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선교회는 1901년 카우만 부부에 의해 시작된 초교파적인 신앙선교단체로, 처음부터 토착인 사역자 양성을 핵심적인 선교정책의 하나로 삼았다. 그리고 성서와 현장중심의 교육을 강조하는 성서학원은 바로 그 핵심 통로였다. 그래서 동양선교회는 가능한 빨리 선교지에 성서와 현장중심의 교육을 강조하는 성서학원을 설립하고자 했다. 거기에는‘현지인 선교는 현지인의 손으로’라는 선교비전이 크게 작용했다. 즉 한국인에게는 한국인이, 일본인에게는 일본인이, 그리고 중국인에게는 중국인이 복음을 가장 효율적으로 전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동양선교회 한국선교는 한때 연동교회 청년 신자였던 정빈이 김상준의 협력을 얻어 시작했다. 정빈은 1904년 일본으로 건너가 1907년 3월 동경백목성서학원(東京栢木聖書學院)을 졸업한 후 그 해 5월 2일 카우만, 길보른과 함께 일본에서 귀국해 같은 학교 출신 김상준의 협력을 얻어 1907년 5월 30일 한국의 최초 성결교회인 염곡복음 전도관을 설립했다. 1908년 이장하가 동경성서학원을 졸업하고 이들과 합류해 이들 세 명은 동양선교회 한국선교를 태동시킨 개척자들이 되었다. 동양선교회는 염곡복음전도관과 카우만(C. E. Cowman)의 재정 도움으로 1908년에 한옥을 구입해 설립한 경성 무교정 구리개 전도관을 기점으로 놀랍게 성장하기 시작했다.
장·감의 경우 선교회가 자신들을 파송한 외국 선교부의 재정적인 지원과 지도를 받으며 선교사 주도로 선교사역이 진행된 것과 달리 동양선교회는 처음부터 자생적으로 선교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정빈과 김상준은 복음전도관을 세우고 전도를 시작할 때 두 가지 선교 원칙을 세웠다. 하나는 새 교단을 설립하지 않고‘받은 바 신앙체험을 아직도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동족’에게 전하겠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직접적인 전도, 즉 노방전도’를 하겠다는 것이었다.
1903년 원산부흥운동에 이어 1906년 후반 목포부흥회, 그리고 1907년 전국을 휩쓸었던 평양대부흥운동의 성령의 불길은 장·감은 물론 동양선교회의 부흥의 중요한 도화선이 되었다. 특히 미국에서 일고 있던 성결운동(Holiness Movement)과 깊이 연계되어 진행된 동양선교회의 해외선교, 특히 한국 선교는 평양대부흥운동을 통해 적지 않은 자극과 도전을 받았다. 1908년 동경성서학원을 졸업하고 귀국한 김혁준(金赫濬)이 동양선교회 전남포교회를 설립하고, 1909년에는 같은 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한 강태온(姜泰溫)이 개성교회를 설립했다. 또한 장로교에서 훈련받은 장로교인들 가운데 연동교회조사 이명헌, 집사 원세성, 배선균, 박용희, 여 조사 원경신이 성결교회로 이명(異名)하여 동양선교회의 초기 멤버가 되었다. 물론 이들 개인들의 의사에 의한 것이었지만 연동교회 출신이 조사나 집사로 봉사하였고, 동양선교회의 영향력 있는 지도자였던 정빈 역시 연동교회 출신이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동양선교회의 한국선교 초창기의 정착과정에서 장로교가 한 몫을 톡톡히 감당한 셈이라고 볼 수 있다.
