금(金)을 사서 그를 대접하는 것이 좋겠다.”하였는데, 공이 홀로 나아가 아뢰기를, “지금 바야흐로 가뭄의 재앙이 참혹하기 그지없어 백성들이 장차 죽음의 구렁에 빠져 들게 되었으니, 묘당에서는 먼저 황정(荒政)을 강구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조사(詔使)를 접대하는 문제는 깊이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하였다.
사람들이 혹 과연 그럴까 하고 의아해하기도 하였으나, 뒤에 지나고 보니 호조의 현은(見銀)을 고갈시키지 않으면서 유사 역시 만족한 상태로 돌아가게 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공이 또 계청하여 제주(濟州)에서 마른 복어(鰒魚)를 더 무역해 오게 하는 일을 정지시키도록 하자 섬 백성들이 다시 크게 소생되었는데, 용도 역시 부족한 점이 없었다. 또 양관(兩館 홍문관과 예문관) 대제학을 겸하였다.
중국 사신이 올 때마다 외방에서 인정(人丁)을 조발(調發)하여 접대도감(接待都監)에 복역케 하는 그 숫자가 수천 명에 이르고 말[馬] 역시 수백 필에 이르는 등 백성에게 폐단을 끼치는 것이 엄청났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공이 병조 판서로 있으면서, 포목을 적당히 거두어 품삯을 주고 일꾼을 모집하자고 건의하였다.
그러자 내외(內外)에서 모두 편하게 여겼음은 물론, 쓰고 남은 포목이 그래도 3천여 필이나 되었으므로 마침내 이것을 가지고 병조의 건물을 중건하기까지 하였다. 병으로 정고(呈告)하여 지중추부사로 체직되었는데, 겸대(兼帶)하는 직책은 예전과 같았다.
겨울에 말미를 청하여 묘제(墓祭)를 행하고 돌아왔다. 이때 경기 백성들이 기아에 허덕이는 고달픈 상황을 진달하고, 또 아뢰기를,
“곡식을 옮겨와 백성에게 대여(貸與)해 주는 것은 본래 굶주림을 구해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백성들이 한번도 실질적인 혜택을 입지 못한 채 그저 이서배(吏胥輩)들이 침탈하는 계기만 되고 있을 따름인데, 내년에 독촉하여 상환하게 하다 보면 더욱 심하게 백성들을 병들게 하고 말 것입니다.
오직 부역(賦役)을 모조리 견감해 주어 힘을 좀 펼 수 있게 해 준다면, 백성들이 비록 풀이나 나무 뿌리를 캐먹고 산다 할지라도 자신들의 생활을 꾸려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진휼용(賑恤用) 미곡은 선혜청(宣惠廳)의 용도로 대신 충당하게 하고, 경기 백성들이 올가을과 내년 봄에 납부해야 할 환수미는 모조리 감면토록 해 주소서. 그러면 백성들이 큰 은혜를 입는 결과가 될 것입니다.”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실록청 당상을 겸하고, 다시 예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이때 공이 계청하여 중외(中外)에서 보고해 올린 효자(孝子)와 절부(節婦) 모두에 대해 정표(旌表)를 행하도록 하였으며, 또 계청하기를, “노산군과 부인의 분묘(墳墓)가 있는 곳에 다시 봉식(封植 봉분을 높이 쌓고 나무를 심는 것)을 가하고 묘소를 지키는 인호(人戶)를 더 늘려 배치하는 동시에, 별도로 사우(祠宇)를 세운 뒤 해마다 향축(香祝)을 내리시어 제때에 제사를 지낼 수 있게 해 주소서.”하였다.
병란을 겪은 뒤로 경중(京中)에 중학(中學)과 서학(西學) 건물만 남아 있었는데, 공이 또 계청한 결과 사학(四學)을 모두 예전의 제도처럼 복구하였다. 경술년에 선조(宣祖)를 제부(躋祔 승부(陞祔) 혹은 부묘(祔廟)와 같은 뜻으로 신주를 종묘에 올려 모시는 것)하였다.
이에 공이 청하여 의인왕후(懿仁王后)의 휘호(徽號)를 고사(故事)에 따라 더 올리게 하였다. 또 아뢰기를, “부묘(祔廟)한 뒤에는 으레 기로(耆老)와 유생들의 가요 행사가 있곤 하였습니다만, 이는 군더더기에 해당될 뿐더러 아직도 슬픔이 다 가시지 않은 때이니 더욱이나 모두 행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였는데, 광해가 즐거워하지 않으면서도 축문(軸文)을 올리는 일만 행하고 결채(結綵 색종이 등을 새끼에 꽂아 길 양쪽을 장식하는 것) 등의 일을 정지하도록 하였다.
또 아뢰기를, “해조(該曹)의 전고(典故)를 기록한 문적(文籍)들이 난리를 치르는 과정에서 모조리 없어졌으므로 변례(變禮)를 당할 때마다 상고하여 근거할 자료가 없습니다. 각조(各朝)의 《실록(實錄)》 가운데에서 수합하게 하되, 길례(吉禮), 흉례(凶禮), 군례(軍禮), 빈례(賓禮)로 분류하여 그 의주(儀注) 절목(節目) 중에서 근거할 만한 사례들을 뽑은 뒤 한 권의 책으로 만들게 하여 고열(考閱)하는 데 편리하게 하소서.”하니, 모두 따랐다.
광해가 장차 사친(私親 생모인 공빈 김씨(恭嬪金氏)를 말함)을 추존(追尊)하려고 하면서 유신(儒臣)에게 명하여 고전(古典)을 널리 상고하게 하였다. 유신이, 명(明) 나라 효종(孝宗)이 기태후(紀太后)를 추존하면서 별묘(別廟)에 모셨던 일을 인용하여 아뢰니, 그 일을 예관(禮官)에게 내려 의논하게 하였다.
이에 공이 아뢰기를, “중자(仲子)의 사당을 낙성한 것과 성풍(成風)에게 수의(襚衣)를 보낸 것 모두가 《춘추》에서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한(漢)ㆍ당(唐) 이후로 추존했던 일 역시 성인의 예제(禮制)에 어긋나니 모두 본받을 것이 못 됩니다. 더구나 의인왕후(懿仁王后)께서 아들을 두지 못해 전하를 취해 후사(後嗣)로 삼으셨고 보면, 사친(私親)에 대해서는 강쇄(降殺)하는 절차가 있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런데 명 나라 조정에서 효종이 생모를 추존하여 봉자전(奉慈殿)에서 별도로 제사를 올리게 한 것으로 말하면, 이는 바로 시왕(時王)이 행한 제도이니, 이를 근거로 하여 의논할 수는 있을 듯싶습니다. 다만 그 위호(位號)를 위로 모후(母后)와 같게 한다면 두 분을 똑같이 어미로 높여 모시게 되는 혐의가 분명히 있게 될 것입니다.
본조(本朝)의 경우, 모비(母妃)가 생존해 계실 때에는 비(妃)라고 칭했다가 돌아가신 뒤에는 후(后)라고 일컫고 있습니다. 따라서 후와 비 사이에는 조금 등급에 차이가 있으니, 지금 추존하되 비(妃)라고 하고, 별묘(別廟)에서 향사(享祀)를 올리는 것이 좋겠습니다.”하였는데, 광해가 이르기를, “종묘에 옮겨 모시는 일을 가벼이 의논하기 어렵다면, 그 일은 서서히 후일을 기다리기로 하겠다만, 후(后)의 위호를 써서 추존한 다음 별묘를 세워 책보(冊寶)를 올리고 의전(儀典)을 갖추어 봉릉(封陵)하는 일만은 지금 해야 하겠다.”하였다.
공이 재차 계사(啓辭)를 올려 대신에게 의논할 것을 청하였는데, 영상(領相) 이공 덕형(李公德馨)이 의논드리기를, “해조(該曹)의 의논이 정당합니다.”하였으나, 광해가 이르기를, “별묘에서 제사드리는 것만도 이미 차별을 두었다고 할 것인데, 비(妃)의 위호만 올린다면 너무나도 흠이 되는 일이다. 후(后)의 위호를 올리는 일은 단연코 그만둘 수 없다. 다시 강정(講定)하도록 하라.”하였다.
공이 세 번째 계사를 올리면서 여전히 예전의 의논을 견지하였는데, 광해가 들어주지 않자 공이 마침내 사직하였으나 그것도 광해가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공이 네 번째 계사를 올려 또 강력하게 불가한 점을 아뢰니, 광해가 이르기를, “후세에 준열한 논의가 일어난다 하더라도 그것은 나 자신이 책임질 일이다. 대신과 유사(有司)가 할 말을 하지 못했다고 그 누가 말하랴. 시급히 의논해 올리도록 하라.”하였다.
이튿날 조강(朝講)에 공이 입시하여 또 극력 말하였으나, 광해가 끝내 듣지 않고 봉자전(奉慈殿)의 제례(祭禮)를 일체 태묘(太廟)에서 행하는 것처럼 하라고 명하였다. 그러자 공이 또 아뢰기를, “별묘(別廟)의 제례에는 시선(時膳 그 계절에 맞는 음식 요리)을 써야지 태묘의 생뢰(牲牢)를 써서는 안 됩니다.”하였는데, 모두 8차례를 아뢰고 나서야 비로소 허락하였다.
광해가 또 사묘(私廟)에 자신이 직접 제사를 올리려 하자, 공이 아뢰기를, “신주(神主)를 아직 개제(改題)하지도 않았는데 먼저 친제(親祭)를 행한다는 것은 매우 온당치 못한 일입니다. 별묘에 봉안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행하도록 하소서.”하였는데, 광해가 처음에는 허락하지 않다가 세 차례를 아뢰고 나서야 따랐다.
유생들이 소를 올려 다섯 현신(賢臣)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게 할 것을 청하였으나 오래도록 윤허하지 않았다. 이에 공이 연석(筵席)에서 그들의 요청을 극력 변호하여 그 일이 거행될 수 있도록 하였으므로 사론(士論)이 대단하게 여겼다. 숭정대부의 품계로 오르면서 이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신해년에 정인홍(鄭仁弘)이 상차(上箚)하여 문원(文元 이언적(李彦迪), 문순(文純) 이황(李滉)) 두 선정(先正)을 헐뜯자 태학(太學)의 제생(諸生)들이 인홍의 이름을 청금록(靑衿錄 유적(儒籍))에서 삭제해 버렸다. 그러자 광해가 크게 노하면서 의논을 주도한 유생을 삭적(削籍)하고 금고(禁錮)시키도록 명하였는데, 태학생들이 그 명을 듣고는 권당(捲堂 동맹 휴학)을 하고 떠나갔다.
