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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토요일 아침, 고갱 전을 보러 갔습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 때문에 매표소 앞에서 발걸음을 돌렸던 터라 여유 있게 볼 계획으로 개관 시간 전에 도착했지만 저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가을 아침 햇살 아래 이미 입장을 기다리는 줄이 길게 만들어져 있었고 저를 포함한 우리나라 사람들의 ‘치열함’을 또 한 번 보게 되었습니다.
황색 예수가 있는 자화상 Self-portrait with ‘Yellow Christ’, oil on canvas, 1889
고갱에 대한 작품은 이미 많은 분들이 소개했기 때문에 저는 고갱에 대한 일생에 대한 이야기만 하고자 합니다. 한편으로는 대단했고 한편으로는 쓸쓸했던 그의 인생이 전시장을 걷는 내내 제 머릿속에 맴돌았습니다.
가을 풍경 Autumn Landscape, 65x101cm, oil on canvas, 1877
고갱의 아버지는 열혈 공화주의자이자 신문기자였고 어머니는 페루인의 피가 섞인 혼혈인이었습니다. 나폴레옹 3세가 정권을 잡게 되면서 고갱의 가족은 프랑스를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로서는 일종의 정치적 망명인 셈이었죠. 그러나 고갱의 아버지는 아내의 근거가 되는 페루 라마로 가는 배에 올랐다가, 그만 배 안에서 숨을 거두고 맙니다. 고갱이 태어난 지 겨우 18개월이 된 아이였을 때였습니다.
한 집안의 가장(家長)이 가져야 할 것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가족에 대한 책임입니다. 집에 돌아와 옷을 벗을 때 그 속에 스며 있던 눈물과 한숨이 뚝뚝 떨어져도 식구들에게 내색하지 않는 것은 책임감 때문이지요. 그렇게 본다면 고갱은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배울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그의 인생에서 가족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오니 마을 입구 Entrance to the village of Osny, 59.5x 73cm, oil on canvas, 1883
일곱 살이 되던 해 고갱은 프랑스 오를레앙으로 돌아옵니다. 어려서 살았던 페루에 대한 기억은 그의 머릿속에 깊게 자리를 잡았고, 훗날 그가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게 되었던 원인이 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제 기준이지만 유년에 대한 순간순간의 기억은 마치 사진처럼 남아 있어서 몸은 아니어도 마음은 늘 그곳으로 달려가게 합니다.
천사와 씨름하는 야곱 Jacob wrestling the angel, 73x92cm, oil on canvas, 1888
열일곱 살이 되던 해 고갱은 선원이 됩니다. 몸 어디엔가 자리를 잡고 있던 새로운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시키기에 당시에 선원만큼 좋은 직업도 없었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이곳저곳을 다니던 고갱은 어머니가 죽으면서 선원 생활을 정리합니다. 파리에 자리를 잡은 그는 어머니의 친구 소개로 증권거래업소의 직원이 됩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긴 고갱은 덴마크 출신의 메테 소피 가트와 결혼을 하는데 고갱이 스물다섯, 가트가 스물세 살이었죠. 둘 사이에 아이는 다섯이나 두었지만 행복한 부부 사이가 아니었던 것을 보면 아이가 많다고 꼭 사랑이 많은 것은 아닌 모양입니다.
