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0. 3. 26. 00:30
▲눈 내린 경무대(1956년)
▲1960년대 경무대 모습
●경무대(景武臺)
☀위치 : 경성부(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와대로 1)
☀상태 : 철거
☀기공 : 1937년 3월 22일
☀완공 : 1939년 9월 20일
☀철거 : 1993년 10월 15일
경무대(景武臺) 총독관저는 1937년에 착공하여 1939년 경복궁 북쪽(현재 청와대 부지)에 건립되었다.
본래 1868년(고종 5년)에 경복궁이 중건되면서 후원 자리에 4개의 건물이 지어졌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경무대였다.
조선총독부는 경무대를 비롯한 경복궁 후원 건물들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총독관저를 신축하였다.
관저의 명칭은 헐린 건물 중 하나인 경무대의 이름을 땄다. 이름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경복궁의 ‘경(景)’과 궁의 북문인 신무문의 ‘무(武)’에서 따왔다는 설이 우세하다.
1892년(고종 29년) 경에 그려진 <수선전도(首善全圖)>에는 경복궁 신무문 밖 후원 지역에 ‘경무대’라는 지명이 표기되어 있다.
1937년 3월 22일에 기공식이 있었고 4월 2일에 신축공사가 시작되어 10월 12일에 지진제가 열렸다. 당시 부지의 총면적은 야산을 포함해 171,902㎡(52,091평), 관저의 연 면적은 1,861㎡(564평)이었다.
1938년에 정초식이 있었고 같은 해 6월 13일에 상량식까지 했으나 중일전쟁으로 인한 물자 부족으로 9월 2일에 공사가 일시 중지되었다. 1939년 4월 5일에 공사가 재개되었으며 같은 해 7월 25일에 준공되어 9월 20일에 낙성식이 있었다.
관저는 벽돌조 건물로 지하 1층, 지상 2층의 규모였다. 정면 중앙에 사각기둥으로 지지되는 캐노피를 두었고 경사지붕으로 처리하였으며 창문 위쪽에는 차양을 돌출시켰다. 1939년에 제7대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南次郞)가 왜성대 총독관저를 시정 기념관으로 개편하면서 본격적으로 총독관저로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광복 이후 총독관저는 미군정의 최고 책임관인 군정장관 하지 중장의 관저로 사용되다가 1948년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대통령 이승만의 집무실 겸 관저로 사용되었다.
1960년 4·19 혁명 이후 탄생한 제2공화국의 대통령 윤보선은 경무대가 독재정권을 연상시킨다고 주장하면서 1960년 12월 30일에 청와대(靑瓦臺)로 개명하였다.
명칭은 건물에 ‘푸른 기와’(靑瓦)를 덮은 데서 유래하였다. 1990년에 청와대의 본관을 신축한 이후 1993년 10월 15일에 철거하였고 ‘청와대 구 본관 터’ 기념 표석을 세웠다.
경무대 총독 관저와 주변 | 지반 공사에 사용된 나무 말뚝. |
●조선총독부 관사
1906년에 통감부의 설치로 국내에 일본인 관리가 대거 등용되면서 이들을 위한 관사가 대량으로 지어졌으며 탁지부 건축소(度支部建築所)의 설립으로 더욱 본격화되었다. 탁지부 건축소의 설치 이후 1910년까지 수행한 공사의 건수를 보면 관사 및 숙사(宿舍)의 비율이 83%로 가장 높았다.
1910년 이후 일본인들의 통치기구가 정비되면서 관사의 건설은 더욱 급속히 진행되었는데 당시 경성부(京城府)는 급격한 인구의 증가로 인하여 심각한 주택부족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관사의 대량 보급은 주택보급 안정화에도 기여를 하였다.
조선총독부 관사는 거주자의 직급과 관등에 따라 규모와 설치되는 실의 종류 등에서 차이를 보임에도 불구하고 공통된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특징이 한·양·일(漢·洋·日) 절충식 공간 구성이다.
일본인들을 위한 일본 전래의 주거 형식(일반 생활공간)과 근대기 서구에서 도입된 서구적 공간(응접실, 식당, 서재 등의 공적 공간), 그리고 한국의 기후 등에 적응하기 위한 한국 전통적 공간(온돌)의 특징이 한 주택 내에서 모두 사용되었다.