이에 공이 대궐에 나아가 설명하여 아뢰자, 광해가 삭적과 금고의 명을 철회하면서 다만 장무관(掌務官)을 파직시키고 대사성을 체직시키도록 하였다. 그러자 공이 또 상소하여 쟁집(爭執)하면서 자신에게도 처벌을 내려 줄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공이 전조(銓曹)에 있으면서 엄체(淹滯)된 인사들을 발탁하고 사적으로 요행히 진출하는 길을 막으려고 노력하였다.
그런데 광해가 일단 공을 좋아하지 않게 된 상황에서, 낭관(郞官)이 적임자가 못 되는 사람을 이조의 관원으로 의망(擬望)하려 하자 공이 견제하면서 따라 주지 않았으므로 더더욱 시배(時輩)들의 미움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극력 사양한 결과 체직을 허락받고 지중추부사가 되었다.
그 뒤 다시 예조 판서가 되었는데, 이때 계청하기를, “평양(平壤)에 숭인전(崇仁殿)을 세워 기자(箕子)에게 제사를 올리게 하고, 그 후손인 선우식(鮮于寔)을 전감(殿監)으로 삼아 제사를 주관하게 하되, 숭의전(崇義殿 고려 태조 이하 8왕을 모신 사당)의 사례에 따르도록 하소서.”하니, 광해가 그대로 따르면서 공에게 명하여 비문(碑文)을 작성해 새기도록 하였다.
술사(術士) 이의신(李懿信)이 상소하여 교하(交河)로 도읍을 옮길 것을 청하였다. 그 일이 예조에 내려오자 공이 복계(覆啓)하여 반박하였는데, 그 말이 매우 정대하였다. 그 글을 보고 광해가 크게 노하였으나 이 때문에 그 일이 결국 행해지지 않게 되었다.
계축옥사(癸丑獄事)가 일어났을 때 공도 무함을 받고 체포되었는데, 대질 신문을 마친 뒤에 광해가 위로하며 풀어 주었다. 공이 옥에서 나온 다음 상소하여 자신을 탄핵하였는데, 6차례나 소장을 올렸는데도 광해가 부드러운 말로 비답을 내리며 허락하지 않았다.
옥사(獄事)를 일단 마무리 지은 다음 공에게 명하여 종묘에 보고하는 글을 지어 올리도록 하였는데, ‘스스로 부귀(富貴)를 꾀할 줄을 어린 동생이 어찌 알기나 하였으랴.’라는 내용이 들어 있자 광해가 그 말을 고치라고 명하였다. 또 저주(咀呪)에 관한 일을 첨가해서 써넣으라고 명하였는데, 공이 또 ‘죄인의 망녕된 공초[亂招]에서 나왔다.’고 작성하자 광해가 다시 난(亂)이라는 글자를 고치라고 명하였다.
연흥(延興 인목대비(仁穆大妃)의 부친 김제남(金悌南)의 봉호(封號))이 일단 사사(賜死)된 다음 조정에서 대비(大妃)의 복상(服喪) 여부를 놓고 의논을 하였는데, 공이 말하기를, “아비와 자식 관계야말로 인륜 중에 큰 것이요 천지 사이의 떳떳한 법이 되는 것인데, 대비가 어떻게 복상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하자, 대신이 마침내 이 의논을 채택하여 소복(素服)과 소선(素膳)을 올리도록 하였다.
이튿날 공이 내국 제조(內局提調)의 신분으로 입궐하여 부제조인 정공 엽(鄭公曄)에게 말하기를, “오늘날의 상황에서 어떻게 자전(慈殿)을 위문하는 예(禮)를 행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하고, 마침내 대비전에 나아가 기거(起居)를 문안하였다.
이이첨의 무리가, 공이 전에 지어 올린 고묘문(告廟文)의 내용이 부당했다는 것과 대비의 복상 문제와 내국에서 대비전에 문안 올린 일 등을 트집 잡아 죄안(罪案)으로 삼은 뒤 논계(論啓)하면서 파직시킬 것을 청하였는데, 광해가 허락하지 않고 예조 판서의 직책만 체직시켰다. 그러다가 곧이어 다시 겸대한 모든 직책을 체직시켰다.
을묘년에 이르러서는 또 지중추부사와 경연관에서 체직되었으며 변무진주상사(辨誣陳奏上使)로 차출되고, 형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이에 양사(兩司)가 논핵을 가하며 파직시킬 것을 계청하였으나 광해가 끝내 허락하지 않았는데, 공이 누차 사양한 끝에 비로소 체직될 수 있었다.
또 호조 판서에 임명되자 공이 간절히 사양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이때 헛된 비용을 줄이고 토목 공사를 중지할 것을 계청하였으나 모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병진년에 관복주청사(冠服奏請使)로 차출되어 경사(京師)에 갔다가 정사년 8월에 복명(復命)하였다. 판중추부사에 임명되고 보국대부(輔國大夫)로 품계가 올랐다.
공이 연경(燕京)에 있을 때 병이 들어 거의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는데, 돌아와서는 마침내 병이 위독하다는 핑계를 대고 문을 닫은 채 찾아오는 사람들을 사절하였다. 계축년 이후로 흉악한 무리들이 대비(大妃)를 폐(廢)할 것을 꾀해 왔는데, 정조(鄭造)와 윤인(尹訒) 등이 맨 먼저 그 의논을 끄집어내어 서궁(西宮)에 유폐(幽閉)시키고 출입문을 봉쇄한 뒤 갖은 위협과 모욕을 가하였다.
그런데 전년(前年)에 크게 가뭄이 들자 고사(故事)에 따라 남문(南門)을 폐쇄한 적이 있었다. 공이 정공 엽(鄭公曄)과 함께 서궁에 가서 중추부에 새로 제수된 것을 사은(謝恩)하려 하였는데, 궁의 출입문에 자물쇠가 굳게 잠기고 뜰 안에 잡초가 가득한 것을 보고는 서로 바라보며 얼굴을 가리고 울면서 말하기를, “열린 문을 닫을 필요 없이 닫힌 문을 열기만 하면 하늘에서 바로 비가 쏟아질 것이다.”하였다.
이이첨이 그 말을 듣고는 장차 큰 옥사를 일으키려 하자, 어떤 이가 해명해 주기를, “이것은 농담으로 한 말이니 꼭 따질 성격의 것이 아니다.”하였는데, 이첨이 노기를 띠며 말하기를, “농담하면서 우는 법도 있는가.”하였으나, 이로 인해 그 일이 또한 무마될 수 있었다.
당시 위태로운 상황이 하루가 다르게 급박하게 전개되고 있었으므로, 화란이 머지않아 일어나리라는 것을 공이 감지하고는, 병든 몸을 부축받으면서 오성(鰲城 이항복(李恒福)의 봉호(封號)) 이공(李公)을 동쪽 교외로 찾아가 서로 결별(訣別)하였다.
그때의 시 가운데 ‘석양 녘 흐르는 몇 줄기 눈물 목릉 마을 입구에 서 있는 말 한 마리[斜陽數行淚 立馬穆陵村]’라는 구절이 있었는데, 이를 듣고는 사람들이 모두 비애에 잠겼다. 흉악한 무리들이 서로 잇따라 상소를 하여 대비(大妃)를 폐할 것을 청하자 광해가 그 소를 내려 정신(廷臣)들에게 의논하게 하였는데, 공은 병을 이유로 조정에 나아가지 않았다.
그러자 광해가 집에 있으면서 헌의(獻議)하게 하였으므로 공이 글을 작성하여 장차 올리려고 하였는데, 그때 마침 불량한 작자가 소를 올려 공이 정의(庭議)에 참여하지 않았다 하여 먼저 유배보낼 것을 청하였으므로, 공이 마침내 ‘유배보내기를 청하는 유소(儒疏)가 나온 만큼 거적을 깔고 처벌을 기다려야 하는 입장이라서 감히 헌의하지 못하겠다.’고 자신의 입장을 개진하였다.
무오년 봄에 정승 한효순(韓孝純)이 백관을 거느리고 복합(伏閤)하여 모후(母后)를 폐할 것을 청하였는데, 공은 병을 칭탁하고 참여하지 않았다. 이에 양사(兩司)가 합계(合啓)하여 멀리 유배보낼 것을 청하였으므로 공이 강변에 나가 명을 기다렸으나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그 일이 처결되지 않았다.
기미년 겨울에 명 나라 조정에서 우리나라를 의심하여 감호(監護)하자는 의논까지 나왔으므로 광해가 이를 근심한 나머지 장차 사신을 파견하여 스스로 해명하려고 하였다. 그리고는 하교하기를, “무함당한 일을 해명하려면 반드시 나라를 빛낼 솜씨를 소유한 자가 필요하다.
이모(李某)를 진주 상사(陳奏上使)로 차출하라.”하고, 마침내 집안에 있던 공을 일으켜 판중추부사로 삼았다. 공이 여러 차례에 걸쳐 상소를 하며 간절하게 사양하였으나, 광해가 허락하지 않고 공을 인견(引見)한 뒤 물품을 하사하는가 하면 그지없이 위로하는 말을 해 주었다.
경신년 여름에 경사(京師)에 도착하여 사신으로서 해야 할 일을 마무리 지었다. 그때 마침 신종 황제(神宗皇帝)가 붕어(崩御)하였으므로 공이 예부(禮部)에 정문(呈文)하여 백관의 임곡(臨哭)하는 반열에 참여시켜 줄 것을 청하였는데, 각부(閣部)의 관원들이 그 뜻을 아름답게 여겨 허락하였다.
그런데 공부(工部)에서 만들어 준 최복(衰服) 가운데 법도에 들어맞지 않는 것이 있자 공이 또 정문하여 개정하도록 청한 뒤에 마침내 반열에 따라 들어가 성복례(成服禮)를 행하였다. 또 문화전(文華殿)에 나아가 황태자를 권진(勸進)하는 의식에 참여하는가 하면 진향제(進香祭)에도 참여하였고, 또 새로 황제가 등극할 때 축하하는 반열에도 참여하였는데, 이 모두가 외국 사신으로서는 얻기 힘든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공이 연경(燕京)에 있을 때, 좌유덕(左諭德) 왕휘(汪煇)가 사람을 통해 공의 문집을 보여 달라고 청해 왔다. 공이 사양하다가 마지못해 ‘조천기행시(朝天紀行詩)’ 1백여 편(篇)을 기록해서 보여 주었더니, 왕공(汪公)이 크게 기뻐하면서 스스로 서문(序文)을 지어 넣은 뒤 서사(書肆)에 맡겨 간행케 하였다.