안녕하세요 고갱 씨 Bonjour Monsieur Gauguin, oil on canvas, 1889
취미 삼아 그림을 그리던 고갱은 인상파 화가들의 스승인 피사로의 지도를 받게 됩니다. 그렇게 편하게 흘러갔을 고갱의 인생이 거대한 변화를 맞게 된 것은, 그가 일하고 있던 주식시장의 폭락 때문이었습니다. 경제난이 닥치자 파리를 떠나 식구들을 데리고 지방으로 이사를 갔던 그는 다시 처가가 있는 덴마크로 거처를 옮깁니다. 고갱은 화가가 되기로 결심을 하고 식구들을 남겨 놓고 혼자 파리로 돌아옵니다. 파리에 돌아 와서도 그의 빈곤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모퉁이의 세 브르타뉴 여인 Breton woman at the turn, 91x72cm, oil on canvas, 1888
브르타뉴는 프랑스이지만 나머지 프랑스와는 다른 독특한 문화를 가지고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많은 화가들이 브르타뉴로 몰려들었지요. 고갱도 브르타뉴의 퐁타방에 자리를 잡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이 무렵 고갱은 인상파 화풍이 지나치게 빛을 강조하는 바람에 본래의 형태를 왜곡시킨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합니다. 확실한 윤곽과 원색들로 이루어진 이른바 종합주의가 탄생하게 된 것이지요
해바라기를 그리는 빈센트 반 고흐의 초상화
Portrait of Vincent van Gogh painting sunflowers, 73x 92cm, oil on canvas, 1888
황색 예수 Yellow Christ / oil on canvas / 1889
1년간 파나마와 남태평양을 돌아보고 온 그는 그 유명한 ‘고흐와의 잠깐 동거’에 들어갑니다. 지금 보면 두 사람 모두 보이지 않는 영혼의 상처를 가지고 있었지만 끝내 서로의 상처를 쓰다듬어 주지는 못했지요. 퐁타방으로 돌아온 고갱은 마침내 1891년 타이티로 떠납니다. 원시의 생명력이 그를 구원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있었겠지요. 그 후로 죽을 때까지 고갱은 사람의 손길이 가능한 한 덜 닿은 곳을 찾아다닙니다. 그곳에서 제작한 작품을 가지고 파리에 돌아와 전시회를 여는 일도 있었지만 더 이상 도시는 그가 있기 어려운 곳이 되었습니다.
세 명의 타이티 인 Three Tahitians, 73x94cm, oil on canvas, 1898
해변가의 두 타이티 여인 Two Tahitian woman on the beach, 1891
바닷가의 여인 Woman by the sea, oil on canvas, 1892
자리를 옮기는 곳마다 원주민 아내를 두었던 고갱은 매독과 자식의 죽음, 그리고 영양실조와 같은 몸과 마음의 질병에 시달립니다. 그러면서도 끝없이 그림을 그렸던 그는 타고난 예술가인 것이 맞습니다. 심장마비로 파리에서 수만 리 떨어진 남태평양의 섬에서 세상을 떠났을 때 고갱의 나이 쉰다섯이었습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Where do we come from? What are we? Where are we going? 139.1x374.7cm, oil on canvas, 1893
화가로는 미술사의 한 획을 그었지만 한 가장으로서는 낙제였습니다. 제가 다시 태어나 길을 고를 수 있다면 고갱보다는 레스까페의 길을 또 걷겠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그의 작품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가 떠올랐습니다.
저도 묻고 싶었습니다.
고갱 선생님, 지금 어디로 가고 계시는지요?
명화 속 그리스 신화 님프 칼립소 그리스 신화에서 칼립소(Kalypso 또는 Calypso)는 오기기아라는 신비의 섬에 사는 님프로, 헤시오도스를 비롯해 호메로스와 같은 고대 그리스 시인들의 기록에 따르면 티탄족 아틀라스(Atlas)의 딸로 알려져 있다. 칼립소에 관한 유명한 일화는 대부분 호메로스의 대서사시 <오디세이아>를 통해 전해진다. 일명 트로이 목마로 그리스 군을 승리로 이끈 오디세우스(Odysseus)는 고향 이타케로 돌아가기 위해 무려 10년의 세월을 떠돌게 되는데, 그중 7년이 칼립소와 보낸 시간이었다. 오디세우스를 사랑한 칼립소 칼립소가 오디세우스를 만난 때는 이미 그가 트로이를 떠나 수년간의 험난한 고초를 겪은 뒤였다. 스위스 출신의 화가 요한 하인리히 퓌슬리(Johann Heinrich Füssli)가 제작한 연작의 내용에서처럼 오디세우스는 괴물 스킬라와 카리브디스뿐만 아니라 신의 저주로 발생한 풍랑으로 인해 부하들을 모두 잃고 부서진 배의 파편에 의지해 간신히 살아남은 처지였다. 이후 오기기아 섬에 홀로 난파된 오디세우스를 구해준 이가 바로 칼립소였다.
