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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에 학림씨가 보내주신 霞帔帖의 관련내용에 답합니다. 내가 천주교에 입교하면서부터 국사와 교회사에 관심이 많아서 조선의 천주교인 박해시대의 순교자들을 떠올리면서 신유사옥(辛酉邪獄)이라고도 하는 신유박해 때중국에서 들어온 천주교는 당시 성리학적 지배원리의 한계성을 깨닫고 새로운 원리를 추구한 일부 진보적 사상가와, 부패하고 무기력한 봉건 지배체제에 반발한 민중을 중심으로 퍼져나가면서, 18세기 말 교세가 크게 확장되었고 특히, 1794년 청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가 국내에 들어오고 천주교도에 대한 정조의 관대한 정책은 교세 확대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가부장적 권위와 유교적 의례·의식을 거부하는 천주교의 확대는, 유교사회 일반에 대한 도전이자 지배체제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었습니다. 때문에 정조가 죽고 이른바 세도정권기에 들어서면서 천주교도에 대한 탄압이 본격화되었습니다. 1801년 정월 나이 어린 순조가 왕위에 오르자 섭정을 하게 된 정순대비(貞純大妃)는 사교(邪敎)·서교(西敎)를 엄금·근절하라는 금압령을 내렸습니다. 이 박해로 이승훈·이가환·정약용 등의 천주교도와 진보적 사상가가 처형 또는 유배되고, 주문모를 비롯한 교도 약 100명이 처형되고 약 400명이 유배되었다. 이 신유박해는 급격히 확대된 천주교세에 위협을 느낀 지배세력의 종교탄압이자, 또한 이를 구실로 노론(老論) 등 집권 보수세력이 당시 정치적 반대세력인 남인을 비롯한 진보적 사상가와 정치세력을 탄압한 권력다툼의 일환이었습니다.
하피첩은 정약용 선생께서 전라남도 강진에서 18년동안 유배시에 선생께서 직접 쓰신 문서인데 가족에 대한
절절한 사랑이 묻어나는 글이라서 읽는이로 하여금 감동의 눈물을 흘리게 합니다. 선생께서 쓰신 책이 500여
권인데 그 중에 베트남 전쟁이 한창일 때 월맹의 호지명(胡知明) 수상이 목민심서를 탐독하고 월남의 부패한
티우정권을 무너뜨려 베트남을 통일했다는 일화를 듣고 선생께서 대한민국에 얼마나 큰 정신유산을 남겼는가
를 실감하기 위해 강진의 유배지와 인근에 소재한 백련사 주지스님과의 우정이 두터워 드나들었다는 그 길도
걸으면서 우리나라 역사적 인물 중에 정권의 탄압으로 기개를 펴지 못한 분이 성웅 이순신 장군과 정약용
선생님이라는 생각을 하게되었답니다. 지금도 남양주시에 가면 선생의 탄생지와 유적지 유물전시관이
있어서 방문하시는 분들에게 선생님께서 남기신 강한 흔적을 느낄 수 있답니다...
정약용 필적 하피첩(naver.com)
정약용 필적 하피첩
조선 후기의 실학자 정약용이 두 아들에게 전하는 당부의 글을 담은 서첩이다.
정약용의 강진 유배 시절을 대표하는 필적으로서 2010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정약용 필적 하피첩(丁若鏞 筆蹟 霞帔帖) │ 보물 │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공사현장에서 발견된 의문의 책 3권
2004년 어느 공사현장, 폐지를 수집하는 한 할머니가 나타났다. 그런데 그곳에서 일하던 한 남자는 어쩐지 할머니의 수레에 실려 있던 낡고 낡은 책 3권이 몹시 신경 쓰였다.
할머니에게서 책을 구입한 그는 2년 뒤, 전문가에게 책의 감정을 의뢰했다. 책을 본 전문가는 깜짝 놀랐다. 책의 정체는 바로 <다산시문집> 등에 기록으로만 남아있던 다산 정약용 선생의 <하피첩>이었기 때문이다
정약용 필적 하피첩(丁若鏞 筆蹟 霞帔帖) │ 보물 │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정약용은 신유박해 당시 천주교와 관련한 것이 문제가 되어 1801년, 유배길에 오르게 된다.그런데 전남 강진에서 10년째 유배생활 중이던 정약용에게 부인 홍씨가 물건 하나를 보내온다. 그 물건은 홍씨가 입던 다홍치마였다.
부인 홍씨가 시집올 때 예복으로 입었던 치마를 ‘지금은 멀리 떨어져있지만 부디 날 잊지 말아달라’는 의미로 남편에게 보낸 것이다.
