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억새와 단풍의 어울림, 다이나믹 간월산, 신불산, 영축산을 가다
1. 일자 : 2010. 10. 23 (토)
2. 장소 : 간월산(1084m), 신불산(1209m), 재약산(1059m)
3. 행로 및 시간
[배내고개(12:14, 680m) -> (나무계단) -> 오두봉 갈림(12:38) -> 배내봉(12:45, 965m) -> 간월산(13:53, 1084m) -> (중식) -> 간월재(14:25) -> (계단 오르막) -> 전망데크(14:58) -> 신불산(15:07, 1209m) -> (억새평원) -> 신불재(15:25) -> 영축산(16:09, 1059m, 통도사 5.2km) -> 매점(16:32) -> 골프장(17:00) -> 통도사 주차장(17:50)]
< 영남알프스 산행을 준비하여 >
경남 동부지역에 위치한 1000m 이상의 산군들로 이루어진 영남알프스는 내게 늘 로망으로 자리잡고 있다. 지난해 이맘때 천황산과 재약산을 다녀왔다. 당시 산행일기 에필로그에 이런 글이 쓰여져 있다. “천황재약산은 훗날 색채의 변화로 기억될 것이다. 오전 희뿌연 안개로 아침을 맞았고, 버스 차창에서 바라다 보는 남녁의 산야는 황금색 물결로 넘실댔다. 배내고개에 도착해서 바라 본 밀양의 산야는 여전히 연무에 쌓인 회색 빛이었으나, 산에 올라 돌아 본 능동산은 비로소 노란색 단풍을 선물해 주었다. 샘물상회에서 시작되는 사자평원의 억새밭은 세상을 온통 금빛 물결로 변화시키더니, 재약산에서 바라보는 초원은 해질녘의 햇살을 받아 주황빛 물결로 변화되었다. 하산길 층층/홍룡폭포는 검은빛을 띄었고, 주변 암벽과 어우러진 울긋불긋한 단풍은 가을의 진수를 알리기에 충분하였다. 하산 후 표충사에서 올려다 보는 산야는 검은빛 실루엣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 영남알프스 산행은 오늘이 시작일 뿐이다. 가지, 영축, 신불, 간월 등 또다른 진산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으니 말이다.”
만 1년이 지난 지금도 영남알프스는 황금색 억새와 주홍빛 석양으로 내게 다가오고 있다. 사람의 오감은 참 미묘하여 먼 기억 저편의 것들을 현실화 시켜주는 마력을 지니고 있다. 천황산 사자평에서 바람에 넘실되던 억새의 밋밋한 냄새는 이상하게도 바다를 추억하게 만들고, 재약산 바위 넘어 비치던 주홍빛의 추억은 지금도 눈앞을 어른거린다.
그날의 감격을 재현하고파 다시 영남알프스를 찾는다. 오늘 코스는 배내고개-간월산-신불산-영축산-통도사 코스다. 당초 예정되었던 자수정 동굴나라-신불공룡능선-신불산-영축산-통도사 코스에서 간월산이 추가되어 반갑다. 산행 지도를 살핀다. 산행 들머리인 배내고개는 예전에 가 본 곳이다. 예서 배내봉을 넘어 간월산에 오른 후 주 능선을 타고 신불산에 올라, 억새 능선을 따라 영축산에 오르고 비로암을 거쳐 하산하면 약 6시간 정도가 소요될 것이다. 이는 동강산악회 홈페이지에 게시된 코스 기준인데, 지도를 자세히 살피니 영축산에서 하산하는 길을 비로암 방향으로 잡으면 통도사 밑을 지나게 되어 있어, 심신이 지친 상태에서 다시 되 집어 통도사에 들리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차리리 영축산 정상에서 시살등 방향으로 가다가 지능선을 타고 관음사 방향으로 하산하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물론 산악회에서 비로암 방향으로 하산 길을 잡은 이유가 있겠지만, 나는 통도사를 위해 나의 길을 갈 예정이다. (실제는 시간이 늦어 결국 산악회 안내 코스로 내려왔고, 통도사와는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오늘 산행에서도 유서 깊은 고찰을 찾는다. 영취산 또는 취서산으로 불리는 영축산은 우리나라 3대사찰(법보사찰 해인사, 승보사찰 송광사)인 불보사찰 통도사를 품은 산이다. 7세기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가 중국에서 부처님 진신사리를 가장 먼저 봉헌한 곳이 바로 통도사 금강계단(金剛戒壇)이다. 통도사 일주문 현판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겨져 있다 한다. "나라의 큰절이요. 불가의 맏형(國之大刹佛之宗家)”. 직접 찾아 확인해 보아야겠다.
