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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파랑길 2코스 제2부
부산문화회관-대연3구역주택재개발지-부산진시장-정공단-부산포개항문화기념관
20201104
1부에서 이어짐
1.부산포 개항가도에 울리는 겨레의 함성
1년 전의 체험을 이어나간다. 기억에 떠오르는 체험과 사진 속 감각을 되살려 남파랑길을 걸었던 그날을 재현한다.
유엔기념관 정문을 나선다. 한국의 전통적 조형성을 추상적으로 표현했다고 하는 건축가 김중업의 작품 유엔기념관 정문은 흰 빛으로 반짝인다. 하얀 천사가 하늘을 날아가는 형상이다. 영혼이 비상하는 날갯짓 같다. 영혼은 천사가 되어 비상하지만 지상의 나그네는 가슴이 뭉개진 채 발길이 무겁다.
죽음의 공간을 넘어서 삶의 향유 공간인 부산문화회관으로 넘어갔다. 중앙광장에 첼로 조형물이 대극장을 뒤로 하고 세워져 있다. 두 마리의 새가 첼로에 조각되어 있는, 곽순곤 작가의 작품 '소리의 여정'이다. 첼로의 선율이 새의 노래 소리와 함께 울려 퍼진다. 인공의 악기 소리와 자연 새명체의 소리가 화합하여 가슴을 울린다. 환상의 소리가 끝없이 울려 나간다. 조형물을 감상하면 문화회관을 지나치는데 회관 게시판에 여러 공연 포스터들이 붙어 있다. 그 중에서도 크게 홍보하는 '우리동네 경사났네~'가 눈길을 끈다. 아마도 다음날이 공연날이기 때문일 것이다. 무슨 내용일까? 인간들의 삶의 모습을 아름답게 표현한 예술작품일 것이라 생각한다. 공연작품을 부산문화회관에서 감상하는 기회가 있을까? 당일치기 부산트레킹을 하면서 너무 사치스런 꿈을 꾸는구나.
점심을 먹고서 대연3구역 재건축지역을 걸었다. 이 지역이 지난해 11월에는 남파랑길 코스였지만 이제는 이 지역을 우회하여 다른 코스로 대체되었다고 한다. 당시 대연3구역은 정비사업으로 기존의 주거지가 폐허가 되어 있었다. 그 폐허 속에는 보석보다도 더 아름답게 반짝이는 생활의 추억이 아프게 숨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폐허의 대연동 재건축지역 너머 문현동의 하늘 높이 솟은 고층아파트들은, 아름다운 삶의 추억을 폐허화하고 그 폐허더미 위에 겉만 화려하게 치장한 마천루 같다는 생각이 든다. 대연동에 새로이 조성되는 주거단지도 저렇게 아니 어쩌면 더 높게 솟아 아름다운 삶의 추억을 아득히 압살할 것이다.
문현곱창골목을 지나 문현교차로를 건너 동천의 범일교를 넘었다. 동천을 경계로 부산광역시 남구와 동구가 구분된다. 동구 범일동 자성대공원 입구에서 자성대공원을 그냥 지나친다. 자성대공원? 자기를 반성하는 공원인가? 부산진성(釜山鎭城) 설명안내판을 읽어보면 그 유래를 알 수 있 수 있다.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 증산(甑山)에 부산진성(釜山鎭城)이 있었고, 이곳 범일동에 부산진성을 보호하는 외성(外城)인 부산진지성(釜山鎭支城)이 있었다. 그래서 증산(甑山)에 있는 본성인 부산진성을 모성(母城), 이곳 범일동의 부산진지성(釜山鎭支城)을 자식의 성, 자성(子城)이라 하였다. 이 자성(子城)에 장대(將臺)가 설치되어 있는 곳이 자성대(子城臺)이며 공원이 조성되어 자성대공원이라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자성대(子城臺)가 일본식 성곽 표기라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되면서 2021년 7월부터 '부산진성공원'으로 명칭이 변경 되었다. 그래서 자성대공원은 이제 부산진성공원이라 불린다.
부산진성을 지나 부산진시장 앞으로 나아가니 특이한 생김새의 육교가 있다. 은하철도999 철도 같은 모양으로 육교가 날아가고 있다. 처음으로 부산진시장 앞에 와서 이 기묘한 육교를 감상하고 육교로 올라가 은하철도를 걸었다. 이제는 이 은하철도를 걸을 수 없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이 육교는 2021년 10월에 철거되었다고 한다. 부산진시장 앞 길에 시장개장 100주년을 기념하는 동판이 바닥에 박혀 있는데 연도를 보니, 2013년 그렇다면 부산진시장은 1913년에 개장한 것이다. 자유시장, 평화시장과 더불어 부산의 3대 도매시장이라 할 수 있는 부산진시장의 주업종은 포목, 피목, 기성복, 양복지, 침구, 신발 등이다. 특히 혼수전문시장으로 명성이 높아 부산권뿐만 아니라 경남권의 고객을 위하여 쇼핑버스를 운행하고 있다고 한다.
높은 언덕에 자리한 데레사여고 입구에서 남파랑길은 정공단로를 따라 이어진다. 정공단(鄭公壇)은 임진왜란의 첫 전투지였던 부산진성(釜山鎭城)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순국한 충장공(忠壯公) 정발(鄭撥) 장군과 그와 함께 목숨을 바친 분들을 위해서 비석을 세우고 제사를 지낸 제단이다. 정발 장군의 애국충정을 드높임과 함께 아픈 역사의 흔적을 복철지계(覆轍之戒)로 삼아서, 앞으로 이와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정공단로를 따라가는 길은 그 비극을 경계 삼아 미래의 희망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정공단로 한 편에 '부산포 개항가도' 안내판에 '부산포 이야기'가 적혀 있다. "부산포는 현재의 동구 좌천동과 자성대 일대 부근을 가리킨다. 조선은 무질서하게 입국하는 왜인들의 통제를 위해 1407년(태종 7년) 부산포를 개항하고, 이곳에 왜관을 설치하여 교역 및 접대의 장소로 삼았다. 성종 즉위년인 1469년에는 동평현 관내 인근의 가마솥처럼 생긴 산 이름을 따라 이곳의 원 지명인 ‘富山浦(부산포)’가 ’釜山浦‘로 바뀌게 된다. 그리고 이곳에 첨사영(수군첨절제사영)이 들어서면서 왜구를 막는 중요한 국토 변방의 군사요지로 사용하였다. 이러한 부산포는 국방의 중요한 길목인 까닭에 임진왜란의 첫 결전지가 부산진성 전투였고, 적군도 임란 때 가장 용감한 장수로 정발 장군을 일컫는다." 부산진성에서 증산왜성으로 이어지는 이 지역의 중요성과 정발 장군의 용맹성을 예찬하고 있다.
