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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수군재건로 벌교-조성-예당 답사기(2014.6.8)
1. 미루었던 수군재건로 답사의 재개
세월호 사건으로 국가적 애도의 분위기가 경제활동마저 저조하게 만든 계절이지만 나는 수순재건로 답사를 재개하기로 결심했다. 통제사로 재임된 이순신에게는 수군재건로가 백의종군로 못지않은 고통의 길이었기에 이런 길을 가는 것은 무방하다고 생각했다.
충무공은 정유년8월9일 낙안(순천시 낙안읍)에서 모처럼 많은 사람들의 환영을 받았다. 관청과 창고가 모두 다 타버리고, 관리와 마을 사람들이 눈물로 공을 맞이했다. 오후에 길을 떠나 십리쯤 가니, 늙은 할아버지들이 길가에 늘어서서 술병을 다투어 바치는데, 받지 않으면 울면서 억지로 권했다. 저녁에 보성 조양창(조성면 조성리)에 이르니 사람은 하나도 없고, 창고에는 다행히 곡식이 묶여진 채 그대로였다. 그래서 군관 네 명을 시켜 지키게 하고, 공은 김안도의 집에서 잤다. 그 집 주인은 벌써 피난가 버렸다.
한편 공은 경상수사 배설의 소식을 들었다. 배설은 원균 지휘 하에 칠천량에서 싸울 때 패전이 불 보듯 하여 휘하 전선 12척을 가지고 전라도 회령포(대덕면 회진리)까지 도망갔다. 그런데 충무공이 통제사가 되어 이곳에 온다하니 문책이 두려워졌다. 공은 조성에서 닷새를 머물다가 8월14일 오후에 어사(임몽정)를 만날 일로 보성에 이르러 열선루에서 잤다. 다음날 열선루에서 선전관 박천봉이 가저온 임금의 분부를 받았다. 공은 보성의 군기를 검열하여 쓸 만한 무기와 장비를 네 필의 말에 실었다.
2. 한산도가(閑山島歌)를 지은 보성 열선루(列仙樓)
초대 독도박물관장 서지학자 이종학이 소장한 한산도가 원문에 한산도는 한산도(寒山島)이다. 1595년8월 한산도(閑山島) 제승당에서 쓴 글이 아니라 1597년8월15일 보성 열선루에서 지었다는 것이다. 이날 왕의 명령을 받았다. 적은 병력으로 적을 대항하기 어려우니 수군을 폐하고 육군에 편입해 싸우라는 것이다. 금신전선상유십이(今臣戰船尙有十二) “신에게 아직도 전선 12척이 있습니다.”고 장계했다. 수군폐지 명을 받은 날은 한가위 날이다. 저녁이 되어 보름달이 수루 위를 비추니 심회가 편치 못했다.
寒山島月明夜 上戌樓撫大刀 深愁時 何處一聲羌笛 更添愁
(한산도월명야 상수루무대도 심수시 하처일성강적 갱첨수)
싸늘한 산과 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올라 큰 칼을 쓰다듬으며
깊은 시름 하는 적에
어디서 들려오는 가녀린 피리소리는
근심을 더하게 하누나.
이 시는 공이 순국하기 하루 전날 1598년11월18일 진린 제독에게 보냈다고 보는 증거가 있다. 이 시는 진도독합하(陳都督閤下)라는 제목으로 된 편지에 들어 있으며 말미에 정유중추이순신음(丁酉中秋李舜臣吟)이라고 적혀있다고 한다. 이시의 원문을 소장한 서지학자 이종학은 1997년9월10일, 30년간 보관해온 이 시의 원본을 공개하고 정유년에 열선루에서 지은 시라고 주장했다. 그는 1998년에 이 문서를 현충사에 기증했다.
이날의 일기와 한산도가의 원본 필체가 일치하므로 한산도가는 열선루에서 지은 것이 분명하다는 추가적인 지지 주장도 최근에 나왔다.
3. 벌교천변
순례자들은 이번에도 06시28분 용산 발 무궁화호 열차를 이용했다. 열차가 출발한지 1시간 쯤 지나서 나는 안내 자료를 나누어 주었다. 안내 자료에 꼭 포함하는 내용은 도보일정과 지도이다. 이는 순례를 안전하고 원활히 진행하기 위해 필요하다. 일정을 아는 순례자들은 자신의 위치를 알 수 있고 지도에 표시된 위치와 비교하면서 신체적 상황에 따라 속도를 조절하고 휴식을 한다.