그런데 급기야 공이 사명을 마치고 돌아오려 할 무렵에 권간(權奸)이 대관(臺官)을 사주하여 공을 탄핵하게 하였는데, 그 내용은 대체로 공이 일찍이 서궁(西宮)을 위하여 정청(庭請)에 불참하였고, 또 사명을 받들고 경사에 간 뒤 사서(私書)를 간행 배포하여 나라의 숨겨야 할 일을 퍼뜨렸으니 나국(拿鞫)하자고 청한 것이었다. 그러자 광해가 준열하게 꾸짖어 물리치고서 공에게 빨리 조칙(詔勅)을 받들고 돌아오도록 하였다.
신유년에 공조 판서의 임명을 받고 예문관 제학을 겸대하였다. 이때 박승종(朴承宗)이 이이첨과 사이가 나빠지자 공의 중한 명당에 기대어 이이첨의 세력을 약화시키려 하였다. 그러자 이첨이 더욱 노한 나머지 다시 양사를 사주하여 전에 있었던 서궁의 일을 가지고 공을 탄핵하게 하면서 절도(絶島)에 안치(安置)시키도록 청하게 하였는데, 계사(啓辭)를 봉입(捧入)했으나 광해가 안에 그냥 놔 두었다.
감군어사(監軍御史) 양지원(梁之垣)이 우리나라에 오게 되자, 비국(備局)이 아뢰기를, “빈접(儐接)할 인재로는 이모(李某)보다 나은 이가 없는데, 현재 중한 탄핵을 받고 있는 몸이라서 감히 청하지를 못하겠습니다.”하였다. 그러자 광해가 즉시 하교하여 양사를 준열하게 꾸짖으면서 속히 정론(停論)하게 하고 공을 접반사(接伴使)로 삼았다.
공이 사양하였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자 마침내 그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는데, 감군(監軍)이 공을 예우하며 대접하는 것이 특별하기만 하였다. 그리고 본국으로 돌아갈 즈음에 미쳐서도 안주(安州)에 오래 머물러 있으려고 하면서 공이 나이도 높고 관직도 높은 것을 공경한 나머지, 조정에 글을 보내 공을 먼저 귀환시키도록 청하기까지 하였다.
이에 공이 영변(寧邊)에 머물러 분부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당시 손 각로(孫閣老)가 우리나라에 온다는 소식이 있자 공을 손 각로의 접반사로 삼았다가 손 각로가 실제로 오지 않게 된 것을 확인하고는 공을 돌아오게 하였다. 이때 정사(靖社 인조반정을 뜻함)의 은밀한 계책이 이미 정해졌는데 그 일이 꽤나 새어나가고 있었다.
그러자 양사가 다른 일을 칭탁하고는 거사를 주도한 여러 사람들을 논하였으므로 장차 어떤 화가 닥칠지 모를 상황이었는데, 공이 이 일로 유희분(柳希奮)을 만나 보고 점잖은 말로 의심을 풀게 하였으므로 마침내 다른 일이 없게 되었다. 계해년 3월에 금상(今上)이 반정(反正)하였을 때, 공이 이에 대한 소식을 속속들이 듣고 난 연후에 창덕궁(昌德宮)에 입조(入朝)하였다.
상이 공에게 명하여 경운궁(慶運宮)에 가서 대비(大妃)를 모시고 복위(復位)를 청하게 하면서, 공을 예조판서 겸 지경연, 판의금부사에 제수하였다. 공이 일찍이 연석(筵席)에서 무함을 당한 성혼(成渾)의 복관(復官)을 청하고, 또 이이(李珥)에게 포증(褒贈)을 가할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모두 따라 주었다.
사묘(私廟)의 전례(典禮)에 관해 의논하게 되자, 공이 아뢰기를, “전하께서 일단 선조(宣祖)의 대통(大統)을 잇게 되셨는데, 본생(本生) 부모의 봉호(封號)에 대해서는 선조(先朝 선조(宣祖)를 가리킴)의 고사(故事)가 있긴 합니다만, 그대로 따라서 칭한다는 것은 근거가 명확하지 못한 점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대체로 전하께서 손자의 입장에서 할아버지를 계승한 만큼 고위(高位 아버지의 자리)가 비어 있기 때문입니다. 정통(正統)이야 물론 문란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마는, 천륜(天倫)으로 볼 때 역시 고위를 비워 둘 수는 없는 일입니다.
따라서 지금 만약 고(考)라고만 칭하면서 황(皇)이라는 글자는 가하지 않고, 자(子)라고만 칭하면서 효(孝)라는 글자는 가하지 않는 동시에, 지자(支子)를 세워 그 제사를 주관하게 하되 사전(祀典)과 봉호(封號)를 일체 덕흥(德興 선조(宣祖)의 부친)의 고사(故事)에 따르도록 한다면, 종통(宗統)을 중하게 하는 것과 본생 부모에게 보답하는 일 두 가지가 모두 극진하게 될 듯싶습니다.”하였는데, 수상(首相)인 이공 원익(李公元翼) 이하 모두가 공의 의견을 정당하다고 옹호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원자(元子)의 보양관(輔養官)을 뽑도록 명하였는데, 공이 오공 윤겸(吳公允謙), 정공 엽(鄭公曄), 정공 경세(鄭公經世), 김공 장생(金公長生)과 함께 동시에 선발되었다. 대비가 하교하여 광해의 죄악을 하나하나 지적한 다음 천자에게 주달하여 복주(伏誅)시킬 것을 청하도록 명하였다. 이에 이상 원익(李相元翼)이 공에게 문의해 왔는데, 공이 이공 및 신공 흠(申公欽)과 함께 청대(請對)하여 그 불가한 점을 설명드리자, 대비의 뜻이 조금 누그러졌다.
광해의 부인 유씨(柳氏)가 죽자, 예관(禮官)을 보내 치상(治喪)하게 하고 왕자(王子)의 예법을 써서 장사를 치르도록 청하였다. 조식(曺植)의 서원(書院)은 이이첨의 무리들이 세운 것이었는데, 사람들에게 훼손되어 사판(祠版)이 낭자하게 되었으므로, 소재지에 영을 내려 금하게 하라고 청하니, 논하는 이들이 옳게 여겼다. 또 원자(元子)의 나이가 10세를 넘어서자, 일찍 책례(冊禮)를 행할 것을 청하면서 우선 원복(元服 성년 의식)을 가하도록 하였다.
갑자년에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임진(臨津)의 방어선이 무너지자 상이 장차 남쪽으로 피신하려 하였다. 이에 공이 경성을 굳게 지키면서 근왕병(勤王兵)이 오기를 기다리자고 청하였으나, 여러 사람들이 불가하다고 의논드렸으므로 마침내 계책을 결정하고 공산(公山 공주(公州))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공이 대가(大駕)를 호종(扈從)하여 수원(水原)에 이르렀을 때, 팔로(八路)에 교서(敎書)를 내려 역순(逆順)의 도리를 가지고 효유(曉諭)할 것을 청하였다. 적(賊)의 머리가 바쳐진 뒤에 상이 도성으로 돌아올 때 공이 먼저 종묘의 신주(神主)를 받들어 모시고 입경(入京)하였다.
을축년에 세자 우빈객(世子右賓客)을 겸하였다. 세자에게 원복(元服)을 가할 때 공이 이와 관련하여 찬(贊)을 지었다. 의정부좌찬성 겸 세자이사(世子貳師)로 승진 발령되었다. 태감(太監) 왕민정(王敏政)과 호양보(胡良輔)가 우리나라에 와서 조칙(詔勅)을 반포하였는데, 그때 공이 관반(館伴)이 되었다. 호패법(號牌法)을 시행하려고 할 때 호패청 당상이 되었다.
계운별궁(啓運別宮 인조(仁祖)의 생모)의 상(喪)을 당했을 때, 공이 또 판중추 겸 예조판서로서 상례(喪禮) 및 장례(葬禮)의 절문(節文)을 의논드렸는데, 높이고 낮춰야 하는 대목을 당할 때마다 반드시 분명히 살펴 신중하게 처리하곤 하였으므로, 상이 준엄하게 분부를 내려 예관(禮官)을 추고(推考)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공이 황공한 심정으로 상소를 하여 사직을 청하였으나 상이 너그럽게 비답을 내리며 윤허하지 않았다.
강(姜 한림원 편수(翰林院編修) 강왈광(姜曰廣)), 왕(王 공과 급사중(工科給事中) 왕몽윤(王夢允)) 두 조사(詔使)가 왔을 때에도 공이 관반의 임무를 수행하였는데, 조사가 보낸 첩문(帖文) 중에는 ‘공의 뛰어난 명성을 실컷 들었다.’는 내용이 들어 있기도 하였다. 다시 예전처럼 좌찬성 겸 예조판서에 임명되었다.
정묘년에 노적(奴賊 청 나라 누르하치의 군대)이 쳐들어오자 공을 이배(移拜)하면서 병조 판서를 겸하게 하였는데, 공이 사양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랏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경(卿)이 아니면 이 임무를 감당할 수가 없다.”하였다. 공이 대가를 호종하여 강도(江都)에 들어갔다. 화의(和議)가 성립될 무렵, 오랑캐가 유해(劉海)를 우리나라에 파견하여 맹약(盟約)을 정하게 하였다. 이때 공이 명을 받들어 그를 접대하였는데, 김 호판 신국(金戶判藎國)과 내가 공을 보좌하였다.
유해가 처음에는 명 나라와의 관계를 단절해야 한다고 말하였는데, 공이 대의(大義)에 입각하여 통렬하게 물리치자 유해가 자못 빈말로 공갈을 치고 나왔다. 그러다가 한참 시간이 지나고 나서는 홀연히 공손한 태도를 지으면서 말하기를, “평소 조선이 예의지국(禮儀之國)이라는 소문을 들어왔는데, 지금 제공(諸公)이 말하는 것을 들어보니 과연 그렇다.
나라가 이토록 위태롭게 되었는데도 여전히 충신(忠信)의 자세를 고수하면서 변절하려고 하지를 않으니 정말 존경스럽기만 하다.”하고, 마침내 그 일을 가지고 다시는 핍박하지 않았다. 유해가 세폐(歲幣)로 요구하는 마우(馬牛)의 숫자가 엄청나게 많았는데, 공이 극력 다투어 허락하지 않으면서 단지 약간의 토산물을 가지고 호상(犒賞)할 자료로 삼게 하였다.
