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성숙 수녀와 유재순 수녀가 성 빈첸시오의 집에서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와 대화를 나누며 말벗을 해드리고 있다.
가난하고 고통 받는 모든 이를 돕는 평신도 단체인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는 알아도 수도회인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 사랑의 딸회'(이하 사랑의 딸회)를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따스한 햇살이 쏟아지는 봄날, 경기도 양주시 은현면 운암리에 자리 잡은 노인복지시설 '성 빈첸시오의 집'을 찾았다. 사랑의 딸회가 운영하는 이곳은 의지할 곳 없는 어르신과 장기요양보험 대상 할머니 48명이 생활하는 전문요양원이다. 고맙게도 한국지부장 강성숙(레지나) 수녀가 취재 일정에 맞춰 함께 방문해 준 덕분에 경기도 군포시 금정동 본원까지 따로 찾아가는 수고를 덜었다. (주)코스모스악기 회장 민명술(프란치스코)ㆍ정진숙(글라라)씨 부부와 은인들 후원으로 집을 지어 2001년 9월 무료양로원으로 문을 연 빈첸시오의 집은 2008년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가 실시되면서 유료요양원으로 전환했다. 후원금이 급감한데다 정부정책에 떠밀려 불가피하게 유료로 전환한 후에도 수녀들은 돌봐줄 가족이 없는 무의탁 할머니를 한 분도 내보내지 않고 지금까지 함께 모시고 있다. 무료로 입소해 있는 어르신이나, 비용을 내고 유료로 서비스를 받는 어르신이나 수녀들 관심과 돌봄에는 차별이 없다. 대부분 거동을 하지 못해 침대에 누워있거나 휠체어에 의지해야 하는 중증질환 어르신들이 많고 절반이 넘는 어르신들에게 치매기가 있어 수녀들은 한시도 긴장을 풀기 어렵다. "밤중에 말없이 밖으로 나가는 치매 할머니들이 있는데 야간 당직 직원을 따로 둘 형편이 안 돼 수녀들이 직접 숙직을 해요. 기저귀도 갈아 드려야 하고…. 우리들은 '밤일'을 나간다고 하지요. 하하~." 유재순(로사) 원장 수녀는 "책상에 앉아 지시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할머니들의 목욕ㆍ식사ㆍ배변처리ㆍ빨래도 앞장서서 한다"고 말했다. 이런 솔선수범 때문인지 요양보호사들도 몸을 아끼지 않고 이직률도 상대적으로 낮은 편이라고 한다. 사랑의 딸회는 당시 라자로 마을 원장이던 고 이경재 신부가 나환우 치료법을 가르쳐줄 수녀 파견을 요청, 미국관구 콘스탄스 하멜(Sr. Constance Hummel) 수녀와 일본관구 쟌기나시 수녀가 1978년 4월 한국에 들어오며 시작됐다. 두 수녀는 라자로 마을 담장 안에만 머물지 않고 경기 북부지역 10여 곳의 나환우 정착마을을 찾아다니면서 무료 이동진료 활동을 벌였고, 1980년 11월 한국 분원을 정식 설립했다. 현재 회원 수는 13명. 33년이라는 세월에 비하면 그리 많지 않은 숫자다. 힘들고 고된 일을 꺼려하는 시대풍조 때문일까. "사실 저희는 선배 수녀님들이 이동진료 때 나환우들을 끌어안고 고름을 짜주고 상처를 씻고 붕대를 감아주면서 버림받은 이들에게 하느님의 손길을 느끼게 해주는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입회했어요. 물론 그런 영성에 반해 지원했다가 저희 수녀들이 몸을 사리지 않고 일하는 것을 보고 놀라서 돌아간 이들도 없지 않아요."(유재순 수녀) "전 세계적으로 회원 수가 103개 나라 2300여 공동체에 1만9800명이 넘어요. 1975년경에는 5만4000명에 육박했던 시절도 있었지요."