정조의 총애를 아낌없이 받았던 정약용은 사실 풍족하게 살지 못했다. 정약용의 집에는 먹을 것이 없어서 시종 아이가 옆집 호박을 훔쳐다 죽을 쑤기도 했다. 그는 시종을 혼내며 이 일을 시로 적었다.
가장인 정약용이 유배를 떠난 후, 남은 식구들의 생활은 더욱 궁핍해졌다. 부인 홍씨가 직접 가재도구를 내다 팔거나 양잠 등을 하며 생계를 꾸려나갈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부인의 빛바랜 예복 치마를 받아 본 정약용의 마음은 어땠을까. 어쩌면 고생만 시키는 아내에게 한없이 미안하고, 또 멀리 떨어져 지내는 가족들이 너무나도 그립지 않았을까. 이에 정약용은 부인 홍씨가 보내온 치마에 붓을 들어 편지를 썼다.
노을 하霞 · 치마 피帔 노을빛 붉은 치마에 쓴 편지
남편을 그리워한 아내 부인 홍씨의 마음과 언제나 가족을 걱정했던 아버지 정약용의 마음이 만나 탄생한 보물이 바로 하피첩인 것이다.
그렇다면 하피첩霞帔帖 에는 어떤 내용이 적혀있을까? 하피첩에는 유독 폐족廢族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폐족은 망한 가문이라는 뜻이다.
과거에 합격해 입신양명 하는 것이 가장 큰 명예였던 조선시대, 그러나 정약용의 아들들은 죄인의 자식으로 과거를 볼 기회조차 가질 수 없었다. 하지만 정약용은 그럴수록 몸과 마음가짐을 바르게 하여 폐족의 자제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조목조목 전달했다.
재물은 잡을수록 빠져나가는 메기와 같다.
공경의 마음을 세우고, 의리를 반듯하게 만들라.
정약용은 아들들이 비록 벼슬길이 막힌 폐족의 자식이더라도, 세상에 부끄럼 없이 떳떳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한 것이다. 이 밖에도 하피첩에는 교우 및 친족관계, 학문하는 자세 등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도움이 될 만한 글들이 많이 적혀있다.
정약용 필적 하피첩(丁若鏞 筆蹟 霞帔帖) │ 보물 │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안타까운 것은 현재 발견된 하피첩이 3권 뿐이라는 것이다. 정약용은 부인 홍씨의 치마를 사용해 하피첩뿐만 아니라 시집가는 딸에게 매화병제도라는 그림을 그려주었는데, 이 매화병제도에 따르면 하피첩은 총 네 첩으로 제작되었다고 한다. 또한 하피첩을 보존 처리하는 과정에서 두 첩에 을(乙)과 정(丁)이라는 글자가 발견되었는데, 이를 보아 하피첩은 갑을병정(甲乙兵丁)의 순서대로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위대한 아버지가 남긴 보통의 마음
비록 4권 중 3권만 전하고 있지만, 하피첩 속에 담긴 아버지의 사랑만큼은 완전하다. 그런 아버지의 마음을 알기라도 했던 듯, 그의 자식들 또한 훌륭하게 자라났다. 큰 아들은 어렵게 관직을 얻어서 아버지를 풀어달라는 상소문도 올리기도 했고, 둘째아들은 정약용의 실학 정신을 물려받아 ‘농가월령가‘ 책을 썼다.
유배지에서도 열정적으로 자식을 가르치고자 했던 정약용! 어쩌면 위대한 아버지가 가진 보통의 마음이 가족들을 위로하고, 자식들을 올바른 길로 이끈 것은 아닐까.
천상의 컬렉션 지식백과 12회- 정약용 필적 하피첩
Heavenly Collection ep.12 - Jeong Yakyong’s calligraphy album
天上のコレクション EP.12 - 丁若鏞 筆蹟 霞帔帖
天上的收藏 EP.12 - 丁若镛笔迹霞帔帖
다산 정약용이 전라남도 강진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1810년(순조 10) 7월과 9월에 만든 서첩이다. ‘하피(霞帔)’는 본래 조선시대 비빈(妃嬪)의 법복(法服)을 말하지만 여기서는 '붉은 치마'라는 뜻으로, 하피첩이라는 명칭은 그의 부인 홍씨가 유배지로 부쳐온 '바래고 해진 붉은 치마[紅裙]'를 잘라 만든 것이라 하여 다산이 직접 명명하였다.