유해가 또 회맹(會盟)하는 날에 상이 직접 맹단(盟壇)에 나오게 하려 하였는데, 공이 또 목숨을 걸고 쟁집(爭執)하자 유해 역시 다시는 강요하지 않았다. 뒤에 유해가 명 나라 조정에 귀부(歸附)하고 나서는 매번 우리나라를 충의(忠義)의 국가로 일컫곤 하였다 한다.
공이 행조(行朝)에 있을 때 건의한 결과, 제도(諸道)에 영장(營將)을 두고 그들로 하여금 속오(束伍)를 관장하며 조련케 하다가 일이 발생할 때에는 각자 부대를 이끌고 적과 싸우게 하였다. 유해가 또 오자, 상이 공에게 명하여 유해에게 가서 의주(義州)에 잔류해 있는 병력을 속히 철수시키도록 타이르게 하였는데, 얼마 있다가 과연 오랑캐 군대가 철수해 돌아갔다.
무진년 7월에 의정부 우의정으로 발탁되었다. 공이 여러 차례 사양하였으나 모두 부드럽게 유지(有旨)를 내리며 윤허하지 않았다. 공이 정승의 지위에 있으면서, 명실(名實)을 상세히 고찰하여 실질을 힘쓸 것과 교화를 밝혀 풍속을 바르게 할 것과 유술(儒術)을 숭상하며 현재(賢才)를 양성할 방도에 대해서 여러 차례 진언하였다.
왜사(倭使)인 현방(玄方)과 지광(智廣) 등이 와서 상경(上京)하게 해 줄 것을 청하였는데, 공이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교활한 섬 오랑캐가 말하는 것을 다 들어주어서는 안 됩니다. 지금은 의당 특별히 부른다는 명목을 붙여 현방 등만 올라오게 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규례에 따라 부산(釜山)에 머물게 하면서 접대해야 할 것입니다.”하였다.
일찍이 강연(講筵)에 입시했을 적에, 예를 두텁게 하여 김장생(金長生)과 장현광(張顯光) 등을 불러올 것과 성혼(成渾)을 추증(追贈)하여 숭장(崇奬)하는 뜻을 보여 줄 것을 청하고, 또 아뢰기를, “전하에게는 아랫사람들을 경시하면서 자신의 총명을 과시하기 좋아하는 병통이 상당히 있습니다.”하였는데, 상이 가납(嘉納)하였다.
상신(相臣) 중에 어떤 자가, 나만갑(羅萬甲)과 김육(金堉)이 권세를 제멋대로 휘두르며 패거리를 짓고 있다고 말하자, 상이 대신에게 명하여 그 죄를 헌의(獻議)하라고 하였다. 이에 공과 수상(首相)이 아뢰기를, “오직 진정(鎭定)시키는 것이 마땅하지 무작정 처벌만 내리는 것은 온당하지 못합니다.” 하였으나, 상이 듣지 않고서 만갑은 멀리 유배보내고 김육은 하옥시키라고 명하였다.
그러자 공과 수상이 입궐하여 대죄(待罪)하니, 상이 즉시 인견(引見)하고서 만갑은 유해하는 벌을 감하여 중도부처(中道付處)하고 김육은 문외출송(門外黜送)시키라고 명하였다. 공이 또 수상과 함께 상차하여 사직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경오년 봄에 선묘(先墓)에 분황(焚黃 추증된 자의 무덤 앞에서 고명문(誥命文)의 부본(副本)을 불살라 고하는 것)하려고 말미를 청하자, 상이 전상(奠床)과 식물(食物)을 하사하도록 명하는 등 매우 두터운 은총을 내렸다. 유흥치(劉興治)가 가도(椵島)의 장수 진계성(陳繼盛)을 제멋대로 죽이자 조정에서 병력을 동원해 공격하자고 의논하였다.
이에 공이 말하기를, “명 나라 조정에 품(稟)하지도 않고서 미리 앞질러 토벌을 행한다는 것은 외번(外藩)의 도리가 아니다.”하고, 급기야 입대(入對)해서 또 공격해서는 안 된다고 강력히 진달하였으나, 상이 예전의 주장을 받아들인 터라 따르지 않았다.
그 뒤 군대가 출동하고 보니 흥치는 벌써 떠나고 없었는데, 혹 섬 안에 있는 노약자들까지 모두 소탕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하였으나, 공이 또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논하여 결국 군대를 해산시키기에 이르렀다. 추숭(追崇 인조의 부모에 대해 위호(位號)를 높이는 일)에 대한 의논이 일어났을 때, 옥당이 차자를 올려 상의 뜻을 거스르자, 상이 이행원(李行遠) 등을 나문(拿問)하고 조경(趙絅)을 유배보내라고 명하였는데, 공이 차자를 올려 극력 간(諫)하니, 상이 모두 풀어 주었다.
신미년 여름에 가뭄이 크게 들자, 상이 억울하고 원통한 자가 있는지 상세히 살피고 가난한 백성들을 구휼(救恤)하고 어진 이와 능력 있는 자들을 선발하여 하늘의 재앙에 사죄토록 명하는 한편, 옥당의 다섯 유신(儒臣)의 죄를 용서하고 추숭(追崇) 문제로 주청하는 일을 정지하도록 명하였다.
공이 그 기회에 상차하여, 자기를 비우고 남의 말을 들을 것과 기숙(耆宿)들을 우대할 것과 죄수들에게 은전을 베풀 것을 청하였다. 이와 함께 또 쇠약하고 병든 자신의 처지를 개진하면서 정승의 직책을 면하게 해 줄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너그럽게 비답을 내리며 윤허하지 않았다.
가을에 바람 불고 천둥 치는 변고가 있자, 공이 수상과 함께 상차하여 자신들을 탄핵하고,아울러 능(陵)을 참배하는 일을 정지하도록 청하니, 상이 즉시로 참배하는 일을 정지하라고 명하였다. 공이 전후에 걸쳐 대례(大禮)를 논하는 과정에서 직접 상의 앞에 나아가 진달드리기도 하고 계차(啓箚)를 올리기도 하였는데, 그 논리가 매우 명쾌하고 적절하였다.
그리고 상이 잘못 책문(責問)하는 일이 있을 때마다 공이 한번도 간(諫)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며, 그 간언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문득 사직을 청하고 그 자리를 떠나곤 하였다. 임신년에 좌의정 겸 세자부(世子傅)로 승진 발령되었다. 상이 유사에게 명하여 속히 추숭(追崇)하는 전례(典禮)를 거행하라고 명하자, 공이 수상과 함께 연명(聯名)으로 상차하여 누차 간하였으나 모두 따르지 않았다.
대관(臺官) 박동선(朴東善)과 권도(權濤)가 휘호(徽號)를 증감(增減)하는 문제를 논하였는데, 상이 노하여 권도는 나문(拿問)하고 박동선은 삭탈관직(削奪官職)하라고 명하자, 공이 또 상차하여 간하였다. 6월에 대왕대비(大王大妃)가 승하하자 공이 총호사(摠護使)가 되었는데, 재궁(梓宮)이 산릉(山陵)에 도착할 무렵 공이 병에 걸려 그 일을 제대로 행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겨울에 이르러 병을 인혐(引嫌)하면서 정고(呈告)를 하였는데, 모두 20차례나 올린 뒤에야 비로소 허락을 받고 판중추부사로 체직되었다. 갑술년에 문강공(文康公 월사의 조부)이 지은 《대학연의집략(大學衍義輯略)》을 위에 올렸다. 그리고 인하여 차자를 올리면서 그 책 속에서 논한 바 경외심(敬畏心)을 높일 것과 일욕(逸欲)을 경계할 것과 내치(內治)를 엄하게 할 것과 민정(民情)을 살필 것 등 4개 조목을 인용하여 경계시키는 내용을 진달드리니, 상이 가납(嘉納)하고 털 담요를 하사하였다.
가을에 원종(元宗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定遠君)을 추존한 위호)을 부묘(祔廟)하라는 명이 내려오자 삼사(三司)가 강력하게 쟁집(爭執)하였다. 이에 상이 진노한 결과 언관(言官) 10여 인이 서로 잇따라 축출되고 귀양을 가게 되었는데, 그때마다 공이 상차하여 간하곤 하였으나 모두 들어주지 않았다.
을해년 4월에 공의 병세가 위독해졌다. 상이 내의(內醫)을 보내 병을 살피게 하는 한편 약물(藥物)이 끊이지 않도록 하였으며, 왕세자 역시 궁관(宮官)을 보내 문병하였다. 이달 29일에 정침(正寢)에서 눈을 감았다. 부음(訃音)이 전해지자 상이 애도하며 철조(輟朝)를 하는 한편, 3일 동안 소선(素膳)을 들고, 근신(近臣)을 보내 조문을 하게 하면서 예법대로 제사를 올리고 부의(賻儀)를 전하게 하였다.
왕세자 역시 궁관을 거느리고 거애(擧哀)하였으며, 7일 동안 소선을 들면서 조문과 부의를 특별히 더 가하였고, 8일이 지난 뒤에 직접 가서 곡을 하고 조문하였다. 그리고 관학(館學)의 유생 1백 70여 인이 서로들 와서 조문하였다. 아, 공이야말로 어쩌면 살아서는 영광스럽게 되고 죽어서는 사람들의 애도를 받는 그런 인물이라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공은 태어나면서부터 특별히 빼어난 자질을 품부받았는데, 덕성이 온화하고 두터울 뿐더러 풍도(風度)가 맑고 시원스러워 사람들과 말할 때에는 화기(和氣)가 물씬 풍겨 나오는 가운데 털끝만큼도 뻐기는 기색이 없었다. 그러나 시비를 따지고 거취(去就)를 결정할 즈음에는 또 한번도 자기의 소신을 굽힌 적이 없었다.
그래서 정 문숙공 엽(鄭文肅公曄)이 당세의 인물을 논할 때면 문득 공을 칭찬하면서 말하기를, “화기로운 가운데에서도 그 소신이 확고하기만 하니 세상에서 그런 인물을 찾아보기가 힘들다.”하곤 하였다. 공은 특히 효우(孝友)에 독실한 면모를 보였다. 임진왜란 때 공이 삼등공(三等公)을 모시고 행재(行在)로 갈 적에 양주(楊州)에 이르러 적병을 만나자 산골짜기에 숨어 있게 되었다.
삼등공이 며칠 동안이나 음식을 들지 못하게 되자 공이 눈물을 흘리면서 산을 나와 먹을 것을 찾아다녔는데, 당시에 적병의 칼날이 번뜩이지 않는 곳이 없어 인적(人跡)이 완전히 끊어졌기 때문에 공이 정처없이 방황하기만 하였다. 그러다가 홀연히 어떤 노인 하나가 바위 위에 앉아 도시락밥을 앞에 놓고 있는 것을 보고는 그 앞으로 나아가 절을 한 뒤 구걸을 하니, 그 사람이 도시락을 모두 내주었다.