(강성숙 수녀) 한국지부는 현재 필리핀관구 소속으로, 성 빈첸시오의 집과 가정폭력 피해 이주민 여성을 위한 쉼터인 루이즈의 집을 직접 운영하고 있으며, 안산 본오종합사회복지관과 이주민지원센터인 수원엠마우스 및 안양엠마우스를 수원교구로부터 수탁 운영하고 있다. 수원교구 군포본당 등에서 본당사도직을 하기도 했으나 1997년 사도직 식별을 새롭게 하면서 정체성에 맞지 않다는 판단에 따라 순차적으로 철수했다. 그 후 안동교구의 가장 가난한 공소였던 함창본당 양정공소에 수녀 세 명을 파견해 10여 년간 과수원과 밭농사를 지으면서 공소선교를 하기도 했다. 사랑의 딸회가 사도직을 선택하는 원칙은 매우 단순하다. '예수님의 시선'으로 '가장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라는 것이다. 특이한 점은 회원들이 일주일에 한 번 '공동체 반성' 시간을 통해 다른 모든 회원들 앞에서 자신의 실수나 잘못을 스스로 고백한다는 점이다. 이를 통해 자신을 더욱 낮추면서 회원들이 서로 이해하고 용서하는 기회를 만든다. 또 회원들이 매년 개인별 지출에 대해 연간 예산을 세우도록 한다. 이를테면 안경이나 수도복을 새로 맞추거나 치과치료 또는 특별한 교육을 받는 필요한 지출에 대해 각자 예산을 짠다. 모든 회원들의 개인 예산에 식비, 공과금 등 공동 지출을 합하면 공동체 전체 예산이 되는 것이다. 강 수녀는 "각자 자유롭게 예산을 짜면 씀씀이가 헤플 것으로 생각하지만 오히려 대부분 예산을 남기는 경우가 많다"며 "자유로움 안에서 스스로 더 절제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강 수녀는 "항상 '가난한 사람들은 이럴 때 어떻게 할까'라는 질문을 스스로 하면서 지출을 하기 때문에 한 달 용돈 2만 원도 다 못 쓰는 회원도 많다"고 덧붙였다. 사랑의 딸회는 사도생활단에 속하기 때문에 종신서원이 없고 수련기를 포함 5~7년 사이에 첫 서원을 하며 매년 서원을 갱신한다. 또 정결ㆍ순명ㆍ가난 서원 외에도 가난한 이들에 대한 봉사 서원을 하는 것이 특징이다. 서영호 기자 amotu@pbc.co.kr
▲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 사랑의 딸회 심벌마크
▨ 수도회 영성과 역사 "여러분들은 가난한 이들의 작은 여종입니다. 언제나 미소 짓고 좋은 맘으로 지내는 '사랑의 딸'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친절과 미소를 늘 지녀야 합니다. 여러분의 주인은 가난한 이들입니다.…그들의 몰골이 추하고 더러울수록, 또 부당하고 상스럽게 굴수록 여러분은 그만큼 더 그들에게 사랑을 주어야 합니다." 스스로 가난한 이들의 종이 되기를 자청했던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St. Vincent de Paul, 사진 왼쪽)가 수녀들을 일터로 보내며 당부한 이 말은 사랑의 딸회가 지니고 있는 영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 성 빈첸시오는 사랑의 딸들이 가난한 이들, 특히 비참하고 가장 버려진 이들을 만나고 찾아 나서기를 원했다. 1617년 프랑스 리옹 근교 본당사제로 부임한 성 빈첸시오는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돌볼 체계적인 조직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평신도 여성들의 봉사 단체인 '애덕 부인회'를 만들었다. 1625년에는 성직자 양성과 재교육을 위해 남자 수도회인 '선교회'를 설립했다. 당시 프랑스는 종교적으로, 사회적으로 매우 혼란한 시기였다. 8차례의 종교전쟁은 경제를 도탄에 빠뜨렸고 대부분 국민들의 삶은 비참함 그대로였다. 