11시20분 순천에 내린 순례자들은 벌교까지 시내버스를 타야한다. 벌교는 보성군 관내의 읍이지만 순천이 생활권이므로 시내버스가 자주 운행한다. 순천역 바로 앞 버스정거장에는 버스노선과 도착시간 알림 모니터가 있다. 순례자들은 1시간쯤 버스를 타고 벌교역전에서 하차했다. 벌교 역부터 하차 승객들은 추가요금 400원을 더 내야 한다. 순천시를 벗어난 지역이므로 시외요금을 적용하는 것이다. 순례자들은 지난번 순례 시 이용한 식당 <고려꼬막한정식>에서 늦은 아침을 했다.
“저희를 알아보시겠습니까? 봄에 와서 석화를 삶아 달라고 했던 순례자들입니다. 이 깃발을 보세요.”
주인이 다시 찾은 손님을 반겼다. 음식을 더욱 푸짐하게 내 놓았다.
13시에 출발했다. 벌교천 둑방길은 흙이 부드러워 걷기에 좋다. 시멘트나 아스팔트로 포장한 길은 걷기에 좋을 것 같으나 그렇지 않다. 특히 여름에는 포장도로가 태양의 복사열을 그대로 반사하므로 뜨겁다. 흙길은 수분을 함유하고 있기에 태양열을 흡수하므로 덜 덥다. 흙길을 40여분 걸으니 인적이 드물어서인지 풀이 무성한 길로 변했다. 풀을 헤치면서 가야했다. 벌교천 북쪽 둑을 한 시간 가량 걸어서 큰 길(2번국도)을 건너 나철 생가에 도착했다.(14:00)
4. 나철 생가터
홍암 나철은 민족전래의 제천의식을 복원하고 민중을 교화한 선각자로서 대종교 대종사이다. 그는 1863년12월2일, 벌교읍 칠동에서 출생해 구한말에 문과에 급제했다. 1909년 경성의 재동에서 단군을 기리는 개천절을 복원했다. 1914년 만주에 대종교본부를 설치하고 항일운동에 앞장섰다. 다음해 일제는 대종교를 불법단체로 규정했다. 그는 다음해(54세) 자진했는데 그에게 영향 받은 이는 많다. 독립군 서일, 김좌진, 이범석, 이상설, 국학운동가 주시경, 최현배, 이병기, 민족사학자 박은식, 신채호, 정인보등이다.
일행은 생가터를 둘러보고 정자나무 아래서 출발 사진을 찍었다. 2번 국도를 다시 건너 벌교천을 따라가다가 고가도로가 만나는 지점(벌교 IC)에서 다리를 건너 남쪽 둑길로 들어섰다.(14:25) 이 길은 2번국도가 크게 확장되기 이전의 중앙선도 없는 구도로다. 차량통행도 거의 없어 걷기에 좋다. 이 구도로는 다시 2번국도(녹색로)와 만난다. 멀리 보성요양원이 보이는 곳을 지나(15:10) 녹색로의 갓길을 잠시 걸으면 SK주유소(열가재 제2주유소)가 있다. 나는 휴식을 권했다. 주민이 외지인에 관심을 보였다.
“저희는 수군재건로를 답사하는 사람입니다. 여기가 이순신 장군이 수군을 모으기 위해 간 길입니다. 아시나요?”
“모르는 구만요. 근디 워디서 오셨당가?”
“서울서 왔는데요 오늘은 벌교에서 걸어왔습니다. 저 꽃은 무슨 꽃인가요?”
“석류랑께. 꽃 보려고 재배하는 거시오.”
제포는 기름 냄새나는 주유소에서 쉬는 것이 마땅치 않아 좀 더 걸었다. 그는 곧 숲속에서 쉴만한 바위를 발견했다(열가재 소공원). 거기에는 방금 어느 농군이 두고 간 듯 한 반쯤 마신 막걸리병과 낫이 있었다. 그는 양말까지 벗고 바위에 누었다.(15:20)
5. 버찌와 산딸기
농익은 버찌가 떨어져 길가를 모자이크 무늬로 물들였다. 순례자들은 굵은 버찌를 한 움큼 씩 따서 입에 넣어 우물거렸다.
“이렇게 많은 버찌를 먹어보기는 이번이 생전 처음이다.”
“여기 봐, 딸기도 지천이야.”