1. 요한 하인리히 퓌슬리 <스킬라와 카리브디스 앞의 오디세우스>, 1794~1796년, 캔버스에 유채, 101x126cm, 취리히 쿤스트하우스 소장.
2. 요한 하인리히 퓌슬리 <오디세우스의 난파>, 1803년, 캔버스에 유채, 139x175cm, 개인 소장. 그러나 <오디세이아>의 첫 페이지에서 아테나 여신이 제우스에게 고하고 있듯이 칼립소는 자신이 구해준 오디세우스에게 반해 그를 곁에 붙잡아두고 있었다. 이곳에 머문다면 영원히 늙지도 죽지도 않게 해주겠다는 말로 오디세우스의 환심을 사고자 했고, 밤에는 그와 동침하며 욕망을 달래주었다. 오디세우스는 칼립소의 신비로운 동굴에 거하며 밤에는 그녀의 연인으로 낮에는 고향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아내 페넬로페(Penelope)와 아들 텔레마코스(Telemachos)를 그리워하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17세기에 활동한 벨기에의 화가 헨드리크 반 발렌(Hendrick van Balen)이 묘사한 이 장면을 보자. 오디세우스를 위한 갖가지 음식을 차려놓고 그에게서 눈길을 떼지 않고 있는 칼립소가 보인다. 이 작품은 신화의 내용을 전달하는 한편 화면 속에 등장하는 다양한 동물들은 4가지 요소인 공기, 물, 불, 흙을 뜻하는 것으로, 당시 지식인들의 서재 혹은 집무실에 걸어놓는 용도로 제작된 일명 ‘캐비닛 그림’(cabinet painting)이기도 하다. 작품 완상을 위해 세 명의 작가가 함께 참여했으며, 반 빌렌은 인물들을, 대(大) 얀 브뢰헬(Jan Brueghel)은 동물들을, 풍경화가 요스 데 몸퍼(Joos de Momper)는 우거진 수풀과 바위산을 각각 그렸다고 알려져 있다.
헨드리크 반 발렌 <님프 칼립소의 손님 오디세우스>, 1616년경, 패널에 유채, 80x116cm, 빈 조형예술 아카데미 소장.
오디세우스를 떠나보내다 칼립소의 극진한 대접에도 불구하고 고향에 두고 온 아내와 자식에게 향하는 오디세우스의 마음은 깊어만 갔다. 이러한 오디세우스의 심경을 가장 잘 드러낸 작품이 아마도 아르놀트 뵈클린(Arnold Böcklin)의 <오디세우스와 칼립소>가 아닐까. 화면 왼쪽 등을 보이고 서 있는 그는 마치 그가 딛고 선 바위에서 솟아난 석상처럼 보인다. 미동조차 느껴지지 않는 검은 뒷모습에서 그의 사무치는 그리움과 고통이 배어 나오는 듯하다. 한편 붉은 천 위에 하얀 나신을 드러내고 그를 바라보는 칼립소의 눈길 역시 예사롭지 않다. 대각선으로 이어지는 그녀의 집요한 시선에는 사랑하는 이의 마음을 알면서도 놓아주고 싶지 않은 서운함과 욕망이 뒤섞여 있다.
아르놀트 뵈클린 <오디세우스와 칼립소>, 1883년, 목판에 유채, 150x104cm, 바젤 미술관 소장.