부산포 개항가도 정공단로를 따라간다. 남파랑길을 바삐 걸어가면서 이 길에서 만나는 건물과 터, 그 건물과 터에 얽힌 사람들의 행적을 어찌 차근차근 읽어낼 수 있을까? 일신기독병원, 정공단, 왕길지 기념관, 부산진교회, 일신여학교 기념관,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 독립운동 체험장소, 부산포개항문화관과 안용복 도일선 전시관 등, 걸으면서 지나친 이곳들의 숨겨진 이야기들이 함성을 지르며 가슴에 불을 지르고 또 가슴을 아프게 한다. 부산진교회, 일신여학교(현 동래여고), 일신기독병원은 모두 호주 선교사들이 선교활동을 하며 조선의 문화에 봉사한 역사의 흔적이다. 국가보훈처에서는 2022년 3.1절을 기하여 부산 일신여학교(현 동래여고)의 설립자인 벨레 멘지스와 교장 마거릿 데이비스, 교사 데이지 호킹 등 호주 여성선교사 3명을 독립유공자로 포상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그들이 조선인과 조선 여성에 미친 영향은 크다.
부산포 좌천동 출신의 독립투사들의 함성이 가슴을 찌르며 들려온다. 부산경찰서장 하시모토에게 폭탄을 투척하여 대구형무소에서 만26세에 순국한 의열단원 박재혁 투사(1895~1921)는 형무소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 뜻을 다 이루었으니 지금 죽어도 아무 한이 없다." "죽으면 한 마리 새가 되고 싶구마. 새가 되어 휴전선 위를 훨훨 자유롭게 날아 댕기고 싶어."(최천택, 1897~1962), "일체의 준비와 행동은 다 이 반일투쟁의 조직발동을 중심으로 하기 바란다.(장건상, 1882~1974) 조선의 독립과 조국의 통일을 염원하는 그 함성이 지금도 애타게 애타게 울려퍼진다.
독도! 조선 숙종 때 독도를 지킨 대표적 인물 안용복은 부산포 좌천동 출신이다. 안용복은 숙종 때 두 차례에 걸쳐 도일하였다. 첫번째는 일본 오오야 가문의 어부들에게 강제로 피랍된 것이며, 두번째는 1696년 자발적 행위에 의한 도일이다. 이 두 차례 도일 결과 일본은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영토라는 것을 인정했으며, 조선은 두 섬의 영유권과 조업에 관한 권리를 공고히 할 수 있었다. 안용복이 살아 있다면, 오늘날 일본이 독도의 자국영토화를 위해 발버둥하는 짓에 어떻게 대응할까? 또 독도는 일본땅이라고 주장하는 <반일 종족주의>의 저자 한국인 이영훈 교수를 향해서는 무엇이라고 말할까? 안용복은 침묵할까, 아니면 분노의 함성을 지를까, 아니면?
1954년 10월 28일 변영태 외무부장관은 독도관계 특별성명을 이렇게 발표했다. "독도는 일본의 한국침략에 대한 최초의 희생물이다. 해방과 함께 독도는 다시 우리 품 안에 안겼다. 독도는 한국독립의 상징이다. 이 섬에 손을 대는 자는 완강한 저항을 각오하라! 독도는 몇 개의 바윗덩어리가 아니라 우리 겨레 영해의 닻이다. 이것을 잃고서야 어찌 독립을 지킬 수가 있겠는가. 일본이 독도를 탈취하려는 것은 한국에 대한 재침략을 의미하는 것이다."
3부로 이어짐
2.걸은 과정 영상
건축가 김중업이 설계한 재한유엔기념관 정문은 한국의 전통적 조형성을 추상적으로 표현하였다고 한다.
재한유엔기념공원은 대한민국근대문화유산으로 대한민국등록문화재 제359호로 등록된 국제기구이다.
터널 밖 오른쪽 길을 걸어 터널 위를 통과하여 부산광역시문화회관으로 진행한다.
부산문화회관이라는 문화의 전당에서 울려 퍼지는 아름다운 음악소리(하모니)가 첼로와 새의 형상을 통하여 시민들에게 큰 울림으로 전달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제작함. - 부산회관 재개관 기념 201.10.
부산문화회관을 나와 유엔평화로 76번길로 들어서면 왼쪽에 석포초등학교가 있다.
왼쪽 위에 부산문화회관 입구가 있고 오른쪽으로 석포초등학교 건물이 보인다.
유엔평화로 76번 길에서 석포로 114번 길로 들어서 내려가면 석포로, 석포로에서 유엔참전기념탑 방향으로 조금 진행하다가 석포로 횡단보도를 건넌다.
이곳에서 점심 먹을 곳을 찾아서 유엔참전기념탑까지 내려갔다.
음식점을 찾아 보았으나 특별한 곳을 찾지 못하여 유엔참전기념탑 맞은편에 위치한 이 낙지음식점에서 낙지 볶음으로 점심을 먹었다.(13:17~13:51)
점심을 마치고 낙지음식점에서 석포로를 따라 올라가서 단디부동산과 아빠횟집 오른쪽 골목길, 석포로 127번길로 들어가 남파랑길 본길로 진행한다.