1910년 12월 10일, 영국인 존 토마스(John Thomas) 선교사와 그의 아내 에밀리 토마스(Emily Thomas)가 조선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동양선교회 복음전도관의 활동은 더욱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토마스가 1911년 3월, 경성 무교정에 세운 전도관에 임시 성서학원을 개설하여 원장을 맡으면서 교수 정빈, 통역 이장하로 교수진을 구성한 후, 10여 명의 학생을 모집하여 가르치기 시작함으로써 교회 지도자들을 양성하는 일을 시작해 한국선교를 시작한 지 불과 4년 만에 상당한 제도적 틀을 갖출 수 있었다. 그 이듬해 3월, 동양선교회는 현 충정로인 축첨정에 성서학원을 정식으로 신축하고 본격적으로 신학교 교육을 통한 지도자 양성에 들어갔다. 그리하여 1912년 이명헌을 첫 졸업생으로 배출하였고, 이듬해 제2회 졸업식에서는 남자 1명과 함께 여자 1명을 배출하였다. 최초의 여성 졸업생이 탄생한 것이다. 그 후 경성 성서학원은 1920년까지 43명의 남자와 19명의 여성 졸업생을 배출하고 있다.
성서학원의 설립은 철저하게 있는 그대로의 복음을 전하겠다는 순수한 동기에서 출발했다. 이명직은 그의 저서 조선야소교 동양선교회 성결교회 약사에서 경성성서학원의 설립 목적을 이렇게 기록했다.
“성서학원은 진격적(進擊的)으로 이단(異端)과 속화(俗化)와 죄악을 대적하야 분투(奮鬪)하자는 주의하(主義下)에서 남녀 전도자를 양성하야 순복음을 동양 전테에 전파하야 령혼을 구원할 목적으로 설립한 동양선교회 교역자 양성(敎役者養成)의 긔관인대, 교과서(敎科書)는 오직 신약과 구약으로 하야 금일과 같치 소위 신신학(新神學)이니 고등비평(高等批評)이니 하는 사단의 오묘(奧妙)하고 하나님의 묵시하신 말삼 됨을 부인(否認)하고저 하는 이 시대에서 성경은 우리 인류의 죄악에서 구원하시겟다는 언약 뿐 아니라 구원하는 능력이 잇는 하나님의 묵시하신 말삼인 것을 천계(天啓)에 의햐여 고됴(高調)하기를 마지아니하는 것이 우리 성서학원 교수의 정신이 되엿고 이것을 의미(意味)하야 일흠을 성서학원이라 하엿나니라.”
이는 일본에서 받은 동경성서학원의 설립 이념을 그대로 한국에 옮겨놓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 우리는 당시 동양선교회가 갖고 있던 신학사상 몇 가지를 간파할 수 있다. 첫째는 철저하게 성경 중심적인 지도자 양성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장로교나 감리교의 네비우스 선교정책에 근거한 사경회운동, 그리고 성경 중심의 선교정책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음을 보여 준다. 둘째는 이들이 신구약성경을 신학교육의 근간으로 삼고 있을 뿐 아니라 성경관에 있어서 매우 선명하고 분명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신신학과 고등비평을 “사단의 오묘하고 하나님의 묵시하신 말삼 됨을 부인”하는 잘못된 행위라고 규정함으로써 이들이 신학적으로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었는가를 발견할 수 있다. 한국에 파송된 장·감에 이어 성결교 역시 신학적으로 건전한 복음주의 노선에 서 있었음을 말해준다.
1912년에는 최초의 성결교 예배당이 건축되었다. 카우만의 부인 레티(Lettie B. Cowman)가 친정아버지의 유산으로 받은 1만환을 바쳐서 80평 정도의 벽돌건물을 지어 무교정 예배당을 봉헌한 것이다. 또한 1914년 4월 21일 ‘전국 교역자 수양대회’(제5회 성결총회)에서는 처음으로 교역자에게 목사 안수를 거행하였다.
선교 시작과 신학원 설립에 이어 1914년 4월 22일에 김상준, 이장하, 강태온, 이명직, 이명헌이 한국성결교회 최초의 목사로 안수를 받음으로써 동양선교회는 교회의 틀을 완전히 갖춘 교단이 되었다. 그 해 9월 30일, 김상준과의 의견 마찰로 정빈이 북간도로 떠난 후 김상준은 정빈에 이어 성서학원 교수와 사감 그리고 아현교회 주임 교역자로 임직을 받고 본격적으로 동양선교회 개척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김상준이 1916년 아현교회와 성서학원을 사임하고 개성교회 주임 교역자로 발령을 받아 자리를 옮기고, 그 이듬해 김상준과의 의견 마찰로 북간도로 떠났던 정빈이 다시 돌아오자 김상준은 동양선교회를 사임하고 조선장로교회와 감리교회의 부흥목사로 이적했다. 그러나 그 후에도 김상준은 활천에 계속해서 기고를 함으로써 성결교회와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했다.