거지들이 들끓고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이 넘쳐났다. 애덕 부인회만으로는 한계를 느낀 성 빈첸시오는 가난한 이들에게 보다 영신적, 육체적으로 봉사하기 위해 성녀 루이즈 드 마리약(St. Luise de Marillac, 사진 오른쪽)과 함께 1633년 11월 29일 최초의 활동 수도회인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 사랑의 딸회를 설립했다. 성 빈첸시오는 "사랑의 딸들은 병자들의 집과 그들이 머무는 곳이 바로 수도원이며, 도시의 거리가 바로 봉쇄 구역이다"고 말했다. 수도자들이 가난한 이들과 똑같은 방법으로 살기를 희망한 것이다. 많은 여자 수도회가 봉쇄 구역 안에서 관상적 수도 생활을 하고 있던 당시로서는 상당히 파격적인 일이었다. 성 빈첸시오는 또 "여러분이 하루에 열 번 가난한 사람을 방문하면 거기서 열 번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고 한 말씀처럼 가난한 이들을 방문하면서 그들 모습으로 강생한 그리스도를 발견했고 가난한 이들을 섬기면서 그리스도를 섬기도록 가르쳤다. 그는 주인이 불렀을 때 즉시 달려가는 착한 종처럼, 하느님께 즉각 순명한 예언자들처럼 수녀들이 가난한 이들에게 그렇게 행동하기를 바랐다. 성 빈센트 드 뽈 자비의 수녀회도 성 빈첸시오와 성녀 루이즈 영성을 따르고 있으며, 사랑의 딸회 회헌은 많은 활동 수도회의 전형이 되고 있다. 한편 파리 뤼드박의 사랑의 딸회 모원에 있는 기적의 메달 성당은 1830년 당시 수련 수녀였던 성녀 가타리나 라부레가 성모발현을 체험하고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요청에 따라 '기적의 메달'을 전파한 곳으로 세계 각국의 순례자들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서영호 기자
▲ 강성숙 수녀와 유재순 수녀가 성 빈첸시오의 집에서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와 대화를 나누며 말벗을 해드리고 있다.
가난하고 고통 받는 모든 이를 돕는 평신도 단체인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는 알아도 수도회인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 사랑의 딸회'(이하 사랑의 딸회)를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따스한 햇살이 쏟아지는 봄날, 경기도 양주시 은현면 운암리에 자리 잡은 노인복지시설 '성 빈첸시오의 집'을 찾았다. 사랑의 딸회가 운영하는 이곳은 의지할 곳 없는 어르신과 장기요양보험 대상 할머니 48명이 생활하는 전문요양원이다. 고맙게도 한국지부장 강성숙(레지나) 수녀가 취재 일정에 맞춰 함께 방문해 준 덕분에 경기도 군포시 금정동 본원까지 따로 찾아가는 수고를 덜었다. (주)코스모스악기 회장 민명술(프란치스코)ㆍ정진숙(글라라)씨 부부와 은인들 후원으로 집을 지어 2001년 9월 무료양로원으로 문을 연 빈첸시오의 집은 2008년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가 실시되면서 유료요양원으로 전환했다. 후원금이 급감한데다 정부정책에 떠밀려 불가피하게 유료로 전환한 후에도 수녀들은 돌봐줄 가족이 없는 무의탁 할머니를 한 분도 내보내지 않고 지금까지 함께 모시고 있다. 무료로 입소해 있는 어르신이나, 비용을 내고 유료로 서비스를 받는 어르신이나 수녀들 관심과 돌봄에는 차별이 없다. 대부분 거동을 하지 못해 침대에 누워있거나 휠체어에 의지해야 하는 중증질환 어르신들이 많고 절반이 넘는 어르신들에게 치매기가 있어 수녀들은 한시도 긴장을 풀기 어렵다. "밤중에 말없이 밖으로 나가는 치매 할머니들이 있는데 야간 당직 직원을 따로 둘 형편이 안 돼 수녀들이 직접 숙직을 해요. 