석포로 큰길에서 이 골목길로 들어와 석포로 127번길을 따라 진행
유엔로 횡단보도를 건너 부산장난감박물관 앞 수영로 196번길을 따라 부산공고 정문 방향으로 진행
이곳에서 왼쪽으로 꺾어 천제등로 28번길로 진입
궁전미용실 앞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주안교회 앞을 거쳐 현대아파트 101동 사이 골목길, 수영로 168번길로 진행
글로리파크빌 앞을 통과하여 맨 끝 천리교 대연교회 앞에서 왼쪽으로 꺾어 대연중학교 방향으로 진행
윗길로 진행하다가 대연중학교 정문 가는 길에서 아래쪽길 신정번영로 31번길로 진행
대연3구역 주택재개발 사업이 진행되어 2024년 입주예정이라고 한다.
번영을 위해 기존의 모든 것들은 사라질 운명에 있다. 다시 이곳에 가게 되면 어떤 모습으로 변하여 있을까?
문현동으로 내려가는 남파랑길을 놓치고 이곳까지 올라왔다.
길을 잘못 든 것을 알고 아예 우암동 도시숲 고개까지 올라갔다. 내려가는 길에 대연동재건축정비사업으로 기존의 주거지가 폐허가 된 모습을 보며 아름다운 생활의 추억이 폐허 속에서 빛나고 있음을 보았다. 폐허 너머 문현동의 고층아파트가 삶의 사상누각처럼 솟아 있다. 대연동 주거단지도 저렇게 아니 어쩌면 더 높게 솟아 지금 바라보이는 앞의 산봉를 가릴 것이다. 저 산봉은 황령산이 맞을까?
신정번영로31번길에서 신정번영로로 들어선 뒤 오른쪽 통제당로 39번길로 꺾어들어 내려와야 하는데 신정번열로를 따라 끝까지 올라가 우암고개까지 가는 실수를 범했다. 고개에서 신정번영로를 따라 내려오지 않고 통제당로로 들어섰다가 통제당로 39번길을 따라 한수탕 방향으로 내려간다. 남파랑길을 벗어나 20여 분 동안 대연동 윗길에서 놀았다.
신정번영로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통제당 39번길 한수탕 방향으로 내려오는 남파랑길을 올려본다. 이제 한수탕에서 싱싱회센터와 못난이과일천국 방향으로 내려간다.
한수탕 앞을 내려가 못난이과일천국과 싱싱회센터방향으로 진행
탑플러스마트 윗길 '지게골로'로 진행
문현4치안센터 왼쪽 골목으로 진행
문현4동에는 일제시대에 형성된 재래시장과 가축시장이 있었다. 이러한 지리적 조건으로 시장에 장보러 온 사람들을 주 고객으로 하는 음식점들이 생겨났다. 어려운 시절이다 보니 인근 도살장에서 나오는 고기 및 부산물을 재료로 하는 음식은 대단히 인기가 있었다. 그 음식 중 하나가 바로 곱창이다. 독특한 맛과 푸짐한 양에 대한 소문이 나기 시작하면서 곱창을 전문으로 하는 가게들이 하나 둘씩 생겨났다. 그렇게 생겨난 가게들이 현재 20여개로 성업 중이다 보니 자연히 ‘곱창골목’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지금도 서민들이 즐겨 찾아오는 부산의 명물 골목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곳에서 최초로 문을 연 곱창집은 없어졌다. 현재 가장 오래된 곱창집은 우석곤 씨가 경영하는 칠성식당으로 40여년 되었다고 한다. 옛날에는 현재의 문현파출소에서 대양전자정보고등학교로 가는 길의 옛 국도에 재래시장인 5일장이 열렸는데 해방 후 큰길이 나고 교통의 편리로 인하여 가축시장 옆에 재래시장이 생기고 그에 따라 사람들의 왕래가 많아지면서 이곳으로 음식점들이 몰리게 된 것이다. (<남구의 민속과 문화>에서)
2001년에는 영화 친구의 촬영지가 되면서 부산의 대표 먹거리 골목으로 널리 알려졌다. 이제 곱창은 문현동을 넘어 부산 지역 단골 먹거리로 오래도록 사랑받고 있다.
문현교차로 고가도로 방향으로 진행
동천을 경계로 부산광역시 남구와 동구가 구분된다.
건너편의 곱창골목과 문현교통광장을 거쳐 문현교차로를 건너 자성로를 따라 범일교를 건넜다. 동천의 범일교를 경계로 부산광역시 남구와 동구가 나뉜다. 부산시 남구 문현동 지역에서 이제 동구 범일동 지역으로 들어왔다.
자성로를 따라 범일교차로 방향으로 진행한다.
육교를 건너 내려가 왼쪽 자성공원로를 따라 진행. 아래의 길은 자성로, 왼쪽으로 이어지는 길은 자성공원로. 2021년 7월부터 '자성대' 명칭이 '부산진성'으로 바뀌었으니, 자성로는 부산진성로, 자성공원로는 부산진성공원로로 불러야 할 듯.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 증산(甑山)에 부산진성(釜山鎭城)이 있었고, 이곳 범일동에 부산진성(釜山鎭城)을 보호하는 외성(外城)인 부산진지성(釜山鎭支城)이 있었다. 그래서 증산(甑山)에 있는 본성인 부산진성을 모성(母城), 이곳 범일동의 부산진지성(釜山鎭支城)을 자식의 성, 자성(子城)이라 하였다. 이 자성(子城)에 장대(將臺)가 설치되어 있는 곳이 자성대(子城臺)이며 공원이 조성되어 자성대공원(子城臺公園)이라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자성대(子城臺)가 일본식 성곽 표기라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되면서 2021년 7월부터 '부산진성공원'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그래서 '자성대공원'은 이제 '부산진성공원'이라 불린다.