제작 배경
서문에서 "내가 강진에서 귀양살이할 때 병든 아내가 낡은 치마 다섯 폭을 보내왔는데, 시집올 때 가져온 예복으로 붉은빛은 흐려지고 노란빛은 옅어져 글씨 쓰는 바탕으로 알맞았다. 이것을 잘라서 조그만 서첩을 만들어 손 가는 대로 훈계하는 말을 써서 두 아이에게 남긴다. 아이들이 훗날 이 글을 보고 감회를 일으켜 부모의 흔적과 손때를 생각한다면 틀림없이 그리는 감정이 뭉클하게 일어날 것이다"라고 이 서첩을 만들게 된 경위를 밝혔다.
다산은 부인 홍씨와의 사이에서 6남3녀를 두었으나 네 아들과 두 딸이 대부분 천연두로 사망하여 이 서첩을 만들 당시에는 장남 학연(學淵)과 차남 학유(學游) 그리고 셋째 딸만 남아 있었다. 이때 학연은 18세, 학유는 15세였으며, 1801년(순조 1) 유배를 떠난 뒤 10년 가까이 자식들을 슬하에 두지 못한 안타까운 마음에 두 아들에게 당부의 말을 전한 것이다.
구성과 내용
1813년(순조 13) 7월 다산이 딸에게 그려준 《매화병제도 梅花倂題圖》에 하피첩을 네 첩 만들었다는 내용이 적혀 있어 원래 네 첩으로 구성된 것을 알 수 있지만 현존하는 것은 세 첩뿐이다. 그 중 두 첩의 서문에 각각 ‘가경 경오년 수추(首秋; 음력 7월)’과 ‘가경 경오년 국추(菊秋; 음력 9월)’로 기록되어 1810년 7월과 9월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서첩은 치마를 마름질하고 종이를 덧대어 만들었다. 천의 재질은 비단이나 옅은 갈색으로 변한 상태이며, 바느질 흔적도 보인다. 세 첩 가운데 한 첩의 크기는 가로 14.2㎝, 세로 24㎝이고, 다른 두 첩의 크기는 가로 15.6㎝, 세로 24.6㎝로 같다. 한 첩의 표지는 박쥐와 구름 무늬가 장식된 푸른색 종이, 나머지 두 첩은 미색 종이로 되어 있다. 세 첩 모두 표지 안쪽에 붙이는 면지는 붉은색 종이를 사용하였다.
내용은 선비가 가져야 할 마음가짐, 남에게 베푸는 삶의 가치, 삶을 넉넉하게 만들고 가난을 구제하는 방법, 효와 우애의 가치 등을 담고 있어 다산의 가치관을 엿볼 수 있다. 서체는 전서·예서·행서·초서가 두루 구사되었으며, 행서와 초서를 섞어 쓰는 다산의 전형적인 행초서풍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전서와 예서는 다른 서첩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필체이다.
보물 제1683-2호
이 서첩은 다산의 후손들이 대대로 보존하다가 6·25전쟁 때 분실되었다. 이후 행방을 알 수 없다가 2004년 경기도 수원에서 폐지 줍는 할머니가 습득한 것을 어떤 건물주가 입수하였고, 2006년 텔레비전의 감정 프로그램에 등장하여 알려진 뒤 2010년 10월 '정약용 행초 다산사경첩'(보물 제1683-1호)과 함께 다산의 강진 유배 시절을 대표하는 필적으로 인정받아 보물로 지정되었다. 이후 2015년 경매에 출품된 것을 국립민속박물관에서 낙찰 받아 소장하고 있다.
출처:(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정약용 행초 다산사경첩[丁若鏞 行草 茶山四景帖]
조선 후기의 실학자인 정약용(丁若鏞)이 강진 유배 시절에 쓴 서첩. 강진 유배 이후로 변모한 정약용의 서풍을 살필 수 있다.
유형시대성격수량재질작가지역(소장처·전승지)크기소유자관리자문화재 지정번호문화재 지정일
정의
정약용(丁若鏞)이 강진 유배시 다산초당(茶山艸堂)의 사경(四景)
을 읊은 시와 외척 윤규로(尹奎魯)의 아들에게 준 시문 등을 쓴 서첩.