기저귀도 갈아 드려야 하고…. 우리들은 '밤일'을 나간다고 하지요. 하하~." 유재순(로사) 원장 수녀는 "책상에 앉아 지시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할머니들의 목욕ㆍ식사ㆍ배변처리ㆍ빨래도 앞장서서 한다"고 말했다. 이런 솔선수범 때문인지 요양보호사들도 몸을 아끼지 않고 이직률도 상대적으로 낮은 편이라고 한다. 사랑의 딸회는 당시 라자로 마을 원장이던 고 이경재 신부가 나환우 치료법을 가르쳐줄 수녀 파견을 요청, 미국관구 콘스탄스 하멜(Sr. Constance Hummel) 수녀와 일본관구 쟌기나시 수녀가 1978년 4월 한국에 들어오며 시작됐다. 두 수녀는 라자로 마을 담장 안에만 머물지 않고 경기 북부지역 10여 곳의 나환우 정착마을을 찾아다니면서 무료 이동진료 활동을 벌였고, 1980년 11월 한국 분원을 정식 설립했다. 현재 회원 수는 13명. 33년이라는 세월에 비하면 그리 많지 않은 숫자다. 힘들고 고된 일을 꺼려하는 시대풍조 때문일까. "사실 저희는 선배 수녀님들이 이동진료 때 나환우들을 끌어안고 고름을 짜주고 상처를 씻고 붕대를 감아주면서 버림받은 이들에게 하느님의 손길을 느끼게 해주는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입회했어요. 물론 그런 영성에 반해 지원했다가 저희 수녀들이 몸을 사리지 않고 일하는 것을 보고 놀라서 돌아간 이들도 없지 않아요."(유재순 수녀) "전 세계적으로 회원 수가 103개 나라 2300여 공동체에 1만9800명이 넘어요. 1975년경에는 5만4000명에 육박했던 시절도 있었지요."(강성숙 수녀) 한국지부는 현재 필리핀관구 소속으로, 성 빈첸시오의 집과 가정폭력 피해 이주민 여성을 위한 쉼터인 루이즈의 집을 직접 운영하고 있으며, 안산 본오종합사회복지관과 이주민지원센터인 수원엠마우스 및 안양엠마우스를 수원교구로부터 수탁 운영하고 있다. 수원교구 군포본당 등에서 본당사도직을 하기도 했으나 1997년 사도직 식별을 새롭게 하면서 정체성에 맞지 않다는 판단에 따라 순차적으로 철수했다. 그 후 안동교구의 가장 가난한 공소였던 함창본당 양정공소에 수녀 세 명을 파견해 10여 년간 과수원과 밭농사를 지으면서 공소선교를 하기도 했다. 사랑의 딸회가 사도직을 선택하는 원칙은 매우 단순하다. '예수님의 시선'으로 '가장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라는 것이다. 특이한 점은 회원들이 일주일에 한 번 '공동체 반성' 시간을 통해 다른 모든 회원들 앞에서 자신의 실수나 잘못을 스스로 고백한다는 점이다. 이를 통해 자신을 더욱 낮추면서 회원들이 서로 이해하고 용서하는 기회를 만든다. 또 회원들이 매년 개인별 지출에 대해 연간 예산을 세우도록 한다. 이를테면 안경이나 수도복을 새로 맞추거나 치과치료 또는 특별한 교육을 받는 필요한 지출에 대해 각자 예산을 짠다. 모든 회원들의 개인 예산에 식비, 공과금 등 공동 지출을 합하면 공동체 전체 예산이 되는 것이다. 강 수녀는 "각자 자유롭게 예산을 짜면 씀씀이가 헤플 것으로 생각하지만 오히려 대부분 예산을 남기는 경우가 많다"며 "자유로움 안에서 스스로 더 절제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강 수녀는 "항상 '가난한 사람들은 이럴 때 어떻게 할까'라는 질문을 스스로 하면서 지출을 하기 때문에 한 달 용돈 2만 원도 다 못 쓰는 회원도 많다"고 덧붙였다. 사랑의 딸회는 사도생활단에 속하기 때문에 종신서원이 없고 수련기를 포함 5~7년 사이에 첫 서원을 하며 매년 서원을 갱신한다. 또 정결ㆍ순명ㆍ가난 서원 외에도 가난한 이들에 대한 봉사 서원을 하는 것이 특징이다. 서영호 기자 amotu@pbc.co.kr