부산진성(釜山鎭城, 부산광역시기념물 제7호)
부산진은 조선 태종 7년(1407) 우리나라의 동남 해안을 방어하기 위하여 경상좌도(慶尙左道) 수군 사령부가 주둔하던 군사적 요충지로, 성종 21년(1490)에는 많은 병선과 수군, 그리고 물자를 보호하기 위하여 증산(甑山) 아래 부산진성을 쌓았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 일본군 장수 모리 테루무토(毛利輝元)가 부산진성을 파괴하고, 증산 정상에 본성(本城)인 증산 왜성(倭城)을, 본성을 방어하기 위하여 동남쪽 해안가에는 지성(支城 : 원래의 성 밖에 보조로 쌓은 성)을 쌓았다. 난이 끝난 뒤 선조 40년(1607) 조선 수군은 진을 지성으로 옮겨 이를 부산진성으로 사용하였다. 당시 사용했던 부산진성의 둘레는 약 2.25km로 동서남북에는 각각 진동문(鎭東門), 금루관(金壘關), 진남문(鎭南門), 구장루(龜藏樓)라는 문을 만들고 문루(門樓 : 성문 위에 세운 높은 집 또는 다락)를 두었다. 성내 정상부에 있던 자성대(子城臺)에는 정유래란 때 참전한 명나라 장수 만세덕(萬世德)을 추모하는 만공단(萬公壇)을 조성하기도 하였다. 그 뒤 일제강점기에는 시가지 정비계획에 따라 성을 철거하면서 옛 모습이 거의 사라졌으나 1974년 부산진성 정화사업 때 정문인 건춘문(建春門, 옛날 진동문)과 서문인 금루관, 장대(將臺)인 진남대(鎭南臺)를 복원하였다.
부산진성은 죽음을 무릅쓰고 나라를 지킨 선열들과 조선 수군의 500년 역사를 고이 간직한 곳이다. 또한 임진왜란 당시 쌓은 왜성과 이후 왜성을 이용해 조선후기에 쌓은 수군진성을 연구할 수 있어 자료사적 가치 매우 큰 것으로 평가된다.
'부산진성공원'에 오르지 못하고 급히 자성공원로를 따라가다가 부산진시장 앞 교차로에서 왼쪽으로 꺾어 범일로로 내려간다. 부산진시장의 육교가 특이한 형태로 인상적이다.
안타깝게도 이 육교는 2021년 10월 철거되었다고 한다.
앞에 보이는 산 중턱에 데레사여고 건물이 보인다. 앞으로 난 길은 진시장로이고, 좌우의 길은 범일로, 두 길이 교차한다. 남파랑길은 육교 왼쪽으로 내려가 데레사여고 방향의 진시장로를 따라가서 지하보도를 건넌다.
부산진시장은 부산 최대 재래시장의 하나로 이곳에 조선시대 때 부산진이 있었다 하여 이름을 부산진시장이라 하였다. 영조 46년에 편찬된 《동국문헌비고》에 보면, "부산진성 서문 밖에 4일, 9일장의 정기시장인 부산장이 있었고 포목이 전국적으로 유명하다"고 했다. 부산장은 읍내(2, 7일), 좌수영장(5, 10일 또는 3, 8일), 독지장(1, 6일), 하단장(5, 10일)과 함께 부산장은 읍내 체계를 이루고 있었다. 개항기 이후에 일본인 거류지역과는 달리 초량과 부산진은 한국인들이 다수 거주하였다.
현재 2,000여 명의 상인이 장사를 하고 있으며, 주업종은 포목, 피목, 기성복, 양복지, 침구, 신발 등이다. 특히 혼수전문시장으로 명성이 높아 부산권뿐만 아니라 경남권의 고객을 위하여 쇼핑버스를 운행하고 있다. 재래식 건물이어서 냉난방 시설이 미비한 점 등 환경문제가 다소 취약하나, 지하철 범일동역을 끼고 있어, 교통시설이 편리하다.
인근의 자유시장, 평화시장과 더불어 부산의 3대 도매시장이라 할 수 있는 부산진시장은 시장으로의 면목을 갖추어 손님을 받기 시작한 지도 구한말기부터라고 하니 벌써 100년이 넘었고, 곡물, 건어물, 토산물 등의 집산지로서 5일장이 선 것이 임진왜란 전부터라고 하니 오랜 역사와 전통으로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부산진시장지하보도를 통과하여 데레사여고 입구에서 왼쪽으로 꺾어 080안경점 앞을 통과하여 일신기독병원 방향으로 진행
호주 장로교 한국선교회에 의하여, 종교적 가치에 따라 그리스도의 봉사와 박애 정신을 구현하기 위한 진료 사업을 펼치기 위하여 설립되었다. 1952년 9월 17일 좌천동에 일신부인병원을 개원하였다. 1956년 3월 2일 동구 좌천동 471-1번지로 신축 이전하였고, 1968년 10월 1일 병원을 증축(109병상)하였다. 1982년 11월 10일 일신기독병원으로 변경하였고, 1984년 7월 2일 치과를 신설하고 200병상 규모로 증설하여 종합 병원으로 승격하였다.
1988년 6월 23일 부산·경남 모자 보건 센터를 개소하였고, 1994년 8월 29일 고(故) 장기려(張起呂, 1911~1995) 박사가 세운 청십자병원을 인수하여 수정동에 일신청십자병원을 개원(1996년 폐업)하였다. 1999년 1월 16일 화명동에 화명일신기독병원을 개원하였고, 2008년 4월 17일 호주 선교사였던 맥켄지의 이름을 딴 맥켄지 전문 진료 센터를 개소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공단(鄭公壇)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10호
정공단은 임진왜란의 첫 전투지였던 부산진성(釜山鎭城)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순국한 충장공(忠壯公) 정발(鄭撥) 장군과 그와 함께 목숨을 바친 분들을 위해서 비석을 세우고 제사를 지낸 제단이다.