< 희망사항 >
작년 천황산 오름길, 정상 전 바위 전망대에서 우측으로 보이던 구름 낀 영남알프스의 산군 간월산, 신불산, 영축산의 전경이 눈 앞에 어른거린다. 연무가 끼어 어렴풋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영남알프스의 위용을 알기에는 충분했다. 당시 가보지 못한 산에 대한 아쉬움이 그리움이 되고 오늘 당시의 스스로에게 한 약속을 지키려 한다.
사실 영남알프스의 전모는 다녀 온 2개의 산과 오늘 가야 할 3개의 산으로도 다 알지는 못할 것이다. 그래도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기분은 늘 셀렌다. 오늘 산행의 목표는 ‘억새+’이다. 영남알프스의 아이콘 가을 억새는 당연한 것이고, 그것에 더해 어떤 감동이 내게 밀려올까 하는 기대가 새롭다. 이 좋은 가을 산하의 풍경을 나 혼자만 보는 것이 늘 아쉽다. 다음 등산에는 길동무라도 한 명 마련해야겠다.
지난 주 조계산 산행일기에 산과 절의 관계에서도 말했듯이, 산과 절은 불가분의 관계다. 국내 최고의 명찰은 ‘적멸보궁을 품은 5대 사찰’과 ‘불보, 법보, 승보의 3대 보찰’을 들 수 있는데, 적멸보궁을 품고 있으면서 3대 보찰 중 하나인 곳이 바로 ‘통도사’이다. 오늘은 지난 오대산 상원사에 이어 두번째의 ‘적멸보궁’ 사찰이자, 3대 보찰 중 마지막 남은 법보 사찰을 찾을 수 있는 영광이 내게 찾아올 것이다. 부처님의 진신사리와 가사를 모신 ‘금강계단’은 적멸보궁 중에서도 그 첫 번째의 명성을 자랑하고 있다. 하산 길, 통도사에서 산행 완주의 성취감과 가을날 해질녘의 정취에 흠뻑 취해 보고 싶다.
< 영남알프스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
먼 길을 떠나는 아침이다. 울산, 언양, 양산이라는 지명이 아득하다. 지난해의 기억이 이곳에서는 시간을 잊으라 한다. 괜히 긴 등산 시간과 돌아올 시간에 조바심을 내면 좋은 산행을 망칠 수 있다고.
평소보다 일찍 버스에 오른다. 오늘따라 산악회 버스가 제 시간에 온다. 체 7시가 되지 않았다. 버스는 지난 번과는 달리 몇 자리 빈 좌석이 보인다. 수요일 등산 신청 시 이번에는 뒷자리가 싫다고 했더니 오늘은 중간 자리를 주었는데, 뒤 쪽에 빈 자리를 보니 성급함이 후회가 되었다. 곁에 어르신이 한 분 앉아 계시다. 언뜻 보기에도 연세가 지긋하시다. 우리 아버지보다도 더 나이가 들어 보인다. 체구도 작으시다, 그 몸으로 어찌 먼 길을 가려는지 걱정이 들었지만, 산행은 체구가 아니라 관록으로 하는 것임을 알기에 안쓰러움이 베테랑을 보는 존경심으로 변한다.
괴산 부근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영천 가까이에서 한 번을 더 쉬고, 언양IC로 나왔다. 버스는 언양 외곽을 지나, 작년에 지났던 배내고개를 오른다. 배내고개 부근은 작년에도 공사 중이었는데, 1년이 지난 올해도 여전히 공사 중이어서 어수선하다. 남녘에 내려오니 해가 바뀌어도 시간이 느리게 흐르고 있음을 느낀다.
배내고개에 도착했다. 12시가 훌쩍 지났다. 길 건너 능동산에서 시작되는 천황산, 재약산으로 흐르는 능선이 아스라하다. 오늘도 날씨는 흐리다. 자! 이제 먼 길을 가 보자.
< 배내고개에서 간월산 >
배내고개, 배 속처럼 구불구불하다고 붙여진 이름일진데, 실제 올라보면 그렇지는 않다. 등산로 초입은 20여분 이상을 올라야 하는 긴 계단 오르막이다(12:14). 지난 해 능동산 방향도 오르막이었지만, 널찍한 임도 였는데 대조가 되었다. 같은 산도 들머리에 따라 길 사정이 변함을 확인한다.