이에 공이 반절만 받겠다고 사양하니, 그 사람이 말하기를, “가지고 돌아가서 며칠 동안 드리도록 하라.”하고는, 돌아보지도 않고 그 자리를 떠난 일도 있었다. 또 누님이 고양(高陽)에 살고 있었는데 생사를 알지 못해 공이 찾아보러 길을 떠났다가 성산(城山 파주(坡州))에 이르렀을 때 적을 만나 하마터면 죽을 뻔한 적도 있었다.
총탄이 3번이나 공을 향해 날아왔는데 모두 상처는 입지 않고 의복에 구멍만 뚫고 지나 갔으므로 마침내 누님을 찾아보고 돌아올 수가 있었다. 경기 감사 심대(沈岱)가 징파도(澄波渡)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었는데, 삼등공의 피로가 극심해지자 그곳에서 하룻밤을 머무르려고 하였다.
그런데 공이 심대의 군대가 대비책을 세우지 않은 것을 보고서 분명히 패할 것이라는 것을 감지하고는 그 즉시 재촉하며 길을 떠나 몇 리를 더 갔는데, 적이 과연 심대의 군진(軍陣)을 습격하여 거의 모든 군사를 도륙하고 말았다. 이처럼 위기에 처했다가 다행히 면하게 된 일이 무척 많았다.
선인(先人)의 기신(忌辰)을 만날 때면 아무리 추운 겨울에도 몸을 씻고 제사드리는 일을 폐하지 않았는데, 늘그막에 이르러서도 똑같이 하였다. 그리고 삭망(朔望)에 참알(參謁)할 때 비록 병이 들었어도 꼭 직접 그 자리에 나아가곤 하였다. 5대조의 묘소가 누원(樓院)에 있었는데 오래도록 향화(香火)를 올리지 못하였다.
공이 이에 제사의 격식을 정한 뒤 자손들에게 교대로 제례를 행하게 하였다. 문강공(文康公)의 구기(舊基)에 사우(祠宇)가 없자 공이 중건(重建)하여 제사를 주관하는 자에게 주었다. 과부가 된 누님과 옆집에서 살면서 하루도 찾아보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리고 내외의 종족을 거두어 보살피면서 곡진하게 은혜를 베풀었으며 가난에 쪼들리는 이들을 진구(賑救)하면서 늘 부족한 듯이 여겼으므로 멀리 떨어진 시골의 소원한 족속들까지 모두 자기 집처럼 여기고 의지하였다. 공의 충군우국(忠君憂國)하는 정신은 지극한 정성에서 발로된 것이었다.
공은 늘 말하기를, “내가 집안일에 대해서는 무척이나 어설프게 처리하면서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나랏일을 당해서는 아무리 미세한 일이라도 감히 소홀히 해 본 적이 없다. 무슨 일을 시행하고 요리할 즈음에 밤에 누워 있으면 눈앞에 그 일들이 꼭 전개되곤 한다.”하였다.
조가(朝家)의 조치가 잘못되었다는 말을 들으면 근심스러운 빛이 밖으로 드러났고, 훌륭한 정사와 성대한 일을 보게 되거나 등대(登對)하여 이치에 합당한 상의 분부를 듣게 되면 나와서 반드시 기쁜 낯으로 자제들에게 자랑삼아 이야기하곤 하였다.
관직을 수행할 때에는 항상 대체(大體)를 견지하는 가운데, 남의 과오를 보아도 오로지 덮어 주려 노력하였고, 옥사(獄事)에 대해 헌의할 때에도 반드시 평반(平反 관대하게 처리하는 것)을 위주로 하여 살릴 방법을 모색하곤 하였다. 평생토록 집안의 살림살이는 거들떠보지 않았으며, 전원(田園)을 경영하거나 가옥을 증수(增修)하는 일을 한번도 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왕세자가 조상(弔喪)하고 돌아와서 강관(講官)에게 이르기를, “경상(卿相)의 지위에 수십 년 동안 몸담았으면서도 사는 집이 이처럼 좁고 누추하다니, 그 청렴한 자세와 검소한 생활이야말로 귀하게 여길 만하다.”고 하였던 것이었다. 공이 선묘(宣廟)의 지우(知遇)를 받은 그 융숭한 은총이야말로 고금을 통해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리고 중도에 비운(否運)을 만나 비록 뭇 소인배들에게 미움을 받는 처지에 놓였어도 그 소신을 확고부동하게 지켜 성예(聲譽)가 더욱 두드러지게 드러났다. 그리하여 만년에 성상의 시대를 만나게 되어서는 마침내 정승 자리에 임명되었는데, 공을 그지없이 중하게 여기며 의지하는 성상의 뜻은 처음부터 끝까지 변한 적이 없었다.
공이 조정에 몸담은 46년 동안 육경(六卿)을 두루 역임하였는데, 그중에서도 춘관(春官 예조 판서)의 직책을 9차례나 수행하고 2번이나 문형(文衡 대제학)을 잡으면서 예악(禮樂)의 의장(儀章)을 상고해 정한 것이 많았다. 그리고 고문대책(高文大冊 교서나 법령처럼 중대한 국가의 문서)이나 사대교린(事大交隣 중국과 일본에 대한 외교 교섭)의 외교 문서들이 대부분 공의 손에서 나왔는데, 모두가 기걸차서 볼 만한 점이 있었다.
공이 경사(京師)에 다녀온 것과 중국 사신을 접대한 것이 각각 4차례나 되었는데,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주선하고 응대하는 과정에서 모든 생각과 정성을 기울이며 나라의 어려움을 해소하고 나라의 무함을 씻어 준 결과 국가가 더욱 빛나게 한 그 공로야말로 사람들이 너무도 분명하게 귀로 듣고 눈으로 보아온 사실이다.
그래서 비록 혼조(昏朝 광해조(光海朝))를 당하여 간인(奸人)들이 참소하여 물어뜯으면서 기필코 사지(死地)에 떨어뜨리려 하였지만, 나라에 걱정스러운 사태가 발생하여 중국 조정과 관련되는 일이 전개될 때마다 어쩔 수 없이 공을 일으켜 세워 그 일을 해결하게 하곤 하였다. 이런 이유 때문에 공이 여러 차례나 낭패를 당했다가 다시 일어서곤 하면서 끝내 기막힌 화를 당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었다.
공은 학문하는 과정에서 장구(章句)를 잗달게 강설하는 일에는 몰두해 본 적이 없었으며, 그런 가운데 선(善)을 즐기고 덕(德)을 좋아하는 성의(誠意)가 물씬 풍겨 나오곤 하였다. 그리고 사문(斯文)을 위하는 길이라고 일단 생각되면 문득 자신의 심력(心力)을 모두 기울이곤 하였는데, 이는 공이 지은 문자와 행한 일들을 통해 보면 고찰할 수 있는 일이다.
공의 문장은 천재적인 것으로서 타인의 추종을 불허하였다. 넉넉한 어휘를 민첩하게 구사하여 전편의 뜻이 통창하게 하면서 군색하거나 응체되는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선묘(宣廟)도 공의 문장을 가장 좋아하면서 이르기를, “당대에 글을 잘 짓는다고 이름난 사람들도 거개가 공보다 한 수 아래이다.”라고 하였던 것이었다.
처음에 변무(辨誣 정응태(丁應泰)가 우리나라를 무함한 일을 해명한 것)하는 주문(奏文)을 지어 중국 조정에서 칭찬을 받았는데, 그 뒤 동정(東征)하러 온 중국 장수들 가운데 그 주문을 보았던 사람들은 상을 만날 때마다 반드시 좋은 문장이라고 일컫곤 하였다.
노인(魯訒)이라는 자는 우리나라 사람으로 강절(江浙)에 표류했다가 돌아왔는데, 그도 역시 남방의 사자(士子)들이 공의 글을 많이들 전송(傳誦)하고 있다고 전해 주었다. 그런가 하면 금년의 하절(賀節) 사신이 연경(燕京)에서 돌아왔을 때에도, 옥전(玉田)의 유생이 공의 주본(奏本)을 꺼내 보여 준 일과 영원사(寧遠寺)의 승려 역시 공이 기증한 시를 암송하며 월사의 안부를 묻던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공이 일찍이 양 어사(楊御史)의 비문을 지어 준 적이 있었는데, 그가 묵본(墨本)을 얻고는 크게 기뻐하여 무리들 속에서 과시하며 말하기를, “조선 이 상서(李尙書)가 지어 준 글이다.”라고 하였다. 또 왕 학사 휘(汪學士煇)가 공의 시를 얻어 간행하였는데, 서승(署丞)인 섭세현(葉世賢)이 사명(使命)을 받들고 전남(滇南)으로 갈 때에 그 판본(板本)을 가지고 가면서 말하기를, “강남(江南)에 이를 널리 배포하여 향리의 영예로 삼겠다.”라고 하였다.
그런가 하면 공이 일찍이 연경으로 갈 적에 진강(鎭江)의 수장(守將) 구탄(丘坦)이 공의 도착 소식을 듣고는 길옆에 나와 기다리면서 채색 비단을 늘이고 장막을 설치하여 영접하기도 하였고, 또 웅 어사 화(熊御史化)는 자기 집에 공을 초청하여 연회를 베풀면서 그지없이 공경스럽게 예우하기도 하였다. 중국 사람들이 공을 경모(敬慕)한 것이 대체로 이와 같았다.
공의 저술로는 시문집 25권이 있고, 또 《서연강의(書筵講義)》 1권과 《대학강어(大學講語)》 1권이 집에 소장되어 있다. 부인 권씨(權氏)는 예조 판서 극지(克智)의 딸이다. 슬하에 2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 명한(明漢)은 성균관 대사성이고, 소한(昭漢)은 병조 참지이다.
공은 일찍부터 중한 명성을 얻었고 그 이름이 중국에까지 벌써 흘러 전해졌다. 그래서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공을 알건 모르건 불문하고 아래로 어린아이들과 부녀자들 그리고 하인과 나무꾼에 이르기까지 늘 공을 일컬으면서 반드시 월사라고 하고 그 이름은 부르지 않았다.