영조 42년(1766)에 부산첨사(釜山僉使) 이광국이 부산진성에서 순국한 사람들의 충성심을 기리려고 그들이 순국한 장소인 이곳, 옛 부산진성(釜山鎭城) 남문터에 제단을 쌓았다. 이후 부산첨사들은 부산진성이 함락된 날인 음력 4월 14일이 되면 제사를 지냈다. 단의 중앙에는 정발 장군의 비, 서쪽에는 정발 장군의 막료였던 이정헌의 비, 동쪽에는 정발 장군의 첩인 애향의 비가 있다. 남쪽에는 여러 군민들을 모시는 비석이 있고 남쪽 계단 밑에는 충직한 노비인 용월의 단이 있다.
1895년에 첨절제사(僉節制使 : 벼슬의 이름 중 하나) 제도가 폐지되었는데 그 뒤 지역 주민들이 중심이 된 향사계(鄕絲契)에서 제사를 올렸다. 또한, 1907년에 순종이 남쪽 지방을 순시할 때 지방민들이 제사를 지내는 것을 보고 돈을 하사하여 향사를 계속 이어가게 하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때 민족혼을 일깨운다는 이유로 일본은 제단을 폐쇄하고 유물과 비품도 강제로 빼앗았다. 광복 후에는 다시 향사계가 조직되었고 옛 비석을 되찾을 수 있었다.
1948년에 제단을 새로 만들면서 뒤쪽으로 별단을 쌓아 옛 비석을 두었고, 2009년에 옛 비석을 땅에 묻고 제단을 정비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현재는 사단법인 정공단보존회에서 매년 음력 4월 14일에 제향(祭享 : 나라에서 지내는 제사)을 주관한다.
충장공 정발 전망비(忠壯工 鄭撥 戰亡碑),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64호
이 비석은 영조 37년(1761) 경상좌수사 박재하(朴載河)가 정발(鄭撥, 1553~1592) 장군의 공덕을 추모하려고 영가대(永嘉臺)에 세운 것인데, 일제강점기에 전차선로를 만들면서 영가대를 헐고 현재의 위치로 옮긴 것이다.
비의 앞면에는 ‘忠壯公鄭撥戰亡碑(충장공정발전망비)’라는 글자가 음각되어 있고, 뒷면에는 임진왜란 당시 정발 장군의 행적과 비를 세운 과정이 새겨져 있다. 또한, 좌측면에는 비석을 세운 날, 우측면에는 박재하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 비석은 임진왜란 당시에 부산진 전투에서 순절한 부산진 첨사(釜山鎭僉使) 정발의 업적과 나라에 대한 충성심을 기록하고 있을 뿐 아니라 만든 사람의 신분과 비석을 만든 의도가 뚜렷이 나타나 있다.
이 비석은 임진왜란 이후에도 부산 지역과 부산진이 국방의 중요한 지역이었음을 알려 주는 좋은 자료이다. 특히 구름사이로 두 마리 용이 마치 여의주를 다투는 듯한 모습을 역동적으로 표현한 이수(螭首 : 비석의 머릿돌)는 조각기법이 뛰어나 조각사적으로도 가치가 높다.
단의 중앙에는 충장공정발장군비(忠壯公鄭撥將軍碑), 그 왼쪽에는 정발 장군의 막료였던 이정헌의 贈左承旨李公庭憲碑(증좌승지이공정헌비), 동쪽에는 정발 장군의 첩인 열녀애향비(烈女愛香碑)가 있다. 서쪽 위에는 전망제공비(戰亡諸公碑), 그 아래에는 충복용월비(忠僕龍月碑)가 있다.
충장공 정발 전망비가 삼문 옆에 세워져 있고, 왼쪽 담벽에는 선정불망비들이 세워져 있다.
부산포는 현재의 동구 좌천동과 자성대 일대 부근을 가리킨다. 조선은 무질서하게 입국하는 왜인들의 통제를 위해 1407년(태종 7년) 부산포를 개항하고, 이곳에 왜관을 설치하여 교역 및 접대의 장소로 삼았다. 성종 즉위년인 1469년에는 동평현 관내 인근의 가마솥처럼 생긴 산 이름을 따라 이곳의 원 지명인 ‘富山浦(부산포)’가 ’釜山浦‘로 바뀌게 된다. 그리고 이곳에 첨사영(수군첨절제사영)이 들어서면서 왜구를 막는 중요한 국토 변방의 군사요지로 사용하였다. 이러한 부산포는 국방의 중요한 길목인 까닭에 임진왜란의 첫 결전지가 부산진성 전투였고, 적군도 임란 때 가장 용감한 장수로 정발 장군을 일컫는다.
부산진 교회는 초대 당회장 왕길지 목사를 기리기 위해 2007년 완공한 교육관을 '왕길지 기념관'으로 명명하여 기념하고 있다.
앵겔(Rev.Dr.Gelson Engel, 1868~1939, 王吉志)은 독일에서 태어나 1892년 6월 바젤선교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선교사로 1892년 인도에 파송되어 6년 동안 사역하면서 클라라와 결혼하였다. 1898년 아래의 나라 호주에 가서 하버드 중등학교 교장으로 2년간 봉직하였다. 때마침 빅토리아 장로교회 여선교사연합회에서 한국 선교에 능력 있는 목사를 찾고 있었는데 적임자로 선정되어 한국으로 오게 된 것이다. 엥겔은 32세이던 1900년 9월 19일 아내와 세 아이를 데리고 멜버른을 출발하여 10월 29일 부산항에 도착했다.
‘엥겔'과 비슷한 발음인 ‘왕길'에 ‘최고로 좋은 뜻’을 전한다는 의미를 덧붙여 자신의 한국 이름을 왕길지(王吉志)라고 지었다고 한다. 그는 부산(1900~1919)과 평양(1919~1938)에서 38년간의 한국선교를 끝내고, 1938년 가족과 함께 멜버른으로 돌아가 이듬해 1939년 5월 24일 7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1890년 미국북장로교 선교사 윌리엄 베어드는 미국공사 헤어드의 조력으로 부산진에 약 264㎡ 대지의 한옥을 확보하였다. 베어드는 부인과 함께 당시 공관에서 미국의 가족들과 자기 집에서 일하던 한국인 몇 사람과 예배드리게 되었던 것이 부산교회(후에 부산진교회로 개칭)의 시작이다.