오디세우스의 처지를 안타깝게 여긴 아테나 여신이 나서면서 둘의 갈등은 해결 국면을 맞이한다. 아테나는 올림포스의 신들이 모인 자리에서 제우스에게 이 위대한 영웅이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도와달라고 청을 올렸다. 그러자 제우스는 신들의 전령 헤르메스를 시켜 칼립소에게 오디세우스를 풀어주라는 그의 명령을 전하도록 했다. 칼립소는 마지못해 그러나 신속하게 신들의 제왕의 명령에 따라 오디세우스가 섬을 떠날 수 있도록 돕기로 한다. 그러고는 오디세우스에게 뗏목을 만들 수 있는 튼튼한 도끼와 잘 마른 나무를 준비해주고 마침내 뗏목이 완성되자 물과 포도주, 그리고 식량까지 넉넉히 챙겨서 그의 뗏목을 순풍으로 밀어주었다.
제라르 드 레레스 <칼립소에게 오디세우스를 풀어주라는 명하는 헤르메스>, 1670년견, 캔버스에 유채, 클리블랜드 미술관 소장.
텔레마코스와의 만남, 그리고 사랑 오디세우스의 수호신을 자처한 아테나의 활약은 이게 다가 아니었다. 여신은 신들을 설득하는 동시에 늙은 현자 멘테스(Mentes)로 변신해 오디세우스의 아들 텔레마코스로 하여금 아버지를 찾는 여행을 떠나게 만든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 4권까지의 내용은 바로 이 텔레마코스의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화가들이 그린 텔레마코스의 일화는 <오디세이아>보다는 프랑스 절대왕정 시기의 대주교 프랑수아 드 페늘롱(François de Fenelon)이 쓴 소설 <텔레마코스의 모험>(1699)에서 전하는 장면을 토대로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페늘롱에 따르면 텔레마코스는 멘토르(Mentor, 멘테스와 동일 인물)와 함께 오디세우스를 찾아다니던 중 폭풍우를 만나 오기기아 섬에 불시착한다. 그때까지 오디세우스를 잊지 못하고 있던 칼립소는 텔레마코스가 자신이 사랑했던 이의 아들임을 단박에 알아채고 그와 멘토르를 환대한다. 18세기 프랑스의 화가 장 라우(Jean Raoux)의 작품에는 오디세우스에 이어 텔레마코스까지 사랑하게 된 칼립소가 청년을 붙잡아두기 위해 모험담을 들려달라고 청한 뒤 이야기를 듣고 있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이후 텔레마코스는 잘 대해주는 칼립소의 곁에 머물려 하지만 멘토르의 조언에 따라 아버지를 찾는 모험을 계속하게 된다.
1. 윌리엄 해밀턴 <동굴에서 텔레마코스와 멘토르를 맞이하는 칼립소>, 18세기경, 캔버스에 유채, 202.7x158.8cm, 개인 소장.
2. 장 라우 <칼립소에게 자신의 모험담을 이야기하는 텔레마코스>, 18세기경, 캔버스에 유채, 114x146cm, 루브르 박물관 소장.
3. 샤를 조제프 나투아르 <텔레마코스와 칼립소>, 18세기경, 캔버스에 유채, 121x153cm, 베르사유 트리아농 궁 소장.
신화에 나오는 님프와 하급 여신들은 대체로 영웅을 유혹하고 임무를 소홀하게 만드는 악역이다. 칼립소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이들의 존재로 인해 영웅은 더욱 영웅답게 성장하고 따라서 이야기의 극적 재미 또한 더해준다. 오디세우스가 아닌 칼립소의 입장에서 보자면 한없이 재미있지만은 않은 상황일 테지만 말이다. 글 이민수(미술 칼럼니스트) 홍익대학교 미술사학과 졸업,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다. 인간, 사회 그리고 미술의 상호 관계와 이 세 가지가 조우하는 특정 순간을 탐구하는 데에서 미술사학의 무한한 매력을 느낀다. 현재 문화센터와 대학에서 미술사를 강의하고 있다.