공의 뛰어난 문장과 정술(政術)과 덕망으로 말하면 국사(國史)에 실려 있고 만인의 입으로 전해지고 있는 바이니, 속일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이에 삼가 그중에서 확연히 드러난 것들을 채집하고 공의 가장(家狀)을 참고하여 이상과 같이 논술하는 바이다. <끝>
[註解]
[주01] 창려(昌黎)의 남산시(南山詩) : 창려는 당(唐) 나라 한유(韓愈)의 자(字)이다. 남산시는 종남산(終南山)에 올라가 그 경승(景勝)
을 표현한 2백 4구(句)의 오언 고시(五言古詩)로서 두보(杜甫)의 북정시(北征詩)와 쌍벽을 이루는 걸작으로 회자되고 있다.
[주02] 중자(仲子)의 …… 것 : 《춘추(春秋)》 은공(隱公) 5년에 “중자의 사당을 낙성하고 처음으로 육일(六佾)의 춤을 추게 하였다.
” 하였는데, 삼전(三傳 좌전ㆍ공양전ㆍ곡량전)의 평가가 각기 다른 가운데, 대체로 별도의 사당을 세운 것에 대해서가 아니라 육일
의 춤을 처음으로 그 사당에서 참람되게 추도록 했다는 데에 폄하하는 시각을 맞추고 있다.
중자는 혜공(惠公)의 둘째 부인으로서 환공(桓公)의 어미인데(곡량전에서는 혜공의 어미라고 하였음), 혜공의 서자인 은공이 환공
을 대신해서 섭정하며 중자의 별궁(別宮)을 지어 준 것이다.
[주03] 성풍(成風)에게 …… 것 : 《춘추(春秋)》 문공(文公) 9년에 “진(秦) 나라 사람이 와서 희공(僖公)과 성풍(成風)의 수의를 전하였
다.” 하였는데, 삼전 모두 비난하는 뜻이 들어 있다고 보지 않았으며, 특히 《좌전(左傳)》에서는 예(禮)가 있는 행동으로 높이 평가
하였다. 성풍은 희공의 부인이다.
[주04] 《춘추》에서 …… 받았습니다 : 무슨 근거로 월사가 비난을 받았다고 말한 것인지 확실치 않다.
[주05] 계축옥사(癸丑獄事) : 광해군 5년(1613), 대북파(大北派)의 정인홍(鄭仁弘), 이이첨(李爾瞻) 등이, 소북파(小北派)에서 선조의
적자(嫡子)인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옹립하려 했다는 구실로, 소북파의 영수인 영의정 유영경(柳永慶)을 사사(賜死)케 하고 소북
을 조정에서 축출한 사화(士禍)이다.
[주06] 목릉 : 양주(楊州) 구리(九里)에 있는 동구릉(東九陵)의 하나로 선조(宣祖)와 왕비의 능이다.
ⓒ한국고전번역원 | 이상현 (역) |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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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左議政月沙李公行狀
(以下續稿)
公諱廷龜。字聖徵。號月沙。延安之李。系出唐中郞將李茂。從蘇定方平百濟。留仕新羅。賜籍于延安。子孫遂爲延安人。高祖石亨。三元及第。策勳封延城府院君。諡曰文康。曾祖渾。司憲府掌令。贈吏曹判書。祖順長。不仕。以老壽陞嘉善階。贈領議政。考𡹘。以文章名一時。累擧不第。官終三登縣令。贈領議政。妣贈貞敬夫人光州金氏。公以嘉靖甲子。生於城南靑坡寓舍。其生之日。有虎當晝來伏戶外。人皆驚走。公旣生而虎亦去。聞者異之。自學語。已知文字。言動不凡。奇自獻與公同閈。公七歲時。奇嘗解錦帶以與公。公不受。或問其意。公曰。奇帶豈可受也。八歲。賦詩有警語。稍長。博學強記。嘗讀昌黎南山詩。次其韻。旣而又用其韻成七言。觀者稱以神童。十一歲。丁金夫人憂。執喪如成人。十四歲。魁泮宮陞補之選。名聲大起。中乙酉進士。庚寅。文科選。隷承文院。薦入翰林。方洪汝諄用事。謂公在太學。嘗撰疏請留成牛溪。論削其薦。壬辰倭難。宣祖西狩。公間道赴行在。到成川。拜侍講院說書。癸巳。從光海迎大駕于定州。拜藝文館檢閱。上曰。講官重於史官。其還授說書。宋經略應昌移咨行朝。令選送文學士。以備講學。公與黃公愼同被選。經略素主陸氏學。當講大學。不許襲用程朱說。公辨析同異。著說數十篇。經略稱善。巡按御史至。宴于統軍亭。提督以下諸將。皆不得與。經略與御史。獨請公及黃公。慰奬甚勤。臨罷。以書勖之曰。東國興衰在世子。世子賢否在公等。尋陞司書。經略還。公自義州歸。拜兵曹佐郞,成均館典籍。華使司憲來。李公德馨爲遠接使。辟公爲從事。以病不就。拜吏曹佐郞。華使之還也。遠接使又辟公從事。備局以公方管槐院文書。啓留之。遠接使尋又再辟。政院又以公善華語。啓留之。公之才諝。爲時所急如此。尋聞三登公疾篤。上疏往省。道聞訃。墜馬幾絶。雪上徒步行數舍。甲午春。奉喪歸葬。丙申服除。當路者。忌公復入銓。左遷禮曹正郞。差冬至使書狀官。累除兵曹正郞,成均館直講。皆以病未赴。丁酉。病少愈始造朝。拜兵曹正郞。兼承文院校理漢學敎授。楊經理鎬到平壤。問我國軍兵城池糧仗之數。責令三曹判書來對狀。朝廷憂之。命公往對。麻提督之南征也。接伴使屢辟從事。皆憚避。最後及公。卽日就途。未幾。槐院啓請召還。自是凡大小文書。多出公手。嘗撰楊經理帖。宣廟問曰。此作甚好。誰所爲也。拜成均館司藝兼侍講院弼善。公嘗直春坊。梁按察猝至闕下。宣廟蒼黃出接。御前通官未及到。政院請召公入侍。應對甚稱旨。按察亦喜曰。春坊學士。乃能解華語耶。宣廟謂承旨曰。不料李廷龜多才至此也。自此益蒙知眷。命授三品准職。超七階爲掌樂院正。兼帶如故。戊戌。拜司憲府執義。擢拜承政院同副承旨兼承文院副提調。關王廟成。天將請上同往奠。駕已辦。始命撰祭文。有司請召知製敎。上以命公。立就以進。上大悅命賜錦。遞爲兵曹參知。方天將滿城。咨揭往復。日夕旁午。公左右酬應。率多口占立草。或有非公所當撰。而往往特以屬公。文成。輒見褒美賜錦。或命別寫一本以入。大臣啓請兼備邊司副提調。無何。有丁應泰之誣。宣廟避殿輟朝。籍稿俟命。中外爲之震動。將遣使辨誣。命擇詞臣數人各撰奏本。旣進。獨用公所撰。公於應泰所誣。隨語辨釋甚晳。而至稱祖宗一段。乃曰小邦海外荒僻。自三國以來。禮儀名號。慕效中國。多有侔擬。至先臣康獻王。一切釐正。而獨其稱號。自新羅,高麗。有此謬誤。蓋以國中臣民。襲舊承訛。相沿而不知改。此實無知妄作。以此受罪。萬死無所辭。若謂之僭。非其情也。柳相成龍。見奏稿以爲此大事也。今遽首實。恐有不測之禍。不如闕而不擧。廷議不能決。久之。上手敎曰。君臣猶父子。安有可諱事。以此受罪。予固甘心。於是群議乃定。李相恒福爲陳奏上使。請以申公欽爲書狀。上曰。今之善爲詞命者。莫如李某。其文章寫出肺肝。醞籍典重。爲人亦有計算。陞品爲副使可也。明日。拜嘉善大夫工曹參判。充陳奏副使。公上疏辭。不許。明年春。至京師。旣上奏。遍詣各衙門。具文呈辨。凡三十六通。皆公筆也。奏下廷臣雜議。諸公讀奏至所陳廟號語。大稱歎曰。老實老實。告君無隱。朝鮮眞禮義邦也。廷臣覆議。有曰朝鮮國王奏。明白洞快。讀之令人涕涔涔欲下。議入。天子命丁應泰回籍聽勘。仍令該部移咨慰諭。復命。宣廟引見嘉奬。特命加階賜奴婢田結。兼備邊司有司堂上。朝議將勦野人。令西北路抄兵。公上箚言其非計。上曰。予固知卿有才。而不謂料敵勝負。其智若是。又能描寫時勢。極陳人所惡聞之言。亦人所難能也。予自詫有人矣。遂從之。拜戶曹參判。尋特授藝文館提學。上嘗接見楊經理。命公入侍。他日又入侍。上曰。前命李某入侍。蓋慮經理有問事。或難對也。尋常接見時。不必爲例。仍賜公錦。其倚重公類此。庚子。兼同知義禁府事。戶判缺。上命廟堂勿計資秩擇擬。遂擢拜公資憲大夫戶曹判書。公屢懇辭得遞。會懿仁王后上昇。大臣啓曰。國有大憂。非李某。無以長度支。復拜公戶判。公不敢辭。卽兼國葬都監提調。時國儲蕩然。殮殯所須羅段等物。其數甚多。皆取足於市。公隨宜措處。事辦而民不病。又設方禁令。吏胥輩不得侵牟市井。市民大便之。兼知經筵事。移拜禮曹判書。大行王后發引至因山。翌日將下。是夜靈幄殿火。梓宮幸得奉移。而萬衆讙譁大亂。公令曰。諸執役人等。各持其物。以避火胥後令。否者有重辟。火旣滅。公按簿點閱。無所遺失。乃遣郞官馳啓。