구성 및 형식
2010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1첩의 필사본으로 대부분 행서로 쓰여 있다. 표지 제첨은 예서로 “다산사경첩(茶山四景帖)”이라 쓰여 있고, 그 밑에 작은 예서 글씨로 “다산친묵 귤송당진장(茶山親墨 橘頌堂珍藏)”이라고 두 줄로 쓰여 있다. 이를 통해 이 서첩을‘ 귤송당(橘頌堂)’이란 당호(堂號)를 가진 인물이 소장했음을 알 수 있는데, ‘귤송당’은 다산초당이 위치한 곳이 강진군 도암면 귤동(橘洞) 마을이었기 때문에 이를 근거로 ‘귤원(橘園)’이란 아호를 썼던 윤규로의 당호이거나 정약용의 외손과 관련이 있는 인물일 것으로 추정된다. 사경시 뒤로는 윤규로의 넷째 아들 윤종진(尹鍾軫)에게 써준 호기(號記), 윤규로의 셋째와 넷째 아들과 문답한 내용을 쓴 글, 윤종진에게 독서하는 자세에 대해 써준 경계의 글, 윤규로 자제의 재질을 칭송한 오언시, 소식(蘇軾)의 오언율시 「권야(倦夜)」가 쓰여지다.
내용
정약용이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할 때 조성했던 다산초당의 경물들 가운데 다조(茶竈), 약천(藥泉), 정석(丁石), 석가산(石假山) 등 네 가지 경물을 읊은 칠언율시를 행서로 쓴 서첩이다. 사경 가운데 ‘다조’는 차 끓이던 부뚜막 역할을 하던 바윗돌로 현재 다산초당 앞마당에 놓여있다. ‘약천’은 다산이 평소 떠 마시거나 약을 달일 때 사용하던 샘으로 다산초당 서북쪽 모퉁이에 위치해있다. 원래 물기만 축축이 있던 곳인데 다산이 이곳을 파내자 맑은 물이 솟아나왔다는 내용이 시의 말미에 적혀있다. ‘정석’은 다산초당의 주인임을 나타내기 위해 다산 자신의 성을 새긴 명문으로 다산초당 서편 바위에 새겨져 있다. ‘석가산’은 다산초당 오른쪽 연못 중앙에 둥근 형태의 산 모양으로 돌을 쌓아 조성한 곳이다. 다산초당의 사경을 읊은 4수 뒤로는 다산초당의 원래 주인 윤규로(尹奎魯)의 아들 윤종진(尹鍾軫)이 15세 되던 해인 1818년에 정약용이 그에게 ‘순암(淳菴)’이란 호를 지어주며 써준 호기(號記), 정약용이 유배에서 벗어난 뒤 1823년 초여름 옛 제자이자 윤규로의 셋째(字는 旗叔)와 넷째 아들 윤종진(字는 琴季)이 한강 상류인 다산의 집에 찾아 왔을 때 주고받은 이야기를 기념으로 써준 글, 윤종진에게 독서하는 자세와 관련하여 써준 경계의 글, 윤규로 자제의 뛰어난 재질을 칭송한 오언시 등이 행서 또는 행초(行草)로 차례로 쓰여 있으며, 마지막으로 소식(蘇軾)의 오언율시 「권야(倦夜)」를 행초로 썼다. 정약용은 초년에 전대의 명필 이광사(李匡師), 강세황(姜世晃) 등의 서풍을 따르다가 강진 유배 이후로는 특유의 서풍을 이루었다. 그의 후반기의 글씨는 글자의 크기 및 필획의 굵기에 변화를 주어 자유분방한 필치가 더욱 드러나며, 먹을 듬뿍 먹은 습윤한 운필과 더욱 여유로워진 글자의 짜임을 보인다. 이 서첩에서도 강진 유배시절 이후 변모된 정약용의 서풍을 살필 수 있는데, 1823년(62세) 윤규로의 셋째와 넷째 아들에게 써준 행초 필적에서 이러한 경향이 잘 나타난다.
의의와 평가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다산시문집 권5에는 다산 팔경을 노래한 「다산팔경사(茶山八景詞)」와 다산의 정경을 읊은 「다산화사(茶山花史)」 20수가 있으나 사경(四景)을 읊은 시는 실려 있지 않다. 문집에 빠져 있는 사경시와 그 대상인 경물들이 현재까지도 그대로 보존되고 있고, 시의 말미에는 시의 소재로 쓰인 경물들에 대한 위치 및 조성배경을 알려주는 기록이 있어 정약용이 다산초당에서 지내기 시작하던 당시의 상황을 파악하기에 유용한 자료이다. 글씨는 행서 또는 초서를 섞은 행초로 쓰여 있는데, 대부분 연대가 기록되어 있고 글씨의 흐름도 각 시기마다 변화를 보여 정약용 행초서풍의 변천과정을 살피기에도 좋은 자료이다.
참고문헌
『다산사경첩』(강진군,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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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 행초 다산사경첩조선 후기의 실학자인 정약용(丁若鏞)이 강진 유배
시절에 쓴 서첩. 강진 유배 이후로 변모한 정약용의 서풍을 살필 수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출처 :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