순례자들은 버찌와 딸기를 따 먹으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걸었다.(16:00) 선두와 후미의 거리가 점점 더 멀어지고 있었다. 그들은 한 시간 가량 더 걸어 조성역 서남쪽의 사월마을 경로당에 도착했다.(17:00) 순례자들은 정자에서 늦은 점심을 했다. 경로당 화장실에서 세수도 하고 충분히 쉰 다음 출발했다.(17:50) 앞으로 갈 길이 얼마인지 짐작이 잘 안되었다. 덕산리 덕정마을회관에 도착하니 날이 저물기 시작했다.(18:20)
6. 날 저물면 순례 중단
계획 대로면 오늘 득량까지 가야한다. 그러나 순례자 건강수칙에 의하면 날이 저물면 가지 않아야 한다. 마을 주민에게 득량 가는 지름길을 물었다. 그 길로 가니 도로표지가 대보둑로임을 알려주었다. 날이 점점 더 저물어 순례중지를 결정했다. 순례자들은 서북쪽의 예당역을 향했다. 철로를 건너 예당역 북쪽 마을로 접어들었다. 마침 숙소(진보 모텔)를 발견했다. 나는 방을 알아보려고 들어갔다. 이 마을 유일의 숙박업소이고 득량에 가도 잘만한 곳이 없다고 모텔 여주인이 장담했다.
“2인 기준 3만원이고 1인 추가 시 5천원입니다. 남자는 아주 큰방이고, 레이디는 3인실, 합이 8만5천원, 어떤가요?”
“2, 3, 3으로 합시다. 화장실이 붐비지 않아야 하니까.”
검암의 제안에 따라 방 셋에 10만원을 결제했다. 메뉴 선정 담당 제포가 파출소 근처에서 감자탕 집(엄지감자탕)을 발견했다. 순례자들은 배낭만 숙소에 놓고 다시 나와 만찬을 즐겼다.
“이 마을에 숙박업소가 하나밖에 없습니까? 득량 가면 많지 않나요?”
“예당이 득량보다 더 큰 고장인지라. 아마도 그럴 거구만요.”
“여기가 더 큰 마을이라고요? 득량면 예당리잖아요?”
“그랴도 예가 더 번창한디, 예로부터 그렇지라.”
“그럴수 있겠네. 여기 큰 둑을 막아 쌀이 많이 나니까 사람이 많이 모여 마을이 커진 것이겠지. 그래서 고을 이름도 득량(得糧)이고”
“파출소도 여기가 더 크당께.”
식사가 끝나니 아직 9시가 아니 되어 훤했다. 여행을 하면 현지의 분위기를 느끼기 위해 저녁 식사 후 이곳저곳을 다녀보곤 했는데 이날은 모두들 힘이 들어 빨리 들어가 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오늘 우리 참 많이 걸었어. 이 만보기 눈금을 봐.”
청호가 스마트 폰에 다운 받은 만보기 앱을 읽어 주었다.
“20킬로 더 걸었어.”
“그래? 사실 우리가 무척 빠르게 걸었으므로 그럴 수 있겠다. 내일 아침 7시에 출발해야 하니 들어가 잡시다.”
“6시 기상, 7시 출발, 득량면소 도착하면 8시경 조식입니다.”
문자 메시지로 알렸다. 순례자들은 늘 하던 야식도 안 하고 조용히 밤을 지냈다.
2. 수군재건로 예당-득량-회천 답사기(2014.6.9)
1. 수량이 풍부한 대보둑
6시에 기상하여 출발하려니 너무 시장했다. 나는 아침 일찍 연 식당이 있는지 찾아보겠다고 나갔다. 다행히 문 연 식당(정가네해장국)을 발견했다.
“지금 식사 됩니까? 7시에 8명인데요.”
“네 됩니다. 그때까지 준비하겠습니다.”
나는 득의만면하여 문자로 계획변경을 알렸다.
순례자들에게 주문을 받으니 뼈다귀해장국(6천원), 추어탕(7천원) 각 4인분이다. 그들은 식당에서 각자의 수통에 식수를 채웠다. 식사를 마치고 8시에 출발했다. 어제 건넜던 철로를 다시 건넜다. 철로를 따라 동편에 예당역이 보였다. 대보둑로 북변에는 농업용수로가 있는데 수량이 풍부했다.