遂告于世子及摠護使。摠護使喜曰。得公爲禮判。復何憂哉。乃先行慰安祭。用初卜吉時。下玄宮如儀。公又言曰。今日不幸遭大變。而冊寶諸器物。幸無損汚。請令三司六卿諸官。一一審視然後掩㼅。皆曰然。由是旣事退。而人無異議。公之力也。辛丑。兼世子右賓客。嘗入侍朝講。大司諫金公尙容進對。多觸犯忌諱。上震怒。左右莫敢言。公進言爲調解之。上稍霽威曰。予無是事。然當申戒宮中也。以病遞。未幾。復拜禮曹。會設校正廳。撰定經書諺解。公爲堂上。辭遞知義禁。尋兼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成均館事。詔使顧天峻,崔廷楗將至。公爲遠接使。辭朝日。宣廟解所御貂帽以賜之。幕僚選辟。皆一時之望。會鄭仁弘使其徒誣𧥮成牛溪。諸臣持正議者。相繼譴罷。公亦不自安。引疾乞解。壬寅三月。遞爲平壤迎慰使。還朝。力辭文衡及賓客經筵。次第得遞。尋復兼賓客及摠管校正廳堂上。又拜禮判。更定孝敬殿祭禮。又請致祭鄭夢周墓。只稱高麗侍中鄭公而不名。宣廟初難之。公力請。乃從之。又請爲魯山,燕山立後。議格不行。病遞。處西樞。甲辰正月。因天變應旨上封事。請修軍政以飭武備。振紀綱以尊國體。結人心以召和氣。開言路以集群策。恢公道以廣人才。修實德以應天譴。朝廷請冊封世子。以公爲奏請使。旣還。臺官承柄臣旨。摭微事論彈。上終不允。乙巳。求外拜京畿觀察使。纂集廳之設也。尹公根壽,李公好閔啓曰。李某不可不參此選。請破格爲堂上。許之。公之治圻也。以厲風敎修廢墜爲先務。建圃隱書院于龍仁。事聞。賜額曰忠烈。重新崇義殿。請以其裔孫王鵾爲殿監。修治水原,竹山二山城。儲峙糧械。爲緩急備。明年。秩滿遞爲知樞。兼知實錄春秋義禁府事。會有無名子。書泮宮廡壁。暴當路隱惡。權臣遂起大獄。死者甚衆。賴公救解。頗得全活。嘗於三省會中。用滑稽語戲之。權臣益怒。宣廟尋廣詢理官。公極言冤狀。遂盡釋之。日本人求和。縛送死囚。妄稱壬辰犯陵賊。柳永慶將告廟陳賀。公上箚論其不可。辭遞禁府摠管。丁未。兼知春秋館事。復拜戶曹判書。戊申二月。宣祖昇遐。公例兼國葬都監提調。公前後再長戶曹。皆遭大喪。治具無闕。人以是益服公通才。移拜兵曹判書。光海初襲位。過自危疑。發兵衛宮城。久而不罷。將士暴露甚苦。人莫敢言。公爲啓罷之。亂後軍功輸粟人等。國家無甚酬報。而勒令輪回上番。謂之一朔禁軍。人皆稱冤。公又啓請罷遣第。令有事則赴防而已。內三廳參下官。積滯不遷。請加設訓鍊主簿。以廣陞遷。兼世子右賓客同知經筵成均館事。又兼宣惠廳堂上,內醫院提調。撰進宣祖行狀。加正憲階。大行發引時。所用軍丁六千餘名。例當徵發諸道。公啓請以五部坊民調用之。遂爲定式。華使熊化至。公爲館伴。熊公得公詩。稱賞不已。書示譯官曰。字字唐人魄。每日請公。
以便服入讌。言語書牘。必稱先生。臨別。戀戀出涕。因請公序皇華集。太監劉用繼至。戶判金公睟爲館伴。大臣啓請以公兼之。劉使在途誅求無藝。將無以應之。或謂宜括民間所貯。且發倉貿金以待之。公獨進言曰。方今旱災極酷。民將塡壑。廟堂宜先講究荒政。接待詔使。不足深憂也。人或不以爲然。旣而度支見銀未告竭。而劉使亦飽去矣。公又請停濟州乾鰒之加貿者。島民大蘇而用亦不乏。又兼兩館大提學。天使時。調發外方人丁。服役都監者累千名。馬亦以百數。大爲民弊。公在司馬。建請量宜收布。以雇募。內外皆以爲便。而羨布尙有三千餘匹。遂用此重建兵曹。以病告遞爲知樞。兼帶仍故。冬請暇上冢。還啓陳畿民飢困狀。且曰。移粟貸民。本以救飢。而民未嘗沾實惠。徒爲吏胥漁奪之資。明年責償。病民益甚。唯當盡蠲賦役。以寬其力。則民雖採食草木。亦可自活。請以賑恤米穀。代充宣惠廳用度。盡減畿民今秋來春應納收米。民之受賜大矣。從之。兼實錄廳堂上。復拜禮曹判書。啓請中外所報孝子節婦。悉行旌表。又請魯山君及夫人墳墓所在。更加封植。增置守塚人戶。 別建祠宇。每年降香。以時祭祀。自兵燹後。京中只建中西二學。公又請悉復四學如舊制。庚戌。宣祖躋祔。公請依故事加上懿仁王后徽號。又言祔廟後。例有耆老儒生歌謠。此系彌文。況餘哀未盡。不必盡行。光海不悅。命只行獻軸。停結綵等事。又言該曹典故文籍。經亂蕩盡。每遇變禯。無可考據。請就各朝實錄中。分吉凶軍賓嘉凡儀注節目可據事例。抄爲一書。以便考閱。皆從之。光海將追尊私親。命儒臣博考古典。儒臣引皇朝孝宗追尊紀太后。奉以別廟事以啓。事下禮官。公言考仲
子之宮。歸成風之襚。皆見譏春秋。而漢唐以下。追尊之擧。違聖人禮制。皆不足法。況懿仁王后無子。取殿下爲嗣。則於私親。當有降殺之節。皇朝孝宗追尊生母。別祀於奉慈殿。此正時王之制。似當據以爲議。唯其位號上竝母后。則必貽貳尊之嫌。本朝母妃生時稱妃。旣沒稱后。后之與妃。等級稍別。今宜追尊爲妃。別廟享祀。光海曰。祔廟如難輕議。徐俟後日。今上以后號。建別廟進冊寶。備儀封陵。公再啓請議大臣。領相李公德馨議曰。該曹議是。光海曰。別廟享之。已有差別。只上妃號。甚
爲欠缺。后號之上。斷不可已。更爲講定。公三啓。猶執前議。光海不聽。公遂辭職。亦不許。四啓。又力言不可。光海曰。後世雖有峻議。予自當之。其誰曰大臣有司莫有言者。宜急議上。翌日朝講。公入侍。又極言之。光海終不聽。奉慈殿祭禮。命悉依太廟。公又啓言別廟祭禮。當用時膳。不可用太廟牲牢。凡八啓。乃許之。光海欲親祭私廟。公啓曰。神主未及改題。而先行親祭。事甚不便。請俟別廟奉安後行之。光海初不許。三啓。乃從之。儒生疏請以五賢臣從祀文廟。久不允。公於筵中。力申其請。事乃克擧。士論多之。進階崇政大夫。拜吏曹判書。辛亥。鄭仁弘上箚𧥮文元,文純兩先正。太學諸生。削仁弘名靑衿錄中。光海大怒。命倡議儒生。削籍禁錮。太學生聞命。捲堂而去。公詣闕陳啓。光海爲寢削錮之命。唯罷掌務官。遞大司成。公又上疏爭之。請同被罪譴。不許。公之在銓也。拔淹滯抑私倖。光海旣不悅。而郞官欲以匪人擬銓望。公持不肯。益爲時輩所忌。遂力辭得遞。爲知樞。復拜禮判。請立崇仁殿于平壤。以祀箕子。以其後鮮于寔爲殿監。主其祀。如崇義殿事例。光海從之。命公撰文勒碑。術士李懿信上疏請遷都交河。事下禮曹。公覆啓駮之。辭甚正。光海大怒。然事竟不行。癸丑獄起。公亦被誣逮置對訖。光海慰遣之。公旣出。上疏自劾。章六上。光海優答不許。獄旣成。命公製進告廟文。有自圖富貴稚弟何知之語。光海命改之。又命添入咀呪事。公又有出於亂招之語。又命改亂字。延興旣賜死。朝廷議大妃服喪與否。公曰。父子大倫。天地常經。大妃安得不服喪。大臣遂用此議。進素服素膳。翌日。公以內局提調。詣闕謂副提調鄭公曄曰。今日安可無慰問慈殿之禮。遂詣大妃殿問起居。爾瞻輩以公前撰告廟文詞意不韙。及大妃服喪內局問安等事爲罪案。論啓請罷。光海不許。只遞禮判。尋又盡遞兼帶。至乙卯。又遞知樞經筵。差辨誣陳奏上使。拜刑曹判書。兩司論啓請罷。光海終不許。公屢辭乃得遞。又拜戶曹判書。公懇辭。不許。啓請省浮費停土木。皆不省。丙辰。差冠服奏請使赴京師。丁巳八月。復命。拜判中樞。進階輔國。公在燕時。得疾幾殆。及還。遂稱病篤。杜門謝客。自癸丑後。群兇謀廢大妃。鄭造,尹訒首發其議。幽之西宮。錮塞門戶。危辱萬狀。前歲嘗大旱。用故事閉南門。公與鄭公曄。同詣西宮。謝西樞新命。見宮門牢鎖。草沒中庭。二公相對掩泣曰。不用閉開門。第開閉門。則天乃雨。爾瞻聞其語。將起大獄。或解之曰。此詼諧語。不必究。爾瞻怒曰。詼諧亦泣耶。然因是事亦得已。時危機日急。公知禍作不久。扶病訪鼇城李公於東郊。與之訣別。有斜陽數行淚。立馬穆陵村之句。聞者悲之。兇徒相繼投疏。請廢大妃。光海下其疏。令廷臣議。公以病不赴。光海令在家獻議。公草議將進。會有無賴子疏𧥮公以不赴庭議。請先誅竄。公遂自陳儒疏方請誅竄。席藁俟鈇鉞。不敢獻議。戊午春。相孝純率百僚伏閤請廢母。公稱病不與。兩司合啓請遠竄。公出江上待命。事久不決。己未冬。皇朝疑我有監護之議。光海憂之。將遣使自辨。下敎曰。辨誣必須華國手。李某可差陳奏上使。遂起家爲判中樞。公屢疏懇辭。不許。引見錫賚。慰諭甚備。庚申夏。至京師。使事得竣。會神宗皇帝崩。公呈文禮部。乞參百官入臨之列。閣部諸官。嘉其意許之。工部製給衰服。有不中度者。公又呈文請改。遂隨班行成服禮。又詣文華殿。參勸進皇太子。又參進香祭。新皇帝登極。參賀班。皆非外國使臣所當得也。公在燕京。左諭德汪煇。因人請見公家集。公辭不獲。錄示朝天紀行詩百餘篇。汪公大喜。自爲序。付書肆欹劂。及公使還。權奸嗾臺官劾公。曾爲西宮不參庭請。又奉使京師。刊布私書。