일제 시기 학생들의 독립만세운동을 도운, 부산 일신여학교(현 동래여고)의 설립자인 벨레 멘지스(사진 오른쪽 맨 끝)와 교장 마거릿 데이비스, 교사 데이지 호킹 등 호주인 여성 3명이 내년 3월 1일,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을 예정이라고 한다. 1895년 10월 15일 호주 선교사 벨레 멘지스는 부산진 일신여학교를 설립했으며, 일신여학교는 호주 선교사들의 헌신과 노력으로 일본강점기 때 많은 독립운동가를 길러낸 모태가 됐다. 이들은 일제강점기 때 부산 최초의 만세 운동인 3.11 만세시위에 참여한 일신여학교 학생들을 인솔하고, 시위가 끝난 뒤에 학생 보호를 위해 태극기를 폐기하다 체포됐다. 이후에도 신사참배 반대 활동 등에 참여했다. 일신여학교가 주도한 ‘3·11만세시위’는 부산·경남지역 3·1운동의 효시가 됐으며, 이 시위에 참석한 교사와 학생 등 12명이 독립유공자로 서훈됐다.
부산진 일신여학교의 설립자 제임스 맥켄지 선교사는 1865년 호주에서 태어났다. 1910년 호주 장로교 선교사로 부산에 와서 선교와 교육, 의료 등 봉사활동을 시작하였으며 이때 매견시라는 한국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다. 그의 네 딸 중 매혜란, 매혜영 두 자매는 1952년 2월 13일 의료선교사로 한국에 입국하여 부산진교회 유치원을 빌려 1952년 9월 17일 좌천동에 일신부인병원(현 일신기독병원)을 설립하였다.
겨레여 우리에겐 조국이 있다./ 친구여 우리에겐 내일이 있다.
건물의 1층 외부는 석조이고 2층은 붉은 벽돌로 치장 쌓기가 되어있지만, 내부는 목재로 감싼 점이 특이하다. 건물 바깥에 벽돌을 쌓은 기술이 매우 뛰어날 뿐만 아니라 건물 정면의 계단과 2층 난간은 20세기초 서양식 건물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건물이 앉은 터는 약간 언덕을 이룬 곳인데, 2층에 남향으로 베란다를 두어서 건물이 만들어진 당시 부산항의 전경을 볼 수 있게 한 점도 눈여겨 볼만하다
부산의 근대건축물 대부분이 일제에 의해 지어진 것에 비해 부산진 일신여학교 건물은 호주인 선교사들이 지은 서양식 건물로서, 이러한 가치를 인정 받아 2003년 5월 2일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55호로 지정되었다.
부산진 일신여학교 건물은 1905년에 호주선교사들에 의해 건립된 양관으로서,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고, 비례와 균제미가 돋보이는 훌륭한 근대건축물로서, 부산·경남지역 최초의 신여성 교육기관이고, 3.1독립운동의 깃발을 처음으로 올렸던 독립운동의 산실로서 역사적·교육사적으로 매우 가치있는 문화재로 평가되고 있으며, 우리 동구에서는 2004년도에 국시비 6억원을 지원받아 지붕, 교실, 벽체, 담장석축 보수 등의 보수정비사업을 추진하여 2006년 6월 23일에 준공함으로써, 우리 고장 근대문화유산 보존전승에 크게 기여하였다.
국채보상운동은 1905년 을사조약에 의해 일제에게 국권을 빼앗기자 국민들의 분노가 절정을 이루던 시기인 1907년에 전개된 범국민적 저항운동이었다. 1907년 1월 대구에서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난 같은 해 3월 부산 초량객주를 중심으로 조직된 부산항상무회(釜山港商務會)의 회원들에 의해 동래부 국채보상일심회가 설립되었다.
이어, 같은 해 4월부터 7월까지 부산의 개항장을 중심으로 여성들이 주도한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났다. 부산 좌천리에서 조직된 감선의연부인회는 조석(朝夕)으로 반찬 값을 매일 3~4푼씩 감하여 감선(減膳) 모금하고자 결성된 부인회이다. 감선의연부인회(減膳義捐婦人會)는 취지서에 충군애국에는 남녀의 차가 없으므로 살림을 담당하는 자가 절용하믕로써 국채보상이라는 대업에 참여하겠다고 밝혔다.
국채보상운동의 여성참여는 여성들이 스스로 단체를 조직하고 구국항일운동을 벌인 최초의 사례이다. 이를 계기로 여성들은 다양한 독립운동 단체를 조직하고 활동을 벌이게 되었다.
서울의 3·1독립만세운동 소식을 접하고 독립선언서를 전달받은 일신여학교를 비롯한 동래고등보통학교와 부산상업학교는 부산에서의 시위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이를 탐지한 일경은 3월 11일 휴교를 단행하고 학생들을 강제 귀가시킴으로써 시위 발생을 원천차단하고자 했다. 이에 굴하지 않고, 일신여학교는 교사 주경애와 박시연이 중심이 되어 1919년 3월 11일 밤 9시 박정수, 김응수, 이명시, 김반수, 김봉애, 김복선, 송명진, 심순의, 김난줄 등 학생들이 만세운동을 펼치게 된다. 이에 일반 시민들도 함께 참여했다. 이는 부산지역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의 효시가 됐다. 시위에 참여한 교사 주경애와 박시연은 징역 1년 6개월, 9명의 학생들은 각 징역 5개월을 선고 받았다.
일신여학교의 만세 시위는 당시 부산상업학교와 동래고등보통학교가 일경의 엄중한 감시로 시위가 무산된 시점에서 벌어진 부산 여성들의 항일구국운동이었다. 또한 일신여학교의 교사와 학생들의 시위에 그친 것이 아니라 당시 좌천동 일대의 주민들에게 영향을 주어 그들을 시위에 참여시켰고, 부산을 비롯한 경남 지역으로 만세시위를 파급시켰다.
