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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일 늦은 오후, 서울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좀더 빨리 가기 위해서라면 부산으로 갔어야 했지만 이 날만큼은 혼자인 게 싫어 다른 이들과 함께 하기 위해 서울로 향했습니다.
김포공항에 내려 지하철을 타고 시청으로 향하는 50여분의 시간속에서 평소라면 잡다한 생각으로 뒤죽박죽이었을 머리가 그 날만큼은 깨끗하게 텅 빈 느낌이었어요.
그런 공허함을 한 가득 안고 시청으로 향했습니다.
시민들이 노짱님께 쓴 글로 도배가 되다시피 한 지하철 입구 계단을 오르면서, 검은 리본을 가슴에 단 사람들의 슬픈 표정을 보면서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게 많이 힘들었습니다.
모이기로 한 장소에 가서 담당자와 인사를 하고 참석을 확인한 뒤 버스가 세워진 곳으로 이동하려는데, 기사님이 저에게 참석자 명단 사본 한 부를 건네며 버스에 탄 사람들을 확인해 달라고 하시더군요.
얼떨결에 임시 담당자가 되어 한 손엔 사본을 들고 참석자 예닐곱명을 이끌고서 버스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28일이 실제적으로 분향을 할 수 있는 마지막 날이기에 이미 수많은 인파들로 거리는 발디딜 틈이 없었습니다.
어떻게든 사람들 틈을 비집고 나아가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채 발을 동동 구르다가, 왠 키 큰 청년(참석자 중 한 명)이 길을 뚫고 앞서 나가자 재빨리 뒤따라갔습니다.
이제까진 키가 작은 것에 대해 별 불만이 없었는데 이 때만큼은 키가 작은게 속상하더군요. ^^;;
여하튼 그 친구 덕분에 가장 혼잡했던 지역(시청역 1번 출구와 덕수궁 주변)을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시민분향소가 설치되어 있는 덕수궁 주변에는 분향을 하려는 사람들의 줄과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여 대기하고 있는 전경들의 줄이 끝없이 이어져 있었는데 그 모습에 왜 그리도 마음이 아프던지......
버스에 도착하여 인원을 체크하고 난 후 시계를 보니 이미 출발시간을 넘었더군요.
원래 출발시간은 오후 7시였지만, 퇴근하는 직장인들도 있었기에 거의 한 시간이 흐른 후에야 출발할 수 있었습니다.
봉하마을.
서울에서 그 곳까지의 거리는 약 400km, 쉬지않고 달려도 4시간이나 걸리는 멀고 먼 곳.
버스를 탄 사람들 중 저처럼 혼자 온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가족들과, 그리고 친구들과 온 분들도 좀 있었어요.
엄마와 함께 온 초등학교 4학년 꼬마는 현장학습 간다고 하고 왔다더군요.
노을지던 하늘이 어느 새 어둠으로 물들고 별들이 하나 둘씩 빛을 내기 시작하면서 달린지 4시간 반, 봉하마을 입구에 도착.
분향소까지 걸어서 20분이면 갈 수 있는 곳이지만 저와 같은 마음으로 전국에서 모인 사람들로 인해 세 시간이 지나서야 노짱님께 국화 한 송이를 헌화하고 절을 드릴 수 있었어요.
한 두 걸음 걷다가 제자리에서 기다리고, 다시 한 두 걸음 걷다가 제자리에서 기다리고...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노짱님께 다가가는 동안 조금씩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그다지 눈물이 없는 저이지만 왠지 모르게 분향소 앞에 가서 울어버리지나 않을지 지레 걱정이 되어서요.
분향소를 향해 가는 길을 따라 걸려있는 만장을 바라보며 먹먹해지는 마음을 다잡고, 노짱님의 생전 영상을 보면서 붉어지는 두 눈에 애써 힘을 주며 뻣뻣해지는 두 다리를 조금씩 움직이며 도착한 그 곳.
조심스레 국화꽃을 헌화하고 절을 하고서 영정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분향소를 빠져나왔어요.
그리고 자원봉사하는 분들이 주시는 빵과 우유를 멀거니 내려다보다가 꾸역꾸역 먹었지요.
먹고픈 마음은 없었지만 앞으로 있을 영결식과 노제, 그리고 수원 연화장까지의 길을 생각하면 힘을 비축해둬야 했으니까요.
분향소를 빠져나와 시계를 보니 새벽 3시 40분, 발인까지 1시간 20분 정도가 남아 주위를 잠시 둘러보았습니다.
시민들이 적어놓은 글귀들을 하나씩 천천히 읽다가 어느새 주저앉아 버렸어요. 다리가 풀렸었나 봅니다.
