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천일야화 허난설헌(許蘭雪軒) <제3話>
고부간이 아무리 사이가 좋아도 딸 같은 며느리는 없다고 하였다. 너를 딸처럼 사랑하겠다는 시어머니의 말은 달콤한 입발림이라고 세상 여론은 말한다. 그랬다. 16세기 안동김씨 안방마님 송씨(宋氏)와 허난설헌 사이는 원수지간이나 다름없었다.
한울타리 안에서 같이 살면 안 되는 관계가 어떻게 얽혀 고부간의 인연을 맺었다. 고부간의 인연은 고추보다 맵고 시지프스처럼 고단한 삶이었다.
부부의 연을 맺은 허난설헌과 김성립과의 관계도 예외가 아니다. 이름뿐인 부부다. 그들은 사랑이 강물처럼 넘치는 금실 좋은 원앙부부가 되지 못함을 서로 상대방에 책임이 있다는 의식을 은연중에 가지고 있다.
김성립은 도도하고 학자연하는 그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고분고분한 여필종부(女必從夫)의 사고에 젖은 안동김씨의 전형적 사대부다.
하지만 그미는 성리학의 나라 조선사회가 인정하는 천재 여류시인이 아니던가? 현모양처와는 거리가 너무 먼 여인이었을 게다.
‘하늘거리는 창가의 난초/
가지와 잎 그리도 향기롭더니/
가을바람 잎새에 한번 스치고 가자/
슬프게도 찬 서리에 다시 들었네/
빼어난 그 모습은 이울어져도/
맑은 향기만은 끝내 죽지 않아/
그 모습 보면서 내 마음이 아파져/
눈물이 흘러 옷소매를 적시네’ ≪난초 내 모습≫이다.
결혼하여 별당에 갇혀 서서히 젊음과 미모가 사라져 가는 자신을 읊은 듯하다. 자유의 영혼이 창살 없는 감옥에 갇혀 병들어 시들어가는 모습을 은유(隱喩)했음이 분명해 보인다. 고부간의 갈등이 심하면 부부금실이라도 뜨거워야 하는데 허난설헌과 김성립은 금실마저 차가웠다.
그런 부부사이에도 그미는 임신을 하였다. 가뭄에 콩 나듯 바람처럼 들어와 번개 불에 콩 볶아 먹듯 욕정을 채우는 동시에 남편역할을 하여 그미를 엄마로 만들어 가는 듯하였다. 하지만 임신부까지로만 만들어 주었다.
첫 아이는 그렇게 그미를 엄마로 만들어 주지 못하고 일찌감치 꿈과 행복이 가득한 저 세상으로 먼저 갔다. 손이 귀한 김첨(金瞻·1354~1418)의 가문에도 충격적이었으나 그미에겐 더 큰 상처를 안겼다. 남편은 미워도 자식은 미워할 수 없는 것이 어미의 심정이다.
그미도 그러하다. 데면데면한 남편의 불성실함을 자식에게서 보상 받으려는 생각이 수포로 돌아가서 배신감마저 들었다. 그미도 여자다. 고부간의 갈등 속에서도 슬쩍슬쩍 잠자리에서 남편으로서 위로의 말을 해 줄 수 있었는데 김성립은 그러하지 못하였다. 오히려 어머니의 시각에서 질시와 인격을 폄훼하는데 앞장섰다.
열등의식일 게다. 번번이 떨어진 과거 낙방에 자존심이 심히 상했을 것이다. 그미는 학문이 높을 뿐만이 아니라 미모도 출중하다. 희고 긴 목덜미, 희다 못해 사기처럼 빛이 나는 속살, 호수같이 깊고 하늘빛처럼 맑은 눈동자, 오뚝한 코, 오이씨 같은 입, 잘록한 허리 등 어느 한 곳도 균형이 깨지는 부분이 없다. 신윤복의 미인도 그 모습 그대로다. 하늘에서 잠시 이승으로 내려온 선녀다.
어머니 영월댁 김씨는 너무 곱고 예쁜 딸 허난설헌이 자나 깨나 걱정이다. 그에게 맞는 배필이 이승엔 없을 것 같아서였다. 그 같은 걱정이 기우이길 바랬는데 김성립이 어느 날 불쑥 허봉과 나타나 사돈지간이 되었다. 집안끼리의 결혼문화다. 걱정이 현실이 되어 버렸다.
영월댁 김씨는 최희를 시집보내고 몇 달을 가슴앓이를 하였다. 걱정했었던 일들이 기우에 불과하기를 신령님과 조상님들에게 수도 없이 빌었는데 그만 현실이 되어 보름동안은 아예 몸져 누웠었다. 그런 어머니의 마음을 알아차린 그미는 친정에서 같이 온 함실댁을 통해 편지로 위로를 하였다.
역시 어머니 생각은 딸이다. 그 같은 어머니 생각으로 마음과 괴로울 때마다 그미는 시를 쓰거나 신선세계로 훌쩍 여행을 떠났다.
‘난새를 타고 한밤 중 봉래산에 내려서/
기린수레 한가롭게 타고 향그린 풀잎을 밟네/
바닷바람이 불어와 백도화를 꺾었는데/
옥소반에는 안기의 대추를 가득 따다 담았네’ ≪하늘을 거니는 노래≫다. (시 옮김. 허경진)
이렇듯 그미는 고부간의 갈등이 최고조로 빚어져 시 쓰기로도 카타르시스가 안 될 때는 신선세계로 훠이훠이 여행을 떠났다.
그곳은 갈등이나 번뇌 같은 이승에서의 세상살이에서는 없는 사랑과 꿈과 행복이 가득한 세상이여서다. 또한 그곳은 그미가 갈 때마다 깍듯한 예의로 여왕처럼 맞아 주었다. 그래서 그미는 일찍이 광한전백옥루상량문을 썼나보다.
아마도 허난설헌은 신선세계에서 무언가 실수를 하여 옥황상제의 명으로 인간세계에 잠시 여행길에 들려 그토록 짧은 삶을 살고 간 것이 아닐까? 인간세계의 27년은 신선세계의 27시간이나 27분쯤 되는 짧은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미의 시집살이는 고추보다 매운 세월이었다. 게다가 남편은 비아냥거림까지 하였다. 술이 거나하게 취해 들어온 성립은 아랫목에 벌러덩 자빠지듯 누웠다. 그리고 손으로 턱을 괴고 그미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 표정이 그윽한 모습의 얼굴이 아닌 ‘네가 그렇게 대단한 여자냐?’하는 얄궂은 태도다. “서방님 뭐가 필요하세요?” 그미는 남편의 표정은 아랑곳 않고 공손한 어투로 예의를 갖추었다. “아니오! 그냥 당신이 보고 싶어 봤소이다. 아참! 당신 시를 잘 쓰니 나에 대해 시를 써 보시구려...” 그미는 심장이 멎어옴을 느꼈다. 생각 같아서는 별당을 뛰쳐나가 건천동집으로 달려가고 싶은 심정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상황이 아니다. 시어버니한테 짓눌리고 남편에게선 치받쳐 안팎곱사 된 상황에서 친정엘 갈 수는 없었던 것이다. 15년 동안을 금이야 옥이야 하며 키워 시집을 보냈는데 지금의 추한 꼴을 보일 그미가 아니다.
어떻게든 관계 개선을 하여 웃음과 꿈이 가득한 행복한 모습의 화목한 가정의 분위기로 만들어야겠다는 마음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아침이슬처럼 맑은 그미의 두 눈에 어느덧 수정 같은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고였다. 김성립은 초희의 그런 모습이 신기한 듯 묘한 표정으로 턱을 괸채 바라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