▲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 사랑의 딸회 심벌마크
▨ 수도회 영성과 역사 "여러분들은 가난한 이들의 작은 여종입니다. 언제나 미소 짓고 좋은 맘으로 지내는 '사랑의 딸'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친절과 미소를 늘 지녀야 합니다. 여러분의 주인은 가난한 이들입니다.…그들의 몰골이 추하고 더러울수록, 또 부당하고 상스럽게 굴수록 여러분은 그만큼 더 그들에게 사랑을 주어야 합니다." 스스로 가난한 이들의 종이 되기를 자청했던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St. Vincent de Paul, 사진 왼쪽)가 수녀들을 일터로 보내며 당부한 이 말은 사랑의 딸회가 지니고 있는 영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 성 빈첸시오는 사랑의 딸들이 가난한 이들, 특히 비참하고 가장 버려진 이들을 만나고 찾아 나서기를 원했다. 1617년 프랑스 리옹 근교 본당사제로 부임한 성 빈첸시오는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돌볼 체계적인 조직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평신도 여성들의 봉사 단체인 '애덕 부인회'를 만들었다. 1625년에는 성직자 양성과 재교육을 위해 남자 수도회인 '선교회'를 설립했다. 당시 프랑스는 종교적으로, 사회적으로 매우 혼란한 시기였다. 8차례의 종교전쟁은 경제를 도탄에 빠뜨렸고 대부분 국민들의 삶은 비참함 그대로였다. 거지들이 들끓고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이 넘쳐났다. 애덕 부인회만으로는 한계를 느낀 성 빈첸시오는 가난한 이들에게 보다 영신적, 육체적으로 봉사하기 위해 성녀 루이즈 드 마리약(St. Luise de Marillac, 사진 오른쪽)과 함께 1633년 11월 29일 최초의 활동 수도회인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 사랑의 딸회를 설립했다. 성 빈첸시오는 "사랑의 딸들은 병자들의 집과 그들이 머무는 곳이 바로 수도원이며, 도시의 거리가 바로 봉쇄 구역이다"고 말했다. 수도자들이 가난한 이들과 똑같은 방법으로 살기를 희망한 것이다. 많은 여자 수도회가 봉쇄 구역 안에서 관상적 수도 생활을 하고 있던 당시로서는 상당히 파격적인 일이었다. 성 빈첸시오는 또 "여러분이 하루에 열 번 가난한 사람을 방문하면 거기서 열 번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고 한 말씀처럼 가난한 이들을 방문하면서 그들 모습으로 강생한 그리스도를 발견했고 가난한 이들을 섬기면서 그리스도를 섬기도록 가르쳤다. 그는 주인이 불렀을 때 즉시 달려가는 착한 종처럼, 하느님께 즉각 순명한 예언자들처럼 수녀들이 가난한 이들에게 그렇게 행동하기를 바랐다. 성 빈센트 드 뽈 자비의 수녀회도 성 빈첸시오와 성녀 루이즈 영성을 따르고 있으며, 사랑의 딸회 회헌은 많은 활동 수도회의 전형이 되고 있다. 한편 파리 뤼드박의 사랑의 딸회 모원에 있는 기적의 메달 성당은 1830년 당시 수련 수녀였던 성녀 가타리나 라부레가 성모발현을 체험하고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요청에 따라 '기적의 메달'을 전파한 곳으로 세계 각국의 순례자들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서영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