吾等(오등)은 玆(자)에 我(아) 朝鮮(조선)의 獨立國(독립국)임과 朝鮮人(조선인)의 自主民(자주민)임을 宣言(선언)하노라. 此(차)로써 世界萬邦(세계만방)에 告(고)하야 人類平等(인류평등)의 大義(대의)를 克明(극명)하며 此(차)로써 子孫萬代(자손만대)에 誥(고)하야 民族自存(민족자존)의 正權(정권)을 永有(영유)케 하노라.
민족대표는 각 교파별로 선정되었다. 천도교측에서는 손병희(孫秉熙)·권동진(權東鎭)·오세창(吳世昌)·임예환(林禮煥)·나인협(羅仁協)·홍기조(洪基兆)·박준승(朴準承)·양한묵·권병덕(權秉悳)·김완규(金完圭)·나용환(羅龍煥)·이종훈(李鍾勳)·홍병기(洪秉箕)·이종일(李鍾一)·최린(崔麟)의 15명이, 기독교측에서는 이승훈·박희도(朴熙道)·이갑성(李甲成)·오화영(吳華英)·최성모(崔聖模)·이필주(李弼柱)·김창준(金昌俊)·신석구(申錫九)·박동완(朴東完)·신홍식(申洪植)·양전백(梁甸伯)·이명룡(李明龍)·길선주·유여대(劉如大)·김병조(金秉祚)·정춘수(鄭春洙)의 16명이, 불교측 대표로서는 한용운(韓龍雲)과 백용성(白龍成)의 2명이 서명·날인했다.
박재혁(朴載赫, 1895~1921)은 1895년 5월 17일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에서 1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5세 되던 해에 아버지가 죽고 어머니, 여동생과 생활하였다. 태어나서 부산공립상업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부산에서 성장하였다. 1911년 3월 22일 사립육영학교(현 부산진초등학교)를 수료하였고 1915년 3월 22일 부산공립상업학교를 제4회로 졸업하였다.
1920년 9월 14일 고서적 상인으로 위장하고 부산경찰서로 찾아간 박재혁은 부산경찰서장과 직접 대면하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경찰서 2층 서장실에서 하시모토 서장이 고서에 한눈을 파는 사이 숨겨온 폭탄을 꺼냈다. 그리고 하시모토 서장을 향해 준비해 온 전단을 보이며 자신이 의열단임을 밝히고 폭탄을 던졌다. 이때 하시모토 서장은 중상을 입어 사건이 일어난 지 오래되지 않아 사망하였다.
박재혁은 부산지방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 받고, 대구복심법원을 거쳐 경성고등법원에서 1921년 3월 31일 사형을 최종 선고 받았다.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어 혹독한 고문과 폭탄 투척 당시의 상처로 고통을 겪는 와중에 폐병까지 얻게 되었지만 기개는 꺾이지 않았다. 일제에 의해 욕되게 죽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단식에 나서 사형이 집행되기 전인 1921년 5월 11일 대구형무소에서 사망하였다.
최천택(崔天澤, 1896~1961)은 1896년 6월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에서 2대 독자로 태어났다. 부산공립상업학교 2학년 때인 1912년 당시 금서였던 『동국 역사(東國歷史)』를 절친한 학우들인 박재혁(朴載赫)·김병태(金鉼泰)·김흥규(金興奎)와 돌려가며 읽고 다른 친구들에게도 돌린 것이 발각되어 10여 일간 구속되었다. 윤독회를 통해 결속을 다진 학우들과 함께 북로군정서의 국내 연락을 담당하고 유사시 항일 비밀 결사대로 전환한다는 목적 아래 1913년 비밀 결사인 구세단(救世團)을 조직하였다.
1919년 3·1 운동 당시 과거 구세단 동지를 통해서 정보를 입수하여 울산, 경주, 포항 등지에 3·1 운동 상황을 알렸다. 부산에서 다시 시위를 일으키기 위해 서울에서 지하 신문으로 발행되던 『독립신문』을 등사해 집집마다 뿌리면서 3·1 운동을 다시 선동하였다. 또 1920년 과거 구세단의 동지였던 의열단원 박재혁의 부산경찰서 폭파 사건을 함께 모의하였으며, 1920년 12월 최수봉(崔壽鳳)의 밀양경찰서 폭파 사건과 1923년 강홍렬의 의열단 군자금 모집 사건에도 연루되어 일본 경찰의 혹독한 취조에 시달렸다. 이와 같이 최천택은 의열단원의 국내 활동에 상당한 연계를 맺고 있었다. 또한, 1924년에 김국태와 시대일보사 부산지국을 설치해 언론 운동을 전개하였다. 1925년 친일 종교 단체인 보천교(普天敎)에서 시대일보사를 인수하려 하자 전국 지국의 단결을 조성하여 이를 무산시켰다.
부산 지역에서 활발한 사회운동을 전개한 최천택은 일제강점기에 54차례 구금, 구속되었으나 온갖 협박과 고문에도 굴하지 않는 강한 의지를 보여 주었다. 1960년 4·19 혁명 이후 혁신동지총연맹의 최고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부산시 동구 을구에 출마하였으나 혁신계의 난립으로 낙선하였다.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로 군사 정권이 들어서자 서면 육군형무소에서 수개월간 구금되었다가 풀려났다. 육군형무소에서의 후유증 때문인지 1961년 11월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 자택에서 파란 많은 생을 마감하였다.