5시간이 넘는 긴 버스 여행 탓에 다리가 쉽게 산에 적응되지 않는다. 긴 오르막이 버겁다. 그래도 배내고개의 고도가 680m 수준으로 965m의 배내봉에만 가면 오늘 산행에서 고도에 대한 부담은 크게 없을 것이라는 희망으로 힘겨운 발길을 앞으로 내딛는다. 배가 고파온다. 갑자기 허기 수준으로 공복의 고통이 밀려온다. 멀건 북어국에 말아 먹은 아침 밥에 별 영양소가 없었나 보다. 비상식량으로 준비한 비스킷을 먹으며 걷는다. 이 음식이 체내에 흡수되면 힘이 날 것이다.
철도 침목으로 일정하게 만든 계단을 힘겹게 오르자 오두봉 갈림이 나온다(12:38). 올라 온 방향 뒤쪽으로 가지산, 운문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보인다. 흰색 바위 봉우리가 쌀바위인가 보다. 멀리서 보기에는 유순해 보이지만 가까운 곳에서는 제법 험준할 형세이다. 좌측으로는 천황산, 재약산 산줄기가 유순하게 흘러가고 있다. 모두 1000m가 훌쩍 넘는 고산준령이지만 멀리서 보니 부드럽기 그지없다.
< 천황, 재약 능선 / 가지, 운문능선으로 배경으로 >
가야 할 방향으로 단풍으로 물 들어가는 배내봉의 봉긋한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좌측으로 언양 시가지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평온한 휴일 오후의 풍경이 느껴진다. 비스킷을 입에 넣고 걷는다. 목이 마르다. 관성이 걸음의 멈춤을 허락하지 않는다. 등산 초입 너무 이른 휴식은 산행 전체에 독이 됨을 알기에 미련스럽지만 그냥 걷는다. 길가에 억새가 하나 둘씩 보인다. 능선 전체에 퍼져 있을 황홀함의 전조일 것이다. 작은 언덕을 넘어 오늘의 첫 목표 배내봉에 도착했다(12:45). 배내고개를 출발한지 35분 정도가 소요되었다. 오늘 코스의 소요시간은 6시간이 넘는 것이 일반적 계산인데, 산행대장은 늦은 버스 도착 시간을 만회하고자 5시간 20분만의 주파를 부탁하고 있다. 죽었다 하고 쉼 없이 계속 걸어야겠다.
배내봉에 올라 바라보는 풍경은 장호
선생이 백대명산기에서 설명한대로 “남으로 치닫는 영마루는 멀리서 보면 그저 밋밋하게 흐르는 듯도 싶지만, 때때로 생각난 듯이 불끈불끈 봉우리로 치솟기도 하니 그것이 이른바 등성이요 부리이다.” 일단 간월산으로 향하는 길의 풍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참나무
낙엽 사이로 보이는 능선상의 삼각형 봉우리가 제법 험상궂은 형상으로 주위의 이목을 끌어보려 하고 있으나, 순한
본성은 숨길 수 없어 보인다. 그 뒤로 간월산으로 추정되는 산이 검은 실루엣으로 뒤를 바쳐주고 있다. 몇 년 전 봄 황매산에서 본 산의 형상과 풍경과 유사한 모습이다.
< 배내봉에서 간월산 가는 길의 풍경 >
좌측으로 언양 시가지의 모습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멀리 아스라이 보이는 산 밑으로 누런 벼들이 보이고, 군데군데 저수지도 있고, 눈에 성가시지 않은 키 낮은 건물들이 주변 자연과 잘 어울리는 모습이다. 전체적인 색채는 누런 색 톤이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평화로워 보인다.
길은 배내봉을 지나며 대세 하강세다. 긴 내리막이 길게 이어지더니 이내 평지가 나오고 다시 오름을 처 오른다. 삼각형 형태의 고개를 오르고, 1시 25분경 억새밭을 지난다. 햇살을 받아 넘실대는 억새 뒤편으로 보이는 산이 간월산 일 것이다. 길 우측으로 뱀처럼 구불구불한 간월재 도로가 보이고, 그 뒤편으로 천황산과 재약산의 모습이 보인다. 산 허리 부근에 붉은 지붕의 자연휴양림 건물이 랜드마크의 역할을 해 주고 있다.