여름을 향해 가는 요즈음이지만 새벽이라 아직 쌀쌀한 기운이 남아있어 얇은 점퍼 하나만으로 견디는게 쉽지 않았는데, 분향을 마치고 나온 사람들 손에 들린 작은 촛불 하나하나가 모여 온기를 전해주더군요.
그런 온기에 기운을 얻어 노짱님의 영상을 보고 또 보았습니다.
1시간 20분은 금방 흘러 별빛도 빛을 잃고 한가닥 햇살이 비치며 발인식이 시작되었습니다.
저는 사정상 일찍 서울로 올라와야했기에 버스 안에 설치된 TV를 통해 발인식을 지켜보았습니다.
점점 커져가는 사람들의 울음소리와 한숨소리에 저 역시 눈물이 나올법도 한데, 웃으며 보내드리겠단 저만의 다짐을 지키고자 입술을 깨물며 눈물을 참았어요.
영구차에 관이 실리고 유족들이 그 뒤를 따르며 사저를 향해 가는동안 많은 사람들이 유족들에게 위로의 인사를 건넸습니다.
아직 죽음을 모르는 어린 손녀는 힘들게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딛는 할머니의 손을 잡은 채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더군요.
나중에 저 아이가 커서 접하게 될 진실의 조각들이 저 아이에게 어떤 영향을 주게 될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지만, 그저 너무 아파하지 않기만을 빌었습니다.
전날부터 비행기를 타고 버스를 타고 분향하기 위해 긴 시간 기다리면서 몸이 점점 피곤해져감을 알고 있었기에 서울로 가는 버스안에서 눈을 붙이려고 했는데 버스 안에 설치된 TV를 향해 실시간으로 보여지는 노짱님의 모습에 잠도 오지 않더군요.
그렇게 달리고 달려 영결식 시간인 11시에 맞춰 서울로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노란색 모자와 노란색 손수건, 노란색 풍선으로 뒤덮여 노란 물결을 일으키는 시청광장을 보며 빨라지던 심장박동이 아직도 생생하게 들리는 것 같네요.
여기서부터는 단체로 행동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할 것 같아 저는 개인행동을 하기로 했습니다.
이미 수십만의 사람들이 모여들었기에 앉을 자리 하나 찾는 것도 쉽지 않았지만 가까스로 비집고 들어가 털썩 주저앉았어요.
이제부턴 엉덩이가 고생할 시간이기에 그 동안 고생한 다리를 조금씩 주무르며 앞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을 주시했지요.
현 정부의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헌화하기 위해 나서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여기저기서 야유가 터져나와 곧 시청광장을 가득 채웠습니다.
그의 모습이 클로즈업되자 "살인자!"라는 분노의 목소리가 울림이 되어 퍼지더군요.
수십만의 사람들에게서 뿜어져나오는 분노와 울분의 덩어리로 인해 저 또한 격해지는 마음을 다스릴 길이 없어 한껏 목소리를 높여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한명숙 전 총리가 조사를 읽어내려갈 때는 시청광장이 침묵에 휩싸였어요.
너무나도 절절하고 마음아픈 그 글귀에 울지말자, 울지말자 다짐하던 저도 어쩔 수 없이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저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오열하고 통곡하면서 광장은 삽시간에 눈물바다를 이루었는데 서로 모르는 사이끼리였지만 이 순간만큼은 모두의 마음이 하나가 된 듯한 느낌이었어요.
그렇게 영결식이 끝나고나서 시청광장에서 노제가 시작되었습니다.
김제동씨가 사회를 맡아 진행된 노제.
노짱님 취임식 때 '상록수' 노래를 불렀다던 양희은씨가 마지막 가시는 길에도 같은 노래를 부르셨고, 윤도현씨도 슬프지만 강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셨어요.
사람들은 한 목소리로 노래를 따라불렀고 노래와 함께 물결치듯 넘실대던 노란 풍선은 사람들의 손을 거쳐 하늘로 향했어요.
침통한 표정으로 사회를 보던 김제동씨가 노짱님이 오셨다고 외치자 모두들 자리에서 일어나 노짱님을 맞이했습니다.
이제 가면 다시는 뵐 수 없기에, 오늘이 마지막이기에 사람들이 노짱님 곁으로 몰려들면서 차량은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어요.
영구차에 손을 대면서 잘 가시라며 오열하던 아주머니, 멀리서 지켜보며 눈물만 흘리던 여성과 그녀를 감싸안고 함께 우는 남성, 눈물로 보내드리고 싶지 않았는데 이미 눈물샘은 제 기능을 잃어버렸는지 쉬지않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연신 닦아내며 저 또한 울음을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에 치이고 경찰에 막히고, 그러면서도 노짱님을 따라 걸어가는 사람들 속에 섞여 한 걸음 내딛다가 지끈거리는 머리를 참지 못하고 자리에 주저앉아버렸습니다. 하도 울어서 그랬나봐요.