카리테스 : 우미(優美)의 세 여신
카리테스(Charites, 영어로는 Graces)는 그리스 신화에서 기품과 아름다움을 뜻하는 우미(優美)를 의인화한 존재로, 인간과 신을 기쁘게 하는 덕목으로서의 미(美)를 나타내는 세 자매 여신을 일컫는다. 로마 신화에서는 그라티아이(Gratiae)라고 불리며, 미술사에서는 삼미신(三美神)이라는 명칭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고대 그리스 시인 헤시오도스는 <신통기>(神統記, 신들의 계보)에서 이들의 이름을 아글라이아(Aglaia), 에우프로시네(Euphrosyne), 탈리아(Thalia)라고 밝히고, 제우스와 대양의 신 오케아노스의 딸 에우리노메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호메로스의 경우에는 <일리아스>에서 이들 중 가장 어린 한 명의 이름이 파시테아(Pasithea)라고 기록하고 그녀가 헤라의 딸로 추정된다는 에피소드를 남기기도 했다.
아폴론과 아프로디테를 수행하는 세 여신
지로데 트리오종 <아폴론의 리라 소리에 춤추는 삼미신>, 19세기경, 캔버스에 유채, 176x295cm, 콩피에뉴 성 소장.
카리테스 세 여신의 기원에 관해서는 그 밖에도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이쯤 해두고 그들의 역할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예를 들어 헤시오도스의 분류를 참고하면, 세 여신 중 아글라이아는 아름다움과 광휘를, 에우프로시네는 유쾌함과 환희를, 탈리아는 풍요로움과 축제를 뜻한다. 또한 호메로스가 언급한 파시테아는 편안함과 미덕을 뜻한다. 여러 판본의 신화 해설서에서 이들은 대체로 젊고 아름다우며 발랄한 처녀들로 묘사되며 세 명이 늘 함께 있다. 그리고 때때로 음악의 신 아폴론과 함께 등장하기도 한다.
예술의 신이기도 한 아폴론을 수행하는 여신들로는 알다시피 아홉 명의 무사이가 있다. 따라서 카리테스 세 여신 역시 이들과 마찬가지로 혹은 이들의 일원으로 아폴론과 함께 예술의 수호자 역할을 했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아홉 명의 무사이 가운데 탈리아가 카리테스의 막내인 탈리아와 이름이 중복되는 것 역시 이와 연관해 생각해볼 수 있다. 아폴론과 더불어 이 세 여신들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또 다른 신은 바로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이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에서 세 여신은 아프로디테의 목욕과 화장을 시중드는 시녀들로 나온다. ▶시몽 루이 부아조 <삼미신으로부터 ‘미의 여신’의 왕관을 받는 베누스>, 18세기경, 유약을 바르지 않고 구운 경질 자기, 루브르 박물관 소장.
고대 미술에 표현된 카리테스
이처럼 신화 속에서 카리테스는 주인공이라기보다 아폴론이나 아프로디테와 같은 주요 신들을 보좌하며 즐거움과 아름다움을 선사하는 역할로 묘사된다. 고대의 부조와 회화 역시 이러한 신화적 내용을 따랐던 것으로 보인다. 2세기경에 활약한 그리스의 여행가이자 지리학자인 파우사니아스에 따르면, 제단의 방 한편이나 음악 공연장 같은 곳에서 여러 미술가들이 그리고 새겨 넣은 카리테스 세 여신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파우사니아스는 특히 여신들이 초기에는 옷을 입은 모습이었으나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누드로 표현되기 시작했다고 지적했다.
[왼쪽] 작자 미상 <삼미신>, BC 331, 대리석, 8x38x40cm, 루브르 박물관 소장.
[오른쪽] 작자 미상 <삼미신>, BC 27, 대리석, 루브르 박물관 소장.
오늘날 전해지는 기원전 4세기 부조와 회화 작품 가운데 누드로 묘사된 카리테스의 예를 한번 살펴보자.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대리석 부조에는 세 여신의 머리와 다리 아랫부분이 파손되었으나 부드럽고 섬세한 누드로 표현되어 있다. 중앙의 뒤돌아선 여신은 정면을 향해 서 있는 두 여신의 어깨 위로 손을 얹고 있고 이들 역시 서로의 어깨에 손을 얹은 자세다. 카리테스의 전형이라 할 수 있는 이 자세는 후대의 미술작품에서도 지속적으로 관찰된다.