정상 밑 바위전망대에 잠시 들른다. 부부로 보이는 젊은 남녀가 다정한
모습으로 앉아 있기에 사진을 부탁한다. 즐거운 표정으로 사진을 찍어 준다. 부부가 함께 산에 다니면 좋겠다 했더니, 여자가 부부가 아니란다. 두 사람의 얼굴이 닮았다 하며 좋은 연이 이어질 것이라 하니 남자가 좋아한다.
빈 말이 아닐 것 같다. 전망바위에서 숨을 고른 후 바위 길을 힘껏 오르니 드디어 간월산
정상이다(13:53).
< 간월산 부근 억새밭 / 간월산 정상에서 >
< 간월산에서 신불산 >
간월산 정상은
< 간월재 가는 길의 모습 / 간월재에서 >
간월산에서 간월재 길로 내려선다. 멀리 간월재까지 긴 내리막이 완만하게 그려지고 석탑을 기준으로 안부 중앙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다. 하늘에는 행글라이더가 난다. 오전에 흐리던 날씨는 맑게 개어 있다. 울긋불긋 단풍들이 멋진 경치에 한 몫을 더해 주고 있다. 참으로 풍요로운 모습이다. 간월재 내리막 끝, 전망데크에는 가족 단위의 행락객들이 많다. 차로 간월재까지 올라온 모양이다.
억새와 행글라이더, 단풍에 더해 간월산에서 간월재 그리고 다시 간월재에서 신불산으로 이어지는 주변 풍경은 마치 천국이 있다면 이럴 것이다 하고 느낄 만큼 이국적이고 풍요롭다. 우리나라는 참 멋진 곳을 많이 품고 있는 나라로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가야 할 신불산 방향의 풍경도 좋지만 돌아 본 간월 산 주변의 풍경도 멋지다. 다시 보니 간월산은 제법 많은 암릉을 보유하고 있나 보다. 암봉 주변으로 단풍의 색이 참 곱다. 그 위로 행글라이더가 날고 있다. 이 아니 멋진 풍경일소냐? 모든 것이 수도권 일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 아니다. 간월재 중간에 돌탑을 지나고도(14:25) 한참을 주변의 경관을 감상하고 많은 사진을 찍는다.
< 간월재에서 본 풍경 >
충분히 쉰 후 다시 계단 오르막을 따라 신불산으로 향한다. 제법 가파르고 긴 계단을 즐거운 마음으로 오른다. 밥도 먹고 좋은 경치를 보았고, 더 좋은 광경들이 앞으로도 펼쳐진다는 생각에 다리에 힘이 솟는다. 때로 무리하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빠르게 걸어본다. 돌아보는 신불재와 간월산의 모습이 점점 멀어진다. 그 모습이 아쉽다기 보다는 새로운 희망으로 다가 온다.
간월재의 모습이 눈에서 완전히 멀어짐과 동시에 신불산으로 향하는 능선이 눈에 들어온다. 길은 걷기에 그만이다. 우측으로는 여전히 천황-재약의 모습이 보인다. 작년에는 오더니 올해는 안 올 것이냐고 묻는 것 같다. 신불산 정상이 빤히 보이는 전망데크에서 사진을 한 장 찍는다(14:58). 즐거워 보이는 일가족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신불산으로 향한다. (이 가족은 포항에서 온 분들인데 딸 둘이 무척이나 잘 걸었다. 부모와 헤어져 잠시 나와 함께 걷게 되었는데 지나는 사람들은 내게 딸들과 산행을 해서 참 좋겠다 한다. 내 친딸은 아니지만 그들과 걷는 것은 기분 좋은 경험이었다.)
3시가 지나서 오늘 마지막으로 올라야 할 영축산의 모습이 눈 앞에 모습을 드러내더니 이내 신불산 정상에 다다랐다(15:07). 커다란 돌탑과 백여 명이 쉬어 갈 수 있는 너른 나무데크 쉼터가 시선을 끈다. 오늘 산행에 최고봉에 도착했다. 사위가 내 발 아래다. 영축산으로 향하는 능선이 곱게 그리고 길게 눈 앞에 펼쳐진다. 신불평원이다. 왠지 미구에 밟게 될 길이 포근해 보인다.