2. 일흔인데 가장 젊다
금평마을과 강골마을 표지석을 지나면 공룡로(851지방도)를 만난다. 다리(해평교)를 건너서 제일교회 앞길을 택해 서쪽으로 걸어야 한다. 이 길은 득량초교 앞의 월평마을 북쪽 길이다. 오봉산 남쪽에 있는 이 길은 스마트폰 지도(트랭글 GPS 또는 네이버지도)에 도촌길로 나와 있다. 기남 마을 입구를 지나 30분쯤 가서 정자를 만나 휴식했다.(09:30) 마을의 강아지가 일행을 반겼다. 강아지는 순례자들이 던져주는 간식 부스러기를 처음 맛보는 듯 근처를 떠나지 않았다. 강아지는 1킬로 이상을 따라왔다. 억지로 쫒아도 한참 있다 보면 어느새 뒤따라 왔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크게 야단쳐야지.”
단호하게 꾸지 짖고 멀리 갔다가 되돌아보는 강아지에게 돌맹이까지 던지니 더 이상 쫒지를 않았다.
산 사이로 일직선 농로가 2킬로미터 가량 곧게 뻗어 있었다. 끝에 마을이 있는데 커다란 느티나무와 정자가 있었다. 인증사진 찍기에 딱 알맞은 장소다. 여기서 845 지방도(충의로)와 합류한다. 이제부터는 이 도로를 따라 해안까지 간다. 느티나무 아래 버스 정류장에 앉아 있는 현지인이 외지인을 호기심을 가지고 바라보고 있었다. 한 노파가 순례자에게 자기의 휴대폰을 내 밀었다.
“이 전화기 먹통인디 한번 봐주오.”
전화기를 받아 이것저것 버튼을 눌러보아도 반응이 없었다.
“그럴 때는 일단 전원을 뽑아. 그리고 10초 이상 기다린 후 다시 끼워봐.”
그대로 하니 신기하게도 작동이 되었다.
“아주머니 멋쟁이십니다.”
“늙은이가 무슨. 나가 70인디 이 말에선 젤 젊으오.”
“그러세요? 아므튼 이뿐이.”
“젊어선 이뿌다 소릴 듣긴 들어다만.”
“지금도 이쁘십니다. 이리로 오셔요. 사진 같이 찍읍시다.”
그들은 인증사진을 찍고 다시 출발했다.(11:00)
3. 드디어 해변으로
845지방도의 회동마을, 지등마을 표지석을 지나면 율포해수욕장 안내 도로표지가 보인다. 진주강씨세장비(晉州姜氏世庄碑)를 지나니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쉴만한 바위가 있었다. 순례자들은 확 트인 바다를 보면서 간식을 나누었다.(12:20)
여기까지 왔는데 비봉공룡알화석지를 보면 좋으련만 갈 길이 멀기에 아쉬움을 달래야만 했다. 회천은 감자가 유명하다. 바닷가로 가는 도중에 감자 수확하는 사람들을 자주 보았다. 시골에서 사람 보기 어려운데, 수확 철이면 전문적 일꾼들이 집단으로 이 농장, 저 농장을 다니며 일을 맡는다. 군농리 해안에 이르니 모래사장이 눈에 들어왔다. 845지방도를 계속 가도 되지만 나는 모래밭을 걷고 싶어졌다. 남쪽 해안을 따라 높은 방파제 둑길이 있다. 뜻을 같이하는 몇몇이 방파제 도로로 들어섰다. 검암은 너무 힘이 들어 이것저것 감상할 기분이 아니므로 계속 지방도를 걸었다. 나는 방파제를 내려가 모래사장을 걸었다. 순례자들이 둘로 나뉜 것이다. 세상이 궁금한 여인 노작가는 물론이요 태극기 휘날리며 씩씩하게 걷는 김 여사도 모래밭 코스를 택했다.
다향길 2코스라는 안내말뚝이 보였다. 보성군이 걷기 좋은 길을 조성한 것이다. 나무 데크 길을 만나면 상상 속의 바닷가 아름다운 집(햇살 펜션)이 있다. 집 앞에는 파라솔과 의자가 있는데 연인과 앉아 와인과 커피를 즐기면 좋은 분위기였다.(13:07) 시멘트에 자갈로 무늬를 박은 길을 가면 생태탐방안내판을 볼 수 있다. 순례자들은 방파제위에서 잠시 쉬고 해수욕장 모래밭으로 내려갔다. 신발을 벗어 들고 바닷물 찰랑거리며 모래를 밟았다. 5시간 반 동안 힘들었던 발이 비로소 해방된 순간이다.