●총독부 청사와 풍수 침략설
대일본 형상화 속설 : 북악산과 경복궁 조선총독부 청사, 경성부청 청사(현재 서울 특별 시청)의 외관을 조합하면 한자로 ‘대일본’(大日本)을 형상화하고 있어서 풍수지리학적으로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통치를 상징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당시 경성부청 설계에 참여하였던 조선총독부 건축과 기수(技手)인 사사 게이이치(笹慶一)는 1926년에 《조선과 건축》(朝鮮と建築)에서 “평면도는 부지의 경계에 붙여서 궁형(弓形)으로 하고 (…) 의장(현재 서울 특별시청 태평홀)은 중앙 뒤쪽에 따로 설치하였다”라고 기술한 점을 볼 때, 애초에 설계자는 건물모양을 ‘本’이 아닌 ‘弓’으로 인식하였다.
그리고 당시 서양 근대건축의 저택, 궁전, 관공서는 대칭형의 위압적인 평면 형태가 일반적이었으며 건물 안쪽에 중정(中庭, 안뜰)을 배치하는 ‘日’ 자형이 전형적인 형태였다.
대표적인 예가 영국인 건축가 에드윈 루티언스가 설계한 인도 뉴델리의 인도 총독부 청사(현재 인도 대통령 관저로 사용되는 라슈트라 파티 바반)이며 경복궁 조선총독부 청사의 모델이기도 하다.
1. 중심축 훼손 문제
일제가 민족정기를 말살하기 위해 경복궁 중심축과는 벗어난 남북축을 설정하고 이를 따라 총독부 청사와 광화문, 조선신궁(朝鮮神宮)을 건설했다는 주장이 있다.
조선총독부는 서울을 재정비하면서 경복궁의 중심인 근정전 앞쪽에 총독부 청사를 신축하고 남산에는 조선신궁을 배치하는데 경복궁 중심축과 5.7° 차이가 난다. 전문가들은 중심축의 차이를 근대적인 서구식 측량법을 사용한 식민지 시대 서울의 도시계획과 풍수지리학적인 개념과 전통적인 측량법을 사용한 조선시대의 건축 상의 차이로 인한 결과로 설명한다.
비슷한 맥락에서 해가 뜨고 지는 궤적에 따라 형성되는 진북(眞北)과 지구 자기장이 형성하는 자북(磁北)은 5° 가량 차이가 난다. 이에 따르면 중건된 경복궁은 자북을 응용한 반면에 조선총독부에 의한 총독부 청사의 신축과 광화문 재배치는 진북을 기준으로 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2. 기초 말뚝 설치 문제
경복궁 조선총독부 청사를 철거하는 과정에서 건물 부지 지하 4.5m에 박혀있는 9,388개의 대형 나무 말뚝이 드러났다. 지름 20~25㎝, 길이 4~8m 정도의 나무 말뚝을 가로, 세로 각각 60㎝ 정도의 간격으로 촘촘히 박아놓았다.
일각에서는 일제가 민족정기를 말살하기 위하여 말뚝을 설치한 것이라 주장하였지만, 말뚝은 건축용 도로 지반을 다지기 위해 박아 놓은 것이다. 공사 기록에 따르면 백두산과 압록강에서 소나무를 잘라와 터파기 공사 때, 지하에 박아 놓았으며 지반에서 물이 솟아올라 양수기로 퍼내며 작업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청사의 해체 당시에 지반안정과 비용, 공사 기간 등을 고려하여 말뚝을 그대로 둔 채 흥례문 등을 복원하였다.
▲필자도 이 건물의 경호 근무를 해서 기억이 새롭다.
▲지금은 주차장이 돼버린 김영삼 대통령 재임 시절의 청와대 구 본관 모습(1993년 철거)
조선총독부 관저로 세워졌던 청와대 구(舊) 본관 건물이 김영삼정부 때인 1993년 10월 15일 철거 작업을 시작하여 다음달 11월 15일 철거를 마무리 하였다. 오늘날 이 건물의 사진이라도 남아있어 1960년 후반 이 건물 경호 근무를 섰던 젊은날의 추억을 회상할 수 있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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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프라하에서 출생한 바이올린 연주자(violinist)이다. 안토닌 드보르작의 외 증손자 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