장건상(張建相), 1882~1974)은 1882년 12월 19일 경상북도 칠곡군에서 네 아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장건상의 집안은 장건상이 태어난 이듬해인 1883년 부산진의 좌천 마을(현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 311번지)로 이사하여 부산에 정착하였다. 어린 시절과 독립운동을 하던 시기에 장명상(張明相)이라는 이름을 쓰기도 하였다. 1919년 3·1독립만세운동 이후 김규식(金奎植), 여운형(呂運亨), 이시영(李始榮) 등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국민대회 준비위원으로 활동하였고,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외무위원과 외무부 차장으로 선출되어 외교활동을 수행하였다. 1945년 4월 김구(金九)의 밀명을 받고 좌우합작 대동단결 협상을 위해 조선독립동맹이 있던 옌안(延安)으로 가서 김두봉(金枓奉) 등을 만나던 중, 1945년 8월 15일 조국의 해방을 맞이하여 1945년 12월 3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의 한 사람으로 귀국하였다.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자 혁신당을 조직하고 통일운동에 나섰으나,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로 구속되어 5년형을 선고 받고 복역하다가 특사로 풀려났다. 이후 칩거해서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의 오두막집에서 어려운 생활을 하다가 1974년 5월 14일 92세로 사망하였다. 장례식은 사회장으로 열렸다. 장건상은 자주적 통일정부를 위해서는 남북협상을 성사시켜야 한다는 신념으로 정부 요직의 진출보다는 일생을 좌우합작운동과 남북협상운동에 전력을 기울였다. 이데올로기의 터부로 인해 오랫동안 백안시되다가 뒤늦게 독립운동의 공훈을 인정받았다.
안용복(安龍福)은 숙종대 사람으로 현재의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좌천동에 거주하였다. 신분은 사노비였으며, 주인은 서울에 거주하였다. 당시 좌천동에는 초량 왜관으로 이주하기 전의 왜관인 두모포 왜관이 있었다. 이러한 주거 환경 덕분에 안용복은 일찍이 일본어를 습득할 수 있었다. 그는 동래부에 설치된 경상 좌수영의 수군 병졸로서 전선의 노를 젓는 병졸이었으며, 어업을 생업으로 하였다. 안용복은 1693년과 1696년 두 차례에 걸쳐 일본으로 가서 울릉도 및 독도의 조선 영유권을 주장한 인물로서 조선 후기 『성호사설(星湖僿說)』의 기록을 통해 널리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독도는 일본의 한국침략에 대한 최초의 희생물이다. 해방과 함께 독도는 다시 우리 품 안에 안겼다. 독도는 한국독립의 상징이다. 이 섬에 손을 대는 자는 완강한 저항을 각오하라! 독도는 몇 개의 바윗덩어리가 아니라 우리 겨레 영해의 닻이다. 이것을 잃고서야 어찌 독립을 지킬 수가 있겠는가. 일본이 독도를 탈취하려는 것은 한국에 대한 재침략을 의미하는 것이다.
- 변영태 외무부장관 독도관계 특별성명(1954.10.28) 발표문 中
안용복 장군의 1차 도일을 계기로, 조선 조정은 일본 막부를 대행한 대마도주와 울릉도·독도의 영유권과 어업권을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짐. 1696년(숙종 22) 1월 일본 막부는 울릉도·독도를 조선의 영토로 인정하고 일본 어민의 도해와 어업활동 금지를 결정함.
안용복은 두 차례에 걸쳐 도일하였다. 첫번째는 일본 오오야 가문의 어부들에게 강제로 피랍된 것이며, 두번째는 1696년 자발적 행위에 의한 도일이다. 이 두 차례 도일 결과 일본은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영토라는 것을 인정했으며, 조선은 두 섬의 영유권과 조업에 관한 권리를 공고히 할 수 있었다.
1차 안용복의 피랍(1693)
1693년 울릉도 인근에서 고기를 잡던 안용복 일행은 불법조업 중이던 일본 오오야 가문의 어부들과 조업권을 두고 대립하다 그들에게 피랍되어 일본으로 끌려갔다. 안용복은 일본에서 자신의 납치와 구금에 항의함과 동시에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따이라고 주장하였다.
2차 안용복의 도일(1696)
국가의 허락 없이 월경을 했다는 죄목으로 2년 간 옥살이를 하고 나온 안용복은 1696년 울산 출신의 어부들, 전라도 승려 뇌헌 등 11명을 태우고 울릉도로 향했다. 안용복은 울릉도와 독도에서 어로활동을 하고 있던 일본인을 몰아내고, 그들을 뒤쫓았다. 그는 미리 준비한 관복을 입고 배에 '조울양도감세장(朝鬱兩島監稅將)'이란 깃발을 달았으며, '조선팔도지도'를 지참하여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땅임을 주장했다.
2차 안용복의 도일 과정이 과연 역사적 사실일까? 지도제작자이자 독도연구간인 안동립씨의 글을 소개한다.
"뇌헌 스님 일행이 1696년 음력 3월 초 8명을 태우고 전라좌수영에서 출발, 부산포에서 안용복 장군을 태우고 흥해, 영해로 항해하여 10척의 선단을 꾸려 울릉도로 갔다. 안용복은 '조울양도감세장신안동지기(朝鬱兩島監稅將臣安同知騎)'를 뱃전에 세우고 갔다. 당상관 벼슬이다. 울릉도에서는 어로행위를 하는 왜의 어선을 쫓아낸 후 왜의 막부가 있던 돗토리현 번주를 찾아가 따져서 서계를 받아냈다. 당시 뇌헌은 54세, 안용복은 43세이다."
- 지도제작자·독도연구가 안동립의 글
전시물에는 일행이 안용복, 김과가, 뇌헌, 행습, 이패원, 유상공, 유봉석, 등담, 영율, 단책 등 10명만 적혀 있다. 더 확실한 고증이 필요하고 이를 바탕으로 전시물을 작성해야 한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이 제공한 <향토문화전자대전>에 의하면 뇌헌은 순천의 승려로 동래 사람 안용복, 흥해 사람 유일부, 영해 사람 유봉석, 평산포 사람 이인성, 낙안 사람 김성길, 연안 사람 김순립과 순천의 승려 승담, 연습, 영률, 단책 등과 함께 배를 타고 울릉도에 가서 일본국 호키주에 들어가 왜인과 송사하였다. 그 후 양양현 지경으로 돌아왔으나 나라의 허락 없이 외국을 출입했다는 이유로 강원감사 심평이 잡아가뒀다." - 오마이뉴스, 2018.6.18
멀리 뒤쪽에 영도구의 봉래산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