播國陰事。請拿鞫。光海峻却之。促公奉勑而來。辛酉。拜工曹判書。又兼藝文館提學。是時朴承宗與爾瞻交惡。欲籍公重名。以傾爾瞻。爾瞻益怒。又嗾兩司以前西宮事劾公。請絶島安置。啓入留中。監軍御史梁之垣來。備局言儐接之才。無踰李某者。方被重劾。不敢請。光海卽下敎峻責兩司。令亟停論。以公爲接伴使。公辭不許。遂行。監軍待公以殊禮。及西還。欲久留安州。敬公耆艾官尊。移書朝廷。請令公先歸。公留寧邊候旨。時有孫閣老東來之報。乃以公爲孫閣老接伴使。孫不果來。公乃還。時靖社密謀已定。事頗泄。兩司託它事論首事諸人。禍且不測。公爲見柳希奮。以雅辭解之。竟得無它。癸亥三月。今上反正。公聞報審悉。然後入朝昌德宮。上命公詣慶運宮。奉請大妃復位。以公爲禮曹判書兼知經筵判義禁府事。嘗於筵中。論成渾被誣。請復官。又請褒贈李珥。皆從之。將議私廟典禮。公言殿下旣繼宣祖之統。其於本生封號。自有先朝故事。唯其屬稱未有明據。蓋殿下以孫繼祖。而考位闕焉。正統固不可紊。天倫亦不可闕。今若稱考而不加皇字。稱子而不加孝字。立支子。以主其祀。祀典封號。一依德興故事。則重宗統報本生之道。似爲兩盡。首相李公元翼以下。皆以公議爲是。上從之。命選元子輔養官。公與吳公允謙,鄭公瞱,鄭公經世,金公長生同膺選。大妃下敎數光海罪惡。命奏天子請誅之。李相元翼以問公。公與李公及申公欽。請對陳其不可。大妃意稍解。光海夫人柳氏卒。請遣禮官治喪。用王子禮葬之。曹植書院。爾瞻輩所建也。爲人撤毀。祠版狼籍。請令所在禁之。論者是之。元子年踰十歲。請早行冊禮。而先加元服。甲子李适反。臨津不守。上將南狩。公請固守京城。以待勤王之師。群議以爲不可。遂決計幸公山。公扈駕至水原。請下書八路。曉諭逆順。賊旣授首。上還都。公先奉廟主入京。乙丑。兼世子右賓客。世子加元服。公爲之贊。陞拜議政府左贊成兼世子貳師。太監王敏政,胡良輔來頒詔。公爲館伴。將行號牌。爲號牌廳堂上。啓運別宮之喪。公又以判中樞兼禮曹判書。議喪葬節文。每當隆殺之節。必斤斤致謹焉。聖敎嚴峻。命推考禮官。公惶恐上疏辭職。上優批不許。姜,王二詔使之來。公又爲館伴。詔使送帖。有飽聞聲華之語。又拜左贊成。兼禮判如故。丁卯。奴賊入寇。移拜兼兵曹判書。公辭。上曰。國事至此。非卿不可當此任。扈駕入江都。和事且成。虜遣劉海來定盟約。公承命接待。金戶判藎國及維爲之貳。劉海初言當絶天朝。公據大義痛斥之。海頗以虛辭恐喝。久之。忽拱手曰。素聞朝鮮禮義名。今聽諸公語果然。國危如此。而猶守忠信。不肯變節。誠可敬也。遂不復相逼。劉海索歲幣馬牛甚多。公又力爭不許。只許若干土物爲犒賞資。海又欲於會盟日。上親莅盟壇。公又請以死爭之。海亦不復強也。後海歸天朝。每稱我國忠義云。公在行朝。建請諸道置營將。使管束伍操鍊。有事則各領所部赴敵。劉海又來。上命公往諭海。令亟撤義州留兵。未幾。虜兵果撤去。戊辰七月。擢拜議政府右議政。屢辭。皆優旨不允。公在相位。屢言綜覈務實。及明敎化正風俗。崇儒術養賢才之道。倭使玄方,智廣等來請上京。公上箚言狡夷所言。不可盡許。今宜以特召爲名。只令玄方等上來。餘人依例留釜山接待之。嘗侍講筵。請優禮召致金長生,張顯光等。追贈成渾。以示崇奬之意。又言殿下頗有輕視群下。好作聰明之病。上嘉納之。相臣有言羅萬甲,金堉專擅朋比。上命大臣議其罪。公與首相言唯當鎭定。不宜遽施罪譴。上不聽。命萬甲遠竄。金堉下獄。公與首相詣闕待罪。 上卽引見。命萬甲減配中道。金堉門外黜送。公又與首相上箚辭職。不許。庚午春。請暇焚黃先墓。命賜奠床食物。恩數甚優。劉興治擅殺島帥陳繼盛。朝廷議擧兵擊之。公言不稟朝命。徑行誅討。非外藩體。及入對。又力陳不當擊。上入前說不從。兵旣進。興治已去。或言當勦島中老弱。公又論其不可。竟罷兵。追崇議起。玉堂進箚忤旨。上命拿問李行遠等。竄趙絅。公上箚極諫。上皆釋之。辛未夏大旱。上命審冤抑。恤貧乏。甄賢能。以謝天災。因命宥玉堂五儒臣。停追崇奏請之擧。公因上箚請虛己聽言。優待耆宿。疏釋罪累。又自陳衰疾。乞免相職。上優答不允。秋有風雷之變。公與首相上箚自劾。請寢拜陵。上卽命停行。公前後論大禮。或面陳或以啓箚。言甚明切。每有譴何橫及。公未嘗不諫。諫不納。輒乞去職。壬申。進拜左議政兼世子傅。上命有司亟擧追崇之禮。公與首相聯名上箚屢諫。皆不從。臺官朴東善,權濤論徽號增減事。上怒命權濤拿問。朴東善削奪官職。公又上箚諫。六月。大王大妃昇遐。公爲摠護使。梓宮至山陵。公有疾不克行事。至冬。引疾呈告。凡二十上。始許遞判西樞。甲戌。進文康公所撰大學衍義輯略。因上箚引書中所論崇敬畏,戒逸欲,嚴內治,察民情四條。以陳戒焉。上嘉納賜毛褥。秋有元宗祔廟之命。三司爭之強。上震怒。言官相繼坐黜竄者十餘人。公輒上箚諫。皆不聽。乙亥四月。病篤。上遣內醫視疾。藥物交途。王世子亦遣宮官問病。是月二十九日。卒于正寢。訃聞。上震悼輟朝。進素膳三日。近臣致弔。賜祭賻如禮。王世子率宮官擧哀。進素膳七日。弔賻有加。越八日。親臨哭弔。館學儒生百七十餘人。相率來弔。嗚呼。豈所謂生榮死哀者非耶。公生稟秀異之資。德性和厚。風度淸爽。與人語。和氣盎然。無纖毫矜持。至當是非去就之際。未嘗有所枉屈。鄭文肅公曄。論當世人物。輒稱公曰。和中有確。世罕其比。尤篤於孝友。壬辰之難。公奉三登公赴行在。至楊州遇賊。匿山谷中。三登公不食數日。公涕泣出山求食。時賊鋒充斥。人煙斷絶。公仿偟無所之。忽見一老人坐巖上。前置一簞飯。公就拜乞焉。其人擧簞與之。公辭其半。其人曰。歸作數日供可也。不顧而去。有姊在高陽。不知存沒。公往省之。至城山遇賊幾死。飛丸三及身。而皆不中傷。唯穿穴衣袴而已。竟省姊而還。京畿監司沈岱。軍澄波渡。三登公疲谻。欲留一夕。公見沈無備知必敗。立催發行數里。而賊襲沈壘。屠殺殆盡。其阽危幸免如是者甚多。每遇先忌。雖隆寒不廢澡浴。至老亦然。朔望之參。雖病必躬。五代祖墓在樓院。香火久不擧。公爲定祭式。子孫輪行。文康公舊基。未有祠宇。公爲重建。以畀主祀者。與寡姊居比舍。未嘗一日不見。收恤內外宗族。曲有恩意。賑貧救乏。常如不及。窮鄕疏屬。歸之如家。其忠君憂國。出於至誠。常曰。吾於家事甚闊疏。不以經意。至當國事。雖微細不敢忽。凡有施設料理。夜臥必森羅目前。聞朝家有過擧。憂形於色。見有美政盛事。或登對聞上敎當理。出必喜以誇語子弟。當官莅職。常持大體。見人過誤。專務覆蓋。讞獄必主平反。求其生道。生平不問家有無。未嘗營置田園增修垣屋。王世子臨喪還。謂講官曰。位卿相數十年。居第隘陋如此。其廉儉可貴云。公受知宣廟。恩遇之隆。迥出今古。中遘否運。雖慍于群小。而操履貞固。譽望益盛。晩際聖明。遂膺大拜。倚毗深重。終始無替。公立朝四十六年。遍歷六卿。而九長春官。再秉文衡。禮樂儀章。多所考定。高文大冊。事大交隣詞命。出於公手者。皆鴻菀可觀。其赴京師儐華使者各四。艱危之際。周旋應對。竭慮盡誠。紓國難雪國誣。增國家之光華者。赫赫在人耳目。故雖當昏朝。奸讒齮齕。必欲致之死地。每値國有憂虞。事關中朝者。不得不擧公以應之。以故屢廢屢起。終得免於奇禍。公於學問。未嘗規規於章句講說。而樂善好德。誠意藹然。有可以爲斯文地者。輒自盡其心力。其見於文字事爲者。可考而知也。其文章天才絶人。贍敏暢達。絶無艱辛滯澁之態。宣廟最悅公文謂一時名能文詞者。擧出公下。初以辨誣奏見稱於中朝。東征諸將見其奏者。每對上必稱好文章。魯訒者我人也。漂到江浙還。亦言南方士子多傳誦者。今歲賀節使臣。還自燕京。亦言玉田有儒生。出示公奏本。寧遠寺僧。亦誦公所贈詩。問月沙亡恙否。嘗撰楊御史碑。楊得墨本大喜。衆中誇示曰。朝鮮李尙書文也。汪學士煇。旣得公詩鋟行。署丞葉世賢。當奉使滇南。以其板本自隨曰。當廣布江南。以爲鄕里榮耀。公嘗赴燕。鎭江守將丘坦聞公至。出候道左。設綵棚供張以迎。熊御史化。請公宴于其第。執禮甚恭。其爲華人所敬慕如此。所著詩文集二十五卷。又有書筵講議一卷,大學講語一卷藏于家。夫人權氏。禮曹判書克智之女。有二男二女。男曰明漢。成均館大司成。曰昭漢。兵曹參知。公早得重名。業已流聞華夏。國中之人。無問識不識。下至童孺婦女輿臺蒭牧。每稱公。必曰月沙而不名。其文章政術德望之盛。載於國史。誦於萬口。非可誣也。謹採摭其表著者。參以家狀論述如右云。<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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