수원까지 함께 하려고 했지만 그 자리에 주저앉은 후 한동안 일어서지 못한 채 그냥 가시는 뒷 모습을 바라보기만 했어요.
지끈거리는 머리와 퉁퉁부은 두 눈과 뻣뻣하게 굳어버린 두 다리를 한 채 그저 하염없이 바라보기만 했습니다.
그렇게 있다가 조금 기운을 차리고는 곧바로 공항으로 가기위해 지하철에 몸을 실었습니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제주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고 한 시간 반 뒤, 집에 도착해 있더군요.
먼지와 눈물로 뒤범벅이 된 몸을 씻고서 저도 모르게 잠들어 버렸네요.
그러다 새벽에 깨어 노짱님의 유해가 봉하마을로 향하고 있다는 TV방송을 보았어요.
49재때까지 임시로 안치되어 있을 사저 옆 정토원의 모습을 잠시 보다가 TV를 끄고 다시 이불을 뒤집어 썼습니다.
2002 대선 당시 전 나이제한에 걸려(83년생) 선거를 할 수가 없었지만 노짱님을 지지했습니다.
82년생 동기들이 자신이 선택한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다며 기뻐하던 모습을 보며 함께 기뻐했었어요.
그 후 그 분의 행보에 지지하기도 하고 실망하기도 하면서 대학생활을 마치고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지요.
그런데 시민운동이라는 분야로 뛰어들면서 정부의 정책과 반대되는 운동을 주로 했던 단체에 몸담고 있었기에, 제 개인의 생각은 접어둘 수 밖에 없었어요.
제 개인은 지지하더라도 단체가 반대하는 이상, 단체에 소속된 운동가는 단체의 방향에 따라갈 수 밖에 없었으니까요.
그런 정치적 충돌이 계속되고 개인적인 이유들로 4년간 몸담았던 단체를 정리하면서 당분간 정치와 사회에는 관심을 두지 않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한 지 3개월이 채 지나지 않아 노짱님의 서거를 지켜보았습니다.
국민이 변하지 않으면 사회가, 정부가, 국가가 바뀌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정치에 무관심해지려던 제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워졌습니다.
지난 4년동안의 시민운동을 통해 배운 것이라곤 정치에 대한 불신과 시민운동의 한계에 대한 좌절감뿐이었는데, 그걸 뛰어넘으려 하지 않고 거기에 순응해버리려 했던 제 자신이 너무나도 부끄러웠습니다.
노짱님이 마지막 가시는 길에 국민들에게 알려주려던 것이 무엇인지 깨달은 지금, 다시 한 번 마음을 다독여 힘을 내 봅니다.
앞으로 무엇을 해야할 지 어떤 삶을 살아야 할 지 막막했었는데, 이제 겨우 가닥을 잡은 것 같네요.
진정한 민주주의의 실현과 노짱님이 원했던 사람사는세상을 이루기 위해서 좀더 힘을 길러야겠어요.
부끄러운 줄 모르고 제 세상인 양 날뛰는 그들을 상대하기 위해선 많은 것이 필요하겠지요.
우선은 제 자신에게 부족한 것들을 채우고 수련을 하면서 내공을 쌓아야겠어요.
대한민국 곳곳에 뿌리깊게 박혀있는 그들과 그들의 지지세력을 상대할 수 있는 힘을 기를 수 있기를.
첫댓글 수고 많았습니다. 노모현 대통령님의 듯을 받들어 세상이 바뛸수 있도록 더욱더 많은 노력 부탁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맞아요..힘없는 국민들이 그나마 힘을.의견을 표출할수있는 방법은 현실적으로 투표밖엔없습니다. 근데 이상하게 투표날만되면 미리 휴가다녀올생각하고,젊은이들은 연인들과 데이트.내지는 약속등으로 뜻을 반영못하는거같아여..곧 잊어버리고..우리 이번 일을 계기로 우리의 주장.권리를 앞으로는 함부로.무심코 내던지지말고 항상 정의.원칙.평등.인권.지역타파,참민주주의.국민의 자존심.을 기치로 내세우는 사람다운 세상살게만드는 정당,인물에 투표합시다.열우당이 인기에 영합하지말고 아직껏 노짱의 정치이념으로 남아있었다면 ..하는 아쉬움이있네요--;;
노대통령님께 진심으로를 드립니다. 정말정말 미안합니다. 다음생애는 꼭 지지할께요 탈퇴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