영남알프스는 낙동정맥 상의 산들의 집합적 명칭으로, “이들 산을 하나의 산군으로 묶는 동질적 요소는 산등성이의 드넓은 억새밭이다. 고산 평원은 사람의 마음을 그곳을 지나는 바람의 크기로 확장시킨다. 거침없이 지나면서도 점령군 행세를 하지 않는 바람처럼 조금의 소유욕도 없이 천하를 얻은 듯한 기분에 젓어들게 한다. 일단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은 쉽게 다가온다. 모든 것이 한 눈에 들어온다. 보는 만큼 다 내 것이다.” 지난 여름 월간 산에서 신불산을 다녀 온 분이 쓴 글을 인용한 것인데, 억새가 이는 가을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표현이다. 억새의 색이 녹색에서 누런 색으로 바꿨을 뿐이다.
< 신불산 정상에서 / 신불산에서 본 영출산 능선 >
< 신불산에서 영축산 >
신불산은 배내봉에서 시작되는 능선상의 최고봉이다. 정상에 서니 큰 형의 풍모가 보인다. 문뜩 ‘영남알프스’라는 이름에 의문을 가져 본다. 유럽 최고 산 알프스에서 따온 이름이라는 것은 알겠는데, 우리 선조들이 본디부터 이 이름을 쓰지는 않았을 것이고, 왠지 일본의 북알프스라는 단어가 영 기분 나쁘게 뇌리에 스친다. 혹 영남알프스의 이름이 왜색의 흔적이 아닐까 하는 불길한 느낌이 든다. 우리의 멋진 산이 일제시대에 왜놈들에게 차출 당해, 이름이 마음대로 난도질 당한게 아닌가? 명명의 배경도 모른 체 이국적이라는 그리고 이미 일반화되었다는 미명 아래 아무 생각 없이 ‘영남알프스’라는 이름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고 나니 이 이름에서는 누구 말대로 “남의 밥에 든 콩을 바라보는 가난한 눈길이 느껴져서 마음 한 귀퉁이가 그늘진다. …당장 아니 언제나 중요한 일은 내 밥의 콩을 꼭꼭 씹어 먹는 일이다.” 표현이 딱 들어 맞는다. 나부터 영남알프스라는 왜색적이고 서양 사대주의적 명칭을 이제부터는 버려야겠다. 우리의 정서가 남아 있는 배내봉, 간월산, 신불산, 영축산의 이름을 ‘알프스’에서 구출해 내야겠다. (앞에 쓴 산행기에서 제목에서만 알프스를 제거하고 본 내용의 부분은 그대로 둔다. 문맥상 어색함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
< 신불재 억새밭에서 >
신불산에서 신불재로 내려선다. 신불재는 간월재만큼 주변이 화려하지는 않지만 한적하고 고운 억새밭을 자랑하고 있다(15:25). 오가는 행락객의 수가 눈에 띄게 줄었다. 덕분에 고즈녁한 분위기에서 나만의 억새밭을 즐기게 되었다. 완만한 계단이 길게 이어진 길을 풍요롭고 부드러운 기분으로 걷는다. 이 순간 나는 참으로 행복하다. 길은 걷기에 최고 수준의 완만함과 황홀한 경치를 동시에 선물해 주고 있다. 마침 햇살에 비치는 억새의 너울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가슴과 머리 깊은 곳에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담아 두어야겠다.
< 신불재에서 영축산으로 향하는 길에 >
지나온 신불재를 뒤돌아 본다. 순한 억새길이 신불산까지 길고 아스라하게 이어진다. 이제 흐드러진 억새밭과는 이별인가 보다. 간월재에서 느끼던 감정과는 사뭇 다르다. 간월재가 청춘의 억새였다면 신불재에서 보는 억새는 중년의 억새다. 그래서 그런지 신불재 억새는 회색톤이 더 강하다.
< 햇살에 비친 억새 / 간월산 방향의 전경 >
황홀한 군락은 지나갔지만 억새밭은 계속 이어진다. 이른바 신불평원이 길게 이어진다. 길가를 따라 핀 억새를 헤치며 걷는 기분이 그만이다. 햇살에 비친 억새가 사라질까 얼른 카메라를 꺼낸다. 정말 혼자 보기 아까운 풍경이다. 멀리 영축산 정상부가 점점 가까워진다. 해가 지려는지 하늘이 흐려지고 햇살에 주황빛이 강하게 느껴진다. 편한 능선 끝 영축산 정상부의 암릉이 눈에 들어 온다.
< 영축산 가는 길에 / 영축산 정상에서 >
4시가 다 되어 간다.