카리테스를 누드로 묘사한 고대 회화의 예로는 폼페이 유적에서 발굴된 1세기경 로마 시대의 프레스코화를 들 수 있다. 현재 나폴리 고고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 작품에도 역시 기원전 4세기 부조에서 본 자세를 거의 흡사하게 취하고 있는 세 여신이 등장한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여신들의 머리에 식물로 엮어 만든 관이 씌어져 있고 중앙의 여신을 제외한 나머지 여신들의 손에 나뭇가지 같은 것이 들려 있다는 것이다.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카리테스 세 여신은 종종 영원한 사랑과 아름다움을 뜻하는 상징물들과 함께 그려지는데, 그것은 대체로 장미, 도금양 가지, 혹은 사과이다. 도금양 가지는 영원과 사랑과 다산을 상징하는 아프로디테의 식물로 알려져 있다.
[왼쪽] <삼미신>, 로마 시대 폼페이 벽화, AD 1세기.
[오른쪽] 라파엘로 산치오, <삼미신>, 1504~1505년, 패널에 유채, 17.8x17.6cm, 콩데 미술관 소장.
르네상스 미술에서 부각된 카리테스
고대의 신화적 전통에서 카리테스는 아프로디테와 그녀의 아들 에로스를 수행하는 시녀들로서 각별한 관계에 있었다. 이러한 관계가 보다 중요시되고 카리테스의 의미가 부각된 것은 르네상스 시대에 들어와서이다. 20세기 초의 미술사학자 에르빈 파노프스키는 르네상스의 플라톤적 인문주의자들이 카리테스를, 아프로디테라는 미의 여신의 실체를 구현하기 위한 본질적 요소로 보았다고 해석한 바 있다. 말하자면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와 마찬가지로 카리테스 세 여신을 미의 여신의 삼위일체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 미술가들은 인문주의자들의 해석에 따라 이 주제를 부활시켰다. 게다가 미술가들에게 이 장면은 다양한 각도로 아름다운 여성의 신체를 표현해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이탈리아 화가 산드로 보티첼리가 그린 <봄>(Primavera)는 그러한 초기 예로 꼽힌다. 화면 중앙에 서 있는 붉은 가운을 걸친 여인은 아프로디테 여신이다. 그녀의 오른손과 몸이 향한 쪽으로 카리테스 세 여신이 보인다. 이들은 하늘하늘 비치는 드레스를 입고 위아래로 손을 맞잡은 채 춤을 추고 있다. 이를 통해 관람자는 유면하면서도 리드미컬한 움직임이 느껴지는 아름다운 여인의 신체를 감상하게 된다.
산드로 보티첼리 <봄>, 1482년경, 패널에 템페라, 203x314cm, 우피치 미술관 소장.
보티첼리 이후 수많은 미술가들이 카리테스 세 여신을 나름의 방식대로 표현해 냈다. 이탈리아 전성기 르네상스의 라파엘로 산치오를 비롯하여 17세기 플랑드르 바로크 화가 페테르 파울 루벤스, 그리고 신고전주의의 조각가 안토니오 카노바의 관능적인 조각 작품이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이후에도 카리테스 세 여신의 조형적 양식은 현대적으로 재해석되어 오귀스트 로댕이라든지 아리스타드 마이욜, 그리고 파블로 피카소와 같은 이들의 작품에 다시 등장하기도 했다.
글 이민수(미술 칼럼니스트) 홍익대학교 미술사학과 졸업,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다. 인간, 사회 그리고 미술의 상호 관계와 이 세 가지가 조우하는 특정 순간을 탐구하는 데에서 미술사학의 무한한 매력을 느낀다. 현재 문화센터와 대학에서 미술사를 강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