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은 삶이 주는
가장 아름다운 축복
황균민
영원히 늙지 않는 것은 축복일까 저주일까.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나이를 먹고 그만큼의
물리적인 노화를 겪다가 결국에는 죽는 것-- 탄생의 찬란함에 비해 삶의 끝은 허무할 수도
두려울 수도 있지만 이것은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섭리다.
그러나 인간은 조금 더 젊게 보이고 조금 더 오래 살기 위해 세월의 흐름을 멈춰 보려는
무모한 노력들을 해왔다. 천하를 가졌어도 결국 불로장생만큼은 손에 넣을 수 없었던
진시황의 꿈은 망상으로 끝났지만 인간은 여전히 과학과 의학의 힘을 빌려 젊음을 얻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독특한 설정으로 화제를 모은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이하 <벤자민
버튼>)는 물질만능주의와 외모지상주의로 팽배해 있는 현대의 삶과 허망한 욕구에 은근한
깨우침을 준다.
남들과 달리 점점 젊어지는 주인공 벤자민 버튼, 그는 젊음도 얻고 사랑도 얻고 재산도
얻지만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삶을 살지 못한다.
우리가 그토록 얻고자 했던 궁극의 것을 가졌건만 그는 왜 행복하지 못했을까?
기이하고 신기한 이야기만큼이나 영화< 벤자민 버튼>은 인생의 신비와 수수께끼를
아름답게 그려낸다.
가장 행복하지만 가장 불행한 사나이
1차 세계대전이 끝나가고 축제 분위기로 한껏 들떠있는 1918년 미국의뉴올리언즈에서
80세 노인의 얼굴을 가진 한 아이가 태어난다. 아버지 토마스 버튼은 놀라움과 충격에
빠져 결국 아이를 한 양로원에 버리고 만다.
양로원에서 일하는 퀴니는 기꺼이 아이의 엄마가 되기로 결심하고 벤자민이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부실한 관절과 치아, 백내장에 걸려 앞이 거의 보이지 않는 눈, 구부정한 허리
얼굴 가득한 검버섯을 한 벤자민은 얼마 살지 못할 것이라는 의사의 부정적인 견해와
달리 조금씩 젊음을 회복해간다.
7세가 되던해, 벤자민은 첫사랑이자 평생의 사랑인 데이지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고
만남과 이별을 반복하던 중 서로의 나이와 외모가 비슷해진 시기에 비로소 함께하게 된
다. 그러나 달콤한 행복도 잠시, 점점 젊어지는 벤자민과 달리 데이지는 보통 사람들처럼
나이를 먹으며 늙어가고 두 사람은 깊은 고민에 빠진다.
결국 벤자민은 어린아이가 되기 전에 데이지와 딸의 곁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영화 <벤자민 버튼>은 『위대한 개츠비』의 작가F. 스콧 피츠제럴드의 단편 소설에서
영감을 받았는데, 재미있게도 피츠제럴드는 마크트웨인의 명언을 듣고 매우 즉흥적으로
이 소설을 써내려갔다고 한다.
"인간이 80세로 태어나 18세를 향해 늙어간다면 인생은 무한히 행복하리라."
아마도 트웨인은 벤자민 버튼에게 내려진 형벌과도 같은 젊음을 의미한 것은 아니었겠지만
피츠 제럴드는 자신이 받은 감흥을 기발한 상상력으로 풀어냈다.
이 독특한 단편소설의 영화화는 1950년대에 처음 시도되었지만 제작이 가시화된 것은
그로부터 40년이 더 지나고 나서였고 1992년에 비로소 감독 데이빗 핀처의 손에 시나리오
초고가 쥐어진다.
『벤자민 버튼의 기이한 경우 (The Curious Case of Benjamin Button)』 라는 매우 간결
하고 솔직한 제목을 갖고 있는 단편 소설은 구성이나 내용전개에 있어서 영화보다 훨씬
간단하다. 설정이나 등장인물, 결말도 다르며 소설의 분량 때문인지 전개 또한 매우
속도감 있다. 소설이나 영화 모두 한 인물의 전 생애와 시간을 역행해 사는 드라마틱한
삶을 보여주는 면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겠지만 영화 <벤자민 버튼>이 훨씬 단단하고
세심한 구성을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보기 드물게 성공적으로 영화화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플래시 백 (영화에서 사용되는 내러티브 장치로서, 시간상으로 등장 인물의 인
생이나 역사의 좀 더 앞선 시기로 되돌아가 그 시기를 이야기하는 것) 으로 진행되는 스
토리는 무려 2시간 46분에 달하지만 시대를 꼼꼼히 재현한 성실한 고증, 따뜻함과 감동
유머가 스며 나오는 탄탄한 시나리오, 적당한 호흡으로 진행되는 이야기의 템포, 그리
고 무엇보다 디지털 기술로 완벽하게 재현한 역노화 과정과 배우들의 모습은 지루함이
끼어들 틈을 결코 주지 않는다.
나이를 먹는 것, 그리고 함께 살아간다는 것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젊어진다는 것은 분명 기분 좋은 일이다. 더 건강해지고 더 아
름다워지는것을 마다할 사람이 과연 있을까? 한 집 건너 하나씩 성형외과, 피부과 간판
이 걸려있을 만큼 외모에 대한 관심과 열기가 정상 수위를 넘어선 현실 속에서 자연
의 섭리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외침은 자칫 공허하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벤자민 버튼처럼 기이한 운명을 타고나지 않는한 보톡스 주사와 주름 성형으
로 쭈글거리는 세월의 흔적을 감춘들 결국 육신의 에너지는 언젠가 그 빛을 잃게 된다.
영화 속 벤자민은 시간이 지날수록 젊어지고, 더 시간이 지나면 어려진다.
노인으로 태어난 벤자민은 아저씨가 되고 청년이 되고 소년이 되어 나중에는 아무것
도 기억하지 못하는 아기가 되어 눈을 감는다.
그는 주변 사람들의 나이 듦을 바라봐야 했고 아이가 되어서는 거꾸로 지나온 과거의
시간을 기억하지 못하게 되었다.
평범한 이들에게는 너무나도 당연한 삶이 그에게는 손에 쥘 수 없는 축복이었던 것이다.
살아가면서 사람들은 당연한 것에 지루함을 느끼고 당연한 것이 왜 당연한지를 잊은 채
자신이 누리는 축복에 감사하지 못한다. 자연의 이치와 순리를 알기 위해 굳이 어려운
공부를 할 필요는 없다. 그저 내가 숨 쉬는 공기에 감사하고 주어진 삶에 감사하며 자연
스럽게 세월의 물살을 타며 함께 늙어가는 친구와 가족,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세월
의 흐름이 쓰나미처럼 다가온다 한들 그 삶은 분명 아름다울 것이다. ♧
황균민_ 동국대학교 영화과 대학원 수료, 영화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있다.
첫댓글 그러잖아도 한번 구해서 관람 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