4. 율포해수욕장의 귀인
율포해수욕장은 모래사장이 넓고 경사가 완만했다. 수상안전을 위해 설치한 높은 전망대가 있었다. 나는 마침 주민을 만나 길을 물었다.
“회천면소에 걸어가려는 사람입니다. 어디로 가면 좋을까요?”
“예, 저쪽으로 가면 되는데... 어디서 오셨나요?”
“네, 저는 이런 사람입니다.”
배낭에 꽂은 백의종군로 깃발을 보여주고 새로 만든 명함을 건네면서 설명을 더했다. 나는 이번 답사를 오기 전에 백의종군로와 수군재건로의 지도가 들어간 명함을 만들었다. 이 명함은 지도를 보여주면서 설명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그는 나의 명함을 받고 크게 반겼다.
“아, 네. 참 반갑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일을 하시게 되었습니까? 저는 보성군 문화관광과장입니다. 혹시 장흥 임씨인가요?”
“저는 풍천 임씨입니다. 아무튼 일가 분을 이렇게 우연히 만나니 참 반갑네요.”
순례자들은 솔밭 그늘에 앉아 임 과장의 설명을 들었다. 광주 가는 버스가 자주 있다는 말을 듣고 나는 순례를 마쳐도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회천면소에 가야 버스를 탈 수 있는 줄 알았으나 여기서 버스를 탈 수 있다니 더 갈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오늘은 이만 순례 끝입니다. 이제 점심 식사하고 귀경합시다.”
나는 문화관광과장에게 식당을 추천해 달라고 했다. 업무에 지장이 없으면 식사를 같이 하면서 설명을 더 듣고 싶다고 부탁했다. 나의 이 말을 들은 검암이 귀엣말을 했다.
“그런 말은 오해를 불러 올 수 있네. 점심을 사라는 말로 들을 수도 있으니까...”
“저희는 관광하는 사람이 아니고 고행하는 순례자이므로 점심도 조촐하게 합니다. 그런 곳을 좀 알려 주세요.”
임 과장은 동행한 직원에게 식당 예약을 명하고 일행을 안내해 앞장섰다. 그는 시골에서 힘들게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해 주었다. 특히 다문화 가정이 겪는 어려움과 인구가 줄면서 발생하는 문제 등을 강조했다. 그는 점심 식사를 이미 했다면서 이야기를 열심히 했다. 그는 이곳에서 면장까지 했는데 일을 잘해 얼마 전에 보성군으로 영전해 갔다. 그는 우리와 같은 순례자는 처음 본 것이다. 전라남도는 수군재건로 안내 말뚝을 박기 시작했다. 올해도 그 일을 계속한다. 이 지역에는 아직까지 안내가 안 되어 있었다. 마침 문화관광과장이 우리를 만났으므로 앞으로는 더 잘 진척될 것이라 기대한다.
“오늘 식사는 제가 개인적으로 내겠습니다.”
“아닙니다. 그러시면 안 됩니다. 저희가 다 부담할 겁니다.”
순례자들이 이구동성으로 말렸다. 그런데 이미 동행한 직원이 계산을 끝낸 것이 아닌가.
토정비결에 남행을 하면 귀인을 만날 것이란 괘가 있나보다. 순례자들은 감사한 마음으로 현수막을 다시 펼치고 귀인을 중앙에 모신 사진을 박았다.
5. 새로운 상경 방법
종래에는 무궁화호 열차로 상경했으니 이날은 버스로 상경했다. 율포에서 광주까지 직행을 타고 갔다. 운임은 10,100원이다. 나는 버스에서 회계보고를 문자로 했다. 왕복 교통비(대략 5만원)외 3식1박에 4만 원쯤이다. 광주에 가까이 가니 검암이 청호에게 팁을 주었다.
“내리면 우선 버스 출발 시간부터 알아보게.”
청호가 인천행의 시간을 알아보니 17시 45분이다. 그는 김 여사와 함께 재빨리 버스에 올랐다. 반면에 문 회장이 타야할 수원행은 17시40분이다. 도착하자마자 탔다면 되었는데 화장실 갔다 와서 출발 시간을 알았기에 타지 못했다. 서울행은 18시10분발 일반이 있었다. 일반은 우등보다 훨씬 저렴(17,600원)한데 운행편이 적어 만나기 어려운데 때마침 가는 편이 있어 운이 좋은 것이다. 서울 팀은 30분을 더 기다려야 하는 문 회장을 위로하면서 버스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