< 영축산에서 통도사 >
하산 길을 고민한다. 산악회에서는 정상 좌측으로 난 길을 따라 내려가라 한다. 통도사를 거치려면 정상 우측에서 능선을 타다 비로암 방향으로 가야 하는데 그쪽으로는 이정표가 없다. 무리하여 내려가다가 길이 폐쇄되었으면 날도 어두워지는데 낭패다 싶어 산악회가 안내하는 곳으로 내려선다. 많이 아쉽다. 적멸보궁이 날아가고, 불보사찰을 볼 기회를 다음으로 넘겨야 한다.
그래도 일단 마음이 정해지자 걸음에 속도를 낸다. 4시간 이상을 걸었어도 다리에는 아직 힘이 남아 있다. 혹시 일찍 하산하면 통도사에 들를 시간이 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뛸 듯이 가파른 내리막을 내려 간다. 지도상 길은 임도가 분명한데, 임도길 사이사이로 가파른 산 길이 나 있다. 임도길을 포기하고 어려운 비탈길을 20여분 내려서자 매점이 나온다(16:32). 이곳이 산불감시 초소인가 보다. 벼랑 가에 널따란 평지가 있다. 좌측으로 내려다 보는 삼남면 일대의 풍경이 시원하다. 초소를 지나 이어지는 길도 매양 한 가지다. 5시 무렵 좌측으로 골프장이 보이는 곳까지 내려 왔다. 건물이 보이고 도로가 나 있으니 다 왔다 생각했는데 길이 길게 이어진다. 등산 지도에는 표식이 없는데 커다란 유원지가 나오고 그로부터도 10분 이상을 더 내려가야 통도사 입구가 나왔다(17:40).
날이 저물었다. 화장실에서 잠시 세면을 하고 나오니 사위가 완전히 어둡다. 통도사 경내에 들어갔으나 어두워 사진 한 장 찍을 수 없다. 대신 절 입구 ‘영취산문’이라는 커다란 현판을 바라보는 것으로 통도사와의 인연을 다음으로 미룬다.
< 하산 길에 본 삼남면 일대 / 통도사 입구 >
< 에필로그 >
출반 전 읽은 자료 대부분에는 배내봉에서 시작하여 영축산으로 이어지는 등산로는, “주 능선 길은 길고 변화가 적다”고 했다. 장호 선생도 신불산 능선을 걸으며는 “잊어버리고 걸어 나가야지 시간을 재거나 발걸음을 재촉하거나 했다가는 그 큰 덩치 안에서 제풀에 지쳐버리기 십상이다.” 라고 했다. 그러나 실제로 내 발로 경험한 배내봉-통도사 등산로는, 형세는 대체로 완만하였으나 제철을 맞은 억새와 단풍으로 인해 너무나도 다이나믹한 산으로 기억될 것이다. 길고 변화 없는 지루한 고원 능선길이 아니라, 일단 배내봉까지 올라서면 긴 내리막으로 내려서고 다시 간월산으로 치오른 후 넓고 평온한 간월재에 다다르고 숨을 고른 후 다시 나무 계단을 올라 신불산에 닿고 이후는 완만한 신불평원 억새능선이 영축산까지 한없이 펼쳐진다. 주변으로 바라다 보이는 천왕-재약능선, 가지-운문능선, 언양과 양산의 도시풍경, 이어지는 통도사까지의 길고 가파른 내리막, 누가 이 산이 길의 변화가 적다고 했던가? 난 절대 동의할 수 없다.
산 길을 걸으며 참 많은 경험을 한 하루였다. 1000m가 넘는 100대 명산 반열의 산을 3곳이나 넘으며, 반대편 가지-운문, 천황-재약의 전경도 바라보며 걷는 것은 분명 크나 큰 행운이었다. 왕복 10시간에 가까운 고된 버스 여정이 전혀 아깝지가 않다.
오늘 산행 전 희망사항을 ‘억새+’로 잡고, 그 ‘+’가 무엇일까 기대했는데 ‘단풍, 산에서 본 남녁의 산하, 그리고 ‘재’의 새로운 발견’등 수 많은 플러스를 경험하였다. 비록 통도사를 들어 가 보지 못한 것이 아쉬웠지만, 더 할 나위 없이 좋은 경험을 한 날 이었다.
어두워진 저녁 식사 자리를 마치고 자리에 돌아오니 ‘짝꿍’ 어르신이 앉아 계시다. 오전 헤어질 때와 동일한 반듯한 표정이시다. 베테랑 등산가의 연륜이 느껴진다. 문뜩 옆 얼굴에 주름을 보니 본가에 계신 아버지 생각이 났다. 내일은 아침에 회라도 한 접시 사가지고 찾아 뵈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