동양선교회도 한국의 여타 교단처럼 3·1운동을 기점으로 위기를 만났다. 1919년 3·1운동이 발생한 후 강경에 시찰 갔던 토마스 감독은 첩자로 오인받아 왜경에 의해 무수히 구타를 당한 후 그 후유증으로 고생하다 결국 조선을 떠나고 말았다. 그 후 영국인 헤슬롭(William Heslop)이 내한했으나 그 역시 1년 만에 귀국하고 말았다. 모든 교파들이 수난을 당하는 그 즈음 동양선교회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두 명의 감독이 조선을 떠난 후 동양선교회 부총리로 있던 길보른(E. A. Gilbourne)이 1921년부터 감독을 맡아 한국의 동양선교회를 통솔하게 되었다. 더 이상 한국 선교를 효율적으로 감당할 수 없다고 판단한 한국동양선교회는 국내 선교를 위해 복음전도관이라는 이름 대신 조선야소교 동양선교회 성결교회로 명칭을 바꾸고 제도적인 교회의 틀을 갖추었다. 본래 동양선교회는 교회 조직이 아니라 전도를 위한 조직체였으나 이들에 의해 전도받은 이들이 기성 교회에 정착하는데 어려움을 겪자 1917년 10월 성결교회를 조직한 일본에 이어 1921년 9월 한국에서도 같은 형태로 성결교회가 조직된 것이다. 전국에 33개소의 전도관과 수천 명의 신도를 갖춘 동양선교회는 이로써 장·감에 이어 세 번째로 큰 한국의 교단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비록 한국의 동양선교회는 설립 초기 일본의 동양선교회와 달리 동양선교회 본부의 치리를 받아야 했으나 신학교육을 통해 육성된 한국인 지도자들에 의해 교회가 치리되어 갔고, 1922년 11월 25일에는 감리교회의 신학세계(神學世界), 장로교의 신학지남(神學指南)에 이어 자신들의 교단지 활천(活泉)을 창간함으로써 교단의 신학적인 틀도 마련할 수 있었다. 1925년에는 교리(敎理)와 조례(條例)를 제정하였다. 이 책은 서문에서 “동양선교회가 주창하는 교리는 새로 만든 교리가 아니라 요한 웨슬리와 감리교회의 초시대 성도들이 주창하던 성경 중의 단순한 진리일 뿐이다.”라고 천명하였다. 이 책은 동양선교회의 신조를 토대로하여 제정된 것인데, 조례는 1922년 미국 만국성결교회의 헌장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이 책은 (1) 교리편, (2) 정치편, 그리고 (3) 부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교리편에서는“교회의 정치를 제정하는 이유”,“ 동양선교회의 목적”, 그리고“신앙개조”를 천명하였다.
또한 교역자들의 총회의 필요성이 제기됨에 따라 1921년 4월에 교역자 간담회를 두게 되었는데, 이 교역자 간담회는 다시 1924년에 교역자회로 발전되었고, 1929년에는 이것이 확대 발전되어 연회(年會)로 개편되었다. 경성학원에서 개최된 제1회 총회에서는 해리 우즈(Harry F.Woods)가 초대 의장에, 박영순이 부의장에 이상철과 이건이 각각 서기와 부서기에 선출되었고, 58명으로 평신도대회도 조직했다. 동양선교회가 완전히 한국인에 의한 자립과 자치를 구현한 것은 그로부터 3년 후인 1932년 제1회 성결교회 총회를 개최하고 이명직 목사를 제1대 총회장으로 선출하면서부터이다.